Modern Reformation/G.J.Vos,1862

예정론(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1 -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Bavinck Byeon 2018. 10. 13. 10:53

예정론(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1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5.1 예정론 개요

5.2 예정론의 교의학 체계에서 위치

5.3 예정론 용어들

5.4 유기

5.5 사도 바울의 예정론

5.6 예정론 각론



5.1 예정론 개요


1. 이 교리를 논할 때, 어떤 부분을 차례로 다루는가?


1) 우리가 작정의 교리에서 예정론의 구별된 위치를 차지하는지 이유.

2) 예정과 선택에 중요한 성경적 용어들.

3) 예정론이 다른 교리와 관계 속에서 어떻게 조직적으로 발전하는지에 대한 모습.

4) 주요 이설(異說)과 우리의 비판.


5.2 예정론의 교의학 체계에서 위치


2. 왜 개혁파 교의학은 예정을 작정에 관한 교리 후에 따로 다루는가?


이것은 전체 교리 체계를 위한 이 교리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창조와 섭리 후에 구속론이 따르듯이, 여기서 하나님의 일반 작정 후에 예정이라는 특별한 작정이 오는 것이다.


3. 루터파 교의학도 예정을 통상적으로 맨 처음에 다루었는가?


그렇다. 분명히 처음에는 그랬다. 멜랑히톤은 자신의 논제(Loci)를 이것[예정]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후에는 달라져 예정론이 구원론의 시작 부분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것은 루터파의 교리 개념이 완전한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4. 어떤 점에서 예정론 또는 선택론(uitverkiezing)이 모든 개혁파 신학의 다른 교리와 관련이 있는가?


1) 예정론은 성령에 근거하여 형성된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개혁파 개념의 직접적인 결과(uitvloeisel)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사람들은 두 가지 길을 따라 예정론에 도달했다. 루터는 인간과 그의 구속에서 출발하여 예정에 이르렀다. 츠빙글리와 칼빈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예정론에 이르렀다. 츠빙글리는 예정을 직접적으로 섭리(=작정)로부터 이끌어냈다. [그래서] 그는 범신론에 가까이 이른다. 칼빈은 더 신중히 말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처음부터 하나님이 모든 것이며 피조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피조물 자신에게 항상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예정을 버리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도 아울러 떨어지게 하는 것이며 그러면 성경의 교의 중 수많은 부분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다.


2) 타락 후 인간의 무능함에 관한 교리는 예정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래서 이 둘을 동시에 주장하듯이 동시에 버리든지 해야 한다. 둘 중 하나이다: [인간의 무능함이] 하나님께 의존하든지 아니면 구원받을 사람에게 의존한다. 만일 첫 번째를 택하면 예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20] 두 번째를 택한다면, 이것은 두 가지 전제 아래서만 가능하다. 하나는 펠라기우스주의처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의 타락으로 무능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 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은 처음에 무능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떤 것을 행하셨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차별없이 행해진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들은 다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 그러나 그러면,


A. 구원받은 이는 어떤 선이 있고,

B. 구원 받지 못하는 이는 없다.


A의 경우, 자기 자신으로부터 난 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B와 정확히 동일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어떤 경우에든, 펠라기우스 또는 반(半)펠라기우스주의와 같이 생각하든, 인간의 무능함을 부인한다.


루터는 인간의 무능함에서 출발하여 거꾸로 논증하여 선택(verkiezing)에 이르렀다: "노예의지론". 여기서 그는 에라스무스와 의견을 달리한다. 후기 루터파 신학은 절대 예정을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후기 루터파 신학은 예정에 행하는 것과 동일한 수준으로 인간의 무능함 또한 잘라낸다. 이것에 따르면, 인간은 초월적 은혜를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3) 예정 또는 선택은 그리스도의 몸과 신비적 연합에 관한 교리와 관련있다. 선택은 몸을 이룬다. 한 몸에 [많은] 지체들이 서로 어우러져야 하고 서로를 위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의 이 몸이 각 사람의 자유선택으로 우연히 생겨났다면, 균형잡힌 몸이 되었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얼마나 많이 이들이 [몸에] 속할 것인지, 누가 이들이 될 것인지, 언제 추가될 것인지 미리 결정해야 한다. 예정은 이것에 관한 하나님의 결정과 다르지 않다.


4) 이에 못지 않게 예정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관한 교리와 관련있다. 이것도 만일 선택을 부인하면, 동일한 내용으로 남을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얻으신 공로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A. 수동적 순종을 통해 형벌을 만족시키는 것.

B. 적극적 순종을 통해 획득하신 영원한 생명.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중보자의 공로를 적용시키는 일 자체가 모두 이 영원한 생명[21]에 속한다. 여기에 중생, 믿음, 회개를 일으키는 성령도 속한다. 인간 자신이 스스로 믿지 않는 것을 결정하거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믿는 것을 결정한다면, 믿음은 인간의 일이 되고, 더 이상 그리스도의 공로의 열매가 아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우리를 위해 획득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믿음 뿐만 아니라 구원 적용의 모든 다른 부분에도 해당한다. 이렇게 볼 때, 예정을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적극적 공로를 부인하는 것을 내포한다.


5) 예정은 성도의 견인(堅忍; volharding); "굳게 견딤")과도 관련있다. 여기에서 네 가지 가능성이 있다:


A. 하나님은 은혜의 상태에 이르게 하시고 이 은혜의 상태를 머물게 하는 것을 모두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존하여 하신다.

B. 하나님은 은혜의 상태에 이르게 하시고, 이 은혜의 상태에 이른 이들이 끝까지 견디는 일 모두를 [그분의] 주권적인 선택을 통해 하신다.

C.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가 은혜의 상태로 올 것인지 자신의 자유의지로 결정하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가 그 안에 있을지, 후에 다시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인지 주권적으로 결정하신다.

D.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은혜의 상태에 이를 것인지 결정한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그들이 넘어질 것인지 그 안에 끝까지 견딜지 그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넘겨주신다.


우리는 견해들 중 세 번째[C]가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완전히 죄된 인간이 어떤 것을 결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거듭난 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네 번째 견해[D]도 견지할 수 없다. 한번 하나님의 주권이 일하기 시작하면, 인간이 그것을 후에 좌절시킬 수 없다. 견해 A는 완전히 펠라기우스 견해이다. 그러면 단지 B가 남고 이것이 바로 개혁파의 견해이다.



5.3 예정론 용어들


5.3.1 야다, 기노스코


5. 성경에서 예정론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용어로서 여기서 다루어야 할 첫 번째 용어는 무엇인가?


히브리어 야다(ידע; "알다")와 헬라어 기노스코(γινώσκω; "알다") 및 프로기노스코(προγινώσκω; "미리 알다"), [이 동사의 명사형] 프로그노시스(προγνῶσις; "미리 아심")이다. 롬 8:29, 30에는 프로에그노(προέγνω; "그가 미리 아신" [aor.])가 맨 앞에 있다.


6. 이 용어들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어떤 것을 먼저 결정해야 하는가?


먼저 이 용어가 고전 헬라어적 의미를 의도하고 있는지, 아니면 히브리-헬라적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유대인들에게 "알다"라는 말은 헬라인들의 정신[세계]에서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다.


7. 고전 헬라어적 의미는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가?


우리를 선택(verkiezing)에 대한 항론파 입장으로 이끈다. "알다"는 고전-헬라어에서 "어떤 것과 친숙해진다", "어떤 것과 관련된 지식을 얻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알미니우스파 신학이 그들 입장을 세운다. 이 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의 "예지"(voorkennis)는 처음부터 죄인 안에 있는 이런 저런 속성들을 알았다. 이 하나님의 예지가 그분의 선택을 지도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택자들을 처음부터 믿는 자들로 아시고, 이들은 선행으로 견인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들을 선택하셨다.


8. 신약에 이런 의미의 "예지"(voorkennen)[22] 개념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가?


이 단어 자체는 나타난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미리 본 믿음이나 선행을 대상으로 하는 선택은 나타나지 않는다. 벧후 3:17: "너희는 ... 그러한 것을 미리 알았은즉, 너희가 무법한 사람들의 미혹에 빠지지 않을까 조심하라". 행 26:5: "그들이 나를 오래전부터 미리 알았다".


9. 선택 개념이 사용된 경우에도, 그런 의미일 수 없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처음부터 아신다고 덧붙여져 있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예지와 관련된 경우라면, 이런 추가적 언급은 필수적일 것이다. 만일 내가 어떤 것을 처음부터 안다면, 모든 것은 내가 처음부터 알거나 인지한 것에 의존한다. 그런데 예정에 관해서는 "미리 아는 것"(voorkennen)과 "미리 앎"(voorkennis)이 롬 8:29, 11:2; 벧전 1:2, 20에 나타난다. 무엇보다 "앎"(kennen)이 특별한 의미에서 사용되는 곳은 마 7:23; 고전 8:3; 갈 4:9; 딤후 2:19이다. 이 중 어느 구절에서도 어떤 대상을 언급할 때, 하나님이 각 개인들 안에 있는 것을 미리 아시거나 아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위의 Q. 8의 두 본문에서 그 대상을 언급하는 것과 비교해 보라.


10. 롬 8:28에서 하나님의 "미리 앎"(voorkennis)이 선지식(voorwetens-chap)을 뜻하지 않는 것을 증명하라.


여기서 바울의 논증 전체의 문맥과 의도를 볼 때, 그것이 불가능하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부르심, 곧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일으키시는 전능한 행위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이 부르심은 시간 안에서 비로소 일어나는 어떤 고립된 행위가 아니다. 이 부르심의 뒷면에는 영원이 있다(zij had eene eeuwige keerzij).[23] 신자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부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 또한 차가운 의지 결정으로서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뒤에는 사도 바울이 "미리 앎"이라 부르는 것이 있다.


이렇게 하여 한 고리에서 다른 고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르심-계획-예지. 그리고 내려오는 것은 예지로부터 시작한다. 예지는 아들의 형상으로 미리 정해 놓은 것으로부터 나오는 그러한 것이었다: "그가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아들과 동일한 형상이 되게 하도록 미리 정하셨다. 이는 그로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시기 위함이었다"[롬 8:29]. 이 문장은 "미리 앎"이라는 뜻을 원칙적 이미 결정하고 있다. "미리 앎"이란 한 아버지가 그의 아들 곧 미래의 그의 아들에 대하여 느끼시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앎이다. 택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배후에 이러한 아버지와 같은 사랑이 작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은 자신의 자유 선택의 대상인 모든 사람들에게 아들의 형상을 갖도록 정한다.


이 사랑의 부성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을 고려할 때, 사도 바울은 이 사랑이, 작정이 실현되는데 있어, 무언가 저지를 받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랑은 신적인 확실성과 저항불가능한 능력으로 지극히 높은 목적을 향한다. 곧 그리스도와 동일한 형상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완전한 영광이다. 이 사랑은 한 걸음 한 걸음 계속 나아가며 일을 완성한다: "그가 아시는 이들, 바로 그들을 그가 또한 부르시고, 그가 부르신 이들,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이들,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롬 8:30]. 이것이 본문의 체인식] 나열의 의미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의 독특한 본성에서 오는 결코 무너지 않는 확실성과 함께 한다.


그러면 만일 "미리 앎"(voorkennis)[의 개념]에 "선지식"(voorwetenschap)[의 의미]을 부여한다면, 이 아름다운 논증과 이 자연스러운 연결에 어떤 것이 남을까 궁금해 할 수 있다. 만일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고 인위적인 것이 되고 만다. 전체 사슬의 맨 처음에 있는 하나님의 행동은 어떤 비독립적인 것이 되고, 그 행동은 나머지 것들에 대하여 그 자체에 근거를 둔 확실성이 되기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뿌리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 뿌리는 몸통과 가지에서 자신의 진액을 끌어와야 하며, 동시에 몸통과 가지를 마르지 않게 해야 할 보증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자체로 모순이다.


한 가지 더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그의 아들과 동등하게 하기 위해 정하신 아들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중보자의 영광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 중보자가 영원부터 소유하고 있는 신적 영광이 아니다. 택자들은 오직 첫 번째 것[중보자의 영광]과 (비록 큰 간격이 있지만) 동등성을 얻을 수 있다.


11. 또한 로마서 11:2에서도 "미리 앎"(voorkennis)이 이와 같은 의미이며, "선지식"(voorwetenschap)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라.


여기서 사도[바울]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신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하고 심지어 터무니 없는지 증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사도의 생각에 따르면, 버림(verstooten)과 "미리 아심"(van te voren kennen)은 서로 배타적이다. 이스라엘의 배교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스라엘이 미래에 보존될 것을 굳게 확신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한번 그의 백성을 아셨다면, 그 백성을 다시 버리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단지 "미리 지식을 얻음"이라는 개념을 여기에 집어넣어 증명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곧 전혀 뜻이 통하지 않는 논증이 된다. 이스라엘의 실제적 배교 앞에서 어떻게 그것[예지]이 이스라엘의 미래 회복을 위한 증거가 될 수 있는가? 곧 하나님께서 아직도 이스라엘 안에서 어떤 선한 것을 미리 아신다는 증거가 되는가? 그 정반대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유로운 선택 안에서 이스라엘이 자체로 어떠한 것인지 전혀 계산에 넣지 않고, 전적으로 그분 자신의 기뻐하심만을 고려하시는 그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언약 관계에서 출발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실 수 없다.


12. 베드로전서 1:2에서 하나님의 예지의 본질에 관한 어떤 것을 끌어낼 수 있는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1:20에서는 가능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예지의 대상은 그리스도이다. 물론 그의 인간적 본성을 따라 그렇다. 그러나 성부가 중보자의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것을 미리 아신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 자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선택이 없었다면, 아들은 결코 인간 본성을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것으로부터 나온 것은 동시에 그것의 근거나 근원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지는 하나님께 있어 자신의 작적 밖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선지식일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13. 마태복음 7:23에서 "앎"(kennen)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이 단어는 엄격한 의미에서 "예정"(uitverkiezing)을 가리키지 않는다. 여기서 "안다"는 말이 쓰인 방식은 다른 곳의 용례에 관하여 빛을 던져둘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심판날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전혀 모른다"고 선언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내가 너희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 너희 불의를 행하는 자들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문장에서, "[어떤 대상의 인격을] 안다"(kennen)는 말에는 "어떤 대상에 관한 정보적] 지식이 있다"(weten)는 뜻이 있다. 그러나 다른 문장들 속에서 "안다"(kennen) 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는 "나는 너희와 인격적인 관계[26]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다. 심판날에 잃어버려진 자들은 그리스도를 안다(kennen)고 억지를 부리면서 말할 것이다: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는 "나는 너희를 전혀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 편에서는 저들이 지금 그들 편에서 호소하는 바로 그 아는 사랑 또는 우정이 없는 것이다.


14. 고린도전서 8:3은 어떤가?


바울은 여기서 교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대비하고 있다. 전자는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반면 바울은 후자 안에 그리스도인의 성품의 내적 가치가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 바울에 따르면, 이것그리스도인 성품의 내적 가치]은 우쭐하여 부풀게 만드는 지식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바울은 이것이 사랑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는 하나님께 아신바 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증명한다. 가치있게 여겨진다는 것은 칼빈이 말한대로 높이 평가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둘 사이의 대조 속에서 미묘한 언어유희를 관찰할 수 있다: 어떤 것 사이의 대조인가? 인간이 자신의 혼란스러움 가운데 가진 지식(kennen)과 실제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하나님께로부터 아신바 되는 것(gekend[25] worden)이다.


15. 갈라디아서 4:9은 어떤가?


본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한다. 바울은 먼저 이 사실을 왜 그들이 더 이상 약하고 천박한 세상의 기초 원리들로 돌아가지 말아야 하는지 근거로 끌어 온다. 그러나 사도에 따르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아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아버지와 자녀들 사이의 관계처럼 그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셨다. 만일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 것을 알면서도 약하고 천박한 세상의 기초 원리로 돌아간다면, 이들에게는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감사할 줄 모르는 죄책이 있게 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아신바 된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훨씬 크고 영광스러운 것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본문의 앎을] 선지식(voorwetenschap)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16. 디모데후서 2:19의 경우는 어떤가?


여기서도 “주께서는 자기 사람들을 아신다”는 말을 어떤 지적 앎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들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앞 구절에서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사람들의 배교를 언급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끝까지 견딜 수 있을까 절망하게 할 수 있다. 나아가 이 거짓 영들의 부패한 가르침은 마치 자신을 파먹는 암덩어리와 같다[딤후 2:16-17]. 하나님이 누가 자기 사람들인지 잘 아시고, 누가 그에게 신실하게 머물지 아신다는 것을 생각한다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주께서 자기의 사람들과 가장 깊은 사랑의 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이들이 넘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위로가 될 수 있다. 요 10:27-28과 비교하라: 여기서는 목자가 양을 아는 것과 그 양이 잃어버려지지 않는 것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5.3.2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반론


17. 여기서 다룬 하나님의 미리 아심(het voorkennen Gods)에 관한 견해에 반대하는 주된 반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택의 대상들 안에서 미리아신 것들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1)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믿음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옛 항론파들의 대답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양립할 수 없다. 성경에 따르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대답은 바울이 믿음과 율법을 대비시키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 이 대비는 믿을 일종의 인간의 행위나 복음적 순종으로 만드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2)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방금 말한 대비와 훨씬 더 많이 충돌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율법에 대한 외적인 행위들이 아닌 내적인 행위들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3)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미리 보실 수 있거나 처음부터 알고 있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올 자리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미리 보셨어야 하는 적은 것을 다시 아무리 정밀하게 정제한다고 해도, 또 모든 행함과 행위와 대비되는 수용성을 말한다 해도, 여전히 인간 스스로 제공한 수용성이 있고, 이런 점에서 적극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아닌 일을 하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다.



5.3.3 예지 개념의 발전


18. 예지 개념은 어떻게 발전하는가?


히브리어 야다(יָדַע; "알다")는 바하르(בָּחַר; "택하다", "알다"[26])와 거의 비슷한 뜻이다. 이 뜻에서 다음의 의미들이 파생되어 나온다: 어떤 것을 자세히 알아보다, 어떤 것에 관심을 갖다; 자신의 존재 안으로 끌어들이다; 그것을 돌보다. 이 모든 것은 대상과 가능한 한 가까이 하나가 되고자하는 사랑에 찬 관심을 보여 준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안다 또는 그는 나를 모른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신적 앎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한다:


1) 하나님은 예정의 이 행위에서 제 일자(de eerste)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선택의 대상 사이의 관계는 전적으로 그분으로부터 출발한다. 단지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알고자 하셨고, 실제로 그들을 인식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께 어떤 것이 된 것이다. 이것이 주권적 요소이다. 이 땅의 주권자와 같이 그 주권자가 어떤 사람을 알만하다 가치를 부여하거나 그를 주목할 때, 그때에야 비로소 어떤 의미가 있듯이 하나님의 앎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2) 하나님의 이 지식 또는 예지는 차가운 임의성의 행위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이다. 이를 통해 주님은 말하자면, 영원부터 사랑 받는 자들에 대한 그의 앎과 봄(het kennen en aanschouwen)에 몰두하신다.


3) 이 지식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일련의 구원행위를 향한 열정(aandrang)[27]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앎은 생산적이다. 그것은 은혜와 영광을 낳는다.


19. 당신은 이것을 구약 성경으로부터 몇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증명할 수 있는가?


그렇다. 호 13:4, 5에서 이스라엘의 죄와 탈선을 말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라 ... 내가 너를 광야 광야 곧 심히 마른 땅에서 알았노라". 아모스 3:5에도 이스라엘이 신실하지 못한 것은 덜하지 않지만,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노라. 그러므로 너희의 불의를 보응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시 144:3은 묻는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고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cf. 시 8:4[21]). 히브리어 의미는 70인역을 통해 헬라어로 전이되었다.


20. 복합어 프로기노스코(προγινώσκω)에서 프로(πρὸ)는 무슨 뜻인가?


1) 롬 8:29에서 프로(πρὸ)는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미리 계획하심 등 시간 안에서 일어나지 않은 하나님의 행위를 수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부르심, 의롭다 칭하심, 영화롭게 하심 등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행위들과도 함께 나타난다. 이로부터 프로(πρὸ)가 이 행위들의 영원성을 가리킨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 동시에 [롬 8:29은] 이 행위들이, 그 대상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점에서 제 일자(de eerste)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을 때, 인간은 이미 그러하다[29]. 반면 하나님이 인간을 미리 아시고 예정하실 때에는 인간이 아직 그러하지 않다. 따라서 프로(πρὸ)는 단지 시간적으로 "미리" 뿐만 아니라, 순서상 "미리"로도 해석해야 한다.



5.3.4 에크레고마이


21. 이 교리와 관련하여 성경이 사용하는 두 번째 용어는 무엇인가?


에크레고마이(ἐκέγομαι)이다. 성경 헬라어에서 이 동사는 중간태로만 나타나며 히브리어 바하르(בָּחַר)에 해당한다. 헬라어 단어의 뜻은 다음 요소들을 포함한다:


1) 어떤 대상을 함께 고려 대상이 될 수 있는 다른 것들보다 더 선호하는 것.

2) 그것을 기쁨으로 곧 의지를 기울여 선택하는 것.

3) 선택 받은 대상을 따로 떼는 것. 이렇게 하여 선택 받은 대상은 선택하는 이와 서로 특별한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22. 당신은 어떻게 첫 번째 요소가 다른 것들과 달리 실제로 이 용어에 들어있다고 증명하겠는가?


그것은 이 단어("선택하다"; uitverkiezen)의 접두어 "~로부터"(uit)에 있다. 히브리어 동사에서는 때로 뒤에 민(מִין‎; "~로부터")을 따라오게 함으로써 이것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헬라어에서는 때로 에크(ἐκ)를 반복한다. 신 18:5에 따르면, 레위 [족속]는 이스라엘 모든 족속으로부터 선택되었다. 요 15:19[30]은 "그러나 내가 너희를 세상으로부터 택하였다"고, 눅 6:13은 “그들로부터 열둘을 택하셨다”고 말한다. 때로 "~으로부터 선택하다"에서는 "~으로부터"의 개념은 퇴색되고 위에서 다른 두 요소[Q, 21,2-3] 중 하나에 강조점이 오기도 하나 어떤 경우에도 그 의미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사 58:5 “이것이 내가 택한 금식이라 하겠느냐?" (즉, 어찌 그것이 금식하는 다른 방식과 다르게 내가 기쁘게 인정할 만한 특한 것이 되겠느냐?)


23. 당신은 무엇으로 "선택하다"[는 용어]에 위에서 언급한 두 번째 요소도 들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는가?


에크레고마이(ἐκέγομαι) 자체에 그런 의미가 있다고 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악들 중에서 가장 악한 것을 택할 때, 기쁨 없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모든 선택에는 선호하는 것과 어떤 성향[마음이 거기에 기우는 것]이 함께 간다. 이것은 라틴어 동사 딜리게레(deligere)와 델렉타리(delectari) 사이의 관계와 비교할 수 있다. 둘다 "뽑다"(uitlezen; λέγω)와 관련 있다. 창 6:2은 “그들이 선호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여자를 택하였다”고 하며 시 78:68은 "그가 유다 족속과 그가 그 사랑하는 시온 산을 택하셨다"고 말한다.


24.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선택하신 대상들 안에서 어떤 선한 것, 어떤 기뻐할 만한 것을 발견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을 의미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실제로 “선택" 뒤에는 “예지”가 있다. 이것은 신명기 7:7-8과 창 6:2을 비교해 보면 곧 알 수 있다. 전자에서는 이스라엘의 선택에 이스라엘의 어떤 선한 속성들이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여 설명한다. 후자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삼상 10:24과도 비교하라.[31]


25. 어떤 점에서 "선택"이란 말에 위에서 언급한 세 번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것은 중간태를 사용하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에크레고마이(ἐκέγομαι)는 실제로 "자신을 위하여 선택하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것을 좀 더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민 16:7과 대하 7:16이 있다. 여기서 하나님이 택하신 대상[모세와 아론; 성전]은 거룩하며 하나님께 따로 떼어졌다고 말한다. Cf. 시 105:26, 33:12: 135:4.


26. "선택"이란 용어는 항상 구원을 위한 선택이라는 특별한 의미로만 쓰이는가?


그렇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선택이라는 말이 아주 자주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선택이란 말에 특별한 뜻이 있다는 사실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27. 그러면 "선택"이란 말에 "구원을 위해"라는 말을 더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것이 이 단어의 우선적인 뜻이 아니다. 이 표현을 더해야 하는 단어는 따로 있다. “선택”에 더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특별한 관계를 위해”라는 말이다. 이 관계에 영원한 구원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을 이동시켜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자기의 것으로 선택하시고,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예정하신다. 이 둘은 늘 함께 한다.


28. 이것에 대한 당신의 증명은 무엇인가?


신 14:2 에서 이 단어의 중간태 뜻과 엡 1:4("우리로 그분 앞에서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셨다")과 같은 본문들을 비교하는 것이다.



5.3.5 프로오리조


29. 여기서 언급되어야 할 세 번째 단어는 무엇인가?


프로오리조(προορίζω)이다. 이 단어는 롬 8:29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미리 아심" 뒤에 바로 뒤에 따라 나오며 "미리 정하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무언가 덧붙일 것이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두 용어 ["미리 알다", "선택하다"]과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을 "미리 안다" 또는 "선택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적어도 성경의 어법에서는 이미 완결된 생각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미리 정했다고 말하면, 즉시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무엇을 위해?" 호리조(όρίζω)란 "경계를 확정하다" 또는 "제한 및 규모를 정하다(eene bepaling, een bestek maken)는 말이다. 더욱이 이는 완전히 중립적인 말이다. 즉 이것은 선을 위해서도 악을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 선택과 예지는 오직 선한 의미이지만, “미리 정하는 것”은 악한 의미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행 2:23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작정"(ὡρισμένῃ βουλῇ τοῦ Θεοῦ)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죽음에] 넘겨진 것을 가리킨다. 행 4:28과도 비교하라.


롬 8:29 외에 엡 1:5, 11로부터 "미리 정하심"[작정]의 특별한 의미를 볼 수 있다: "우리를 그의 자녀로 받으시기로 미리 정하셨다"[엡 1:5]; "그 분, 곧 모든 일을 자신의 작정을 따라 행하시는 분 안에서 우리가 예정을 입어 우리가 기업이 되었도다". 여기서 우리는 예정(verkiezing)의 목적이 어떤 관계인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미리 정하심(voorverordineeren)의 목적은 어떤 모습(gestalte)과 상태(toestand), 형상(beeld), 분깃l(lot)이다. Cf. "그분이 또한 자기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롬 8:29]. 그러므로 여기서 모습(vorm)은 바로 미리 정하심의 대상인 "그리스도와 동일한 모습"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분의 중보자의 영광을 생각하고 있다.


30. "예정"(uitvrkiezing)과 "미리 정하심"(voorverordineeren) 개념은 항상 이렇게 분명하게 구별되는가?


그렇지 않다. 때로 예정이 미리 정하심을 표현하기 위해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약 2:5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가난한 자를 택하여 믿음과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는데 있어 부요(하게)하지 아니하셨는가?" 하고 말한다.



5.3.6 프로티데미


31. 예정을 표현하기 위해 쓰이는 또 다른 용어가 있는가?


있다. 즉 "뜻”(voornemen)이라는 용어이다. 예를 들어, 롬 8:28에는 "그분의 뜻을 따라 부르신 자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뜻"(πρόθησις)이란 프로티데미(προτίθημι)에서 온 말이다. 이 단어는 어떤 점에서 프로 오리조(προορίζω)와 차이가 나는가? 프로티데미는 예정에 관한 하나님 작정에서 의지적 측면을 더 강조한다. 모든 하나님의 작정은 그분의 지성의 행위이면서 동시에 의지의 행위이다. 예정의 작정도 마찬가지이다. 전자[지성의 행위]는 어떤 개념[beeld)을 형성하고 목적을 표시한다. 후자[의지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은 확고한 의지로 그것을 자신 앞에 결정하여 그것이 실제로 실행되도록 하신다.


때때로 "뜻"이 더 포괄적인 의미로 쓰여 "예지"와 "선택"을 포함할 수도 있다. 딤후 1:9은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르셨다. 이것은 자신의 뜻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전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된 것이다"고 한다. 롬 9:11에서는 "선택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 사도가 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선택하고 조사하며 구별하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 것은 선택에 관계된 뜻(een keur voornemen)이다.



5.4 유기


32. 성경은 선택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많은 용어들만큼이나 유기를 위한 용어들도 많은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과 함께 그 이면을 나타내기 위한 어떤 용어도 거의 찾을 수 없다. 이것은 교회가 이 위로에 찬 교리 [예정]의 어두운 면[유기]에 대하여 갖는 실제적인 관심이 매우 낮은 데에 부분적으로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33. 바하르(בָּחַר)의 반대 개념은 무엇인가?


히브리어 마아스(מָאַם; "버리다")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이 말이 "선택하지 않다"는 의미로 쓰인 곳이 없다. 이것은 항상 "이전에 선택된 것을 다시 버리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렘 33:24 "여호와께서 택하신 그 두 족속을 버리셨다; 시 78:67-68"[32] "또 그가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족속과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셨다"; cf. 출 32:32-34; 그래서 사 14:1은 이스라엘을 반복적으로 택하신 것을 이야기한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시리라[33]". 분명한 반립적인 대조가 나타나는 곳은 사 41:9 뿐이다: "내가 너를 택하고 버리지 않았노라".


34.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선택과 더불어 유기가 전혀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있는가?


이것은 너무나 성급한 결론이다. 이미 "선택하다(uitverkiezen) 안에 "~로부터"(uit)가 선택과는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35. 마아스(מָאַם)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어떤 것인가?


아포데오(ἀπωθἐω; "verstoten"; "던져 버리다", "인연을 끊다")이다(롬 11:2).


36. "버리다"와 "던져버리다"는 용어의 뜻에서 하나님의 예정이 불변하지 않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 결론 역시 [cf. Q.34] 허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프레데스테나치(praedestenatie; "미리 정함")와 프레데스티나치(praedestinatie; "예정")는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34] 중지될 수 있는 "미리 정함"(voorverordineering)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예정은 그 고유한 의미에서 취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7. 선택과 미리 정함이라는 단어가 갖는 다양한 뜻 중에 때로 예정교리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이 선택을 말할 때, 단지 민족 선택을 의미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에 따르면,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말은 단지 그분이 그의 은혜 언약을 어떤 민족 중에 집행하시고, 다른 민족은 제외하셨다는 의미일 뿐이다. 또한 선택이란 이제 기독교 선교가 어느 시대에 이런 저런 이방 족속에 이를 것인가 문제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한 예정도 절대적인 것이라 말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을 받는 그 대상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 예정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그런 민족이나 족속 중에서 거듭나고 회개하여 구원받은 사람이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달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자신이 그들의 선택적 자유를 사용하는데 달려 있다.


38. 그러면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여 어떤 것을 주목해야 하는가?


1) 우리는 결코 그런 민족 선택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결정은 배타적으로 개인만을 대상으 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족도 포함하고 그 족속과 언약을 체결하신다. 그분은 개인의 운명을 달아 보시듯이, 어떤 민족의 운명도 가늠하신다. 그것을 어떻게 부르든, '민족 선택'을 부인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며, 나아가 개혁파 신학 진영에서는 불가능하다.


2) 그러한 민족 선택은 곧바로 개인 유기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하나님 말씀의 지식없이 어떤 구원도 없다는 점이다. 만일 하나님이 어떤 민족들이 진리 지식 밖에서 오랫동안 계속 살도록 주권적으로 작정하신다면, 그 작정은 그 민족들에 속한 모든 개인은 분명 잃어버려질 것도 포함할 것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은혜 수단을 누리도록 어떤 민족을 선택하거나 예정하는 것은 개인 유기 없이 한 순간도 생각할 수 없다. 만일 개인적 유기를 일단 인정할 경우, 왜 개인 선택을 반대하여 이의를 계속해서 제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만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세 부류의 사람 중에 하나여야 한다:


A. 자신을 버린 그런 사람들

B. 하나님에 의해서 버림받은 사람들

C. 자신을 선택한사람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매우 받아들이기 어렵다.


39. 신학 용어 용법상 프레데스티나치(praedestintie)과 예정(verkiezing)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임시적으로만 이 용어들의 다양한 의미를 주목한다.


1) 프레데스티나치는 어떤 운명에 미리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상태의 마지막을 염두에 둔다. 선택(uitverkiezing)은 어떤 인물들이나 이런 저런 일에 대한 지시(aanwijzing) 또는 결정이다. 따라서 이 것은 인물들을 염두에 둔다.


2) 프레데스티나치는 선택보다 범위가 더 넓다. 전자[프레데스티나치]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구성된다:


A. 선택electio)

B. 유기(reprobatio)


따라서 선택은 프레데스티나치의 결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선택하다"는 것은 "영원한 행복으로 결정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3) 선택은 특정한 인물들과 관계된 것으로, 그들을 특정한 관계 속에 세우기 위한 것이다. 프레데스티나치는 결정이 일어나는 목적과 그 목적을 이끄는 수단들도 포함한다. 사도 바울이 롬 8:29에서 하나님의 자녀 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모습이 되도록 정하여졌다고 말했을 때, 그가 의도한 것은, 분명 작정은 또한 이 실제[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음]에 이를 수 있도록 수단과 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다음 결론에 이른다: "그[하나님]가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이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출처: 개혁교의학(Reformed Dogmatics), 제 I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