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 Reformation/G.J.Vos,1862

삼위일체론(The Trinity) 1 -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Bavinck Byeon 2018. 9. 18. 14:24


삼위일체론(The Trinity) 1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3.1 삼위일체 서론


3.1.1. 구약학에 나타난 삼위일체 흔적


1. 우리는 왜 구약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엄밀한 증거를 찾을 수 없는가?


1) 왜냐하면 구약 계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단지 준비 중이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것을 종말에 가서야 온다.


2) 구약 시대에는 온갖 다신론적인 경향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유일성이라는 개념이 이스라엘의 의식 속에 깊이 새겨져야만 했다.


3) 우리는 구약 성도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우리가 신약의 빛 아래 읽는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성령께서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지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구약 성경을 단지 그 때를 위하여 뿐만 아니라 현재를 위하여도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약에서 삼위일체에 관한 어떤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가?


1) 엘로힘과 여호와라는 이름의 차이. 엘로힘은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 중에 나아가 이방인 가운데서도 창조와 섭리[92]를 통해 일하시는 분을 가리킨다. 여호와는 하나님으로서 신정적 인도하심과 계시로 자신을 알리신 분을 가리킨다(cf. 창 1:3; 2:4).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신 곳에서 다른 이름을 알리신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다른 곳에서보다 더 알게하실 뿐 아니라 다른 존재로서도 알리시려는 것이다.


2) 엘로힘(cf. 엘로하)이라는 칭호의 복수 형태. 피터 롬바르두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형태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어떤 증거를 찾곤 했다. 예를 들어 루터가 있다. 칼빈은 아니었다. 엘로힘은 아버지와 아들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시 45:8). 나아가 사람과 우상의 명칭으로도 나타나기도 한다(출 22:8. 삼상 28:13). 이 명칭이 복수형인 것은 강조하기 위함이다. 마치 "하늘들"과 "물들" 이 확장적 함의가 있는 것과 같다. 이 명칭의 복수형은 하나님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만성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단어 자체보다 더 깊은 의미로서 장엄함의 복수인 것이다.[93]


3) "주의 천사"(מלאך יהוה) 개념.


"주의 천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가설들이 있다:


A. 주의 천사란 어떤 유한한 영으로서 피조된 천사를 말한다. 어거스틴, 제롬, 그리고 현대에 와서 쿠어츠(Johann Heinrich Kurtz; 1779-1853)와 델리취(Franz Julius Delitzsch; 1813-1890) 등이 그렇게 생각했다.[94] 이들에 따르면, 이 천사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을 보낸 자의 인격으로부터(ex persona) 말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낸자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절(使節; de bode)이 자신을 보낸 자에게 합당한 종교적 경배를 받을 수 있겠는가?(삿 6:11; 18:22, 23).


B. 주의 천사는 말씀(로고스)로서 삼위일체의 제 2 위격이다.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 후대에 루터파 교의학자들과 개혁파 교의학자들, (칼빈은 어떤 부분에서는 확실치 않으나 A 견해를 택하는 것 같다), 행스턴베르그가 이런 견해를 가졌다. 어떤  사람들은 로고스가 자신을 다른 피조된 존재와 인격적으로 일정시간 결합했다고 생각한다.


C. [또 다른 견해로에 따르면] 주의 천사는 어떤 인격체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비인격적 나타남으로 하나님이 순식간에 가시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나타낸다. 천사(말라아크;מלאך)를 어떤 추상적인 독립 명사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번째 견해를 받는다. 왜냐하면 이 견해만이 성경의 모든 데이터들을 옳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또한 주의해야 한다:


a. 성경은 사람들에게 주의 천사가 나타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천사를] 삼위일체 교의가 가르치는 것과 분명히 구별되는 그런 개념을 갖지 않았다.[95]


b. 천사, 곧 사절 [보냄 받은 자]은 피조된 존재가 아니요 영원한 로고스이다. 그러나 로고스가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 취하는 가시적 모습은 피조물에 속한다. 그는 자신이 취한 모습과 자신을 동일시 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로고스가 후에 그가 취하신 인간 본성과 자신을 하나되게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 견해를 지지해주는 근거들은 다음과 같다:


α. [주의] 천사는 하나님의 권위로 말한다(창 31:11-13).

β. 그는 하나님으로 불리운다(창 16:13).

γ. 그는 신적 사역을 실행한다(출 23:20).

δ. 그는 신적 속성을 소유하고 있다(창 16:8).[96]

ε. 그는 자신에게 신적 영예를 표하게 한다(수 5:14).

ζ. 그는 피조된 천사와 구별된다. 출 33:2; 33:14[97]에서 "나의 얼굴"이라는 천사는 다른 일반 천사와 구별된다(사 63:9; 신 4:37).

η. 그의 이름은 여호와의 이름과 함께 교대로 나타난다(슥 12:8).


4) 호크마(지혜; חָכמָה) 개념. 이 개념은 잠언 8:22 이하, 욥 28:12 이하에서 등장한다. 여기서 지혜는 의인화되어 하나님-자신에 대하여 대상화되지만, 그분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 지혜[98]는 하나님의 생각의 상(beeld)이요, 자신의 내적 존재의 완벽한 형상으로서, 그분 안에도 그분 밖에도 동시에 존재한다. 요한복음의 서문은 로고스에 관해 이와 같은 것들을 말한다.


5)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에 또한 신적 속성들을 돌린다. 예를 들어, 시 33:4; 사 40:8; 시 119:105 등이 있다.


6) 구약은 등장하는 하나님의 영에 관한 가르침. 성령은 세계의 자연적, 지적, 이성적 사람의 원리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의식적 내재(de zelfbewuste immanentie Gods)를 표현한다. 또한 계시의 영이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몇몇 믿는 자들 안에 거주하시는 영이다(cf. 시 51:13; 143:10). 성령은 객관적으로 하나님과 마주하고 있는 인격으로 등장한다(사 63:10; 48:16).


7)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복수로 말씀하시는 곳들. 교회는 계속해서 이 구절들이 삼위일체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는 견해를 견지했다. 다른 견해도 없지 않다:


A. 이것은 장엄 복수(pluralis majestaties)로서 동방 통치자들이 자신에 관하여 사용하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런 예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비교적 후대에 등장할 따름이다(참 20:15; cf. 스 6:8).[99]


B. 이것은 소통 복수(pluralis communications)로서 이것으로 하나님은 자신과 천사들을 총칭하신다(cf. 사 6:8). 필로나 현대에 델리취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창 1:26은 천사들이 창조시 어떤 일에 참여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C. 이것은 자아생성 복수(pluralis der zelf-opwekking)로서 어떤 주체가 자신을 객체로 보고 부르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여기서 일-다-성(eenerveelheid)이 출현한다. 힛치히(Ferdinand Hitzig; 1807-1875)가 이렇게 생각했으나 근거가 없다(cf. 창 2:18; 시 12:5).


8) 구약에서 한 인격 이상이 명백히 언급되고 있는 곳들(시 45:8; 110:8). 첫 번째 구절[시 45:8]은 히 1:9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9) 심지어 세 인격들이 언급된 곳들(민 6:24, 26; cf. 고후 13:13; 시 33:6; 사 61:1, 63:9, 10).



3.1.2 신약의 삼위일체 이해


3. 우리는 신약으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삼위일체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가?


다음 사항을 증명해야만 할 것이다:


1)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 칭하는 세 구별된 위격들을 하나님이라 부르며,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는 것.


3) 이런 이유로 셋성 안에 일성(eenheid in drieheid)이 존재하고 일성 안에 셋성(drieheid in eenheid)이 존재한다는 것.


4. 세 위격을 함께 언급하고 있는 신약 텍스트는 어떤 것인가?


눅 1:35; 3:21; 마 28:19; 고후 13:13; 고전 12:4-6; 벧전 1:2. 무엇보다 요한복음 14-16에 있는 주님의 가르침은 삼위일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5. 어떤 두 측면이 삼위일체 논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가?


아들의 신성과 성령의 인격성이다. 반면, 아들의 인격성과 성령의 신성은 너무나 확실해서 이를 증명할 필요가 거의 없다.


6. 신약 어딘가에 삼위일체를 완전히 정리하여 가르쳐주고 있는 곳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다른 교의와 마찬가지로 이 또한 성령의 인도 아래 교회가 받았다. 교회는 성경 전체에 흩어진 정보들을 수집하여 이 교의를 천천히 또 갖가지 오류를 대항하면서 작성하였다.



3.2 교부들의 삼위일체 이해


7. "삼위일체"(Triniteit)란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누구인가?


"삼위일체"의 라틴어 형태는 터툴리안에게서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그는 "한 신적 본질의 셋성"(Trinitas Unius Divinitatis)을 말하였다.[100] 그러나 터툴리안 이전에 이미 이와 관련된 그리스어 용어들이 있었다. 시리아 안디옥의 주교 테오필루스는 하나님의 셋성(ὴ τριας τοῦ θεοῦ)을 말했는데, 그 때가 기원 후 2세기 후반이었다.


8. 동방교회에서 삼위일체 교의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누구인가?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와 위대한 갑파도기아 교부들이다. 그러나 아폴리나리스의 경우, 기독론은 이단이었다.


9. 서방에서 삼위일체 교리 정립에 가장 많이 공헌한 이는 누구인가?


터툴리안이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많은 부분 분명치 않다. 예를 들어, 그는 아들과 성령을 단지 창조를 위하여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이들로 본다. 또 아들과 성령은 신성의 전본질(de geheele substantie der Godheid)을  소유하지 않았고, 단지 아버지에 "일부" 또는 "부분"이 종속되어 있다는 주장 등이 있다.


10. 터툴리안과 갑바도기아 교부들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가?


니케아 회의와 콘스탄티노플 공회이다. 여기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다. 거기서 채택된 신조(Symbol)는 또한 우리 고백서 제9항[101]에도 들어왔다. 그러므로 이 신조는 삼위일체 교의 문구로서 우리에게도 구속력이 있다.


11. 이 신조 내용은 무엇인가?[102]


(후대의 수정을 제외한) 니케아 [신경] 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만드신 창조자를 믿는다. 또한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서 아버지로부터 나신 자, 곧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신 이요,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요,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이시요, 나셨으나 창조되지 않고, 아버지와 '동일본질'(Omoousios)이신 분을 믿는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이 다 그를 통해 지은 바 되었고,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의 보존을 위해 내려오셔서 육체가 되었고, 사람이 되셨으며, 고난 받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고, 하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오실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이 [신앙]에 대항하여 '그는 나시기 전에,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는 나시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되신 것이 아니다 또는 그는 다른 실체(substantie)나 본질(wezen)로 존재하지(또는 창조되지) 않는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은 변한다 또는 변동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του̉ς)을 공교회(사도적 교회)는 저주한다."[103]


12. 당신은 어떻게 정통 삼위일체 가르침을 표현할 수 있는가?


1) 오직 하나의 신적 본질이 존재한다. 성경은 모든 다신론을 단호하게 거부한다.(신 6:4; 사 44:6; 약 2:19).


2) 이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존재 방식들(bestandswijzen)[104]이 있는데, 이를 위격(person)이라 부른다. 이들 각각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이 세 위격을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 한다.


3) 이 세 위격은 모두 유일한 참 하나님이시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구별된다: 즉 세 위격은 서로 객체적 관계를 맺으시고, 서로에게 말씀하시며, 사랑하시며,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4) 이 세 위격은 하나의 동일한 신적 본질을 소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위격적 존재에 관해서는, 아버지가 첫 번째이시고, 아들은 두 번째, 성령은 세 번째라고 가르친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일하시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통해 일하시므로, 외적 사역에서는 이 위격적 존재의 순서가 반영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위격적 존재 방식과 사역 방식에 있어서는 모종의 종속이 존재한다. 그러나 동일한 신적 본질의 소유와 관련하여서는 어떤 종속도 존재하지 않는다.


5) 신적 본질은 세 위격에 배분되어, 그들 각각이 1/3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세 위격 옆에 또 하나의 새로운 독립적 존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유명론적으로 우리 생각을 추상화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어떤 유비도 찾을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각 위격들이 완전한 신적 본질을 소유한다.


13. 니케아 신조와 방금 전 제시된 정의[105]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점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1) 우선 니케아 교부들이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라는 용어를 아들이 한 본질에 속한다(eenswezens)는 뜻으로, 곧 아버지와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졌다는 의미로 사용했는가 의문이 있다. 계속해서 심지어 최근에도, "호모우시오스"는 "비슷한 종류의"(gelijk soortig)라는 뜻 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A. 니케아 교부들이 [호모우시오스라는 말로]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gelijkwezen)이라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아리우스주의자들의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106]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 말[호모이우시오스]이 바로 "비슷한 종류의"(gelijksoortig)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표현을 거부했다.


B. 니케아 신조는 분명하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


C. 만일 이 말이 종동질성(種同質性; Soortgelijkheid) 외에 다른 의미가 아니고, 그러면서도 아들이 하나님이라면, 그러면 삼신론, 곧 세 신들이 존재한다는 사상으로 빠질 수 있다.


2) 나아가 니케아 신조가 아들은 단지 자신의 위격적 존재를 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신성을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의심하곤 했다. 실제로 이러한 뜻으로 설명할 수도 있는 표현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셨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하나님이시요, 빛으로부터 난 빛이시다"는 표현이다. 이 점에서 [니케아] 신조 작성자들이 아직 완전히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래서 이미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신적 본질 내에서' 나셨고 내쉬어졌다(gegenereerd en gespireerd)"와 같이 더 조심스럽고 더 적절하게 표현했다: [무엇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어거스틴에게 영예가 돌아가야 한다. 그는 성경에 근거하여, 본질과 관련하여 종속성을 내포하는 요소를 삼위일체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위험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3.3 삼위일체 용어; 경륜과의 관계, 유비, 본질의 인격성


14. 신학자들이 [과거에] 삼위일체론 정립시 사용했고 또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중요한 용어들에 대하여 서술하시오.


1) 우선 우시아(ου̉σια; "본질")와 휘포스타시스(ύπόστασις; "실체")라는 단어들이 있다. 우시아는 추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존재로서, 이는 세 위격들에 공통적인 것이다. 반면, 휘포스타시스는 이 본질의 위격적 존재방식으로서, 우리는 이것을 위(位; 페르손; persoon)라 부른다. 이 두 명칭은 모두 그리스 철학에서 온 것이다. 우시아는 플라톤 철학 용어이고, 휘포스타시스는 스토아 철학 용어이다. 후자는 본래 "자립성"(zelfstandigheid)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한 동안 이 용어를 사용하여 우시아와 동일한 것을 표현하는데 사용할 수 있었다. 이후에 [휘포스타시스는 우시아보다는] 페르손(Persoon)의 의미를 더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일 순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큰 혼란이 초래되었는데, 사람들은 신성 안에 동시에 한 휘포타제(een Hypotase)[107]가 있다는 말과 세 휘포타젠(drie Hypotasen)[108]이 있는 것과 같은 같은 주장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다른 그리스어 단어는 퓌시스(ψῦσιζ; "본성")이다. 이 단어 역시 위격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리키곤 했다. 그러나 사실상 퓌시스와 우시아는 같은 것은 아니다. 우시아는 추상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존재이고, 퓌시스는 아버지, 아들, 성령, 즉 신적 본질에 고유한 속성들의 총체(inbegrip)를 뜻한다. 그러나 속성들은 본질과 불가분리로 결합되어 있다.


3) 또 다른 그리스어 단어는 프로소폰(πρόσωπον)이다. 이것은 본래 "얼굴", "마스크"를 뜻한다. 동일한 의미를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가 표현하는데, 이 단어로부터 우리 화란어 페르순(persoon)이 왔다. 이것 또한 본래 "마스크"와 같은 뜻이었다. 이단이었던 사벨리안주의자들은 단지 계시된 삼위일체(eene openbarings-drieeenheid)[109]만을 알려고 했다. 자연히 그들은 그들의 견해를 도입하기 위해 이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 이에 따라 정통교회는 그 단어를 삼가도록 했다. 따라서 동방 그리스 교회 사람들은 "페르손"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처음에는 프로소폰을 사용했으나, [사벨리안 이단과 차별을 위해] 위에서 언급한 "휘포스타시스"를 사용하게 된다.


4) 서방 라틴 교회들 역시 처음에 모호하지 않은 명칭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이 찾은] 두 라틴어 단어는 숩스탄치아(substantia)와 숩시스탄치아(subsistentia)였다. 어떤 때는 둘 다 본질을 위해, 어떤 때는 둘 다 위격을 위해, 또 어떤 때는 하나는 볼질을, 다른 하나는 위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A. 숩스탄치(substantie)는 더 이상 하나님[의 본질]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숩스탄치의 반립개념은 악시덴치(accidentie; "우연성")이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숩스탄치라 부름으로써 그분 안에도 역시 우연성(toevalligheid)이 존재한다는 인상을 주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B. 이 단어를 버리고, 대신 더 정제된 용어인 에센치(essentie; "존재, 본질")를 사용했는데, 그리스어 우시아(ousia)에 해당한다.


C. 하나님의 본성, 곧 본질의 속성들의 총체(inbegrip)를 라틴어로 "나투라"(natura)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리스어 퓌시스(physis)에 해당한다.


D. 숩스탄치아(substantia)라는 단어는 계속해서 사용되는데, 이 단어를 통해 위격적 존재방식을 가리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용어가 뜻하는 것은 위락 위격(persoo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동일한 것을 수포지툼(suppositum)이라고도 말하는데, 이 용어는 그리스 단어 휘포스타시스(hypostasis)와 휘포케이메논(hypokeimenon; ύποxεῖμενον)에 대한 번역이다.


5) 고대인들은 또한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 또는 엔휘파르시스(ένῦπαρξιζ)를 말했다. 이것은 라틴어로는 키르쿰세시오(circumcessio) 또는 인엑시스텐시아 무투아(inexistentia mutua)인데, "상호적으로 서로 안에 있음"(wederzijdisch inzijn)을 뜻한다. 그들은 이 용어로서 신성의 위격들이 서로 안에 상호적으로 내재한다는 점을 말하려고 했다(요 14:20; 17:21,[110]; 고전 2:10, 11), 이것은 신성 안에 일종의 내향적 순환(een soort inwendige circumlatje der Godheid) 곧 하나님의 본질 안에 어떤 영원한 운동이 있음을 나타낸다.[111]


6)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그들의 위격적 특성(character hypostasius 또는 personalis, 그리스어τρόπος ύπάρξεως)으로 구별된다. 이 위격적인 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이름 안에 나타나는 것으로 세 위격들의 고유한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한 위격에만 고유한 것으로 공유될 수 없다. 이것은 각  위격들을 서로 구별한다. 아버지에게 고유한 것은, 그가 아들을 낳는 것에 있고(그가 성령을 내쉼으로서 나가게 하는 것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아들과 공동으로 하기 때문이다); 아들의 경우는 그가 아버지를 통해 나시는 것에 있다; 성령의 경우는 그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밖으로 내쉬어지는 것에 있다.


7) 위격들과 본질 사이의 관계와 어떻게 위격을 본질로부터 구별하는지 정통 교회에 완전한 의견 일치가 없다. 여기서 두 극단들을 멀리해야 한다: [첫째는] 사벨리안주의이다. 이들은 오직 한 위격만을 인정하려고 했다. 이 위격이 자신을 세 형태로 계시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삼신론이다. 이 사상은 세 위격을 본질의 하나됨 안에서 파악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둘의 중간 입장을 취한다. 이들에 따르면, 위격들은 본질로부터 구별되기는 하나 "양태적으로"(modaliter: "양식을 따라") 구별된다. 즉 관념상 본질과 어떤 존재방식을 가진 특정한 양태상 본질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실제적으로는[realiter] 구별되지 않는다. 다만 형식적[formaliter] 또는 단순히 이성적으로[ratione] 구별된다). 마스트리히트는 "만일 이 스콜라주의적 언어방식[112]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면, 성경이 말하는대로 단순하게 위격들은 셋으로 구별된다고 믿으면 되고 어떤 방식으로 구별이 되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고백하면 된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와 같은 것을 계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위격들이 초자연적으로 곧 자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구별되기 때문이다."


8) 또한 이 개념[위격]과 휘포스타시스, 숩시스텐시아, 수포지툼 등 명칭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전혀 의견의 일치가 없다. 칼빈은 페르손(persoon)이라는 용어가 단지 보조개념인 것을 인정하지만, 이 용어 사용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소시누스주의자들, 항론파들, 재세례파들, 데카르트주의자들, 심지어 코케이우스까지도 논쟁을 벌였다. 초기에는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페르손이란 신적 존재 자체로서, 이 존재는 분명한 독립적 성격과 고유한 존재 방식을 통해 구별된다". [그런데] 그 후에 이 정의에 좀 더 세부적인 것들이 추가되었다. 옛 교의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될 수 있는 정의는 멜랑히톤을 거쳐 부시우스로 소급하는데, 다음과 같다: "페르손이란 분할되지 않고, 지성을 갖처었으며, 공유되지 않는 독립성으로서, 다른 본성을 통해 유지되지도, 어떤 다른 것의 일부도 아니다."


이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우선 페르손에 관한 신학적 정의가 충족시켜야 할 요구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A. 페르손과 하나님 본질의 하나됨을 어떤 식으로든 분리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페르손이란 어떤 다른 본성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이것은 삼위일체의 위격들을 제외시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위격들은 스스로는 존재하지 않고 신적 본성 안에 있다.


B. 페르손은 그 자체 안에 신적 그리고 인간적 인격성에 공통적인 어떤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기독론에서 바로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이 하나님의 공의로 선택받은 택자들의 인간적 인격을 대표한다. 만일 어떤 점에도 [이 둘 사이에] 동질성(同質性; gelijkheid)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


C. 페르손은 [삼위일체론에서 그 자체 개념이] 너무나 크게 재형성되어 있어서 중보자의 인간 본성에 인간 페르손이 결여된 것까지도 허용한다.[113] 그러나 만일 내가 "페르손이란 자의식과 자기결정("자유 의지")을 가진 어던 존재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러면 구세주의 인성이 그 안에 포함될 것이다.


이제 이 세 조건을 동시에 만족하는 정의를 찾는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페르손이란 분할되지 않고, 지성적이며, 공유되지 않는 독립성이다. 다른 인격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활동 원리를 지닌다". 좀 더 단순하게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페르손이란 어떤 특정한 존재방식 안에 있는 신적 존재이다. 그리고 이 특정한 존재방식으로 그 존재와 다른 위격들은 구별된다. Cf. 이 점에 대하여는 기독론을 더 참도하라.[114]


9) 삼위일체 위격들이 서로 구별되어 존재하도록 하는 행위들을 "내적 사역"(opera ad intra)라 부른다. 이것은 위격들의 활동으로서 모든 위격들에 공통이 아니며, [따라서] 공유하지 않는다. 이러한 행위들은 성부의 '나게 하심'과 '내쉼', 성자의 '남'과 '내쉼' 그리고 성령의 '내쉬어짐'이다. 이런 사역은 [방금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나누인 사역"(opera divisa)이라고 부른다.


10) 다른 한편으로 "내적 사역"과 대비되는 "외적 사역"(opera ad extra)이 있다. 이 사역들은 서로 나뉘지 않으며 [삼위일체] 모두가 참여한다(창 1:26; 요 5:17, 19).


A. 외적 사역을 실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인데, 이 능력은 그분의 속성으로서 그분의 본질에 속한다.


B. 하나님의 경륜(經倫; oeconomie) 또는 섭리(摄理; huishouding) 내에서[115] 각 위격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임무가 있다. 따라서 성부는 창조를, 성자는 구속을 맡는다. 그럼에도 세 위격이 어떤 의미에서 함께 일한다. 즉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통해 일하시고, 성자는 그들을 통해 일하신다.[116]


C.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경륜 즉 구원경륜 안에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법적 유대 속에서(in eeme rehterlijke gemeenschap) 일하신다. 법적으로 각 위격 모두에게 관련되어 있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것도 행해지지 않는다. 성부는 손상된 [자신의 또는 하나님의 지고한] 거룩성을 위해 일하시고 심판자로서 분노하시나, 동시에 그의 아버지 같은 마음 깊은 곳에서는 구속할 생각이 솟아난다. 또 성부는 성자를 중보자로, 성령을 구원을 적용하는 자로 정하신다. 성자는 그 중보자 사역을 실행하신다. 즉 성자는 성부께서 정하신 직분을 수행하고 성령을 통해 자신의 공로를 [신자들에게] 적용시키신다. 성령은 택자들의 마음에서 일하신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를 위하여 행하신다.


D. 이 사역의 순서는 우리에게 [삼위일체 각 위의] 존재 순서를 소급하여 알려준다. 성부는 제 1위격이시다. 바로 그 때문에 구원 계획과 일반 외적 사역에서 그 [제 1] 위치를 차지한다. 성자는 제 2위격이시다. 바르 그 이유로 [위] 두 측면[구원 계획과 일반 외적 사역]에서 그 맡은 직분의 자리를 차지하신다. 성령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5. 어떤 이유로 이 하나님의 경영에 관한 가르침(leer van de huishouding Gods)이 중요한가?


왜냐하면 이것은 범신론뿐만 아니라 이신론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고, 이신론은 하나님을 세계로부터 분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계 뒤에 계신 무의식적인 배경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는 의식적 구별의 충만이 있다. 나아가 하나님은 그분이 지으신 세계로부터 어떤 거리를 두고 계시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창조주이시면서 동시에 지탱자이시고, 구속자이면서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며, 모든 존재와 모든 생명의 근원자로서 세계 내에 현존하신다.


16.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 영역에서 유비를 끌어와 사용한 사람이 있었는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일찍부터 그렇게 하였다:


1) 많은 교부들이 물리적인 것들[117]로부터 유비를 찾았다.


2) 무엇보다 어거스틴은 인간 영혼 안에서 유비를 찾고 발전시켰다. 그에 따르면, 삼위일체는 인간 영혼 안의 지성과 의지와 감정의 통일성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유비는 우리를 사벨리안주의나 양태론에 빠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 안에서 이 인격의 세 원리들은 하나되는 것이 분명하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대단히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때로 사벨리안주의 경계에서 배회하곤 했다. "세 위격을 말하는 것은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침묵하지 않고자 하기 때문이다". 안셀름과 멜랑히톤, 개혁자들 중 케커만, 또 많은 현대신학자들은 이런 유비로부터 등을 돌렸다.


3)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은 다음 명제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모든 긍정적 관계들은 완전무결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완전한 존재는 자신 안에서 나와야 하고 또 나가게 해야 한다; 나가게 하는 것은 나온 것이 아니다; 나온 것은 아가게 한 것이다. 등등(둔스 스코투스).


4) 또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선함이나 사랑에서 출발한다. 이 같은 견해를 현대에는 뮬러(Juliu Muller; 1801-1878)나 도너(Isaak August Dorner; 1809-0884)에게서 찾을 수 있다. 선함과 사랑은 하나 이상의 인격체 사이에 교제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삼위일체에 도달할 수는 없다. 기껏해야 이위일체를 이를 수 있을 뿐이다.


5) 마지막으로 삼위일체론에 관한 범신론적 오해가 있다. 범신론은 교회-성경적 명칭들을 전혀 새로운 의미와 결합시켜 사용했다. 헤겔(Hegel) 사상구조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성부는 자신으로부터 [나온] 그리고 자신을 위한 자신의 영원한 관념(idee) 안에 있는 하나님이다. 성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관념인데, 이 영원한 관념은 자신과 다른 존재 곧 하나님으로부터 객관화된 것으로서 세계 안에 있다. 성령은 교회의 요소 안에서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관념이다.[118]


17.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독립적 인격으로 생각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되면 네 위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본질이 비인격적인 것은 아니다. 이는 본질이 세 위격들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단지 본질을 위격들로부터 추상화할 때, 그것이 인격적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3.4 삼위일체론적 두 이단 [양태론, 삼신론] 반박


18.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적 가르침으로 벗어난 두 극단은 무엇인가?[119]


1) 하나는 양태론 또는 사벨리안주의이다. 이 사상은 단지 하나의 신적 위격 외에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 신적 위격이 세 가지 계시 형태를 취한 것이다.


2)다른 하나는 삼신론 또는 세-신들-이론이다. 이것은 위격의 셋이라는 개념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본질의 하나됨을 놓쳐버렸다.


19. 당신은 사벨리안주의를 어떻게 반박하겠는가?


다음 네 가지를 보여줌으로서 반박한다:


1) 성경은 어느 곳 할 것 없이 신적 위격들을 서로 구별한다. 성부는 성자에게, 성자는 성부에게 말한다.


2) 하나님의 경륜(huishouding)이 그분의 구속 계획에서 계시된다. 그런데 이 경륜에서 각 위격들은 서로에 대해 법적 관계속에서 등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관계 속에 있기 위한 적합성(geschiktiheid)[120]과 권한(bevoegdheid)을 갖는다. 만일 위격들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 평화의 작정(Raad des Vredes)[121]에 관해 이야기한다 해도, 그 모든 것이 단지 빈 말에 불과할 것이다.[122]


3) 이 이단은 하나님의 불변성을 부인한다. 이 사실은 위격의 구별을 좀 더 진지하게 고려하지마자 분명해진다. 몇몇 사벨리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한 분이시고 하나의 위격을 가지셨지만, 계시 때문에 자신을 세 위격으로 쪼갰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계 속에서 자기 발전을 이루신다는 범신론적 가르침이다.


4) 사벨리안주의는 중보자의 인성에 관하여 옳은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사벨리안주의 관점에서 중보자는 마치 천사의 현현과 마찬가지로 단지 하나님의 계시 형태일 뿐이다.



출처: 개혁교의학(Reformed Dogmatics), 제 I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