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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육의 역사적 전개 과정과 교회에 미친 영향 연구 - 이상조 박사

Bavinck Byeon 2016. 1. 4. 22:17

16~17세기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육의 역사적 전개 과정과 교회에 미친 영향 연구

- 교과과정, 교재, 교수들의 성향을 중심으로 -

 

이상조 박사(장로회신학대학교)

 

 

I. 들어가는 말

 

비텐베르크 대학이 설립(15021018)된 지 15년이 지난 1517년에 마틴 루터는 이 대학에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이 후 비텐베르크 대학은 개신교 신학과 신앙의 중심지로 발돋움하여 17세기에는 루터교 정통주의의 아성(Hochburg)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신생 할레 대학(Halle, 1692년 설립)과 경쟁하면서 점차 쇠약해져갔다. 나폴레옹은 독일의 프로이센(Preußen)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작센 주에 있던 비텐베르크의 대학을 폐쇄(1814)하였다. 그 후 프로이센 제국은 나폴레옹의 지배체제로부터 벗어났으며, 1815년에 이루어진 빈 회의(Wiener Kongress)을 통해 비텐베르크가 포함되어 있는 작센 지역이 프로이센에게로 양도되었다. 프로이센 제국은 1817년 비텐베르크 대학을 할레 대학과 통합시켜 프리드리히 대학교 할레-비텐베르크”(Friedrichs-Universität Halle-Wittenberg)라 개칭하였고, 이미 대학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비텐베르크 대학에 목사후보자 교육 세미나’(Predigerseminar)를 설립하였다. 이후 1933년에 마틴 루터 대학교 할레-비텐베르크”(Martin Luther Universität Halle-Wittenberg)라는 명칭으로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비텐베르크를 방문해 보면 종교개혁 당시 융성했던 대학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고 다만 루터가 설교하고 95개조 반박문을 내 걸었던 성교회’(Schlosskirche)와 작은 규모의 비텐베르크 목사후보자 교육 세미나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처럼 한 때는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주요 무대 역할을 했던 비텐베르크 대학이 어찌하여 300여년 사이에 명성이 잦아들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을까? 흥망성쇠 하는 역사의 자연스런 흐름일 수도 있겠지만 비텐베르크 대학보다 훨씬 이전에 세워져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수많은 대학들이 오늘날까지 그 전통과 명성, 학문성을 자랑하는 걸 보면 비텐베르크 대학의 흥망성쇠가 자연스럽게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사실 비텐베르크 대학이 현재의 모습으로 남기까지는 다양한 원인과 예기치 못한 많은 요인들, 특히 유럽의 정치적인 상황과 같은 대학 외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기에 어설프게 한두 가지의 경우를 들어 그 원인을 설명하다보면 자칫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본 논문에서 이런 여러 원인 중의 하나를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육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II. 주제에 따른 연구사와 연구 방향

 

비텐베르크 대학의 역사에 관한 연구는 주로 독일어권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2) 19세기의 연구는 신학자들의 생애와 성향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할레 대학의 신학교수로 활동한 톨룩(Friedrich August Gottreu Tholuck, 1799-1877)이 저술한 17세기 비텐베르크 대학의 루터파 신학교수들의 정신(3)이 대표적이다. 이 저서는 비록 톨룩의 주관적인 관점이 강하게 나타나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좋은 이차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역사에 관한 학문적인 연구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문서 전문가이자 역사학자인 프리덴스부르크(Karl Walter Friedensburg, 1855-1938)가 일차사료에 근거하여 비텐베르크 대학의 역사를 서술하고(4) 비텐베르크 대학의 원본 문서를 정리함으로써(5) 향후 비텐베르크 대학의 역사 연구에 초석을 놓았다. 그가 세워놓은 바탕 위에서 알란트(Kurt Aland, 1915-1994)교회사 설계도에서 16세기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부에 관해 서술하였다.(6)

 

20세기 중·후반에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전체적인 역사보다는 주제별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철학부 발전사나(7) 신학부의 발전과 역사적 특징들을 연구했으며,(8) 16~17세기 종교개혁과 교파주의 시대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공부 방법을 연구하기도 했으며,(9) 1570~1710년간의 비텐베르크 대학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중심으로 당시 신학부의 신학적 성향을 연구하기도 했다.(10) 국내에서는 이와 관련해 아직까지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루터의 신학이해와 방법론을 중심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이 신학수업의 개혁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한 연구와 16~17세기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수업의 개혁에 관한 연구가 각각 발표되었다.(11)

 

본 논문에서는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들이 사용한 교재는 무엇이었고 거기에 나타난 그들의 신학적 성향이 어떠하였는지, 실제로 신학생들은 어떻게 공부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교육이 당시 교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고자 한다.

 

III.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육

 

1. 비텐베르크 대학 설립 초기(1502-1517)의 교육과정에 관한 스케치

 

(1) 교양학부와 신학부의 학문적 성향: 스타우피츠를 중심으로

 

비텐베르크 대학은 설립 초기부터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 및 교양학부로서의 인문학과 철학 분야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12) 저학년 과정의 교양학부는 중세의 전통을 따라 크게 3학과와 4과로 나뉘었는데 3학과(Trivium)에는 (라틴어) 문법, 작문을 포함한 수사학, 논리학 또는 변증학이 들어가고 4(Quadrivium)에는 산수,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 포함되어 있었다.(13) 14세기 이래로는 대부분의 서유럽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비텐베르크 대학도 교양학부의 전통적인 과목들 외에도 역사, 시학, 도덕철학, 자연철학, 형이상학 등을 포함시켰다.(14) 특히, 논리학, 도덕철학, 형이상학 및 자연철학을 배우는 과정에서는 그리스 원문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개설된 교양학부에는 토마스주의적인 전통뿐 아니라 둔스 스코투스적인 전통도 공존해 있었으며 인문주의적인 흐름도 있었다. 이는 당시 개설된 강의들과 신학교수들의 성향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1504년에 개설된 교양학부의 강의목록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당시 스코투스주의자였던 니콜라스 암스도르프(Nikolaus von Amsdorf)와 토미스트주의자였던 안드레아스 칼슈타트(Andreas Karlstadt)(16) 가르쳤으며, 페트루스 히스파누스(Petrus Hispanus)논리학(Tractatus 또는 Summulae logicales magistri Petri Hispani)도 토미스투주의자였던 킬리안 로이터(Kilian Reuter)와 스코투스주의자였던 세바스티안 쿠켄마이스터(Sebastian Küchenmeister)가 가르쳤다. 도덕철학(Moralphilosophie)은 볼프강 오스터마이르(Wolfgang Ostermair)가 가르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Metaphysik)도 개설되어 있었다.(17) 그 외에 라틴어 문법도 개설되었으며 인문주의자들에게 칭송을 받던 고대 로마 베르길리우스(Verglius)의 장편서사시인 아이네이스(Aeneis)도 개설되어 있었다. 이러한 기초과정은 모두가 당시 상급과정이었던 의학, 법학 그리고 신학을 위한 도구나 방법론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신학부 설립 초기의 역사를 다룰 때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회(18) 총대리신부였던 스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tz, ca.1465-1524)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비텐베르크 대학을 1477년에 세워진 튀빙겐(Tübingen) 대학교를 모델로 하여 설립하려고 하였는데, 여기에 적합한 인물이 바로 튀빙겐 대학 출신의 스타우피츠였다. 그는 1490년 쾰른(Köln)과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공부하여 철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497년에는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1500년에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타우피츠를 중심으로 설립된 비텐베르크 대학의 학문적인 특징은 자연스럽게 스타우피츠의 신학 성향과 깊은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료가 빈약하여 스타우피츠의 신학적 성향을 정확히 규명하기는 어렵긴 하지만 그는 전통적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노선도 아니었고, 둔스 스코투스 노선에도 속하지도 않았다.(19) 오히려 그는 독자적으로 고대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를 철저히 연구하였고, 무엇보다도 성서강의를 가장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20) 이러한 그의 성서연구에 대한 열정이 비텐베르크 대학의 학생들에게 뿐만 아니라, 같은 수도회 소속의 젊은 수도승이었던 루터에게도 영향을 끼쳤음은 자명한 사실이다.(21)

 

비텐베르크 대학은 설립 초기부터 대학 규정에 따라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회가 대학에서 최소한 두 자리의 교수직(성서강의를 위한 신학 교수와 교양학부의 도덕철학 강의를 위한 철학 석사 학위자)을 담당할 책임을 맡고 있었다.(22) 이런 연유로 스타우피츠가 신학부 교수로서 성서를 강의하였으며, 나중에 그의 성서강의 담당 교수직을 루터가 물려받게 된 것이다. 또한 스티우피츠의 영향으로 대학이 설립되자마자 첫 겨울학기(1502/03)에는 416명의 학생들 중 13명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엄수파 소속의 수도승들이 입학하였으며 이듬해 15035월에 스타우피츠가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회의 독일지역 총대리신부로 선출된 이후에는 162명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승들이 입학할 정도로 초창기 비텐베르크 대학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도승들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23)

 

당시 스타우피츠는 인문주의의 대표자도 아니었으며 강단 학문의 방향을 새롭게 선도할 만큼 신학적인 대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학문적인 개방성을 지닌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토마스의 저서나 스코투스의 저서보다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들을 읽기를 권고하였다. 이런 토양 위에서 루터와 칼슈타트는 반()펠라기우스주의 아우구스티누스 저서인 영과 문자를 읽었던 것이다.(24) 스타우피츠가 전통적인 토마스주의나 스코투스주의에 경도되지 않고 성서연구에 보다 큰 가치를 두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그가 새로운 학문의 흐름에 신학적으로 열린 태도를 지녔음을 의미한다.(25)

 

(2) 성서인문주의(Bibelhumanismus)의 발전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하면서 학생들로 하여금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들과 성서를 강독할 것을 권고하게 된 이유가 스타우피츠의 열린 신학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런 배경에는 당시 독일 대학가에 유행하던 인문주의 운동의 영향도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인문주의는 15세기에 이미 알프스를 넘어 점점 유럽의 중부와 북부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인문주의자들은 대학 안팎에서 동료들을 중심으로 동아리 형태로 모임을 이루어 활동하였고 라틴 고전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다.(26)

 

이러한 인문주의는 신생 비텐베르크 대학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루터와 멜란히톤이 중심이 되어 대학교육의 개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1518년 이전까지 인문주의 흐름을 보면 보통 세 시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27)

 

첫 번째 시기는 1502-1506년으로 마샬크(Nikolaus Marschalk)와 라이프치히의 의학교수 출신의 마틴 폴리히(Martin Pollich)가 인문주의를 주도했다. 특히, 마샬크는 스콜라 신학을 반대하고 희랍어와 수사학 및 역사 연구를 주창하며 강단에서 인문주의적 정신을 가르쳤으나 1505년에 비텐베르크를 떠났다.

 

두 번째 시기는 1507-1512년 사이로 크리스토프 셰울(Christoph Scheurl)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1507년부터 비텐베르크에서 교회법과 인문학’(humanas litteras)를 가르치기 시작하며 인문주의의 부흥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 역시 1512년 초에 뉘른베르크로 돌아가서 자신의 고향에서 법률 자문인의 삶을 살았다.

 

이 두 시기가 대학 내에서 고전 문학의 수용을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다면 1513-1517년은 성서인문주의(Bibelhumanismus)가 꽃을 활짝 피운 시기로 이 때 주요한 인물이 바로 마틴 루터와(28) 요한 랑(Johann Lang)과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비서였던 게오르그 슈팔라틴(Georg Spalatin, 1484-1545)이었다. 슈팔라틴은 마샬크의 제자요 이탈리아 인문주의의 대표적인 대변자였던 무티아누스 루푸스(Mutianus Rufus)의 제자로서 1511년 가을부터 선제후 조카들의 교사로 비텐베르크에 머물게 되었으며 15169월부터는 선제후의 비서로 임명되었고 15179월부터는 교회와 대학의 문제를 담당하는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에 인문주의 정신을 확산시키기 위해 인문주의자들이 좋아하는 도서들을 구입하면서 대학 도서관의 확장을 추진했고, 이 일을 위해 선제후는 1512년 자신의 성 도서관을 내놓았다.(29) 루터는 에어푸어트 시절 인문주의를 접하기 시작했으며 비텐베르크로 와서 강의를 할 때부터 인문주의자들이 저술한 본문비평서나 참고서들을 강의에 활용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시편을 강의할 때 인문주의자들이 저술한 세 종류의 신간 참고도서를 사용했다: 로이클린의 히브리어 교재와 사전(De rudimentis linguae hebraicae, Pforzheim 1506), 로이클린의 히브리어 원문을 기초로 한 일곱 개의 참회시편 주해(In septem Psalmos poenitentiales, Tübingen 1512), 다섯 종류의 서로 다른 라틴어역 시편을 대조시킨 프랑스 인문주의자 야콥 파버 스타플렌시스의 시편주석(Psalterium quintuplex: gallicum, romanum, hebraicum, vêtus, conciliatum, 1509).(30) 요한 랑은 반()스콜라주의적 입장에서 도덕철학(1512-1515)을 강의했고, 1515년에는 희랍어도 강의했다. 그해 1120일에는 비텐베르크에서 성서 학사를 취득한 후 로마서와 디도서를 강의하였다(요한 랑은 1519년에 신학박사 학위도 취득하였다). 루터와 요한 랑은 강의시간에 반()스콜라주의 입장에 서서 인문주의적인 방법들을 성서 주해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그들의 강의는 학생들로부터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31) 이 시기의 비텐베르크 인문주의의 방향은 이미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고대교부과 성서로 관심이 기울어져 있었다.(32)

 

2.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육 개혁

 

(1) 개혁의 진행 과정

 

16세기 초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육의 특징을 서술할 때 보통은 1518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생각한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더불어 멜란히톤이 15188월에 희랍어 교수로 부임하면서 대학의 교육개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혁을 위한 준비는 그 이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1516년 초와 15179월 두 번에 걸쳐 각각 비텐베르크 대학에 대한 시찰이 있었으며, 시찰 결과 대학교육의 질적 향상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선제후는 15182월에 칼슈타트와 루터에게 대학교육 향상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하도록 위임하였다.(33) 그 결과 교양학부의 수업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결정사항이 이루어졌다: 첫째 희랍어와 히브리어 강의가 개설되어야 하며, 플리니우스와 퀸틸리아누스와 같은 저서들에 관해서 강의되어져야 한다.(34) 둘째로 페트루스 히스파누스(Petrus Hispanus)의 교재와 페트루스 타르타레투스(Petrus Tartaretus)의 주석을 따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강의는 취소되어져야 한다. 셋째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이차 자료를 통하지 않고 라틴어 본문으로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자체로부터 진행되어야 한다.(35)

 

이러한 결정사항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고전어에 대한 강조였으며 토마스주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원전을 직접 다루는 수업의 강조였다. 이러한 결정사항이 전면적으로 관철되지는 않았으나 대학은 학칙을 바꾸어 학생들로 하여금 고전어 시험을 치르도록 하였고 루터는 1518년 겨울학기부터 토마스주의적인 물리학과 논리학 강의를 빼고 수업시간에 원전을 직접 다루기 시작했다.(36)

 

아울러 대학은 고전어(히브리어와 희랍어) 강의를 위해 교수도 초빙하였다. 1518년 늦가을에 히브리어 교수로 요한 뵈센슈타인(Johann Böschenstein)이 초빙되었으나 몇 개월 만에 떠나고 말았다. 이후 1519년 말에 스페인 출신의 유대인 마태우스 아드리아니(Matthäus Adriani)가 부임하여 히브리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루터의 복음 이해와 충돌하였기에 15212월에 해임되었으며, 그해 6월 비텐베르크 출신의 골드한이라고도 하는 마태우스 아우로갈루스(Matthäus Aurogallus oder Goldhahn, 1543년 사망)가 교수로 부임하여 히브리어를 가르치게 되었다.(37)

 

희랍어를 가르칠 교수로는 1513년부터 작센 주의 역사기록에 도움을 준 독일의 인문주의자 로이클린(Johannes Reuchlin, 1455-1522)의 외손자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이 부임했다. 멜란히톤은 15116월에 하이델베르크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5141월에 튀빙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1518년 봄에 이미 희랍어 문법서를 출판할 정도로 고전어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1518825일에 비텐베르크에 도착한 후 29일에 대학에서 젊은이들의 학업 개혁(De corrigendis adolescentiae studiis)이라는 제목으로 교수취임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에서 멜란히톤은 수백 년간 진행되어온 학문과 교회의 타락을 지적하며 이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희랍어 습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희랍어는 윤리학, 자연과학, 의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의 갱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언어라고 역설하였다. 아울러 신학은 희랍어와 히브리어의 도움으로 스콜라적인 주석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철학과 더불어 시()를 비롯한 고전문학도 교육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강조하였다.(38)

 

멜란히톤의 이 강연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육개혁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루터는 이것을 매우 흡족히 여겼다. 이후 멜란히톤은 대학 내에서 급속도로 신임을 얻었고, 비텐베르크인들에게 인문주의적인 지식을 넓혀 주는 역할을 하였다. 루터는 그에게서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역사 강의를 하도록 자극받았다. 멜란히톤도 루터의 강의를 들었고, 종교개혁적인 바울 신학에 깊이 빠져들었다.(39) 그 결과 멜란히톤은 1519년 가을에 성서학사 학위(Baccalaureus biblicus)를 취득했으며, 이후 디도서, 야고보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시편과 마태복음 등의 성서주석을 강의했다.(40)

 

이러한 교과 과정의 개혁 결과는 1520년에 교양학부에 개설된 강의목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히브리어와 문학, 희랍어와 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학(초급),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동물학(중급), 키케로에 따르는 수사학, 베르길리우스와 키케로의 웅변, 퀸틸리아누스, 역사, 라틴어 문법, 플리니우스, 수학, 교육학.(41) 이 강의목록에는 토마스주의와 스코투스주의 관점에서 강의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형이상학 과목이 빠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신학수업과 공부 방법 (루터와 멜란히톤을 중심으로)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수업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을까? 또 학생들은 어떤 식으로 신학을 공부했을까? 본 논문에서는 루터와 멜란히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루터는 15121018/19일에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스타우피츠의 후임으로 성서강의(Lectura in Biblia)를 위한 신학부 교수로 1513년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이 후 그는 평생토록 강단에서 성서 강해만 했다: 구약성서의 경우 창세기, 이사야, 소선지서, 전도서와 아가서 및 시편(세 번)을 강해했으며, 신약성서의 경우 로마서, 갈라디아서(두 번), 디도서, 디모데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요한1서를 강해했다. 15451117일 창세기 강의가 끝나면서 루터의 교수활동도 끝이 났다.(42) 그는 (중간에 강의를 하지 못한 기간을 제외하고) 27년 혹은 28년간의 교수생활 중 4년 반 정도만 신약성서를 다루었고 나머지는 구약성서를 강해했다. 오늘날로 생각할 것 같으면 루터는 구약학 분야의 성서학 교수였다. (43) 따라서 그의 수업의 주 교재는 성서였다.

 

그의 첫 강의는 구약성서의 시편주해였다. 강의를 위해 루터는 비텐베르크 인쇄소에 라틴어 시편을 줄 간격을 넓혀 인쇄하도록 요청했고, 그와 수강생들 모두가 어구에 대한 설명(Glossen)을 줄 사이와 여백에 기입하도록 하였다(행간주기와 여백주기). 그 외에도 루터는 시편의 각 구절에 대한 상세한 해석을 했다. 이렇게 시작한 루터의 강의는 이후 로마서 강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44) 하지만 1518년 제2차 시편강의를 시작한 이래로 루터는 주해 형식인 자구해석과 본문해석의 틀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고, 각각의 구절을 언어학적이고 신학적으로 상세히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루터의 강의에는 인문주의적인 연구 방식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종교개혁의 신학적 색채를 짙게 적용하였다.(45) 이후 그는 평생 강단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바울을 기초로 새로운 복음적 바울 사상을 가르쳤다. 교회의 전통보다 성서에 더 권위를 두었던 루터에게 있어서 신학연구의 중심에는 당연히 성서연구가 있었다.

 

그렇다면 루터는 신학생들이 어떻게 해야 성서를 바르게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그는 1539년 독일어 전집 제1권의 서문에서 신학을 바르게 공부하는 방법을 제시한다.(46) 여기에서 그는 기도, 묵상, 영적시련’(Oratio, Meditatio, Tentatio) 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들어 바른 신학공부 방법을 설명한다.(47) 그는 신학을 공부하는데 기도를 먼저 강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아담의 타락과 함께 죄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의 이성으로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성령에 의해 이성이 밝아져야만 성서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묵상이란 성서를 직접적으로 연구하는 과정으로 성령에 의해 조명된 이성으로 성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성서를 문법적으로 파악하고 주석하는 학문적 연구 작업을 의미한다. ‘영적시련은 성서 연구를 통해 깨달은 바를 각 개인이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루터가 신학공부 방법으로 제시한 기도, 묵상, 영적 시련은 사실 신학생들이 무엇을’ ‘어떻게공부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태도(modus studendi), 즉 신학생들이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가지고 신학을 공부해야 하는지를 언급한 것에 가깝다.(48) 이에 반해 이제 소개하게 될 멜란히톤의 신학공부를 위한 간략한 방법에는 당시 신학공부방법의 구체적인 내용이 묘사되고 있다.

 

멜란히톤은 1520년대부터 이미 조언자요 상담자로서 대학에서 신입생들과 상급생들에게 공부하는 방법을 조언해 주고 있었다. 그가 학생들에게 신학을 공부하는 방법에 관해 조언한 내용은 문서로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49) 신학공부를 위한 간략한 방법(Brevis discendae theologiae ratio, 1529/30)이라 이름 붙여진 이 문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신학생을 위해 1529년 늦가을 경에 멜란히톤이 작성한 것이다.(50) A4 용지로 대략 세 쪽 분량의 라틴어로 작성된 신학공부를 위한 간략한 방법에서 멜란히톤은 신학생에게 어떻게 복음적인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언하고 있다.

 

이 글에서 멜란히톤이 신학공부를 위해 제시한 학업방법의 중심에는 성서연구가 놓여 있다. 그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성서를 공부할 것을 권면한다. 첫 번째로는 성경을 통독할 것(tota Biblia ordine legenda)을 권면하고 중요한 성경 구절들의 경우 신학적으로 요점 정리할 것(loci)을 권면한다. 그는 학생으로 하여금 아침에 일어나자마 그리고 밤에 침실로 들어가기 전에 기도한 후에 성경을 한 장 혹은 두 장 읽어서 성서 전체를 차례대로(ordine) 통독할 것을 권면한다. 동시에 기독교 교리의 전체를 바로 파악하기 위해 신학적으로 중요한 개념들을 뽑아내고 거기에다가 중요한 성경구절들을 기입하도록 권하고 있다. 여기에 필요한 신학적인 전문용어들은 강의 시간에 사용하고 있는 자신의 교재인 신학총론(Loci communes, 1522)으로부터 끄집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독서방식을 통해 학생이 성서 본문을 더욱 신뢰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두 번째로 멜란히톤은 학생이 복음적인 기독교 교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도록 성서에서 하나의 방식/체계’(methodus)를 익힐 것을 권면한다. 이러한 체계의 기본적인 구조를 세우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로마서를 공부할 것을 권면하는데 그 이유는 로마서 안에는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개념들인 이신칭의, 율법의 사용, 율법과 복음의 차이 등이 열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바울 서신의 본문을 논리적이고도 수사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로마서에 나타난 이신칭의적인 신학개념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뒤이어 멜란히톤은 학생에게 루터의 주석(1523년 판)이 첨부된 갈라디아서와 멜란히톤 자신의 주석(1527년 판)이 첨부된 골로새서를 읽을 것을 권하고 있다. 이 문서들을 정독하여 읽게 되면 기독교 교리 전체에 관한 개요를 지니게 될 거라 말한다. 그런 후에 그는 성서의 나머지 부분들도 다음의 순서로 읽을 것을 추천 한다: 바울서신들, 복음서들(특히,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읽고 창세기, 신명기, 시편, 예언서들과 역사서. 이러한 성서 공부는 아침과 밤에 하는 통독용 성서읽기와는 달리 정확한 신학적 관점에서 성서 본문을 이해하게끔 해 줄 거라 말한다.

 

멜란히톤은 신학생이 이렇게 성경통독과 신학요점정리(Loci)와 교리적인 체계’(Methodus)를 익히다보면 각각의 성서 구절들을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이러한 방식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알레고리적인 성서해석 방법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또한 멜란히톤은 교리적인 성서해석을 연습하기 위해서 교회적이고 신학적인 전통을 공부할 것을 권면한다. 이를 위해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들, 특히 반() 펠라기우스 문서들을 읽을 것을 권면한다. 흥미롭게도 그는 중세의 주석적이고 교리적인 문헌들은 반대했지만, 니콜라우스 리라(Nikolaus von Lyra, 1270/75-1349)의 성서주석은 긍정적으로 여겼다.(51) 그리고 고대 교회의 공의회들과 가르침들을 공부할 것을 권면하고 성서이해를 위해 교양학부 과정에서 라틴어 문법을 비롯한 고전어(희랍어와 히브리어)와 수사학, 그리고 변증학(Dialectica)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52)

 

이상에서 언급한 신학공부를 위한 간략한 방법에 나타난 멜란히톤의 신학공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성서연구이다. 통독을 위한 성경읽기를 통해 학생들은 성서의 전체적인 의미(큰 줄기의 의미)를 파악하고 내용적으로 성서를 서로 연결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다른 하나는 성서를 깊이 있게 읽는 것으로 이신칭의적인 신학적 관점에서 성서본문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이신칭의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같은 바울서신들을 적극 추천하였던 것이다. 그 외에 성서를 교리적으로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고대교회의 문헌들을 권하며 인문학 과정에서 고전어 실력을 향상시킬 것을 권면했다.

 

이렇게 성서 중심의 교육으로 개혁되고 발전한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육은 학생들에게 열렬한 호응을 받았으며, 이는 결국 대학의 학생 수에도 영향을 미쳤다. 1519년에 입학한 학생들을 비교해 보면 쾰른 276, 에어푸르트 298, 라이프치히 298명인데 비해 비텐베르크에는 458명의 학생들이 입학하였으며 이러한 증가는 1540년까지 지속되었다.(53)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공부한 신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독일과 유럽 전역으로 나아가 교회에서 종교개혁적인 목회 사역을 하였고 강단에서 신학교육의 개혁에 헌신하였다. 한 예로, 요한네스 로니체루스(Johannes Lonicerus, 1499-1569)는 루터처럼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회의 수도승이었는데 루터를 따라 비텐베르크에서 공부하면서 1520년부터는 루터의 추종자가 되었다. 1521년에는 문학석사 학위를 받고 히브리어와 희랍어를 강의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 후 루터의 종교개혁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다가 1527년 개신교 이념으로 설립된 마르부르크(Marburg) 대학의 희랍어와 히브리어 교수가 되었으며 1554년에는 신학교수가 되면서 마르부르크를 개신교적인 학풍으로 만드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54)

 

IV. 17세기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육

 

1. 루터 이후 17세기말까지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부에 대한 스케치

 

루터 이후 17세기말까지 비텐베르크 대학은 루터교 내부의 교리논쟁과 정통주의 시대 속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독일의 루터교 정통주의는 세 시기로 나뉜다. 첫 번째 시기는 아우구스부르크 종교 평화협정(Augsburger Religionsfrieden)이 체결된 1555년부터 시작하여 1577년의 일치신조(Konkordienformel) 통해 루터파 교회로 발돋움하게 된 1600년까지 해당되며, 이 시기를 초기 루터교 정통주의(Frühorthodoxie)라 칭한다. 둘째시기에 해당되는 1600-1675년은 루터교 전성시기(Hochorthodoxie)라 칭하는데, 이 시기에는 루터교회가 신()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과 방법론을 통해 가톨릭 및 칼빈주의와 신학적 논쟁을 하던 시기로 예나(Jena) 대학의 요한 게르하르트(Johann Gerhard, 1582-1637),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의 요한 콘라드 단하우어(Johann Conrad Dannhauer, 1603-1686), 비텐베르크 대학의 아브라함 칼로프(Abraham Calov, 1612-1686) 등의 루터교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시기를 일컫는다. 그리고 경건주의자 필립 야콥 슈페너가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을 출판한 1675년부터 시작하여 1740년까지의 시기를 후기 루터교 정통주의(Spätorthodoxie)라 일컫는데, 이 시기의 정통주의는 경건주의와 계몽주의에 의해 학문적 비판을 맞으며 와해되었다.(55) 이 와중에 루터교 정통주의의 아성을 지키고 있던 비텐베르크 대학은 점차 루터 당시에 지니고 있었던 신학적 역동성을 서서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16세기 초부터 네 개의 정규교수 자리를 갖고 있었던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부는 네 개의 성서 강의들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1536년 당시 네 개의 강의목록을 살펴보면 이렇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요한복음 강의, 창세기와 이사야, 시편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저서들 강의, 나머지 바울서신들과 베드로 서신들과 요한서신들 강의, 마태복음과 신명기 그리고 소예언서들 강의.(56) 이러한 강의는 루터 사후에도 동일하게 유지 되었다. 그러던 것이 교리 논쟁 속에서 점점 루터파의 교리가 확립되고 1577년의 일치신조가 확정된 후에는 강단에서 성서강의와 더불어 멜란히톤의 신학총론에 맞춘 개신교 교리를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마틴 켐니츠(Martin Chemnitz, 1522-1586)신학개요(Loci theologici, 1591)와 레온하르트 후터(Leonhard Hutter, 1563-1616)가 지은 신학개요 편람(Compendium locorum theologicorum, 1609) 등이 신학수업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특히 후터는 신학개요 편람에서 교리문답 방식으로 일치신조에 관한 루터파의 교리를 조직적으로 서술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신학적인 교리 체계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사용하였으며 루터가 배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도 다시 도입하였다. 이 후 후터의 책은 17세기 내내 루터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57)

 

이렇게 하여 16세기 당시 루터가 대학을 개혁하면서 제거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윤리학 그리고 물리학이 이제 다시 강단으로 들어오게 되었다.(58) 이로 인해 17세기 루터교 정통주의는 스콜라적인 강단신학으로 되돌아갔다. 이러한 경향은 17세기 비텐베르크에서 루터교 정통주의를 이끌어 학문적인 전성기를 이끌었던 아브라함 칼로프(Abraham Calov, 1612-1686)와 요한 안드레아스 크벤슈테트(Johann Andreas Quenstedt, 1617~1688) 모두에게 나타나는데,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을 통해 자신들의 교의학 책을 저술하고 강단에서 교재로 사용하였다.

 

2. 17세기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육의 한 예() (고트프리드 아놀드를 중심으로)

 

17세기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하던 신학들은 어떤 과정에서 무슨 과목을 들었으며 당시 사용하던 교재는 무엇이었을까? 본 논문에서는 17세기 전체의 역사 중에 1685-1689년까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교양학부와 신학을 공부한 고트프리드 아놀드(Gottfried Arnold, 1666-1714)의 경우를 통해서 당시의 신학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놀드는 김나지움의 라틴어 선생이기도 했던 아버지의 추천으로 1685618(59)에 당시 루터교 정통주의의 아성(牙城)인 비텐베르크(60) 대학에 입학하여 4년간 철학과 히브리어, 헬라어, 수학, 고대사와 역사 등의 교양학부의 기초학문과 상급과정의 신학을 공부하였다. 먼저 2년간의 기초학문 과정에서 아놀드는 발터(Michael Walter) 교수에게서 수학과 기하학을 배웠다. 발터는 나중에 신학부로 전공을 옮길 만큼 루터교 정통주의 신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2년 후에 아놀드가 신학 수업을 받을 때 그에게서 다시 신학 수업을 받았다. 논리학과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방법론에 깊이 젖어 있던 도나트(Christian Donat) 교수에게서 배웠다. 도나트가 교재로 사용하던 교과서 일반 형이상학(Metaphysica usualis, 1682)은 당시 루터교 정통주의의 대가로 명성을 날리던 아브라함 칼로프(Abraham Calov)의 신학적 입장을 철저히 따르던 책으로 아놀드는 이 책을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습득하는데 주교재로 사용하였다. 윤리학은 크리스티안 뢰렌제(Christian Röhrensee) 교수에게서 배웠는데, 뢰렌제 역시 윤리학 교재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스 윤리학(Die Nikomachische Ethik)을 사용하였다. 히브리어는 테오도르 다소프(Theodor Dassov) 교수에게서 배웠다.(61) 그 외에 아놀드는 교양과정에서 슈어츠플라이쉬(Konrad Samuel von Schurzfleisch, 1641~1708) 교수에게서 고대사와 역사 그리고 희랍어를 배웠다.(62)

 

2년간의 기초학문 과정을 마친 후 1686428일에 아놀드는 신학석사과정에 입학하였다.(63) 석사과정에서 아놀드는 주로 크벤슈테트와 발터(Michael Walther) 그리고 도이치만(Johannes Deutschmann) 교수에게서 신학수업을 받았다.(64) 이들의 신학적 경향은 철저히 루터교 정통주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17세기가 시작될 무렵 비텐베르크를 비롯한 루터파 대학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유입되었으며 대학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그의 방법론을 이용하여 개신교 스콜라신학이라 불리는 자신들의 교리 체계를 구축하였다. 비텐베르크에서 이 일에 앞장 선 신학교수들이 바로 칼로프와 크벤슈테트 교수였다. 이들의 영향력에 의해 비텐베르크 대학교는 17세기 후반 루터교 정통주의의 아성이라 불리어질 정도였다. 이런 신학적 경향 속에 아놀드는 루터교 정통주의 신학 수업을 받았다.

 

이상의 교육과정의 한 예를 통해 보건대, 17세기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적 방법이 교과과정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16세기 볼 수 있었던 성서 중심의 교과과정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 결국 성서 중심의 역동적인 강의가 더 이상 이루어지지고 않고 그 자취를 잃어버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17세기 베텐베르크 대학의 성서 해석의 방법 (요한 도이치만의 경우를 중심으로)

 

그렇다고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이 성서를 아예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성서 본문을 다루었다. 그렇다면, 스콜라주의적인 교육방식으로 돌아간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육에서 성서는 어떻게 활용되고 해석되었을까?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들을 포함하여 17세기 대부분의 루터교 정통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교리의 정당성과 권위를 세우는 과정에 어김없이 자신들의 교재 안에 루터와 루터의 종교개혁에 관한 내용을 포함시켰다.(65)

 

한 사례를 살펴보면, 게르하르크의 제자요 공격적인 교리 논쟁가인 스트라스부르크의 단하우어는(Johann Conrad Dannhauer, 1603-1666)는 뷔르츠부르크(Würzburg)의 가톨릭 신학 교수인 멜키오르 코르네우스(Melchior Cornäus, 1598-1665)와 신학논쟁을 하는 가운데 루터교회의 신학적 정통성과 합법성을 주장하기 위해 루터의 신학을 거론하며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였다: “루터가 엄청나게 새로운 교리나 도덕철학을 설교했다거나 교회의 윤리규범과 신앙규범을 변화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루터의 가르침은 옛날 사도적 가르침의 복원이었다.”(66) “루터는 악한 영을 몰아내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서적 의미를 열었다. 루터는 사자(使者)로써 합법적인 권한을 부여 받았다. 그는 어떤 새로운 교리를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요한계시록 147절에 나오는 두 번째 천사이다.”(67) 이러한 루터 이해는 비단 단하우어만의 이해만은 아니었다. 예나(Jena) 대학의 게르하르트의 신학주제(loci theologici)에서도 나타나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을 최정상으로 올려놓은 칼로프의 조직신학(Systematis Locorum Theologicorum)과 크벤슈테트의 교훈적이며 논쟁적인 신학체계(Theologia didactico-polemica)에도 동일하게 등장하고 있다.

 

루터교 정통주의자들이 루터교회의 교리의 합법성과 권위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나온 신적 교리의 권위자로서의 루터이해’(die göttliche Lehrautorität Luthers)1617년 루터의 종교개혁 기념 경축일에 맞추어 주조된 기념주화에서 아주 명백히 나타났다: “하나님의 말씀이 루터의 가르침이다. 그런 까닭에 루터의 가르침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Gottes Wort ist Luthers Lehr, darum vergeht sie nimmerm)(68) 신적 교리의 권위자로서의 루터 이해는 요한계시록 146~7절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통해 더욱 견고해졌다. 초기 루터교 정통주의의 대표자로 일컬어지는 요한 게르하르트 (Johann Gerhard, 1582-1637)1617년 루터의 종교개혁 기념 경축일에 행한 설교에서 루터의 가르침과 성서를 동일시하면서 루터는 교황권의 부패와 오류의 캄캄한 암흑으로부터 다시금 복음 교리에 빛을 밝혀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는 이 본문[요한계시록 14]에서 몇 세기 전부터 예언된 천사였다.”(69)

 

게르하르트의 이러한 성서해석은 17세기 루터교 정통주의 전성시기의 대표자인 비텐베르크의 아브라함 칼로프(Abraham Calov, 1612-1686)에게 그대로 전해졌는데 칼로프는 성서주석학적인 주저(主著)라 할 수 있는 성서주석(Biblia illustrata Alten und Neuen Testament, 1672-1676)(70) 1683년에 발표된 소논문인 루터교 이전의 루터에 관하여(De Luthero Ante Lutherum, 1683(71))에서 각각 요한계시록 14장을 주석하면서 종말론적으로 교회 교리의 신적 권위자로서의 루터상을 증명하였다. 칼로프의 입장은 또한 같은 학교의 요한 도이치만(Johann Deutschmann, 1625~1706) 교수에게 그대로 전해졌는데, 그는 요한계시록 146~7절에 등장하는 천사 루터에 관한 신학논문(Dissertatio Theologia de Luthero Angelo illo Apocalyptico cap. XIV. v. 6,7, 1683)에서 이 점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7세기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들이 강단에서 성서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도이치만의 논문 요한계시록 146~7절에 등장하는 천사 루터에 관한 신학논문(72)은 도입부와 세 개의 본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입부분에서 도이치만은 루터의 출생과 출생 장소를 짤막하게 소개한 후 루터는 종말론적인 천사이며 종교[기독교]를 복원시킨 사람이다.”(73)는 명제를 내세운다. 본론의 첫 번째 부분(Kapitel I)에서 도이치만은 요한계시록 146~7절의 그리스어 원문과 라틴어 본문을 대조하며 본문 분석을 한 후, 본론의 두 번째 부분(Kapitel II)에서 본문의 구절구절에 대한 정통적’(orthodoxe)인 주석 작업을 한다. 이 두 번째 주석 과정에서 특별히 주목할 사항은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천사의 임무를 해석한 부분이다: “천사의 임무는 영원한 복음 선포인데, 이 복음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관한 커다란 위로와 신적으로 계시된 교리를 말한다.”(74) 당연히 신적으로 계시된 교리는 루터교회가 닻을 내리고 있는 정통적인 교리’(orthdoxe Lehre)를 의미한다.

 

석의 과정 후에 세 번째 부분(Kapitel III)에서 도이치만은 복자(福者) 루터는 영원한 복음을 가져온 천사이다.”(Angelus aeternum afferens Evangelium est B. Lutherus),(75) “루터가 선포한 복음과 그의 저서들은 거짓이 아니라 예언적이고, 사도적이며, 복음적이다.”(76) 결론적으로 도이치만은 루터는 세계 역사의 마지막 때에 교회와 교리(Lehre)를 복원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으며, 루터의 신학은 내용면에서 성서에 기록된 신적 계시와 일치하며, 따라서 루터가 선포하고 가르친 것은 신적(göttlich)이었다”(77)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요한계시록 14장의 주해를 마친다.

 

이상에서 도이치만의 성서주석을 통해 살펴본바 17세기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연구는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에 있었던 역동적인 성서해석은 찾아볼 수 없고 교리의 권위와 합법성을 논증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성서를 명제적으로 인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성서해석 방법은 성서의 역동성을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V. 연구결과 및 제언

 

본 논문에서는 16~17세기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육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매 시대마다 있었던 촘촘한 역사와 그 변화를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본 논문을 통해서 드러난 몇 가지 결과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6세기 비텐베르크 대학이 설립될 당시 스파우피츠의 폭넓은 신학적 입장과 성서연구에 대한 입장은 향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서인문주의가 발전하고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는데 중요한 밑거름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둘째, 루터는 평생토록 대학 강단에서 성서를 중심에 둔 교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성서를 사랑하는 교수로서 강단에서 평생 성서를 강의하고 주해했다. 하지만 그의 성서강의는 오늘날의 성서학 강의와는 온전히 똑같지는 않다. 그는 성서를 주해하면서 언어학적인 본문 비평을 사용했으며 교부 전통의 역사 신학적 입장과 조직신학적 통찰로 성서를 주해했고, 주해한 본문을 실제로 예배 설교에서 활용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성서학 교수는 아니다. 루터는 성서를 가장 중심에 둔 신학자요 목회자요 개혁자였던 것이다. 셋째, 신학생들이 신학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에 관한 루터와 멜란히톤의 방식도 성서를 최우선으로 두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멜란히톤이 기독교 교리를 확립하는데 어느 정도 논리적 접근과 방식을 사용하긴 했지만 신학공부를 위한 간략한 방법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멜란히톤은 철저히 루터의 종교개혁적 통찰 위에서 성서를 해석했고, 그 통찰을 체계적으로 세우는데 있어서 철저히 성서를 중심으로 두었다. 그래서 루터나 멜란히톤 당시에는 성서중심의 비텐베르크 신학교육이 역동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넷째, 루터와 멜란히톤 세대가 지난 후 17세기 루터교 정통주의 시대의 비텐베르크의 신학교육의 중심은 더 이상 성서가 아니었다. 성서는 교리적 논증을 뒷받침해주는 단순한 보조교재로 전락했다. 형식상으로는 강단에서 성서주석이 있었으나 그 내용을 보자면 철저히 교리의 합법성과 권위를 증거하고 논증하는 책으로서 사용되어졌을 뿐이다.

 

이상의 연구결과를 통해 본 논문은 비텐베르크 대학이 흥망성쇠의 길을 걷게 된 여러 이유 중 한 원인이 바로 역동적 성서 중심의 신학교육이 사라져버린데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학문적 정교함을 추구한 17세기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육은 점점 교회와 신학생들에게 지루함을 안겨 주었다. 신학 논쟁은 성도들에게 점점 유익을 주지 못했고 설교는 지루했으며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1692년에 할레(Halle)에 대학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할레 대학의 희랍어와 고대 근동어 교수로 프랑케가 초빙되었다. 프랑케는 이곳에서 16세기 루터가 시도했던 성서 본문 중심의 역동적이고 실천적인 해석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할레 대학은 근대 개신교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반면 비텐베르크 대학은 완고하고 폐쇄적인 신학교육을 고수하다 점점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져준다: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신학과 신앙이 완전히 분리된 이후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발달시킨 대학 강단에서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하고 경험했던 역동적인 신학수업은 과연 어떻게 해야 가능할 수 있을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교수나 학생이나 교육 관련자 모두가 함께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A. 일차 자료

 

Arnold, Gottfried: Gedoppelter Lebens-Lauff., 1716.

 

Aus dem Index der “Alethea sancta sive vindex,” Straßburg 1655.

 

Aus der “Alethea sancta sive vindex,” Straßburg 1653.

 

Calov, Abraham: Biblia Novi Testamenti Illustrata [...] / Opera & Studio D. Abraham Calovii, P. P. In Acad. Witteberg. Primarii [...] /, Dresdae et Lipsiae 1719, 1862-1866.

 

Calov, Abraham: De Luthero Ante Lutherum, Wittenbergae 1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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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본 논문은 201210월에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열린 10회 종교개혁기념 학술강좌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본 논문은 각각 다음에 실려 있다:개혁교회의 목회리더십과 16세기 신학교육(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13), 263-297; 장신논단2012 (44), 111-137.

 

(2) 전체적인 참고문헌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Heiner Lück, “Wittenberg, Universität,” TRE 36 (2004), 232-243.

 

(3) Friedrich August Gottreu Tholuck, Der Geist der lutherischen Theologen Wittenbergs im Verlaufe des 17. Jahrhunderts, Hamburg/Gotha 1852.

 

(4) Karl Walter Friedensburg, Geschichte der Universität Wittenberg, Halle 1917.

 

(5) Karl Walter Friedensburg, Urkundenbuch der Universität Wittenberg, 2 Bde., Magdeburg, 1926-1927.

 

(6) Kurt Aland, “Die Theologische Fakultät Wittenberg und ihre Stellung im Gesammtzusammenhang der Leucorea während des 16. Jahrhundert,” Kirchengeschichtliche Entwürfe, Gütersloh 1960, 283-394.

 

(7) Hein Kathe, Die Wittenberger Philosophische Fakultät 1502-1817 (Mitteldeutsche Forschungen 117), Köln; Weimar; Wien 2002.

 

(8) Stefan Oehmig (hg.), 700 Jahre Wittenberg: Stadt, Universität, Reformation, Weimar 1995; Martin Treu, “Die Leucorea zwischen Tradition und Erneuerung: Erwägungen zur frühen Geschichte der Universität Wittenberg,” Martin Luther und seine Universität: Vorträge anläßlich des 450. Todestages des Reformators, hg. von Heiner Lück, Köln; Weimar; Wien 1998, 31-51; Irene Dingel und Günther Wartenberg, Die Theologische Fakultät Wittenberg 1502 bis 1602: Beiträge zur 500. Wiederkehr des Gründungsjahres der Leucorea, Leipzig 2002.

 

(9) Marcel Nieden, Die Erfindung des Theologen: Wittenberger Anweisungen zum Theologiestudium im Zeitalter von Reformation und Konfessionalisierung, Tübingen, 2006.

 

(10) Kenneth G. Appold, Orthodoxie als Konsensbildung: Das theologische Disputationswesen an der Universität Wittenberg zwischen 1570 und 1710, Tübingen 2004.

 

(11) 강치원, “루터의 종교개혁과 신학수업의 개혁,” 신학지평17(2004), 283-301; 강치원, “교회의 위기와 교회개혁: 16-18세기 중엽까지 독일의 루터교를 중심으로,” 2012년도 제15회 소망신학포럼 (대주제: 한국교회의 위기 진단과 대안 모색), 39-63.

 

(12) Hein Kathe, Die Wittenberger Philosophische Fakultät 1502-1817 (Mitteldeutsche Forschungen 117), Köln; Weimar; Wien 2002, 1.

 

(13) Ibid, 2.

 

(14) Ibid ,3.

 

(15) 둔스 스코투스 학파 입장을 따르던 니콜라우스 암스도르프는 당시에 아우구스티누스와 히에로니무스를 깊이 있게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루터의 권면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들을 읽은 후 1517년 중반 이후에는 자신의 신학적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참고: Martin Brecht, Martin Luther, Bd. 1: Sein Weg zur Reformation 1483-1521, Stuttgart 1981, 166.)

 

(16) 안드레아스 보덴슈타인 칼슈타트는 철저한 토마스 아퀴나스적 입장을 따르는 사람이었으나 루터의 영향으로 15171월부터 아우구스티누스 저서를 읽고 그해 여름학기부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과 문자를 수업 교재로 사용할 정도로 신학적 전향을 하였다. (참고: Martin Brecht, Martin Luther, Bd. 1: Sein Weg zur Reformation 1483-1521, Stuttgart 1981, 168.)

 

(17) Hein Kathe, Die Wittenberger Philosophische Fakultät 1502-1817, 17.

 

(18) 중세 후기에 독일에는 네 개의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회(Augustinereremiten) 지역이 있었다: 바이에른 지역, 라인-슈바벤 지역, 쾰른 지역, 작센-튀링겐 지역. 그런데 14~15세기에 다른 탁발수도회(도미니크 수도회, 프란시스 수도회)를 엄습한 수도회 개혁 열풍이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회에도 엄습했다.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수도사들이 수도회의 규칙을 철저히 따라 개인 재산을 배제하고 수도회의 공동체적 삶을 살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개혁 움직임이 경과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회 내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회’(Die observanten Augustinerklöster)가 생겨났다. 이후 이 엄수파 수도회는 기존의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회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엄수파 수도회의 연합체인 수도원 개혁 연합회’(Reformkongragation)를 구성하였는데, 이 엄수파 수도회의 총대리신부가 바로 스타우피츠였다. (참고: Adolar Zumkeller, “Augustiner-Eremiten,” TRE 4 (1979), 728-739; Hans Schneider, “Der Hessische Augustiner Tilemann Schnabel und sein Orden,” Jahrbuch der hessischen kirchengeschichtlichen Vereinigung 51 (2000), 145-146.

 

(19) Reinhard Schwarz, Luther (Die Kirche in ihrer Geschichte, Bd. 3), Göttingen 1986, 20.

 

(20) Ibid.

 

(21) Markus Wriedt, “Die Anfängen der Theoogischen Fakultät Wittenberg 1502-1518,” Die Theologische Fakultät Wittenberg 1502 bis 1602: Beiträge zur 500. Wiederkehr des Gründungsjahres der Leucorea, Leipzig 2002, 28-29.

 

(22) 규정에 따라 스타우피츠는 튀빙겐 출신의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회 동료인 지기스문트 에프(Sigismund Epp)를 비텐베르크로 불러 교양학부의 학장으로 앉혔다. 에프는 철저히 스코투스 입장에 서 있었는데 부임한지 일 년 만에 신학부 교수로 자리를 옮겨 신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Hein Kathe, Die Wittenberger Philosophische Fakultät 1502-1817, 8.

 

(23) Markus Wriedt, “Die Anfängen der Theoogischen Fakultät Wittenberg 1502-1518,” 17. 당시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승들의 입학생 숫자는 마르부르크 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인 한스 슈나이더(Hans Schneider)200510월에 괴팅겐(öttingen) 대학교에서 열린 종교개혁기념 강연회에 발표한 원고(강연제목: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대학으로서의 비텐베르크 대학 초기역사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회의 중요성 Wittenberg als ‘Augustiner-Universität’ - Die Bedeutung der Augustinereremiten für die Frühgeschichte der Leucorea”)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슈나이더는 1502-1522년 당시 쾰른과 에어푸어트 및 비텐베르크 대학의 입학생들의 구성 비율을 비교해 보았는데, 1502-1522년간 쾰른의 입학생은 총 6200, 에어푸어트는 5730, 비텐베르크는 5280명이었으며, 그 중 쾰른 62(1%), 에어푸어트 94(1,6%), 비텐베르크 220(4,2%)의 학생들이 수도승들이었으며, 이 중 비텐베르크의 경우 220명 중 162명이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회 소속의 수도승들임을 밝혔다. 비텐베르크에 입학한 이들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승들이 루터의 영향으로 나중에 종교개혁을 각 지역에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24) Berhard Lohse, “Zum Wittenberger Augustinismus: Augustins Schrift De Spiritu et Littera in der Auslegung bei Staupitz, Luther und Karlstadt,” Augustine, the harvest and theology (1300-1650) - Essays dedicated to Heiko Augustinus Obermann in honor of his sixtieth birthday, hg. von Kenneth Hagen, Leiden 1990, 89-109.

 

(25) Markus Wriedt, “Die Anfängen der Theoogischen Fakultät Wittenberg 1502-1518,” 29.

 

(26) Berhard Lohse, Luthers Theologie in ihrer historisches Entwicklung und in ihrem systematischen Zusammenhang, Göttingen 1995, 25.

 

(27) Helmar Junghaus, “Martin Luthers Einfluß auf die Wittenberger Universitätsreform,” Die Theologische Fakultät Wittenberg 1502 bis 1602: Beiträge zur 500. Wiederkehr des Gründungsjahres der Leucorea, Leipzig 2002, 58-67.

 

(28) 루터가 인문주의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아 자신의 종교개혁 신학에 반영했는지를 온전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인문주의의 영향을 통해 고전어 연구가 장려되었고, 그것이 루터로 하여금 성서 본문이 지니는 깊은 의미를 알 수 있는 근거를 제공받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29) Reinhard Schwarz, Luther, 24; Helmar Junghaus, Der junge Luther und die Humanisten, öttingen 1985, 61.

 

(30) Reinhard Schwarz, Luther, 26. 물론 루터는 히브리어 시편과 교회에서 사용되는 시편 사이에 차이점이 있음을 알았으며, 교회에서 쓰던 시편이 더 깊이 있고 영적인 내용이 풍부하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그의 시편주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영향 아래에 있었다.

 

(31) 요한 랑이 슈팔라틴에게 보낸 1516311일자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거룩한 성서와 고대교부들의 저서들을 강의에서 읽고 듣기를 갈망하는 많은 학생들이 있는 반면에, 스콜라적인 신학자들의 강의에는 그들 스스로 얘기하듯이 두 세 명의 청중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Martin Luther, Operationes in psalmos: 1519-1521, Teil I: Historisch-theologische Einleitung von Gerhard Hammer, Köln; Wien 1991, 80, Anm. 6.)

 

(32) Maria Grossman, Humanism in Wittenberg: 1485-1517, Nieuwkoop 1975, 76.

 

(33) Martin Brecht, Martin Luther, Bd. 1: Sein Weg zur Reformation 1483-1521, Stuttgart 1981, 264-265.

 

(34) 이전까지 선택적으로 개설된 희랍어와 히브리어 및 고전 라틴 문학 등을 이제는 필수로 개설하도록 규정함.

 

(35) Martin Brecht, Martin Luther, 265.

 

(36) Martin Brecht, Martin Luther, 265.

 

(37) Ibid., 270.

 

(38) Ibid., 267-268.

 

(39) Reinhard Schwarz, Luther, 55.

 

(40) Martin Brecht, Martin Luther, 268.

 

(41) Hein Kathe, Die Wittenberger Philosophische Fakultät 1502-1817, 68-69.

 

(42) Reinhard Schwarz, Luther, 191.

 

(43) Ulrich Köpf, “Martin Luthers theologischer Lehrstuhl,” Die Theologische Fakultät Wittenberg 1502 bis 1602: Beiträge zur 500. Wiederkehr des Gründungsjahres der Leucorea, Leipzig 2002, 71. 루터가 대학 강단에서 강의한 과목을 연기대적으로 서술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이에 대한 기초적인 자료를 알기 원한다면 다음의 글을 참고하면 좋다: Hans von Schubert, “Allgemeines über Luthers Vorlesungstätigkeit,” Zu Luthers Vorlesungstätigkeit. Sitzungsberichte der Heidelberger Akademie der Wissenschaften. Phil.-hist. Klasse, hg. von Hans von Schubert und Karl August Meissinger, Heidelberg 1920, 3-30.

 

(44) Reinhard Schwarz, Luther, 26.

 

(45) Ibid, 55-56.

 

(46) WA 50, 657-661.

 

(47) 강치원, “Oratio, Meditatio, Tentatio 루터에서 18세기 중엽 루터교 계몽주의에 이르기까지 이 세 개념의 해석사”, 역사신학논총 제2, 한국복음주의 역사신학회 2000, 46-51.

 

(48) Marcel Nieden, “Wittenberger Anweisungen zum Theologiestudium,” Die Theologische Fakultät Wittenberg 1502 bis 1602: Beiträge zur 500. Wiederkehr des Gründungsjahres der Leucorea, Leipzig 2002, 142.

 

(49) ibid., 134.

 

(50) 신학공부를 위한 간략한 방법(Brevis discendae theologiae ratio, 1529/30) 원문은 독일(Halle)과 스위스(Basel) 대학 도서관을 비롯한 여러 도서관을 통해 온라인으로도 열람과 복사가 가능하다. 본 논문에서는 바젤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본문(http://www.e-rara.ch/bau_1/content/pageview/1748269)을 채택하였다. 아울러, 이 원문에 대한 설명은 마셀 니덴(Marcel Nieden)의 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Marcel Nieden, “Wittenberger Anweisungen zum Theologiestudium,” 134-140; Marcel Nieden, Die Erfindung des Theologen: Wittenberger Anweisungen zum Theologiestudium im Zeitalter von Reformation und Konfessionalisierung, Tübingen, 2006.

 

(51) 니콜라우스 리라(Nikolaus von Lyra / Nicolas de Lyre)는 중세시대에 영향력 있는 성서해석자의 한 사람으로 1309년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박사가 되었다. 그는 히브리어와 랍비전통의 지식을 바탕으로 성서를 해석하였으며 성서해석에 있어서 전통적인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였지만, 성서에 대한 본문 비평을 시도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성서주석집을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도 종종 의지하였는데, 특히 창세기 강해를 할 때 자주 참조하였다. 루터는 그를 높게 평가했다. (Klaus Reinhardt, “Nikolaus von Lyra,” BBKL Bd. 6. 1993, Sp. 910915.)

 

(52) Philipp Melanchthon, Brevis discendae theologiae ratio, 1529/30; Marcel Nieden, “Wittenberger Anweisungen zum Theologiestudium,” 134-140.

 

(53) Kurt Aland, “Die Theologische Fakultät Wittenberg und ihre Stellung im Gesammtzusammenhang der Leucorea während des 16. Jahrhundert,” Kirchengeschichtliche Entwürfe, Gütersloh 1960, 325-326.

 

(54) Allgemeine Deutsche Biographie, 19 (1884), 158-163.

 

(55) Markus Matthias, “Orthodoxie: I. Lutherische Orthodoxie,” TRE 25 (1995), 465-466.

 

(56) Heiner Lück, “Wittenberg, Universität,” TRE 36 (2004), 238-239.

 

(57) Ernst Koch, Das konfessionelle Zeitalter Katholizismus, Luthertum, Calvinismus (1563-1675), Leipzig 2000, 226-228.

 

(58) Edmund Schlink, “Weisheit und Torheit,” Kerygma und Dogma I (1995), 7.

 

(59) Fritz Jundtke (Hg.), Album Academiae Vitebergensis Jüngere Reihe, II: 1666-1710, Halle 1952, 7.

 

(60) Heiner Lück, “Wittenberg, Universität,” TRE 36 (2004), 240; Markus Matthias, “Orthodoxie: I. Lutherische Orthodoxie,” TRE 25 (1995), 465f.

 

(61) 아놀드의 비텐베르크 학창시절에 관한 자세한 부분은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Sang-Jo Lee, Luther-Rezeption bei Gottfried Arnold, Marburg 2011, 16-33.

 

(62) Hans Schneider, “Der radikale Pietismus,” Geschichte des Pietismus, Bd. 1: Der Pietismus vom siebzehnten bis zum frühen achtzehnten Jahrhundert, hg. von Martin Brecht, Göttingen 1993, 410.

 

(63) Fritz Jundtke (Hg.): Album Academiae Vitebergensis. Jüngere Reihe, II: 1666-1710, Halle 1952, 7.

 

(64) Gottfried Arnold, Gedoppelter Lebens-Lauff, f. A2.

 

(65)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시오: 이상조, “17세기 루터교 정통주의 루터상(Lutherbild)의 역사적 발전과정,”한국기독교신학논총76 (2011), 97-118.

 

(66) Aus der “Alethea sancta sive vindex,” Straßburg 1653, 114.

 

(67) Aus dem Index der “Alethea sancta sive vindex,” Straßburg 1655, 344.

 

(68) Ernst Walter Zeeden, Martin Luther und die Reformation im Urteil des deutschen Luthertums, Bd. 2, 69.

 

(69) Johann Gerhard, “Die Andere Evangelische Jubelpredigt / Aus dem 14. Cap. der Offenbahrung Johannis / Am andern Feyertage Gehalten von Johanne Gerhardo, der H. Schrifft Doctorn vnd Professorn, auch damals der Universitet Rectorn,” Drey Christliche Frewden= Lehre vnd Lobpredigten ..., Jena 1618, B 3a ff.

 

(70) Abraham Calov, Biblia Novi Testamenti Illustrata [...] / Opera & Studio D. Abraham Calovii, P. P. In Acad. Witteberg. Primarii [...] /, Dresdae et Lipsiae 1719, 1862-1866.

 

(71) Abraham Calov, De Luthero Ante Lutherum, Wittenbergae 1683.

 

(72) Johann Deutschmann, Dissertatio Theologica De Luthero Angelo illo Apocalyptico cap. XIV. v.6.7., Wittenbergae 1683. (이후 De Luthero Ante Lutherum로 축약)

 

(73) De Luthero Ante Lutherum, A2. “nostrae Religionis Restaurator, Angelus ille Apocalytpicus, Martinus Luthers.”

 

(74) Ibid., B3f.

 

(75) Ibid., D1.

 

(76) Ibid., E2f.

 

(77) Sang-Jo Lee, Luther-Rezeption bei Gottfried Arnold, Marburg 2011, 43.



출처: 코람데오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