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 Reformation/G.J.Vos,1862

삼위일체론(The Trinity) 4 -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Bavinck Byeon 2018. 9. 18. 14:30


삼위일체론(The Trinity) 4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3.7 성령 하나님


3.7.1 서론: 성령에 관한 주제


72. 여기서 논의해야 할 세 가지 사항은 무언인가?


1) 성령의 위격적 존재(het personeel bestaan) 및 그 성격(aard)과 지위(graad).

2) 성령의 신성.

3) 성령의 경륜적 관계(huishoudelijke betrekking).



3.7.2 성령의 위격적 존재 및 그 성격과 지위


73. 성령의 인격성(persoonlijkheid)[138]과 신성 중 어느 것이 논란이 되었는가?


성령의 인격성이다. 이것[성령의 인격성]을 일단 확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신성은 의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Q. 5]. 아들의 경우에는 그 반대[139]이다. 왜냐하면 그는 육체로 나타나셨고 인격적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성령은 자신의 경륜적 사역을 가시적 형태로 실행하시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성령은 인격으로서 신자들 안에 거주하시고 기도하신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 성령은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한다.[140] 따라서 성령은 신자들에 대하여 [성자와 비교할 때] 더 약한 인격적 관계에 있다(Hij staat dus minder in eene persoonlijke verhouding tegenover den geloovige).


74. 성령의 이 독특함을 오해했을 때, 어떤 오류가 나타났는가?


옛 사벨리우스주의자들의 오류이다. 이들은 성령을 단지 하나님 능력의 표출로 생각했다. 또한 옛 시대 및 현대의 단성론자들이 있다. 나아가 현대의 사벨리우스주의라 할 수 있는 슐라이에르마허 학파가 있다. 이 학파에 따르면, 성령은 전체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이요[141], 기독교 교회가 존재를 드러냈을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했다. 이 오류는 개혁 교회보다 루터파 교회에서 더 진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성령 자체와 말씀 자체가 교회를 존재하게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성령의 인격적 사역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만큼 느끼지 못한다.


75. 우리는 성령의 인격적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서 어떤 정보들을 고려해야 하는가?


1) 성령에 관한 명칭들. 히브리어 루아흐(רוּחַ), 헬라어 프노이아(πνεῦμα).


2) "~부터 나가게 하다"(uitgaan van)[142]라는 표현. 성경은 이 문구로 아버지 및 아들과 성령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


3) 성령과 아버지 또는 성령과 그리스도 사이의 [본질의] 단일성(eenheid)을 말하고 있는 본문들(고전 1:10, 11; 고후 3:17; 엡 1:17; 요한복음).[143]


4) 성령께 인격적 속성을 돌리고 있는 본문들.


76. "영"(geest)이란 칭호는 어떤 고유한 속성 곧 인격으로서 삼위일체의 제 3위격에게 속한 것을 표현하고 있는가?


그렇다. 이 명칭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 우리는 앞에서 아들이라는 칭호가 제 2위격에 대하여 그러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성령이라는 칭호 또한 이와 같다. 이 칭호는 어떤 추상적인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칭호를 성부 뿐 아니라 성자도 공유하기 때문이다. 만일 제 3위격을 특별히 성령이라고 부른다면, 거기에는 틀림없이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도적 축복 선언[고후 13:13]에 "성령"이라는 칭호가 인격적인 칭호들 곧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나란히 있다.


77. 그러면 "영"이라는 칭호가 성령의 인격적 존재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1)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영"이란 단어는 둘 다 본래 "숨"(adem)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바람"(wind)과 모든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 개념이 파생하여 나온다. 한편 "숨"은 생명을 표시한다(창 2:7). 그러면 숨을 불어넣은 것이란 생명을 수여하는[144]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제 3위격을 영이라 부르는 것은, 성령께서 성부를 통해 그리고 성자를 통해 그의 위격적 존재가 영원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는 위격적 생명-숨(levensadem)이 마치 그들[성부와 성자]에게서 그 [성령]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overgaat). 여기서 우리가 [성자의] 나심(generatie)의 경우처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단순히 어떤 인간적인 개념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이다. 위의 성경 용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 존재의 내적 관계를 알리기 위해 사용하시는 것이다. 즉 살아 있는 존재 안에서 "숨"은 생명의 표시이다. 따라서 "숨"은 피조물 내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생명의 총수장(werkmeester)[145]이신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그의 위격적 존재를 받고 있는 것의 모사(模寫; abbeeldsel)가 된다.


2) 숨 또는 바람은 움직이며 힘을 행사하는 어떤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삼위일체의 위격으로서 피조물에 생명과 움직임을 주시는 분이시다.


3) 어떤 인격의 숨을 다른 [인격]으로 이양하여 불어넣는다면, 이것은 발생한 생명과 숨이 발원한 그 생명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성령과 성자와 성부 사이에는 본질의 단일성 뿐만 아니라 위격적 유사성(overeenkomst)[146]이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서로 다른 위격의 상(beeld)이 된다.


78. 우리는 어떤 표현으로든 "내쉼"(uiblazing)을 "나심"(generatie)과 구별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그 활동 자체(werking zelf)를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형식적인 구분을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 후에 언급할 것이다[cf. Q. 89].


79. 성령의 인격적 존재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15:26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성령께서 "성부로부터 나오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큰 질문은 어떻게 이 "나옴"(uitgaan)을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단어는 영원한 내쉼(uitgaan)을 묘사하는가 아니면 시간적 보냄을 나타내는가? 전자는 성령께서 그의 인격적 존재를 영원부터 받은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삼위일체의 제 3위격은 시간 안에서 완성된 구속사역 후에 교회에 보내신다는 의미이다.


80. 당신은 어떻게 본문의 의도가 후자가 아니고 전자라는 것을 증명할 것인가?


1) 바로 앞 본문이 성령의 시간적 보냄을 언급하는데, 이때 성경은 다른 용어를 사용한다: 예수님은 "그를 내가 아버지로부터 나가게(ἐϰπορεὑομαι) 할 것이다"[요 15:26b]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를 내가 아버지로부터 보내리라(πἐμψω)"고 하셨다[요 15:26a].


2) 나아가 본문은 "아버지로부터 나가게 될 이"(die van den Vader zal uigaan)[147]가 아니라 현재형으로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이"(die van den Vader uitgaar)라고 한다. 이로써 본문은 영원하고, 항상 있으며, 현재적인 행동을 의도하고 있다.


3) 만일 시간적 나감(uitgang)을 의도했다면, 주님은 "내가 아버지께서 (다르게 또는 통상적으로) 보낸 성령을 보낼 것이다"고 말했을 것이다.


4) 여기서 사용된 전치사는 다른 곳에서 아들에 관하여 사용하는 것과 동일하다.


81.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가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아들은 중보자로서 말하고 있으므로 그는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는다. 아들의 신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성령께서는 동일하게 아들로부터 나오시지만, 아들이 중보자로서 이를 말한다는 것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82. 고린도전서 2:10, 11로부터 성령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가 사람의 영이 사람과 맺는 관계와 동일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가? 곧 인격적으로 그와 구별할 수 없고 다만 그의 능력으로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도 이 본문으로부터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것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영이 인간에 대해서 갖는 관계와 같다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 안에 있다. 이것은 인간의 영이 인간 안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비교점은 성령과 하나님 사이의 긴밀한 하나됨에 있다. 이 하나됨은 인간의 경우와 같이, 곧 인간 본성과 인간의 영 사이와 같이 긴밀하다. 하나[성령]가 일종의 안에 있는 존재[148]이듯이 다른 것[인간의 영]도 안에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동질성은 여기까지이다. 이 비유를 강요하여 그 안에서 이것 이상을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됨이란 인간과 그의 영이 단지 하나의 인격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신성에 있어서 하나됨이란 세 위격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신적 본질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비교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83. 고린도후서 3:17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주" 곧 중보자의 신적 위격은 영이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이스라엘이 주께로 돌이킬 때, 이것은 동시에 성령께로 돌이킴이 될 것이다. 그러면 모든 막힘(bedekking; "덮임")와 묶인 것(gebondenheid)으로부터 구속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자유하게 하기 때문이다(vgl. 고후 3:12-18)[149]. 따라서 본문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우선 성령과 중보자 사이에 구속사역의 경륜적 통일성(huishoudelijke eenheid)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신적 본질 내에 하나됨으로 소급된다.


84. 에배소서 1:17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본문은 성령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 부른다. 이것은 성령이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본성으로 소유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지식을 전해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85.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그가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담화들을 통해 성령에 관하여 무엇을 가르치시는가?


성령께서는 아들과 같이 가르치시고 선포하시며 증거하실 것이라는 점, 또한 성령과 함께 이런 일들이 듣고 받아들임을 통해 계속 흘러 넘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경우와 같다(요 16:13, 14). 그러나 그리스도의 경우, 이런 모든 것들이 그가 아버지의 품속에 영원히 머무는 것, 곧 그가 아버지와 맺고 있었고, 맺고 있는, 전적으로 유일한 관계로부터 흘러나온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가 성령께도 존재해야만 한다(cf. 요 14:26; 16:13; 요일 2:20, 21).


86. 어떻게 최근의 사벨리안주의 신학이 성령의 인격성을 증명하는 본문들을 무위화시키는가?


그 방법은 이들 본문에서 강한 의인화(persoonverbeelding)[150] 외에 어떤 것도 찾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무슨 댓가를 치러서라도 [성령의] 인격성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인격성이 증명되면, 성령의 신성은 너무나 명확하게 확정되어 있으므로, 더 이상 삼위일체 교의를 회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87. 왜 이 본문들이 의인화를 말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 없는가?


1) 어떤 진술의 의미를 완전히 파괴하거나 그 진술이 목적한 의도를 무효로하는 곳에서는 결코 의인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 예를 들면, 롬 8:26의 경우이다. 만일 여기서 성령이 실제로 인격이 아니라면, 그가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한다는 것이 어떤 위로가 되지 못한다. 의인화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지 않는다.


2) 신약과 산문 형식에 나오는 많은 수의 비유적 언어 방식들을 볼 때, 그러한 것을 기대할 수 없다. 특히 교리적 논증(betoogtrant)시 설 자리가 없다.


3) 의인화한 경우들은 늘 어렵지 않게 다른 것들과 구분할 수 있다. 요 3:8; 히 12:24; 고전 13:1-8을 읽을 때, 누구나 곧바로 이 본문들이 의인화하여 말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성령을 인격으로 말하고 있는 본문들에서는 그렇지 않다.


88. 성령의 인격성을 위해 어떤 증거들이 있는가?


1) 성령의 나오심으로부터 그의 인격성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나심(generatie)이 성자의 인격성의 근거인 것처럼, 나오심이 바로 [성령의 인격성의] 근거이다.


2) 성령이 그분 자신에 대하여 1인칭으로 말씀하신다(행 10:12; 13:2). 요한복음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3개의 중요한 구절에서 남성 인칭 대명사 에케이노스(ἐϰεῖνος)를 써서 성령을 증거하셨다(요 14:26; 15:26; 16:13, 14).


3) 인격성의 모든 특성이 성령께 인정되었다:


A. 지성(고전 6:11; 요 14:26; 롬 8:16)

B. 의지(고전 12:11; 행 16:7)

C. 감성(엡 4:30; 사 63:10; 마 12:32)


4) 우리는 성령과 어떤 인격에 대하여가 아니고는 가능하지 않은 그런 관계 가운데 서 있다(마 28:19; 고후 13:13).


5) 성령은 비둘기(마 3:16)나 불의 혀(행 2:3, 4)와 같이 개별적 인격적 형태로 나타나셨다.


6) 성령은 인격적 존재로서 자기 자신의 능력과는 구별되신다(눅 1:35; 4:14).


89. 아들의 나심(generatie)과 성령의 내쉼(spiratie) 사이에 어떤 구별점이 있는지 언급하시오.


1) 나심은 성부를 통해서만 일어나지만, 내쉼은 성부와 성자를 통해서 일어난다


2) 어떤 사람들은 나심은 단지 본질 내에 어떤 새로운 존재방식을 야기할 뿐 아니라 나게하신 이와 동일한 존재방식을 야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후자는 내쉼에는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 근거로서 어떤 존재방식은 단지 어떤 한 존재의 상이지 둘의 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만일 이 둘이 아버지와 아들의 경우처럼 이미 서로 동일하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


3) 나심의 결과는 능력의 나눔(mededeeling des vermogens)으로서 이것은 다시금 본질에 참여하도록 한다. 나심은 아들에게 실제적 내쉼(blazing)의 필연적 속성을 준다. 내쉼에서 성령에게는 이러한 필연적 속성이 전달되지 않는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의 내향적 운동이 그 종결과 정지에 이른다.


4) 논리적 순서를 말하자면, 나심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내쉼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시간적 구별이 아니다. 두 가지 모두 동일하게 영원한 것이다.


90. 성령은 단지 아버지로부터만 나오시는가 아니면 아들에게서도 나오시는가?


동방 그리스 교회는 이것을 부인하지만, [성령은] 아들에게서도 나오신다. 이것을 부인하는 그 근저에는 다양한 동기들이 자리잡고 있다. 무엇보다 그리스 교회의 신비주의적인 경향과 일치한다. 이 신비주의적인 성향 때문에[151] [동방 그리스 교회는] 영혼 내 성령의 구원사역도 중보자의 객관적 사역으로부터 더 쉽게 분리한다[cf. Q. 96].


성령이 또한 아들로부터도 나오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1) 만일 성령이 아들로부터 또한 나가지 않는다면, 신성 안에 아들과 성령이 서로 접촉하지 않는 어떤 한 점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면 아들과 성령은 그들의 하나됨을 단지 간접적으로 다시 말해서 아버지 안에서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2) 아들은 성령을 시간 안에서 보내신다. 만일 성령이 영원히 아들로부터 나오시지 않는다면, 아들은 이것[성령을 시간 내에서 보내시는 일]을 할 수 없다. 삼위일체 내의 사역의 순서는 세 위격들의 존재의 순서를 따르기 때문이다(요 16:7).


3) 성령은 아버지의 영 못지 않게 아들의 영 또는 그리스도의 영이시다(갈 4:6; 롬 8:9; 빌 1:19).


4) 성령이 소유한 모든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못지 않게 아들에게서 받는 것이다(요 16:13-15).


91. 만일 성령께서 자신의 위격적 존재를 아들에게서 받고, 다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위격적 존재를] 받았다면, 이로 인해 성령의 신성에 어떤 손상이 가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성령을 내쉼을 통해서 그의 신성이 아니라 단지 그의 위격적 존재를 받는다. 그리고 그는 후자[위격적 존재]를 받는 것을 통해 동시에 분할되지 않는 신적 본질을 공유하게 된다.


92. 얼마나 많은 성령의 나오심이 있는가?


오직 하나뿐이다. 성령은 유일한 영으로서 (무로부타가 아닌) 신적 본질 내에서 나오신다. 그러나 여기에 이중적 내쉼(blazing)이 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로부터이다.



3.7.3 성령의 신성


93. 당신은 어떻게 성령의 신성을 증명하겠는가?


다음 사항을 증명함을 통해서이다:


1) 성령은 신적 칭호를 소유한다. 우선 구약 성경의 어떤 구절을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소개하는 구절들은 증거가 될 수 없다. 이것은 성령의 신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경륜적 사역(zijn huishoudelijk werk)에서 연유한 것이다.[152] 이런 이유로 구약에서 인간의 말들도 신약은 성령께서 말씀하셨다고 소개한다. Cf. 사 6:9; 행 28:25). 반면 행 5:3; 고전 3:16; 6:19; 요일 4:13은 [성령이 신적 칭호를 소유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유효하다.


2) 신적 속성들을 성령께 인정하는 점이다:


A. 영원성(창 1:2)

B. 보편 편재성(시 139:7, 8; 고전 3:16)

C. 전지함(고전 2:10; 요 16:13; 벧후 1:21)

D. 전능함(눅 1:35)


3) 신적 사역들을 성령께 돌리는 점이다:


A. 창조(창 1:2; 시 33:6)

B. 보존과 통치(시 104:30)

C. 기적들(마 12:28; 고전 12:4; 눅 1:35)

D. 죄사함(고전 6:11)과 중생(요 3:5)

E. 교회를 다스리심(행 13:2; 15:28; 20:28)

F. 장래 일들을 알리심(요 16:13)

G. 조명(엡 1:17, 18)과 성화(살후 2:13; 벧 1:2)

H. 죽은 자를 살리심(롬 8:11)


4) 신적 영예를 성령께 돌린다는 점이다(마 28:19; 고후 13:13; 계 1:4; 고전 6:19-20). [예수님에 따르면] 사람이 성령을 대적하여 죄를 짓는다면 가장 무서운,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는 것이다[cf. 마 12:32; 눅 12:10].



3.7.4 성령의 경륜적 사역


94. 성부와 성자의 경륜적 사역과는 구별되는 성령의 독특한 경륜적 사역은 어떤 것인가?


모든 것을 그 궁극적 목표로 이끌어 완성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삼위일체의 완성적 위격인 것처럼, 그의 사역은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완성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거룩한 영(H[eilige] Geest)이라는 명칭을 가진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거룩함이란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의 "구별됨"(afgezonderd zijn Gods)이다. 성령을 거룩하다 부르는 것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질 자체가 완성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의 점으로 다시 모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이와 같은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말하지 않는다.


95. 성령의 이러한 독특한 사역 때문에 [성경은] 그분을 어떻게 표시하는가?


만물이 그에게로 향하는 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롬 11:36과 고전 8:6을 비교함으로서 확인할 수 있다. 성부께 전치사 "~으로부터"(uit)[153] 그리고 성자께 전치사 "~통해"(door)[154]가 해당하는(toekomt) 것처럼, 성령께 전치사 "~로"(tot)[155]가 속한다.


96. 성령의 사역과 아들의 사역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령의 사역은 순서상 아들의 사역을 뒤따른다. 이것은 마치 아들의 사역이 순서상 아버지의 사역을 따르는 것과 같다. 이 사실을 늘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역을 아들의 객관적인 중보자 사역과 분리한다면, 항상 잘못된 신비주의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97. 성령께서는 그분의 이 독특한 사역을 다양한 측면에서 실행하시는데, 어떤 것들이 있는가?


1) 창조시 성령은 생명의 총수장(緟首長; werkmeester des levens)[156]이시다. 이는 아버지께서 생명의 원인자이시요 아들이 생각의 실현자(bewerker van de gedachte)이신 것과 같다(cf. 창 1:2; 욥 26:13; 33:4; 시 33:6; 104:30; 사 40:13). 이것은 이 구절들에 나오는 표현들, 곧 "알을 품다"(broeden; [창 1:2])[157], "모든 천체를 만들다"(het heir...maken; [시 33:61])[158], "장식하다"(versieren; [욥 26:13])[159] 등에서 충분히 볼 수 있다. 성령은 피조물에 마지막 손을 얹으신다.


2) 성령께서는 계속해서 과학과 예술, 직분 수행에 있어서 영감을 불어넣으시는 이(Bezieler)시요, 능력을 부여하시는 이(Bekwaamer)이시다(출 28:3; 31:3-4, 6; 35:31, 35; 시 51:12; 사 45:1 등).


3) 성령께서는 메시야의 몸을 준비하셨다. 이것은 평화의 작정 안에서 보증(Borg = 성자)에게 주어진 성부 하나님의 약속을 따른 것이다(시 40:7; cf. 히 10:5). 이 몸을 준비하는 것은 성경 기록(H. Schriftuur)[160]의 영감을 또한 포함한다. 왜냐하면 그것[영감된 성경 기록]은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형상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4) 또한 성령께서는 계속해서 중보자의 인성에 역사하고 그것[중보자의 인성]에 중보자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은혜의 은사들로 구비하신다. 특히 그리스도께서 요단강에서 받으신 세례와 그의 승귀시 이루어졌다. 물론 이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있다.


5) 나아가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일하신다. 성령께서는 이미 옛시대부터 각 믿는 자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며, 신앙고백으로 이끄시고, 그들을 함께 연합시킴으로써 교회를 형성하셨다. 중보자의 승귀 이후 성령은 주님의 신비로운 몸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성령은 그 몸 안에 거하시고,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그 몸의 지체와 연결시킨다. 이 일이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주심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오순절의 참 뜻이 있다(엡 2:22).


6) 마지막으로 성령께서는 개별 신자들 안에서 일하신다. 그 방편은 다음과 같다:


A. 예비하는 은혜를 통해

B. 중생가 부르심의 은혜를 통해

C. 회개를 통해. 이 회개에 믿음이 속한다.

D. 칭의의 적용을 통해

E. 거룩하게 만듬(heiligmaking)[161]을 통해. 이것[성화]은 성령의 재창조 사역도 포함하는데, 이는 신자가 죽을 때 그들의 영혼에 일어나는 일과 죽은 자가 부활할 때 그들의 몸에 일어날 일을 말한다.


98. 어떤 속성들이 이 독특한 사역의 결과 성령 하나님께 인정되는가?


1) 거룩함.

2) 신성(시 143:10).

3) 은혜(히 10:29; 슥 12:10).

4) 권세와 힘, 특히 완성하는 능력(눅 1:35).

5) 능동적 의미, 곧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으로서 영광(벧전 4:14).



출처: 개혁교의학(Reformed Dogmatics), 제 I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