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 Reformation/G.J.Vos,1862

삼위일체론(The Trinity) 3 -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Bavinck Byeon 2018. 9. 18. 14:29


삼위일체론(The Trinity) 3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3.6 성자 하나님


3.6.1 서론: 성자에 대한 주제


29. 다음으로 거룩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과 관련하여 어떤 것들이 다루어져야 하는가?


1) 아들의 위격적 존재 및 그 근거와 방식에 관하여

2) 아들의 신성에 관하여

3) 아들의 경륜적 사역에 관하여(over zijne huishoudelijke betrekking)



3.6.2 아들의 위격적 존재 및 그 근거와 방식에 관하여


3.6.2.1 성자와 성부의 관계


30. 성경은 우리에게 삼위일체 내에서 첫 번째 위격과 두 번째 위격 사이의 관계를 더 정확하게 결정하게 하기 위해 어떤 정보들을 제공하는가?


1)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칭호, 이들 칭호 각각은 서로를 전제한다.

2) "독생자"와 "첫 번째로 나신 자"라는 말(요 1:14, 18; 3:16, 18; 요일 4:9, 골 1:16, 히 1:6).

3)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가르침과 로고스-가르침, 그것과 관련 있어 보이는 그리스도의 명칭들이 있다. 한 예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3)가 있고, 그의 자립성에 관한 분명한 표현이 있는데, 예를 들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 고후 4:4)이다. 나아가 구약에는 "지혜"가 있다.


31.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칭호의 경우, 어떤 것을 주목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이 칭호들의 의미를 때로는 너무 지나치게 때로는 너무 소홀히 두루었다. 지나치게 다룬 경우는, 이 칭호들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본질을 나누어 준다는 주장의 증거로 사용하려는 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너무 소홀히 다룬 경우는, 이 용어들을 단지 비유적으로 생각하고, 두 위격 사이에 어떤 실제적 관계도 표현하지 않는다고 논증하는 것이다.


32.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명칭들 자체는 본질의 나눔(wezensmededeeling)을 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이라.


본질의 나눔을 전제해야 한다면, 인간의 경우, 아들은 그의 본성을 아버지에게서 나누어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유전주의자들이 그렇게 주장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동시에 실제론자일때 뿐이다. 그러나 개혁파 사상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을 지금도 계속하여 창조하신다. 물론 이것을 성자께 적용할 여지가 조금이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창조되지 않았고 나셨다. 따라서 여기서 인정해야 할 점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명칭이 신적 관계와 인간적 관계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 비교점이 본질나눔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33.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은 본질나눔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 본문은 아버지의 생명을 말씀이 성육신 전에 나눠받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중보자에게 있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칼빈이 이 구절을 두 번째 뜻으로 옳게 설명했다. 문맥을 따라 읽어야 한다.


34. 그러면 어떤 경우에 이 명칭들(아버지, 아들)의 뜻을 축소하는가?


이 명칭들을 본질의 하나됨이나 위격들의 동질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이다.


35. 그러면 이 명칭들의 참된 뜻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원인성(oorzakelijkheid)이라는 개념에 있다. 즉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고, 아들을 아들로 일컷는 것은, 전자[아버지]가 두 번째 위격적 존재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3.6.2.2 성자의 호칭들


36. "독생자"라는 명칭의 어떤 점을 주목해야 하는가?


"독생자"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아주 다양한 견해가 있다. 이 이름이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에도, 성육신과 상관없이도 그에게 적용된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영원부터 마치 이 땅의 어떤 아버지와 그의 외아들 사이와 같은 그런 관계에 있다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 명칭들은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은유적 언어일 것이다.


이와 달리,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아들이라는 명칭이 영원한 초월적 관계를 표현한다 인정한다면, "유일하게 난 아들"이라는 표현이 더 자세한 정의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후자의 명칭["유일하게 난 아들"]을 해석할 때, 절반은 문자적으로 절반은 비유적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둘 모두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유일하게 나신 아들"(Eengeboren zoon)이란 원인성과 관련하여 한편으로 나게 하심을, 다른 한편으로 나심을 암시한다. 더욱이 이것은 내적으로 가장 깊은 하나님의 관계로서, 요한복음 1:12에서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과 맺는 하나됨과 전혀 다른 것이다. 이 [특별한] 하나됨이 "유일하게 나신"데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은 1:14은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한 것이 이 나심과 어떤 점에서 관련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영광"이라 말한다.


37. "먼저 나신 자"(Eerstgeborene)라는 명칭이 나오는 곳은 어디인가?


골로새서 1:15이다: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Eerstgeborene aller Creaturen). 이 문구의 뜻은 여기에 등장하는 소유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126] 이것은 부분 소유격(gen. partitivus)인가 아니면 비교 소유격(gen. comparativus)인가?


만일 첫 번째 경우[부분 소유격]라면, 위 문장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첫 번째로 난 자"가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피조물 중 하나가 된다. 아들의 신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의도가 바로 이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두 번째 경우[비교 소유격]라면, 앞의 문구는 "창조된 모든 피조물보다 더 앞서 나신 자"라는 뜻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창조물의 영역 밖에 있게 된다. 그러면 소유격은 먼저라는 비교 개념에 의존한다.


이 둘 중 후자의 견해가 옳다. 골로새서 1:15은 첫 번째 사상에서 기대하는 것처럼, "전 피조물"(al het schepsel)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각 피조물, 모든 피조물"(alle schepsel)라고 할 뿐이다.[127] 이는 오직 두 번째 사상에 어울린다. 여기서 사도가 나심과 창조됨을 명확히 구별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후자 ["창조됨"]는 모든 다른 것들에 해당하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나심"]만을 말할 수 있다. 그는 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았다.


38. "먼저 나신 자"라는 명칭이 나오는 곳은 또 어디인가?


히브리서 1:6이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신적 속성을 기업으로 얻으셨기 때문에 이 명칭을 소유한다는 점을 부연한다: "그가 천사보다 더 뛰어나게 된 것은 그가 그들보다 더 나은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라". 이 [기업으로 얻은] 이름으로 바로 "먼저 나신 자"를 뜻하고 있다(히 1:4, 6, 9).


39. 로고스라는 명칭이 요한복음에서 사용되기 전에 어디선가 쓰인적이 있는가?


그렇다. 이미 구약에 "하나님의 말씀"이 등장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말씀으로 하늘이 창조되었다. 이 명칭은 필로의 글들[128]과 유대교 신학에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루어졌다. 그러나 근복적으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필로는 말씀(het woord)을 "계시와 창조의 수단"으로 이해한다. 그는 하나님은 너무나 높고 유한 위에 너무나 멀리 계시므로 그분은 피조물과 적접적으로 접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무한한 간격을 중간 존재를 통해 줄여보고자 했는데, 이 중간 존재는 일종의 우주적 중개자로서, 하나님을 인간에게 알린다. 그래서 "로고스"(말씀)라 불렀다.


그러나 사도 요한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성경은 이와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한다. 그리스도를 로고스(말씀)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세계와 관련하여 맨 처음 위치에서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아버지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로고스론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고자 할 때, 이 점은 대단히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또 다른 생각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말씀하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었다. 그러나 이 사상은 부차적인 것으로 첫 번째 사상에서 이끌어 낸 것이다.


40. 삼위일체의 제 2위격의 말씀됨(Woord-zijn)이란 개념은 그 속에 어떤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는지 더 자세히 설명하시오.


1) 말이란 말하는 이가 야기된 어떤 것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 기원을 생각할 때, 말은 이미 말하는 이 안에 있다.

3) 말은 말하는 이의 상을 나타낸다. 곧 말은 말하는 이의 인격적 존재를 나타내는 모사(afdruksel)다. 그래서 말하는 이와 말 사이에는 동질성이 존재한다.

4) 말하는 이와 말은 서로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말은 그것을 발설된 이후라도 그 의식 안에 살아 있다.


41. 사람들이 때로 로고스론에서 무언가 더 찾으려 한 것이 있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로고스론에서 그들의 철학적 삼위일체론을 확증해 주는 것들을 찾았다. 몇몇 개혁파 신학자들도 나심은 성부가 그분의 신적 생각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로고스는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낼 있다:


1) 외향적 의미에서 말씀, 곧 말함(sprake).

2) 내향적 의미에서 말씀, 곧 이성(rede).


만일 두 번째 의미로 사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뜻이다. 아들은 영원부터 아버지의 생각을 통해 나오는 것으로서 말씀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로고스 명칭을 이같은 의미에서 이해하도록 하는 어떤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42. 요한복음 1:1과 1:18은 로고스에 대하여 어떤 것을 더 가르치는가?


그[말씀]는 "하나님과 함께"(πρός τόν θεόν) 있었고, "아버지의 품 속에"(εός τὸν ϰὸλπον τοῦ πατρός)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전치사를 사용하는데, 모두 어떤 방향을 가리킨다. 아들은 "아버지를 향하고"(요 1:1), "아버지의 품속으로"(1:18)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리스도는 지속적으로 나심을 통해 그의 인격적 삶의 열망으로 자신을 그 [아버지]에게 향한다.


43. 히브리서 1:3에는 어떤 로고스론 표현들이 등장하는가?


히 1:3은 아들을 하나님의 아파우가스마 테스 독세스 카이 카락토르 테스 휘포스타세오스(ἀπαὑγαμα τῆς δὸξης ϰαὶ χαραϰτἡρ τἡς ὑποστάσεως)라 부른다. 곧 "그의 영광의 광채요 그의 본체의 카락터(형상)"이다.


44. 이 히브리서 구절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논증할 때 독특한 점은 무엇인가?


이 논증의 독특한 점은 중보자의 위대한 상속 및 영예에서 출발하여 영원한 아들됨으로 논증해 가는 것이다. 만일 어떤 이가 그와 같은 중보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또는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하나님의 본성적인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히 1:3의 논증이다. 이 구절과 바로 이어오는 내용을 연결하여 생각해야 한다: "그가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므로, 그는 이 권세와 영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나아가 지극히 높은 하늘에 있는 위엄[=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


45. 히브리서 저자는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와 "그의 본체의 형상"과 같은 표현들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아들의 신성과 하나님의 하나됨을 연결하기 위함이다. 아들은 사실상 아버지의 반사요 압형(afdruck)이다. 그러나 다시 아버지와 구별되신다. "그의 영광의 광채"는 본질의 하나됨을 표현한다. "그[성부]의 자립성이 표현된 상"(uitgedrukte beeld zijner zelfstandigheid)은 위격의 동등성을 표현한다. 하나의 상은 두 진리를 동시에 표현하지 않는다. 따라서 두 가지 상을 선택했다. 아버지와 하나된 존재, 그러면서도 아버지로부터 유일하게 난 이, 이것이 바로 두 상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서 "형상"(afdruksel)이란 "도장"(stempel)을 의미한다. 곧 "압인된 것"(het afgestempelde)이란, 예를 들어, 동전에 찍힌 형상 같은 것이다.


46. 골로새서 1:15과 고린도후서 4:4는 어떤 명칭을 그리스도에게 돌리고 있는가?


골로새서 1:15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 부른다. 고후 4:4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다 말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형상으로서 이 신적 영광에 참여하는데, 이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지는 것이다(롬 1:23). 그런데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간접적으로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라는 점을 내포한다. 물론 이 구절은 성육하신 말씀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만일 영원한 말씀으로서 이미 아버지의 형상이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의 형상일 수 없었을 것이다.


47. 지금까지 살펴본 성경 데이터들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과는 무엇인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1) 원인성 관계이다. 또한

2) 본질의 하나됨 관계이다. [나아가]

3) 위격의 동등성 관계이다. [마지막으로]

4) 하나의 관계로서, 이 관계는 아들이 신적 본성을 소유한 것과 관련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계속해서 아들은 이 관계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을 유추하기 때문이다.



3.6.2.3 성부와 성자의 본질 나눔에 관하여


48.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 나눔(Wezensmededeeling)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만일 어떤 이가 본질이란 마치 처음에는 아버지 안에 존재하던 것이었는데, 이제 아버지가 취하여 아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 생각은 매우 이론(異論)의 여지가 많아 보인다.


49. 이러한 사상을 어떻게 반박할 수 있는가?


1) 이 사상은 아들의 완전한 신성에 대하여 옳게 설명하였다 볼 수 없다. 나누어 받은 신성이란 완전한 신성이 아니라 [신성에 대한] 부정(eene tegenstrijdigheld)이다. 신성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자체로 자존하는 것이다.


2) 이 사상은 아들을 쉽게 피조된 존재로 생각하게 할 수 있다. 어떤 것을 나누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 어떤 것을 전달받는 어떤 인격을 상정해야 한다. 만일 여기 아들이 있는데, 아직 본질을 전달받기 이전이라면, 그는 이 본질을 나누어 받은 시점으로부터 나신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그는] 무로부터 [본질을 전달받은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럼에도 본질 수여라는 개념은 이러한 생각으로 이끈다.


3) 옛 사람들은 실제로 본질-나눔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의도한 것은 공유(communicatio)였다. 곧 본질을 공통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먼저 나게 하시고 다음으로 본질을 나누어 주시려고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의 신적 본질 내에서 그가 바로 그 본질 안에서 아들을 나게 하시고, 이를 통해 하나의 본질을 자신과 아들의 공동적인 것으로 만드신다.



3.6.2.4 성자의 나심


50. 나심은 일시적이고 지나가는 해위인가 아니면 영원한 행동인가?


나심은 영원하고 지속적인 것이다. 이 나심 개념 안에서 어떤 시간경과나 시간 진행도 생각해서는 안된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 xiii. 29에서 이 영원성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심은 하나님의 영원성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된다.


51. 나심은 성부의 의지 행동인가 아니면 영원한 필연적 행동인가?


후자[필연적 행동]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들은 피조물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심지어 존재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en dus ook niet had kunnen zijn)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심은 성부의 뜻을 거스리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나심을 이 [성부의] 의지의 자유로운 산물인 창조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52. 나심은 신적 본질의 나눔이나 분할이란 개념을 포함하는가?


그렇지 않다. 나심의 결과는 아들이 성부와 동일하게 신적 본질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하나님이 계시고, 아들은 바로 그 하나님이다.


53. 그러면 당신은 아들의 나심을 어떻게 묘사하겠는가?


나심이란 삼위일체 제 1위격의 영원하고 필연적인 행위로서. 이를 통해 그 [성부 = 제 1위격]는 동일한 신적 본질 안에서 자신의 위격의 존재와 동등한 제 2위격의 존재의 근원이시다. 또한 이 나심을 통해 성부는 이 2위격에게 신전 본질을 공유하여 그것을 소유하게 하시되, [그 신적 본질에] 어떤 분할도 일어나지 않게 하신다.



3.6.3 성자의 신성


54. 신성(Godheid, 하나님이심)과 신성(Goddelijkheid, 하나님 속성을 소유함)의 차이는 무엇인가?


삼위일체를 열심히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그들조차도 아들에게 신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유사-아리우스주의자들, 소시누스주의자들, 다른 단성론자들은 본질의 하나됨을 부인한다. 이 모든 사람들은 다음 질문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고 말할 때, 아들은 바로 그 의미에서 하나님인가? 이 질문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 각 학파와 그 학파의 견해를 공유하는 사람들[129]은 선택해야 한다. 어떤 사람도 모호하게 말할 수 없다.


55. 아들의 신성(Godheid)을 입증할 증거는 몇 종류가 있는가?


2 가지가 있다:


1) 간접적인 증거, 즉 신성을 전제하는 그런 사실과 자료로부터 끌어낸 것.

2) 직접적인 증거, 즉 아들의 신성을 가르치는 의도를 가진 본문들이다.


56. 첫 번째 종류의 증거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다음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1) 아들에게 신적 칭호를 인정하는 곳: 시 45:7, 8 (cf. 히 1:8, 9); 사 9:6; 7:14 (cf. 마 1:23); 말 3:1 (cf. 막 1:2; 눅 1:16); 딤전 3:16; 히 1:1, 10 (cf. 시 102:26); 엡 4:9 (cf. 시 68:18).


2)  아들에게 신적 속성들을 인정하는 곳:


A. 영원성: 미 6:2 (cf. 마 2:6); 사 9:6; 히 7:3; 계 1:8; 요 8:58.

B. 광대함(Onmettelijkheid)과 무소부재(Alomtegenwoordigheid): 마 18:20; 28:20; 요 3:13.

C. 전능함: 계 1:8; 요 5:19; 히 1:3.

D. 전지함: 요 21:17; 16:30; 2:24, 25; 1:49; 계 2:3 (cf. 왕하 8:29); 막 13:32는 이에 대한 반대 구절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어거스틴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아들은 직무상, 인간적 본성에 따라 알지 못하는 것이다.

E. 불변성: 히 1:11, 12 (cf. 시 102:26); 히 13:8.

F. 신성의 충만(골 2:9).


3) 아들에게 신적인 사역을 인정하는 곳:


A. 창조 사역: 잠 8:27; 요 1:3; 골 1:16, 17; 히 1:2, 10.

B. 섭리 사역: 히 1:3; 골 1:17; 요 5:17.

C. 기적 사역: 요 5:21; 6:40; (5:36).

D. 구속 사역: 행 20:28; 요 13:18; 10:16; 엡 5:26; 요 16:7, 14.


4) 아들에게 신적 영예를 돌리는 곳:


A. 그에게 향하는 믿음(요 14:1). 그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과 심지어 모세와 선지자들과도 다르게 가르친다. 곧 권세를 가진 이로서 그의 말씀은 더 높은 것에 더 이상 호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B. 소망: 고전 15:19; 살전 1:3; 딤전 1:1.

C. 공식적인 예배: 히 1:6; 시 2:12; 요 5:23; 빌 2:9, 10.

D. 그로부터 은혜를 빔: 고후 13:13; 고전 1:2; 행 9:14; 7:59; 계 5:13; 벧전 4:2; 딤후 4:18; 계 1:6; 벧후 3:18.


57. 어떤 본문이 아들의 신성을 직접적이고 의도적으로 말하는가?


요 1:1; 롬 9:5; 빌 2:6; 딛 2:13; 요일 5:20[130]; 요 20:28.


58. 요한복음 1:1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 말씀은 하나님시니라". 이 말씀은 아들에게 완전한 신성을 돌린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와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고, 그[말씀]는 그 [아버지]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59. 로마서 9:5에 얼마나 많은 번역들이 있는가?


[세 가지 번역이 있다];


1) 일반적인 번역으로, 우리 화란어 번역도 따르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육신을 따라서는 그들로부터 그리스도도 나셨으니, 그는 영원토록 모든 것보다 찬양할 이시니라, 아멘(Uit welken Christus, zooveel het vleesch aangaat, dewelke is God boven allen te prijzen in der eeuwigheid, Amen). 이 문장[131]은 아들의 신성에 대하여 가능한 강하게 증거한다.

2) 그러나 다른 이들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려고 한다: "그들로부터 난 그리스도는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이시다(Uit welen Christus is te prijzen in der eeuwigheid). 이외 나머지 단어들을 성부를 가리킨다고 본다.

3) 또 다른 사람들은 "육체와 관련해서는 그들로부터 그리스도도 나셨는데, 그[그리스도]는 모든 것 위에 계신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지로다(Uit welke Christus is zooveel het vleesch aangaat, die daar is boven allen. - God is te prijzen in der eeuwigheid).


60. 원문에는 "이 단어들"이다. 다시 말해서 이 번역 문장을 구성하는 말들이 아들의 신성을 강력히 증거한다는 것이다.


1) 왜냐하면 앞에서 그리스도를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바울]가 계속 진행애야 했다면("그는.." 등등), 여기서 그리스도를 생각한다고 해서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2) 왜냐하면 "육신에 관하여는"이란 말은 반대개념으로서 주님[그리스도]의 신격(Godheid)에 관한 표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cf. 롬 1:3).

3) 그리스도께 적용한 단어들은 그 앞의 것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 특권들 사슬에 새로운 고리를 추가하기 때문이다.

4) 만일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송영이 나온다면, 원문에 있는 단어들의 순서가 그들이 송영에서 늘 취하는 순서와 일치하지 않는다.

5) 바울이 이스라엘의 슬픈 배교(afval)를 바탄해 마지않은 후이므로 어느 누구도 이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송영이 나오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61. 만일 어떤 이가 바울은 주님을 어디서도 하나님이라 부른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주님[그리스도]을 하나님이라 부른다(딛 2:13, 행 20:28).


62. 그러면 어떻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3이나 에베소서 4:5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그렇게 날카롭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이 구분은 경륜적인(huishoudelijk)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위 구절에서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반대 위치에 있는 것이지 아들로서 아버지의 반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63. 만일 어떤 사람이 사도들의 편지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송영(doxologieen)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할 때,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이 논증은 베드로후서의 진정성과 히브리서의 사도성을 부인하는 것과 베드로전서 4:11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딤후 4:18, 계 1:6, 5:13을 제외할 수는 없다.


64. 빌 2:6을 짧게 설명하시오.


이 구절에 대하여는 참으로 많은 논의와 다양한 해석이 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으나(=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나) 경륜적 사역상 동등함을 강탈할 어떤 것으로 생각지(= 어떤 강탈할 생각을 품고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자신을 낮추셨다...". 다시 말해서, 신적 본질상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체로서 아버지와 동등하시다. 그러나 그는 위격의 순서상 제 2위격이시다. 그래서 평화의 작정(Raad des Vredes; counsel of peace)시 보증(Borgtocht)과 그와 관련있는 모든 것이 그에게 속한다. 그러므로 지금 사도가 말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속 사역을 분배함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동등성[132]을 강탈해야 할 것으로, 즉 마치 강제로 그에게 끌어와야만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제 2위격으로서 자신에게 비록 고난과 죽음이 있을지라도 두번째 사역이 오는 것을 기뻐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부인의 위대한 모범이 된다. 그러므로 본문은 다음 두 가지를 가르친다:


1)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소유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위격의 순서와 존재의 방식상 첫 번째가 아니고 두 번째이다.


65. 디도서 2:13은 아들을 어떻게 부르는가?


"우리의 큰 하나님 곧 구원자(όμἐγας θεὸςϰαὶ σωτἡρ[133] ἡμῶν)" 어떤 사람들은 처음 두 단어("큰 하나님", "구원자")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 보지 않는다.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래서 이 구절을 "우리의 크신 하나님의 그리고 우리의 구원자의 영광"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나타나심"(ἐπιψἀνεια)이라는 표현은 한번도 아버지께 사용된 적이 없고, 항상 심판을 위해 아들이 다시 오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뒤에 오는 구절[딛 2:14]이 오직 아들과 관련있기 때문이다.

3) 만일 이 단어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킨다면, "크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불필요한 것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심판 날에 그리스도께서 "크신 하나님이요 구원자"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에야, 부가어(附加語; bijvoeging) "크신"의 의미도 살아난다.


66. 요한일서 5:20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들은 "참되신 하나님이요 영원한 생명"임을 말한다. 여기서 이 단어들 역시 아버지가 아닌 아들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단어들이 아들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동일한 것을 두번 [반복해서] 말한 것이 된다.

2) 하나님 아버지를 여기서 말한 의미로 곧 "그는 영원한 생명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3) 여기서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이 구절 초반부가 그에게  돌린 것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즉 그가 오셔서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셔서, 우리가 참되신 자를 깨달을 수 있게 하신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할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이 참된 하나님이며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67. 요한복음 20:28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어떤 놀라움에서 발원한 외침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향한 놀라움에서 나온 인정(toespraak)으로 바아야 한다. 왜냐하면:


1) 본문에 "도마가 대답하였다. 그리고 말하였다"고 하기 때문이다.

2) "나의 하나님"은 놀람의 외침일 수 있으나, "나의 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3) 문맥은 도마의 말을 [단순한 외침이 아닌] 인정으로 볼 곳을 요구한다. 도마의 말은 그가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인식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주님이 자신의 신성에 대한 인식을 기뻐하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3.6.4 성자의 경륜적 사역


68. 아들의 경륜적 사역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아들의 경륜적 사역은 하나님의 외적 사역(de werken Gods naar buiten)[134]에서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그를 통해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다. 아버지 때문에 그는 평화의 작정에서 보증의 책무를 맡으셨고, 시간 안에서 지상 메시야 사역을 성취하였다. 이는 그가 하늘에서 아버지 앞에 자신의 중보기도를 드리기 위함이다.


69.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들됨과 그의 메시야 사역 사이에는 연결점이 있는가?


있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서로 연결한다.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에서 제 2위격이시고 자신의 위격적 존재가 아버지로부터 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세 위격들 중 보냄받은 자이고, 언약에서 섬기는 사역을 담당한다는 말이 적절하다. 따라서 성경은 아들을 "집을 돌보는 자"(Huisvoorzorger)로 소개한다[cf. 히 3:6].[135]


70. 아들은 그의 중보자 위치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피조물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가?


그렇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이 그를 통해서 창조된 것처럼, 또한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상은 무엇보다 바울의 옥중서신[136]으로부터 알 수 있다(엡 3:19, 1:3, 4; 골 1:16; 엡 1:10, 5:5; cf. 고전 15:2). 주목할 점은, 아들은 이 관계 때문에 중보자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보자"라는 명칭은 항상 성육신을 통해서 말씀(het Woord; λόγος)이 피조물과 맺는 관계[137]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 후자의 관계[로고스와 피조물과의 관계]는 전적으로 구속 사역의 요구들로부터 나온다.


71. 그의 경륜적 사역을 위해 어떤 속성들이 아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졌는가?


1) 지혜(고전 1:24; 잠 8).

2) 신실성. 이는 "집을 돌보는 자"로서 특별히 있어야 할 것이다(cf. 고전 4:2, 히 3:1, 2; 요 5:30, 8:29, 49, 50).

3) 권세. 이것은 능력보다는 권위를 뜻한다(고전 1:24; 히 1:3).

4) 자비와 은혜(고후 13:13; 엡 5:2, 25).



출처: 개혁교의학(Reformed Dogmatics), 제 I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