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 Reformation/G.J.Vos,1862

예정론(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4 -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Bavinck Byeon 2018. 10. 13. 12:23

예정론(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4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5.6.7 예정의 대상에 나타나는 성질


64. 예정의 대상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속성을 가지고 나타나는가?


천사들에 관해서는 이미 본 것과 같이, 그들은 여전히 타락할 수 있는 존재 또는 타락할 존재로 나타난다. 선택 받은 천사들은 타락할 수 있는 존재로, 버림 받은 천사들은 이중적인데, 타락할 수 있는 존재요 이미 타락한 존재로서 나타난다. 후자[타락한 천사들]에 대한 예정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타락을 허락하시고 그들을 타락한 상태에 놓아두며 그들의 의로운 형벌을 통해 자신을 영화롭게 하실 것을 결정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전자[선택 받은 천사들]에 대한 예정은 하나님이 그들을 넘어지기 전에 지키시고, 그 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축복을 주실 것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경우, 여기서 타락 전 선택설 지지자들과 타락 후 선택설 주장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이 논쟁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A. 주해적 차원

B. 교의적 차원

C. 역사적 차원


이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58]은 로마서 9장이다. 이것은 앞에서[Q. 40-51] 자세히 논의하였으므로 주해적 차원은 충분히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교의적 차원으로 넘어간다.



5.6.7.1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차이


65. 어떤 것이 두 견해 주장자들 사이의 차이가 아닌지 미리 제시하라.


1) 우선 여기서 문제는 하나님의 작정 안에 어떤 시간적 순서가 있는지 질문이 아니다. 모든 개혁파 사람들은 성경에 따라 하나님 본성의 완전한 영원성을 고백한다. 이 본성은 영원성으로 시간적 지속을 초월한다. 따라서 거기에서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한 날 같고, 그 날은 마치 밤의 한 경점처럼 지나간다[시 90:4; cf. 벧후 3:8]. 이 영원성 안에 하나님의 지식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결정이 현존하거나, 거기[영원]로부터 시간으로 넘어가 [하나님의] 창조적 전능함이 반영된 사역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는] 세계의 완성시점에 일어날 일은 창조의 여명에 일어난 일보다 이르지 않다. 하나님의 작정의 작정의 다양한 부분들이 순차적으로 그분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든 관념은 이 영원성 개념과 맞지 않는다. 먼저 창조에 대한 작정이 있었고, 다음으로 타락, 그 다음으로 예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타락후 선택설]도 또는 정반대의 시간 순서로 이 부분들이 차례로 따랐을 것이라는 생각[타락전 선택설: 예정, 타락, 작정]도 모두 성경에 어긋난다.


우리가 우리의 시간에 묶인 사고로 신적 생명이 갖는 영원성을 파악하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 영원성을 인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영원성이 우리 [인식 틀]와 싸우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중 어떤 것도 확정할 수는 없다. 이것을 가능한 한 짧게 표현하면, 하나님 안에는 많은 작정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현재적으로 존재하는 단 하나의 유일한 작정이 있을 뿐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이미 타락 전 그리고 후 선택설(supra-eninfra-lapsarisme)이라는 명칭에 들어 있다. 만일 이 명칭들[의 차이]이 시간 순서에 관한 것이라면, 타락 이전 그리고 이후 선택설(ante-en post-lapsarisme)이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타락에 관한 작정 이전에 예정이 있다고 믿는가 아니면 그 후 예정을 믿는가 라고 질문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명칭들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 이미지를 택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맞지 않는 모든 시간적 개념의 흔적을 피하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


2) 나아가 여기서 문제는 인간의 창조와 타락이 하나님의 작정 아래 있느냐 하는 질문도 아니다. 창조에 관한 작정을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타락에 관한 작정을 부정하고자 하는 사람은 타락후 선택설 대신 개혁파 입장이 아닌 견해를 취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 역사에서 모든 구속 사역이 달려 있는 가장 중요한 전환점들 중 하나를, 이것과 함께 하는 모든 것의 진행을 우연에 넘겨주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개혁파 사람들은 칼빈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결정(de beschikking Gods) 아래 타락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죄책을 통해 타락했다"(cf. Inst.111 23, 8-9]. 하나님은 그분의 작정 안에서 단순히 타락을 아실 뿐만 아니라, 타락을 계산에 넣으신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분의 작정(in zijn raad) 안에서 그들의 확실성과 확고함을 확보하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 옆에 사물의 제 2원인을 생각지 않는다면, 죄의 끔찍한 실재(het vreezelijke feit der zonde)의 경우도 다를 수 없다. 죄도 그 확실성을 하나님의 작정(raad Gods)을 통해 획득한다. 이 입장에 뒤따르는 어려움이 아무리 크고 아무리 극복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 어떤 것도 이것을 감소해 줄 수는 없다. 여기서 의심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지금 끝없이 빠져 들어가는 이원론의 끝자락에 서 있다.


단지 입문 단계에서, 신학의 시야가 아직 완전히 밝지 않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작정으로부터 타락 또한 제거하려 했다. 어거스틴이 그랬다. 그는 타락에 이어오는 사건들의 경우, 하나님의 예지(Gods voorkennis)가 그분의 작정(zijn besluit)에 기초하고, 이와 반대로 타락의 경우, 작정이 미리 내다봄(voor uitzien)에 의존한다고 생각했다. 이것과 또 다른 것(성도들의 배교)이 어거스틴 구원론에 있는 두 개의 약점이다. 진정한 개혁파 신학자들 중 단지 몇몇 사람들만이 미리 내다봄(vooruitzien)을 말할 뿐이다. 발레우스(Walaeus)는 말한다(Synops. Leid, XXIV 23): "하나님은 그분의 무한한 지식의 빛으로 어떻게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실지, 인간이 그의 자유의지를 그의 전 후손들과 함께 남용할지 미리 내다 보셨다(vooruitziende). 그리고 어거스틴이 우리에게 옳게 일깨워주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지 않는 것보다는, 악에게 [그분의] 선함(weldadigheid)을 보여주는 것이, 그분의 전능하신 선함(almachtige goedheid)과 더 잘 어울릴 것으로 악인에게 판단하셨다."[59]


3) 세 번째로 지적해야 할 점은 개혁파 신학은 타락 후 선택설이든 타락 전 선택설이든 죄는 허용적 작정 아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불만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이 말이 너무 많이 협화신조 5조(Formula concordiae, art. 5)를 떠오르게 하고, 그래서 루터파 음색을 갖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에 대하여 그의 한 저술(Inst. III 23,7)에서 항변했다. 칼빈 뒤에 베자(Beza)와 다네우스(Danaeus)도 같은 길을 따랐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표현은 없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 표현을 엄격한 타락전 선택설 지지자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타락후 선택설 지지자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게르마누스(Germanus)는 말한다(Opera Omnia, II, p. 28): "그러므로 인간의 창조시, 타락을 허용하는 것과 제어하는 것과 함께, 인간이 그의 궁국적 목적에 이르는데 사용될 수단들이 예정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되풀이 되었다. 물론 허용적 작정이란 무작용적 작정(een werkloos besluit), 즉 미리 내다봄에 근거한 작정이요 단지 그것을 막을 길이 없는 작정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죄라는 어떤 실재에 확실성을 가져오는 그런 작정이다. 그러나 죄가 실현될 때, 그 원인은 아니다. 만일 사람이 이것이 말이 되지 않는 말들이요 구분이라고 할 때, 우리 또한 이것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것들 이상을 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사람이 지금 가늠할 수 없이 깊은 신비의 경계에 있다는 경고에 속한다.


4) 이것은 예정과 유기의 작정시 죄를 한 요소로서 고려해야 하는가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점을 오해한다. 자주 예정을 타락 위에 두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는 주장을 듣는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 전에 축복과 영원한 고통을 결정하셨는데, 이것은 단지 그가 그렇게 윈하셨기 때문이었고, 이때 그들의 죄를 고려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것은 타락전 선택설에 없는 결론이며, 이 이론의 지지자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이다. 이와 동일하게 타락후 선택설로부터도 수많은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런데 그 결론들 앞에 모두가 움츠려 든다. 왜냐하면 이 결론들이 하나님의 덕성들(Gods deugden)의 기초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퍼킨스(William Perkins)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스스로 타락전 선택설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가 말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고 비난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옥 불에 들어가도록 피조물이 멸망하도록 결정하셨다. ...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우선 이렇다: 유기는, 그것이 첫 번째 행동과 관련있을 때, 즉 피조물을 버리고 그 안에서 의를 증명하려는 뜻과 관련될 때, 완전하고 절대적이다. 우리는 이것을 가르치고 믿는다. ... 죄 자체는 버림과 하나님의 의로운 허용 뒤에 온다. ... 그러나 유기는, 그것이 두 번째 행동과 관련될 때는, 다시 말해서 저주하려는 뜻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또는 무제한적이지 않다. 도리어 죄를 고려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의 죄책이 아닌 다른 이유로 멸망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 외에 다른 것으로 지옥 또는 멸망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 두 번째로 나는 대답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지 그를 멸망시키기 위해 창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죄인들의 정당한 멸망을 통해 그분의 공의를 증명하시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그가 죄인인 한, 정당한 멸망을 통해 벌주시는 것은 약간 다른 것이다"(하나님의 예정과 은혜에 관하여 I, 770-772).


동일한 방식으로 칼빈도 논증한다(Inst III 23). 즉 한편으로 죄를 허용하실 때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을 가리키고,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창조물 중 어떤 것도, 죄가 있거나 죄를 고려하는 것 외에 멸망하도록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만일 타락전 선택설 속에 소위 폭군적 하나님이란 개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가증스러운 것이다. 만일 죄를 허용하는 것을 작정에까지 끌고 오려 한다면, 두 가지를 붙들어야 한다:


A. 하나님은 폭군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이성적 피조물 자체로 멸망을 위해 만드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를 자기 자신의 덕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그렇게 행하신다.

B.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실 때, 그리고 악을 작정에 포함시킬 때 임의적으로 행하시지 않고, 완전한 공의를 따라 행동하신다. 그러나 이 공의를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Cf, Calvin, Inst, III 23,4과 위에서 롬 9:21에 관하여 관찰한 것을 참조).


5) 두 견해의 차이를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A. 그 차이는 우선 예정의 범위에 있다. 왜냐하면 타락전 선택설은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예정 안에 있도록 허용하는 것인 반면, 타락후 선택설은 그 밖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트리그란드(Jacobus Tngland: 1583-1654)의 말을 들어보자(Advies overt Concept van Moderate, ll): "나는 개혁교회 교사들이, 예정을 타락 위에 두든지 타락 후에 두든지, 근본적으로 서로 의견이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차이가 나는 것은 단지 동일한 문제에 관한 설명의 방식에 있다. 유니우스에 따르면, '우리는 경건하고 학식있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예정 안에서 그들을 보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아니다. 하나님께는 인간이 창조되고 그리고 타락한 존재로 인식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들이나 저들이나 실제로 말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경건하게 고백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둘 다를 말하기 때문이다. ... 후자의 경우 하나님께서 예정시 인간을 타락한 자로 인식하셨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실제로 예정이나 유기의 원인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저주가 뒤따르는 원인들의 순서와 형태에 주목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만일 하나님이 예정 안에서 인간을 아직 창조되지 않은 존재로 인식한다고 말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을 생각했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다.'"


(이어서 트리그란드는 말한다) "그래서 문제 자체와 개혁파 교사들의 글들을 주의 한다면, 유니우스가 위에서 설명한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베자의 말들을 통해서도 동일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우리에게 소개된다. 따라서 원인들의 순서상 부패가 하나님의 뜻에 앞서 간다. 그러나 부패 앞에 거룩하고 의로운 상태의 창조가 있다. 그래서 하나의 길이 하나님께 열린다. etc."


(다시 트리그란드는 말한다) "... 그래서 나는 이 견해[타락후 선택설]와 저 견해[타락전 선택설]에 어떤 차이를 볼 수 없다.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타락 전으로 가며 예정 또는 미리 정하심(voorverdrdineering)이라는 말을 좀더 넓 은 의미로 사용한다. 즉 [이들은 예정을] 곧 인간의 구원과 저주, 거기까지 이르는 모든 수단들에 대한 운영과 순서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작정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이 창조 뿐 아니라 타락을 허용하는 것, 어떤 이들은 다시 일으키고 어떤 이들은 내버려두는 것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전자는 타락 아래 머물고 예정이란 단어를 좀 더 좁은 의미로 사용한다. 그래서 이들은 인간의 창조와 타락을 허용하고 제어하는 것을 예정에 넣지 않고, 하나님의 일반 섭리 속에 둔다. 여기서 이러한 차이가 교리 자체 보다는 그 교리에 대한 설명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B. 다음으로 그 차이는 신적 작정의 다양한 부분들을 연결하는 방식에 있다. 옛 타락 전 선택설은 적어도 인간 타락 허용이 창조와 함께 하나님의 작정 아래 있고, 그것의 가장 높은 목적은 그분의 의와 긍휼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타락 허용이 수단으로 나타난다. 자체로 형벌을 위한 수단이 아닌 하나님의 의와 긍휼을 계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다. 타락 후 선택설은 이런 의미에서 수단과 목적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들도 타락이 허용된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제한 이상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은 어떻게 타락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작정의 여러 부분들이 분리된 채 옆에 높여 있게 된다.


C. 마지막으로 그 차이는 예정의 개인적이고 구별적인 특성이 어디까지 확장되느냐에 있다. 특히 선택의 경우, 창조와 타락의 작정까지 포함하는가 하는 것이다. 옛 타락 전 선택설은 하나님이 이미 자신의 작정 안에서 택자들을 그의 인격적 사랑을 받는 자들로 보신다고 가르쳤다. 타락을 허용하는 작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작정(Gods raadsbesluit)에서 택자들이 하나님과 이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 밖에 있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다. 이에 반해 타락 후 선택설은 인격적 관계와 구별은 창조와 타락의 작정 후에야 비로소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두 작정들(twee besluiten)에서 택자들은 인간이라는 일반 집단(algemeene massa der menschen)에 포함되어 있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서 하나님이 인간을 예정 안에서 아직 창조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그리고 타락해야 할 존재creatiblis et labilis)로 보시는가 아니면 창조되고 그 후 타락할 존재(creatus et lapsus)로 보시는가 하는 질문은 단지 이 차이를 표시하기 위한 짧은 문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창조될 그리고 타락할 존재(creandus er lapsurus; to be creadted and to be fallen)라는 말이 타락전 선택설적 느낌을 더 잘 살리는데 더 나을 수 있다. 왜냐하면 창조되어야 하고 타락해야 할 존재(creatblise labils)라는 말은 마치 죄가 전혀 인식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창조 될"(uullende geschapen)과 "타락할"(zullende vallen)은 어떻게 죄가 실제로 고려되었는지 감지할 수 있게 한다.



5.6.7.2 타락 전 선택설


66. 어떻게 다양한 타락 전 선택론자들을 더 세밀하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옛 타락 전 선택론자들은 예정(선택)이 처음부터 인격적이었다고 가르쳤다. 이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런 이런 특정한 인물들을 자신의 택자요 사랑받는 자로 보고 창조할 것을 결정하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것을 염두에 두시며 타락을 허용하셨다. 이에 반해, 후대 [타락 전 선택론자들은] 작정을 처음부터 조금 덜 인격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예를 들어, 마스트리히트(Petrus van Mastricht; 1630-1706)가 있다. 그는 다음 4가지를 구분한다:


1) 자신의 긍휼과 보복하는 의를 계시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 이것은 인격적인 것이 아니다.


2) 모든 인간을 오직 하나의 공통의 뿌리 안에서 창조하고 그 하나의 뿌리 안에서 타락하도록 하는 뜻. 이것 또한 인격적이지 않다.


3) 이렇게 창조되고 타락한 인류로부터 몇몇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고 몇몇 특정한 사람들을 버리려는 뜻.


4) 이 후자의 작정[유기]을 실행하기 위해 적합한 수단들과 방법들을 준비하려는 뜻. 이것은 인류의 두 부분에 대한 타락 전선택설이지 특정한 인물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67. 알렉산더 콤리(Alexander Comrie: 1706-1774)가 "관용 개념에 대한 연구"에서 가르친 타락전 선택설의 독특한 점은 무엇인가?


죄는 우연히 이중 예정 사상의 전환점(donga ngspunt)이 되었는데, 이때 이중 예정은 죄보다 앞서 있고, 죄에 앞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본래 어떤 사람들은 위대한 축복으로, 다른 사람들은 축복 밖의 자연 상태로(그러나 죄를 허용한 것은 아니다) 예정하셨다. 전자는 그들의 초월적 복락의 상태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의 제 2위께서 인간 본성을 취하고, 그 인성 안에서 그들과 가장 밀접하게 연합했기 때문이다. 후자는 이 연합 밖에 머물 것이었다. 이것이 예정에 관한 하나님 작정의 정점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죄를 허용하여 그 죄가 이 두 그룹을 붙잡도록 하는 작정이 등장한다. 이것은 택자들의 예정은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이 구원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변화된다. 그래서 단순한 영광은, 그것에 선행하는 구속 후에 영광으로 대치된다. 동시에 비택자들의 예정도, 작정이 그들의 자연적 상태에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죄와 멸망에 남겨 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뀐다.


68. 이 견해에 대한 반론은 무엇인가?


1) 이 견해는 예정을 처음에 구속과 분리된 것으로 생각한다. 반면 성경은 예정을 항상 구속과 관련시킨다. 예정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그릇(bestel)은 구속이 주어질 그릇 곧 "자비의 그릇"이다.


2)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죄 밖에 옮겨 놓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 점에서 최근의 많은 새로운 견해들과 일치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견해들은 전혀 다른 기원을 갖는다.


3) 이 견해는 어떤 초월적인 것을 자연에 죄와 관계 없이 더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꾀림찍하게도 로마교의 입장을 상기시킨다.


69. 마스트리히트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한 반론은 무엇인가?


마스트리히트는 예정을 본래 인격적이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따라서 예정에서 실제적이고 위로적 요소를 제거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정을] 항상 인격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성경에 따르면, 선택의 첫번째 행위가 이미 인격적 사랑(= "미리 아심")이다.


70. 타락 전 선택설에 대한 논리적 반론이 결정적인가?


그렇지 않다.


1) 왜냐하면 이러한 추상적 문제는 항상 반론의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완전한 설명을 할 수 없다.


2) 또 타락 전 선택설의 경우, 예정의 대상이 비존재(non-ensniet wezen)라는 반론은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작정 안의 지식 부분은 비존재가 아니다. 비존재인 것은 오직 의지적 행위와 관련된 것들이다. 그래서 이 추론[예정의 대상이 비존재다]을 확대하면, 하나님은 결코 창조의 작정을 할 수 없게 된다.


71. 타락 전 선택설은 엄청난 어려움으로 이끌지는 않는가?


이것은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또한 이 어려움이 하나님의 작정 교리 자체에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타락 전 선택설에 분명하게 드러날 뿐이다. 예를 들어, 타락 전 선택설은 하나님이 자신의 의의 영광을 위해 어떤 인물들에게 죄에 빠지고, 구원 받지 못할 것을 허용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인간이 죄에 빠지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은 타락 후 선택설자도 말한다. 그러면 타락 전 선택설자들이 "[하나님] 자신의 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했을 때, 그렇게 가혹한 것인가? 어떤 가혹한 것이 하나님의 의의 광채가 강화됨으로써 더 가혹하게 되는가?


72. 우리는 이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우리는 할 수도 없고 시험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그것이 엄격하게 의롭지만 폭군적인 임의성은 아니라는 입장에 확고하게 서 있듯이, 이것은 확고하게 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행동에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개념 기준을 제시할 어떤 권리도 없다. 이것은 그분 모든 것의 중심이요, 모든 것의 최고선으로서,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영광 아래 종속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다.


73. 중보자는 선택의 작정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논리적으로 죄 이후에 온다. 중보자로서 그는 보증이다. 보증은 지불되어야 할 죄책을 전제한다. 또한 죄책은 죄를 전제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죄가 이미 있는 곳에서만 등장할 수 있다(위에서 인용한 트리그란트의 글을 보라; cf. Q. 65,5A), 따라서 그리스도는 논리상 죄 뒤에 와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를 인간이 무죄한 상태에 있었을지라도 인간 본성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인간본성의 중보자로 생각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콤리처럼 죄와 상관없는 성육신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러나 이 독특한 생각은 타락 전 선택설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타락 전 선택설이 다른 사상들과 연결된 데에 있다. 타락 전 선택설과 다른 교리 사이에 논리적 연결점(nextus causals)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구원에 관한 다른 모든 교리들은 죄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만을 생각해도 알 수 있다.



5.6.7.3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 논쟁의 역사


74.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 사이 논쟁을 역사적으로 개관하시오.


어거스틴은 처음으로 예정 교리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당시 그는 타락 후 선택설을 지지했다. 왜냐하면 타락을 하나님의 예지(voorwetenschap)로부터 끌어냈기 때문이다. 후대 사람들은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타락-위-선택설 용어(Supra-lapsarischen term)로 소개했다. 장로 루키두스(Lucidus)가 이렇게 했는데, 이 주장은 철회되어야 한다. 중세에 수도사 곳샬크(Gottschalk), 브라드바르디나의 토마스(Thomas van Bradwardina) 등이 타락 전 선택설의 지지자로 등장했다.


칼빈에 대해서는 논쟁이 없지 않다. 그러나 진실은 그가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 후 선택설로 들리는 그의 말들이 부분적으로 사후에 그의 견해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그의 명확한 타락 전 선택설적 주장을 약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기독교강요 제 3권 23장 전체를 보자. 거기서 그는 예정을 다루면서 타락과 타락에 대한 작정에 관하여 자세히 언급한다. 나아가 다음을 참조하라(Opera IX, 713):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 인류 전체와 함께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하고자 할지 확정하신다. 하나님의 이 숨겨진 작정을 통해 아담이 그 자연적 의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타락으로 그의 모든 후손들을 자신과 함께 영원한 죽음이라는 죄책으로 끌어들이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와 같은 표현들이 [칼빈의 글에는 수없이] 많다. 마지막으로 칼빈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창조하셨다"(God heeft ons geschapen om ons te verlossen)고 선언한다.


칼빈 이후 개혁파 신학자들 중 타락 전 선택설 지지자들은 다음과 같다: 베자(Theodorus Beza: 1519-1605), 피터 버밀리(Petrus Martyr Vermigli: 1499-1562), 마르로가두스(Augustine Marlorati: 1506-1563), 휘태커(W. Whitaker: 1548-1595), 페리우스(Femus), 장키우스(Hieronymus Zanchius: 1516-1590), 퍼킨스(willian Perkins: 1558-1602),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 1563-1641), 마코비우스(Juohannes Maccovius: 1588-1644); 부분적으로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유니우스도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75. 도르트 회의는 이것을 어떻게 말하는가?


도르트 공의회는 타락 후 선택설 적 관점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타락 전 선택설을 정죄할 의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타락 후 선택설자들은 결코 타락 전 선택자들이 어떤 점에서 옳지 않은지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이가 이것을 주장한다면, 그는 죄를 허용할 때 하나님의 의도에 관하여 긍정적인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은 거기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들어가서도 안 된다. 그래서 그는 타락 후 선택설적 입장에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타락 전 선택설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이 사안이 불확실한 상태로 그냥 두어야 하고 침묵하고 넘어가록 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할 수 있을 뿐이다.


도르트 회의가 타락 전 선택설을 정죄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음 5가지를 살펴볼 때 분명하다:


1) 도르트 회의 회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타락 전 선택설자들이었다: 의장 보거만(Johannes Bogernan: 1576-1637)과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 1563-1641), 리디우스(Balthasar Lydius: 1577-1629), 푸치우스(Gisbertus Voetius: 1589-1676), 페스투스 호미우스(Festus Hommius: 1576-1642), 그리고 헬더란트(Gelderland)와 남부 네덜란드 지역에서 온 대표자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타락 전 선택설을 지지했다. 이 모든 사람들이 도르트 신경에 서명했다. 따라서 만일 이들이 타락 전 선택설을 정죄했다면, 이들 모두는 이 서명으로 자신들을 정죄한 셈이 될 것이다.


2) 고마루스는 폴리안더(Johannes Polyander a Kerckhoven: 1568-1646), 뒤시우스(Antonius Thysius: 1565-1640), 발레우스(Antonius Walaeus: 1573-1639의 의견(advies)에 대해서는 항의했지만, 신조 자체에 대하여는 하지 않았다. 첫 번째 사람은 타락 후 선택설을 타락 전 선택설을 배제하는 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생각하고자 했다. 다른 한편으로 고마루스는 타락 전 선택설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문제는 열린 채 두어야 한다고 했다. 신조는 고마루스가 항의했던 교수들의 의견과는 다르게 작성되었다.


3) 도르트 회의에 참석했던 타락 전 선택설자들이 신조에서 그들의 예정론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중 일부는 거기에 있고, 다른 부분은 언급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고마루스도 자신의 예정론이 발레우스나 다른 사람들의 글을 대치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단지 그는 만일 어떤 이가 이 사안을 깊이 생각하고자 할 때, 이것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5.6.7.4 유기에 대한 타락 전 선택설 및 타락 후 선택설의 설명


76. 유기론에 있어 타락 후 선택설과 타락 전 선택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타락 후 선택설에 따르면 유기는 두 가지로 구성된다:


A. 프레테리치오(praetenritio; "지나침"). 죄 중에 있는 어떤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으로 이들에게 구원을 위한 은혜를 베풀지 않는 것이다.

B. 프레뎀나치오(praedamnatio; "정죄"). 이러한 사람들을 그들의 죄 때문에 영원한 멸망에 넘겨주기로 하는 하나님의 작정이다.


타락 전 선택설에 따르면, 유기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A. 죄에 대한 형벌로 하나님의 보복하는 의를 드러내시려고 어떤 사람들을 따로 분리하는 작정이다.

B. 하나님의 작정에서 인간의 타락에 관한 허용이다.

C. 일단 타락한 이런 사람들을 은혜를 베푸시지 않고 그들의죄 때문에 정죄하는 것이다.


따라서 후자[타락 전 선택설]의 의미에서 유기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의로운 작정으로서, 자신에게 알려진 어떤 사람들에게 그분의 형벌하시는 의를 계시하시고, 또 자신들의 과실로 죄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며, 그 후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은혜도 보여주시지 않는 것을 말한다.


77. 타락 후 선택설자들은 어디에서 유기의 원인을 찾아야만 하는가?


이것은 세 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1) 왜 특별히 이이나 저이가 멸망하는가 이유를 묻는다면, 타락 후 선택설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기뻐하심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죄의 결과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담의 모든 후손들도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죄에 종속되도록 하셨으나 그들 모두가 유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 그러면 은혜를 베풀지 않는 원인에 대하여 묻는다면, 타락 후 선택설적인 입장에서 그 대답은 다시 하나님의 주권적 기뻐하심에 이 저지(沮止)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은혜를 주어야 할 의무가 없으시다.


3) 이제, 택지들과 반립을 생각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유기자들이 멸망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타락 후 선택설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 원인은 하나님의 예정에 있지 않고, 인간의 죄에 있다. 만일 죄의 확실성의 근거에 관하여 더 묻는다면, 타락 후 선택설자들은 하나님의 작정에 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다시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를 허용하도록 했는가 질문한다면, 그들은 "나는 거기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 대답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멸망한다. 그 죄의 확실성은 (그것이 실제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작정에 있다. 그러나 타락 후 선택설자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의의 영광을 위해 그들의 죄를 허용하기로 작정한다고 감히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예정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타락 전 선택설자들은 사람이 멸망하는 법적 근거는 그들이 시간 안에서 고의적으로 지은 죄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죄 외에 다른 것으로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죄 자체는 하나님의 작정적 허용 밖에서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이 허용, 곧 하나님의 예정은, 비록 법적 근거는 아니지만, 멸망이라는 실제에 대한 가장 높은 근거이다. 하나님의 작정이 죄가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므로, 당연히 죄는 어 떤 원인도 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그 정당성에 관해서는 탐색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정당한 어떤 다른 근거들을 가지고 있다.



5.6.7.5 예정과 완악하게 함


78. 하나님께서 인간을 완악하게 하시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성경은 이와 관련하여 4가지를 가르친다:


1) 완악하게 함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나 진리와 접촉한 결과이다. 이 계시와 진리를 죄 된 인간은 저항한다. 예를 들어, 바로(출 7:3), 이사야 당시 사람들(사 6; 마 13:11-16);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냄새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cf. 고후 2:16].


2) 또한 완악하게 함은 하나님께서 동시에 성령의 일반 은혜를 거두어 가시고 동시에 죄가 제약받지 않고 발생하여 확산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일어난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님의 실제 행동이 있으나, 다만 소극적인 행동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 안에서 죄를 생성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선으로 이끄는 모든 영향을 거두시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죄 된 마음에 넘겨주심"(롬 1:24, 26), "명예롭지 못한 정신에 넘겨주심"(롬 1:28); "마음의 완악함 대로 내버려 두심"(시 81:12)[60] 등으로 표현한다.


3) 때로 완악하게 함은 비범한 [영적] 비춤을 거부한 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으나, 어떤 거듭나게 하는 은혜가 동반되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를 히 6:4-8에서 찾을 수 있다.


4) 하나님을 통해 완악케 됨은 동시에 자신이 스스로 완악하게 함이라 부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바로의 경우가 있다.



5.6.7.6 예정과 그리스도


그렇지 않다. [만일 그리스도가 선택의 공로적 원인이라면], 그리스도라는 선물이 선택에 선행하고, 따라서 일반적으로 전인류를 위해 정해졌다는 것을 내용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만일 그리스도가 이미 중보자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죄 된 인류에게 예정의 혜택을 베풀었다고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대답한다. 하나님은, 중보자가 이미 있지 않다면, 죄 된 인류에게 중보자의 선물을 베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은 결코 그 목적[지]에 이를 수 없다. 튜레틴은 말한다: "여기서 질문은 그 문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가 작정된 구원의 토대요 공로적 근거인가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가 구원의 작정의 공로적 원인과 토대가 되는가이다. 전자에 관하여는 긍정적으로 대답해야 하고, 후자에 관하여는 부정적으로 대답해야 한다. 사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부터 나와 우리에게 온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은,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과 함께, 하나님의 자유로운 긍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모든 곳에서 그렇게 말한다(고전 1:30)."



출처: 개혁교의학(Reformed Dogmatics), 제 I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