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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신학의 성찬론 - 김병훈 교수

Bavinck Byeon 2015. 1. 9. 22:12

개혁 신학의 성찬론

 

김병훈 교수(, 조직신학)

 

 

들어가는 말

 

개혁 신학에 있어서의 성찬론에 대한 이해는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신학 토론의 상황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화체설’(transubstantiation)로 지칭이 되는 천주교회의 성찬론을 성경에 따른 바른 교리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성찬론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개신교와 천주교회가 교회론적 분리를 겪게 되는 하나의 이유로 작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찬론에 대한 논쟁은 종교개혁자들 상호간에도 일치를 보지 못하여 교회의 구조와 예배의 이해를 서로 달리하는 분열의 이유로도 작용을 하였다. 종교개혁의 시기에 있어서의 성찬론의 논쟁은 신앙과 경건에 있어서 성찬 의식이 단지 부차적이며 종속적인 역할만을 감당하는 오늘날 복음주의 개신교회의 예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의아하며 사소한 다툼으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1)

 

그러나 성찬론의 문제가 치열한 교리적 논쟁으로 발전되면서 교파의 분립의 한 이유로 나타나게 된 것은 성찬론의 이해의 차이가 단지 하나의 교리 상의 차이로만 이해되지 않고, 십계명 가운데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가의 논의와도 연결이 되면서, 더 나아가 이러한 이해가 예배의 의식과 관련하여 어떠한 의미를 주는 가의 논의와도 연결되었기 때문이다.2) 성찬론은 언뜻 드러나지 않는 교리 상의 차이가 아니라, 교회의 구체적인 현상으로서 예배와 신앙의 실제를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개혁 신학의 성찬론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성찬론의 논쟁점들에 대한 여러 교파들의 견해들이 어떻게 서로 구별이 되는 지를 살피는 일이 필수적이며 적절하다.

 

성찬론에 관련한 논쟁점들은, 첫째로 성찬의 본질(essential nature)과 관련한 것으로 성찬은 실재(reality)인가 아니면 상징(symbol)인가의 문제, 둘째로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며, 그렇다면 그 임재의 양식(the mode of presence)은 어떠한지와 관련한 문제, 셋째로 성찬의 효력(efficacy)과 관련한 것으로 신앙 없는 자가 성찬에 참여하였을 경우 그가 받은 성찬은 신앙 있는 자가 받은 성찬과 동일한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자에게도 성찬의 효력은 나타나는 것인가, 그리고 끝으로 성찬식의 의의와 목적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희생 제사의 반복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한 성도의 교통인가의 문제 등으로 크게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칼빈의 교훈을 중심으로 하는 장로교회의 개혁주의 성찬론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갖는 일은 성찬론에 관련한 논쟁의 문맥 안에서 루터파 교회와 쯔빙글리파 교회의 견해의 차이를 살피는 일과, 이것을 위하여 루터파 교회는 천주교회와 어떻게 다르며, 칼빈의 견해는 쯔빙글리 개혁파와 또 어떻게 다른 지를 살펴야 할 것을 요구한다. 본고는 이러한 논쟁점들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주장하였던 주요 교파들, 천주 교회, 루터파 교회, 그리고 칼빈의 견해를 중심으로 하는 제네바 개혁파 교회와, 쯔빙글리의 견해를 중심으로 하는 취리히 개혁파 교회의 견해를 비교하여 설명함으로써, 개혁 신학의 성찬론의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중세 교회의 성찬론 논쟁

 

성찬의 본질이 실재인가 아니면 상징인가와 관련한 논쟁은 종교개혁의 시기에 비로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이 문제와 관련한 규모 있는 신학 논쟁은 이미 9 세기 전반 중세 초기에 콜비의 베네딕트 수도원(the Benedictine abbey of Corbie)에 속해 있던 두 사람, 라드베르투스(Paschasius Radbertus)와 라트람누스(Ratramnus) 사이에 전개 되었다.3) 두 사람은 각각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De corpore et sanguine Domini)라는 동일한 제목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라트람누스의 책은 라드베르투스의 책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형식에 따라 이루어 졌다.4) 라드베르투스는 사제가 축성을 한 이후에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가 되며, 이 몸과 피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의 그 몸과 피와 동일하며 또한 지금은 하늘에서 다스리시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도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성찬의 신비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뜻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는 누구도 이 성찬의 신비를 의심하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5) 한편 라트남누스는 제단 위에 놓여진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신비로운 상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떡과 포도주는 사제의 축성을 통하여 이러한 상징으로 변하며, 그로 인하여 그것들이 본래 지니고 있던 외적인 모습(outward appearance)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결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감각에 인식될 수가 없으며, 마리아에게 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적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것이다. 떡과 포도주는 단지 비유적인 의미에서 상징적으로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일 뿐이다.6)

 

9세기에 있었던 라드베르투스와 라트람누스 사이의 성찬의 본질에 대한 논쟁은 11 세기 후반 중세 중기에 뚜우르의 베렝가리우스(Berengarius of Turonensis)와 랑프랑크(Lanfranc) 사이의 논쟁으로 다시 나타났다. 11 세기부터 15 세기에 이르는 동안에, 대체로 성찬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원죄의 죄책과 세례 받기 이전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은 후에 지은 죄를 용서받는 구원의 수단으로 인식이 되어갔다. 이에 따라서 죄를 용서하는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성찬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점점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베렝가리우스와 랑프랑크는 성찬이 신비이며 거룩한 은혜의 수단인 것을 인정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되는 형이상학적 이해에 있어서 베렝가리우스는 떡과 포도주가 라트남누스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이며 표지라고 주장하였다.7) 구아문드(Guitmund)는 이러한 베렝가리우스의 견해는 떡과 포도주가 참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vere substantialiterque)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아니며 단지 이름으로만 그렇게 일컬어지는 것이며(sola voce sic appellari), 따라서 표지이며 그림자로서 몸과 피를 표현하는(significativa) 것일 따름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8) 베렝가리우스의 이러한 견해는 랑프랑크에 의해서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에는 자신의 견해를 취소토록 강요를 받았으며 그의 글들은 정죄를 받아 불태워졌다.9) 그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에 의하여 실체적으로(substantialiter) 만질 수 있으며 떼어 나눌 수 있다는 의미에서 참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는 점을 인정할 것을 강요받았다.10)

 

천주교회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

 

성찬의 본질에 관한 이러한 논쟁을 거친 이후에, 중세 교회는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the Fourth Lateran Council)에서 성찬의 실재설을 확정하면서, 소위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공식 교리로 선언하였으며,11) 종교 개혁 이후에 천주 교회는 1551년 트렌트 공의회(the Trent Council)에서 화체설을 천주 교회의 공식 교리로 재천명하였다.

 

...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몸과 피는 참으로(truly; veraciter) 떡과 포도주의 모양으로 제단의 성찬 안에 담겨있다(continentur); 실체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떡은 몸으로, 포도주는 피로 변화를 한다 ...12) [4차 라테란공의회, 1]

 

... 떡과 포도주를 축성함으로써, 떡의 모든 실체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변 화하는 일이, 그리고 포도주의 모든 실체가 그의 피의 실체로 변화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교회는 적절하고도 합당하게 이러한 변화를 실체의 변화[화체]라고 일컫는다.13) [트렌트공의회, 13속회, 4]

 

중세 교회의 공식 교리로서의 화체설이 의미하는 떡과 포도주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의 변화가 어떠한 의미에서의 변화인가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설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퀴나스는 성찬에 그리스도의 실재의 몸과 피가 성례전적으로(in sacramento) 담겨져 있음을 말하면서 성찬을 표지로(in signo) 또는 비유로(secundum figuram) 이해한 베렝가리우스를 비판하였다.14) 아퀴나스에 따르면 화체설이 말하는 사제의 축성에 의한 성찬의 변화는 자연적인 변화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결과되는 완전히 초자연적인 것이다(non est similis conversionibus naturalibus, sed est omnino supernaturalis, sola Dei virtute effecta). 자연적인 변화에서는 동일한 주체 안에서(in eodem subiecto) 다양한 형상들이(diversae formae) 연속적으로 나타나지만, 성찬에서의 변화에서는 떡이나 포도주가 완전히 다른 실체로 변한다(convertitur in totam substantiam illius). 떡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완전한 실체로(in totam substantiam corporis Christi),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라는 완전한 실체로(in totam substantiam sanguinis Christi) 변화를 하는 성찬의 변화는 자연에서의 형상의 변화(conversio formalis)가 아니라 실체의 변화(conversio substantialis)이며, 따라서 화체설(transubstantiatio)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아퀴나스는 주장하였다.15) 사제의 축성 이후에, 떡과 포도주가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실체의 변화를 주장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아퀴나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떡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포도주가 그의 피로 [변화한] 후에, 이 둘의 우유성들 (accidentia)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로부터 떡과 포도주의 [양의] 규모가 그리스도의 몸의 [양의] 규모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 체로 변화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나 피의 실체가 성찬의 능력에 의하여 이 성찬 안에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몸이나 피의 [양의] 규모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양적으로가 아니라 실체적으로 이 성찬 안에 있음이 분명하다.16)

 

성찬이 더 이상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떡과 포도주의 모양, 크기, 색깔, 그리고 맛 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까닭은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의 우유성들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변화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의 양이나 크기가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아퀴나스는 풀이하였다. 이처럼 실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전 실체의 우유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아퀴나스는 해석하였다.17) 만일 그것들의 우유성들마저도 새로운 실체의 것들로 변화한다면,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혐오스러운 일이 있게 될 것이며, 불신자들에 의하여 조롱을 받게 될 것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감각적으로 보지 못하면서 성찬을 받는 것이 믿음의 공로에 유익이 될 것이기 때문에, 우유성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이다.18)

 

루터파 교회의 비장소적 공재설(illocal consubstantiation)

 

그런데 루터를 비롯한 루터파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용한 스콜라 신학 방법론에 의한 화체설의 설명이 성경의 가르침을 훼손한다고 생각하여 천주 교회가 중세 교회로부터 받은 화체설을 거부하였다. 루터의 생각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기에 적절치 않은 것으로, 말하자면 세례를 받지 못한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호소하여 그리스도께서 임재하는 성찬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19)

 

그리스도에 관하여 참인 것이 또한 성찬에 관하여서도 참이다. 신성이 그(그리스도) 안 에 육체로 거하시기 위하여(2:9), 인성의 실체가 변화를 하며(transubstantiated), 신 성이 인성의 우유들(accidents) 아래에 담겨져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두 본질이 그 저 각각 완전한 상태로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이시며, 이 하나님은 사람이시다라는 말이 참이 된다. 비록 철학으로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겠 지만, 신앙으로는 이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이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어떤 인간의 지성보다도 더 크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실재의 몸(the real body)과 실재의 피(the real blood)가 임재하기 위하여, 떡과 포도주의 실 체가 변화되고(transubstantiated), 그리스도께서 그것들의 우유들(accidents) 아래에 담 겨져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 둘이 다 함께 동시에 있으면 되는 것이며, 그 때에 이 떡은 내 몸이며, 이 포도주는 내 피다라고 말씀하는 것이나, 이를 역으로 말 하는 것이나, 참된 말씀이 된다.20)

 

화체설에 대한 루터의 비판은 성찬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성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성을 설명하는 철학적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성찬에 대한 루터의 설명은 두 가지 요점으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위에 인용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체설과 구별이 되는 성찬론을 제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쯔빙글리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이다.

 

루터가 화체설을 비판하면서도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정당한 해석적 이유가 없이 바꿀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루터는 1523년에 쓴 성찬의 찬미라는 글에서 성찬에 단지 떡과 포도주만 있을 뿐이며, 이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표지할(signify)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 성경을 왜곡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을 하였다.

 

... 성찬에는 단지 사람들이 성찬이 아닌 경우에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떡과 포도주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떡은 그리스도의 몸을, 포도주는 그리스도 의 피를 상징한다는 것만을 가르쳤다 ... 이제 그러한 견해를 삼가야 할 것이다 ... 그리 스도의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한다: “받으라. 이는 내 몸이요, 이는 내 피니라.” ... 이들은 이것은 내 몸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조롱하고, 그것이 마치 이것은 내 몸을 상징 한다는 말씀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단 순하게 붙들어야 할 것이며 ...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단지 이것은 내 몸이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로써 이 오류를 물리쳐야만 할 것이다.21)

 

루터가 성찬을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징적으로나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상징적 해석이나 비유적 해석이 불합리하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성경의 다른 표현들에서 읽는 것처럼, 은유적으로(metaphorically) 읽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루터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성찬의 제정의 말씀을 상징적으로나 은유적으로 읽어야만 할 해석적 필연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적 해석을 거부하는 이들은, 마치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그 안에 신성을 감추고 있는 형상(figura, forma)인 것처럼,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 안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감추고 있는 형상(figura, forma)임을 불분명하게 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루터는 비판하였다.22)

 

이와 같이 성찬의 제정의 말씀(the words of institution)이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성을 지지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루터의 생각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의하여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는 부활하여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이해에 또한 근거하고 있다. 부활하여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데, 어떻게 성찬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재할 수 있겠는가고 묻는 자들에 대하여 루터는 하나님의 우편이 특정한 어떤 장소인지를 되묻고 스스로 답하기를 하나님의 우편은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시듯이 그의 우편도 또한 어디에나 있다고 주장하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더 이상 육체 가운데 계셨던 것과 같은 양식이 아닌 다른 양식으로, 즉 봉하여진 무덤의 돌과 닫힌 문을 통과하시는 양식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이것은 내 몸이다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성찬의 제정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루터는 결론을 짓는다.23)

 

이러한 루터파의 성찬론은 일반적으로 공재설(consubstantio)로 알려져 있지만, 던스 스코투스의 공재설과는 구별이 되어야 한다. 던스 스코투스의 공재설은 화체설과 마찬가지로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께서 장소적이며 육체적인(localis sive corporalis) 임재를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 반면에, 루터파는 편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은 떡과 포도주에 비장소적이지만 제한적인(illocalis sive definitiva) 임재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루터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떡과 포도주의 공간적 크기만큼 장소적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성찬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초자연적으로 편재하므로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비장소적인 임재를 하며, 그러나 성찬과 관련하여 임하는 것이므로 일정한 제한을 갖는다. 따라서 그들의 이러한 임재의 양식을 떡의 안에 아래에 함께라는 말로 표현을 하였다.24)

 

취리히 개혁파 쯔빙글리의 상징설(Symbolism)

 

루터의 이러한 이해는 바로 쯔빙글리의 상징적 해석과 충돌을 한다. 이 둘 사이의 의견의 차이는 1529년에 있었던 소위 마르부르크 대담’(the Marburg Colloquy)에서 잘 드러난다. 일부를 발췌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다.

 

외콜람파디우스: 모든 몸이, 제한을 받은 채, 한 장소에만 있을 수 있다.

 

루터: 수학적으로 쓸데없이 따지는 말에는 귀 기울여 듣지 않겠다. 하나님께서는 - 이 것은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따르는 자들조차도 인정하는 것인데 - 어떤 한 몸 이 한 장소에만 있도록 하게 하시든지 또는 동시에 여러 장소에 있도록 하게 하시든지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러 개를 한 장소에 동시에 있도록 하실 수 있다 ...

 

쯔빙글리: 우리도 그리스도의 몸의 성례전적임재를 말하지만, 이로서 우리는 그리스 도의 몸이 주의 성찬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represent)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 당신이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고 말씀하시므로 [당신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말하심에도 불구하고, 떡에서 몸의 실체를 제거하여 단지 껍데 기 뿐인 형상을 남겨주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계속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다.

 

쯔빙글리: 외콜람파디우스와 나도 하나님께서 물론 한 몸이 여러 장소에 있도록 하게 하실 수 있음을 믿는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주의 성찬에서 이렇게 하신다는 주장을 입증하여 주기를 우리는 원한다.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구유, 성전, 사막, 십자가, 무덤, 하나님의 오른 편과 같은 어느 특정한 한 장소에 언제나 계셨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는 언제나 어느 특정한 한 장소에 계시는 것이 틀림이 없다고 믿는다.

 

....

 

루터: 당신은 처음부터 이런 일이 불가능하며 우리의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 왔다. 이것이 당신에게는 해야만 하는 일일 수 있겠으나 우리에게 증 명을 요구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당신에게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 이다.

 

쯔빙글리: 그처럼 중요한 항목을 확정하고 가르치며 방어를 하면서도 성경의 한 구절도 가리킬 수 없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얼마나 터무니가 없는 일인가!

 

루터 (식탁보를 들어올리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 바로 성경이 여기에 있다 ... 우리 는 더 이상의 다른 것이 필요치 않다 ...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 이것은 나 의 몸이다(Hoc est corpus meum) - 여기에 있는 한, 나는 이것을 결코 무시할 수가 없으며, 다만 그리스도의 몸이 여기에 있음을 고백하고 믿어야만 한다 ...25)

 

쯔빙글리는 성경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의 몸이 부활 한 이후에도 언제나 한 번에 한 장소에 있었으며 한 번에 여러 장소에 계신 적이 없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쯔빙글리의 생각에 루터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혼동하여 한 번에 한 장소에만 있을 따름인 인성을 지닌 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곳에 계신 것으로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쯔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양성이 각각 구별이 되면서 순전성을 잃지 않은 채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에 많은 주의를 하였다.26) 쯔빙글리는 루터와의 논쟁 가운데 그리스도의 위격의 단일성을 유지하면서도 양성의 구별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교환’(alloiosi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쯔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양성 가운데 어느 한 본질의 이름을 가리키면서도 다른 한 본질을 이해하는 경우나, 혹은 양성 모두의 이름을 가리키면서도 단지 한 본질만을 이해하는 경우가 있음을 교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성경에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그의 신성에 따라서 혹은 그의 인성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그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고 할 때, 여기서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양성을 분명하게 구별할 때에라야, ‘내가 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는 말과 너희가 항상 나와 함께 있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모순이 없이, 전자는 신성에 따라서, 후자는 인성에 따라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계시며, 그가 또한 아버지의 우편에 계시다고 할 때, 이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리켜 하는 말이며, 인성에 따라서는 그의 몸이 하늘에 계시므로 성찬에는 있을 수 가 없음을 말하여 준다고 쯔빙글리는 강조하였다.27)

 

쯔빙글리의 생각에, 루터의 오류를 밝혀주는 또 다른 근거는 요 6: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는 말씀이었다. 쯔빙글리는 이 말씀이 바로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주장의 잘못을 드러내 준다고 생각하였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이 성찬을 통하여 상징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고 해석할 주장의 근거를 배척한다고 쯔빙글리는 주장하였다.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며 떡에 의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루터파들은 구원의 길을 그리스도의 죽음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의 두 가지 길로 제시한다고 쯔빙글리는 강하게 비판하였다.28)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6:63육은 무익하니라의 말씀은 쯔빙글리에게 성찬의 제정의 말씀 이것은 내 몸이다이다”(is)를 문자적 의미로 해석하여서는 안 되며, “상징하다”(signifies)의 비유적 의미로 해석하여야 할 분명한 성경적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자신은 성찬의 본질을 성찬의 제정의 말씀이 아니라 요 6:63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해한다고 주장하였다.29)

 

마르부르크 대담이 전혀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대담 이후에, 쯔빙글리의 성찬에 관한 견해에는 좀 더 적극적인 표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역사적으로 마르부르크 대담이후에 루터파는 쯔빙글리, 부처, 그리고 외콜람파디우스와의 친교와 성찬의 교체를 거부하였다. 루터파는 쯔빙글리파를 단지 친구로만 여길 뿐, 복음 안에 있는 형제로는 바라보지 않을 만큼, 루터파와 쯔빙글리파의 견해 차이는 더욱 공고해졌던 것이다.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빙글리의 성찬의 표현 가운데에는 임재,’(presence) ‘참된’(true), ‘성례전적’(sacramental)이라는 말이 좀 더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떡이 단지 이름뿐인 떡에 불과한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신앙 강해’(An Exposition of the Faith)에 덧붙인 부록에서, 쯔빙글리는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참으로 임재함을 믿는다. 실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임재가 없는 것을 주님의 성찬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31) 물론 그렇다고 하여 쯔빙글리가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의 임재나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육적으로 먹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32) 다만 그는 이러한 견해를 부정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참된 몸이 신앙을 통해서 주어짐을 말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표현을 위하여 영적이라는 말과 구별하여 성례전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는 독일 군주들에게 보내는 편지’(the Letter to the Princes of Germany)에서, 자신은 그리스도의 몸이 참으로,’ ‘성례전적으로,’ ‘신비하게성찬에 임하는 것을 결코 부정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33)

 

제네바 개혁파 칼빈의 영적 임재(Spiritual Presence)

 

대부분의 개혁파 교회에서 표준적인 성찬에 관련한 견해로 따르고 있는 칼빈의 교훈은 쯔빙글리의 후기의 견해에서 사용하는 표현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의미가 분명하게 사용하고 있다.34) 무엇보다도 칼빈은 성찬의 실체가 단지 떡과 포도주일 뿐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제시하는 것이 없이 단지 상징일 뿐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비판을 하였다.35) 칼빈에게 있어서 성찬은 단순한 표지(signum)만이 아니라 표지되는 것(res signata)을 아울러 제시하는(exhibeo) 것이었다.

 

...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그의 생명이 우리의 뼈와 골수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과도 같이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부어주시는 그의 살과 피에 거룩히 참여하는 일에 대해서 또한 성찬으로 증거하시고 인을 치신다. 이것은 한낱 헛되고 속이 비어 있는 표지를 제 시하는 것으로 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영으로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결과를 나타내 보임으로써 한 것이다. 비록 참된 믿음과 감사의 마음으로 그처럼 크고 너그러 운 은혜를 받아들이는 신자들만이 성찬의 유익을 누리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는 참으로 (truly) 성찬이 표지하는 실재(reality)를 영적인 잔치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에게 제시하 며(exhibits) 보여주신다. 실로 나는 떡을 떼는 일은 하나의 상징(symbol)이며, 상징이 되고 있는 그것 자체는 아닌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인정 하고 난 후에는 상징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표지되고 있는 것 자체가 또한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것이 올바르다 ... 그러므로 만일 주님께서 떡을 떼는 일을 통해 자신의 몸에 참여함을 참으로(truly) 나타내 보인다면, 주님이 자신의 몸을 참으로(truly) 제시하며 (exhibits) 보이고 있음을 조금도 의심하여서는 안 된다. 경건한 사람들이라면 주님께서 지정하신 상징들을 볼 때마 다 그것으로 표지되는 것이 참으로 확실히 임재하고 있음을 생각하고 확신해야 할 것이 다 ...36)

 

칼빈은 떡과 포도주가 단순히 상징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 상징들을 통하여 성찬의 신비 가운데 자신의 몸과 피를 참으로 제시하신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강조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만일 성찬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임재가 있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거룩한 성찬을 하찮고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것은 저주받을 신성모독과도 같은 것이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시적인 표지이면서, 주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수단이기 때문이다.37)

 

성찬이 한낱 빈껍데기뿐인 표지(nuda signa)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성을 드러내는 은혜의 수단임을 확신하는 것은 이 성찬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칼빈은 성찬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점들을 고려하여 제시하였다.

 

... 나는 이것의 본질을 친밀한 표현으로 설명하고자 할 때, 세 가지 점들을 제시하여 하곤 한다. 성찬이 의미하는 바, 성찬에 근거하고 있는 실체, 그리고 이 둘에 의한 결과 로 나타나는 힘 또는 효과가 그것이다. [성찬이] 의미하는 바는 약속 안에 담겨 있으며, 이 약속은 이를 테면 표지 안에 내포되어 있다. 실체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 시다. 효과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여 주시는 구속, 칭의, 성화, 영생, 그리고 기타 여러 은사들이다 ... 그러므로 나는 성찬의 신비 안에는 떡과 포도주의 상징으로써 그리스도, 곧 그의 몸과 피가 우리에게 참으로 제시되어짐(exhibited)을 말한다. 첫째는 우리로 하여금 그와 더불어 한 몸이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둘째로는 그의 실체 (substance)에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그의 모든 은혜에 참여 하는 가운데 이 사실을 느 낄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의를 전해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그의 몸과 피 안에서 모든 순종을 이루셨던 것이다.38)

 

칼빈은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가 단순한 외적 표지나 상징인 것으로만 이해하여서는 잘못임을 표현하기 위하여 제시하다’(exhibeo)라는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하였다. 칼빈은 이 표현을 가지고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우리를 위하여 제시되며, 주어지고 있음을 말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전제하고 이를 제시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표현이었다.39) 1549년에 취리히 개혁파 불링거(Heinrich Bullinger)와 제네바의 칼빈 사이에 있었던 스위스 개혁파의 신앙 일치를 위한 협의에서, 불링거는 제시하다’(exhibeo)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를 원하는 칼빈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 표현은 표지’(signum)표지되는 것’(res signata)의 관계가 너무나도 직접적인 상관성을 갖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성찬론에 관련한 부분이 아니라 기독론에 관련한 곳에서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 표현이 성찬의 이해와는 단지 암시적으로만 연결되도록 하는 것으로 불링거와 칼빈은 타협을 보았다.40)

 

베르카워(G. C. Berkouwer)에 따르면, 바빙크(Herman Bavinck)는 칼빈의 성찬론이 그리스도의 임재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바빙크는 쓰기를, 칼빈은 주의 성찬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재적이며 본질적이며 참된 임재를 한다는 사실을 견고하게 유지하기에 필요한 충분히 강한 표현을 좀처럼 찾지를 못 하였다고 하였다.41) 쯔빙글리의 성찬관이 단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이루신 은택들만 말할 뿐 그것 외에 다른 어떤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칼빈이 쯔빙글리에 대해 반대하였던 것임을 지적하면서, 바빙크는 칼빈의 성찬관에는 단순한 은택의 교통을 넘어서는 보다 더 깊은 교통, 곧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의 교통이며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과의 교통이 있음을 강조하였다.42) 요컨대, 바빙크는 칼빈에게 있어서의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는 쯔빙글리가 말하는 바와 같이 십자가에 죽으신 몸에서부터 신자들에게로 흘러 나가는 능력이 아니라, 한 인격으로서의 그리스도와의 교통, 곧 감추어진 그러나 매우 실재적인(real) 교통을 가리킨다고 강조하였다.43) 이 사실은 종종 분명하게 인식이 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바빙크는, 주의 성찬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와 대조적으로, 개혁신학도 그리스도의 실재적인(real), 참된(veracious) 임재, 곧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임재를 말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정리하였다. 즉 영적 임재는 참되고 본질적인 임재보다 못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더욱 더 그러하다는 것이다.44)

 

칼빈은 떡과 포도주를 단순한 외적 표지나 상징으로만 보는 것에 반대하면서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의 실재성을 강조하기는 하였지만, 동시에 화체설을 주장하는 천주교회나 떡과 포도주의 실체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가 같이 존재한다는 루터파 교회의 이해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칼빈은 천주교회나 루터파 교회가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의 실재성을 물체적 또는 장소적 임재(praesentia corporalist sive localis)로 잘못 이해하였다고 비판하였다.45) 칼빈의 생각에, 화체설은 그리스도께서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에 장소적으로 임재한다는 생각에 따라서 떡과 그리스도의 몸이 혼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치에도 맞지 않게 고안된 잘못된 이론이었다.

 

우리는 먼저 성찬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로마 교황청의 사술꾼들이 꾸몄던 것과 같은 식으로, 마치 그리스도의 몸이, 장소적으로 임하여(locally present), 손으로 집어, 이로 씹어, 목으로 삼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일은 꿈에서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 그들도 그리스도께서 성찬 안에 장소적 제한을 가지고 신체적으로 담겨 있을 수 없 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은 뒤에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하며 다른 이들에게 설명할 수도 없는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떡의 외형 안에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 요컨대, 축성에 의하여 이전에는 떡이었던 것 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말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 떡의 모양 아래 감추인 채 계신다 는 것이다 ... 그러므로 떡의 모양은 우리의 눈이 몸을 보지 못하도록 감추고 있는 가면 과도 같다는 것이다 ... 이러한 야만적인 상상의 원인은 이들이 축성을 마치 주술적인 주문과도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데에 있다. 마치 세례를 준 물이 그 자체로는 변화가 없으며 단지 약속의 말씀이 더하여졌을 때에 우리에게 대하여 이전과는 다른 것이 되기 시작하는 것처럼, 떡이 말씀을 받는 사람들에게만 성찬이 된다는 원리를 이들은 간과하 였다 ... 게다가 ... 적당한 방법으로 우리를 자신에게로 끌어 올리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므로, 그리스도에게로 오라고 우리를 부르면서도 단지 자신들의 완악성으로 인하 여 떡 아래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그리스도에게로 오라고 부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46)

 

화체설에 대한 칼빈의 반대는 화체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찬에의 임재를 장소적이며 신체적인 것으로 이해하여 마치 주술적 주문에 의하여 떡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변하는 것처럼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성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시는 방식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데에 이유가 있었다.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신체적, 장소적 임재에 의한 성찬을 통하여 그의 실제의 신체적 육과 피를 마심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땅에서 하늘로 이끌어 올리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의 화체설에 대한 반대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다는 그의 굳은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의 몸에 일반적인 변함이 없는 특징들에 의하여 제한을 받으며, 하늘에 받아들여진 바가 되셨으므로 하늘에 계시며 그가 심판을 위하여 돌아오실 때까 지 그곳에 계실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므로, 이와 같이 썩어질 요소들 아래에 그리스도를 다시 돌려놓거나 그것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전혀 타 당치 못한 것으로 판단한다.47)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며,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는 하늘에 계실 것이므로, 마치 떡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고 칼빈은 비판을 하였다.

 

동일한 이유로 칼빈은 루터파의 성찬의 이해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루터파는 화체설의 오류를 피하기 위하여 떡은 떡의 실체로 그대로 있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성의 실체가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으로 그 떡에 함께 있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였으나, 칼빈의 생각에 루터파도 또한 화체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성을 신체적인 임재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루터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편재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와 더불어 실체로 함께 한다고 그릇된 주장을 하였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 성찬의 떡은 참으로 이 땅의 썩어질 요소들의 실체이며 그 자체의 본질 로는 변화를 겪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몸을 그것의 아래에 봉하여 붙들고 있다고 말한다 ...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떡 안에 둠으로써 몸의 본질과는 어긋나는 편재성을 몸에게 부여하면서, 아울러 떡 아래에라는 말을 덧붙여서 몸이 그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의 미하기 때문에, 잠시 이들의 궤변 가운데 숨겨져 있는 것들을 끌어낼 필요가 있다 ...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광대하기 때문에 떡 아래에 숨 어 있는 것으로 말하곤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으로 강림하여야만 그리 스도의 몸과 교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그것 은 그들은 장소적 결합과 접촉 혹은 어떤 다른 포함하는 조잡한 형태가 아니면 몸과 피 에 참여하는 일에 대해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48)

 

부활하신 주님께서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마지막 날까지 하늘에 보관되어 머물러 계신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가르치고 계시는 성경이 명확한 교훈이라고 칼빈은 생각했다.49)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계시며, 또 몸은 본질상 편재성을 가지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루터파는 화체설을 주장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장소적 임재라는 잘못된 성찬 이해를 고집함으로써,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을 오해하였다고 칼빈은 루터파를 비판하였다.

 

칼빈이 화체설과 루터파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제시한 성찬론 이해의 핵심 원리는 다음의 두 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떡의 요소에 묶어 두지 않는 방식으로, 또는 그를 떡 속에 가두어 두지 않는 방식으로, 또는 그를 어떤 식으로든지 어떤 장소에 국한되도록 (circumscribe him in any way) 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확립하여야 한 다 ... 끝으로 그의 크기와 그를 분리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그를 동시에 많은 장소에 있도록 조각 조각 나누지 않는 방식으로, 그에게 하늘과 땅을 덮을 만큼 끝이 없는 광대함을 부여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임재를 확립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은 참된 인성과는 분명히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제한들을 결코 빼 앗기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1) 그리스도의 하늘의 영광을 가리는 어떤 것도 있어 서는 안 된다 -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썩어질 요소 아래에 놓이게 되거나, 어떤 이 땅 의 피조물에 묶이게 된다면 그러한 일이 있게 될 것이다. (2) 인간의 본성에 적합지 않은 것이 그의 몸에 돌려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 그리스도의 몸이 무한하다거나 동시 에 많은 장소에 놓이게 된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일이 있게 될 것이다.50)

 

칼빈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하늘의 영광을 훼손하지 않고, 또 그의 인성의 본질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원리에 일치하지 않으면 잘못된 성찬론이며, 로마교회의 화체설과 루터파의 견해가 그렇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만일 이 두 원리에 일치하기만 하면, 성찬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성에 대한 어떤 표현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합리한 것들만 배제된다면, 나는 주의 성찬의 신성한 상징들 아래 신 자들에게 제시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참되며 실체적인 참여를 표현하는 어떤 것이 든지, 그 표현으로 인하여 그들이 그것을 단지 상상이나 정신의 이해력으로만 받는 것 이 아니라 실체적으로 영생의 양식으로 누리는 것임을 이해한다면, 기꺼이 받을 용의가 있다.51)

 

화체설과 루터파의 견해를 비판하면서도 칼빈은 그리스도의 실체적 임재, 혹은 임재의 실재성을 계속적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주의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장소적이며 물체적인 임재를 거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참된 임재를 가르쳤다. 전자와 관련하여 화체설과 루터파의 교훈을 거부하였으며, 후자와 관련하여 쯔빙글리의 견해를 부정하였던 것이다. 전자와 관련하여 성찬의 객관적 실체를 장소적(local)이며, 물체적(corporeal)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후자와 관련하여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단지 상징일 뿐이며 이것을 주관적으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반대하였다.

 

그리스도의 몸의 물체적 임재도 아니면서, 또한 단순한 상징만이 아닌 성찬의 이해를 칼빈은 영적 임재로 이해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의 영적 임재란 장소적이며 물체적이지는 않지만 실체적인 임재를 뜻하였다. 영적 임재를 실체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성찬의 상징은 주관적인 신앙의 이해로만 남을 뿐이었으며, 칼빈은 이 점과 관련하여 쯔빙글리의 견해에 대해 반대를 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장소적이며 물체적이지는 않지만 실체적인 임재를 말하면서, 신자로 하여금 그것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연결을 성령의 능력으로 설명하였다.

 

... 그들은 떡 아래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삼키지 않으면 성찬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고 한다. 그러나 만일 성령의 불가해한 능력에 의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 여하게 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성령께 대하여 심각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 그 들은 영적으로 먹는 것(spiritual eating), 먹는 방식과 관련하여 말할 때, 자신들에게 는 [참되게 실제적으로 먹는 것이] 육적으로 먹는 것이지만, 참되게 실제적으로 먹는 것(true and real eating)에 어긋난다고 거짓되게 떠든다. 우리에게는 그 방식은 영적이 다. 왜냐하면 성령의 비밀한 능력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줄이기 때문이다.52)

 

결국 성령의 역사의 실재성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영적 실재와 그것에 대한 영적인 참여는 매우 실제적이며 실체적인 것이라고 칼빈은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 ‘영적인 참여를 단지 성찬의 유익을 누리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부족한 설명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을 먹음으로써 신자가 누리는 은택과 결과만을 단지 말할 뿐이라 고 비판하는 그들의 주장은 결코 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앞서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자신이 성찬의 실체이며, 결과는 그의 죽으심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에서 깨끗케 되었으며,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씻김을 받았고, 그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늘의 생명을 바라는 소망을 향해 일으킴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비롯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53)

 

앞에서도 이미 언급하였듯이, 칼빈은 성찬의 본질을 성찬의 의미를 밝혀주는 약속의 말씀, 그리고 성찬이 표지하는 실체, 그리고 약속의 말씀과 실체로 인하여 결과되는 여러 은택들의 세 가지 측면으로 구별하여 설명하였다.54)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은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영적 임재에 참여하여 영적으로 먹는다는 것’(spiritual eating)이 다만 약속의 말씀과 실체인 그리스도로 인한 영적인 은택에의 참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 자체인 그리스도에 참여함을 말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55) 그리고 그와 같은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의 참여함이란 성찬을 통하여 우리가 하늘로 들려 올라감으로써 그와 연합함을 의미하였다.56) 베르카워에 따르면, 이 점은 칼빈의 성찬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특징이며 본질적인 이해의 핵심이다. 칼빈이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하늘의 소재를 말하면서 우리가 성찬을 통해 그의 몸과 피를 먹음으로써 하늘에 올라가 그와 연합을 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성찬의 이해가 실체성이 있다고 주장할 때,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말로써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사역을 가리켰으며 루터파나 천주교회처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자연적 물체적인 요소들로서의 비인격적(de-personal) 실체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즉 칼빈은 성찬의 참여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그리스도의 인격과의 연합으로 주장하였으며, 루터파의 견해나 화체설은 물체적 실체를 통한 비인격적(de-personal) 연합으로 그릇되게 주장한 것으로 비판하였다.57)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영적으로 임재하며, 이 모든 것이 주관적인 상상이 아니라 참된 실체성을 지니는 것이 되도록 하며,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로 하여금 영적 먹음을 통하여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와 연합되도록 하는 일이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므로, 칼빈에게 있어서의 성찬은 오직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자에게만 의미를 갖는다.

 

... 여기에서 성찬을 먹는 것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나타났다. 왜냐하면 불경건하고 사 악한 사람들도 그들이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고 상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찬의 신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은 그 자 체로 우리의 영원한 구원 못지않게 영적인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 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수 없는 것은 미각이 없는 사람이 포도주의 맛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추론한다 ...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이 인간의 배 은망덕으로 인하여 약화되거나 간섭받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 하지만 제공 이 되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 그들은 미각이 없더라도 그리 스도의 살은 살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살이 신앙이라는 미각이 없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 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의 바구니에 담아 갈 수 있는 만큼만 이 성찬으로부터 담아간다고 주장한다 ... 그들은 반박하기를, 만일 사악한 사람들이 썩어질 떡 외에 다른 아무 것도 받지 못한다면, ‘이것은 내 몸이다는 말씀이 의미를 잃는다고 말한다. 이미 그 대답도 준비되어 있다 ... 그리스도의 몸과 살 은 하나님의 택한 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격이 없는 사람들(the unworthy)에게도 참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마치 빗물이 내리더라도 단단한 바윗돌 안으로 들어갈 곳이 없기 때문에 흘러내리는 것처럼, 악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할 정도로 완악한 마음으로 은혜를 배척한다.58)

 

루터파 성찬론과 화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칼빈이 불신자인 악인들이 성찬을 먹는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을 들어, 칼빈은 성찬의 객관적 실체성을 부정한다고 비판을 하였다.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장소적이며 물체적인 임재를 주장하는 루터파들과 화체설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불신자들도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관점에서 불신자들이 성찬을 먹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칼빈의 영적 임재가 주관적인 것에 불과한 것임을 말하여 주는 증거였다.59) 그러나 칼빈은 주는 것(offerre)과 받는 것(recipere)구별함으로써 성찬과 신앙의 관계 안에서 성찬의 객관적 실체성을 증거했다.60) 성찬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참으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칼빈의 성찬은 어느 정도 자체로서의 유효성을(ex opere operato) 갖는다. 그러나 모두가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영원한 작정 가운데 선택을 받은 자들만이 성찬을 통하여 은택을 누릴 수 있는 믿음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누린다.61)

 

끝으로 칼빈은 루터파와 더불어 주의 성찬에 희생제사의 개념을 더하는 천주교회의 미사 교리를 배척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오직 단 한번으로 충분하며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사는 유일하며 완전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이외에 희생 제사를 드릴 또 다른 제사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 되므로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칼빈은 비판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전한 희생 제물로 우리를 위하여 드려졌음에도 또 희생제물을 드려야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가리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었다. 셋째로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가리며, 따라서 넷째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오는 영적 유익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오류를 범하게 한다고 칼빈은 비판하였다. 결국에 미사는 성찬을 통해 누려야 할 구원의 기쁨과 새 생명의 계속적인 확인을 폐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유익을 위하여 매일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성찬을 폐기한다고 칼빈은 강하게 비판을 하였다.62)

 

칼빈에게 있어서, 성찬은 희생 제사이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돕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보증하여 주기 위하여 제정하신 은혜의 수단이었다.63) 동시에 성찬에는 우리에게 기대되는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영원한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잊지 말고 합당한 찬양으로써 고백하며 선포하라는 뜻이며, 다른 하나는 순결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서로 사랑과 화평을 권장하고 증진하라는 뜻이다.64) 이에 근거하여 칼빈은 합당치 못하게 성찬에 참여하는 자란 성찬의 목적과 어긋나게 참여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해석하였다. 곧 그리스도의 몸이 영원한 생명의 은혜인 것을 알지 못한 채 참여하거나, 거룩하고 깨끗한 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고자 하는 열망도 없이, 서로 지체로서 사랑과 화평을 증진하지 않으면서 참여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말하였다.65)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믿음과 사랑이라는 성찬의 목적에 합당한 상태를 완전히 이룬 자들만이 성찬을 받을 만한 자로 간주하여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왜냐하면 만일 그러한 기준에 따라서 판단한다면 아무도 성찬에 참여할 수가 없으며, 우리에게는 절망과 멸망만이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66) 성찬은 병자를 위한 약이며 죄인을 위한 위로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칼빈은 성찬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주신 은혜의 수단이라는 점을 환기시켰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찬에 참여하기에 합당함이란 무엇보다도 첫째 우리들 자신에게는 어떠한 것도 의지하지 않은 채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는 가이며, 둘째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하나님께 드릴 만한 충분한 사랑이 있는 가라고 칼빈은 정리하였다.67)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칼빈은 성찬을 가능한한 자주 거행하라고 권면하였다.68) 성찬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이었다.

 

나가는 말

 

한국 장로교회 신학의 중심에 서 있는 칼빈의 성찬론을69) 살펴보는 일은 중세 교회가 13세기에 공식교리로 확정한 화체설을 받은 천주교회와, 루터파, 그리고 취리히 개혁파 쯔빙글리의 성찬론를 비교하는 작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견해들의 개괄적인 특징들을 비교하여 보면, 성찬에 임하는 실체와 관련하여 화체설은 오직 그리스도의 몸과 피만이 유일한 성찬의 실체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던스 스코투스의 공재설과 루터파의 공재설은 떡과 포도주의 실체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가 각각 동시에 성찬에 임한다고 생각한다. 쯔빙글리는 이와 정반대로 성찬에는 단지 떡과 포도주의 실체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성찬에는 떡과 포도주가 실체로 임하고 있음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영적으로 임재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 모든 견해들은 다 같이 동의하는 것은 성찬의 실체를 어떻게 이해하든지 간에 입에서 느껴지는 맛과 같은 것은 떡과 포도주의 것이라는 점이다.

 

성찬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임재의 방식과 관련하여, 화체설과 스코투스의 공재설은 장소적이며 육체적인 임재를 말하는 반면에, 루터파의 공재설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편재성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비장소적이며 제한적인 임재를 말한다. 쯔빙글리는 상징적 임재를 말하는 것으로 요약이 되지만, 후기의 쯔빙글리는 단순한 상징을 넘어서서 다소 불분명하지만 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임재를 말하는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 칼빈은 영적인 임재를 말하며 그 영적 임재가 참이며 실체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 실체성은 영적이기 때문에 장소적이거나 물체적이지 않다.

 

성찬의 유효성과 관련하여 화체설, 스코투스 공재설, 그리고 루터파 공재설은 모두 불경건한 악인들도 성찬에 임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성례의 객관주의와는 반대로, 쯔빙글리와 칼빈은 이것을 부정한다. 화체설, 스코투스의 공재설, 루터파 공재설, 그리고 칼빈의 영적 임재설은 쯔빙글리를 제외하고 모두가 성찬을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 생각한다.

 

종합적으로 볼 때,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본 칼빈의 성찬론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영적 실상을 더욱 공고히 하여 주는 객관성이라는 측면에서 적어도 초기의 쯔빙글리의 것과 확연히 구분이 된다. 단순히 신앙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올려져 그와 연합하는 은혜가 객관적이며 실재적으로 있을 것을 약속하고 있는 칼빈의 성찬의 이해가 확고해지고, 또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성찬이 한국 교회 안에서 보다 더 자주 올바르게 시행 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David Steinmetz, "Scripture and the Lord's Supper in Luther's Theology," in Luther in Context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5), p. 72.

 

2) David Steinmetz, "Calvin and the First Commandment," in Calvin in Context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pp. 53-63.

 

3) G. R. Evans ed., The Medieval Theologians (Oxford: Blackwell Publishers Ltd., 2001), p. 81; Geoffrey W. Bromiley, Historical Theology: An Introduction (Grand Rapids, MI: Eerdmans Publishing Co., 1978; reprinted by Wipf and Stock Publishers, 1998), pp. 159-165; William C. Placher, Readings in the History of Christian Theology vol. 1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88), pp. 139-143.

 

4) George E. McCracken, ed., "Ratramnus of Corbie: Christ's Body and Blood: Introduction," in Early Medieval Theology, LCC vol. IX (Philadelphia, PA: The Westminster Press, 1957), p. 110.

 

5) George E. McCracken, ed., "Paschasius Radbertus of Corbie: The Lord's Body and Blood (Selection): Introduction," in Early Medieval Theology, pp. 90-93. 라드베르투스의 글의 일부를 살펴보기 원하면, "Paschasius Radbertus of Corbie: The Lord's Body and Blood (Selection): The Text," pp. 94-108을 볼 것.

 

6) "Ratramnus of Corbie: Christ's Body and Blood: Introduction," p. 111. 라트람누스의 글의 전문을 보기 원하면, "Ratramnus of Corbie: Christ's Body and Blood: The Text," pp. 118-147을 볼 것.

 

7) David Knowles, The Evolution of Medieval Thought (London and New York: Longman Group Limited, 1988, 2nd edition), pp. 86-87; G. R. Evans, Philosophy &Theology in the Middle Age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3), pp. 97-98; G. R. Evans, ed., The Medieval Theologians, pp. 86-89.

 

8) G. R. Evans, Philosophy &Theology in the Middle Ages, p. 105; Reinhold Seeberg, Text-Book of the History of Doctrines vol. II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3 3rd printing), p. 75.

 

9) G. R. Evans, ed., The Medieval Theologians, p. 87.

 

10) G. R. Evans, Philosophy &Theology in the Middle Ages, p. 98; Text-Book of the History of Doctrines vol. II, p. 76.

 

11) 에반스(G. R. Evans)는 소위 화체’(transubstantio)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 뚜르네이의 시몬(Simon of Tournei)일 것으로 추정한다. 12세기 이후의 중세의 중요한 성찬 논의에 대한 요점을 간략히 파악하기 위하여서는 Philosophy &Theology in the Middle Ages, pp. 97-108을 참조할 것.

 

12) Henricus Denziner, Enchiridion Symbolorum (Freiburg: Verlag Herder, 1932), art., 430; Norman P. Tanner, ed., Decrees of the Ecumenical Councils vol. II (London and Washington DC: Sheed &Ward and Georgetown University Press, 1990), p. 230: “... Iesus Christus, cuius corpus et sanguis in sacramento altaris sub speciebus panis et vini veraciter continentur, transsubstantiatis pane in corpus, et vino in sanguinem potestate divina ...”

 

13) Henricus Denziner, Enchiridion Symbolorum, art. 877; Decrees of the Ecumenical Councils vol. II, p. 695: “... per consecrationem panis et vini conversionem fieri totius substantiae panis in substantiam corporis Christi domini nostri et totius substantiae vini in substantiam sanguinis eius. Quae conversio convenienter et proprie a sancta catholica ecclesia transsubstantiatio est appellata.”

 

14) Summa Theologica, 3a. 75. 1.

 

15) Summa Theologica, 3a. 75. 4. 아퀴나스의 이 주장은 그대로 트렌트공의회(1551) 13 속회에서 공식적인 천주 교회의 교리로 그대로 반영이 되고 있다. 각주 13을 참조할 것.

 

16) Summa Theologica, 3a. 76. 1 ad. 3: "facta conversione panis in corpus Christi vel vini in sanguinem, accidentia utriusque remanent. Ex quo patet quod dimensiones panis vel vini non convertuntur in dimensiones corporis Christ, sed substantia in substantiam. Et sic substantia corporis Christi vel sanguinis est in hoc sacramento ex vi sacramenti, non autem dimensiones corporis vel sanguinis Christi. Unde patet quod corpus Christi est in hoc sacramento per modum substantiae, et non per modum quantitatis."

 

17) 아퀴나스의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초한 것으로, 우유성은 실체와 구별이 되는 비본질적 속성들(non-essential properties)이며, (quantity), (quality), 관계(relation), 장소(place), 시간(time), 자세(position), 소유(possession), 능동(action), 수동(passion) 등으로 구별이 된다. 아퀴나스 철학과 신학에 있어서의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이해와 사용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면 Joseph Bobik, Aquinas on Matter and Form and Elements (Notre Dame, IN: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98)H. D. Gardeil,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St. Thomas Aquinas: IV Metaphysics (St. Louis, MO: B. Herder Book Co., 1967)를 볼 것. 이러한 화체설은 이미 11 세기에 베렝가리우스가 지적하였던 바와 같이 우유성이 자신을 담고 있던 실체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실체가 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약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비판을 받았다. Frederick Copleston, A History of Philosophy: 2 MediaevalPhilosophy, Augustine to Scotus (Westminster, MD: The Newman Press, 1962), p. 145. 하지만 화체설에 대한 이와 같은 철학적 비판에 대하여 던스 스코투스(Duns Scotus)는 우유성이 자신을 담고 있는 실체가 없이도 독립적으로 개체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반박한다. 스코투스의 아퀴나스에 대한 비판은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전개되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에 함께 하고 있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스코투스는 몸이 어떤 장소에 존재하는 두 가지 방식, 곧 몸이 다른 어떤 곳에서 이동하여 오는 방식과 몸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몸으로 변화하여 나타나 존재하는 방식 가운데 아퀴나스가 택한 두 번째 방식의 화체설이 아닌, 첫 번째의 공간 이동(local motion)의 방식에 의하여 설명하였다. 화체설은 우유성과 상관없이 실체만 변화하였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실제로 떡은 주님의 몸의 실체로 변화하였다 하더라도, 변화된 주님의 몸은 공간이라는 우유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므로, 주님의 몸은 하늘에서 공간을 그대로 점유 하고 계신 것이 되며, 그렇다면 실제로는 주님의 몸이 성찬에 임한 것이 아닌 것이 된다. 따라서 스코투스는 주님의 몸이 하늘에 그대로 계시면서, 성찬의 제단에도 동시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사제의 축성에 따라 역사하시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였다. 스코투스의 이러한 설명은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을 떠나지 않은 채, 떡의 실체와 동일한 장소에 떡의 실체와 함께 존재함을 주장한다는 의미에서 공재설(consubstantiatio)이라 일컬어진다. Richard Cross, Duns Scotus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pp. 139-143; Richard A. Muller, s.v. "consubstantiatio," in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House, 1985), pp. 80-81.

 

18) Summa Theologica, 3a. 75. 5: "... sensu apparet, facta consecratione, omnia accidentia panis et vini remanere. Quod quidem rationabiliter per divinam providentiam fit. Primo quidem, quia non est consuetum hominibus, sed horribile, carnem hominis comedere et sanguinem bibere ... Secundo, ne hoc sacramentum ab infidelibus irrideretur, si sub specie propria Dominum nostrum manducemus. Tertio ut, dum invisibiliter corpus et sanguinem Domini nostri sumimus, hoc proficiat ad meritum fidei."

 

19) Werner Elert, The Structure of Lutheranism, trans. by Walter A. Hansen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62), p. 305; David Steinmetz, Luter in Context, 73.

 

20) Martin Luther,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from Luther's Works 36, quoted from Eric Lund,, ed., Documents from the History of Lutheranism 1517-1750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2002), p. 50.

 

21) Martin Luther, The Adoration of the Sacrament (April 1523) from Luther's Works 36, quoted from Documents from the History of Lutheranism 1517-1750, p. 51.

 

22) David Steinmetz, "Scripture and the Lord's Supper in Luther's Theology," p. 75.

 

23) 루터는 자신의 논지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제시한다. “이 문제와 관련한 나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신앙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 안에서 본질적이며, 실체적이며, 참되며, 완전한 하나님과 사람이시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우편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되거나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넷째는 하나님은 어떤 장소에 단 한 가지 방식으로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임재하시며 또 그렇게 하실 줄을 아신다 ...” Martin Luther, Confession concerning Christ's Supper (March 1528) from Luther's Works 37, quoted from Documents from the History of Lutheranism 1517-1750, p. 54. 성찬과 관련한 루터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루터파 신학 안에서 그리스도의 위격과 관련하여 개혁파와 구별이 되는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proprietatum)와 연결이 된다.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에게 있어서의 양성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속성의 영역’(genus idiomaticum)에 덧붙여 존귀의 영역’(genus maiestaticum)을 말하는 루터파와는 달리, 개혁파는 전자만을 인정하며, 사역의 영역’(genus apotelesmaticum)에 있어서의 속성의 교류의 이해를 개혁파와 루터파는 서로 다르게 해석을 한다. 이 중에서 특별히 성찬에 관련한 것은 존귀의 영역인데, 루터파는 그리스도의 위격의 연합으로 인하여 신성의 위격이 인성의 위격이 되었으므로, 인성은 이제 신성의 속성에 참여케 되며, 그 결과로 신성의 영광과 존귀를 누리게 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성찬에 임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신성이 인성의 속성에 의하여 제한을 받거나, 인성이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을 위하여서는 Heinrich Schmid, The Doctrinal Theology of the Evangelical Lutheran Church, trans. by Charles A. Hay and Henry E. Jacobs (Minneapolis, MN: Augsburg Publishing House, 1899; 1961 reprinted), pp. 313-337; Richard A. Muller, s.v. "communicatio idiomatum/communicatio proprietatum," in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pp. 72-74.

 

24) Heinrich Schmid, The Doctrinal Theology of the Evangelical Lutheran Church,, p. 563; Richard A. Muller, s.v. "praesentia" in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pp. 239-240.

 

25) The Marburg Colloquy (1529) from Donald Ziegler, ed., Great Debates of the Reformation (New York: Random House, 1969), pp. 93-94, 97-98, quoted from Documents from the History of Lutheranism 1517-1750, pp. 55-56.

 

26) W. P. Stephens, Zwingli: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p. 102.

 

27) 뚜렷한 양성의 구별을 강조하는 이러한 설명으로 인하여 쯔빙글리는 루터파에 의해 네스토리안의 오류에 빠져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보다 자세한 내용을 위하여, W. P. Stephens, The Theology of Huldrych Zwingli (Oxford: Clarendon Press, 1986), pp. 112-118; idem, Zwingli: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pp. 101-102를 볼 것.

 

28) W. P. Stephens, Zwingli: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p. 100.

 

29) 쯔빙글리의 이러한 주장을 옮기면서, 루터파 신학자 프란시스 피이퍼(Francis Pieper)는 요 6:63은 성찬과는 관련성이 없는 본문이며, 특별히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의 은 성찬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하여 말하는 바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함으로써 쯔빙글리는 스스로 자신이 성경에 근거하여 성찬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자신의 상상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을 한다. Francis Pieper, Christian Dogmatics III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53), p. 332.

 

30)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유럽에 있는 루터파와 쯔빙글리파는, 연합교회(the United churches), 왈도파(the Waldensian church)와 체코 형제단 교회(the church of Czech Brethren)를 포함하여, ‘마르부르크 대담이 있은 후 450여년이 지난 1973년에 루웬베르크 협약’(the Leuenberg Concord)을 맺으면서, 성찬으로 인한 분열을 해소하였다. http://www.leuenberg.net/english/en-a-002.html에서 루웬베르크 협약의 전문을 불 수 있음.

 

31) W. P. Stephens, Zwingli: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p. 105.

 

32) 참고로 영적으로 먹는 것에 대하여 쯔빙글리의 설명을 붙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몸을 영적으로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과 선하심을 심령과 영혼으로 신뢰한다는 것, 즉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화해케 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영원한 구원의 기쁨을 주셨음을 흔들림이 없는 확고한 신앙을 갖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좀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성례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성찬과 함께 마음과 이성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먹기 위하여 주의 성찬에 임할 때, ... 당신이 당신의 형제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인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일에 참여할 때, 참된 의미에서의 당신은 그를 성례전적으로 먹는 것이다.” Huldrych Zwingli, "The Presence of the Body of Christ in the Supper," in Exposition of Faith, from Zwingli and Bullinger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53), quoted from William Stacy Johnson and John H. Leith, eds., Reformed Reader: A Sourcebook in Christian Theology vol. 1 (Louisville, KT: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3), pp. 314-315.

 

33) W. P. Stephens, The Theology of Huldrych Zwingli, p. 250; idem, Zwingli: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p. 106.

 

34) 하지만 칼빈이 쯔빙글리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살펴보면, 쯔빙글리의 후기의 표현들에 대해서 칼빈이 지식이 없거나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던으로 여겨진다. 칼빈은, 자신을 비롯한 개혁파 신학자들이 성찬을 내용이 없는 빈 상징으로 간주한다는 루터파 신학자 베스트팔(Westphal)의 비난에 대해 반박하는 글(1556)에서, 자신이 루터의 글에서 외콜람파디우스와 쯔빙글리가 단지 내용이 없이 비어 있는 상징이나 비유이외에는 아무 것도 성찬에 남겨놓지 않았다는 것을 읽었으며, 이들의 글에 대해서 자신의 반대의 견해를 취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오랜 동안 그들의 글을 읽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John Calvin, Second Defence of the Pious and Orthodox Faith concerning the Sacraments in answer to the Calumnies of Joachim Westphal, quoted from François Wendel, Calvin: Origins and Development of His Religious Thought, trans. by Philip Mairet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7 1st Baker Book edition), p. 333. http://www.godrules.net/library/calvin/142calvin_b11.htm에서 위의 글 전문을 볼 수 있으므로 참조할 것. 칼빈이 쯔빙글리의 성례관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그는 1539년에 앙드레 제베디(André Zébédéé)에게 보낸 편지에서 쯔빙글리의 성례관이 잘못된 것이며 위태로운 것이라고 썼던 것이다. 후에 이 사실이 드러나자, 칼빈은, 제베디가 신의를 버리고 이것을 드러냈다고 불평하면서, 1555년에 불링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쯔빙글리의 교훈을 잘못된 것이라고 일컬은 적이 없다고 변명을 하였다. Corpus Reformatorum XV. 573, quoted from John T McNeill, ed., and Ford Lewis Battles, trans., John Calvin,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vol. 2. 14. 13, n. 21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60), p. 1288. 아마도 쯔빙글리의 후기의 견해가 칼빈의 견해와 어느 정도 근사한지에 대해서는 새로운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쯔빙글리의 후기의 표현들, ‘참으로,’ ‘성례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등이 어느 정도의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규명한 연구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만일 쯔빙글리가 칼빈이 동일한 표현으로 말하고자 하였던 것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내용을 말한 것으로 규명이 된다면, 개혁파의 견해는 사실상 내용적으로는 하나인 것으로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칼빈이 말하는 바의 참된 성례전적 그리스도의 임재가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재성(reality)을 결코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학계의 판단이 견고한 만큼, 상징적 견해로 대표되는 쯔빙글리의 성찬론은 후기의 관점을 고려하더라도, 그 표현들만 동일할 뿐, 내용은 구별이 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35) Institutes, 4. 17. 6.

 

36) Institutes, 4. 17. 10.

 

37) John Calvin, Short Treatise on the Lord's Supper in Calvin's Tracts and Treatises, trans. Henry Beveridge, vol. 2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9; Grand Rapids: Eerdmans, 1958 reprint), quoted from William Stacy Johnson and John H. Leith, eds., Reformed Reader: A Sourcebook in Christian Theology vol. 1 (Louisville, KY: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3), p. 317, 318.

 

38) Institutes, 4. 17. 11.

 

39) 칼빈은 제시하다’(exhibeo)라는 표현을 1559년판 기독교 강요 제 417장에서만 적어도 17번을 사용하고 있다. Timothy George, "John Calvin and the Agreement of Zurich (1549)," in John Calvin &the Church: a Prism of Reform, edited by Timothy George (Louisville, KY: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0), p. 49. 1541년에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이 칼빈의 견해를 고려하여 개신교의 일치를 위하여 아우그스부르크 고백(Augsburg Confession)의 일부를 수정하였는데, 이른바 아우그스부르크 수정판(Augustana variata)에서 그는 제 10항의 일부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주의 성찬에서 먹는 자들에게 참으로 임하며 나누어진다(vere adsint et distribuantur)”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주의 성찬에서 먹는 자들에게 떡과 포도주와 함께 제시된다(cum pane et vino vere exhibeantur)”고 수정하였다. 칼빈이 이 변형을 기뻐하며 고백서에 서명을 한 것은 물론이었다. ibid., p. 44.

 

40) Exhibeo의 표현이 사용된 취리히 협약’(Consensus Tigurinus)의 기독론 부분은 제 5항이며, 그것의 영역은 다음과 같다: "Article 5. How Christ Communicates Himself to Us.: Moreover, in order that Christ may exhibit himself to us in this way and produce these effects in us, we must be made one with him and grow together into his body. For he does not pour out his life into us unless he is our head from which the whole body, compacted and connected through every joint of supply, makes for the increase of each member of the body by proportion according to his working." ‘취리히 협약의 전문을 보기 원하면http://www.creeds.net/reformed/Tigurinus/tigur-bunt.htm을 볼 것.

 

41) H. Bavinck, "Calvijns leer over het avondmaal," in Kennis en leven, 1922, p. 171, quoted from G. C. Berkouwer, The Sacraments, trans. by Hugo Bekker (Grand Rapids, MI: Eerdmans, 1969), p. 225.

 

42) H. Bavinck, "Calvijns leer over het avondmaal," p. 173, 176, quoted from G. C. Berkouwer, The Sacraments, p. 226.

 

43) H. Bavinck, "Calvijns leer over het avondmaal," p. 176, 177, quoted from G. C. Berkouwer, The Sacraments, p. 226.

 

44) H. Bavinck, "Calvijns leer over het avondmaal," p. 181, 182, quoted from G. C. Berkouwer, The Sacraments, p. 226.

 

45) 루터파의 견해는 장소적이며 육체적(localis sive corporalis)이 아니며, 비장소적이며 제한적(illocalis sive definitiva)인 임재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 루터파 학자들의 주장이지만, 칼빈을 비롯한 개혁파 학자들은 루터파에 대한 이러한 구별을 두지 않은 채, 일반적인 공재설로 루터파의 견해를 비판을 한다. 예를 들어,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3, 19. q. 28. 1, (Phillipsburg, NJ: P&R Pub., 1997), p. 505.

 

46) Institutes, 4. 17. 12, 13, 15.

 

47) Institutes, 4. 17. 12.

 

48) Institutes, 4. 17. 16,

 

49) Institutes, 4. 17. 26.

 

50) Institutes, 4. 17. 19.

 

51) Institutes, 4. 17. 19

 

52) Institutes, 4. 17. 33. 칼빈은 성찬과 신자를 연결하여 영적으로 임하여 있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도록 하는 연합의 줄을 1712항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표현한다: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를 하기 위하여 이것은[=그리스도의 장소적 임재]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영혼과 몸으로 그와 하나가 되는 은혜를 부여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연합의 끈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를 그에게 연합케 하시며,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이 우리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수로(channel)가 된다.”

 

53) Institutes, 4. 17. 33.

 

54) Institutes, 4. 17. 11. 본 논고 12쪽을 참조할 것.

 

55) 장소적이며 물체적인 임재가 아닌 영적인 임재는 실체적(substantial)이라고 할 수 없다는 루터파의 비판에 대해서 칼빈의 답변은 분명하다. 영적인 임재도 실체적이라는 것이다. 골위처(H. Gollwitzer)는 칼빈에게 있어서의 세 가지 다른 의미로서의 실체의 용례를 구별하여 준다. 하나는 물체적 실체로서 그리스도의 실재적(real)이며 자연적인 몸을 가리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성례의 실체로서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의미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적 은택의 실체로서, 영적 실체(spiritual substance)이다. 골위처의 구별에 따른다면, 칼빈은 영적 임재영적으로 먹음이 실체적이라고 주장할 때, 그의 의미는 위의 세 가지 중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성례의 실체영적 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칼빈이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의 자연적 실체의 임재에 대해서 반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의 성례전적, 영적인 실체를 강조하는 것에는 아무런 논리적 모순이 있지 않게 된다. Helmut Gollwitzer, Coena Domini, (Munich, 1934), p. 120f., quoted from François Wendel, Calvin: Origins and Development of His Religious Thought, p. 342.

 

56) Institutes, 4, 17, 18, 31.

 

57) G. C. Berkouwer, The Sacraments, p. 228.

 

58) Institutes, 4, 17, 33.

 

59) G. C. Berkouwer, The Sacraments, pp. 244-245.

 

60) G. C. Berkouwer, The Sacraments, p. 251.

 

61) Timothy George, "John Calvin and the Agreement of Zurich (1549)," p. 52.

 

62) Institutes, 4, 18, 1-7.

 

63) Institutes, 4, 14, 1-6; 17. 1-3.

 

64) Institutes, 4, 17. 37, 38.

 

65) Institutes, 4, 17. 40.

 

66) Institutes, 4, 17. 41.

 

67) Institutes, 4, 17. 42.

 

68) Institutes, 4, 17. 44, 46.

 

69) 한국 장로교회가 교단을 망라하여 공식적인 신앙고백서로 받고 있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성찬론의 교리가 칼빈의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할 때에, 칼빈의 성찬론은 곧 장로교회의 성찬론으로 일컬어질 수 있다. 최근에 성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임재의 본질과 관련하여 칼빈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이며, 그럴 때에 칼빈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가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 있었던 논의의 흐름을 살펴보기 위하여서는 Ligon Duncan, "True Communion with Christ in the Lord's Supper: Calvin, Westminster and the Nature of Christ's Sacramental Presence," in The Westminster Confession in to the 21st Century vol. 2, edited by Ligon Duncan (Fearn: Mentor, 2004), pp. 429-475을 참조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