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 Reviews/Korean

성경의 권위 - 김명도 교수

Bavinck Byeon 2016. 1. 14. 00:05

성경의 권위

 

김명도 교수(튤립 교육 선교회)


I. 서 론

 

사람이 태어나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마치 온 세상이 자기를 위하여 있는 것처럼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다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어서 어떤 기회에 혹 문서 전도나 방송 전도를 받든지 혹은 친구나 친척을 따라서 가까운 교회에 나가서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고 점점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어 새사람 되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교회에 한번 두 번 나오게 될 때 처음에는 그저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말씀을 생각한다. 그 이상은 잘 알지 못한다. 그러자 일 년쯤 교회에 잘 출석하게 되면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말의 뜻을 좀 더 구체적으로 체계 있게 알게 되는데 즉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신 분으로 죄의 값은 사망이니 나는 필연코 죽을 수밖에 없는(영혼과 육신 둘 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오셔서 나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내가 마땅히 내 죄 값으로 받아야 할 지옥의 형벌을 내 대신 받으시고 피 흘려 돌아가시므로 내 죄를 대신 짊어져 주셨는데 그 예수님의 피를 믿는 마음을 보시고(신앙) 예수님의 의(義)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셔서(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함 받고 의로움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며 구원받게 된다”는 지식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성경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고 성경은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하시기 전 성경 봉독 할 때만 잠시 펴서 볼뿐 그 외는 성경을 볼 시간도 없고 또 성경은 너무 어려워서 몇 번 읽어도 그 뜻을 정확히 알기가 어려워 그냥 접어 두고 주로 주일날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만 성경을 공부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의 성도들의 신앙생활이다. 또 부흥회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기 쉽다. 이 어려운 세상, 불신의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한 주일에 한번 혹은 두 번 목사님의 설교만 가지고는 신앙생활을 하기가 부족하다. 성경은 꾸준히 혼자서 공부해야 한다. 성경은 기도하시면서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으시면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옛날 리챠드 로테(Richard Rothe) 라는 독일의 신학자는  성경말씀은 세인(世人)이 알 수 없는 <성령의 언어>로 기록이 되었다고 주장한 적이 있기도 했다. 이것은 아돌프 다이스만(Adolf Deissmann) 이라는 19세기 말의 독일 Marburg시의 목사님이 끈질기게 연구한 결과 “성경에 기록된 언어는 성령의 특별한 언어도 아니고 암어(暗語)도 아니며 신약성서의 언어 는 기원 1세기에 헬라문명권(文明圈)을 휩쓸던 당시의 평민들이 일상 쓰던 말” 임이 판명되었다. 성경학자들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단어들과 문법이 희랍 고전 문헌에 나오는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억측을 자아내어 심지어 교단에서 싸움까지 한 역사를 특히 18세기에서 다이스만의 해결이 나오는 19세기 말엽까지의 성경언어학에서 읽어본다. 오늘날에도 희랍에서는 평민들이 쓰는 말 (Koine 성경의 단어와 대부분 동일)과 신문 잡지에서 쓰는 말이 현저하게 달라서 희랍 정부는 언어를 통일하는데 고심하고 있는 실정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은 우리가 도무지 알지 못할 내용이 아니다.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교황이나 신부들의 전용물도 아니다. 누구든지 모두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또 읽을 의무가 있다. 성경을 읽지 않고 신앙생활을 옳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책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믿는 성도들이 하루도 쉬어서는 안 되는 생명줄이다.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은 성경을 읽지도 않고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 처음 출석하는 성도는 처음엔 어색하기 만하던  교회의 풍속에 차차 익숙해지고 내 생명을 구원해 주신 주님에게 일편단심으로 죽도록 충성하며 세상에서 맛보지 못하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 인생의 풍파도 이기고 나갈 수 있는 신앙이 생긴다.  그런데 신앙이 이렇게 자라나면 (누구나 택함을 받은 자라면  신앙은 자라나게 마련이다. 어떤 이는 좀 빨리, 어떤 이는 좀 더디지만) 그 다음에 그 성도가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의 구원의 도리가 기록된 성경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고 체계적으로 알고 싶어서 여기저기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성경지식을 넓히고 성경을 연구할 곳을 찾아 성경학교나 신학교에도 가며 또 성경 공부 반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바로 알고 바로 믿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마음은 참으로 귀하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려면 한이 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전부 다 이해할 능력도 인간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터이라 우리 믿는 성도들의 성화의 과정(聖化의 過程)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과 같이 성경도 일생을 두고 공부해도 깊은 샘에서 싱싱하게 솟아나는 샘물처럼 무궁한 은혜 속에 깨닫는 성경의 깊은 진리는 한이 없어서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그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감사하여 감격할 뿐이다. 평생을 두고 공부해도 성경을 못다 배우지만(성경말씀을 모두 암송한다고 성경을 통달한 것은 아니다.) 날마다 꿀 송이보다 더 단 이 성경말씀을(시편 19:10, 시편 119:103)을 연구하고 상고할 때 성경을 어제보다 더 많이 더 정확히 알게 되고 어제 받지 못했던 새로운 은혜를 받게 된다. 성경이 기록된 역사적 배경, 성경 66권이 서로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으며 성경 각 책의 주제는 무엇이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 (救贖史 God's Redemptive History)를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가? 또 성경이 기록된 후의 사본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 사본들이 옳게 원본을 보존해왔나? 하는 문제등 알고 싶은 일이 많을 것이다.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알고 바로 믿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질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성경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오늘에 사는 지성인들은 퍽 이론적이어서 따지기를 좋아하지만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제한되어 있어서 무한한 하나님을 따라 갈 수가 없다. 사람의 이론으로 따질 것과 따질 수 없는 것이 있다. 가령 일기를 예보하는 기상 관상대 에서 과학지식과 기계를 동원해서 다음날 날씨가 어떠할 것과 바람의 속도와 강우량들을 대략 예고하며 알 수 있으나 가령 우리가 살고 있는 대기권(大氣圈)에는 늘 변하지 않는 원소들은 용량(用量)의 일정한 비율이 있는데 즉 질소(N2)가 78.084 퍼센트, 산소(O2)가 20.946 퍼센트, 아르곤(Ar)이 0.934 퍼센트, 이산화탄소(CO2)가 0.033 퍼센트, 네온(Ne)이 18.10 퍼센트, 헬리움(He)이 5.24 퍼센트, 크립톤(Kr)이 1.14 퍼센트, 제논(Xe)이 0.057 퍼센트, 수소(H2)가 0.5 퍼센트, 메탄(CH4)이 2.0 퍼센트, 산화질소(N2O)가 0.5 퍼센트(이상자료는 대영백과사전 제2권 702페이지에서 얻은 것임) 이런 비율로 고정되어 있어서 사람과 동물들 그리고 식물들이 살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과학자들의 이론으로 알 수가 없다. 아무리 훌륭한 과학도라고 왜 이런 비율인지 여부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조물주의 신기한 능력과 설계에 감탄할 따름이다.

 

성경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이 없을까? 정확하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앞으로 찾아보겠지만 한 가지 똑똑히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한낱 유명한 문학작품이나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서적과 같은 가치밖에 없다고 가정한다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위해서 자기생명을 죽이면서까지 그 작품을 사랑할 정신병자가 없는 것처럼 성경이 그런 가치밖에 안된다면 그 성경말씀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죽을 사람이 세상에 한 사람인들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사(敎會史)를 읽어보거나 세속적인 문헌 가령 유명한 기본 (Edward Gibbon)의 로마제국의 쇠퇴와 멸망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같은 책(특히 제1권)에 보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이 성경을 위하여 웃으며 찬미 (시편) 를 부르며 죽어갔으니 이는 성경은 무언가 세상의 다른 책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웅변으로 입증한다. 아니, 이것이 분명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사람들이 진리가 아닌 것을 위하여 귀한 자기의 생명을 쉽게 버릴 수 있을까? 성경이 자기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증거와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육신의 생명을 기꺼이 버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주님의 부활 사건으로 미루어 보아 넉넉히 알 수 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돌아가신 후  유대인들의 핍박이 무서워서 출입을 삼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나가서 담대히 전도하기 시작했고 죽음도 마다 하지 않았다. 이유는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으며 확실히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좋은 증거가 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를 확실히 아는 것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일이다.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차라리 마음에 맞는 문학작품을 읽거나 윤리 교과서를 읽는 편이 더욱 우리에게 유익을 줄지 모르겠다. 반면에 성경이 정말 조금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하다면 그때는 이 세상에 성경책만큼 귀한 것이 없을 것이고 아끼고 사랑하며 배우고 이 성경말씀대로 살 마음이 울어 나올 것이다. “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39) 이 성경말씀은 내가 영원히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가장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분명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실히 알 때 잠시도 성경말씀을 소홀히 할 수가 없을 것이고 사랑하며 연구하며 말씀대로 순종하며 거룩한 생활을 영위할 것이다.

 

그래서 위에 언급한 여러 문제들 성경의 성질, 성경의 전래(傳來), 성경의 권위, 그리고 우리들의 할일 이런 순서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II.  성경의 성질

 

처음 생각할 것은 성경의 성질이다. 성경이 물론 문학적으로도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명작중의 명작이라서 영국의 문호 윌리엄 쉐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도 그의 수많은 작품에서 성경을 많이 인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성경은 결코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읽혀질 목적으로 기록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죄에 빠져 죽게 된 인생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이 성경을 약 1,500년에 걸쳐서 약 40명에 달하는 교육과 문화배경이 다르고 각기 자라나온 배경과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사람의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고 기계적이 아니라 자기의 성격 이나 교육배경을 버리지 않은 채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시되 원본에 있어서 단어에 이르기까지 선택하시어 기록하시게 했다.  이것을 성경의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 有機的靈感)이라고 부fms다.

 

그러므로, 성경은 세상의 여러 가지 다른 책들과는 기록된 동기와 방법이 아주 다른 것을 알게 된다. 그 목적도 다르다. 독자도 어떤 특수층을 상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서적은 모두 그가 대상으로 하는 독자의 층계가 있다. 헤겔이나 칸트의 서적을 나 어린 사람이나 바탕이 없는 사람이 읽으면 그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는 책입이다. 1611년도에 나온 제임스왕판(King James Version) 에는 어려운 고어체(古語体) 단어가 많이 나오지만 원래 기록된 성경말씀은 앞서 서론에서도 말씀을 드렸듯이 누구나, 심지어 어린이들도 알 수 있는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기록하였다.  백성들이 알기 어렵게 쓰려고 한 것이 성경저자들의 의도는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처음 읽을 때보다 두 번째 읽을 때가 더 뜻이 명확해지고 두 번째보다는 세 번째가 더 뜻이 분명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은 여러 번 읽어야 한다. 또 성경을 읽을 때는 문맥을 따라서 읽을 필요가 있다. 문맥 없이 읽으면 그 성경구절을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게 되므로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다음 성경해석방법을 다룰 때 충분히 설명드릴 기회가 있을 것으로 알기에 여기서는 자세히 다루는 일을 피하기로 한다.

 

성경은 위에서 본 것처럼 다른 책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유기적 영감을 하나님의 선지자와 사도들에게 주시어 오직 죄에 빠져 영원토록 멸망 받게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내용도 인간의 구원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있는데 구약의 39권 어느 책을 보아도 한결 같이 장차 오실 메시야(히브리말로 “기름부음 받은 자 ”란 뜻) 즉 그리스도(헬라말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는 뜻)에 대한 예언과 인간이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사람도 없고 지킬 수도 없다는 것과 그러기에 그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주실(능동적 순종) 메시야가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벌써 “아담”(사람이라는 뜻)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아 타락한 직후에 약속해주셨던 것이다.(창세기 3장15절).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은 구약의 여러 책에서 혹은 전쟁을 통해서 혹은 비유를 통해서 혹은 직접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대화(對話)나 사건(事件)은 겉으로 나타나는 원인과 결과 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구속사(救贖史 Redemptive History)에서 해석이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에서는 성경해석의 원칙을 구속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구약의 모든 사건들, 신약의 기적이나 이적, 병고침, 예수님의 비유 등은 반드시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 (救贖史的 觀點)에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 이야기하다가 구약성경의 아가서 에 대하여 사람들은 퍽 언짢게 생각하는 분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이런 “연애편지”가 어떻게 성경의 거룩한 말씀 속에 들어갈 수가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이 어떤 자기 애인에게 쓴 연애편지가 아니라 아름다운 가정의 사랑 이야기이며 귀한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성경말씀의 일부이다.

 

성경에서 이스라엘백성이 430년이란 긴 세월 종살이하던 애급은 죄악의 상태를 상징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구원받은 상태를 상징한다.  순종치 아니했던 이스라엘의 60만 대군(남자 장정만 세어서)은  애굽에서 살던 때가 더 좋다고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결국은 가나안 구원의 복지(福地)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의 자손 20세 미만 되는 장정 60만이 여호수아(여호와가 구원하신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과 같음.  전자는 히브리말이며 후자는 히브리말을 헬라어로 표기한 것)와 갈렙 (마음이 다른 이스라엘백성과 달라서 온전히 하나님을 좇았음으로... 민수기 14:24참조) 두 사람의 인도로 최후의 목적지인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다수(多數)를 기뻐하시지 않으셨다.(고린도전서 10:5 참조)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자는 약속된 땅 가나안복지 즉 구원의 반열에 끼울 수 없다.  종살이하던 애급에서의 옛날을 그리워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지 않던 자들을  하나님은 외면하신다.(데살로니가후서 2:11 참조).

 

사정은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  모세란 뜻은 <건져냄을 받은 자> 란 뜻인데 백성을 애급에서 건져내심으로 모세는 그의 사명을 끝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가 구원하신다> 는 뜻이라고 앞서 말했는데 그는 이스라엘백성을 구원해 냄으로 사명을 다했다.  구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의 이름도 그냥 아무렇게나 인용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기록하게 하실 때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룩하시는데 꼭 써야할 이름과 사건만을 기록하게 하신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안나 라는 할머니는 출가하여 7년 만에 과부가 되어 84년을 과부로 지내면서 그러니까 백살이 넘기까지 성전에서 기도하던 여자였는데 안나 라고 하는 이름 그대로(은혜라는 뜻) 기다리던 메시야의 탄생을 보는 은혜를 입었고 한나 라고 하는 구약성경 사무엘상에 나오는 엘가나의 아내는 자식이 없는 여자로 브닌나라고 하는 여자(남편의 또 다른 아내)에게 괄시를 받으면서도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은혜(히브리말로)라는 이름그대로 한나는 <하나님이 들었다> 라는 이름을 가진 사무엘 (“하나님이 들었다” 란 의미) 을 얻는 기쁨과 은혜를 입었고 또 구약성경 룻기 1장에 나오는 길룐(“폐병”이라는 뜻)과 말룐(“병자” 라는 뜻)은 모두 기쁨이란 뜻을 가진 나오미 란 어머니를 둔 채 모압 땅에서 죽었으며 나오미는 과연 나중에 그 이름이 뜻하는 그대로 손자 오벳(“섬기는 종” 의 탄생을 보면서 기뻐했다.

 

위에서 열거한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나 또는 지명(예를 들어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 하나님과 우리와 사이의 복음으로 얻는 평화, 또는 베들레헴은 떡집...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나실 곳 등) 또는 사건 등은 모두가 그 속에 하나님의 깊은 말씀의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항성 성경 특히 “지루한” 구약을 읽을 때는 이와 같은 구원의 모형(Type 模型) 또는 인물이면 그리스도의 모형 또는 바벨론 같은 사탄의 모형 등을 찾아내면서 읽어야 한다.  사건 하나하나가 큰 구속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어떤 분들은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다" (The Bible contains the Word of God, Die Bibel enthaltet das Word des Gottes) 고 말하지만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신학자 중에 칼 빨트(Karl Barth)라고 하는 분이 있지만 이분은 말하기를  “마치 카루소의 노래를 듣고저 할 때, 전축 판을 돌리면 잡음이 나는 것같이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 이를테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의 말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 요소를 배제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들을 수 있다” 라고 주장한다 (1919년 그가 펴 낸 “로마서주적” 참고).  과연 그러한가?   성경에는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섞여있을까?  성경은 분명 두 가지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즉 완전히 사람의 말이든지 아니면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든지 둘 중의 하나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므로 거짓과 타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말을 혼합할 때 성경은 하나님의 본래 성경기록 목적인 인간 구원의 의도를 상실하게 된다.  사람은 모두 하나같이 타락한 까닭에(로마서 3:23, 로마서 3:21, 시편 58:3-4 참조)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 지는 것이다(에베소서 2:8).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없을텐데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 있어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는데 눈먼 자에게 신령한 것을 볼 수 있는  靈眼(영안)을 주시어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구주로 모시고 살게도 하시고, 귀머거리로 하여금 귀가 열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죽었던 영혼이 살기도 하며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경배하게도 하신다. 이것은 분명히 기적이다.

 

오늘도 성경말씀의 기적은 믿지 않던 형제가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와 새 사람 되어 영혼 구원받는 일에서 얼마든지 봅 수 있다.  이것이 진정 기적이요 성경 기록의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영혼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이지 육신의 병신들, 귀머거리, 장님을 고쳐주는 것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 목적도 아니었고(마가복음 10:45 참조) 그 목적으로 십자가위에 돌아가신 것도 아니다.  기독교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 사람의 영혼을 구원받는 구원의 길이다.

 

이와 같이 구원의 길은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야이신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창조주 아닌 피조물들을 섬기기 때문에 거기에 구원이 없다(사도행전 4:12 참조).  사람을 섬기거나 나무나 돌을 섬겨서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영혼은 하나님께서만 고칠 수 있는데 죄진 영혼은 하나님께 범죄한 영혼인 까닭에 누군가가 죄의 값을 치르고 죄의 형벌을 받아주어야 내 죄가 씻겨 지는데 사람은 모두 아담의 죄를 물려받은 죄인들인지라 어느 성현군자도 몇 번 되풀이하여 피를 흘려 죽은들 그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못하며 아담의 후손이 아닌, 여인의 후손(창세기3:15 창조)에게서 난자, 땅에서 나지 아니한 자,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어린양, 하나님의 독생자의 피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요한일서 1:7참조).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히브리서 9:22).

 

그래서 구약시대는 매일같이 비둘기나 양을 잡아서 문자 그대로 수천 마리의 짐승을 번제로 열심히 드렸으나 그 짐승의 피가 무슨 마력이 있어서 그들의 죄를 사했던 것은 아니고 앞으로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피를 내다보면서 상징적으로 짐승의 피를 흘렸던 것이다.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전야(前夜)에 애급의 모든 장자들을 죽이는 재앙에서 유독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재앙을 면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집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죽음의 천사가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이 때의 양의 피도 그 자체가 효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앞으로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려 피 흘려 주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바라보는데서 효험이 있었고 그러기에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룩하고 우리를 그의 귀한 보혈로 사주신 후에는 짐승을 잡아다가 드리지 않는다.

 

예수님의 피의 효험은 창세 전부터 시작된다(요한계시록 13:8 참조).  그러기에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똑같은 것이니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며 구약시대 사람들은 앞으로 오실 예수 (메시야)를 내다보면서 믿었고 신약시대 사람들은 2,000년 전 골고다 (히브리어로 해골처, Latin 어로는 갈보리) 언덕에서 나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을 뒤로 돌아보며 한편 최후의 심판의 그날 주님 재림의 그날을 앞으로 내다보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역사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한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여러 계시의 말씀이 기다리던 메시야 에수님에게서 성취되고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율법을 친히 완성하셔서 하나님의 죄인구속(救贖)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셔서 구속 사업을 완성하신 것이다.  성경은 이런 과정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함 받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살아가야 될까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이 성경의 저자는 바로 하나님 그 분이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참고).

 

III. 성경의 전래

 

앞서 제2장에서 성경의 성질을 논하면서 성경은 세상의 여러 책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언급했지만 제3장과 제4장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성경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저 한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가끔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과연 지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성경이 정확한가?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성경이 원래의 원본과 같은 것이며 믿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창세기는 과연 지금으로부터 약 3,500넌 전에 모세가 쓴 그 내용과 다름이 없나? 분명히 서양에서 독일사람 요한 구텐베르그(Johann Gutenberg, 1398-1468) 라는 재주 있는 사람이 활자를 발명한 것이 15세기 일인데(한국에서는 그보다 훨씬 빠르지만) 그 동안에 성경은 분명히 사람들이 손으로 책상에 앉아서 복사했을 탠데 사람이 하는 일이라 틀리게 복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 성경말씀이 원래는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셨다 하더라도 중도에 여러 사람이 복사하는 과정에서 잘못도 있음직하지 않은가?  라고 의심해 보는 것은 타당하다.

 

성경은 어떻게 오늘 우리들의 손에까지 전해져 내려왔을까?  틀림없이 성경은 여러 사람에 의해서 오랜 세월 동안 복사되고 또 복사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복사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에게는 성경이 보전(保全)되고 보존(保存)되지 못했을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은 성경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그 1장8절에 보면 “히브리말(옛 하나님의 백성의 본 방언이었던)로 쓰여진 구약성경과 헬라어(신약을 기록할 때 여러 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졌던)로 쓰여진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직접 감동으로 된 것이요 또한 그의 특별하신 보호와 섭리로 말미암아 만세에 순결하게 간직되어 있음으로 참다운 것이다.” (The Old Testament in Hebrew(which was the native language of the people of God of old), and the New Testament in Greek (which at the time of writing was most generally known to the nations), being immediately inspired by God, and by His singular care and providence kept pure in all ages, are therefore authentical; WCF I,8)라고 되어 있다.

 

위에 인용한 신앙고백서의 내용은 첫째로 성경은 원래가 구약은 히브리말로 신약은 헬라말로 기록되었다는 사실과 둘째로 이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씌어졌다고 하는 것과 셋째로 이 성경 말씀은 순수하게 보전되고 보존되어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날에는 성경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성경이 여러개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성경은 하나밖에 없으니 그것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함을 주시어서 양피지(羊皮紙)나 파피루스에 기록한 그 성경원본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3:16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하신 말씀은 그 원본에 있어서 글자 한자에 이르기까지 틀림이 없이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뜻이다.  번역판 성경에는 잘못된 곳들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제임스왕 판에는 요한계시록 13:18 끝부분에 “사람의 수이니”하는 대목에 가서 the number of a man 이라고 a 자를 넣어서 번역한 성경도 있는데 이것은 부정관사 a 가 없어야 되는 곳이다.

 

또 사도행전 16:31절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는 대목에서 “예수를 믿으라”하는 대목은 헬라어 원문에서는 위에(上)라는 뜻을 가진 επι인데(πιστευσον επι κυριον Ιησουν) King James Version American Standard Version 을 제외하고는 전치사 in 으로 번역하고 있어서 역시 원어에 가장 충실한 번역 성경은  American Standard Version 이라고 생각된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한때 시편 119:161 “방백들이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라는 대목에서 인쇄하는 사람이 잘못해서 “방백들이”(princes)를 잘못 식자(植字)하여 “princes”대신에 “printers”를 써서 “인쇄공들이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나...”라고 쓰여진 성경이 한동안 나돌기도 해서 세상 사람들이 빈정대기도 했고 또 1641년에 나온 소위 Wicked Bible 이라고 불리는 성경에서는 역시 인쇄공이 잘못하여 제7계명에서 “말라”라고 하는 부사 not 을 빠트린 탓으로 당시 Laud라는 추기경에게 인쇄소가 고소를 당하여 그때 돈으로 300파운드 벌금을 낸 기록도 있다(F.F. Bruce 저 Books and Parchments 참고).

 

아직까지 고쳐지지 않은 채  충실히 번역되지 못한 곳은 요한복음 2:23의 “많은 물”(우리말 개역판 성경은 정확히 번역되었고 American Standard Version도 정확히 번역됨)을 원문대로  “물들이 많다”(many waters)라고 번역이 되어야겠고, 고린도전서 7:1에서도 “결혼”이 아니라 “다친다 (接觸)”는 뜻으로 바꾸어야 될 것 같다. 지금까지 필자의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원 1세기의 파피루스 문헌에서 다친다는 απτομαι (합토마이) 가 결혼한다는 γαμεω (가메오) 와 같은 뜻으로 쓰인 예가 전혀 없다.

 

성경은 원래가 우리가 알지 못할 히브리말과 희랍어로 기록이 되었으니 우리말로 번역을 해서 읽어야 할 터인데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성경말씀을 장난감 가지고 놀듯 마음대로 뜯어 고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원어에 가장 충실하게 번역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을 건 생명의 말씀인 까닭에 백성들에게 알기 쉽게 번역한다는 미명아래 성경을 제멋대로 아무단어나 대치하고 뜻을 변질시키는 행위는 좋게 볼  수 없다.  요즘 소위 여권신장 운동하는 이들 가운데는 성경이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상이 짙다고 해서 하나님을 중성명사로 고치려는 움직임이 있는가하면 선원들의 성경(Seamen's Bible)이란 것을 보면 시편23편에 “Lord is my skipper I shall not be lost”(여호와는 나의 선장이시니 내가 길을 잃지 않으리로다 운운)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훼방해도 좋은 가?  하나님의 자녀 된 자,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 사랑하는 자가 이렇게 할 수가 있을까?

 

위에서 지적했듯이 성경의 원본에는 잘못이 조금도 없지만, 번역하는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가서는 성실치 못한 탓으로 잘못 번역될 수 있고 또 인쇄과정에서도 잘못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성경은 믿을 수 있을까?  수 천년 내려오면서 사람들이 제멋대로 번역했다면 지금 남아있는 성경은 그 원본과 어느 정도 차이가 생길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되지만 다행한 일은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다음에 그대로 성경을 방치(放置)해 두신 것이 아니라 앞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8에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의 특별계시의 말씀이 될 수 있는 대로 순수하게 보존되도록 간섭하시고 섭리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이 처음 기록된 후 죄악 투성이의 사람들에게만 맡겨 두었더라면 오늘 우리는 성경 없이 살며 구원의 도리를 모르고 살 뻔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생들의 완악함을 아시고 친히 말씀이 순수하게 보존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어떻게?

 

가령 창세기나 마태복음의 원본을 A라고 한다면 이 원본을 오래 쓰게 되면 낡아서 못 쓰게 될 터이니 이 원본 A를 보고 사본을 만들면 가령 두통의 사본을 만들어 각각 그 사본을 1과 2로 부른다고 하면 그 다음 1과 2사본이 또 낡아지면 그때는 이미 A는 없어졌으므로 1이나 2사본을 보고 복사하게 되는데 각각 1을 보고 복사한 것을 “가” 와 “나”라고 하고 2를 보고 복사한 것을 “다”와 “라”라고 했을 때 벌써 1이나 2사본에도 글자를 잘못 복사한 것이 있을 수 있고 더욱 “가” 나 “나” 혹은 “다” 또는 “라”에서도 오류가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직접 기록하게 하지 않는 한 잘못은 생기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성경의 원문이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의 경우에서 가령 물론A는 원본인 고로 잘못이 없지만 1과 2사본에 잘못이 있다고 가정할 때 하나님은 두개의 또는 여러 사본에서 꼭 같은 곳에 잘못을 저지르도록 방치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2라는 사본에서 1장5절에 철자법을 틀리게 복사했다면 1이라는 사본이나 그밖에 “가” 나 “나” 또는 “다” “라” 사본에는 2 사본과 똑 같은 곳에 같은 성질의 오류를 범하지 못하도록 섭리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이 기록된 때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본들이 만들어졌다.  본문 비평가들의 임무는 고등비평가들처럼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성경저자와 연대를 무시하고 말씀을 훼파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수많은 사본들을 분류, 비교, 연구하여 가장 원본에 가까운 사본을 찾는  일이다. 이것이 하등비평가, 혹은 본문비평가 가 하는 일이다.

 

그러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의 사본의 수는 얼마나 되며, 서로 다른 오류는 얼마나 될까?  많은 자유주의 학자들의 공격의 대상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거쳐서 손으로 복사해 내려오는 가운데 잘못이 없다고 보장 못하며 만일 잘못이 있는 것을 시인한다면 원본은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도중에 변질되었으니 믿을 수가 없지 않나?  라는 식의 논조다.  지금 신약성경은 학자들 간에 약간 견해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약 20,000개의 성경사본이 있다. 이들은 대개 fragments (단편들) 인데, (codex 는 5,000 개). 어떤 것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지 얼마 안 되는 기원 후 50년에 복사된 사본도 있다. 좋은 예는 마가복음 6:52-53 이다 (이를 고고학자들은은 7Q5 라 한다). 기원 125년에 복사된 요한복음 18:31,32,37,38 도 있다.

 

이 20,000개의 사본 중에서 5,000개는 헬라어로 기록된 사본들이고 나머지 15,000개는 라전어(Latin), 수리아말 (Syriac) 로 또는 애급어(Coptic), 기타 언어로 된 것들이다.  이 20,000개의 사본 중에는 신약성경이 전부 들어 있는 것도 있고 (5000개의 codices) 또는 일부만 들어있는 것들도 있다.  기원1세기부터 시작해서 매 세기 것이 모두 존재한다. 성경사본은 지금도 열심히 고고학 팀들이 찾고 있다,  새로운 성경판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 라도 새로운 사본이 발견되면 그 사본을 줌심으로 새로 성경을 번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 들은 겨우 글자 몇자 혹은 몇 구절 뿐이다. 그보다도 성경이 새로 번역되는 주요한 이유는 번역하는 사람들이 신학 사상 때문이다.

 

가령 The Message 라는 성경이 있다. 비교적 최근에 번역된 성경으로 Regent College (Vancouver, Canada 소재)에서 영성신학을 강의하다가 은퇴한 Eugene Peterson 이라는 학자가 번역한 것인데 영문판 마태복음 6:10 을 읽어 보라,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러 지다‘ 라는 구절을 “As above, so below" 라는 말로 엉뚱하게 번역했다. 이는 그가  Monism (단일론) 사상에 물들어 잇음을 입증해 준다. Cyrus Ingerson Scofield 는 1909년에 Scofield Reference Bible 을 만들었다.  오늘 미국이나 한국에서 세대주의를 가르치는 목사들은 모두 옛날 이 성경을 가지고 신학 공부한 분들이다.  시 성경의 특징은 성경의 페이지 마다 Scofield 자신의 의견으로 설명한 성경 구절의 의미를 많이 수록해 두었다는 점이다.  이 성경을 보는 사람은 어느 것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 이고 어느 것이 그의 주석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람들은 성경을 새로 번역하애 내 놓는다.  성경선택에 주의해야 한다.

 

사람들은 성경보다 세상의 문헌을 더욱더 연구할 듯 하지만 성경학자만이 아니라 세상의 학자들도 이 성경의 사본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앞서 말씀드린바 있는 20,000개의 사본 중에는 상호간에 상치되는 점들의 수가 물론 학자 간에 약간 차이가 지만 .800,000군데나 된다 (supra Bruce, op.cit. 참고).  이것을 변형 (變形, variants) 이라고 한다. 신약개론을 강의할 때 이런 말이 자주 나온다. 같은 책, 같은 장, 같은 절인데 거기에 사용된 문자나 단어나 문법이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이런 곳이 많다.  서기관들이 복사할 때 실수 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롬 5:1 이다.  “화평을 누리자” 인가 아니면 “화평을 누리도다” 인가 사본에 따라서 다르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이런 사소한 차이가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는데는 지장이 안된다는 것이다 (신앙고백서 1;8).

 

그런데 800,000군데 다른 것들 중에서 795,000군데는 글자가 잘못된 것들이다.  글자를 틀리게 썼다든지 글자를 빠뜨렸다든지 하는 따위이다.  이런 것들은 내용을 알아보는데 별 지장을 주지 아니한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두개의 사본에 똑 같은 곳에서 똑 같은 실수를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셨기에 항상 다른 사본과 비교해서 그 내용을 거의 완전하게 알 수가 있다.  나머지 5,000개는 단순히 글자문제가 아닌 내용이 빠져있거나 서기관들이 기입해 넣은 대목들이다.  가령 예를 들면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밤에 천사가 베드로를 석방시켜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우리말 성경은 문제가 안되지만 어떤 사본에는 베드로가 옥에서 나와서 거리로 향해 가는 계단이 7개가 있다고 기록한 예가 그런 것이다.  이런 것은 서기관들이 삽입한 것으로 사본연구가는 다른 여러 사본과 연구 대조해 볼 때 진본이 아님을 곧 알게 된다.

 

사본 연구가들은 사본마다 번호를 부여한다.  또는 사본을 발견한 사람이나 발견된 지명을 붙인다. Beza(종교개혁당시의 신학자) 사본 또는 Koridethi 사본 등은 전자의 경우이고 시내사본, 에부라임 사본 같은 것은 후자의 경우이다.  사본 자체에 번호나 이름을 붙인 다음에는, 각 페이지마다 또 번호를 붙인다.  각줄 마다 번호를 붙이고 각 단어마다 번호를 붙인다.  이렇게 해서 내용만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본마다 글자와 글자를 대조한다.  이중에서 99퍼센트는 확인할 수가 있는데 나머지 1퍼센트는 교리에 영향을 주지 못하며 한군데 빠져서 없으면 성경 다른 책에 있게 마련임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령 마가복음 15장의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 장면은 빠진 것이 많이 있다.  지진이 나고 무덤이 열리고... 한  그 부분 즉 다른 복음서에 나타난 기사에는 빠졌다.  이것은 비록 마가복음서에는 빠져있지만 다른 성경 부분에서 읽어볼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성경 66권은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알 수 없는 것이며, 그러기에 성경은 성경 안에서 해석하고 그 뜻을 찾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성경을 5년 내지 6년 되면 새로 복사하고 낡은 성경은 항아리에 넣어서 깊이 묻어버리거나 또는 불태워 버렸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오래 되어 글씨가 희미하게 되면 성경을  교회에서 정확히 읽지 못할 우려가 있고 이 성경은 그 당시는 주로 암기에 의존했으니 만큼 잘못된 성경을 읽으면 기억에 큰 죄를 짓는 결과가 되며, 또 성경을 묻거나 불태우는 이유는 그것이 만일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주워 가지고 어떤 기회에 잘못 복사함에서 오는 폐단을 방지하여 말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함이 었다.

 

이와 같이 주로 성경을 암기하여 배우던 당시에는 성경사본을 읽을 때 곧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손쉽게 구별할 수가 있었다.  오늘날 영문성경은 고사하고 우리 나라 성경도 개역판 성경에 익숙해 있는 사람에게 새 번역판 성경을 읽어주면 곧 그 성경말씀은 자기가 잘 아는 개역판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임을 아는 것과 같이 옛날 사람들도 잘못된 사본을 즉시 분간해 낼 수 있었다.  이리하여 성경은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번 복사되어 왔건만 순수하게 보존되어 내려왔으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후세에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즉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계획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복음을 들을 때까지 이 말씀은 계속 순수하게 유지되어 나갈 것이다.

 

또한 요한 1서 4:1-3까지에 기록된 것과 같이 민간에 거짓선지자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의 거짓복음에 넘어가지 않기 위하여는 말씀을 순수하게 보존해야만 했다. 거짓선지자는 오늘 우리 사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에도 사도들의 가르침을 훼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원 140년대에 교회를 혼란하게 했던 일이 있었으니 즉 마르시온(Marcion)이라고 하는 영지주의에 빠진 사람이 소아시아로부터 로마에 와서 구약의 무서운 하나님과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은 너무나 대조가 되며 따라서 유대인적인 것은 받아드릴 수가 없다하여 자기 자신의 독특한 정경을 만들어 많은 사람을 가르쳤는데 그가 만든 정경이란 누가복음은 누가가 이방인인고로 가장 유대인의 색채가 적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이고(예수님의 탄생기록은 제외하고), 바울서신 중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 등 목회서신을 제외하고 나머지 10개의 서신만을 받아드렸다.  누가복음이라 해도 구약이 언급된 곳은 모두 삭제해 버렸다.  그에게는 사도 바울만이 참다운 사도로 보였고 다른 모든 사도들은 정경에 넣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의 잘못된 신앙 즉 예수는 갑자기 사람들 가운데서 인간성을 닮은 듯이 나타났던 하나의 초자연적인 인물이었다고 하는 생각에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의 기사,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기사는 모두 생략했으며 예수는 사람으로 보일 뿐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므로 예수님의 족보도 삭제했다.

 

이와 같은 마르시온이라고 하는 사람의 잘못된 성경 해석관에 대하여 기원180년경에 사도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Polycarp) 이라고 하는 사람의 제자였던 이레네우스(Irenaeus)가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구름같이 몰려드는 마르시온학파의 잘못을 고쳐주기 위하여 이단을 반대하여 (Against Heresies) 란 책을 써서 그 책의 제3권에서 마르시온을 반박하며 네개의 복음서, 사도행전,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베드로전서, 요한일서 및 계시록 등이 하나님의 말씀에 틀림이 없음을 명백히 하였다.

 

초대교회 땨눈 말씀을 훼방하는 일이 많았지만 말씀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 속에 보존되어 왔으니 앞서 말씀드린 신약의 헬라어 사본 말고도 여러 교부(敎父)들의 증언들이 많은 도움을 주는데 이 증언들의 수가 헬라어의 성경사본의 수만큼이나 많다.  사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여러 가지 사본을 비교하여 연구하여 원본은 없어졌지만 원본에 가까운 사본을 찾아 성경말씀을 후대에 순수하게 보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오랜 시일에 걸쳐서 성경이 복사되어 왔어도 우리는 원본과 거의 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성경의 권위를 다음 장에서 생각해 보자.

 

IV. 성경의 권위

 

앞에서 우리는 성경의 성질과 성경이 어떻게 전해져 왔는가를 보았다.  여기서는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진 구원의 도리를 기록한 책으로 그 말씀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지는 근거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가?

 

성경의 내적 증거와 외적증거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자:

 

가. 성경의 내적 증거

 

성경자체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씌어진 책이라고 주장한다. 디모데후서 3:16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라고 했는데 그 “감동으로 된” 이란 말은 원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입김을 불어넣었다는 뜻을 가진 동사이다.  그 밖에 베드로후서 1:21에도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라고 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보면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사실을 말한다.  사도바울은 자기의 독특한 개인의 교훈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갈라디아서 1:11에 바울은 말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절에 계속하여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오 배운 것도 아니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성경을 기록한 것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입김으로(성령의 감동) 기록하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증거이다.  성경기록자들은 누가복음을 기록한 의사이었던 이방사람인 누가를 빼놓고는 모두가 유대인이었는데 이들이 쓴 말씀은 유대인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을 향하여 말하고 있다.  이방인들을 구원하실 계획은 구약 때부터 있었으니 예수님의 족보(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는 룻 같은 모압 사람도 있고 우리아의 아내(밧세바)같은 헷 사람도 들어 있다.

 

이들 성경을 기록한 사람 중에서 다윗과 솔로몬은 왕이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제사장이었고  누가는 의사였고 베드로와 요한은 어부였고 모세와 아모스는 양치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바리새교인이며 당대에 누구 못지않은 석학이었으며  다니엘은 정치가였고 마태는 세금을 거두어 로마정부에 바치는 세리였다. 여호수아는 군인이었고 에스라는 서기관이었고 느헤미야는 왕의 술 관원이었다.  다른 성경저자들의 직업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은 서로 몇 백년 또는 1500년 떨어져서 산 사람들이지만 모두 한결같이 그들이 쓴 성경책에는 여러 가지 모형을 통해서 같은 주제인 메시야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셨기에 같은 주제일 수밖에 없다.

 

성경에 보면 성경자체에서 증거하기를 성경이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진 책이라고 하는 대목이 모세오경에 680군데, 예언서에 1,307번, 역사문서에서 418번, 지혜문서에 195번, 구약전체에 2,600번 나온다. 모세는 신명기 4:2에서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라고 했는데 통계적으로 연구해 보면 출 애급기에는 반 이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함이 없이 직접 인용했으며 레위기에는 90%가 직접 인용되고 있는 사실을 아는가?

 

다윗은 사무엘하 23:2에서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라고 하여 자신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에게서 받아 말한 것임을 알려준다.  다윗은 시편의 대부분을 썼는데 구약의 어느 책보다 더 하나님의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이 쓰였음을 잘 나타내주는 책이다.

 

구약의 예언서에 가보면 가령 예레미야 20:9에서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않으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했다.  에스겔서에는 1:3에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리라”하고 했다.  에스겔서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에스더서에는 유일하게 “여호와” 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성경책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같은 권위를 부여했다. 에스더서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심을 주제로 하고 있다.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로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은 그들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증거하고 있다.  앞서 인용한 바 있는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서 베드로서, 디모데후서 말고도 고린도전서 2:13, 에베소서 3:4-5, 로마서16:25-26등을 살펴보면 성경저자들이 사람의 말을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37에서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라고 했다.

 

사도바울은 당시 남에게 어느 모로 보아도 뒤지지 않는 명문가정출신이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최고의 학문을 닦은 자요, 로마시민권 소유자요, 히브리인 중에도 히브리인으로 부러울 것이 없이 살며 유대교의 열심 있는 바리새 교인이었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후 이렇게 변하여 주를 섬기게 된 종인데 우리에게 하나님에게서 받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께 받았다고 거짓증언 할 수는 없다.

 

성경자체가 이렇게 압도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기록된 것임을 말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용하셨다는 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거짓을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신약 여러 군데에서 구약을 많이 인용하셨는데 그는 요한복음 5:47에서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 이니라”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0:25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라고 가르치신 분도 바로 주님이다.

 

주님은 자연인이 받아 드리기 어려운 성경구절들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모순되는 듯한 창세기 1:27과 창세기 2:24를 동일한 신약성경 구절인 마태복음 19:4-5에 인용하고 있으며 노아의 홍수 기사(누가17:26, 마태 24:37-39),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누가 17:28-29), 요나의 기적(마태 12:40), 다니엘의 예언은 다니엘의 것으로 받아드렸고, 이사야서는 두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사야 한사람이 기록한 것을 증거 했다(마태 24:15, 4:16, 12:17 각각 참조).

 

그는 모세가 모세5경의 저자인 것으로 의심 없이 인정하셨으며(누가 20:37), 광야에서의 만나의 기사와(요한 6:32), 광야에서의 구리뱀을 든 기사는 오늘 어떤 성경학자들이 믿기 어렵다고 부인하는 모든 성경해석상의 어려운 점들을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 있게 받아드렸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인정하고 진실하다고 인 치신 것을 어느 누가 부인하며 의심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누가복음 24:25-27에서 “미련하고 선지들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제 모세와 그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또한 계속해서 누가복음 24:44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성경의 모든 말씀을 정확하고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인용했다면 예수를 내 생명의 구주로 믿는 우리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말씀의 권위를 믿어야 하지 않을까?  십자가위에 돌아가신 주님은 사흘 만에 성경에 예언된 대로 부활하시고 승천 하시기 전에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는 당부를 모든 제자들에게 하셨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구약성경밖에 없었다.  그것도 구약의 칠십인역(七十人譯)이 흔했었다.  예수님은 칠십인역의 성경에서 많이 인용하셨다. 그러나 그 칠십인역 (LXX) 속에 들어있는 외경(外經 apocrypha)에서는 예수님은 한군데도 인용하신 일이 없다.

 

외경은 유대인들의 히브리말 성경에도 없어서 그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공동번역에 외경이 들어있는데 이것은 천주교와의 공동번역이기 때문에 들어가 있는 것 같지만 외경은 우리에게 영혼의 양식과 구원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힘써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을 기억나게 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었는데 요한복음 16:26-27에 “내가 아버지께오서 너희에게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 하느니라”라고 하시므로 장차 성령이 임하여 요한복음 14:26말씀대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여 성경을 기록할 수 있도록 예비하시었으니 주님이 승천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한 사실을 사도행전 2장에서 읽어본다.  주님은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시어 사단도 매임을 받아 베드로가 한번 설교할 때 하루에 3000명이 회개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고 신약성경을 기록하게 되었는데 성령께서 주님의 가르치심을 생각나게 인도하심으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종결을 보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을 모두 성경에 기록하셨으매 더 이상의 계시가 없고 환상이나 꿈이나 천사들을 통해서 옛날처럼 계시를 주지 않고 성경말씀만 가지고 하나님의 택정하신 백성을 구원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무능해졌다거나 하나님의 속성이 변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어서 하시지 않을 뿐으로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그 속성에 변화가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하나님께 매달려 내 생명 구해달라고 회개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성경의 내적 증거 가운데 가장 유력한 증거는 예언의 성취이다.  구약 모든 선지자들이 수 백년 앞서 예언한 말씀이 성취되는 것은 과연 놀라운데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없음을 웅변으로 입증해 준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메시야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나를 보자.

 

메시야의 출생지에 대한 예언 : 미가서 5:2

메시야의 출생할 나라, 지파 등: 창세기 18:18, 21:12, 22:18, 26:4, 28:14, 49:8

                                                  시편 18:50, 89:21, 29, 35, 37

메시야의 동정녀 탄생: 이사야 7:14

메시야는 마지막 선지자가 되리라는 예언: 신명기 18:15

메시야는 마지막 제사장이 되리라는 예언: 사무엘상 2:35, 시편 110:4

메시야는 영원한 왕이 되리라는 예언: 사무엘하 7:12-16

박해를 받으리라는 예언: 시편 22:6, 35:7,12, 109:2, 이사야 53:3이하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리라: 시편 118:26,스가랴 9:9

은 30량에 팔리우리라: 스가랴 11:12

가까운 친구에게 배반당하리라: 시편 41:9, 55:12

제자들에게 버림받으리라: 스가랴 13:7

거짓증인에게 고발당하리라: 시편 27:12, 35:11, 109:2

재판할 때 입을 열지 않으리라: 시편 38:13, 이사야 53:7

조롱 받고 사람들이 그에게 침뱉으리라: 시편 35:15,21

채찍질 당하리라: 이사야 50:6, 53:5

십자가에 달리리라: 시편 22:14, 17

사람들이 해융과 식초를 주리라: 시편 22:15, 69:21

그의 옷을 제비 뽑으리라: 시편 22:18

그를 조롱하리라: 시편 22:6-8, 109:25

창으로 찌르리라: 스가랴 12:10, 시편 22:16

그의 뼈가 상하지 않으리라: 시편 34:20

강도와 함께 죽으리라: 이사야 53:9-12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리라: 이사야 53:9

죽을 때 지진이 있으리라: 스가랴 14:4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 시편 16:10, 호세야 6:2 이하

그가 승천하리라: 시편 16:11, 24:7, 68:18, 110:1

가룟유다가 비참하게 죽으리라: 시편 55:15, 109:17

 

나. 성경의 외적증거

 

성경은 성경자체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임이 입증되고 성경 밖에서는 증명되지 않는 것인가?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증거해 준다.  성경 외의 증거로는 주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임이 입증되었으니 독일의 고고학자 Froener 는 1878년 소위 나사렛포고령 이라고 불리는 하얀 대리석에 새긴 로마의 황제의 포고문을 발견했는데 그는 이것을 남모르게 가보(家寶)로 간직하다가 1930년 그가 죽게 되자 이귀한 고고학적 자료가 프랑스 루부르 박물관(Cabinet de Medailles de Leuvre)에 입수되어 고고학자이며 사학가인  Michel Rostovtzeff가 감정한 결과 그 가치가 인정되어 1932년에 Abbe Cumont 이라는 사람의 손을 빌려서 처음으로 그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누구든지  죽은 자의 무덤에 손을 대지 말며 특히 그 조상들이나 친족간에 이상한 미신을[기독교를 오해한말] 믿다가 죽은 자의 무덤은 절대로 손대지 말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무덤을 훼파하거나 파손하는 자는 묘지법 위반 죄로 사형에 처한다”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약 기원 40-50년 사이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학자들 간에는 로마정부의 관할이 44년 아그립바 왕이 죽은 뒤부터 갈리리 지방을 통괄하게 되었으므로 44년 경에 씌어진 것이 아닌가 보는 사람도 있다.  이 포고문은 분명히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로마의 황제가 예수님의 부활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수 믿는 자들의 무덤을 건드리지 말 것을 경고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로 부인할 도리가 없으며 세상의 문헌들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밖에도 1976년부터 시리아의 옛날의 Ebla (Time잡지 1981, 9.21일자 76-78페이지 참조)왕국의 고적지에서 17,000장이 넘는 점토서판 (粘土板)에서 얻는 성경기록의 정확성은 이미 학자들 간에도 논란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소위 문서설(文書說)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세는 그 당시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모세오경을 기록할 수 없었다고 말하던 학설을 무너뜨렸으니 문자는 벌써 아브라함 때 있었던 사실이 이번에 입증되었다.  이와 같이 학자들의 연구나 사람의 지식은 완전할 수가 없어서 어제의 그럴듯한 학설이 오늘에 휴지가 되어 버리기 일수 이다.  하나님만이 진실하고 변하지 않으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이 우리를 대해 주시고 세상을 주관 하신다는 사실을 믿자.

 

창세기 1장도 마찬가지이다. 지구가 억만년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채로 제멋대로 생각해 낸 학설이다. 우리는 늘 변하고 상대적인 사람의 말을 믿기보다는 하나님의 진실하신 말씀을 믿어야한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성과 고모라성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하여 만들어낸 허구(虛構)가 아니라 이번의 에불라 왕국 (Kingdom of Ebla) 유적발견에서 소돔과 고모라는 그 당시 실제로 무역이 흥성한 도시였으며 에불라 왕국과도 무역한 서류들이 발견되었다.  소돔과 고모라는 실제로 존재했던 도성 들이었다. 저대로 허구가 아니다.

 

얼마 동한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헷족속(the Hittites)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종족으로 성경이 틀렸다고 떠들던 때가 있었다.  헷족속은 당시 상당히 부유하게 살던 민족임이 오늘날 판명되었다. 성경에 나오는 Hittites 족속은 실제로 존재했었다. 또 다른 이야기는, 한때 이사야서는 두 사람이 쓴 것이라고 생떼를 부리는 성경학자들과 싸우느라고 보수주의 학자들이 진땀을 빼던 때가 있었는데 1947년의 사해문서 발견에서 나온 이사야서에 이사야 39장과 40장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고(이때 발견된 이사야서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임) 두 사람이 썼다고 생각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되어(Baltimore 소재 Johns Hopkins University의 박물좐장 William F. Albright 박사 감정결과) 싸움은 싱겁게 끝났던 일이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이다.  사람은 실수하되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요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이것은 성경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하는 성경자체의 증거가 사실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부연하고 싶은 것은 이 성경말씀을 위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리의 신앙의 조상들이 로마의 박해 천주교의 박해를 받고 화형에 죽으면서도 찬미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이 성경말씀이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V. 우리들의 할 일

 

이제 우리는 성경의 성질, 성경의 전래, 성경의 내적 증거 성경의 외적 증거 등을 더듬어 보면서 성경은 다른 책과는 다른 성질을 가진 것으로 그 목적 그 기록방법등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보았다.  성경의 목적은 죄에 빠져 죽게 된 인간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이기에 앞서 본대로 성경의 말씀의 예언의 말씀들은 모두 그대로 이루어 진 것도 알았다.  다른 어떤 책도 3500년이나 오래된 책의 내용을 성경처럼 정확히 순수하게 전달되어 올 수 없고 40여명의 저자가 각각 다른 시대배경에서 1500년간에 걸쳐 기록된 책들이 오직 하나의 주제인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고 그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도 그것이 하나님의 귀중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신문기자였던 Werner Keller라는 사람은 성경을 믿지 않은 사람이었으나 그가 신문기자의 직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여기저기 고적발굴작업을 취재하던 중 발굴되는 고적들이 너무도 성경의 사실을 뒷받침하는데 놀라서 성경의 기록이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확신하여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Die Bibel als Historie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이 영어로 번역되어 The Bible As History 란 제목으로 뉴욕의 William Morrow Co에서 간행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의 진실성을 웅변으로 간증해주었다. (참고 서적 목록참조)

 

이제 글을 맺을 때가 되었다.  성경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처음 이 글을 읽기 시작할 때 느끼던 성경에 대한 견해와 이 글을 읽고 난후의 여러분의 성경관이 달라졌으리라 믿고 싶다.  이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이 없다고 믿어질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이 말씀은 나 같은 죄인에게 살길을 열어주시는 은혜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니 이 말씀을 믿으며 예수님 앞에 나와 죄 용서함 받고 성도들의 반열에 참례하여 하늘의 기쁨을 맛보지 않으려는가? 그리고 남에게도 이 복된 귀한 성경책을 소개하여 그들도 구원의 기쁨을 얻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맨 마지막으로 쓴 성경인데 4:13에 보면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디모데에게 부탁했는데 감옥에서도 바울은 성경말씀을 이토록 사랑했다.  여기 “겉옷” 이라고 번역이 되었으나 그 말은 원래가 라전어의 “paenula” 에서 온 말로 책을 싸서 보호하는 보자기를 말하는 뜻이 였다.  날씨가 추워지니 외투(coat) 를 뜻했는지는 몰라도 희랍어 원어 “φαιλονης” 에 그런 두 가지 뜻이 있음을 볼 때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William Tyndale도 사형을 앞두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생각했었으니 간수에게 히브리말 성경책과 히브리말 사전을 차입해 달라고 한 전기를 읽어본다.  그는 못 다한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감옥에서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번역을 완성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옥중에서도 말씀을 사랑했다.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논할 때 우리는 성경의 필요성, 명료성, 충족성, 영속성 및 종결성 을 반드시 논하게 된다. 성경의 필요성이란 성경은 죄에 뺘져 죽게된 인생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必要 necessity) 하다는 말이고; 성경의 명료성(明瞭性, perspicuity)란 성경은 구원의 도리를 명명백백하게 가르쳐 주어 그릇됨이 없도록 인도한다는 밀이고; 성경의 충족성(充足性, sufficiency) 란 말은 성경은 우리 구원의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하게 가르치고 있으므로 다른 계시가 필요없다는 의미이고; 성경의 영속성(永續性 perpetuity) 이란 한번 기록된 성경은 시대에 따라 변개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그 권위가 지속된다는 말이며; 끝으로 성경의 종결성(終結性, finality))란 하나님의 특벽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종결되어 더 이상 계시나 환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 다섯 가지 모두가 모두 성경의 권위에 내포(內包)됨을 알자.

 

이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았을진대 말씀을 귀하게 여기며 우리 모두 이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자.  성경 해석법에 대해서는 언제 까까운 장래에 동영상으로 강의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안다. 오늘은 성경의 권윙 대해서만 강의하였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 한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6-17). -끝-

 

 

출처: 영적분별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