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 Reformation/G.J.Vos,1862

예정론(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2 -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Bavinck Byeon 2018. 10. 13. 11:37

예정론(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2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5.5 사도 바울의 예정론


5.5.1 로마서 9-11장 해설


40. 사도 바울이 예정을 자세히 논하는 곳은 어디인가?


로마서 9장과 이어지는 [두] 장들[봄 10-11]이다.


41. 여기서 어떤 특정 민족과 관련된 외적 선택을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미 고대부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었고, 현대에도 다시 이 주장을 가지고 개혁파 예정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반복하여 등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옳지 못하다:


1) 사도 바울의 논증 과정 전체. 바울은 여기서 아주 구체적인 동기에서 예정(vooreordneering)을 말한다. 그의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 중 대부분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반면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수세기 동안 긴 발전을 거쳐 무르익은 특권을 얻었다. 이것은 바울에게 깊은 고통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이 이전에 가졌던 영광스러운 것들을 나열한다(롬 9:4-5). 여기에는 “언약들"과 “언약 약속들”도 포함된다. 그러나 바울은 언약 약속들이 조상들만큼이나 그 후손(het zaad)에게도 유효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어떻게 조상들이 언약의 약속을 받았는데 그 후손은 잃어버려질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35] 것인가? (9:6). 사도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그 약속들은 엄격하게 말해서,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36]에게 유효한 것이 아니고, 약속의 자녀들을 내다 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 약속들과 하나님의 자유로운 예정(voorbeschikking) 사이에 어떤 모순도 없다. 본문 자체가 여기서 민족적 선택이 아닌 개인적 예정(voorbeschikking)을 말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여기서 주제는 개인적 선택과 민족적 버림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가 신약 교회에 통합되어 들어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 중 몇몇과 이방인들이[37] 함께 연합하여 약속의 참된 씨가 된다.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통해 주신 약속들은 바로 이 약속의 참된 씨를 가리킨다.


2) 지금까지 이 예정(voorbeschikking)이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설명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결정하는 것이요, 아브라함의 진정한 영적 자손으로 결정하는 것이다(롬 9:7-8). 결과적으로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진 완전한 영광이 연결된다(9:23). 반면, 불명예(9:21)와 진노(9:22), 멸망(9:22)으로 미리 결정된 자들도 있다. 하나님은 [영광을 반을 또는 불명예로 멸망 받을] 개인들을 이스라엘 중에서도(uit) 부르시고 이방인들 중에서도(uit) 부르신다(9:24).


바울은 이 개인들에 대한 전형적인 예를 덧붙이면서 모세(9:16)와 바로(9:17)를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유용성의 윈리에 따라 시간 안에서 어떤 이를 다른 이보다 선호하고 다른 이는 지나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자신의 덕의 영광(verheerlijking zijner deugden)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9:17, 22). 롬 9:14 이후부터는 모든 것이 엄격히 개인적이다.


42. 그러면 로마서 9:14절 이전에는 민족적인 문제를 논하는 것은 아닌가?


이 반론을 어떤 의미에서 수긍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삭 안에서 너의 씨라 불리리라"[롬 9:7; 창 21:12]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이삭은 바로 그 아들인데, 그로부터 언약 백성이 [싹이 나듯이] 나게 될 것이며, 반면 이스라엘은 언약밖에 있게 될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이삭이 [개인적으로] 영원한 구원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이 주된 사상이 아니다(물론 우리는 이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삭의 선택은 구원으로 예정과 약간 다른 것이다. 이와 같이 롬 9:9에서도 이삭이 사라에게서 난 것을 언급한다. 그의 선택의 결과로서 거듭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9:12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리브가에게 주어진 예언은 야곱과 에서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두 사람에게서 생성될 두 민족의 국가적 관계에 대한 것이다. "큰 자가 작은 자를섬길 것이다".


이와 같이 롬 9:13 (말 1:2-3인용)에서도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했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국가적 신정적 작정이 어떤 결과를 갖게 될지에 관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로부터 바울이 영원한 분깃을 위한 개인 예정을 전혀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끌어내려 한다면, 이것은 매우 피상적인 면만을 논하고, 그의 논지의 깊은 차원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 반대를 이미 바울이 확증했다. 즉 그는 육신을 따라 형제된 자들의 개인적인 불신앙을 다루었다. 바울은 여기서 출발하여(9:1-2), 그곳으로 다시 돌아온다(9:24). 그러므로 여기서 질문은 "바울이 어떻게 민족적 문제들로부터 예정을 추론하고, 그 예정을 개인적인 문제에 적용하는가? 어떻게 그가 이삭과 야곱의 선택으로부터 모든 믿는 자들과 영원한 영광으로 그들을 작정하셨다고 결론 내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바울은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에게 일어난 일을, 복음의 경륜(bediening van het Evangelie) 가운데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예표로 본 것이다. 또한 영적인 약속들은 반드시 모든 육적 후손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선택과 자신의 언약 약속들을 이행하실 때 계속해서 자유로우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연적인 방식으로 내가 네게 아들과 그 후손을 일으키지 않고 기적적인 방식으로 하리라"(cf. 롬 9:7)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예표론적으로 이해할 때), '약속으로부터 남'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삭의 경우부터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게 실현될 일과 관련된 것을 행하셨다. 이와 같이 그것[약속으로부터 남[31]은 지금도 영광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한 모든 것을 결정한다. 따라서 롬 9:8에서 "약속의 자녀들이 씨로 여겨 진다"고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사도가 사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표론적인 논증이다. 그러나 그의 주제는 [롬 9:14] 이전이나 이후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중 몇몇 사람들의 선택이다.


43.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의 예정 또는 결정(voorbeschikking)이 완전히 자유롭고, 하나님이 선택을 할 때, 사용할 수도 있는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에 의존적이지 않은가?


그렇다. 바울은 이 것을 매우 강조하여 가르친다. 따라서 모든 항론파의 생각은 뿌리채 뽑힌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 한 사람, 곧 선택받는 자는 자유자로부터 태어났고, 다른 하나, 곧 버림받은 자는 종으로부터 태어났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별하셨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갈 4:22). 하지만 바울은 반론이 있으리라고 예상한다. 그래서 이삭과 이스마엘의 예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예를 드는데, 여기서는 그 본질상 이런 반론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는 서로 다른 어머니이나, 야곱과 에서의 경우는 그러한 차이[다른 어머니]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야곱과 에서는 각각 동일한 신분[자유자]의 어머니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어머니가 같았고, 나아가 각각 같은 어머니 같은 아버지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한 배에서 난 쌍둥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리브가도 증거이다. 리브가가 한 사람, 곧 이삭 우리 조상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을 때, 그 아이들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아직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른 하나님의 뜻이 행위가 아닌 부르신 자로 말미암아 확고히 서게 하려 하였다"[롬9:10-12]. 야곱에게 어떤 탁월함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그를 주권자로 삼고 에서를 종으로 만들도록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운명이 그렇게 결정된다는 말씀은 그들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 이전에 주어진 것이다.


또한 이 말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일찍 주어진 것은, 사람이 언젠가 차이가 드러났을 때, 야곱이 호의를 얻은 것은 그의 성품들(eigenschappen)이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히려 두 사람과 그들로부터 시작된 두 민족들의 운명은 부르시는 자의 자유로운 의지에 달려 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운명이 달라졌다. 이렇게 볼 때, 그것[선택]이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스스로 어떤 이는 자신의 언약 백성으로 세우는 사역을 위해 결정하신다. 만일 그 사역이 야곱에게는 후에야 게시되고, 에서에게는 아예 알려 지지 않았다면, 야곱 자신에게 영예를 돌리고 그의 더 나은 성품들을 인정 할 수 있을 가능성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행위가 아닌 부르신 자를 통해서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드러나도록 하나님은 그렇게 일찍, 이미 출생전에 그 아이들이 자랐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선포하신 것이다. 이것이 이렇게 일어난 것은, 어떻게 부르시는 하나님이 모든 은혜의 원천이며, 이것을 통해 어떻게 사람들이 서로 차이가 나는지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본문은 또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즉 선택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선택-뜻(verkiezing-vornemen = keur-voornemen)이 확고히 서게 하기 위해".


여기서 바울은 우리 앞에 어떤 영역에 있는 사역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영역에서는 성경의 사역들이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즉 여기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적이고 신비로운 선택(verkiezing)을 행하실 때, 이를 유도하는 어떤 동기를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선택[할 때 품은] 뜻(keurvoornemen)과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는다"는 말이 동일한 내용과 동일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함께 등장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가르친다: 하나님은 왜 예정할 때 인간과 인간을 구별하시는가? 그 이유는 이를 통해 선택받은 자들이 모든 것을 그분 홀로 행하시는(= 부르시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동일한 인물들 중 하나는 취하고 다른 하나는 그냥 두신다면,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이 은혜의 근원이심을 나타낸다. 이것[39]을 우리는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성경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주권적 선택과 자유로운 은혜는 언제나 서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에게서 선택을 빼앗는 사람은 우리가 가진 은혜 또한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선택에 적용된다. 그러나 또한 사도 바울의 말에 따르면, 특별한 의미의 선택, 예정 내에 있는 선택적 차별적 요소에도 적용된다. 보편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구원에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데, 이들은 자유로운 은혜의 실제를 소홀히 취급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필연적으로 자유로운 은혜가 계시되는 것을 정당하게 취급하지 못한다. 여기서 바울은 이것을 주의하도록 하는 것이다.


44. 바울의 이 예정 교리를 무위화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그렇게 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바울이 롬 9:30에서 10:21에서 말하는 그 반대면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두 가지가 확고하다:


1) 하나님의 결정은 자유롭고 주권적이다. 그분 결정의 동기들은 사람의 행위에 있지 않다.

2) 인간은 자신의 창조주 앞에서 완전한 책임성을 가진다.


바울은 이 둘을 차례로 논의한다. 그는 이 둘을 논리적으로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우리 또한 그런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 나아가 로마서 9장의 내용을 롬 9:30까지 구부리고 비틀어서, 그 내용이 뒤따르는 것과 이런 식으로 또는 저런 식으로 어울리게 만드는 것은 더욱 허용할 수 없다. 양쪽 측면 모두, 우리의 사고에 적응하지 않은채, 각각이 완전한 권리를 가지면서, 서로 공존해야 한다. 로마서 9장을 로마서 9장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이성주의적 주해이다.


45. 바울이 이스라엘 선택과 관련된 민족 선택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로마서 9장 이하에서 바울은 이것을 자세하게 다룬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버리시는가?" 하고 묻는다[롬 11:1]. 대답은 "결코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그가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시지 않는다"이다[롬 11:2].


1) 한번 미리 아신 백성은 결코 완전히 버려져서 아무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거나 그 싹조차 보존되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했던 약속들이 성취된 전형으로 제시한다. 그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엘리야 시대에는 7000명이 남아 있었다. 우선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비록 그것이 민족 선택이라해도 취소될 수 없다. 따라서 언제나 선택에 따른 남은 자가 있다(롬 11:5).


2) 민족 선택이 실행되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비록 남은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 절대 대다수(de groote mass)는 버림받았다. 롬 11:15은 또한 "그들을 버리는 것"(verwerping)을 롬 11:12에 있는 "그들에 대하여 손실을 보는 것"(vermindering)[40]과 함께 언급한다. 하나님은 실제로 이스라엘을 전체로서, 곧 나라로서는 버리셨다. 이스라엘 민족의 대부분은 언약 밖에 있다. 그러나 현재를 보지 않고, 또한 가까운 미래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 민족 기관, 이 전체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즉 이스라엘은 선택을 받았으며 언젠가 언약 경륜속으로 다시 들어올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의 충만함이 들어오고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11:29).


3) 여기서 롬 11:17, 19은 잘려나간 가지와 접붙여진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이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질문이 생긴다. 사람들은 자주 이 구절을 예정의 상대성과 변화성을 증명하는 증거로 생각하곤 했다. 그러면서 바울이 롬 11:23 끝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잘려나갈 수 있다고 경고하는데, 저들은 이 경고를 가리키곤 했다. 그러나 접붙임 비유 자체가 이미 그런 설명을 제지한다. 이것은 한번도 몇몇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에 거듭남을 통해 심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적이 없다. 이것은 종족 계열 또는 민족 계열이 언약 경륜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나 이로부터 제외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수용(opname)은 당연히 선포된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 일어난다.


이런 점에서 이 종족이나 민족의 접붙임 또한 개개인을 그리스도의 몸에 심는 것에 관한 것이다. 잘려 나가는 것(afsnijding)은 당연히 불신앙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동일한 사람들의 불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한 때는 믿었다가, 자신들이 [선택된]민족 계열에 속했다는 것에 의지하여 믿었어야 했다든가, 믿는 자로 여겨진 그런 사람들의 불신앙에 머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택한받은 신자들이 버림당하는 일과 연관맺는 일이 없이, 택한 민족의 버림(= 다중 유기)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후하고 종족 또는 민족의 유기는 또한 인간들 중 일련의 사람들의 개인적 유기를 포함한다. 이스라엘이 민족으로서 버림당하고 세상 종말에 다시 데려오기까지 그 시기에 태어나고 죽은 거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버림 당한 사람들에 속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롬 11:22의 경고는 개별 신자로서가 아니고 종족으로서 이방인 그리스도들에게 한 것이다.


46. 로마서 9장에 나타난 바울의 논증이 "선택은 예견된 믿음과 선행에 근거해 이루어진다"는 사상을 어떻게 반대하는가?


바울은 이 항론파 견해를 단호하게 배제한다. 바울에 따르면 에서와 야곱의 운명이 결정되고 또한 그 결정이 그들이 아직 선이나 악을 행하기 이전에 선포되었다. 또한 만일 이 결정에 인간의 선행을 미리 보았다는 것을 받을 경우, 전체 논지가 무너진다. 롬 9:14에서 바울은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하나님께 불의가 있으신가?"하고 질문하는데, 만일 그가 믿음과 불신앙의 차이를 택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구별하는 원인으로 생각했다면, 이 질문은 전혀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불의하다는 생각은 가장 작은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며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행동에 대하여 그런 항의를 하는 일은 없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 그렇지 않았다.[41] 그러나 세상에는 아주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다. 아니 인류의 대부분일 수도 있다. 이들의 경우, 아직 그들이 야곱과 에서와 똑같은 처지일 때, 곧 분별 연령에 이르기도 전에 자신들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이성적 분별력을 사용할 수 있기 전 아이들의 경우, 행위로서 믿음을 논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들에게 항론파 견해는 적용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쉽게 이성적 분별력 사용 이전에 죽은 모든 아이들이 택함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은혜 언약 경륜 밖에 사는 아이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해서는 안되고, 또한 성경이 이런 생각을 지지하는 어떤 근거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면, 어린이들의 경우, 선택과 유기가 예견된 믿음과 선행과는 다른 어떤 법칙으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믿음과 선행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항상 하나님의 선택의 이유가 아니라 그 선택의 열매요 결과로 나타난다(요 6:44; 엡 1:4; 2:8, 9, 10; 행 13:48; 빌 1:29; 살진 1:2, 3, 4). 어거스틴이 이미 말한 것처럼, “바퀴는 동그랗게 되기 위해 잘 구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둥글기 때문에 잘 구르는 것이다."[42]


47. 로마서 9:14 질문은 어떤 뜻인가?


[바울은 이 질문으로 다시 긴 논의를 시작한다.] 후에 오는 구절들을 살펴볼 때, 어떤 반론(tegenwerping)이 있고, 그것을 바울이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반론은 선택에 나타나는 불공평하고 차별[대우]적 요 소를 겨냥하고 있다. 의는 하나님의 성품들(deugden) 중 하나이므로 엄격한 공정함을 포함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선택받지 못한 이는 자기를 다루실 때, 하나님이 의롭지 못하다고 불평할 수 있다. 바울은 이 반론(bezwaar)에 대해 구약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대답한다. 그것은 출 33:19(LXX)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43]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자에게 긍휼을 베풀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여기서 자신이 모세에게 이 비전을 허락하고, 이것을 일반적 진술로 선포하는 것을 그분의 자유로운 자비에 돌리고 있다. 그는 실제로 미래에 자신의 은혜와 자비를 증명할 것이다. 누구에게 하는가? 그분이 지금[모세에게 말씀하시는 당시] 주권적으로 그분의 은혜와 자비로 결정한 사람들에게 하신다.


이것으로 반박을 마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선포[출 33:19]에 호소하여 그 반론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이 소위 불공평하고 불의한 행동을 확보해 두신다고 선언하시며, 이런 행동 방식에 대하여 인간의 불평이 따른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단순히 확증하고, 거기에 더 이상 설명을 부가하지 않으며, 바로 자신이 인용한 것으로부터 결론을 끌어낸다: "이와 같이 원하는 자도 아니요 달음질하는 자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속한 일이니라"[롬 9:16]. 이 말은 매우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집에 두고 내쫓지 않기를] 원한 것이나 에서가 사냥감을 찾아 나간 것 등 어떤 특정한 사실에 대한 암시를 찾을 필요가 없다. 원하는 것(willen)이란 인간적으로 바라는 것(verlangen)이고 달음질 하는 것lopen)은 인간이 강하게 시도하는 것이다. 물론 바울은 이 격언에 호소하여 다른 설명은 없다는 암시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어떻게 [말이 안되는 것 같은] 그러한 설명이 분명한지 주의할 필요는 있다.


불공평함과 공평함, 의와 불의는 반대 개념으로서, 어떤 특정한 관계를 전제한다. 여기 두 사람이 있는데, 이들 사이에 일정 총액의 돈에 대하여 재산권에 차이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들이 나를 중재자로 불렀다; 그리고 나는 그 총액을 나누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는 더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덜 주었다면, 이런 경우에 분명히 내게 불공평함과 불의가 있다, 본래 의가 있었는데, 그것이 여기 나의 선택 때문에 손상을 입은 것이다. 의가 있는 곳에 불의가 있을 수는 있다. 그리나 반대로 의가 [본래부터] 있을 수 없는 곳에서는 [불의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만일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정 총액을 나누어 주려 할 때,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풍성하게 주고 생각한다면, 여기서 불의와 불공평을 화두로 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차별 대우를 하지만 모든 불공평한 것 밖에 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이편 저편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사도 바울은 이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그의 대답에는 [이런 논리가] 간접적으로 깔려 있다. "원함"이나 "달음질"이 권리를 생성하는데, 아무도 말할 수 없고, 오직 [선택이] 전적으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한다. "긍휼히 여기는 것"(ontferming)은 어떤 법적인 역할이나 속성이 아니라 그저 선물이다. 주는 것은 자유로운 일이며, 여기서 사람은권리에 묶여 있지 않다. 마 20:15는 말한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내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이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물론 사람이 원한다면 하나님의 의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죄 가운데 있는 곳에서 찾는다면, 주소를 잘못 찾은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이곳에는 어떤 권리도 없다. 따라서 죄로 인해 상실된 권리일 수도 없다. 죄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동일한 상태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차별[대우]적 행동 방식을 정당화할 수 없다. 유일한 대답은 선택은 하나님의 행위이며, 이 선택에서 사람의 권리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선택은 하나님이 심판자로서 하신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전적인 주권을 세우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긍휼히 여기기로 작정한 사람을 긍휼히 여길 것이다.


48. 로마서 9:16-18을 설명하라.


이 구절들은 선택시 주권에 관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선언하신다[롬 9:16; 출 33:19]. 이 선언에 따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다 해도 그분께는 어떤 불의가 있지 않으시다. 바울은 이것으로 자신의 논지를 마무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놀라우리만치 단호하게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악을 분배하는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자유하시다는 것을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 성경)이 바로에게 하신 말씀이 그 뒤에 온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하신 말씀은 "내가 이 일을 위해 너를 일으켰으니, 곧 네 안에서 나의 능력을 나타내고 나의 이름을 온 땅에 드러내기 위함이라"이다[롬 9:17]. 이것은 출 9:16을 인용한 것인데, 일부는 70인경에서 가져왔지만 몇 가지는 의도적으로 변화를 주었다.[44] 70인경에는 디에테레데스(διετηρήθης; 네 생명이 보존되었다"[45])이고, 히브리어로는 헤아마드티카(הֶעֱמַדְתִּ֔יךָ; "내가 너를 세웠다")이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다룰 문제는 출9:16의 히브리어 단어가 무슨 의미인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이 구약의 표현을 인용할 때, 그 취지를 좀 더 잘 설명하거나 그 단어의 깊은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자주 거기 쓰인 용어를 바꾸기 때문이다.


우선 헬라어 에게이로(ἐγείρω; "일으키다")는 신약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게 하다"(te voorschijn brengen), "일으키다"(doen optreden)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마 11:11은 "여자에게서 난 자들 중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나지(is opgestaan) 않았다"고 하고, 마 24:11은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리라(zullen opstaan)"고 말하며, 요 7:52에서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is opgestaan) 않는다" 등이 있다. 나아가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이 "내가 너의 생명을 보존하였다" 또는 "보좌에 오르게 하였다", "질병에서 일어나게 하였다", 또는 무엇이든 이와 같은 것이었다면, 바울이 70인경 표현에 변화를 준 것을 설명 할 수 없다.


셋째, 히브리어 표현과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만일 우리가 그것을 "내가 너를 일으켰다”(ik hebu verwekt)고 번역한다면, 원리적으로 완전히 일치한다. 히브리어는 단순하게 "내가 너를 세게 하였다(ik heb ui laten staan)고 말한다. 즉 '많은 다른 사람들이 넘어져 쓰러질 것이지만, 너는 남을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이것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이 바로를 역사적으로 출현하게 할 때 자신의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이 이루기 전에는 바로가 넘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쓰러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넷째, 어떤 설명도 여기서 말하는 논지를 약화시킬 때, 바울 논증의 초점을 흐리게 한다.[46] 그러면 더 이상 논리적인 결론이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 논지로부터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롬9:18)는 결론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권좌에 오르게 하셨다 또는 생명을 보전하셨다. 병상에서 일어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전 인격을 일으키셨다는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칼빈의 설명(exegese)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사람들은 헛되이 하나님이 마치 계산을 해야 하는 분인 양 그분과 싸운다. 그분은 거기서 스스로 나와서, '버림당한 자들은 자신의 숨겨진 섭리의 보물창고에서 나오며, 그들 안에서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실 것이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반론을 제거할 것이다"[47] 베자(Beza), 피스카토(Piscator), 벵엘(Bengel], 올스하우젠(Olshausen), 류허트(Ruchert), 벡(Beck), 토럭(Tholuck), 필리피(Philippi) 또 많은 다른 사람들도 이와 같이 말한다.


만일 이 말의 엄격함을 줄이려 한다면, 다른 길을 택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바로의 인격을 일으킨 것은 추상적이고 아직 비결정적 인류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죄된 인류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간접 창조를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아무도 이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그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어쨌든 바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전형(toonbeeld)으로 세워졌다. 이것을 위해 그는 창조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를 위해"(juist hiertoe; εἰς αὐτὸ τοῦτο; 롬 9:17)의 주된 의미이다.


49. 롬 9:18을 설명하라.


이 구절에서는 먼저 나오는 말에 강조점이 있다: "그가 하시고자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고, 그가 하시고자 하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롬 9:18].[48] 바울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양하게 운명을 배정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 외에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참한 운명을 위한 결정에도 구원을 위한 결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완악하게 하다"(verharden; σκληρύνω)는 용어의 경우에도,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 따르면, 바울은 자신의 용어를 가능한한 약한 의미로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께 어울리지 않는 것을 집어넣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말한다: "나아가 성경이 하나님께 '완악하게 하다'는 말을 돌릴 때, 그것은 단지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자가 하는 것 같은 '허용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동시에 신적 진노의 사역을 가리킨다. 솔로몬이 말한 대로 불경건한 자들의 멸망은 단지 예견된 것뿐만 아니라 악인들 자신이 멸망 받기 위한 목적으로 창조된 것이다(잠 16:4).


50. 로마서 9:19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가?


바울이 예정의 반대자들의 입에서 취한 반론이다. 이것은 반론은 반론이나 이번에는 하나님의 편파성(partijdigheid Gods)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의 악함에 대해 불만을 표하실 때 그분의 공의(bilijkheid Gods)에 대한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 아래 있으므로, 죄인들의 현재 모습이 어떤 것이든 그들이 그렇게 발견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이 그렇게 정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렇게 나타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결정(voorbeschikking)의 결과(산물이 아님)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불만을 표하실 수 있는가? 누가 그의 뜻을 거스릴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어느 누가 어느 때 그분의 전능하신 뜻을 거스리는데 성공한 적이 있는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우리도 [그분의 뜻을] 대적하는데 성공할 수 없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뜻하신 대로 우리를 내버려 두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반론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는 첫 걸음은 바울이 어떻게 롬 9:14의 반론에 대해 대답하는지 명심하는 것이다. 그는 논증이나 세밀한 구별을 동해 이 반론(bezwaar)을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의 단호한 선언 자체를 맞세운다. 그리고 대담한 어구를 써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더 강한 예를 더한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긍휼히 여기고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에 불만을 토한다. 나는 당신에게 하나님 자신이 이에 관하여 어떻게 선언하시는지 대답하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 출 33:19 LXX]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은 완악하게 하실 자유도, 그 완악함이 실제로 나타나게 하실 자유도 가지고 계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에게 [이 일을 위해 내가 너를 세웠다; 출 9:16]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당신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수 없다 항의한다. 그러면 악인들이 필연적으로 그들의 완악함에 빠졌다는 것인가? 나는 당신에게 좀 다른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 사람아 당신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대적하여 답하는가? 도기공이 [자기 손에 든] 흙을 어떻게 빚을지 권한이 없는가?


이것이 사도 바울의 논증의 큰 흐름이다. 이로부터 만일 사람이 각종 제한을 가져와 논점을 약화시키려 한다면, 그는 완전히 논의 흐름을 오해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사도 바울도 이 제한들을 알고 있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자신이 사용하기도 한다. 바울은 우리들 만큼이나 인간의 책임성에 관한 이론의 전문가이며, 죄의 인간 안에서의 발전[49]을 잘 이해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하나님이 주권적이실 뿐 아니라 엄격하게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이것[하나님의 공의 측면]을 의도적으로 논외에 있도록 하고, 이 문제를 하나님의 주권 측면에서 본다. 왜 그런가? 비록 그들이 이미 하나님께 버림받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죄로 멸망한다는 것을 가리킴으로써, 바울은 이 신성모독자들의 입을 더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면 바울은 사람들이 그가 이 반론(tegenreden)에 대하여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다: [그렇다.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신성 모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변호하는 논증을 하였다면, 그것은 바울이 볼 때, 하나님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보였을 수 있다. 그러한 논증도 사람을 설득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의 입을 줄로 묶을 뿐이다. 더욱이 바울이 하나님의 이 주권적 행동방식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너무나 어려워서 아마도 그 목적을 이룰 수 없었을 수 있다. 여기에 우리가 결코 가늠할 수 없이 깊고, 어떤 사람도 해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바울이 여기서 펼친 논증은 실제로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도기공과 진흙 은유(beeld)를 살펴보자. 이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은유(beeld) 또는 비유(gelijkenis)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비유는 그 모든 요소 하나 하나를 적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성경에 나오는 일반적인 은유 및 비유들과 같이 다루는 사람은 아주 터무니 없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모든 은유에는 제 3의 비교점(tertium comparationis), 곧 왜 이 비교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왜 그것을 하는지, 주된 요점이 있다,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이 규칙을 여기에 적용하여 우리는 질문한다: "여기서 사용된 비교의 주된 요점은 무엇인가?"


1) 그것은 도기공이 여러 토기를 만드는 물질의 상태가 아니다. 거친 진흙도 고급 진흙도 가장 좋은 그릇을 만드는 재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진흙의 좋고 나쁨]이 도기공과 덩어리의 관계에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이다. 이 은유의 목적은 완전히 진흙 덩어리 즉 인간이 정하냐 부정하냐, 고상하냐 비천하냐를 우리에게 보여주 것이 아니다. 자체로 보면, 두 경우 모두일 수 있다. 진흙이 죄덩어리이고 부정하다고 하자. 이것이 진흙 덩어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축소시키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러면 진흙 덩어리의 부정함에 대한 생각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 나아가 도기공이 따르는 작업 방식도 아니다. 도기공은 정교한 도구를 사용하여 거친 것을 다른 것으로 만들고, 어떤 것은 예술가적 혼과 능숙한 손가락으로 만들고, 어떤 것은 무미건조하고 미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을 만든다. 도기공들은이 모든 것들을 죽은 재료인 점토 덩어리를 기계적으로 다루어서 그들이 원하는대로 주무르고 모양을 빛는다. 그러나 이때 점토 덩어리는 그들의 작업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지는 것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은 물질이 아닌 살아있는 영으로 다루신다. 우리는 그의 손가락 아래에 있는 죽고 영혼 없는 존재가 아니다. 또 그분은 우리를 기계적으로 다루시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이 비유 바깥 영역에 놓인 측면이다. 이 은유는 인간을 형성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작정이 실행되는지 신비에 대하여 그 어떤 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것이 그저 허용을 통해 일어나는지, 아니면 은혜를 거두어 가심으로 이루어지는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서 되는지, 여기서 이 비유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도, 다른 것들도, 모두 완전히 은유 용어 안에 있다.


3) 여기서 제 3의 비교점이 다음 두 가지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A. 하나는 질적 수준을 할당하는 것이다.

B. 다른 하나는 그와 함께 어떤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도기공이 그의 그릇들을 구상할 때 생각하는 두 가지 것이다. 그는 먼저 이 그릇들이 어떤 것을 위해 쓰일 것인지 결정하고, 그 다음으로 이 목적을 섬기려면 그들이 어떠해야 하는지 결정한다. 이 두 가지 측면에서 그는 진흙에 대한 권위(nacht)을 갖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울이 "힘"(kracht)이라는 말이 아닌 "권위"(macht; εζουσία)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힘"이란 물질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권위"라는 말은 도덕적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조물에 힘을 갖듯이 도기공이 진흙 위에 "힘"을 갖는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신적 작정을 문제삼는 사람들(bediller)은 하나님께서 이에 더하여 법적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 훼방자(毁謗者; bediller)들에게 말한다: "하나님이 그대와 갖는 관계는 바로 도기공이 그릇과 갖는 관계와 동일한다". 하나님은 이것을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덕을, 위에서 언급한 두 관점에서 손상시키는 일 없이 적법하게 실행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하시며, 하나님은 그분께 하나님으로서 돌려질 법적권위로 행동하신다. 이 법적 권위는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함에 일치한다. 이에 대하여 피조물은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이 자유롭지 않다. 이 점이 "오 사람아, 그대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대적하여 답하는가?"는 질문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인간으로서 피조물로서 택자나 유기자나 지극히 높으신 이[하나님]의 행하심을 '완전히 의롭다' 또는 '전혀 의롭지 않다'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피조물은 그 자신 안에 정의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정하기 위해서는 그의 기준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한다. 이러한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 기준을 자신 안에 자신의 거룩한 속성 안에 지니신다. 이런 점에서 도기공과 하나님을 비교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확장할 수 없다. 실제로 도기공이 그가 만드는 그릇들의 형태들의 경우, 윤리적인 질문은 전혀 관계가 없다. 도기공은 그의 진흙에 대해서는 윤리 적인 법칙들을 전혀 존중할 필요가 없다. 진흙에게는 윤리적 특징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물질적인 덩어리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기공으로서 그분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 인간의 운명을 정하실 때, 그분은 이 것을 윤리적인 원리를 따라, 윤리적인 동기에서 행하신다. 단지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그릇이 그것을 만드는 이의 의도와 고민에 대하여 어떤 판단을 할 권리가 없듯이, 피조물은 이 윤리적 원리와 동기들에 대하여 어떤 판단을 내릴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릇은 전혀 권리가 없고, 그러한 권리를 소유할 수도 없다.


이제 위에서 언급했던 두 가지 비유 요소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은 어렵지 않다. 첫째 요소, 즉 특성의 할당은 제조품(maaksel; 토기)의 질문에 있다: "당신은 나를 왜 이렇게(alzoo) 들었는가?" 여기서 실제로 특성 결정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제조품은 자신의 상태가 그의 목적과 관련성이 있고, 그 목적이 자신의 현재 상태로 주어진 것을 안다. 따라서 제조품이 "왜 이렇게?"하고 묻는 것이다. 나아가 "제조자"(Formeerder)라는 하나님의 칭호에 있다. 플라소(πλάσσω; "만들다"; "짖다")는 목적을 지정할 뿐만 아니라 어떤 속성을 부여하는 것을 나타낸다. 요약하면, 그 형성 작업(formeering)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본문이 우리에게 어떤 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만은 본문에서 분명하며 균형잡힌 주해는 이 것을 인정할 것이다.


두 번째 곧 목적을 정하는 것은 롬 9:21에 나타나는데, 토기장이가 하는 일을 설명하면서, 그가 어떤 그릇은 영예로운 것을 위해, 다른 것은 영예롭지 못한 것을 위해 만든다고 한다. 이것은 그릇들이 갖는 목적을 보여준다. 하나는 귀한 것에 쓰이고, 다른 것은 천한 용도로 만들어진다. 사도 바울은 이 측면(trek)을 인간에게 적용한다. 마치 그들이 하나님의 예정의 대상인 것처럼, 바울은 어떤 사람은 "진노의 그릇"으로 멸망을 위해, 다른 이들은 "긍휼의 그릇"으로 영광을 위해 준비되었다고 말한다.


분명한 것은 이 표현 속에 두 개념들 "멸망"과 "영광"은 도기공 은유에서 "천함"과 "영예"에 상응한다. 도기공이 어떤 것은 천한 것을 위해 예정하듯이 하나님 또한 멸망으로 예정하며, 도기공이 영예로운 것을 예정하듯이 하나님도 영광으로 예정한다. 이것으로부터 "진노"와 "긍휼"은 은유에서 질적인 요소와 일치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칼빈은 그들은 멸망을 위해 예비된 그릇들이다. 즉 멸망을 위해 넘겨지고 예정된 것이다. 동시에[50] 그들은 진노의 그릇이다. 즉 형벌과 하나님의 진노(toornigheid)에 대한 증거가 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진노와 멸망이 상응하고 있는데, 하나는 다른 것을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긍휼의 그릇의 경우, 버려져 긍휼히 여길 그릇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은유와의 상응점 모두가 사라지고 만다. 이들은 긍휼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정해진 그릇들이다. 즉 여기서 소유격은 목적을 서술하는 소유격이다. 칼빈이 우리 신자들을 긍휼의 그릇이라 부르는 것은 매우 옳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긍휼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버림받은 자들을 진노의 그릇이라 일컷는 것도 옳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는데 쓰이기 때문이다.


51. 로마서 9:22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방금 제시된 주해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사도 바울의 논증에 전환이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불변사(partikel) 데(δέ; "그러나 만일")가 이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하고, 이 문장이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리이고 그분은 그렇게 행동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hoe-indien) 하나님이 한번도 이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나 그러한 대조는 단순한 데(δέ)보다 훨씬 강한 용어를 요구한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매우 옳은 지적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풀어 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버림 받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노를 계시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작정을 즉시 시행하는 대신 이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심으로 그분의 능력을 알리시기로 하시고, 영광을 받기로 예비한 긍휼의 그릇을 통해서는 자신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리시려고 의도했다면, 그러면 하나님이 그분의 작정을 즉시 시행했을 때만큼이나, 우리 모두 손으로 입을 막아야하지 않은가? 하나님이 이렇게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의 절대적 작정을 시행하는 것이 결코 덜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만하지 않은가?"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물론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버린받은 자들이 그들의 대담한 죄로 진노의 그릇이 되자마자, 그들에 대한 자신의 작정을 시행하실 수 있다. 곧 그들을 멸망으로 넘겨 주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들을 많은 인내로 참으셨다. 즉 형벌을 연기하시고 미루셨다. 이것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다. 이것을 "~하려고"(opdat; ἵνα)는 말이 표시한다. 그 목적은 그분이 하신 택자들에 대한 결정에 있다. 그분은 자신의 영광의 부요함을 긍휼의 그릇들에게 나타내고자 하셨다. 그런데 긍휼의 그릇들은 세상이라는 유기적 조직 속에 있다. 따라서 만일 주님께서 진노의 그릇을 즉시 멸망으로 넘겨주셨다면, 세상이라는 유기적 조직체는 부서지게 될 것이고 긍휼이 점차적으로 계시되는 일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카테르티스메나 에이스 아폴레이안(κατηρτισμένα εις απώλειαν; "멸망을 위하여 예비된")이 하 프로에토이마센(άπροητοιμασεν; "그가 준비한")의 반대개념인 것을 지적한다. 여기서 하나님이 긍휼의 그릇에 관하여 예비하였다는 것과 진노의 그릇들이 스스로 예비된 것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자체로 반대할 것이 없다. 모두가 하나님이 세계를 통치하실 때, 인간이 자신의 죄로 멸망으로 가게 하시는 것을 인간이 그분의 은혜로 영광으로 인도하시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하신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하나는 능동적이요 하나는 (비록 역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허용적이다. 그러나 과연 사도 바울이 여기서 이 말로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 실제로 여기서는 하나님의 작정의 시행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 작정 자체가 주제이다. 물론 그분 작정 안에서도 일반 작정과 허용 작정을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카테르티스메나(κατηρτισμένα)가 그것을 표현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칼빈은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예비함들이 하나님의 숨겨진 작정 속에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울은 유기자들은 자신들을 멸망으로 넘겨주거나 버렸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이 [이러저러한] 조건을 받기로 작정되었고 넘겨졌다고 설명한다.


어떤 경우에는 "예비되었다"(수동)고 하고 다른 경우에는 "그가 예비하였다"(능동) 한 것은 표현상 변화를 주려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 칼빈이 이 예비됨과 예비함이 하나님께서 작정을 실행하실 때 인간을 실제적으로 인도하고 주관하는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작정 자체 내에서 인간 운명을 형성하고 준비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았는데, 이 생각이 옳을 수 있다. 이것은 "영광받기로 미리 예비하셨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자들을 오래 참으시며 [멸망시키지 않고] 그대로 두신다. 이것은 단지 이미 실존하는 택자들 뿐만 아니라 이직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나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예비된 그런 자들도 위한 것이다. 그들의 삶과 운명이 하나님 안에서 이미 작정된 것이다. 이것이 이 무게감 있는 단락에서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논증이다.


이 논증이 타락후 선택설적(infralapsarisch)이냐 아니면 타락전 선택설적이(supralapsarisch)냐 하는 질문을 여기서 길게 다룰 필요는 없다. 만일 우리 해설이 옳다면, 사도 바울의 말들은 타락후 선택설적 설명은 적절하지 않다. 도기 그릇의 질문은 그 어느 때에도 "왜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할 수 없다. 최대한 양보해서 "왜 당신이 내가 그러했을때, 그렇게 되도록 결정했는가?"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질문은 실제로 "왜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작정 안에는 또한 인간이 무엇이 되든지 그렇게 되는 과정의 모든 수단까지 미리 정하시는 것도 포함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수단들 중 많은 부분이 우리 첫 조상 아담의 타락 이후이므로 우리 또한 이 것을 포함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죄의 원인으로 생각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작정이 이 모든 것을 포괄하여 실행하는지, 바울은 자신의 논증에서 전혀 의견을 개진하지 않는다.


죄에 관해서는 허용적 작정이나 이것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악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로우시다. 인간은 하나님께 내몰려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스스로 죄를 짓는다. 도기공 비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예정의 권능으로 죄인을 만든다는 것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이 스스로 지은 죄를 피조물의 운명에 관한 자신의 작정에 수용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아가 죄에 대한 작정이 인간이 어떻게 될 것인지 어떤 목적을 위해 그들이 존재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5.5.2 에배소서 골로새서 해설


52. 사도 바울은 자신의 다른 편지에서도 선택을 논하는가?


그렇다. 첫 번째 투옥시 쓴 편지들에는 하나님이 선택 작정을 하실 때 지혜 측면이 두드러진다. 반면,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주권(vrijmacht)에 더 초점이 있다. 엡 1:4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것과 이것이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일어났다는 것, 나아가 그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세우시는 것을 가르친다. 첫 번째 점["그리스도 안에서"]은 다음을 의미한다:


A. 그리스도는 선택의 기초 또는 공로적 원인이 아니다. 마치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보증이 되셨기 때문에 선택시 아버지의 사랑[51]이 역사했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성육신과 자신의 중보자직 및 그와 관련된 모든 것과 함께,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의 선물로 여겨진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외에는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머물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자신이 그 사랑의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B. 또한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로 선택되었고, 그 다음이 신자들이며, 그래서 그가 머리로서 선택될 때, 그의 지체들의 선택은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신자를 위해 존재하는 만큼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반대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아버지로부터 주어졌다고 가르친다.


C. 바른 뜻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몸의 지체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갈 1:6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곧 너희로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을 수 있도록"하고 말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의 결정을 포함하는데, 이 결정은 둘로 구성된다. 첫째 신자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요, 둘째 그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구원 혜택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교제 속에서만 나눠지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모든 신령한 축복들로 축복을 받는다. 분명히 그리스도는 선택의 작정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대상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말할 때, 그의 중보자 측면에 주목하는 것이며, 추상적으로 영원한 로고스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는 예정의 작정에서 대상이요 방편이었다.


두 번째 사항 "세계의 기초를 놓기 전에"(προ καταβολής κόσμου)라는 말은 선택이 영원에 속한 행동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선택을 부르심이나 의롭다 하심과 같이 시간적 행동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무흠이다. 다시 말해서 선택은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영예를 목표로 한다. 하나님이 무언가를 예정했을 때, 그분은 그것을 자신을 위해 구별해 내셔서 그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 편지[에베소서]는 구원 계획을 거듭 하나님의 지혜로운 창조로 묘사한다. 이것을 천사들과 사람들이 경이로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여기서 선택받은 교회는 특별히 몸이라 부른다(엡 4:4; 골 3:15).


이것은 또한 전 세계 역사를 이 하나님의 작정(dit raadsplan Gods)의 거대한 실현 관점에서 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계획을 프로데시스 톤 아이오논(πρόθεσις τών αιώνων; "세대들의 계획")이라 부른다(엡 3:11). 그런데 이것은 세계 기초 전에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만드셨는지 말한다. 동일한 하나님이 바로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지으신 분이시다(엡 3:9-10).


또한 바울은 이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그리스도는 천사들과도 관계가 있다는 점을 충분히 말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만물, 곧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자신과 화목시키는 것이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었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것들 중에는 천사들도 들어간다고 이해할 수 있다(cf. 엡 1:10, 11; 골 1:20).



출처: 개혁교의학(Reformed Dogmatics), 제 I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