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 Reformation/G.J.Vos,1862

예정론(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3 -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Bavinck Byeon 2018. 10. 13. 12:04

예정론(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3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5.6 예정론 각론


5.6.1 개요


53. 예정 교리를 설명할 때, 다음으로 언급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1) 예정의 주체: 예정하시는 하나님[Q. 54-55].

2) 예정의 출발점: 신적 예지[Q. 56]

3) 예정 안에 있는 구별하는 요소: 신적 선택(uitverkiezing) [Q. 57-591.

4) 예정의 효과적이고 형성적인 요소: 미리 정하심 (vooror-dineering) [Q. 60]

5) 예정의 대상들: 천사, 인간, 중보자[Q. 61-63].

6) 예정의 대상에 나타나는 성질(qualiteit), 다른 말로 표현하여 예정의 범위(omvang). [Q. 64-79]



5.6.2 예정의 주체


54. 성경 전체에서 예정은 누구에게 돌려지는가?


하나님 아버지께 돌린다. 따라서 벧전 1:2은 신자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선택된 자들"이라 부른다. 엡 1장[52]은 선택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선택은 [하나님의] 아버지와 같은 행동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만일 선택이 피조물의 운명과 목적을 결정한다면 그것은 어떤 점에서 창조적인 성격을 가진다. 비록 외적 사역은 모두 삼위일체 전체와 관련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순서상 처음으로 선택하려는 생각을 형성하는 것은 아버지이시다. 그럼에도 성경 어느 곳에서도 아들과 성령에게 선택을 돌린 일이 없다. 요 6:70, 13:18; 15:16, 29; 행 1:2, 24에서 '그리스도의 선택'이라는 말이 나타나나 그것은 구원을 위한 영원한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직임을 위한 시간적 선택과 결정을 가리킨다.


55. 우리가 선택을 경륜적으로 성부께 돌릴 때, 이것이 내포하는 것은 무엇인가?


소위 "평화의 작정"이 선택에 앞서지 않고, 순서상 선택 뒤에 온다는 것이다. "평화의 작정"은 선택에 관한 생각을 실행하는 첫 번째 단계로 보아야 한다. 그 작정은 그리스도라는 영원한 보증을 포함하는데, 이 보증에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시간 안에서 은혜 안에서 다루시는 모든 것들이 달려있다. 그런데 만일 그 보증이 구체적이라면,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인류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매우 제한적으로 택함 받은 사람들과 이들만을 위한 것이라면, 택함 받은 사람들에 대해 결정하는 것, 곧 그 인물들이 누구인지 확정하는 일이, 성부와 성자 사이에 보증에 관한 협의가 있기 전에, 이미 이루어졌어야 한다(여기서 "전에"[laleer]와 "시작하다"[beginnen]는 시간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와 반대되는 견해는, 비록 그것이 우리를 가로막은 후에라도[53], 보편속죄론으로 이끌어 간다. 이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졌고 어떤 제한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한 보증자의 지위를 받았다. 그리고 순서상 나중에서야 어떤 제한이 하나님의 작정 안으로 들어간다. 이 제한을 통해 그리스도의 보증인 지위는 오직 특정 사람들에게 효력이 발생하고 유효하게 된다. 이것은 아미랄두스(Moses Amyraldus; 1596-1664) 도식에 매우 가까운데, 이에 관하여 우리는 후에 이야기할 것이다[cf. I 2,12-14]. 이 도식은 구체적인 것으로 마치기 위하여 보편성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목적과 사랑이 처음에는 전포괄적이나 몇몇 개인들로 축소된다. 만일 처음부터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



5.6.3 예정의 출발점


56. 신자에 대한 예정의 출발점은 무엇이었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서 찾도록 가르친다. 우선 그 출발점은 "예지"라는 명칭에 있다. 이 "예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앞에서 논의하였다. 이 예지는 자유롭고 주권적인 사랑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지"를 죄인의 구원을 위한 기초가 되는 여러 행위들 앞에 둔다(롬 8:29).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 사랑을 곧이어 미리 아심 곧 인격적 사랑으로 표시한다. 하나님은 단지 인류의 일부나 핵심이나 나머지만을 사랑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특정한 인물들, 예를 들어, 요한, 바울 등을 사랑하신다. 이것은 각 이름을 아는 앎이요, 인격적인 앎으로서 "알다"(kennen)란 말 자체가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인격적 사랑 외에 다른 것[앎]은 자체로 가능하지 않다. 사랑은 그 본성상 인격적인 어떤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이 사랑 뒤에는 어떤 것도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긍휼도 이 사랑 뒤에 두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긍휼은 인격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곤경에 처한 모든 이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자비를 필요로 한다. 긍휼은 바로 그것 자체의 본성적이고 일반적 성격 때문에 사랑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이가 선택을 긍휼에서 출발하여 생각하려 한다면, 그는 인격적 출발점을 포기한 셈이 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죄를 보시고, 우리의 비참한 상태 보시고, 마음이 움직여 동정하게 되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셨다. 그리고 이 동정이 하나님의 사랑을 움직이게 했다. 그러나 과연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비참한 상태에 있는지, 동일한 비참함이 모든 사람을 위한 동일한 긍휼이 나게 하는지 정당하게 질문할 수 있다. 부정적으로 대답한다면, 긍휼 이외에 그것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결정적으로 머무르도록 하는 다른 어떤 것이 있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긍휼을 깨우고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오직 옳은 주장은, 선택의 근거가 그 어떤 측면에서도 우리 자신에 있지 않으며, 심지어 우리가 비참하게 잃어버려진 상태도 그 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참하기 때문이 아니라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 성경은 이것을 동일한 관점에서 본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의 그 크신 사랑 사랑을 인하여 (ter wille van) ..."(엡 2:4). 이 구절에 따르면, 긍휼은 분명하게 사랑에서 나오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5.6.4 예정 안에 있는 구별하는 요소


선택(uitverkiezing)이란 말 자체에 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그 반대를 생각하게 하고, 나아가 모든 보편적인 견해universalistische opvatting) 곧 모든 만물의 회복에 관한 이론을 배제하게 한다.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들을 분명한 목적으로 가지고 선택하셨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이 두 측면이 어떤 연관 속에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몇 가지 사물이나 몇몇 사람들에게 주의를 집중하고, 다른 사물이나 인물들은 비록 동일한 항목에 속한다고 해도 뒷전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우리에 의해 그들에 관한 결정이 내려졌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일은 우리 자신이 그들에 관한 결정을 소홀히 함에도 불구하고 일어난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께 이런 일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님께는 그분의 결정 안에 있는 그 어떤 결과도 자신에게 완전히 분명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분의 예정에는 그 반대편으로 유기가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이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와 다르게 생각하고 그것을 기꺼워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기를 어떤 결정의 부재로 설명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서 전혀 다르게 말씀하신다. 그분은 야곱과 에서,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 구별을 두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마엘과 에서를 지나쳐 보시기 때문이 아니라, 이 구별을 통해 그분이 다른 사람에게 주신 것을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유지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58. 선택의 대상 자체 안에 이런 구별을 위한 어떤 이유들이 있는가?


없다. 이것 또한 성경이 부정하는 것이다. 구별하는 선택(onders chedende verkiezing)으로서 예정(verkiezing)은 동시에 전적으로 자유로운 예정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유롭다는 것은 임의적인 것과는 다른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예정 시 그분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서 끌어온 어떤 동기들에 이끌린다면 예정은 부자유하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어떤 동기도 없고 또 자신의 지혜와 일치시킬 수도 없다면, 예정은 임의적인 것이 된다. 모든 것에 대하여 주님은 가장 완전하고 지혜로운 근거를 가지고 계시다. 우리는 이 근거가 그분 자신에게서 왔으며, 그가 선택한 이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들은 중보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의 몸을 이루도록 예정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종국에 어떻게 될 것인지는 이미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늘이 그와 같았던 것은 하나님께 어떤 근거가 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먼저 선택을 통한 것이며,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선택의 목적에 적절함은 하나님 안에서 선택을 위한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열매이다.


59. 유기가 오직 선택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택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더 강하게 나타나기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이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유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고 가르친다:


1)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이, 어떤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유기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사역이 독점적인 하나님의 사역으로 다른 데서보다 더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선택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기 위한 것이다"[롬 9:11]고 말한다. 에서는 버림을 받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사역이 야곱에게 있었는지 드러났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롬 9:22, 23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멸하기로 예비된 진노의 그릇을 용납하셨다. 그것은 긍휼의 그릇에 대한 자신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도 유기가 오직 선택을 위한 것이라는 명제를 지지하는 증거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 구절에 명백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단지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는 것(이것이 이미 진노의 그릇이었다는 것을 떠나서)이 택자들의 구원과 관련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2) 그러나 왜 하나님이 택자들 옆에 버림받은 자들을 세우는지 그분 안에 더 높은 차원의 근거가 있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은 어떤 그릇들은 명예롭지 못한 것을 택하셔서 세우시고자 하시는데, 그것은 자신의 진노를 증명하고 그분의 능력을 알리시기 위한 것이다(롬 9:22). 따라서 이것은 독립적인 목적으로, 선택의 목적 다음에 위치 하고 그것에 종속된다.



5.6.5 예정의 유효적이고 형성적인 요소


60. 예정 안에 있는 유효적이고 형성적인 요소라는 말을 당신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우리는 이미 성경이 우리에게 예정 행위가 다음 순서로 일어난다는 것을 보았다:


예지(voorkennis)

예정 (voorbepaling)


이 예정은 예지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운명과 신분을 결정한다. 선택이 그 목적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결국 거기로 오게 될 것이다. 롬 8:29에 따르면, 예정을 동해 이루어질 것은 어떤 형상(eene beeld)이다. 그러나 예정을 편파적으로 이 형상을 결정하는 것으로 제한할 수 없다. 이것은 이 마지막 상태 외에 그것에 이르게 할 모든 수단들과 방법들을 포함한다. 이것이 예정 안에 있는 유효적이고 형성적인 요소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자주 마치 이 수단들이 그 목적과 분리된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예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시행 위에 둔다. 그리고 마치 예정이 기적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수단들 밖에서 실현되는 것처럼 주장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경에 반하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선택을 말할 때, 동시에 그 예정이 실현되도록 하는 모든 수단들과 방법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하나님]가 미리 정하신 자들,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이들,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롬 8:30]. 따라서 수단을 회피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말해서, 선택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근거를 내놓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예정이 실현될 것인지 체념한 채 기다리는 것은 항상 예정이 수단들 밖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예정 안에 수단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는 택자들을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곳에 이르게 하기 위해 기여하는 모든 것이 속한다. 따라서 외적 부르심 등 은혜의 시행뿐만 아니라 준비하는 은혜 또한 포함된다(준비하는 은혜에 관해서는 후에 정의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생 여정은, 그들이 하나님께 오기 전에도, 임의성이나 우연에 넘겨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들의 운명과 상황들을 훗날 택자들의 몸 안에서 차지할 위치를 위해 가장 적합하게 섬길 수 있도록 정하신다. 어머니 태에서 구별된 바울이 그랬고, 어거스틴이 그러했고, 루터와 칼빈이 그랬다. 가장 작은 신자 또한 그러하다. 나아가 외적 부르심 후에 이 [수단을] 정하는 일은 가장 사소한 일에까지 확장된다. 사도 바울은 예정에 관한 그의 논의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고 말했다. 여기에 어떻게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이 관점 아래 놓이는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선이라는 결과로 인도하도록 정해졌는지 나타난다.



5.6.6 예정의 대상자


5.6.6.1 인간 그리스도


61. 예정의 대상자들[54]은 누구인가?


성경은 [예정의 대상자로] 천사와 인간, 중보자를 언급한다. 지금까지 인간에 관해서만 말했다. 우리는 이제 먼저 중보자가 예정되고 선택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질문에 대답할 것이다. 성경은 벧전 1:20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창세 전에 미리 알려지신 자이나, 이 마지막 시기에 우리를 위하여 나타나셨다". 눅 23:35은 그를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 벧전 2:4은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았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보배로운 산돌"이라고 부른다. 마지막 두 구절은 "선택을 받다"는 말을 "보배롭다" 또는 "사랑 받다"와 동일한 뜻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바른 길을 지시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얼마만큼 미리 아심과 선택, 미리 정하심에 관하여 물을 수 있는가?


1) 미리 아심에 관하여. 미리 안다는 것은 자신의 예정의 대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그런데 중보자의 인격은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이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구속과 상관없이 아들을 사랑하시는 곳에서, 아들[성자]에 대한 아버지[성부]의 인격적 사랑을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즉 성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있는데, 이 사랑은 아들로서가 아닌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에 머문다. 즉 그의 인격에 근거를 둔다. 왜냐하면 그가 인간의 본성을 취하셔서 보증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단강 세례시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그를 들으라"[마 3:17; 눅 3:22]고 강조하여 하신 말씀은 중보자 사역과 관계가 있다. 성경이 그리스도를 미리 아신다고 가르칠 때,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이것은 중보자의 자격을 가진 그리스도의 인격에 머무는 매우 기쁨 어린 사랑이다.


2) 선택에 관하여. 우리는 위에서 어떻게 선택 교리 또는 개념이 특히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는지 살펴보았다:


A. 구별함

B. 택자들을 기쁨으 로 받아들임


여기서 구별함을 그리스도께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중보자로 오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다. 따라서 선택(kiezen)이나 골라냄(uitlezen)을 여기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두 번째 것에 관해서는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중보자로서 미리 아신다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이 된다. 또 여기서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떼어놓는 것을 생각한다면, 중보자를 선택하는 것이란 그를 미리 정하시는 것과 일치한다.


3) 미리 정하심에 관하여. 성경 어느 곳에도 그리스도를 미리 정하였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떻게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미리 정하였는지, 그래서 그가 많은 형제들 중 맏아들이 되게 하셨는지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롬 8:29). 이것은 간접적으로 그리스도 또한 이 형상으로 미리 정해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과 같이[Q. 60], 이 형상은 도덕적인 속성이 아닌 중보자의 영광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몸이 지체라면 가장 멀리 떨어진 부분이라도 그의 이 영광에 참여한다. 그리스도를 미리 정하심이란 아버지께서 중보자인 그에게 영광을 의도한 것, 어떤 형상을 생각하고 [그것을] 표시한 것을 뜻한다.


이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이 영광의 약속에 관해 말씀하셨다. 그는 이 영광이 하나님을 통해 그에게 엄숙하게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내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나에게 맡기신[= 언약으로 결정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그것을 맡긴다"[눅 22:28]. 여기서 "맡긴다"(verordineeren)는 말을 이런 의미에서 말할 수 있다면, 여기서 결정하다는 의미에서 "맡기다"가 논리상 앞서 있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를 정하심은 분명히 그의 중보자 사역과 관련된 모든 것, 즉 그분의 영광 뿐만 아니라 그분의 고난, 모든 수단들과 방법들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작정과 손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헤롯이나 빌라도가 공모할 것에 대하여도(행 4:28), 모두 미리 결정하셨다.


62. 이 예정은 로고스로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가?


오직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는 예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오직 구원론적인 특별한 의미에서 중보자 그리스도께만 해당한다. 그리스도께서 죄 밖에서 성육신 하신 것에 관하여 성경은 아무 것도 모른다. 로고스가 삼위일체 제 2위격으로서 모든 것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관련성을 예정으로부터 유추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제 2위격]은 신적 본질 자체의 존재 방식에서 오는 것이지 자유로운 결정의 결과[55]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자유로운 결정의 결과]은 또한 다르게 될 수도 있다.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된 것처럼, 또한 만물은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다(골 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륜적 관계, 즉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 제 2위로서 그를 통해 창조된 모든 피조물과 맺고 있는 관계는 그의 중보자 됨 안에서 실행되는 것이 사실이다. 창조가 그를 통해 그리고 그를 위하여 이루어지는 것처럼 재창조도 마찬가지이다.



5.6.6.2 천사들


63. 천사들의 선택을 말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딤전 5:21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들을 "선택받은 천사들"이라 부른다. 그 반대는 선택받지 못한 천사들일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천사들의 선택을 이해할 것인가하는 것이다:


1) 우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천사들의 선택이란 다음 두 가지를 뜻한다.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의 경우, 하나님께서 그들이 확고부동하게 머무르는 순간부터 영원히 변치 않도록 정하셨다. 반대로 나머지 천사들을 버린다는 것은, 타락한 천사들의 경우, 구속함 없이 그들의 넘어진 상태로 머무르도록 정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론이 있다. 이 설명은 천사의 선택을 그들 안에서 예견된 어떤 선, 즉 그들이 확고부동하게 머무는 것에 의존하게 한다. 이것은 성경의 유비 전체와 충돌한다. 나아가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 생각으로 이끈다: 만일 인간이 행위 언약 아래서 넘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에 근거하여(om de reden) 불변하는 축복을 받았다면, 그 이유로 선택받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따라서 이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천사들을 선택한 근거(grondslag)는 확고하게 서 있을 것에 대한 예견이 아니다. 오히려 선택이 그들의 확고 부동함의 근거가 되었다. 반대로 선택 받지 못한 천사들이 확고하게 서 있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선택 받지 못했다는 것 외에 다른 확실한 근거가 없다. 칼빈은 말한다(Inst. III 23,4): "바울은 넘어지지 않은 상태로 끝까지 견딘 천사들을 '선택 받았다'고 말한다. 만일 그들의 확고히 서 있는 것이 하나님의 기쁜 뜻(belbehagen Gods)에 근거하였다면, 다른 천사들의 타락은 그들이 버림받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밀한 작정 안에 숨겨진 유기 외에 어떤 다른 원인도 제시할 수 없다."


3) 동시에 천사들의 선택과 유기는 타락 후 선택설적(infra-lapsarisch)이 아닌 타락 전 선택설적(supra-lapsarisch)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타락 후 선택설적으로 본다는 것은, 동시에 선한 천사들의 학고하게 머무는 것이 [선택] 밖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선택] 밖에 있다면, 그들의 선택은 거기[작정]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 안에 근거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유로운 기쁜 뜻에 의존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한 것은 천사들의 선택[에 관한 개념]을 연장하여 인간의 선택[을 이해하는데]에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이 두 경우가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천사들의 경우, 넘어질 것이냐 아니냐에 관한 하나님의 결정이 선택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반박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따라서 이 선택은 자체로 죄가 이미 결정된 어떤 것으로 주어진 곳에서 비로소 사용될 수 있는 그런 용어가 아니다.


4) 그러면 천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받았는가? [이에 관하여] 어떤 사람들은 중보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받았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머리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받았다고 말한다]. 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보존(bewaring)과 확증(bevestiging)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그러나 여기서 중보자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 중보자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항상 보증으로서 다른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이 스스로는 이행할 수 없는 의무들을 떠맡는 이를 의미한다. 나아가 다음 두 가지를 전혀 증명할수 없다:


A. 천사들이 그들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었다.

B.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의무들을 대속적으로 자신에게 지우셨다.


따라서 천사들은 그들의 머리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받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 첫째 이것은 분명히 로고스를 염두에 둔다. 그를 통해 그리고 그를 위해 천사들도 창조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로 그리스도가 중보자로서[56] 그의 교회를 봉사하는 천사들 위에 행사하는 통치권을 생각할 수 있다. 선택 받은 천사들은 분명히 구속 사역을 섬기기 위해 예정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을 "섬기는 영들"[히 1:14]이라 부른다. 그들은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섬기고[마 4:11; cf. 26:53]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을 때 그분을 강하게 한다[눅 22:43]. 그리스도께서 이미 창조를 통해 그들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 자체는 그가 계속해서 그들의 머리가 되시고, 재창조시 그들을 자신의 종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함의한다. 단지 주의해야 할 한 가지는 여기서 머리라는 개념은 유기적 기관으로서 몸의 머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머리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A. 다른 사람 위에 있는 지배자.

B. 살아 있는 몸에서 생각하고 통제하는 부분.


첫 번째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바로 천사들의 머리이시다. 두 번째 의미에서는 그리스도가 오직 선택 받은 인간들의 머리이시다.


5)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피조된 천사들을 위한 화목에 관한 말을 찾고자 했다: "경륜상 시간의 충만이 이르렀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이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나 모든 것을 다시 하나로 모으려 하셨다"(엡1:10); "그[하나님]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그리스도]를 통해 화평을 이루셨다. 그를 통해 모든 것, 곧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과 화해(verzoenen)을 이루셨다"(골 1:20). 그러나 어떻게 천사들과 화해(verzoening)를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는 그들에게 있는 중보자라고도 말할 수 없다.


칼빈은 엡 1:10을 선택받은 천사들을 그들의 상태에 확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곧 처음에 선택받지 못한 천사들이 넘어지는 시초 뿐만 아니라 저들이 타락한 후 계속되는 시기에 그들의 상대를 확고히 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확고히 함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를 중보자라 부른다(cf. 그의 에베소서 주석 해당 구절). 골 1:20에 관하여 칼빈은 "화해"는 배교를 막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57] 하나님과의 평화가 확고하게 되고 지속되므로 이것을 화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욥기 4:18을 가리키면서 천사들이 가진 의 조차도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기에 전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Calvin, Inst. II 12,1; 17,9]. 따라서 그들 조차도 일종의 은혜, 하나님 앞에서 일종의 가리움과 화해가 필요하다. 엡 1:10은 천사들의 선택과 시초 지속적인 붙들어줌을 염두에 둔 것이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때가 찼을 때" 일어난 것이다. 즉 어떤 경우에도, 메시야의 도래를 선행하는 시점에 일어난 어떤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cf. 갈 4:4).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을 때, 그들은 본래 서로가 하나였고, 하나님과도 연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죄를 통해 균열이 왔다. 천사들 중 일부가 타락했고 인간은 타락했다. 하늘과 땅은 분리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자들을 구속하시고 다시금 자신과 하나되게 하셨고, 땅과 하늘 사이의 진정한 하나됨을 회복하셨으며, 모든 것을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셔서 진정한 하나됨을 이루셨다. 선한 천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들은 인간과 분리되어 있었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과 연합하여 다른 모든 피조물과 하나됨을 이룬다. 반면 버림받은 천사들과 버림받은 인간들은 땅과 하늘로부터 쫓겨나 지옥에 맏겨진다. 그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τα έπι τοις ουρανοις και τα έπι τής γής]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이 표현에 내포된 것을 주목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본래는 서로 하나였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였다. 이것은 "다시 모든 것을 하나로 모은다"(α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는 말에 담겨 있다.


B. 모든 것들은 중성이다. 따라서 천사와 사람을 제외하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전 하늘 영역과 땅 영역을 의미한다. 전 이성적 비이성적 피조물, 생명체와 비생명체 사이에 균열이 온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피조물의 하나됨이 회복된다.


C. 하나로 모으는 것은 (때가 찼을 때) 인간이 되신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이미 여기서 말하는 것이 천사들을 위한 화해가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D.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 되도록 모으는 것이다. 이때 모든 것이 하나 됨[統一]을 이룬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 모두가 일치하여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아나케 팔레이오사스타이(ἀνακεφαλαιωσασθαι)에서 중간태가 이것을 내포한다: "자신에게". 어떤 의미에서 골 1:20은 어렵다. 그러나 주요 의도는 엡 1:10과 동일하다: 실현된 화해가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다시 이끌어 갔을 때,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었다". 예를 들어 "만물을 불사른다"는 말은 그 조각 하나하나에 따로 불을 놓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중 몇에 불을 놓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불타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만물과 화해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화해가 그들 모두에게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화해가 어떤 이들에게 이루어지는데, 이를 통해 모든 것이 다시 하나님과 옳은 관계에 서게 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도 [골 1:20] "모든 것, 땅에 있는 것과 하늘에 있는 것"(τ πvτa, τἀ επι τής, τ έτοις ουρανοις)이 모두 중성인 점을 주목해야 한다.



출처: 개혁교의학(Reformed Dogmatics), 제 I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