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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무력증 - 마틴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Jones)

Bavinck Byeon 2015. 12. 18. 13:52

영적 무력증



(진리를 믿는 것과 그것을 적용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듣고 처음에는 그것을 적용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그저 진리를 듣고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우리 자신에게 그것을 적용시키지 않거나, 그 진리의 빛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일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David Martyn Lloyd-Jones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26:17:18)

 

우리는 여전히 이삭과 우물 사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옛 이야기야말로 부흥의 생명수를 찾는 모습을 진정으로 그려 주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행한 일로 인해 우물이 막혀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 많은 잡동사니들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즉 정통을 잃어버린 것과 결함 있는 정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죽은 정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태의 또 다른 표증들은 무엇입니까? 그 중 하나는 진리를 적용하려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믿는 것과 그것을 적용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듣고 처음에는 그것을 적용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그저 진리를 듣고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우리 자신에게 그것을 적용시키지 않거나, 그 진리의 빛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일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정규적으로 주일마다 교회에 나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여러 책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거듭해서 우리는 그러한 진리로 인해 각성하게 되고, 죄의식을 느끼며, 우리 앞에 있는 옳은 것을 느끼고,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부당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에 대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느낌이 왔다가는 가 버립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같도다”( 너희의 마음은 아침 안개와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구나. )(6:4). 나타났다가는 곧 없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무서운 위험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저 피상적으로 마음에 깨우침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는 그것을 진정으로 부딫혀보거나, 상황에 진정으로 부딫혀보거나, 난제를 직면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을 생각하면서 , 이것이 무엇인가, 내가 이 일에 대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까?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믿기로는 모든 회중들을 괴롭히는 가장 큰 위험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동안 무엇인가를 느낍니다. 그러면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지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사람들과 이야기합니다. 이야기하되 다른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집회에서 느꼈던 것은 사라져 버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삶을 허비합니다. 잠깐 동안의 피상적인 깨달음만 느낄 분이지 아무 것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오래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진정한 고통거리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상황은 구약의 여러 선지서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약간 근심했을 것이고,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을 재빠르게 치료해 주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두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적용하지 못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증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나타내 보고자 합니다. 묵상의 예술, 진정한 사고의 예술을 무시하는 일반적인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교회사를 읽어보면,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일이 영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 좋은 시절의 교회사를 읽어보거나, 그 당시 교회의 보편적인 상태에 대해서 읽어보거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의 개인적인 전기를 읽어보면, 그들과 우리가 현격하게 대조를 이룸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묵상은 그들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색하거나 묵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곧 여러분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하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사라졌습니다. 물론 우리는 너무 바쁘다는 핑계를 댑니다. 우리는 정말 너무 바쁩니다. 우리의 전체 삶이 종국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일에 허비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꼭 짜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너무나 바쁜 나머지 자기들의 영혼에 큰 해를 줄 정도입니다. 그래서 피상적이거나 메마르게 될 수밖에 없고 결국은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묵상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어느 유명한 찬송가의 한 절을 살펴보십시오. “너 상결키 위해 늘 기도하며.....” 여러분은 시간을 거룩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니고 활동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물론 신문지상에서 이러한 것을 보면 매우 아름다워 보일 수 있습니다. 또 종교 잡지도 이러한 것을 기사화할 것입니다. 그들은 활동에만 관심을 둡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로 그것이 뉴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뉴스입니다. 묵상은 뉴스 칼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 깊고 볼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늠하는 것은 그 깊이와 참된 이해입니다. 그리고 그 깊이와 참된 이해를 얻는 것은 오직 묵상과 생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훈련의 한 부분입니다. 참된 부흥이 일어나는 시기에 한결같이 이러한 일이 나타났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제 우리는 또 다른 문제, 곧 앞에서 다룬 문제에 뒤이어 나타나는 문제를 숙고해 나가기로 합시다. 묵상은 언제나 참된 자기 성찰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기 성찰은 인기가 없습니다. 자기 성찰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언제나 주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들은 그것을 그릇된 방식으로 말합니다. 물론 우리의 전체 삶은 궁극적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그러나 자기 성찰을 버리면서까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신을 살피고 시험해 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과거의 문헌은 이점을 너무나 명백히 보여 줍니다. 부흥과 관련하여 특별히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이 자기를 시험해 보고 자신에 대해 깜짝 놀라게 되었던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했고 또 하나님께 기도하게 했습니다.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펴보지 않는다면 참으로 기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피상적인 것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성찰에 대해서 거의 듣는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을 인정합니다. 성경을 짧게 읽고 바쁘게 서둘러 기도하고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자기 성찰은 어디 있습니까? 또 육체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나 이야기를 합니까?

 

"땅에 있는 (너희)지체를 죽이라" (3:5). "너희가.....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8:13). 이것은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전혀 듣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화에 대한 거짓된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고 있소." 그래서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피상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깊이가 부족할 뿐 아니라 참되고 생명력 있는 경건함도 부족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진리를 적용하는 데 실패함으로 나타나는 여러 면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균형 있게 진리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 계속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 성찰을 전혀 믿지 않고, 그것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자기성찰을 행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도 마찬가지로 나쁜 것입니다. 잘못된 자기 성찰 때문에 죽은 정통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을 시험하는 데도 바른 방법이 있고 그릇된 방법이 있습니다.

 

물론 바른 방법은 성경에 나타나 있으며, 그것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맺기 마련입니다. 그릇된 방식은 병적 상태와 거짓된 자기반성을 낳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내에는 절대적으로 정통을 고수하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들여 자기성찰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적으로 마비되어 있습니다. 또 쓸모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성찰하는 데만 온 시간을 써버립니다. 그들은 자신의 속을 들여 다 봅니다.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것에만 생각을 기울이고, 자기의 죄와 쓸모 없음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어떠한 일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태를 들여다보는데 시간을 써버립니다. 실로 그들은 자신을 성찰하는데 너무 바쁘고, 이렇게 함으로써 너무나 침체되어 결국은 부흥을 위한 기도나 다른 어떤 것을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영혼에 관해서만 기도하고,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상태에 대해서만 기도합니다.

 

이것은 분명해 그릇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전혀 성찰하지 아니하는 피상적인 삶만큼 나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침체되거나 비참해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하나의 원리로 설정해 놓을 수 있습니다. 비참한 그리스도인이란 모순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식으로 침체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째서 사람들이 이러한 상태에 자주 빠집니까? 이에 대한 답변은 그들이 성경에 비추어 자신들을 시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적인 방식을 따른다면 다음과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즉 여러분은 진리가 여러분을 탐사하도록 허락할 것이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킬 것이며, 자신에게 설교할 것입니다. 또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할 것이고, 이러한 것들을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식 속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핑계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여러분 자신의 참된 상태를 발견했으면 성경이 여러분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또 그의 피로 씻김을 받는데 까지 인도하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침체되고, 우울하며, 내성적인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적용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죄에 머물러 있거나,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는데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나아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진리를 여러분 자신에게 다시 적용시켜야 합니다. 또 여러분의 죄가 가리움을 받고 도말 되었으며 여러분이 새로워져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상태에 이르렀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가 얼마나 미묘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현재에 있어서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까?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흥의 필요성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바쁘고 활동적이며 여기 저기 쏘다닙니다. 부흥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진정한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저는 이 점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려 합니다. 반면에 병적일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아 다른 사람을 생각할 시간이 도무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성찰이 없는 것이나, 잘못된 자기 성찰은 모두 죽은 정통의 상태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것에 시선을 돌립시다. 저는 이 시점에서 특히 이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의 제목으로 삼으려 합니다. 죽은 정통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광스러운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잘못으로 흔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의 궁핍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러 가능성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3장 마지막 부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 위대한 몇 구절을 읽어보라고 강권하는 바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한동안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분의 풍성한 영광으로, 그분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여러분이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3:16-19).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도 역시 그러합니다. 바울의 입장이 여기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관심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오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가지려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3:9-11)

 

그리스도인의 삶의 높이와 깊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 이 현재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열려진 여러 가능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성경에서 발견할 뿐만 아니라, 다시 말씀 드리지만 성도들의 전기와 부흥의 시대에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여러 가능성들을 인식했던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옛날 어떤 청교도는 산기슭을 걷고 있을 때 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 길은 메마른 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져온 빵과 물을 마시기 위해 우물가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표증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사람은 그 간단한 체험을 통해서 오십 여 년 동안 연구하고 책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다시 부흥의 역사에 대해 읽어보면 그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교통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임재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의 여러 표증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도 들을 것입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의식으로 압도당했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사랑에 대한 의식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러한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제가 부단히 지적하고 있지만, 신학적인 견해를 달리하는 여러 교파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그런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휘트필드와 웨슬리를 통해서 그 말을 듣습니다. 또 찰스 피니나 무디나 다른 많은 성도들의 삶 속에서 그러한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이러한 것들을 체험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일들이 가능함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도 점점 더 잘 알게 되겠지만, 부흥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살아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흥을 떠나서도 이러한 것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모르는 것입니까? 어째서 우리는 갈증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까? 어째서 이러한 것들을 간절히 소원하지 않는 것입니까? 부분적으로 이유를 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교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3:17).

 

오늘날 교회의 상태가 그러합니다. 이것은 많은 복음적인 사람들. 복음적인 교회들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헐벗고 곤고해 있으며 비참하고 눈멀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복음적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바르다.”그러나 우리가 다 바릅니까? 그릇된 자들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살피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며, 우리가바르다는 확신을 할 수 있게 합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문제는 우리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활동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성찰할 것을 계속 고집할 것입니다. 바쁘면 모든 것이 다 잘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그리스도인을 시험하는 시금석은 그 사람이 바쁘고 활동을 많이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바쁘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임재를 진실로 느끼려고 노력할 때 여러분은 이 일을 위해서 시간을 내야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는 데 그것의 부분적인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몇 년 동안 매우 인기 있었던 교훈이 있는 데, 그것은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이라는 유명한 책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주도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만 행복할 수 있을까? ,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비결입니다. 제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나를 성가시게 하는 어떤 죄에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죄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된 관심의 대상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는”(3:10)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12).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준은 그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 주님의 부활의 권능,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아는 가능성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우리 자신의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어합니다. 여러분은 난제들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어느 정도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에 대해서 얼마나 압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 여러분의 가장 큰 소원입니까? 지식보다 뛰어난 그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충만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한 기준으로 여러분 자신을 시험해 보셨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이러한 기준들로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본다면, 비록 정통적이라 해도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이러한 문제의 또 다른 요소는 우리는 가장 특이한 방식으로 체험을 배제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슬로건은 믿음으로 그것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의 회심에 있어서 그것은 진수입니다. 즉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진수입니다. 또 그러한 시점에서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라. 이 말씀에 당신 전체를 맡기라. 당신 자신을 그것에 의탁하라.” 이것은 가장 먼저 해야 할 바른 진술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계속해서 그 사람에게 . 이것이 이 순간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의 전부다. 그리고 만일 이렇게 한다면 체험, 확신을 얻을 것이고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자주 두 번째 단계가 배제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동안 내내 너희 느낌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그것을 취하라. 체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덧붙입니다. “대단한 체험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큰 믿음이 아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였으나 믿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제 1단계는 그러합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거나 아무 체험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지적인 동의나 지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가 하나님을 체험하는 여러 경우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알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견고히 붙잡고나가며 믿음으로 취하는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 1단계입니다. 그 뒤에 깨닫고 이해하는 것이 뒤따라야 합니다. 저는 바로 이 시점에서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죽은 정통에 빠지게 되는 큰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부흥의 중대한 장애 요소입니다.

 

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겠습니다. 저는 그러한 체험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며 또한 사람들이 단순히 체험을 추구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지기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체험 자체가 아닙니다. 그를 체험하고 그를 아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은 그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임재를 인식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린 유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에서 그 개념조차 사라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거짓된 체험을 너무 무서워한 너머지 체험을 완전히 쫓아 버렸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어떤 지나침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범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문제입니다. -저는 이것을 저 자신에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문제는 너무 건전하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겸손은 너무 자주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허풍을 떨며 피상적으로 자신감을 갖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과 자기 죄를 애통하고 자신의 무가치함과 불완전함을 깨닫는 것은 별 인기가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전진해 나가지 않고 쉬면서 그저 만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얼마나 다릅니까? 여러분도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라고 말합니다. 뒤에 있는 것들은 놀라웠습니다. 그의 삶의 내력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그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는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3:13-14).

 

그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 그리스도인은 불과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즉 뒤로 젖히고 앉아서 자족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더 많은 것을 갈망하고 더 소원하며 더 추구하고 더 많은 일을 하며 더 많이 기도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보지 못합니다. “푯대를 향하여...”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볼 때 그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대신 그저 하나의 원을 뱅뱅 돌고 있을 뿐입니다. 진보와 성장의 흔적을 보기 힘듭니다. 사람들은 구원받았고,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할 일들이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그러한 일들을 합니다. 자기들의 삶의 안정을 위해서 그와 같이 계속해 나갑니다. 너무 바쁘고 너무 활동적이며 또 너무나 할 일이 많아서 어떤 이들은 신경 쇠약에 걸릴 정도입니다. 그들은 과로하여 지칩니다. 그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한 원을 계속 돌고 있을 뿐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성장하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50년 동안 바쁘게 돌아다닐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것저것을 조직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처음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나 50년 뒤에나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 별 차이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의 지식은 자라나야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되 과거는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뛰어가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니예요. 우리는 그를 위해서 일하고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그를 홀로 남겨두고 우리의 작은 일들에 몰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께 복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주님 자신을 추구합니까!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임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것, 그것이 참된 기독교입니다. 부흥의 때마다 하나님께 사용되었던 사람들이 바로 그것을 추구했습니다. 여러분은 굳이 제 말을 듣지 않아도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부흥에는 예비 단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 크게 사용되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라오디게아 사람들과 같다고 느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얼마나 벌거벗었는가? 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에게 나아가고 그를 찾습니다.

 

죽은 정통의 또 다른 표증, 다시 말하면 다른 것들로부터 연유되는 또 다른 표증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참된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경건치 않은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이 세대의 죄악을 보고 격분하고 있는지를 물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묻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신성모독적인 죄 또는 다른 사악한 죄와 음탕함과 부패함과 거리와 신문에서 보는 모든 일들에 의해 자극을 받고 격분하는 것은 간단한 일입니다. 괴로워하고 자극을 받고 격분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만 격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런 식으로 격분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시금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속에 슬픔과 비통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구약으로 돌아가 시편 기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지 살펴보십시오.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신성 모독적인 말을 내 뱉으며 하나님의 신성을 더럽힐 때, 시편 기자가 비탄에 잠기는 모습을 보십시오. 바로 이런 것들이 시편 기자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는 성령 안에서 슬퍼했고,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큰 짐이요, 문젯거리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보며 그와 같이 느낍니까?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람들의 상태를 보고 슬픔을 느낍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이 있고,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높임을 받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시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68:1)라고 말한 적이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또 우리 속에서 그렇게 느낀 적이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아니면 단순히 우리의 활동 차원에서나 우리 교회가 잘되는 차원에서나, 아니면 우리가 관심을 쏟는 어떤 조직의 차원에서 그 문제를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중심, 하나님을 위한 슬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우리 마음을 주장합니까? 부흥의 때에는 언제나 그러한 일이 나타납니다. 교회가 이익을 보지 못할 수도 있고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과 그 영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 이전에 사람들이 갖는 일차적인 관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참다운 관심이 부족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 그러나 나는 선교사역에 매우 큰 관심이 있어요. 나는 그러한 일에 매우 활동적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지, 즉 가정에서나 해외에서 선교활동을 돕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묻는 것은 마음속에 근심을 갖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불신자의 상태 때문에 근심하고 있습니까? 우리 선조들이 영혼을 누르는 짐으로 불러 왔던 것에 대해 많이 알고 있습니까? 그 일이 우리를 억누릅니까?

 

, 그리스도인들이여, 만일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대로 정말 믿는다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만일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으며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짐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멈추어 서서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분석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 영광에 대한 합당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의 진정한 상태에 대한 합당치 못한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건한 관심,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이 부담이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필요하다면 이것을 여러분에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나라 전역의 많은 목회자들이 이와 같은 체험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정규적으로 참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큰 대중 집회 때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주간 기도 모임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설명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만일 그들이 영혼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부담을 가지고 있다면 정규적으로 극히 작은 기도 모임이라도 참석할 것입니다. 이것이 시금석입니다. 진정으로 부담을 갖는 사람은 그것의 무게를 느끼는 사람이요,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면전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강박관념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의 최상의 활동은 기도입니다. 물론 다른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크고 중차대한 일은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 문제야말로 하나님만이 다룰 수 있는 영역임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짐을 압니다. 그 부담을 아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부족하면 진실로 긴박한 기도가 결여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소망하고 기대하는 기도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그렇지만 참된 기도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때,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열심을 품으며, 영혼에 대한 긍휼과 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부담으로 압박감을 가질 때마다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기도할 때는 바로 그때뿐입니다.

 

우리는 재촉을 받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조직적으로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조직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혼자서 의로우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이러한 문제들을 우리 스스로 직면해 나가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받은 일을 그들이 바라는 방식대로 행하는 것이 훨씬 더 쉽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기도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길은 오직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태를 바르게 진단해 보면, 우리의 진정한 문제는 하나님과 그 존재와 그 뜻에 대해 매우 피상적이고 예비적인 지식만 갖고 있으면서도 만족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준에 만족하고는 바쁘게 활동하는 데만 삶을 허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멈추어 서서 가능성들을 인식해 보고 우리의 실패를 따져 보며, 우리가 어떠한 사람도 그리스도께 인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싶은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려 하지 않습니다.

 

부흥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예비단계는 하나님에 대한 갈증,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갈구하는 생생한 갈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하시고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시며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일어서서 원수들을 훼파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부흥의 필연적인 예비 단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직면하되 계속해서 직면하게 하시는 은혜를 허락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정직하게,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며, 우리의 가장 큰 소원은 그를 알고, 그의 부활의 능력을 알며, 그의 고난에 참예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함과 지각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이러한 것들을 어느 정도까지 체험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살아 있는 실상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갈증,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부흥에 이르는 필수적인 예비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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