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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는 분들에게 - 리종연 목사

Bavinck Byeon 2015. 1. 9. 23:57

신학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는 분들에게

 

리종연 목사



요즘 이러저런 생각에 뒤척인다.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이 때를 눈여겨본다. 그 가운데 신학교에 대한 마음은 갈 수록 불붙는다. 신학교가 무엇이고, 누가 공부하고, 어떻게 배우며 그 목적은 무엇인지 다시금 돌아본다. 성경계시에서 부름 받은 많은 선진들은 어떠했는가 살펴본다. 예사로 오늘 신학교들이 썩었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양비론을 앞세우는 기성세대와 세상에 빠져 기득권을 붙잡고 늘어지는 모양이 여간 씁쓸하지 않다. 왜 이리도 세상 줄을 놓지 못할까? 제 자리에서 버티려고 하고, 심지어 진리 까지라도 이용해 먹는다.

 

왜 신학 공부를 하려고 할까? 결과보다 원인이 앞선다면 그 동기는 어떠한가? 언제나 날카롭고 뚜렷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과 교회에 속한 지체로서 말씀과 더불어 어떤 사귐을 펼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진리관과 교회관이 일치를 드러내지 못하면 이중 인격자가 된다. 그야말로 꼴불견이리라. 저마다 임금이라고 날뛰는 때이니 퍽 조심스럽다. 바른 교회들이 별로 보이지 않으니 바른 신학교도 보일 리 만무이다. 무슨 잣대로 신학공부를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아무리 소명을 앞세우고 신앙고백을 내세워도 그리스도 앞에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부르심을 언제나 앞세워야 한다. 이게 만만치 않다. 자칫 개인의 주관을 앞세워 일생을 망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저 세상에서 먹고 살고 많은이들 앞에서 외친다고 만능은 아니다. 이런 정도 라면 불신 세상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성경과 교리 없는 소명은 없다! 교회에서 성경과 교리 여부의 타당함은 결정난다. 교회에 속해서 그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도 바른 교회에 속해있는 지 물어야 한다. 그 고백에 목숨 걸어야 한다. 생명을 내대지 못한다면 소명은 어렴풋하다. 갈팡잘팡하는 인생이 되기 쉽다. 필경 정통에서 빗나가리라. 어떻게 공부하는 지 거기에 소명은 따라붙는다.

 

왜 큰 교단이라는 곳에서 벌이는 신학교에는 천 명 이상 몰릴까? 참으로 괴이한 때이다. 그렇게 선택한 판단의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신학교란 그리 되는 것이 아니다! 오롯한 신학교는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객관의 근거와 능력이 갖추어진 인격으로 사귀는 그런 학교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신학공부를 마음에 두는 사람만 문제가 아니라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의 소명감은 더욱 중요하다. 이것을 생각하면 더욱 숨이 가빠온다. 개혁주의 라면서 게거품이라도 내뿜으면 할 말을 잃는다. 사태가 이러하다. 소명을 깨달아도 그 소명을 갈고 닦아 검증할 터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 이 글은 제 스스로 넋두리인지도 모른다. 둘레를 둘러보아도 도무지 깜깜이라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진실과 공부, 그리고 교회에 대한 걱정에 사무쳤던 박윤선 목사를 떠올려본다. 한살매를 이용만 당하다 간 분이다. 기독교가 무엇이고 기독교인의 생기가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이용하는 무서운 짓이 너무도 가득찼다. 진실한 사귐을 나누기 쉽지 않다. 속으로 제 것을 꼭 붙들고 주장하는데 무슨 수로 사귄단 말인가? 그래서도 거듭남을 생각해보게 된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도 떠오른다. 우리는 어떤 계기로 신학공부를 하려는 것인지 ... 두려움이 생긴다.

 

정치판 투전판이 오히려 진실소박하게 보일 지경이다! 우리나라 토양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을까? 어려운 물음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라 조심스럽다. 진리를 가지고 한탕을 노리는 공부도 넘친다. 사람 앞에서 우쭐거려 보려고 거룩한 말씀과 거룩한 도리를 주무른다. 근본원칙과 강자 앞에서는 움추리고 기웃거리다가 그냥 사라지고 만다. 우직하게 뿌리 부터 캐내는 깊고 넓은 공부를 마다한다. 이쯤 되면 이미 신학교에 대한 소명은 빵점이다. 그러나 현재 직위를 내놓지 않는다. 믿음으로 한단다. 하나님은 부족해도 써주신다고 자위하면서 버틴다. 아! 어찌 되려나 ... 무지한 고집불통을 조심하자!

 

말이 길어지는데 신학교에 대한 소명감은 준엄하고, 엄청나고, 피눈물을 쏟아야하며, 자기부인을 끝없이 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속한 환란을 벗어나지 못 하게 한다. 학문에서, 인품에서, 예배에서, 성도들의 사귐에서, 이웃 사랑에서 끝없이 끝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모쉐, 다윗, 이사야, 바울, 깔뱅 ... 이런 벗들과 벗삼는 실질이 이루어져야 한다. 역사의 개혁교리에서 그 여백 까지라도 깊이있게 꿰뚫어내야 한다. 거룩한 가정과 바른 사회 의식 가운데 오직 복음에 사무쳐야 한다. 거저 먹기로 인간들 비위나 맞추려든다면 소명이 아니다. 이불 속에서 활개친다거나 골목대장 노릇하려면 그만 두어야 한다.

 

교회관을 돌아보자!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 으뜸을 말씀선포의 성격과 내용이다. 속한 교회에 신앙고백하고 들어섰을텐데 일치하는지 아닌지 교리의 잣대로 가려내자. 이것이 예배 가운데 이루어지고 참된 교회의 표지로 드러나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에 때묻게 되면 끝장이다. 사람 눈치보고 줄서다 인생을 마친다. 허다한 사람이 이 굴레를 벗어나지 못 한다. 교회 자리 하나, 신학교 자리 하나 얻으려고 보이는 꼴불견이라니 소가 웃는다. 모두 돈의 논리이다. 배교한 무리들 앞에서 춤추는 격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심보이다. 어영부영 악습이 우리나라를 망가뜨린다.

 

성경관이 근본에 깔린다. 어떤 성경을 최후심판을 바라보며 붙잡았는가? 원어성경과 역본성경에 대한 자세는 어떤가? 이것을 분명히 갖추어야만 한다. 이 방면에 큰 속임이 깔아뭉개기에 몽롱한 체 살아간다. 이 바람에 사이비들은 거짓 성경관으로 도사린다. 한글번역성경에 대하여 조차 무덤덤이라 무슨 말을 하랴! 성경관은 참으로 중요하다. 이것에 일치를 지향하지 않으면 신학교는 없고 부패한다. 신학과 신앙의 근본인 성경에 이렇게 무지하고 진위를 가려낼 줄 모른다면 무슨 소명일까? 저마다 그저 열심으로 정통이라고 열낼 지 모르나 현주소가 이렇다. 한글역본 성경 중 개혁신학에 맞는 것은 아직 없다!

 

원문성경에 까지 다다르면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이 분야를 교리를 부정하는 영감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에서 정복했다. 이런 가운데 바른 원어성경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다. 기적이리라. 모든 신학교를 장악했고, 거의 다수를 차지하고 관련 책을 모두 그런 자들이 만들어 도배를 하니 특별 섭리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바른 소명이라면 성경관을 올바르게 갖추도록 이끄신 자. 이 공부를 해야하는데. 바른 책이랑 바른 선생을 만나기란 기적이다! 다시 말하지만 바른 교회에 속한 사람 중에서 일꾼을 가르치고 길러내는 일이 나타나야 한다. 아무튼 성경관에서 큰 도전을 받는 중임을 잊지 말자!

 

할 말은 늘어만 가는데 시간이 없다. 중요한 이야기들이 기다리는데 ... 꾸밈없는 진실과 소박한 열정으로 넘쳐야 한다. 쓸데없이 복잡하거나 밑도 끝도 없이 제 주장에 빠지거나, 기본 인간성 조차 구역질난다면 신학교는 없다! 명예와 돈벌이를 꿈꾸는 신학교는 사탄의 학교이다. 기본공부 부터 철처하게 연마하지 않는 학교도 마찬가지이다. 적당히 가르치고 대충 배우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알량한 학위나 교육부에 들어가서 눈치보다가 배교하는 무리가 된다. 하나님 앞에서 배우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섬기면 된다. 배교의 길을 간 서양 신학교를 알면서 왜 흉내내고 따라가는지 아리송하다.

 

이제 마지막 때라 바른 진리를 사모하는 영혼들은 많지 않다. 바른 신학교도 거의 없지만 바른 선생과 학생도 거의 없다. 이런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제는 더욱 그런 때이다. 앞에서 말한 몇 가지를 늘 개혁하여 올바로 세우는데 온 힘을 쏟아야 바른 신학교이고 바른 일이다. 기회주의자, 요령꾼들, 머리굴리는 자들은 안 된다. 전폭을 맡기고 다가서지 않으려면 생각 조차 말아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런 신학교를 바란다. 그런 선생과 학생으로 이루어지는 바른 신학교를 기다린다. 나머지는 걱정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 할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거기에 온 힘 쏟으면 된다.

 

성경원어와 고전어를 올바로 배우고 개혁교리를 철저하게 주경학을 바탕으로 꿰뚫어야 한다. 언어학을 철저하게 하지 않으면 개혁신학은 없다! 이것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개중에는 이러저런 말을 내세워 약화시키지만 인본주의이다. 적어도 교회의 강단을 맡는다면 기초에 지나지 않는 과목이다. 이것을 깔보면 자유주의의 교묘한 촉수에 물든다. 보기 들면 신정통주의 속임에 물든이가 한 둘인가? 버젓이 개혁신학을 말하면서도 말이다. 참 무서운 때이다. 기초를 원리를 철저하게 갖추어야만 한다. 제가 개인의 특장을 말하는 게 도무지 아니다!!! 여기에 구멍나면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고만고만한 사람에 지나지 않으리라.

 

잊지 말 것은 교리사에 정통하여 교리를 깊이있게 터득해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도 라틴어를 어느 정도 마련해야 한다. 성경원어 만큼 절대는 아니라도 꼭 필요하다. 이것을 게을리하면 원수를 물리치기 버거워진다. 성경원어가 날개를 달지 못 한다. 교부들과 깔뱅의 작품 같은 무게있는 글을 원전으로 직접 접촉해야 한다. 개혁신학을 가볍게 보지 말자. 개혁교회를 풋사과로 보지 말자. 바른 교회에 속하여 예배를 드리면서 그 교회의 전진에 발맞추면서 그 고백에 걸맞는 신학교를 들어서면 된다. 교회와 신학교는 일치해야 한다. 성도들의 사귐에서 드러나야 한다. 오늘은 이만 적는다.



[2009.11.12]



<성경 원어와 개혁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