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
- 이승구 교수(합신대학원대학교)
기독교는 다른 종교나 사상과는 달리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존재하시나, 이 삼위가 일체이시어서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신(the triune God)이시라는 이해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유신론은 다른 유신론과는 구별되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 이 유신론을 특별히 "기독교 유신론"(Christian theism)으로 지칭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1) 따라서, 이 기독교 유신론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기독교를 바로 이해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다는 이해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명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성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을 믿는 태도에서 겸손히 순종하는 이성을 사용해서 그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묘사해 보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진술해 보려는 노력 자체도2)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라는 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술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1)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계시다고 할 때에 이 "삼위"(three persons)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대해서 사용된 "위격"(person)의 의미는 과연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인간에게 대해 사용하는 "인격"(person)의 의미와 하나님께 대해서 사용하는 "위격"(person)의 의미는 과연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연관될 수 있을 것인가? (2)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께서 "일체"이시라고 할 때 그 일체성(unity)의 의미는 무엇인가? 삼위가 한 류(類, genus)에 속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가? 아니면 요즈음 어떤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사회적 삼위일체"란 말인가? 이 때 "사회적 삼위일체"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3)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계시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칼시돈 신조 등에서 정식화된 삼위일체 이해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4) 하나님께서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당신님께 대해 드러내신 당신님의 삼위일체성과 역사 이전에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들 문제 가운데서 나는 이 소논문에서 마지막에 진술한 문제, 즉 전통적으로 경륜적 삼위일체(혹은 경세론적 삼위일체)와 존재론적 삼위일체(혹은 내재적 삼위일체, 본체론적 삼위일체)로 불러온 것의 관계 문제를 검토해 보려고 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경륜(오이코노미아, οι"κονομι"α) 가운데서 당신님에게 대하여 드러내신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말한다. 따라서 경륜 가운데서 드러난 삼위일체란 의미에서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 또는 계시의 삼위일체(the Trinity of revelation)란 용어가 사용되어 온 것이다.3) 융엘이 말하는 대로 "경륜적 삼위일체 교리는 사람과 그의 세계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한다."4) 이에 비해서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경륜 이전에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의 삼위일체성을 말한다. 즉, 존재론적 삼위일체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와 관련 없이 하나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며,5)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존재의 내재적 존재적 구조"(the immanent ontic structure of the being of God)를 묘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6) 그래서 그의 존재 자체의 삼위일체성이란 의미에서 "존재론적(혹 본체론적) 삼위일체"(ontological Trinity), "영원한 삼위일체"(eternal Trinity), "본질적 삼위일체"(essential Trinity), 또는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로 불리기도 한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경륜적 삼위일체와 본질적 삼위일체의 구분이 18세기의 우를스페르거(Johann August Urlsperger, 1728-1806)에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7) 그러나 개념 자체는 그 이전의 신학자들의 글에서도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그 이전에는 의식적인 구별 없이 그 둘을 다루어 왔다면, 삼위일체의 본체론적 측면을 무시하고 나아가려는 분위기의 고조와 더불어서 이 용어의 구체적인 사용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터툴리안에 의해서 양태론이 거부된 후로부터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구별하는 것이 상례였다고, 특히 카파도기아 신학은 이 둘을 명확히 구별하였다고 말하는 몰트만의 진술이 더 옳다고 할 수 있다.8)
이 글에서 나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보는 고전적 관점을 개혁신학에서의 진술을 중심으로 묘사하고 검토해 보려고 한다. 삼위일체에 대한 고전적 관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구별해서 보자면 동방신학의 관점과 서방신학의 관점을 구별할 수 있고, 특히 종교개혁 이후의 철저한 입장과 그 이전의 입장을 구별해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신학적 관점들에는 일관해서 나타나고 있는 어떤 공통적 양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이들을 구체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이 모든 관점을 포괄하는 입장을 고전적 관점이라는 표제로 제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개혁신학에서의 고전적 표현을 중심으로 고전적 관점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삼위일체에 대한 고전적 관점을 단적으로 진술하자면 다음과 같은 명제로 그 입장을 진술할 수 있을 것이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이고,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이다."
I. 기본적 진술
개혁신학이 그 한 예가 되는 고전적 관점에서는 위의 명제가 잘 지시해 주듯이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본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경륜을 통해서 하나님이 삼위일체적 존재이심을 알게 된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적 존재이심은 이 세상에 대한 경륜에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의 관계 이전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이미 삼위일체적이시다; (3) 이렇게 영원부터 삼위일체적 하나님이시므로, 그의 경륜 과정에서 당신님을 삼위일체적으로 드러내시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진술의 과정을 취한다면 고전적 삼위일체론의 사유는 다음 세 가지 과정을 거쳐서 진행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이 있게 된다. 즉, 먼저 하나님의 창조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과정을 살피면서, 그 가운데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임하심과 그의 계시, 그의 승천 이후에 교회에 임하신 성령과 그의 사역 및 그에 대한 교회의 반응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그리고 그리스도 이후에 아버지와 아들이 보내시는 성령(요 14:26, 15:26, 16:7)이 삼위일체적 하나님이심을 인식하게 되는 일이 앞서게 된다. 그리고 이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서 이 삼위간의 관계의 일부를 알게 된다. 즉 성부와 성자가 그 이름 그대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가지신 분이며, 그리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보냄을 받으시는 분임을 알게 된다.(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
그리고 둘째로, 그리스도와 성령의 계시 중에서 이런 삼위일체적 관계를 확증하며, 그 관계를 삼위간의 영원한 관계로 지시하는 진술들을 만나게 된다. 즉, 요한 복음에 나타난 "독생자"(모노게네스, μονογενη"?)란 진술, 그것도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란 진술은, 시편에 있는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는 진술과 함께 (또는 그 시편 진술을 넘어서서) 성자는 그 관계성에 있어서 영원의 영역에서 아버지에 의해서 "낳아지신 분"이라는 인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성육신 하시기 전부터 영원의 영역에서 아버지에 의해서 낳아지신 분이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여기에 오리겐의 좀 철학적인 "영원하신 낳으심"(eternal generation) 개념이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영원성에 대한 좋은 주석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셋째로 위의 제 2 단계의 사유의 도움을 얻어서 삼위간의 경륜적 관계를 영원에도 적용시켜서 아버지는 영원히 아들을 낳으시는 분이시고,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낳아지시는 분이시며,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보냄을 받는("나오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이해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고전적 삼위일체론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그 관계성을 영원한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에 적용하여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크게 강조한 것은 하나님은 경륜적 과정에서 당신님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시리라는 확신이었다. 즉,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있기에 경륜적 삼위일체가 그와 같이 삼위일체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와 같은 요약을 확증한다는 의미에서 고전적 삼위일체론을 말하는 개혁신학자 두 사람의 진술을 살펴보기로 하자.
II. 칼빈의 이해
칼빈은, 대부분의 고전적 관점을 지니는 이들이 그러하듯이,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명확히 구분하면서 그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지 않다. 그에게 있어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로 계시된 것이므로 이 둘을 구태여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의식이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이것은 대부분의 고전적 견해의 주장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칼빈과 다른 고전적 견해의 주장자들을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오늘날의 논쟁의 상황 속에 세운다면 그들은 아주 명확히 하나님은 영원부터 불변적으로 삼위일체적 관계를 가지신 분으로서 창조와 역사의 진행 속에서도 당신님을 있는 그대로, 즉 삼위일체적으로 드러내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삼위일체에 대한 진술에는 이에 대한 시사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삼위일체 문제를 다루면서 먼저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여러 용어들("삼위일체", "위격들", "동일 본질" 등)의 사용이 성경의 해석을 도우며, 따라서 사용될 수 있고, 특히 잘못된 가르침을 드러내는데 유용하다고 밝히는 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런 그의 입장은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말하는 다음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렇게 크고 위대한 일들에 대한 인간 언어의 부족함 때문에 "위격"(hypostasis)이란 말이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강요되었으니,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이 어떻게 셋이심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9) 즉, "위격"이란 말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어떠하심을 정확히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기보다는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이심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용어들은 계시의 사실 앞에서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 보려는 지난한 노력 가운데서 사용되는 용어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칼빈이 말하려는 바는 다음과 같은 진술 속에 잘 요약되어 있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위격들의 삼위일체가 있다(in the one essence of God there is a trinity of persons)고 말하라. 그러면 당신은 한마디로 성경이 진술하는 것을 말하면서 공허한 잔소리를 다 줄일 수 있을 것이다"(Institutes, I, viii, 5, p. 128).
이렇게 시작된 칼빈의 삼위일체에 대한 진술은 "위격"(hypostasis, person)을 하나님의 본질 안에 있는 다른 위격들과 연관되면서도 각기 비공유적인 성질을 가짐에 의하여 구별되는 한 "subsistence"라고 정의하고서는(p. 128), 말씀과 성령의 신성을 밝히는 일, 즉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일본질임을 드러내고 그 후에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이 구별되시는가의 논의에로 나아간다.
성자(말씀)의 신성을 논의하면서 칼빈은 아주 조심스럽게 먼저 성육신 하시기 전의 말씀, 소위 "육체를 입지 않으신 말씀"(logos asarkos)의 신성을 말하고, 그후에야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는 성육신 하신 말씀(that Word endued with flesh)이라고 해야만 하므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언들을 살피는 일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런 진술 방식은 우리의 논의와 연관하여 아주 중요한 시사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칼빈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의 말씀과 성부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존재론적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이해가 여기서 드러날 수 있다는 말이다. 칼빈은 베드로전서 1 : 10-11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아직 나타나지 않으셨으므로, [여기서] 말씀은 시간 전에 성부에게서 낳아진 것으로(as begotten of the Father before time)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Institutes, I, viii, 7, p. 129). 그리고서는 창세기 1장의 말씀으로의 창조를 언급한다. 칼빈은 이 "말씀으로의 창조"를 히브리서 1 : 2-3에 비추어 이해하면서,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성부의 영원하고 본질적인 아들이신 아들의 명령(the order or mandate of the Son, who is himself the eternal and essential Word of the Father)이라고 이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한다(Institutes, I, viii, 7, p. 129).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분명히 말씀의 신성을 밝히는 것은 요한복음 1 : 1-3의 말씀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요한은 말씀에게 분명하고 영존하는 본질을 돌리면서 동시에 그 자신에게 독특한 어떤 것을 그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Institutes, I, viii, 7, p. 130). 이 모든 논의에 근거하여 칼빈은 "불변하는 말씀은 영원히 하나님과 하나시요, 하나님과 같으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것이다"고 결론짓는다(Ibid.). 그 후에 아들의 신성은 인정하면서도 그의 영원성을 부인하는 이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칼빈은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하나님에 의해서 시간의 시작 너머에서 낳아지는 말씀은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있는 것이다"고 한다(Institutes, I, viii, 8, p. 131).
이렇게 영원하신 아들의 신성을 말한 후에야 칼빈은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I, viii, 9,)을 말하고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논의를 하고(I, viii, 10)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을 사도들의 증언(I, viii, 11)과 그리스도의 사역(I, viii, 12)과 이적에 근거해서(I, viii, 13) 논의하고 있다.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그의 사역과 성령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명확한 표현들을 중심으로 논의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칼빈의 논의는 그 어디를 살펴보아도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관계를 가지고 계셨음을 분명히 하고, 경륜적 과정에서 하나님의 이 삼위일체적 관계가 잘 계시된 것으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에게 있어서는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는 일은 전혀 생각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는 아들의 영원성을 의심하는 이들에 대한 그의 반응에서 아주 잘 나타난다.
III. 헤르만 바빙크의 이해
헤르만 바빙크의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에서도 우리는 칼빈에게서와 같은 태도를 볼 수 있다. 더구나 바빙크의 견해가 이 문제를 다루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그가 삼위일체론을 거의 다 진술한 후에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후의 진술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우리가 말한 의미의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삼위일체론을 진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이 둘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의 핵심은 위에서 우리가 정리한 것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몇 가지 진술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존재론적 삼위일체에서 성부가 그 존재 사실의 순서에서 첫째이고 성자가 둘째이며 성신이 셋째이듯이, 계시사에서도 성부가 성자에 앞서며 성자가 성신에 앞서는 것이다.10)
성자는 성부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으시고(마 10 : 40; 막 9 : 48; 요 3 : 16; 요 5 : 23, 30, 37; 요 6 : 8이하), 성신은 성부와 성자 모두에 의해서 보냄을 받으신다(요 14 : 26; 16 : 7).
그러나 이 시간 내에서 나오심은 존재론적 삼위일체 내의 삼위간에 존재하는 내재적 관계의 반영이고 출생과 내어 쉬심에 근거한다. 성자의 출생은 로고스의 성육신의 영원한 원형이고 성신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것은 성신의 쏟아 부어주심의 원형이다. 그러므로 교부들은 삼위일체의 삼위 내에 존재하는 영원하고 내재적인 관계들에 대한 지식을 시간 내에서의 이 관계에 대해서 계시된 바로 부터 이끌어내었다. 이 일에 있어서 그들은 옳았다(p. 320=pp. 467f.).
이 진술들에 바빙크는 계시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구조, 즉 경륜적 삼위일체의 구조를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구조의 반영으로 볼 수 있음을 말하며, 교부들이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에서 존재론적 삼위일체에로 추론해 나간 것을 인정하고 그 과정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빙크에 의하면, 이미 교부들이 그 용어는 사용하지 않을지라도 그 내용상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구분하며,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를 반영함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전적 관념은 하나님이 이미 영원으로부터 당신님의 어떠하심을 가지고 계셨으며 시간 내에서의 경륜적 과정이 하나님을 규정하거나 형성하는데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뜻에서 다음과 같은 틸리케의 말은 고전적 삼위일체론의 의도를 잘 인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질적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 교리는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사역 이전에 이미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독특한 것이며, 하나님은 그 무엇을 창조하시거나 개인과 연합하시거나 또는 신자들과의 교제 중에 거하시기 이전부터 그 자체 안에서 영원히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고 주장한다."11)
정통적 견해를 견지하려는 많은 신학자들 외에도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도 기본적으로 이런 고전적 이해를 지지하는 이들도 있다.12) 예를 들어서, 하인리히 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세적 삼위일체는 불가피하게 내재적 삼위일체를 소급해서 지시해 준다. 하느님은 하느님이 있는 그대로 만나신다."13) 또한 바르트의 삼위일체 이해를 언급하면서 푈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바르트에게는 모든 역점이 계시의 삼위일체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내재적 삼위일체도 인정되고 있다...... 구원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전제한다."14) 그러나 다음에 살펴 볼 라너도, 심지어 맨 마지막에 살펴 볼 헨드리쿠스 베르코프도 거의 비슷한 말을 하고 있고,15) 오트와 푈만은 더 이상의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는 라너의 말과 같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16)
이에 비해서 근자에 유행하고 있는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은 좀더 분명하게 최소한 경륜적 삼위일체가 하나님의 내재적인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며 경륜적 삼위일체만을 인정하는 관점은 경륜적 과정이 없이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일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17)
IV. 결 론
이 글에서 우리는 개혁주의의 입장을 중심으로 소위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를 바라보는 고전적 관점을 살펴보았다. 고전적 관점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성경적, 고대 신학적 이해에 충실하여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요,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제시되고 있는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은 어떤 점에서 보면 모호하여 여러 해석의 여지를 주고 있으나, 최대한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경륜적 삼위일체에 의해서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풍성해진다고 하며, 최대한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경륜적 삼위일체가 역사의 과정에서 다 드러날 때에야 참으로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있다는 의미에서 존재론적 삼위일체를 종말론적 개념, 또는 종말론적 개념에 대한 예배 중에서의 송영적 선취라고 말한다. 현대에 유행하는 또 다른 관점인 경륜적 삼위일체만을 인정하는 입장은 좀더 솔직하게 표현하여 기본적으로 영원부터 삼위일체적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오직 우리의 구원 경험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의 취향에는 현대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이나 순전히 경륜적 삼위일체만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관점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것이 우리의 취향에 더 맞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서 당신님을 나타내 보이신, 그리고 그것을 성경에 성문화하시어 그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 당신님을 알게 하신 하나님 자신의 계시와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핀 세 가지 관점 모두가 형식상으로는 모두 성경에 호소하고 있고 계시에 충실하려고 한다는 공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관점의 논리적 결국을 살필 때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이나 경륜적 삼위일체만을 주장하는 관점에서는 이런 공언이 유지될 수 있으려는 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오직 경륜적 삼위일체만을 인정하는 관점은 결국 삼위일체의 영원성을 상실하거나, 삼위일체 개념을 전통적인 개념과는 다른 의미에서 이해해 보려고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에 대해서도 우리는 과연 이 관점이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하나님 자신의 영원부터의 불변성을 유지하게 할 수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우리의 질문에 대하여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을 가진 이들은 이런 우리의 질문이 성경의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이 아닌 희랍적인 불변성 개념을 상정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며 우리의 질문은 결국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는다고 하고 무엇인가를 새롭게 경험한다고 보아야지만 성경의 하나님의 역사에 충실한 것이며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 공정한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상당히 유사한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하더라도, 고전적 관점과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 사이에는 상당히 깊은 사상적 전제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어떤 면에서 살펴보면 역사의 과정과 역사와 시간 내에서의 하나님의 경험을 강조하는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은 20세기의 상황에서 (헤겔에 대한 모든 비판을 염두에 두면서 때로는 그 비판을 피할 수 있는 방향으로, 또 때로는 그 비판을 그래도 받으려고 하면서) 새로운 헤겔적 접근(neo-Hegelian approach)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경륜적 삼위일체만을 말하는 베르코프의 입장은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20세기의 상황에서 역시 슐라이어마허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두면서 때로는 그 비판을 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 또 때로는 그 비판에 대항하여 서면서 다시 새로운 슐라이어마허적인 접근(neo-Schleiermacherian approach)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오늘날의 신학계에서는 다시 헤겔과 슐라이어마허의 망령이 떠다니고 있는 것이다. 비록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로운 전략을 가지고, 더 튼튼한 논리적 무기를 갖추고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는 역시 19세기에 헤겔과 슐라이어마허의 사상과 그것의 신학적 함의와 더불어 싸우던 신학자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경륜적 삼위일체와 존재론적 삼위일체를 바라보는 고전적 관점이 어떻게 진술되어야 현대인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으려는 지를 생각하는 일이 필요함을 인정하면서도, 우리 시대의 정신에 맞도록 우리의 신학과 신관을 바꾸는 일이 발생하지 아니하도록 커다란 주의를 해야만 하리라는 것을 강조하게 된다.
우리가 아직도 성경의 계시에 근거하여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존재에 변화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하시기에 그의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계시되는 것이다. 만일에 경륜적 삼위일체에 의해 하나님 자신이 더 풍성해지거나 그에게는 오직 경륜적 삼위일체가 있을 뿐이라면 하나님은 역사를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이 되시고, 따라서 이 시간의 과정이 없이는 온전한 하나님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과정을 중요시하며, 우리의 구원 역사를 중요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은 사실상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며, 그의 뜻으로 이 과정을 만드시는 하나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 자신이 중요하고,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과 그 역사적 과정을 위해서 그를 변화시켜 놓으면 실상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놓치게 된다. 하나님은 역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역사에 의해 무슨 도움을 받지 않으신다. 역사가 도대체 그 분께 무엇인가를 풍성하게 하여 드릴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역사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고 진행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정한 역사의 주님으로 인정하려면 하나님을 역사의 과정에 의해 풍성해지는 분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존재론적 삼위일체를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온전한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영원에 있지 않으면 경륜적 삼위일체도 없는 것이다. 경륜적 삼위일체에 의해서 조금의 보충이라도 받아야만 하는 존재론적인 삼위일체는 엄밀하게는 하나님의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온전한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있어야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경륜적 삼위일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기독교적인 삼위일체론은 다음의 주장을 아무런 유보나 조건 달음 없이 주장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이고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이다. 경륜적 삼위일체만을 인정하는 관점은 실상 그 존재 근거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고,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은 인식 근거를 인식 근거 이상의 것으로 여겨 확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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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f. Cornelius Van Til, The Defense of the Faith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55), pp. 9-13, 114; idem, Christian-theistic Evidences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61); idem, A Survey of Christian Epistemology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1970), p. 62; idem, Christian Theistic Ethics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1971).
2) 차영배 교수도 우리의 삼위일체론 진술 노력을 바로 이런 작업으로 본 듯 하다. 그의 다음 진술을 참조하라 "삼위와 그 본체의 단일성, 혹은 유일신이 어떻게 서로 조화되는가라는 것은 신비에 속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만으로 이해할 수 없으나 서로 모순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우리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 싸여 심오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으로 계시된 만큼은 성경 자체의 가신성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도 가신성(credibility) 있게 진술되어져야 한다."(차영배,『개혁 교의학 Ⅱ/1: 삼위일체론(신론)』[서울: 총신대 출판부, 1982], p. 17).
3) 이 용어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는 Otto Weber, Foundation of Dogmatics, vol. 1, trans. Darrell L. Guder (Grand Rapids: Eerdmans, 1981), p. 388; Helmut Thielicke, The Evangelical Faith., vol. 2: The Doctrine of God and of Christ, trans. and ed.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1991), p. 179; Paul K. Jewett, God, Creation and Revela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1), p. 305 등을 보라 Weber와 Jewett는 이를 계시적 삼위일체(revelational trinity) 또는 기능적 삼위일체(functional trinity)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4) Eberhard Juengel, God as the Μystery of the World, trans. Darrell L. Guder (Grand Rapids: Eerdmans, 1983), p. 346.
5) lbid.
6) Thielicke, p. 176.
7) Wolfhart Pannenberg, Systematische Theologie, band 1 (Goettingen: Vandenhoeck and Ruprecht, 1988), s. 317, n. 122=E.T. Systematic Theology, trans.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1991), p. 291, n. 111. 여기서 판넨베르그는 우를스페르거의 다음 두 책을 언급하고 있다. Vier Versuche einer genaueren Bestimmung des Geheimnisses Gottes des Vaters und Christ (1769-1774); Kuizgefasstes System meines Voitrages von Gottes Dreieinigkeit (1777). O. Weber도 우를스페르거를 언급하고 있다(Weber, p. 388, n. 124).
8) Juergen Moltmann, Trinitaet und Reich Gottes (Muenchen: Christian Kaiser Verlag, 1980). E.T. The Trinity and the Kingdom: The Doctrine of God, trans. Margaret Kohl (London: SCM, 1981), p. 151; idem, Der gekreuzigte Gott (Muenchen: Chr. Kaiser Verlag, 1972), s. 252=The Crucified God, trans. R. A. Wilson and John Bowden (London: SCM, 1974), pp. 235ff. 베르카우워도 경륜적 삼위일체와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구별은 양태론과 투쟁하려는 노력 가운데서 교회에 의해서 사용되었다고 밝히고 있다(G. C. Berkouwer, A Half Century of Theology, trans. and ed. Lewis B. Smedes [Grand Rapids: Eerdmans, 1977], p. 259).
9) John Calvin, l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0), I, viii, 5, p. 127. 이하에서는 Institutes로 약하고 이 절 안에서 『기독교 강요』로부터의 인용은 (Institutes, I, viii, 5, p. 127)식으로 하여 본문 안에 삽입하기로 한다.
10) Herman Bavinck, The Doctrine of God, trans. William Hedriksen (Grand Rapids: Eerdmans, 1951; reprinted, Grand Rapids: Baker, 1977), p. 320=졸역,『개혁주의 신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p. 467. 이 절에서의 이 책으로부터의 인용은 본문 안에 면수만으로 밝히기로 한다 앞의 면수는 영역 판의 면수이고, = 이후의 면수는 한역 판의 면수이다.
11) Thielicke, pp. 176f.
12)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 기본적으로 이런 고전적 이해를 표명하는 이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Weber, p. 388; Thielicke, pp. 176-81; Heinrich Ott, Die Antwort des Glaubens (Stuttgart: Kreuz, 1973), 김광식 역,『신학해제』(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74), p. 115.
13) Ott, p. 115. 그러나 김광식 교수는 오트의 이 말을 융엘의 의도와 비슷한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인용하고 있다(김광식,『조직신학(1)』[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p.171). 이는, 우리가 이 논문의 본문에서 말하려는 바와 같이, 오트의 이와 같은 진술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음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14) Horst G. Poehlmann, Abriss der Dogmatik (1975), 이신건 역,『교의학』(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pp. 155, 156.
15) Hendrikus Berkhof,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John Knox, 1964), pp. 109f: "We may believe that he is as he comes to us in his revelation."
16) 바르트와 관련해서는 이 모호성이 가장 잘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이해를 보는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푈만과 이종성 교수는 바르트를 고전적 관점에 가깝게 놓고 이해하는 듯하고 (Poehlmann, p. 156; 이종성,『삼위일체론』[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pp. 631f., 638), 김균진 교수는 바르트에게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나(cf. KD, Ⅰ/1, 411, 413, 435, 437, 489), 오히려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경륜적 삼위일체성은 내재적 삼위일체성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헤겔과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in 『헤겔철학과 현대신학』[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p.105). 바르트에 대한 비슷한 해석으로 Richard Roberts, "Karl Barth," in one God in Trinity, eds. Peter Toon and James D. Spiceland (Westchester, lllinois: Cornerstone Books, 1980), pp. 79-88, esp. 88, 91을 보라.
또한 이 주장을 한 뒤에 김균진 교수는 좀더 과격한 주장을 펴고 있다. 그의 다음 진술들이 다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 수 있는 지를 생각하여 보라: "(1) 내재적 삼위일체성은 이미 완결되고 고정된 것으로서 경륜적 삼위일체성의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륜적 삼위일체성의 생동성 속에 있으며 되어져 가는 과정 속에 있다. 달리 말하여 경륜적 삼위일체성은 내재적 삼위일체성의 전개를 말하며 내재적 삼위일체성은 이 전개의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내재적 삼위일체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난 경륜적 삼위일체성 안에 있을 분이며 이것을 통하여 되어져 가는 과정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재적 삼위일체성이 폐기되거나 경륜적 삼위일체성을 통하여 비로소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2) 오히려 내재적 삼위일체성은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안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된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적, 역사적 세계에 대하여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도달되지 않은 미래적 차원,? 종말론적 차원을 의미한다"(ibid., p. 111, 이 글 안에 (1)과 (2)는 후에 논의를 쉽게 하기 위해서 필자가 붙인 것임). (2)의 내용을 말하려면 과연 (1)과 같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모순일까? 아니면 우리의 언어의 한계 내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말하려다가 나타나는 사소한 문제점일까? 이런 문제의 제기는 차지한다고 해도 김균진 교수가 바르트를 후에 논의할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에 가깝게, 또는 그 관점의 빛에서 해석하려는 한다는 것이 분명해 졌을 것이다.
17) 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제 11 장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제 12 장 "헨드리쿠스 베르코프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자세히 살펴 보라.
출처: http://cafe.daum.net/ansanhoebok/7MyF/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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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pdf
출처: Kid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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