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결박: 계시록 20:1-7
김명도 교수(튤립 신학 연구원)
요한계시록에 관한 해석이 구구합니다. 열사람이 모이면 열 가지 다른 해석이 나옵니다. 또 근자에는 “성도가 사탄을 결박할 권세가 있다” 고 가르치는 다락방의 유광수 같은 사람도 등장하여 참으로 요한계시록을 둘러싸고 학설이 분분합니다. 개혁주의적 해석은 무엇일까요? 언젠가는 본 튤립 신학 연구원에서 요한계시록을 해석을 할 때가 있겠지만 오늘은 계시록 20: 1-7 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우선 알아야 할 것은 계시록은 고도의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는 묵시문학 (Apocalyptic Literature) 이라는 점입니다. 다니엘서, 에스겔서 등이 그러하지요. 묵시문학은 묵시문학 이라는 문학 genre 에 따라 해석해야 합니다. 묵시문학의 특징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인 괴물 (계 13:1) 이라면 그런 괴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으면 안 됩니다. 단지 어떤 진리를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 뿐입니다. 이것은 비단 계시록 13:1 만 아니라 계시록 전체에 해당하는 해석상의 진리입니다.
사도 요한은 유대인이고 유대인들은 랍비문헌 (Rabbinic Literature) 에 정통하고 있습니다. “사탄을 결박한다” 는 사상은 구약의 이사야 24:21-23 에도 암시되지만 모두 랍비문헌의 Tobit 8:3, I Enoch 10:3, 4, 11절, Jubilees 23:29, Testament of Levi 18:12 등에서 따온 말입니다. 천년이라는 숫자도 문자 그대로 천년이 아니고 II Enoch 33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많은 부흥사들이 계시록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해석을 많이 합니다만 성경은 성경으로 풀이해야하며 Historico-Grammatico-Theological Interpretation 을 따라 해석합니다. 이런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은 종교개혁기의 종교개혁가 들입니다.
교회사를 더듬어보면, 1135년에 태어났던 이태리의 Joachim da Fiori 란 신부는 “요한계시록 강해” 라는 책을 쓰면서 구약은 성부시대이고, 신약은 성자 시대이고 지금은 성령시대라고 말했다가 파문 (excommunication) 당한 적이 있습니다. 한편 칼빈은 계시록의 주석을 쓰지 않았는데 이유는 잘못 해석하여 독자를 오도하면 큰 연자 돌을 목에 달리우고 깊은 물에 빠져죽는 편이 낫다는 마태복음 18장6절 말씀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부록이 아니고 정경의 일부이며 성경해석의 원칙을 따라 해석하면 될 것입니다. 성경해석할 때 요한계시록 이라고 해서 독특한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해석할 때 genre에 따라서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방법” 을 이용하여 해석하면 될 것입니다.
계시록 20장은 우리나라에서 과거 박형룡 박사 (옛날 돌아가신 노학자) 가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을 가르치는 바람에 한국의 목사들은 전 천년설에 모두 물들게 되었고, 또 평양신학교를 설립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1930년대 C.I.Scofield 의 세대주의적 성경인 Scofield Reference Bible 을 가지고 공부했으니 한국은 온통 세대주의 신학 일색입니다.
1907년 평양에 큰 부흥이 일어났을 때 목회자들은 세대주의적인 관점에서 계시록을 공부했고 그 후에 6.25 동란이 일어나던 시절과 한국이 어수선한 시절 교회에서는 앞을 다투어 계시록을 공부하는 사경회를 가졌습니다. 지금은 어려움을 당하지만 장차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다는 새로운 생의 의욕을 주며 희망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전쟁이 끝나고 나라 살림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계시록 공부가 끝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주님의 재림을 간절하게 고대하는 사람도 드믑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은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 에 대해서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는 그리스도의 승리이며 그리스도의 승리는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유기적으로 연합된 성도들의 승리입니다. 지금은 교회 (성도) 가 사탄의 세력에 핍박을 받고 있는데 그 강도 (intensity) 가 마치 옛날 수리아의 Antiochus Epiphanes (수리아의 황제) 가 유대를 압박한 일을 상징하는 <곡과 마곡> 처럼 고조에 달하지만, 결국 나중에는 하나님의 정한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곧 짐승과 사탄과 거짓 선지자 (참된 성도를 핍박하던 악의 세력) 이 반드시 망하고 불 못에 던져지고야 만다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이 점을 놓지면 본문의 오묘한 뜻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천년이란 문자 그대로 천년이 아닙니다. 계시록은 고도의 상징적 언어 (symbolical language) 를 사용하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계시록의 내용을 모두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문제가 됩니다. 물론 소아세아의 7교회는 문자 그대로 해석됩니다. 거기에 무슨 상징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소아세아 지금의 Turkey에 실제로 교회가 7 개 있었고 주님은 그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주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촛대를 옮겨 오늘에는 그 교회들의 흔적만 남고 교회는 모두 사라졌지만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는 존재하고 있던 교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할 문제이지만 계시록의 다른 부분의 숫자는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상징적 숫자가 많습니다.
가령 “144,000” 이라는 숫자는 정확히 144,000 명만 짐승의 표를 받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교파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교파에 속한 사람들만의 숫자“ 라는 말도 아닙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구원받은 성도 전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줍니다. (12X12X 1000). 또 ”천년“이라는 말도 문자 그대로 천년이 아닙니다. 만약 문자 그래도 천년이라면 온갖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우선 언제부터 1000년이 시작되는 것입니까? 대답을 못하게 됩니다.
“천년”을 “말세” 의 개념과 같이 생각하면 물론 주님의 십자가로부터 재림까지의 전체의 기간을 상징적으로 말한다고 하지요 (히 1:2; 벧전 1:5, 20). 이것을 무천년설이라고 합니다. “천년”을 따로 분리하여 그 자체로 의미를 찾고저 한다면 확실한 답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전 천년주의자들” (세대주의자를 포함하여) 은 문자 그대로 1000년을 말하지만 그런 학설은 성경 전체로 볼 때 지탱될 수 없습니다. 이유는 요한이 그 숫자를 상징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9:19절부터 시작해서 20장 에서는 역사의 종점, 즉 심판까지를 다룹니다. 계시록 19장에서 20장으로 넘어오는 과정은 마치 계시록 11장에서 12장으로 넘어오는 과정과 비슷하여 반복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11:18 에 보면 심판이 닥아 오는데 12장에 보면 이상하게도 다시 아직 심판은 미래의 일로 계시록 12:5 을 보면 예수님의 탄생, 승천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전체의 요절은 17:14입니다. 계시록은 이 한절을 전개해 나가는 책입니다. 계시록의 요절을 주의 깊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사탄이 결박된다는”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사탄이 결박된다” 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유광수의 다락방이 가르치는 것처럼 성도가 “사탄 결박권” 을 가지고 실제로 사탄을 결박한다는 말입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사탄을 인간이 어찌 결박합니까? 하나님만 하시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거짓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결박하는 것이지 인간이 결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20장 초두에 나오는 ‘사탄 결박“ 에 대한 의미를 바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통제한다는 말입니다.
아마 가장 좋은 예를 들자면 오순절 성령 강림할 때 베드로가 한번 설교하니 3000 명이 일시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런 대규모의 회개운동과 예수님의 지상사역 때를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 바로 그분이십니다. 하나님이신 바로 그 예수님이 전도해도 갈리리에 500명, 제자들 12명, 그를 따르던 여인네들 몇 명, 예루살렘 120명 문도, 모두 합해도 1000명이 안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보다 나을 리 없건만 그가 한번 설교하니 3000명이 “형제여, 어찌할꼬?” 하고 가슴을 치면서 회개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의 자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55절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라고 말합니다. 계시록 20:1-3 은 상징적인 말입니다. 천사가 실제로 쇠사슬을 들고 다닐 수도 없거니와 쇠사슬로 마귀를 묶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사탄의 세력을 통제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다시피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사탄이 결박당했다” 는 말은 사탄이 하나님의 나라 일을 방해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그 세력을 억제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전에도 언급한대로 베드로가 한번 설교할 때 수천명이 일시에 회개하는 일은 전대미문의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후 복음이 급속도로 구파라 전역에 전파되어 나갑니다. 분명 사탄이 복음전파를 막을 힘을 잃은 증거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계시록에서 상징적으로 “사탄이 결박당하여 무저갱 속에 갇혀 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무저갱 속에 결박된 채로 갇혀 있다고 해도 사탄이 완전히 통제된 것은 아닙니다. 마치 개를 끈으로 잡아 매 놓으면 개는 다른 곳에 나가서 해를 끼치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그 영역에서는 신발을 물어뜯을 수도 있고, 사람을 물을 수도 있고, 온갖 나쁜 일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탄이 결박되어 있다고 해도 비록 복음을 전하는 일은 방해 하지 못하지만 (결박상태이므로) 성도들을 시험한다든지 다른 일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얼마 동안? 천년이 차기까지입니다. 그 천년이 언제부터 시작됩니까? 아무도 대답을 못합니다. 이것은 어느 일정한 기간을 말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즉 주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얼마동안은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어 가지만 어느 시점에 가면 (천년이 지나면) “사탄이 잠시 놓여나서 만국을 미혹한다” 고 계20:3 절에 말합니다.
사탄이 놓여나서 무엇을 합니까? 만국을 미혹합니다. 옛날 결박되어 있을 때는 만국을 미혹할 수 없었습니다. 복음이 만방에 전파되어도 마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마귀가 풀려났습니다. 물론 마귀가 실제로 쇠사슬에 묶여 있다가 풀려난 것이 아니고 사탄의 활동을 그렇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사탄이 이제는 복음전파를 방해 합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고 진리의 복음이 아닌 “위장된 거짓 복음”이 전파되어 갑니다. 오늘 얼마나 비성경적인 가짜 복음이 전파되는지 눈여겨보십시오. 사회복음주의, 해방신학, 번영신학, 기복신앙, 신복음주의 신정통주의. 신비주의 등 온갖 그릇된 복음들이 진리의 복음 인양 전파되고 있고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1:8 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 줍니다.
계시록 20:4-6 까지는 이 땅에서 무대가 바뀌어 천당에서 이루어지는 내용입니다.
보좌를 본다는 말은 항상 하늘에서 행해지는 일을 말합니다. 지상에서는 방금 언급한대로 주께서 돌아가시고 부활승천하신 후 얼마동안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가 확립되고 교리가 완성되었으나 그 얼마 기간이 지난 후 사탄의 방해가 시작되어 주님 재림 전에 무서운 핍박 (그것은 주로 속임수로) 핍박이 올 것을 예고했는데 하늘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한 성도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에 관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죽은 자의 “영혼‘입니다. ”몸“ 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몸과 영혼의 분리 작용입니다. 죽으면 몸은 땅속에 들어가 육신의 부활 (두번째 부활)을 기다지만 신자의 경우 영혼은 즉시 하늘에 올라 갑니다 (고후 5:8, 빌 1:23). 영혼이 잠잔다고 가르치는 교리는 비성경적입니다. 영혼이 없어진다 (소멸, annihilation) 고 가르치는 교리도 비성경적입니다.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 로마서 6장 말씀대로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합하여 영혼이 부활하여 죄를 짓지 않으려는 성향으로 변화됩니다. 영의 생각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지만 인간에게는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육신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영의 생각을 거슬립니다. 죄를 지으려고 합니다. 부단한 싸움이 계속 됩니다 (롬 7장 참고). 계시록 20:5 절은 예수를 믿고 하늘에 올라갈 자격을 얻은 성도들, 즉 영혼이 부활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을 <첫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둘째 사망> 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둘째 사망”은 사탄, 거짓 선지자들과 함께 불신자들이 불못에 던져지는 최후 심판을 말합니다.
요즘 어떤 신학자들은 지옥에서 사람의 의식이 없어지고 영혼이 소멸된다고 가르칩니다만 비성경적입니다. 지옥에 내려가는 사람은 분명한 의식이 있는 가운데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영원”은 문자 그대로 영원입니다. “형벌” 을 받는 다는 것은 “의식이 있을 때” 형벌이 의미가 있는 것이며 "의식이 없는 상태“ 에서는 형벌이란 말이 무의미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All Souls' Church 를 목회하다가 은퇴한 John R. W. Stott 목사는 Brian Davies 와 공저한 ”Evangelical Essentials“ 라는 책에서 ”불신자는 무의식 속에 형벌을 받는다“ 고 가르치는데 이는 크게 잘 못된 가르침입니다. ”첫째 부활“ 에 참예한 자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한 사람 (즉 영혼이 부활한 사람) 이며 이들은 보좌에 앉은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두 번째 부활“ 은 주님 다시 오실 때 땅속에 있는 육신들이 부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 5:28-29).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목 베임을 당한 자”의 “영혼‘ 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영혼이 첫째 부활했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부활은 그 성도의 몸의 부활 (땅속에 있는) 을 말합니다. 사람은 이 땅에서도 육신과 영혼으로 되어 있지만 신천지에서도 영혼과 육신이 ”영화로운 몸“(Glorified Body)이 되어 영원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몸의 부활 즉 둘째 부활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둘째 사망" 즉 마지막 불못에 던져지는 심판이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 사망은 마지막 심판에서 악한 자가 불 못에 던져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좀 전에 언급한대로 그 “죽음” 이란 몸과 영이 아울러 하나님과 단절된다는 말이며 아주 죽어서 없어지는 (소멸 annihilation) 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있는 상태 속에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으며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오늘 점점 사라져갑니다.
천년은 여기 계 20장 1-7 에서만 6번 나옵니다. 성경 다른 곳에는 없습니다. 이 천년을 어떻게 해석 하는가 에 따라서 전 천년설, 무 천년설, 후 천년설 등 여러 가지 학설이 나오지만 초대교회에 그런 학설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초대교회에서는 그들 당대에 주님이 재림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학설이 생겨난 것은 종교개혁이 있고 난 다음에 시작되었습니다. 제1차 대전 직후 사람들은 후 천년설을 지지했습니다. 모든 것이 잘되어가고 복음이 잘 전파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종식되어도 점점 세상은 악화되고 특히 제2 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좋아지기보다 오히려 점점 악해 지자 이제는 무 쳔년설 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대거 등장했습니다.
개혁주의자는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등을 믿지만 대부분 칼빈 처럼 무천년설을 믿습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Louis Sperry Chafer 의 조직신학을 믿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7년 대환난” 을 말합니다. 유대민족을 우대하고 “하나님이 지금도 유대민족을 우대한다” 고 가르칩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7 세대 로 나누어 그때 마다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신다” 고 합니다. 즉 무죄시대, 양심시대, 인간정부 시대, 약속시대, 율법시대, 은혜시대 및 왕국시대 등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6장8절을 보면 구약의 노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엡 2:8 대로 We have been saved by grace through faith in Christ (전치사들을 조심할 것).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계시록 20장 8절에 “곡과 마곡” 은 역시 상징적 표현입니다. “곡과 마곡”은 실제 있던 나라들입니다. 알렉산다 대왕 (323 BC 사망) 이 죽자 그의 부하들이 땅을 분배했는데 Seleucus 는 수리아 지방을 점령했고, Ptolemy 장군은 애급을 점령하여 통치했습니다. 북의 수리아의 Seleucus 는 “셀루커스 왕조”를 건설하고 황제의 이름을 Antiochus Epiphanes (안티오커서 에피파네스) 라고 했고 남쪽의 유대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다 수스 (Zeus) 신전을 세우고 돼지의 피를 바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Maccabean Revolt“ (맥캐비 전쟁 167-164 BC) 가 일어나 유대의 맛다디아 제사장은 아들들과 같이 게릴라 전쟁을 시작했고 드디어 수리아 군대를 격파하고 "하스모니아 독립 시대"를 맞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 있는데 수리아의 이런 침략은 이스라엘 역사상 마지막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면 계시록 20장에서 왜 Gog 과 Magog 을 말하는가 하면, Seleucus 왕조는 방대한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Gog 과 Magog 지방을 포함했습니다. Gog 와 Magog 는 땅도 넓었과 군사들도 많고 강했습니다. 요한은 이런 고사를 인용하면서 옛날 Gog 과 Magog 이그 막강한 힘으로 유대나라를 침범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혔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패하고 유대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허락하였듯, 하나님은 영적인 “아마게돈”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 (성도)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자들을 마지막에 심판하고 교회 (진정 중생한 성도)의 승리를 가져오고야 만다” 는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한 목적입니다.
기원전 2 세기에 있었던 북의 수리아의 Seleucus 왕조의 일부였던 “Gog” 과 ”Magog” 이 유대를 침공한 것은 유대민족의 마지막 싸움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계시록 20 장에서도 악의 세력 (사탄) 과의 마지막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놀랍고 재미있는 것은 계 20:8 에 보면, “싸움을 붙이리니” 라는 대목에서 “싸움” 이라는 단어 앞에는 정관사가 있습니다 (“the“ battle). 마찬가지로 계 16:14 에도 그렇고, 19:19 에도 그런 정관사가 있습니다. 모두 정관사가 붙어 있는 ”싸움“입니다. 이 셋은 서로 다른 싸움이 아니라 “같은 싸움” (the self-same battle) 을 말합니다. 그 싸움은 마지막 싸움인데 "아마겟돈“ 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마겟돈”이란 별도로 그런 싸움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도를 보시면 지중해 연안에 "므기도" 란 산이 있습니다. 가멜산 근처에 있지요. "am기도"는 싸움이 자주 있던 곳입니다. 진기스칸도 나폴레옹도 여기서 싸움을 했습니다. “아마겟돈” 과 "므기도"는 발음상에 유사점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정관사는 "ha"입니다. "므기도“ 란 말에 정관사를 붙이면 "하므기도"가 됩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표기하며 "hamugido" 가 되는데 이 단어의 헬라어에서 alpha 라는 첫 글자의 호흡기호를 반대로 쓰면 "amugido" 가 됩니다. 이 말이 와전되어 "amaggedon" 이 되었으니 결국 "아마겟돈" 은 문자그대로 그런 곳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많던 ”므기도“ 를 사탄과 하나님의 나라의 마지막 싸움을 상징하여 사용한 것뿐입니다.
사탄은 곡과 마곡을 사주하고 동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공격해 옵니다. 마지막엔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사탄을 삼켜 불 못에 던지듯, 거짓 선지자, 거짓 신자. 거짓 목사, 거짓 신학교 교수, 거짓 부흥사, 불신자들이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참된 주의 종들을 핍박하고 잡아 죽이지만 나중에 1000 년이 차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정한 때가 지나면) 반드시 우리 하나님이 성도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해 주시고 그 하나님이 악한 자들을 반드시 멸해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 평화, 평화” 라고 외치는 말을 믿지 마십시오. 이 땅에 참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뿐입니다. 사탄은 오늘 “평화” 란 이름으로 <종교다원주의> (Pluralism) 을 권장하며 “기독교의 독특성“ (uniqueness of Christianity) 를 말살 (obliterate)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계의 종교를 하나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즘 한창 인기를 끄는 "Alpha Course" 라는 것인데 여기에는 영국 성공회 Canterbury 주교도 Alpha Course 의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Rick Warren, Doug Paggit, Tony Jones, Calvin Miller Oprah Winfrey 등이 그런 New Age 운동을 장려하며 Contemplative Spirituality 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미혹을 받지 않도록 하라” 라고 주님이 마태복음 24장에서 경고하십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성령이 마지막 때에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지금은 지금 가장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진정 개혁주의 신학으로 믿는 성도들은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끝에는 “마라나다” 라는 말로 끝납니다. 이 말의 숨은 의미가 무엇일까요? 왜 이런 말을 요한이 성경 맨 끝에 넣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출처: 영적분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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