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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미터의 "칼빈주의" 요약

Bavinck Byeon 2016. 5. 11. 22:48

"칼의" 요약


헨리 미터(H. Henry Meeter) 著


목 차


제 1 장 칼빈주의의 기본 원리
제 2 장 칼빈주의 체계에서 성경의 위치
제 3 장 칼빈주의 체계에서 신앙의 위치
제 4 장 균형적인 체계인 칼빈주의
제 5 장 칼빈주의 신학의 요점
제 6 장 일반 은총에 대한 칼빈주의의 견해
제 7 장 칼빈주의와 문화
제 8 장 칼빈주의와 정치학과 성경
제 9 장 국가의 기원과 기능
제 10 장 가장 완전한 국가 형태
제 11 장 정부의 형태
제 12 장 정부의 직무
제 13 장 정부의 권위
제 14 장 시민의 자유
제 15 장 사회 모든 부문의 주권
제 16 장 교회와 국가의 관계
제 17 장 국제주의
제 18 장 국제주의, 국제 연합, 칼빈주의
제 19 장 국 제 법
제 20 장 전쟁사(戰爭史)
제 21 장 성경과 전쟁
제 22 장 기독교인 된 국민과 전쟁


제 1 장 칼빈주의의 기본원리


1. 통일성 있고 포괄적인 사상체계


칼빈주의란, 죤 칼빈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사상체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칼빈의 신학적 교의는 신교 개혁운동에 이바지한 다른 위대한 지도자들의 교의와 함께, 어거스틴 교설의 부흥이고, 어거스틴의 교설은 바울 교리의 부흥인 것으로, 이 교의들을 조직적으로 설명하고 또는 특수하게 적용하여 현대를 위하여 제시한 것이다. 즉 이 사상체계를 칼빈주의라 부르며, 이 교리들은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하고 하나의 기본원리를 공동토대로 하고 있는 유기적인 총체이다. 이러한 칼빈주의는 신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상체계이다. 그 사상의 범위에 신학과 동시에 정치, 사회, 과학, 예술 등에 대한 사상도 포함한다. 이 사상체계는 인생관 우주관 세계관을 제공하는 것으로 사실상 지금까지 인간에게 제공된 몇몇 기본적 사상 철학세계를 열 두개로 제한하고 기타의 체계들은 이들에 대한 변체들로 고려하였다.


2. 칼빈주의의 기본원리


칼빈주의의 기본원리는 칼빈주의 자들의 복음적 교리 속에 게재되어 있는데, 이 교리들은 단지 추상적으로 생각된 것이 아니라, 살아 있어 생기 있는 진리로 취급된 것이니, 이 진리들은 칼빈주의의 기본원리가 하나님 교리에 관한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칼빈주의의 중심사상은, 그 위대한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하나님이 당연히 차지하셔야 할 권리를 차지하시도록 함이다. 즉 칼빈주의자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이란 성경 말씀의 진리를 생활원리로 삼고 실현하려고 한다.


이러한 칼빈주의의 중심 사상이 하나님 사상이라는 점에는 우주관적인 구성적 원리라는 점에서는 하나님의 영원 자존은 우주와 관계가 없는데, 그것은 우주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영원 자존하실 것이므로 하나님은 자연계와 도덕계에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말하고, 이 주권은 하나님은 단지 최고의 입법자 또는 통치자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영역에서, 진리 과학 예술등의 영역에서, 사랑, 그의 모든 은사실시의 영역에서도 모두 법칙과 질서 속에서 조화와 아름다운 체계를 가지고 사람과 자연을 섭리하신다는 것이다.


3. 칼빈주의 원리에 대한 오설들


칼빈주의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는 학설들에 대하여 여러 사람의 지적을 들수 있는데, 그러한 지적들을 본다면, 첫째, 예정론을 칼빈주의의 기본원리로 보이는 오해이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연구한다면 예정론이 칼빈주의의 기본원리가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정론은 칼빈의 신학사상 체계의 기초가 아니라 다만 구원론 부분에서 취급되었는데 거기서도 그것이 전제 조건이라기 보다는 결론으로 언급되었다. 즉 예정론을 칼빈주의의 기본 원리로 보기보다는 칼빈주의의 논리적 결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칼빈주의의 기본원리라고 하는 오설이다. 물론 이 주장 즉 하나님은 가장 높이 영화롭게 되셔야 하며 사람은 제일 낮아져야 된다는 것이 칼빈주의자들의 집단에서 볼 수 있는 공통된 의견이나 이것을 인간의 전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제일 되는 목적으로만 여기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활동을 너무나도 크게 제한한 것이다. 칼빈주의자는 생애 목적에서만 하나님을 포함할 뿐 아니라 만물의 기원과 만물의 섭리적 통설을 생각할 때에도 역시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한다.


셋째, "인간의 책임"이 설자리를 빼앗길 것이라는 오설이다. 이 주장은 하나님의 활동이 강조될 경우 인간의 책임이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서, 칼뱅주의에 있어서 이 두 가지를 다 역설함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인간의 책임의 종합적 사상을 칼빈주의의 기본원리라고 주장하나, 칼빈주의의 정신은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들과 인간 책임을 동등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칼빈주의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요 또 그는 언제나 하나님 제일주의를 가진다. 즉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보다 앞서고 기본 되는 사상인 것으로 말하고 있다.


4. 이 기본원리를 기반으로 한 체계


자연계와 도덕계에 있어서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원리로 하여 그의 전 체계를 구성하였다. 이 체계는 광범위한 부분들에 대한 칼빈주의 견해를 표현하는 것이니 신학, 정치학, 사회학, 과학, 예술 등에 관한 것이다. 칼빈주의자에 있어서 그 전 체계를 통하여 흐르는 여러 원리들이 있는데, 첫째, 신교개혁의 정당한 공리적 원리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자연계의 일반적 계시 이외에, 특별계시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 특별계시는 성경 말씀이니, 거기 하나님 자신과 그의 행하시는 일들이 계시되어 있다. 이 성경이 자연계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해석하여 주며, 또한 그의 구속사업을 계시하여 주는 것인 만큼, 그것은 칼빈주의자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종극적 또는 표준적인 진리 지식의 원천이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칼빈의 체계에 기본적 의의있는 다음 몇 가지 사실들을 가르쳐 준다. 곧 ① 성경에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은, 만물 위에 계신 주권자시며 창조된 만물과는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는 사실과 ② 하나님과 그의 형상을 가진 인간과의 관계, 곧, 종교란 언약의 성질로서 그것이 벌써 의로운 상태에 있는 원인에게는 특별 계시되었다는 사실과 ③ 그러나 금일의 세계는 순결한 상태에 있지 않고 죄악의 세계로 변하여 버렸다는 사실이다.


제 2 장 칼빈주의 체계에서 성경의 위치


칼빈주의 체계가 '하나님'을 '모든 것의 주재자'라고 보는 사상이라면,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이 원하는대로 만사를 관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생활의 '원리'로 삼고 '신앙'의 법칙이요, 또 실 '생활'의 표준이다.


1.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자연


하나님은 자기에 대한 두 가지 계시, 곧 두 책을 주셨으니 하나는 자연에 관한 책이요, 다른 것은 성경이다. 자연에 대한 책이라고 하면 그것이 칼빈주의자에게는 단순히 광물, 동식물, 사람 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적 대상 그 자체 이상으로 무엇을 더 알게 하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대상물들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그것들의 운동 일체를 주장하신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에 대한 많은 사실을 우리에게 계시하며 또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준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책, 즉 자연에서 하나님의 생각들과 그의 놀라운 것들과 또 그의 의지등을 발견하게 되며, 이 자연의 책을 읽고 연구하여 하나님의 생각들을 생각해 보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알고, 이것을 우주관과 인생관에 전개시켜야 한다고 한다. 자연계 인생의 전부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성한 법정이 된다.


2. 하나님의 계시로서 성경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계시인 성경은 창조 당시에는 필요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자기의 마음과 자기 주위에 둘러 있는 자연계에서 분명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이미 보았고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 때문에 우리에겐 특별계시인 둘째 책인 성경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이 범죄한 때에 그와 자연이 다 변하였고 사람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사물들을 그대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고, 자기의 참 성품과 자기의 존재하는 목적을 정당하게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책으로 성경이 있어야 했으며, 성경에서 하나님은 분명하고 틀림없이 사람에게 만물에 대하여 계시하시고 또 사람의 어두 어진 마음을 성령 님으로 말미암아 밝히시므로 이 성경의 진리를 까닭을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첫째, 죄인 구원에 대한 특별계시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하며 이것을 통하여 우주관이나 인생관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게 해 준다. 둘째, 우리의 사색적, 도덕적 생활 전체를 주장하는 원리를 제공해 주며, 구원 얻는 법에 대한 진리와 신앙과 생활의 원리들을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3. 정경으로서의 성경


칼빈주의자는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앞에 머리를 숙여야 될 절대적인 법칙의 책이라고 한다. 이 말은 성경을 '믿어야 할 것'과 '행해야 될 것'을 일러준다는 의미하며, 성경에는 그에게 명령하는 힘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였다면 거기 대하여 취할 태도는 오직 한가지 뿐이니 곧 순종하는 것이다. 이렇듯 성경을 고귀하게 보는데 대한 이유와 설명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는 데 있다. 칼빈주의자는 성경이 비록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지만 그들 배후에 있는 실수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을 보고 '성령의 영감'에 의해서 '유기적 완전 축자 영감설'을 역설한다.


제 3 장 칼빈주의 체계에서 신앙의 위치


칼빈주의자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매우 광범위한 부분을 차지하며 실제로 그의 생활에 있어서 결정적인 위치에 있으나, 초자연적인 것들을 다 부정하는 신신학자들에게는 하나님을 믿을 만한 여지가 많지 못하다. 이 두 가지 체계는 서로 정반대 되는 양극과 같고 또 신앙에 대한 저들의 태도에 있어서도 이 점이 매우 분명히 보인다.


1. 신신학과 신앙


신신학자들은 한 가지 특징에 의하여 알려지는데, 그러나 이들은 세밀한 점에서 서로 같지 않다. 그러나 신신학자들이 다 같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있는데, 이들은 특별히 초자연적인 사실들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곧 이적, 특별 계시와 영감, 처녀 탄생, 육체 부활(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 기도에 대한 특별한 응답, 그리고 자연법칙이나 인간의 상식을 떠나서 있을 수 있는 초자연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한다. 저들은 대부분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을 단순히 우주에 있는 비인격적인 세력으로만 생각한다. 또 신신학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 계시로 믿지 않으며 그들에게 있었서는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옛날 종교적 인물들이 하나님과 종교적인 것들에 대하여 생각한 것을 기록하여 놓은 것뿐이라고 한다. 결국 이들은 기껏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가 보는 것과, 자연 세력들 뿐이다.


2. 칼빈주의자와 신앙


칼빈주의자는 초자연적 하나님을 믿으며, 이 하나님은 자연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초자연적 행동, 곧 계시와 영감으로도 자기를 계시하시며, 그는 간구하는 자들에게 매일 필요한 힘을 공급하시며 성령의 특별 역사로 사람을 중생시키며 또 성화시키심을 믿는다. 칼빈주의자는 인생과 우주의 문제에 대하여 알고자 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특별 계시(성경)를 통하여 알게 되며, 만일 그가 도덕적 능력이 요구된다면 필요에 따라 은혜주시는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고, 자연계에도 인격적인 하나님의 지혜롭고 목적이 있는 통솔력이 있어서 인생의 생활과 만물을 지도하시나니, 이는 비인격적인 힘이 아니라 지혜로우시고 선하신 하늘 아버지이시라고 한다.


더욱이 칼빈주의자가 보기에는 하나님 신앙이 인간에게 더욱 필요하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졌고 그의 영혼은 도덕적으로 타락하였으되 일부분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타락된 상태에서 사람은 본연의 지적 통찰력이나 도덕적인 능력을 소유할 수 없고 그의 사상과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의 특별 은혜를 의지하여야 한다. 이것에 대한 성구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요 15:5; 빌 4:13) 중대한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칼빈주의 체계는 그 자체를 시종일관하게 신앙에 뿌리를 박았다. "우리는 알기 위하여 믿으며" "또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가치있는 생활을 하기 위하여 믿는다."


3. 신신학자의 과학적 방법


신신학자들은 정통파 신자들을 경건하지 못하다고 하여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이 아니라고 하여 주로 반대한다. 그러나 먼저 종교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려면 물리와 화학 같은 초자연적 계시를 믿는 방법보다 전연 다른 자연과학이 취하는 방법을 택해야 될 것이다. 먼저 그는 경험에서 종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 모든 사실을 수집해야 하며 그것들을 유사한 것들끼리 모아서 분류 하여야 할터인데, 그러나 하나님은 관찰할 수 있는 어떤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으로 알아볼 수 없다. 결국 이들이 확보했다는 것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나, 악과, 천당과 지옥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막연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대체로 저들이 사용하는 순수한 귀납적 또는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종교의 순수한 점을 발겨하게 될 것이라고 하고 그 결과는 과학적으로 옹호될만한 종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의 전부일 뿐이다.


또 이들이 사용하는 과학적 방법 그 자체도 역시 반대에 부딪치게 되는데, 그것은 어떠한 종교적 현상과 사실을 모아 그것이 순수한 종교요, 또는 그렇지 못한 종교라고 하기에는 그 표준이 세워져야 하는데, 그 표준을 결정하는 방법은 전연 새로운 것이어야 하며, 그 표준도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의 성질에 대한 주관적 전제, 가설, 관념 등에 의하여, 누군가가 "과학적 연구"의 결과를 얻었다고 해도 그 종교관은 실상의 연구의 결과 그대로가 아니라 자기 주관적 표준에 의한 판단일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종교적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연과학에서 취하는 방법을 따르는 것이라 함은 참되지 않다고 하는 것이 옳으며, 정신과학에 있어서는 보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이론에 의해 알기에, 진리에 도달하는 제 3의 길이 있으니 곧 신앙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받아드리는 많은 지식은 이 방법을 사용하여서 받아드려진다. 우리의 지식의 대부분은 우리 자신의 관찰에 의하거나 자신의 이론의 힘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믿을만한 권위들의 증거에 의하여 오는 것이다. 이와같은 일이 종교에 있어서 실현되는 것이니 곧 칼빈주의자가 성경의 계시를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대부분의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4. 칼빈주의자의 과학적 방법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과 우주, 우주의 기원, 그 성격, 그 운명에 관한 계시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며, 또한 이 계시가 성경에서 발견될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하여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첫째, 자연과학의 귀납적 방법에 가까운 것이니, 곧 비교 종교학적으로 이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다. 둘째, 기독교 변증론과 증험론이다. 이 방법은 기독교의 하나님은 참되신 하나님이요, 성경은 그의 계시오, 또 기독교는 참된 종교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전개시킬 수 있는 논증을 찾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신자들에게 알게 하는 세째방법은, 신앙의 방법이다. 이것은 기독신자가 사용하는 기본적 방법으로 결국 신자가 하나님 그의 말씀을 믿는 신앙이 합리적 논증에 기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앙은 그 자체의 이론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신앙은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확신이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영혼에 심어주신 것이다. 


5. 신앙적 방법


우리는 신앙적 방법에 의하여 하나님과 성경의 계시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이 영혼에 부식된 이 확신을 가리켜서 신자의 심중에 있는 '성령의 증거'라고 하는데 이 증거가 바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먼저 성령이 하시는 것은 단순히 우리 마음을 밝혀줌으로 어떤 다른 빛에 의하여 사물을 보게 하는데, 이 새 통찰력이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우리의 밝혀진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기초가 되어 있다는 합리론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이러한 점은 대해 칼빈주의적 기초 위에서 불가능하게 된다.


칼빈주의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앙은 인간 자신의 통찰에 근거하여 무엇이 참되다고 함이 아니고 다른 사람 곧 하나님의 증거권위에 근거하여 그러는 것이다. 여기서 신앙은 구원신앙으로 이것은 일반적 신앙, 혹은 역사적 신앙과 같지 않으니, 곧 어떤 진리에 대하여 지적으로 승인하는 이외에 인격적 신뢰의 요소도 포함한다. 즉 성령의 증거는 성령이 신자로 하여금, 성경 자체의 어디서든지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신적 권위를 자유로이 또는 자발적으로 승복하는 것이다. 이 신적 권위가 그 신자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복종하도록 만든다.


신자가 자기 마음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성경의 신성성을 그렇게 확신한 후에는 성령이 밝혀주신 마음으로 사물을 전과 다르게 볼 수 있으며, 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합리성을 전개하는데 많은 논증을 용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경 교훈 중 이성적으로는 궁극적 이해가 되어지지 않는 기본적인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을 믿는 이유는, 성령에 의하여 밝혀진 이성이 그것들을 참되다고 증명하여 주는 까닭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가르친대로 그렇다"는 하나님의 증거 때문이다. 이렇게 증명할 수 없는 기본적 전제가 되는 사실들을 믿는 것을 비과학적이라고 정당하게 반대할 자는 없다. 그것은 신자가 증명할 수 없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한다고 비과학적이라고 한다면 다른 모든 철학설도 꼭 같이 비과학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제 4 장 균형적 체계인 칼빈주의


종교의 어떤 사실, 즉 인간의 구원, 회심, 침례 혹은 이신득의 같은 어느 하나를 누구가 그 믿는 종교의 중심사상으로 취하면 그의 신학의 정당한 균형이 깨어진다. 그러나 칼빈주의자가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우주의 주권자'라고 하는 진리를 신학의 중심으로 삼을 때에는 모든 다른 교리들은 정당한 곳에 놓여지고 또 적당히 강조 될 것이다. 그것은 칼빈은 "성경"을 자기 사상의 기초로 삼기 때문에 그는 이론으로 조화시키기 어려운 이런 관념들도 그것들이 성경에 있는 한, 자기의 체계에 포함시키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에 대한 예로 첫째, '예정'과 '인간'의 '자유'를 생각해 볼 때, 칼빈주의자들은 전적으로 절대적 예정을 믿으면서도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여 그 둘의 조화를 하나님이 조화시켰다고 하고 인간이 알기 어려운 문제는 그것을 신비로 남겨두고 만족하였다. 둘째로 '정신과 물질의 관계'가 영원히 상충되는 사실에서도 칼빈은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서슴치 않고 인정하면서 곧 그것들은 두 개의 같지 않은 실체로서 다같이 하나님이 '지의신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것들과 창조자 하나님이 서로 다른 만큼, 그것들끼리도 서로 같지 않다.


셋째로 기독자가 이 세상과 짝하지 않아야 한다는 문제와 문화 문제이다. 불신자는 이 세상과 짝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와 반면에 어떤 신자들은 그 점을 너무 강조하면서 저들이 이 세상 사람들로 더불어 문화발전에 참여하여야 할 사명과 인간 사회에 누룩이 될 의무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이 둘을 성경이 요구하는대로 꼭 같이 강조한다. 넷째로 '주지주의'와의 대조에 일고를 요한다. 사람은 종교생활에 있어서 지적으로 치우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서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사람들은 칼빈과 칼빈주의 운동에 최선의 찬사를 보내면서 어떤이들은 칼빈주의를 주지주의라 불렀고, 다른 이들은 신비주의자라고 불렀고, 혹은 종교에서 의지를 역설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극단으로 편협한 데로 빠지지 않고 되어 균형을 유지하였다.


제 5 장 칼빈주의 신학의 요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고조하는 신자가 있다면, 그는 칼빈주의자이다. 가는 데마다 그의 시종일관한 사상은 하나님이시다. 이 사상은 칼빈주의 신학의 전체를 착색하는 황금 실이다. 만사가 하나님에게 달렸다.


① 종교는 인간을 축복하는 것일지라도 인간을 위하여 있지 않고, 결국은 하나님을 위하여 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칼빈주의자는 이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였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자연계나 인생 생활에서 생기는 모든 발생사가 만대를 통한 하나님의 신성한 계획의 진전이라고 주장한다. ② 죄도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죄를 그의 의지로 허락하시고, 죄 자체의 본래의 성격에 의하여 발생하게 하시되 그것을 관할하시어 결국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 되도록 하신다. ③ 칼빈주의자의 '성경'에 대한 태도에서 이 위대한 사상은 지배적 지위를 볼 수 있다. 칼빈주의자에게서, 성경책은 구원받는 방법을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책이다. 하나님은 이 책의 매 페이지에서 인간의 구원과 또는 인생의 모든 행할 바 본분에 관한 계획과 목적을 알려 주신다.


④ 인간 연구의 문제에서도 사람은 아주 타락하였으므로 착한 행실을 할 수 없고, 범사에 범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의하여 선한 일을 하게 되기는 한다. 무엇 보다도 인간의 전적 타락의 비참한 상태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초자연적 변화가 아니면 고쳐질 수 없다. ⑤ 구속에 대하여 연구하여 보더라도, 거기 역시 하나님 사상이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속에 대한 계획이 사람의 마음에서 유래할 수 없음은, 사람은 자력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요 구주는 곧 하나님의 선물이다. 즉 구원은 우리의 공로 없이 단순히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은혜의 축복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또하나 그럼 누가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게 하느냐? 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우리 강팍한 마음에 보내시사 우리로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또 새 희망과 소원을 주셨다. 그러므로 구속의 전부가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구속을 계획하셨고, 성자 하나님이 그것을 성취하셨고, 성령께서 그것을 실시하시어 심령과 생명을 중생시키셨다.


⑥ 교회에 관한 칼빈주의자들의 견해를 연구해 보면, 로마 교회가 교회를 두는 위치에 칼빈주의는 성령 하나님을 둔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밝히시므로, 중생한 사람 자신이 성경 연구를 통하여 구원 방법을 알 수 있게끔 된다. 이들은 교회 자체는 어떤 특별한 교파이거나 혹은 교직자들의 일군이 아니라 어느 때나 어떤 곳에서나 그리스도의 몸된 참 신자의 단체를 말한다. 교회 정치에 있어서도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특징으로 가진다. 특히 두 가지 면에 있어서 그러하니, 하나는 권위이고, 또 하나는 자유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에, 그는 교회의 유일한 주권자이시오, 그의 원대로 모든 일을 교회가 행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도 시대와 같이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 중심으로 조직 되어야 한다. 교회가 권징도 반드시 해야 하는데, 그것은 교회에 해를 끼치는 교인을 배제시키려는 의미 뿐만 아니라, 제직과 교인들이 그 교훈과 행위에 있어서 다 같이 그리스도의 뜻대로 엄격히 순종 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 조직은 동시에 최대 한도의 참 자유를 준다.


⑦ 칼빈주의 신학의 특징으로 또하나 언급할 것은, 기독교 윤리이다. 로마교나, 루터교나, 재세례파나, 혹은 금일의 근본주의와 비교하면, 칼빈주의가 훨씬 더 도덕을 강조함을 볼 수 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을 신학체계의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의 목적을 하나님과 그의 영광에 두기에, 사람의 구원까지도 보다 더 고상한 목적을 위한 방편, 곧 하나님을 위하여 착한 일에 성실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방편이 된다. 칼빈주의자처럼 하나님을 중심하는 기독자는 다른 기독교인들 보다 더 고상한 윤리를 고조하는 신자가 될 것이다. 칼빈주의자에게 있어서 도덕 생활이 잘 발전되게 하는 이유가 또하나 있으니, 그것은 자기가 전적으로 타락했음을 아는 의식이다. 즉 이들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믿기 때문에 유달리 성령의 필요를 고조하며, 성화의 모든 요구를 위하여서 성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것 때문에 칼빈은 성령 신학자(the theologian of the Holy Spirit)이라고까지 불려졌다.


도덕상 강조점에 대하여 또 한가지 사실을 지적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실 때에 그의 전 인격을 구원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전 인격을 하나님을 위해 바쳐야 된다. 즉, 그가 교회에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사업할 때에나 여하한 정치적 활동 혹은 사회적 활동을 할 때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할 것이고, 가정 관계, 교육, 과학 또는 예술도 다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여 종교도 비로소 그 극치에 도달하게 된다. 생활의 중심이 하나님이요, 구원은 하나님에게서만 오고,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힘에 의하여 생활의 일체를 하나님을 위하여 바칠 때에, 그 이상 더 고상한 종교적 이상은 생각할 수 없다.


제 6 장 일반은총에 대한 칼빈주의의 견해


1. 불신자의 선행에 대한 칼빈주의자의 견해


칼빈은 로마서 3:10∼18에서 모든 사람은 본성으로 악하다고 한 바울의 교훈을 언급한 뒤에, 죄가 자연인에게 다음과 같이 작용할 것이라고 하였다. 곧 "아무리 맹수라고 하더라도 죄악만큼 다스리지못할 정도로 사나운 것은 없겠고, 아무리 빠르고 급하게 흐르는 강이 있더라도 죄악만큼 광분하여 제방을 넘는 것은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이교인들과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이 행하는 선행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이것에 대한 루터와 칼빈은 사람의 본성은 너무도 타락하여서 그 본성으로서는 어느 부문의 선행이든지 할 수 없다. 죄는 다스릴 수 없는 짐승 같아서 모든 것을 파괴하고 멸망시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자들은 죄악적 질병을 아주 고쳐주시지만,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 한하여는 그가 우주의 보존을 위하여 필요하신 범위 내에서 저들의 죄악의 충동을 제재하실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부끄러워서, 어떤 이들은 법의 공포에 의하여, 여러 가지 더러운 죄를 범하지 않도록 제재를 당한다. 또 이들은 선을 유익하게 생각하게 하므로, 미약하나마 그러한 생활을 하려는 소원을 가지고, 또 다른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통 이상의 훌륭한 생활을 나타내므로 그들의 점잖은 풍채에 의하여 인간의 본성의 패역한 것이 외부적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제재된다. 그러나 그것을 내적으로 순결하게 하지 않으신다라고 하였다.


2. 일반 은총의 열매도 선행인가?


어떤 행동이 선이 되려면 그 목적과 성격도 외형적 실천과 같이 선하여야 된다. 무엇이든지 거룩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행해지고, 하나님의 율법에 합치되고, 또 그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다 선행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순결한 행동과 동시에 순수한 성격과 깨끗한 목적을 요하는 행동들을 이교인이나 불신자은 행할 수 없다. 그러면 신자의 경우는 어떤가? 그것은 신자의 행동이라도 아주 절대 순결한 마음에서나 혹은 완전히 순결한 동기에서 행해진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신자도 선행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제23장 주일의 제 60문에서 "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다 범하여 하나도 지키지 못했고 오히려 모든 악행만 하려고 한다고 고백한다. 그와 같이 엄정한 의미에서 생각할 때에 사람은 신자나 불신자를 물론하고 다 선행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으니,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 18:19)."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도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서 선한 일에 "열심"이 있다고 하였고, 또 사람이 행하게 한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그 자체가 하나님의 율법에 외형적으로 부합되는 것이면 성경은 그것을 선이라고 한다. 이렇듯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격렬한 정욕을 제재하고, 여러 가지 외형적 선행을 나타내게 하고, 저들의 심정에 있는 죄악적 원리와는 반대로 저들의 타락한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감화력을 가리켜서 칼빈주의자는 일반적 은혜라고 한다.


3. 일반 은총의 열매를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신 은총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곧 하나님이 중생하지 못한 자 특히 택함 받지 못한 사람, 혹은 버림받은 죄인에게도 은혜, 호의, 후의, 사랑 같은 것을 나타내시는가 하는 문제이다. 타락한 자 곧, 죄인인 저들은 결코 하나님의 호의의 대상이 못되고 항상 그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은 죄인을 영벌하는데 나타내실 공의 실시로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같은 성경이 택함 받지 못한 죄인에게 하나님의 호의 특히 사랑하시는 태도까지 나타내어 보인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두 가지 속성에서 영광을 받으시기로 작정하셨기에, 선택받은 자 곧, 영광의 그릇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와 또 버림을 받아 멸망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에게는 벌하시는 공의, 그리고 영광과 진노의 두 그릇을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심에서 예정설에 의한 하나님의 결정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놀라운 신적 방법으로 우리를 미워도 하시고 동시에 사랑도 하셨다.


그는 우리가 창조함을 받은 대로 있지 않는 정도에 비례하여 우리에게 미움을 나타내신다. 우리의 불의가 그가 우리 속에 이루어 놓으신 업적을 전멸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각 사람을 취급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은 미워하시고 그에게서 난 것은 사랑하신다." 곧 택함 받지 못한 자들에게도 하나님이 호의 혹은 은혜를 보이셨다. 그러나 이 일반적 은혜가 후에 저들이 받을 형벌을 증가시킬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 일반 은총을 감사할 줄 모르고 회개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일반 은총에 대한 칼빈주의 견해의 유익한 점


칼빈주의자는 이교 사회나 불신자 세계에서라도 과학과 예술과 문화가 더 잘 발전된 것을 보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맺히게 하는 열매, 곧, 성령님의 역사라고 한다. 칼빈주의자는 감사하게도 이 열매를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하고, 또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함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 7 장 칼빈주의와 문화


사전에서의 문화란 "교양 시키는 행동 혹은 교양받은 결과로 이루어진 상태"라고 하는데, 이 고양은 "정신적 도덕적 훈련이나, 문명이나, 풍습 또는 취미에 대한 세련을 통하여 가져오는 개량, 개명, 연단 같은 인간 개발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렇다면 문화는 단순히 발전만이 아니라 항상 개량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둘 때, 자연계의 모든 세력을 상대하고 활용하는 인간 정신의 활동으로서 창조를 고차원적인 단계로 올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요컨대 문화는 에덴 동산에서 창조주가 피조물계의 왕인 사람에게 맡긴 사명을 성취함, 즉 문화 운동은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명을 실천함이다.


1. 무죄 세계에 있는 문화


만일 사람이 낙원에 있어서 범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는 문화의 과업을 담당하고 있었을 것인데, 그것은 사람인 자기 지배 하의 세계를 상대로 행하였을 업무 내용을 전적으로 포괄하였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있어서 사람은 세가지 관계로 자기 업무를 이행하였을 것이니, 곧 자연계와 자신과 또 인류사회와의 관계이다. 그는 자연계를 지배하여 그 속에 묻혀 있는 가능성들을 발휘하였을 것이며, 그는 자기 속에 타고난 하나님의 형상을 발휘시켰을 것이며, 또 그는 인류 사회(조직된 인류)의 일원으로서, 유기체로서의 전 인류에게 보유되고 있는 풍부한 가능성들을 개발시키는 일에 합작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노동, 즉 개량의 유익한 각각의 방법으로 농작, 산업, 그리고 인간의 정신노동으로 문화 운동을 전개했을 것이다.


2. 문화와 과학


과학은 그 대상들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취하여 연구하고, 그 속에 잠재해 있는 의미와 그 관련성들을 찾아 내서 거기 합당한 명칭들을 주는 것이다. 아담이 창조된 때에 한 것을 과학이 계속하고 있는 것이며, 오직 한가지 학문 철학만이 어떤 개별적 과학들이 우주의 체계 즉, 그 구성의 전체의 조화되는 가를 결정하는 탐구이므로 문화와 과학의 임무와 사뭇 다르다고 하겠다. 그러나 과학은 어떤 사물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이기에, 그 실제적 효용, 실제적 목적에 적용함도 과학의 사명이라 하겠다.


3. 문화와 예술


인간정신이 자연의 세력을 정복하는 또 하나님의 영역이 그것은 곧 예술이다. 과학은 모든 사물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한 반면, 예술은 그 사물의 의미에 합당한, 감각적 형태를 나타내는 일에 종사한다. 예술가의 사명은 자연을 현재의 형편 그대로만 보여 주는 것이 아니고 그 자연의 이상적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자연 속에 묻혀 있는 세력을 더 고상하게 실현시키는 것이다. 예술에는 특별한 기술이나 숙련공의 재간 있는 솜씨를 생각하기도 하나 흔히 예술이라고 할 때, 건축, 조각, 회화, 음악, 시가 등 "순수한"예술을 연상한다.


4. 죄악이 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인간이 타락한 후 문화 개발의 사명이 페지되었거나 쓸데 없이 된 것은 아니다. 죄악은 결코,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를 불필요하게 하지도 못하며 하나님의 목적을 실패하게도 할 수 없다. 단지 죄악은 문화의 업무를 이중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인간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정복하며 개발시켜야 할 땅은 저주를 받았으며, 사람 그 자신도 달라져 자기의 문화적 개발의 업무를 분명히 알기에 필요한 지식을 상실했고 결국 문화 개발의 업무를 성과있게 실행하는데 필요한 자격을 개인적으로만 결여할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그것을 손실해 버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의 세력을 추방할 때에만 문화 개발의 완성이 올 것이나, 또한 우리가 일반은총에 대하여 을 고려할 때에 알게된 것과 같이 이방에서도 하나님의 죄의 파괴적 세력을 대비하여 이를 막는 세력이 역사하게 하시여, 죄악이 있는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화적인 선을 실현시키신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과학이 때로는 고상하게 발전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 세상이나 영원한 세상에 대한 인간의 목적을 파악하지 못하였으며, 하나님이 지정하신 피조 세계의 목표는 깨닫지 못하였고, 더욱이 이방인들이 과학, 예술, 사회 생활에서 있어서, 저들의 문화의 풍성한 수확을 거두던 고귀한 사회에서라도 부패하게 하는 부도덕의 암이 섞여있었다. 결국, 그리스도 위에, 즉 기독교 기초 위에 세운 문화만이 영구히 존속할 것인데, 그것은 금일에 유럽의 문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념이나 능력이나 은혜나 계명에서 떠나면서 부패하여 가며 몰락하여 감을 보아서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지 만세 반서(그리스도) 위에 세운 것은, 교회나 하나님 나라나 또 무엇이든지 영원히 남아 있다.


5. 기독교와 문화


이방 문화의 실패를 보면서 문화을 위하여 기독교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있으나 기독교를 떠나서는 문화가 존재할 수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그것은 실제로 수개의 고대 민족 중에 이따금 매우 발달된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가, 그 정당한 목적을 성취하며 피조 세계의 올바른 목표를 지향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서 지도적 원리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방 민족이 경험한 것과 같이 문화가 끝까지 자멸되지 않으려면, 기독교가 신봉하는 그리스도의 도덕적 능력이 필요하다.


몇몇 기독교 단체들은 문화와 기독교는 서로 반대되므로 기독교와 문화 세계와 완전히 분리하여야 하며, 문화사업은 불신자들에게 맡겨 둘 것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한 칼빈주의 입장은 문화도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성을 제재하시므로 나타내시는 선물인 것으로 하나님이 주신 일반 은총으로 맺힌 열매가 어디에 나타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감사히 사용할 의무가 있다고 하면서,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문화적 사업에 협조할 의무를 가졌다고 한다. 우리는 스스로 후퇴하여서는 안되는데, 왜냐하면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창 1:28)"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화와 기독교와의 상호 영향을 살펴본다면, 이들은 문화가 있는 사회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흔히 문화의 산물을 그릇된 목적에 사용했고 또 기독교를 반대했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문화 그 자체는 종종 기독교을 도와주었다. 예를 들면, 사도들 당시에 문화가 복음전파에 협조한 것을 볼 수 있겠다. 즉 잘 만들어진 도로와 통일된 말(언어)과 정치면에서 주는 여러 가지 편의가 복음전파에 도움이 된 것이다. 기독교가 문화에 이익을 끼친 것을 본다면, 자연과 인간에게 잠재하여 있는 원료들을 발전시켜 인류의 당연한 사명, 곧 피조물 중에 내재하여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발현 시켜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대로 조사케 하는 사업이라는 문화의 사업을 성취케 하도록 죄인 된 인간들에게 중생케 하는 영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정당한 목적으로 자기들의 재능과 권세를 사용하도록 만들어 주는 지대한 공헌을 기독교가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이 충분히 성취될 때에는 폐허 같은 이 세상에서 인간의 복리를 위한 모든 가능성을 무수히 발전시키는 세계가 생길 것이다.


제 8 장 칼빈주의와 정치학과 성경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칼빈주의가 신학적 체계를 갖추기는 충분하나 그것이 생활의 전체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과 정부에 대한 백성의 복종 고조하는 소수의 일반적 진리 이외에는 정치계에 제공할 진리가 없다"고 하였으며, 또 그들은 주장하기를 "칼빈주의는 그 자체로서 정치적 체계를 발전시킨 일이 없다. 만일 그렇게 한 적이 있었다 하면, 그것은 하나의 추상적 이론에 지나지 않고, 그것이 효력을 나타낼 수 있는지 없는지 증명하기 위하여 정치적 분야에 한번도 시도해 본 일이 없다고 한다." 그렇기에 여기서 칼빈주의 역사적 참고 사항을 먼저 보도록 하겠다.


1. 정치적 칼빈주의에 대한 역사적 고찰


사실 칼빈주의의 정치사를 연구해 본다면, 칼빈주의가 자체의 정치적 원리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정치설들이 이 원리에 기인되었고, 또 근대에 와서 여러 나라에서 이 원리가 적용됨을 볼 수 있다. 콜롬비아 대학의 역사학 및 정치 철학 교수인 더닝이 저술한 '정치 이론사' 따위의 색인를 보면 그 저서 중에서 칼빈주의에 근거한 정치 학설들이 많음을 볼 수 있으며, 또한 패어베언의 지적-역사에 있어서 칼빈이 가장 높이 평가된 것은 그의 입법자로서의 성공에 기인한 것이라 하며, 입법자로서의 선구자 이다.-에서, 프랑스인 룻소가 경의를 표한 것들에 비추어 보아 칼빈은 정치사에 있어서 유명한 인물이었고, 또 정치계에 매우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볼 수 있다.


2. 성경과 정치학의 관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앙과 행위의 법칙이므로, 칼빈주의자는 그것을 자기의 정치적 활동에 있어서도 지침으로 삼는다. 성경이 자연의 책을 교정하는 이외에도 인류 사회의 행동을 지도하는 영원한 원리도 포함하므로 성경은 최후 판결을 주는 책이요, 또 특별한 의미에서 칼빈주의자의 정치학의 기초가 된다. 칼빈은 국가에 관하여 주장하여야 될 여러 가지 의견을 하나님의 의지에 기준하여서 결정한다. 칼빈주의자는 정치적, 신학적, 사회적 견해에 대한 성경적 기초 원리들이 단편적 성구에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도리어 이 원리들을 성경에 있는 '신앙의 법칙'에서 발견한다. 이 신앙의 법칙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흐르고 있으며, 또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되, 때로는 특별한 성구에도 나타난다. 칼빈주의자에 의하면 신자는 정계에서도 성경 원리가 특히 그 자신을 위한 법칙임을 알아야 된다고 한다. 그는 그의 영혼에 대하여서나 영원을 위하여서만 아니라 시간 세계에서 그의 육체를 위한 사물에 있어서도 자신이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속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생활 부문에서 그에게만 순종하여야 된다.


제 9 장 국가의 기원과 기능


국가라는 것은 일정한 영토 안에서 독자적인 정부 아래 조직되었고 최고 기관으로 백성의 인정을 받은 정치적 공동 사회라고 할 수 있다.


1. 국가의 기원


칼빈주의자에 의하면, 국가는 인간의 자연적 본능으로 인하여 자연히 생겨졌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사회적 충동에서 국가가 생겼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것은 칼빈주의만이 아니다. 이방 철학자 아리스도텔레스가 인간에게 개인적 특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 특질도 있다고 인정하였다. 어떤 이들의 의견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군서 본능"이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가족, 씨족을 이루게 하며, 칼빈주의자는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사람에게 "군서 본능"을 주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국가는 보통 사회 이상의 기구이므로, 이 결합력을 가진 사회적 본능만이 국가의 기원이라고 볼 수 없다. 국가는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조직된 정부를 포함한 특수 사회이다. 독립된 영토 안에 거주하는 단체가 자체의 일반적 복리를 증진시키며 공동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결속될 때에는, 그 단체가 정부의 기구, 지배자, 법률을 요하게 되며, 이 법률을 시행하기 위하여 법원, 경찰, 육군, 해군을 요하게 된다. 그러면, 인류 사회의 성원들로서 공동 이익의 추진과, 그 단체의 일반적 복리증진과 정의 수행을 위하여 정부를 조직하는 국가 구성의 운동도, 역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 처사로 말미암은 것이다.


2. 무죄 세계에 있는 국가의 기능


이 무죄 세계에서 통치자들이 할 일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할 때, 이미 문화라는 문제로 앞서 충분히 설명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위임한 개발적 임무 취급에 들어 있다. 무죄 세계에서 각 사람은 개인적 의무로 자기에게 유익에 관한 한도에서 자기의 형상을 발전시키며, 또 자기 개인의 유익에 관한 한도에서 자기의 개발적 임무에 종사할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으로 할 일 외에, 매 가정은 그 가정으로서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일의 성질상 개인적 활동과 가정적 활동은 인류 사회가 확장되는데 따라서 확장된 것이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인류도 역시 일대 연합된 유기체로서 성취하여야 될 개발적 임무에 해당하는 공동 임무를 실행할 터이다. 그 단체 전부가 하여야 될 통일적인 일에 포함된 공동적 활동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지도적 지위에서 그 단체를 위하여 활동함이 요구될 것이다.


3. 죄악 세계에 있는 국가의 기능


죄악이 이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변하여진 보든 형편에 맞도록 정부의 형태도 변경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정부가 방범하기 위하여 법률을 제정하는 권한과 법률의 일정한 조문을 해석하고 판결하는 법정과 법을 집행하기 위한 경찰이 필요하다. 이 권한은 인류의 타락 이후 하나님이 정부에 주신 것이다. 이 사실을 로마서 13:1∼4에서 배웠으니 이 성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정부에게 칼을 사용하는 권한과 권선징악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나라와 이상적 사회 상태는 결코 정부나 혹은 어떤 다른 자연적 방법에 의한 자연적 발달로 생길 수 없음을 역사가 증명한다. 이 위대한 이상, 완전한 국가인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서만 실현될 것이니, 곧 자연적 방법에 의할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 은혜에 의하여 실현될 것이다. 그 나라를 그가 벌써 이 세상에 심어 놓았다. 그것이 중생에서 시작하여 성화로 계속되며, 이 세상에선 영적 실재로만 있다가 장래에는 영적 또는 물적으로 아울러 완성될 날에 이른다. 그 날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결과로 의가 거하는 새 땅이 옛 세상의 폐허에서 생겨나는 날이다.


정부의 기능을 말할 때에 칼빈은 두가지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첫째는 국가와 천국을 동일시 함을 경고하였고, 둘째는 이 양자가 서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고하였다. 이 두가지 경고는 다음에 있는 칼빈의 말에서 발견된다. 즉 "그러나, 바로 위에 우리가 암시한 것과 같이, 이러한 정부의 통치는, 그리스도의 영적 또는 내적 다스림과는 구분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자가 어떤 점에 있어서든지 서로 충돌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① 교회를 지지하며, 인류사회가 요구하는대로 국민 생활을 조정하며, ② 사회 정의를 실시함에 관한 광범한 책임들을 정부에서 귀속시켰다. 다른데서는 칼빈이 정부의 임무가 사회의 모든 일반적 복리를 제공함에 있다고 말하였다. 즉 국가는 그 사회적 임무에 있어서 단체에 관한 문화적 복리 즉, 공익을 위하는데 국한되어 있는데, 그것은 개인, 가정, 교회, 사회 등 사사로운 부문들과 다른 소위 '천부의 공동이익'을 추진시키는데 제한된다. 그리고 타락 후 국가는 이러한 문화적 임무 외에 역시 사회 성원들 중에서, 상호간이나 또는 국가 전체에 대하여 '정의를 수행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 10 장 가장 완전한 국가 형태


1. 무죄 세계와 죄악 세계에 있는 국가들의 대조


국가의 기능을 완수하기에 이상적인 국가의 형태를 들라면 그것은 단일한 세계 국가 즉 하나님의 나라라 할 수 있겠으나, 칼빈주의는 이 죄악 세상에 단일한 세계적 국가의 존재를 찬성하지 않는다. 칼빈주의는 군주정치나, 과두정치나, 민주정치나, 혹은 기타 어떤한 정치든지 어떤 한가지 정치 형태를 지정하여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현대에 여러 종류의 정부를 통하여 통치하심을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므로 사람이 가져야 할 정부의 형태 문제 곧 어떤 종류의 정부 형태를 가져야 되겠는가 하는 문제는 실제적 형편에 따라 스스로 해결할 일이다. 정부가 일할 수 있도록 제일 잘 보장하는 것은, 정치의 그 형태에 있지 않고 그 백성의 도덕적 정신적 성격 여하에 달려 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정부가 성공하려면 민중의 도덕과 정신적 배경이 필수적 조건이라는 사실이다. 이 조건을 칼빈주의는 기본 원리인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과 함께 열렬하게 주장한다.


2. 국가는 기독교국이어야 될까?


국가는 반드시 기독교국이어야 될까? 이것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킨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이 문제는 단순히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하는 말로는 대답할 수 없다. 이 문제는 "기독교적"이라는 말의 의미 여하에 좌우된다. 합리적인 의미로는 국가가 결코 기독교에서 세운 기관이 아니다. 국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속하는 기관인데, 이 기관에 의하여 하나님은 그 섭리로 죄를 견제하고 도덕적 세계 질서를 추진시킨다. 성경은 기독교가 아닌 정부도 하나님이 세우신 것들이라고 가르치므로 하나의 조직체로서의 국가는 분명히 기독교 특색의 조직체라고 할 것은 없다.


기독교 국가라 함은 국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침으로 삼아 정부로서의 권위에 대한 존경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제도에 의해 죄를 벌하고(?) 공무원이나 시민의 허물과 책임 문제 단속을 무시하려 하지 않고, 결혼과 가정의 신성성을 보존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또 기타 어떤 면에서든지 그것이 정부 자체의 부문과 관계된 한 거기서 기독교 정신에 물든 자로 보일 때에 그러한 국가는 기독교국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교회의 통치자인 것과 같이 그가 국가의 통치자로 인정되어서 모든 공무원이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 될 것으로 시인된 것을 의미한다. 국가는 특별 은총의 산물이 아닌 일반 은총의 산물이니 만큼 확실히 창조주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치하에 속하였으므로 그것은 인간 생활의 표준인 하나님 말씀에 복종해야 할 것이나 국가의 속죄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권 내에 복속해야만 국가로서의 자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최후의 의미에서 따지자면 일반 국가를 정당하게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없다.


칼빈주의의 국가관을 정리하자면, 국가는 본래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인데 개인 가족 또는 그것들의 이해 관계에 발전된 그 어떤 부문들과 다르다. 국민 전체가 협력해서 해야 될 문화개발의 사업들을 돌보는 것이다. 천국은 현존하는 국가에서는 계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초자연 왕국에서 육성되고 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가 특별 은혜로 지상에 세운 것인데, 심판날이 지난 다음에는 이 땅 위에서 실현될 것이다. 땅의 국가는 하나님이 주신 일반적 은혜로 건설된 하나의 기계적 기관이니,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서로 충돌되게 활동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를 통하여 발전하도록 협력하여 일할 것이다. 타락 이후의 인류는 아직도 해야 될 문화 개발의 의무를 가지고 있다.


제 11 장 정부의 형태


1. 어떤 일정한 정부형태를 가르치지 않고 일정한 원리들만 지시하였음


칼빈주의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진리 체계요, 인생 철학이요, 적절한 정치 원리들의 일군을 가진 세계관 내지 인생관이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정치상 고정 불변하는 기계적 단일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형태에 있어서 영구히 정적이거나 불변적이 아니며, 변하는 정세에 맞추기 위한 발전 혹은 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생기가 가득 찼고 적응서이 풍부한 유기적 진리와 같은 것이다. 칼빈주의적 국가 조직의 형태에 있어서 다양성을 띠고 모든 국가들 사이에 분명히 원리상으로는 공통이 있으나 역사에 있어서 그 나라들이 늘 변하는 정세에 맞게 하기 위하여 부단히 칼빈주의에 의한 발전도 가져왔다.


2. 권위의 옹호


칼빈주의는 이 기본적 처지를 취하므로 거친 개인주의 행위나 남들의 권리를 무시하는 행위에 항거하여 단연코 법과 질서편에 굳게 선다. 이 처지가 정부를 공고하게 함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또 이것이 시민들의 권위 존경과 또 순종을 강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사실상 권위를 존경하며 순종할 동기를 일으킬 주장을 내세운 셈인데 하나님께서 정부 권위에 대한 존경과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주장이다.


3. 인민의 자유 옹호


칼빈주의는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하여 인민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여 내려왔다. ① 이 죄악 세상에서 어떠한 세계적 단일 국가나 혹 너무 지나치게 큰 국가를 칼빈주의는 반대한다. ②작든지 크든지 일개의 국가 안에서 한 사람이나 소수의 사람에게 세력이 집중되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 ③ 소수의 수중에 권리가 집중되는 것을 반대하는 또 하나의 안전 보장책은 정부를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분리제로 세워서 각자가 서로 예속하지 않는다. ④ 인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보장책은 사사의 각 분야가 그 자체 안에 불가침의 주권을 가진다고 칼빈주의자는 주장한다. 이를테면 가정, 학교, 교회, 사업기관 기타 사회적 조직체들이 그런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⑤ 칼빈주의자들의 정치적 견해로서 중앙 정부에 대한 시민권리와 자유 문제에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견해는 지방 분권과 지방 자치라는 말에 포함된다. 이상에서 본 칼빈주의자가 옹호하는 정부 형태는 개인과 단체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원리들은 그것들은 정부 형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제 12 장 정부의 직무


미국 헌법의 유명한 서문에 그 기초자들이 헌법의 목적을 선언하는 그 목적들을 보면, "저의를 확립하며, 국가의 안전을 확보하며, 일반적 방위를 제공하며, 일반적 복리를 추진시키며, 또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자유의 혜택을 얻게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목표들을 달성하려는 노력은 첫째, 정의를 실시하고, 둘째, 국가와 국민의 일반적 복리를 증진시킴이다. 이것이 칼빈주의 관념에 의한 정부의 이대 직무이다.


1. 정부의 제일 직무는 공의의 실시이다


어떠한 정부이든지 첫째로 할 일은 정의를 수행함이다. 인류 사회에서 법의 신성성을 옹호하는 것이 정부의 일이다. 그리고 반드시 실시할 법은,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이 우주의 주권자라면 국가로서 시행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양심 자체는 죄 때문에 바르지 못하고 완전히 지도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하여 하나님의 의지가 무엇인지 알고 공무원과 동시에 국민들의 양심도 그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2. 정부와 하나님의 율법


만일 성경이 절대적 표준으로 이에 이하여 국가가 지켜야 할 법을 결정해야 된다면 국가가 성경의 얼마만한 분량과 관계를 맺어야 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국가의 임무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또 성경 전체에 산재해 있는 정부의 지킬 율법과 원리가 우리를 위하여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경과 십계명은 나라의 지킬 법을 취급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행동과 동시에 가정, 사회, 교회, 기타 인류사회의 모든 단체의 행동에도 관계된다. 국가는 정부의 행정면에 관계된 하나님의 법칙만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국가는 이 십계명에 의한 프로그램을 국민으로 하여금 실행할 책임을 자지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은 결코 정부에게 참된 종교의 전파와 옹호의 사명을 맡기지 않고 이 일을 교회에 맡겼기 때문이다. 그것을 전파하고 옹호하는 무기는 국가의 무력이나 폭력이 아니고 성령의 검, 곧 성경이니 이것은 인간의 마음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것과 같이 국가의 복리를 위하여 국가는 행정이 상대하는 종류의 국민 도덕을 장려할 의무가 있으며, 그런 종류의 도덕은 종교적 견지에서 볼 때, 최소한도의 윤리일 것이다.


3. 정부의 영역


칼빈주의자는 국가가 관리해야 할 또는 정의를 실시해야 할 영역의 범위에서 국가의 권한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보며, 국가의 절대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① 자연적 일반 선을 실행함에 국한되었다고 한다. ② 국권의 제한성은 그 국가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특성에서 생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자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넘어서 사생활 안에서도 많은 의무와 책임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하여 그는 필요한 자유를 누려야 하며 구가는 그 자유를 침해 할 수 없다. ③ 가정, 학교, 교회 그리고 경제적 사회적 모든 기관들과 같은 사회에서의 자연적 영역에 놓여 있는 것들은 그 기원과 존재의 형태가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위임받은 임무를 갖고 있으므로 이것들은 각기 자체 안에서 자주권을 소유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는 정부가 경제적 혹은 사회적 모든 기관의 개개의 영역에 개입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고 하지는 않으며, 또한 정부로서 그것들을 소유하며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의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 칼빈주의자는 개인이나 어떤 사회 단체가 자체의 권리의 한계를 넘어서서 개인이나 혹은 국가 자체의 권리를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침입할 때에는 그것을 제재하는 법을 제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라고 믿는다. 또 적극적으로 칼빈주의자는 실업과 경제와 사회적 모든 세력에 대한 법규를 제정하여 모든 사람들이 더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정부의 의무라고 한다.


4. 백성의 복리를 도모할 것


국가의 둘째 큰 의무는 국민의 일반적 복리를 추진시키는 것 즉, 자연적 공동 복리를 중진 시키기 위한 정부의 활동들로 공의의 시행 임무가 추가 된다. 이 활동들은 체신업무, 공익 사업 또 자연 재원의 개발, 사업적, 사회적, 연구적 기관들을 돕는 것, 재난당한 지방들을 도와 주는 것 등이다.


5. 칼빈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차이점


칼빈주의자는 국민의 공동 복리를 취급하는 임무를 정부에 귀속시키면서, 물질적 사상적 또는 자선적 공익관계의 여러 가지 시책을 주장하며, 관리들로서 법과 질서를 보존하는 이외에 정부로서 빈민과 피난민들에게 공채를 대부하여 공중에 관한 위생 시설을 해 놓으며, 각 지방의 세입을 통계적으로 검토할 것이며, 곡물과 포도주와 기타 물품의 값들을 정하며, 정당한 이율을 결정하며, 또 국고세입의 증수와 시민들의 직업 확보를 위하여 명주 생산은 국영으로 할 것까지 권유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나 국가주의는 그들의 목적인 정부가 사회를 지배하는 욕망에서 모든 것을 국가로 하여금 지도하고 지배하고 또 관계하는 것이다. 또한 칼빈주의는 경제문제나 사회 문제에 국가의 간섭을 거의 혹은 전혀 용인하지 못한다는 개인주의(자유주의)보다 매우 다른 처지를 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개인들이나 단체들이 각기 자체의 원리에 의하여 복잡한 사회에서 각기 하나님이 주신 사명대로 충분히 자유롭게 활동하게 되도록 정부에 의하여 경제적, 사회적 규정이 실시되기를 원하며, 이 규정이 다른 개인들이나 또는 국가의 권리와 평등을 유지함에 손실이 없도록 제정되기를 바란다.


제 13 장 정부의 권위


지배자의 무제한적 권한은 그로 하여금, 전재, 독재, 또는 압제 정치를 하는데 이르고, 시민의 무제한적 자유는 방종, 혁명, 무정부주의로 퇴보하게 한다. 이 둘 사이에서 정당한 관계를 발견하기란 어려운데, 이 문제에 대한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을 보겠다. 칼빈주의자들은 개인을 단체에 희생시키거나 단체를 개인에게 희생시키거나 함으로, 문제해결을 찾지 않는다. 그들은 신성한 국가에 있어서 개인이나 단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고차원적인 협동에서 연합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배자와 국민이 다 같이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려는 고차원적인 협동에 의하여 권위와 자유를 둘 다 보전하려고 한다. 단순히 권위 뿐만 아니라 자유도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진실하게 순종함으로 성립된다. 권위는 감화, 존경, 혹은 신임 등을 요구할 수 있는 인격의 힘보다도 다른 무엇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명령할 수 있는 권한과 순종하게 하는 권리를 말한다.


1. 정부 권위의 기원


모든 권위의 근원은 언제든지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신 하나님 뿐이다. 칼빈주의자들은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림이니....그(곧 정부)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었음이라"고 하였다.


2. 집정자에 대한 국민의 의무


국민은 집정자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알고, 저들의 권위를 존중히 여기며 '존경'하여야 하며, 정부가 합법적으로 하는 일에 있어서 국민은 반드시 '순종'하여하고, 국민은 정부를 위하여 반드시 '봉사'해야 한다. 성경은 정부를 위하여 기도하되(딤전 2:1∼3), 신자를 핍박하는 정부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3. 정부 권위의 성격


지배자들도 국민의 전체 생활에 대한 절대적, 또는 최종적 권위는 결코 가지지 못한다. 저들의 통치권은 언제나 정치적 임무에 국한 되어 있다. 하나님이 인류사회의 다른 단체들에게도, 각기 필요한 권위를 맡겼는데, 가정에선 부모에게, 학교에선 선생에게, 교회에선 교직자에게, 사회의 여러 법인 단체에선 책임장들에게 맡겼다. 정부의 권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서 유래된 이런 권위들에 대하여 공무원으로서 침범하면 안된다. 통치자들이 그 직위에 있는 한 하나님의 사자요 또 사자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저들은 자기의 마음대로 정치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될 것이다.


4. 권리의 오용(誤用)


칼빈주의자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통치권" 곧 "하나님이 주신 지배권"이란 것은 군왕들만이 아니고 누구든지 자기 임무의 분야에서 하나님이 주시어 가지게 되는 지배권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 왕들은 독재적으로 정치하면 안되며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들의 기쁨을 위함이 아니요, 국민의 복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백성을 다스리도록 임명받은 하나님의 사자인 까닭이다. 또한 이들은 모든 권위와 모든 영광을 대주재 하나님께 돌림으로 왕의 인물숭배나 왕 앞에 위촉되는 것 같은 모든 행동을 강하게 반대한다. 그리고 공무원들에게 과도한 영예를 돌리는 것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국가를 경배하거나 신격화하는 행동을 반대한다.


칼빈주의가 본 통치자나 공무원의 권위 내용을 보면, ① 이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니 언제나 하나님의 권위로 존속된다는 것, ② 이 권위는 하나님이 결코 통치자와 공무원들에게 아주 양도해 버리지 않았다는 것과 저들은 하나님의 사자로 있을 뿐이라는 것, ③ 저들의 권위는 각기 맡은 행정권 안에서만 제한되었다는 것, 그것은 시민의 생활 전부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가정, 학교, 교회, 기타 사회 부문은 각각 하나님에게서 받은 영역이 있으니 거기에 국가의 권위가 미치거나 침해할 수 없다는 것, ④ 이 권위는 백성의 복리를 위하여 있다는 것, ⑤ 정부나 통치자나 관리들은 백성을 경유하여 선택되었으며, 그들은 백성의 동의를 얻어가면서 행정해야 한다는 것, 즉 교회에서와 같이 국가에서도 백성이 감독권을 소유하였다는 것, ⑥ 백성이 하나님의 위하여 정부에게 정당한 존경, 복종, 봉사를 해야한다는 것, 즉 하나의 개인적 시민 의로서는 결코 행정적 권리를 받지 못하였고 다스릴 권리도 없으니 하나님 개인적 시민으로서 저들이 하여야 되고 또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안 할 수 없는 최선의 행위는, 그들의 양심에 반대되는 일을 관리들이 요구할 때에는 언제나 소극적 저항을 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제 14 장 시민의 자유


시민은 정부에게서 어떤 일정한 행사들을 개대할 권리가 있다. 인생은 누구나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의 내적 갈망이 있다. 정부는 시민들의 복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 만큼, 시민들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정부의 도움을 바랄 권리를 가졌다.


1. 시민이 누릴 자유


첫째, 백성(교회, 교육 기관, 상업 기관, 자선 기관들과 같은 국내 시민 단체들도 포함함)은, 저들의 정당한 권리들을 침해하려는 모든 사람에게서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둘째, 백성이 주장할 구 있는 특권은, '국내에 있는 그들의 특수활동 분야'에 관계된 것이다. 셋째, 국가의 임무는 백성의 '물질적 복리'에 관계된 것이다. 국가로서 할 일은, 백성이 인간 위신에 맞추어 친수로 확보할 수 있을 환경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넷째, 국가가 시민들을 위하여 보증하지 않으면 안될 특수한 종류의 특권은 그들의 '정신적 존재' 관계되는 것으로 곧 사람의 영혼의 자유 즉, 언론의 자유, 출판 자유, 종교 자유, 양심의 자유이다.


2. 전제적 지배자들 앞에서 취하여야 할 국민의 자유 옹호


독재적 폭군의 불법성 앞에서 백성들은 마땅히 반대운동을 실행하므로 국민의 권리와 자유가 옹호되게 하여야 한다. 그 방법은 합법적 대표들에 의한 헌법저항이며, 또하나 방법으로 외국의 통치자들이 간섭할 권리이다. 칼빈주의는 인류의 연대적 책임을 믿기에 여러 민족이 합하여 하나의 인류 가족을 이루기에 어떤 국가의 국민이, 자기 통치자들에게 압제와 박해를 당한다면, 다른 민족이 와서 도와 줄 의무가 있다. 기독자가 독재적 폭군을 반항함에 있어서, 하급 관헌들을 통하여 합법적으로 또 질서있게 할 수 있는 것쯤은 행해야 한다.


3. 정치적 자유를 추진시키는 칼빈주의의 요인


자연권설에 대하여 칼빈주의가 행하는 두 가지 일은, ⓛ 이 자연권이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 권위의 기초 위에 성립되도록 상호 관련시켰고, ② "자연권"설은 국가에 관한 다른 여러 가지 학설들 처럼 필요한 개혁을 가져올 힘이 없었던 것을 칼빈주의가 그것으로 하여금 폭군 앞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함에 유효한 것이 되도록 변화시켰다. 정치적 자유의 추진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원동력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념이다. 지배적 지위를 가진 이 사상이 칼빈주의자로 하여금 정치적 권위에 대한 깊은 존경심으로 준법하는 시민이 되게 한다. 그 이유는 그가 법에도 절대 주권자신 하나님의 권위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왕도 하나님의 은혜로 통치한다는 진리는 그가 폭군이 못되도록 막아서 독재적 세력을 견제하는 좌우에 날선 검과 같다.


마지막으로, 만일 칼빈주의자가 왜 정치상 자유의 유력한 원동력이 되었는가를 알려면, 위대한 선택 교리를 기억해야 한다. 이 교리는 역사상 칼빈주의가 성행될 때에 그 신봉자들에게 매우 강한 힘이 되었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줄로 인식하는 그들로 하여금 한층 더 고상한 도덕적 의무를 감당하게 하였다. 그들은 영원한 구원을 받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생활 전폭을 통하여 하나님의 대의를 옹호 할 사명을 위하여 택함 받은 줄로 믿었다. 칼빈이 창설한 '시민의 자유'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법과 질서의 노선으로 진행된다는 사실과 권위를 존경하는 주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특히 주의할 만하다.


제 15 장 사회 모든 부문의 주권


1. 역사적 서론


가정이나 과학 단체나 상업적 공업적 농업적 모든 기관들이나 교회는 인간 사회의 유기적 생활에서 자연적으로 발달되어 나오는 것들이고 그들의 기원과 존재와 생활의 원리가 국가에 의존된 것이 아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체 내의 고유한 원리와 문화 개발상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 저들의 이와 같은 '임무 수행'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저들에게 각기 분야에 대한 자주권을 주셨다. 인류의 창조주께서 저들에게 직접 주신 이 주권은, 국가도 침해할 수 없다. 칼빈주의자는 국가나 교회나 기타 사회의 모든 합법적인 세포 단체들을 하나님이 세웠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저들이 자기 몫에 태인 자주의 권리들을 가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사회의 세포 단체들에 대한 국가의 관계 문제는 전적으로 이렇게만 해결될 수 있다. 곧 하나님의 경륜과 성경교훈에 의하여, 이 단체들이 인류 사회에 점령하여야 할 자리를 잡는 대로 두고 침해하지 않음이다.


2. 사회 모든 분야의 주권


칼빈주의에 의하면, 사회는 서로 상관없는 개인들의 조잡한 집합체가 아니고,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 곧, 커다란 사회적 유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적 유기체는 인류의 복잡한 생활에서 생긴 독특하면서도 서로 관계된 많은 분야들로 구성되었는데, 그 각 분야는 하여야 될 임무와 하나님에게서 받은 명령이 있다. 그리하여 가정, 과학, 예술, 기술, 발명, 상업, 산업, 농업, 교회 같은 것들의 부문들과 기타 모든 분야들이 다 함께 일체를 이루는 사회에 속한다. 이 여러 분야들은 하나님이 권리를 주셨고,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라고 맡겼으며, 각자는 자체 안에서 주권적 권리를 가진다. 각 분야가 자기의 임무를 정당하게 이루고 있는 한 국가나 교회나 가타 어떤 사회 단체 같은 외부의 세력이라도 그것을 침해할 수 없다.


3. 정부와 사회 제부문


정부의 권위와 사회 여러 부문의 권위의 관계는 무엇이나? 이상적으로는 양자의 권위 사이에 충돌이 없다 양자의 다 공동 근원인 하나님에게서 생겨 나왔기에 모든 권위는 이것을 행사할 자에게 직접 부여된 것이고, 다른 분야의 매개를 통하지 않는다. 정치상 입법 사법 행정을 가지며, 육군 해군 경찰을 가진 국가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된 기관이요 죄악 때문에 존재하는 기계적 기관으로서 죄악의 난폭함을 제재하고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국가가 할 일 가운데, 소극적으로는 사회 여러 기관들로 하여금 그 천품적 임무에 있어서 정상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들을 국가로서 방비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저들의 문화 개발상 모든 과제를 성취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여러 가지 조건과 관계를 국가로서 추진시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회 모든 분야에 대한 정부의 임무는 ① 여러 부문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방지하며 또 저들이 맡은 신수의 임무를 할 수 있는 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할 조건들을 추진시켜 줄 것과, ② 개인과 약한 단체에 대하여 강한 세력이 권리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보호할 것과, ③국가의 유지를 위하여 정부는 백성에게서 필요한 인격 또는 재정적 의무를 요구할 수 있음이다.


제 16 장 교회와 국가의 관계


1. 성경은 교회와 국가의 규범


사회 생활의 각 분야가 자체의 영역 안에 관계된 사항에서 자주권이 있음을 인정하므로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고 또 사회의 각 분야도 자체를 위하여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한 진리는 이스라엘에게와 같이 직접으로 정치인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며 혹은 교회나 교회의 어떤 기관을 경유하여서 알려지는 것도 아니고, 오직 정부의 공무원과 백성의 양심을 통하여 그것이 알려진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영원한 원리들은 교회와 국가를 위한 치침이 되는데, 이 원리들이 저들의 공동 기초를 구성한다.


2. 국가와 교회의 차이


국가와 교회는 함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양자간에 서로 필요한 조화를 도모하며 공동적인 고상한 이상들을 함께 흠모하여야 될 것이다. 물론 교회는 국가 혜택으로 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그 근원 또는 왕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기원은 중생과 특별은혜에 둔다. 교회는 신령한 것을 취급하며, 또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과 신령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인류의 타락 이후에 존재하게 된 것으로서 자연적 생활에 그 기원을 가졌다. 이는 일반 은총부문에 속하면 현세 관계의 일들을 취급하며, 그 목적은 인간 사회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는 서로 조화하며 협력하는 관계이어야 한다.


3. 교회에 대한 국가의 의무


첫째, 국가가 일반적으로 종교에 대하여 중립적 태도를 취할 수가 없는데, 그것은 그렇게 되면 실제로 무신론 국가가 되어 버려서 사회 생활의 모든 분야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게 될 것이다. 국가는 하나님이 존재한 것과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가진 것을 알아야 된다. 둘째, 국가는 결코 여하한 종류이든지 국교를 건설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한 행동은 국가 자체의 정당한 영역의 한계를 넘어가는 행동일 것이다. 국가는 종교를 선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운 기관이 아니고 자기 영역 안에서 인류사회법과 질서를 유지하며 자연적 공동유익을 추진시키는데 있다. 국가로서 국교를 둔다는 것은 교회의 자주권들을 침범함이다. 셋째, 국가는 신령한 일들이 아니고, '세속적인 일'들에 한하여 교회에 관계할 권리를 가졌다. 그것은 국가가 교회의 외부에 속한 일들 그 건물과 기타의 모든 재산에 관한 일들에 대하여 관계 할 권리를 자졌다는 뜻이니 그 점에 있어선 그 나라 사회 안에 다른 분야의 기관들과 꼭 같은 법으로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넷째, 양심의 자유, 따라서 종교의 자유는 모든 시민과 불신자에게도 보증되어야 한다. 누구나 국가의 권위는 침해하지 않는 한 다만 그가 가진 종교적 신념 때문에 국가가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간섭할 권리는 없다.


4. 국가에 대한 교회의 의무


교회가 공동적으로 국가에 대하여 해야 할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문에 잘 말하여졌으니, 곧 "공의회는 교회 일 외에는 아무 일도 주관하거나 판단할 것이 없느니라, 나라에 상관되는 정사는 간섭할 바가 아닌데 혹 특별한 일을 만나면 그 나라 집정자에게 겸손히 품하여 상의하든지 혹 나라의 집정자가양심에 관계 한 일을 물으면 고의회에서 가히 충고할찌니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교회는 국가의 관리들과 평민들의 양심에 감화를 주므로 국가에 간접적으로 돕는 영향이 미치도록 정당하게 노력할 수가 있다. 교회가 국가에 끼칠 기독교적 감화운동은 몇 가지 방면을 통하여 진행되어야 한다. ① 교회는 복음을 전할 때에, 정치 상의 사리들을 위시하여 인생 생활의 모든 방면에 관계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들을 명백히 가르칠 것, ② 기독교인인 과학자들과 기독교대학은 기독교적 기반에 입각한 국민 생활관계의 성경진리들을 해명하여 전개시킬 것 ③ 기독교 출판물과 기독교방송과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들에 대한 일반민중의 호의를 얻도록 영향을 끼치기 위하여 노려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제 17 장 국제 주의


1. 역사적 서론


국제주의란 것은, 한 국가로서 다른 국가에게 대하여 혹은 일반적으로 여러 국가들에게 대하여 가질 관계 문제를 취급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외국 관계는 한 나라 안에서 개인들 끼리나 모든 기관들끼리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또는 법률적 모든 규범과 규칙에 의하여 조정되어야 한다. 이 국제간 상호 관계에 있어서 모든 국가를 지배하는 법전은, 국제법이라고 한다.


2. 고대와 중세기


옛적 헬라 이전 시대, 고대에도 세계적인 대제국들이 있었지만 그 나라들은 국제주의의 이론적 연구에 참고 될 만한 것을 주지 못한다. 이들은 기껏해야 국가주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 시민이라고 자처한 소크라테스는 헬라인의 국가주의에서 예외이었다. 세계적 정신은 제일 먼저 처음으로 스토익(Stoics)학파가 저희들 가운데서 대대적으로 발전시켰다. 저들은 이성에 기초하여 만민을 지배해야 될 우주적 자연법에 대하여 말하고, 세계 만민을 위하여 오직 유일한 국가, 유일한 법률, 유일한 정의 체계가 있어야 될 것을 주장하였다. 이 학설은 헬라 사람보다 법률을 애호하는 로마인에게 더 호의를 샀다. 로마 제국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나중에 그것을 정복한 때에는 기독교가 벌써 확고한 세계적 종교가 되어있어서 기독교는 인류 기원이 동일하고 모든 기독 자들이 형제라는 교리에 의하여 국제주의의 정신을 크게 도왔다. 중세기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기독교는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치적 기관까지 통솔하여야 된다는 견해를 일반화 시켰다.


3. 근 대


그러나 결국 국가들이 로마 제국과 정치적으로 독립됨에 따라서 세계적 단일 국가주의는 무너져 버렸고, 또 그와 동시에 국제 주의 정신도 독립된 국가들의 국가 정신이 대두되었다. 1648년에 웨스트팔리어(Westphalia)평화 조약은, 독립 국가들의 인정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세계적 단일 제국주의 사상의 종막을 고하게 하였다. 국제주의의 정신은 아직도 제18세기 내지 제19세기에 이르기까지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독립국가들의 건설에 따라, 국가주의에 대한 새 견해가 여러 가지 새로운 사상들과 동반하여 나타났다. 이때에 독립 국가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유력한 요소는 정의가 아니라 세력 균등이다. 그리고 국가가 최고의 단위가 되며, 자율적이고 그 이상 아무 권력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는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충분히 자율적으로 움직였다.


현대의 역사를 고찰해 보면, 국제주의 정신이 다시 증진되고 있다. 국가들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상호 관련성은 보다 유효한 국제적 관계 조정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한다. 칼빈주의자로서는 한편으로 치우친 국제주의를 찬동할 수 없고, 한편으로 치우친 국가주의도 찬동할 수 없다. 곧, 우리의 국제적 관계를 무시하는 국가주의도 우리는 찬성할 수 없고 개체주의를 무시하는 국제주의도 찬성할 수 없다. 양자가 다 금일의 문화적 생활을 적당하게 발전시키는데 필요하다.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 목표는, 모든 개체 국가들을 배제시키는 하나님의 세계적인 제국이 아니고, 각국이 자유로이 자체의 문화를 발달시키며 국제법에 의하여 정당하게 관련되며 조정하는 가족연한 국가군이다.


제 18 장 국제주의 국제연합, 칼빈주의


국제주의 사상에 일어난 모든 긴급한 문제와, 주장되는 여러 가지 견해에 직면하여, 칼빈주의적 기독자는 어떠한 처지를 취하여야 될까? 우리가 필요한 것은, 일정하고 견실한 원리이다. 우리 생활 전체에 있어서, 신앙과 본분의 법칙이 되는 성경은 이 원리들을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역시 우리의 지침이라고 생각해야 된다.


1. 칼빈주의자가 보는 국제주의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원리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성경을 상고한다면, 유익하게 인용될 수 있는 성구들이 많으나 훨씬 더 가치 있는 재료는 국제 문제 취급에 관하여 전체 성경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기본적 원리들을 연구하는 가운데서 얻게 될 것이다. 첫째.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행 17:26)"라는 성경의 말씀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여러 인종들을 혹은 여러 민족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부부를 창조했는데, 거기서 이 지상에 사는 여러 민족들이 생겨 나왔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피조물로서 형제적이요, 다 같이 한 혈맥과 공동적인 피조적 기원에 의하여 서로 관계되어 있다. 둘째, 여러 나라 민족들이 비록 인종 단일성은 가졌다 할지라도, 성경에 의하면, 개체국가의 형성이 순리적인 것이 확실하다.


칼빈주의자들은 인류가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무죄 세계에서는 각 민족의 다양성과 전 인류의 통일성이 함께 정상적으로 발달 되었을 것이다. 즉 인류 중 각 개체 민족들이 각기 특이한 문화개발의 임무에 종사하였을 뻔 하였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전 인류를 위한 문화적 이상의 실현을 위하여 모든 다른 민족들로 더불어 조화성 있게 협력하였을 뻔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런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통하여 설립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실현도리라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 죄악 세상에서 인류의 선한 질서를 세우려고 일반은총에 의하여 법률로 다스릴 세계 관리의 기관을 시설하셨다는 것을 믿는다.


2. 칼빈주의자가 보는 국제연합


지금의 국제연합기구에 대하여 칼빈주의 자의 생각할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그 기관의 명칭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그것이 참으로 모든 "국가의 연합"을 목적한다면 그것은 순전한 성경적 이상을 포함하는 것이며 우리의 찬동과 지지를 요구할 만하다. 위에 말하는 국가의 연합이란 것은 곧 각 국가로 하여금 그 자체의 문화적 임무를 이행하는데 필요한 그 고유의 주권을 보유하게 하고 그와 동시에 다른 방면으로 가족연한 국가군에 대한 공동 임무에 협력할 책임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도 시일이 지나감에 따라서 개체 국가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이 무시를 당한 바벨탑에서와 같이 또 하나의 무신론적 초국가 된다면 그때에는 그런 국제연합은 소망이 별로 없고 지지할만한 것이 아닐 것이다. 만일 국제엽합이란 것이 통일된 하나의 세계적 제국을 세우므로, 각 개체 국가에게 하나님이 주신 특징들을 제거하는 용광로와 같다면 그것은 우리로서 원할 바 아니고 두려워 할 바이다.


제 19 장 국 제 법


칼빈주의자는 "국제 연합"이란 문구가 지적하는 것 같은, 국가들끼리의 관계를 찬성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민족들로 단일한 생활 표준에 맞추어 살도록 강요하여, 모든 민족들의 특성들을 없애 버리려하는 통체적인 세계적 제국은 찬성하지 않는다. 또 그는 모든 민족들이 서로 견고한 연결이 없는 절대적 개체 국가주의도 찬성하지 않는다.


1. 국제 법정이 있을 필요


국제 연합은, 중앙 행정기구인 어떤 종류의 국제 법정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 그런 기관에 의하여 이 연합체의 사물를 관리하며 진행할 수 있다. 이러한 중앙 기구는 순전히 자문 기관 또는 중재 재판 기관격으로 행사할 수 있고 혹은 그것이 어느 정도의 입법, 행정, 사법의 권한을 행사함으로 그 기구의 결정들이 구속력 있게 되게 할 수 있다.


2. 국제 법정에 대한 칼빈주의자의 태도


1934년에 화란의 반혁명당 강령 중에 삽입된 새 조항 제18조는, 화란 칼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국제주의가 어떤 것인지 밝혀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란 나라가 가질 모든 외국과의 관계들에 대하여, 반혁명당은 이렇게 가르친다. 곧, 이 관계들도 하나님이 세상 국가들을 위하여 주신 제도들에게 다스림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들은, 다음과 같은 조건 밑에서 성립되어야 할찌니, 곧 화란 나라가 손색없는 독립을 그냥 유지하면서, 국제 연맹에 참가하여 협력하라는 것이다. 국제 연맹에 협력할 목적은, 국련의 권리가 발달되게 하며 그 결과로 국가들 사이의 쟁의를 평화적으로 해결시키는 동시에 또한 불의한 세력을 필요에 따라 국련의 무력 행사로 해결하게 된다. 사회를 발달시키며 국가들 사이의 법률과 정의에 해당하는 협정적 교역에 의하여, 영적 또는 물질적 복리를 일반 민중에게 가져오게 함이다."


3. 국제법의 기초


국제법이 의존하는 근거에 대한 의견이 백출하나, 제18세기 중엽 이전에는 국제법에 세 가지 근원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로 여하한, 정부의 의사에 대하여서든지 독립자존하는 법의 일반적 원리들이 있다고 하며 그 원리들이 모든 국가에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둘째로, 보편적 풍습적 법이란 것이 존재한다 하였고, 어떤 풍습들은 확립되어서 누구나 다 지켜야 될만한 법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셋째로, 모든 국가가 지키기로 서로 약정한 성문법이 곧 그것이라고 하였고 이것은 모든 국가들을 다 구속할 수 있는 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4. 국제법의 내용


무슨 일들이 세계 법정 혹은 국제 연합의 영역에 속하는가? 이미 전정에서 논한 것과 같이 대체로 북미 합중국과 같은 연방정부의 임무, 세계 법정의 임무는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연방 정부의 경우와 같이 국제 연합기관에 있어서도 그 의무는 두 가지 방향으로 되어 있다. 곧 다수 국가간에 국제정의를 수행함과 일반적 공동 복리를 증진시킴이다. 일반적 공동 복리란 것은 모든 국가가 독립적으로 할 수 없는 문화사업을 민활히 성취시킴과 같은 것이다. 반면에 개체 국가에 속한 일이나, 혹은 사회의 어떤 문화 단체에 속한 일은 다 국제엽함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나라든지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주장할 만한 권리들은, 첫째, 각국의 자체 보존과 독립의 권리를 소유하였다. 둘째, 자아를 발전시킬 권리들을 소유하였다. 셋째, 국가의 존엄성을 주장한다. 국제법 실시 문제에 관하여 말하자면, 외국에 거주하는 어떤 나라 시민의 권리나 의무에 관한 법과, 국가 단위로 가질 각 국의 상호 관계에 대한 법으로 분간하여 말할 수 있다. 국가마다 외국에 대사와 공사를 설립하여 외교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으며, 이런 외교를 통하여 그 나라의 권리와 의무가 조절된다. 국가마다 타국과 조약을 체결하며 협정을 맺으며 조든 맹약을 결성한다. 국제적 관계들을 지휘하기 위하여 공약된 일반 법규들을 국제 법정이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제 20 장 전쟁사(戰爭史)


전쟁은 가장 무서운 악(惡) 가운데 하나이다. 전쟁은 어느 민족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생명과 재산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전쟁 후에도 많은 빈곤, 과부, 고아 등을 남겨 놓는다. 그리고 그것은 문명의 필요한 많은 선과 소원되는 발전을 막어 버린다.


1. 전재의 기원은 죄악의 기원만큼 오랜 것임


전쟁의 기원은 거의 인류의 기원과 같이 오래다. 즉, 죄악의 기원과 같이 오랜 것이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전재의 이유를 성립시킨 두가가 생겼다. 첫째는 이 세상이 반대되는 두 세력의 대립, 곧 의의 세력과 악의 세력, 하나님과 마귀의 대립이다. 이 두 세력은 결코 조화되어 공존할 수 없으며, 하나가 완전히 항복할 때까지 계속하여 싸울 것이다. 둘째로는 인생 생활 그 자체를 부도덕하게 만드는 죄악의 부패성이다. 그 부패성의 약영향은 개인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단체들과 또는 국가들 사이에, 증오심과 이기주의와 투쟁이 생기게 한다. 그러므로 죄악과 그 독소가 우리에게 있는 한, 전쟁이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면할 수 없다.


2. 好戰主義者와 反戰論者는 어느 단체에나 있음


전쟁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보면, 어느 단체를 물론하고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전쟁을 찬성하여 그것을 남성적이고 또 영웅적이라고 하나, 또 전적으로 죄악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기독 신자와 불신자 간의 분명한 한계선을 그을 수가 없다. 호전주의자들과 반전주의자들은 다 같이 고대 이방 민족들 중에나 초대 기독교인들 중에 있었다. 금일에도 비기독교인들 중에나 신자들 중에 다 함께 발견된다. 교계에 주도적 위치에 점령하였던 후대의 지도자들, 이를테면, 암브로시우스,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빈 등은 어디까지나 전재을 주장하는 편도 아니었고, 반대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들은 국가가 어떤 경우에 일정한 제한 안에서 전쟁하는 것을 정당시 하였다.


3. 인생관과 전쟁에 대한 태도를 결정함


전재의 옹호자와 반대자가 다 같이, 인류의 모든 계급과 역사상 모든 시대에 있었다. 그런데 전쟁에 대한 사람의 태도는 대체로 자기가 가진 인생관에 따라서 결정된다. 몇 가지 실례로 설명하여 보자면,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이 세상은 절대 사상의 부단한 과정이라는 관념으로 철학을 출발한다. 그의 견해는 국가는 그 자체 가운데 가족과 사회를 결합하고 거기서 자유와 도덕도 가장 완전히 실현하며, 또 사실상 그것은 인간에게 알려진 가장 고귀한 조직체인 것만큼, 숭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하면서, 국가는 그 자체가 소유하고 또 실시해야 할 사상을 실시하기 위하여는 권력을 행사하여야 하고, 전재은 국가의 자체 실현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므로 찬양하여야 한다고 한다.


다윈과 핵겔(Darwin, Haecekl) 같은 유물론적 진화론자들의 견해는 인류는 야만 상태에서 진화한 것이기에 인류가 생겨나고 문명이 진보됨에 따라서 전재은 점점 적어져서 나중에는 인류의 야만성을 아주 벗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전쟁이란 것은 쓸데없는 골동품과 같이 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적 처지에서는 16, 17세기의 재세례파가 절대 반전론을 옹호하였다. 이들은 정부는 교회와 아주 다른 이 세상에 속한 것이며, 그리스도 신자는 딴 세계에 속하여 있으므로, 무력을 사용할 수 없고 전쟁에 참가할 수 없으며, 정부에 충성하겠다고 맹세도 할 수 없고 정부의 공무에 종사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어떤 재세례파 신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부의 일체 행사와 기독교국의 정부나 공무원의 필요성도 부인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의 진영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이 재세례파의 견해에 가까운 처지를 취하고 있다. 특별히 이들은 사회 개혁 희망을 전혀 그리스도의 전천년 재림에만 고정해 둔다. 기독자로서 교육적, 사회적, 정치적 생활에 누룩의 역할을 하려는 노력은 전혀 무익하다고 생각하고, 평화적 방법이나 혹은 전쟁의 방법으로 국제적 문제들을 해결하여야 한다는 과제 앞에서 저들의 태도는 냉정하다.


현대주의 신학자는 근본주의와 달라서 기독교의 사회적 정치적 방면을 그의 가장 중요한 관심거리로 여긴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감화나 혹은 헌신된 신자들의 노력에 의하지 않고, 순전한 자연주의적 기초 위에서 인간의 자력에 의하여 인류 사회가 개혁되기를 바란다. 자연주의적 또는 대체로 진화론적인 근거 위에서 다수의 현대주의의 신학자들은 미래에 전쟁이 없는 세계 곧, 유토피아가 있을 것이라는 이상에 사로잡혀 있다. 저들은 반전주의 정신을 찬성한다.


4. 전쟁 문제에 대한 관심의 부흥


근년, 특히 20세기의 초엽부터 전쟁 문제는 전면에 나타나서 매우 자연스러운 이유로 광범위한 주의를 끌게 되었다. 위대한 발명 시대라고 할 수 있는 16세기 이후, 국가들은 이전 시대보다 더욱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국가들 사이의 근본적 이상과 취미의 차이로 인한 충돌은 , 저들 사이에 전쟁의 유력한 동기가 되어 왔었는데, 그 예로 민주주의적 이상을 추종하는 국가들과 전체주의적 이상을 신봉하는 국가들 간에 일어나는 충돌 등이다. 이런 종류의 사실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 회피, 또는 그 해독 방지, 국가관 평화 촉진 등의 가능성에 대하여 더욱 치밀히 연구하도록 추진시켰다. 1899년에 열린 해그(Hague) 평화회의 이래, 비공식적인 평화 회의자들의 회담과 국가간의 공식적인 평화 회의 형식으로 무수한 평화 운동들이 일어났다.


제 21 장 성경과 전쟁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지도하는 원리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성경을 상고할 때에, 우리는 당장 딜레마에 직면한다. 그것은 전쟁에 관한 많은 성구 중, 어떤 것들은 전쟁을 찬성하고 또 다른 것들은 전쟁을 심히 반대한다. 그렇다면 전쟁에 대한 두 가지 모순되는 듯한 구절들을 어떻게 설명하여야 되겠는가? 우리는 이 난제를 해결하려면, 이 성구들이 각기 관련되어 있는 각이한 상황을 연구하여야 된다. 전쟁에 대하여 성경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하게 된 원인은, 그 관계 구절들이 신국안의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개인 자격으로 취할 태도를 말한 것인지, 혹은 정부에 대한 책임에 있어서 공무원들의 자격을 취할 태도를 말한 것인지에 달려 있다. 그 예로  출 20:13에 "살인하지 말라"고 한 말씀은, 모든 살인을 다 금한다. 이것은 개인 자격으로 지킬 계명이다. 또 하나 롬 12:19에서는 기독신자가 개인 자격으로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였으나, 여섯절을 지나가서 그 다음 장에서 정부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롬 13:4)고 말하였다.


1. 외관상으로 모순된 듯이 보이는 구절들의 해결


악을 저항하는 여부의 문제에 있어서, 신자가 개인 자격으로 취할 행동의 원리와 국가가 취할 임무와의 사이에, 성경은 분명한 경계선을 긋는다. 이 구별의 이유는 천국은 그 내적 조직과 관계에 있어서 義와 기쁨과 평화의 나라이다. 그 나라의 일원으로서의 시민들은 의와 평화의 자녀들이니, 저들의 사적관계에 있어서는 선으로 악을 이기고 무저항 주의로 권력을 이겨야 한다. 그러나 전쟁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문제는 이 죄악 세상에서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도 정의가 확보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쟁의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실패된 후에, 악이 계속 전진하는 것을 제지하는 유일의 길은 무력 행사밖에 없는 때가 오는 법이다. 이러한 현실 아래,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무력에 의한 정의의 절서 유지를 개인 시민에게 맡기지 않고 정부에 맡기셨다.


신자의 개인 생활에 있어서 실행해야 될 교훈은, "네가 친히 원수 갚지 말고 노하심에 맡기라"고 한 말씀이다. 그러나 정부는 그 특별한 사명으로 정의 수행의 임무를 가졌고, 또 이 세상이 악의 침해를 받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에 대한 칼빈의 의견을 보자면, "개인의 범죄를 법적 차원으로 제재할 뿐만 아니라, 적국의 침략을 막는 전쟁에 의하여 영토를 보호하기 위하여, 주권자들에게 무장을 하게 한 것은, 자연적 공평의 원리에서 또는 직무상 성질에서 명령된 바이다. 또 이러한 전쟁이 정당함은 여러 성경 구절들에서 성령이 증거하시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악을 벌하는 임무는 개인 시민들에게 맡긴 것이 아니고 정부에게 맡기웠다. 그 일을 위하여 정부가 검을 가진 것이다.


2. 정당한 전쟁


이 세상에 전쟁의 원인을 보면, 첫째로, 이 세상에 있는 두 가지의 반대되는 원리들의 대립이다. 다시 말하면, 정의와 불의, 진리와 오류, 하나님과 악마가 각각 서로 대립한다. 이러한 원리들은 결코 조화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 둘째로는, 전쟁은 다툼이나 탐욕이나 또는 진리와 정의에 반대되는 그릇된 이상에서 생길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전쟁은 한편에나 혹은 양편에 다 악한 동기들이 있어서 추진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어떠한 때에 전쟁이 정당한지를 결정할 수 있는 원리를 가질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정부를 세우신 중요 목적, 곧 정의, 질서, 보존이 다른 모든 방법으로는 이를 수 없을 때에, 정부로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정당한 경우에도, 때로는 그 전쟁이 부정당한 것일 수도 있는데, 다음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들을 보겠다. 정의의 보존을 위하여 반드시 불의한 반역적 행동을 진압하여야 할 경우, 한 국가가 다른 국가와 전쟁을 안 할 수 없는 경우, 박해를 당한 나라가 민족을 원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 불의한 침략자를 대항하는 국가 연맹에 참가할 수밖에 없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정부가 정의를 적당히 옹호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때에만 정당하다. 마지막으로 정당한 전쟁의 성격을 정함에 있어서 제의되어 온 또 다른 표준은, 성경에 하나님이 분명히 명령한 전쟁들 곧,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들만은 정당한 것들이라고 한다.


3. 交戰者들의 정당한 행동


전쟁이 합법적이 되기 위하여서는 정당한 정부에 의하여 또 정의를 보존할 필요를 위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정당한 전쟁을 위한 두 가지 요소 이외에 세째로 고려할 점은, 전쟁하는 동안 교전자들의 정당한 행동에 관한 것이다. 싸우는 가운데서 교전하는 모든 국가가 얻은 경험대로 가르치는 것은, 평시와 같이 전시에도 효력있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다는 것과, 존중히 여김을 받아야 할 인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된다. 전시에 교전자들은 인도적으로 싸워야 하며, 또 흔히 일어나는 것과 같이 자기 자신들을 짐승과 같이 타락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 외에도 교전자들이 지켜야 할 정당한 행동에 관한 주의사항 이외에, 전쟁의 방식의 타당성에 관한 윤리적 문제들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4. 정당한 평화의 결말


칼빈주의자가 전쟁에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종말점은 승리할 때에 따라오는 평화의 종막을 취급하는 점이다. 만일 전쟁이 다만 정의의 옹호 때문에 싸워진다면, 전승 국가가 그 적국에게 복수를 하거나 그를 파멸하거나 혹은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승리를 오용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공정한 평화를 수립하고 정의의 보존을 확보하는 것이어야 된다. 그와 같은 목적이 달성된 때에 전승국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요, 그 이상 더 무엇을 정당하게 구하지 말아야 한다.


5. 생명력 있는 기독교 필요


앞서 논의한 것에서 곧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 국가들이 기독교 정신으로 보급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진실하게 인정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 사실로 얼마나 생명력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일은 정당한 전쟁의 이유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식별하는데 뿐만 아니라, 전쟁을 정당하게 수행하고 또 공정한 평화적 결말을 맺도록 하는데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자가 이 세상에 소금과 빛의 직분을 행하는 의무는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개인에게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아직 구주이시다. 인류와 국가들이 저들의 뜻을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의 성령과 그 자신에게 복속시키기를 원하지 않으면 어떤 무서운 戰憟할 일이 인류 사회에 생길 수 있다.


제 22 장 기독교인 된 국민과 전쟁


1. 전쟁과 이전의 신자의 의무


전쟁에 대한 기독교인의 첫째 의무(사실상 가장 중대한 의무)는 전쟁이 생기기 전인 평화시의 행동에 관한 것으로, 전쟁을 방지하는 것이 확실히 신자의 의무이다. 기독신자들은 인류에게 알려진 것과 같이 지상에서 가장 완전한 평화 주의의 단체에 속하여 있으며, 전쟁을 방비하는 가장 유력한 무기로 신자의 복음을 가지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옛날에 선언된 바와 같이 금일에도 위대한 평화의 왕이요, 인류 사회의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평화주의자들의 인도주의적 선전이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므로 전쟁 정신을 항전할 것이다.


전쟁 방지에, 기독신자는 친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검을 자기 검으로 사용하는 십자가의 용병이 되어야 한다. 그보다도 한층 더 가치있는 것은,  그가 친히 자기 생활 전체에서 자기의 가슴 속에 깊이 전쟁 정신을 진압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보다 더 확실한 기독자가 되어야 한다. 평화의 왕이요, 동시에 진리와 의의 왕이신 그의 영을 충만히 받으면, 그는 이 세상에서 평화와 의를 촉진하는데 가장 강력한 주의 사신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그렇게 받아 흡수한 때에, 그는 진정한 평화주의자가 되어 이 점에 있어서의 소금이 되며 이 암흑한 세상의 빛이 되라는 소명에 응할 수 있다.


2. 전쟁 중에서의 신자의 의무


국가에서 전쟁의 선전포고가 있는 후, 신자는 자기 의무를 바로 결정하기 위하여 몇 가지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하나님을 위하여 위에 있는 권세를 복종하여야 되므로, 시민은 정부에 순종할 의무를 가졌다는 일반적 원리를 기억함이 필요하다. 둘째, 국민에 대한 정부의 권위가 절대적이 아니고 일정한 제한을 가졌다는 것이다. 셋째,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정부의 의무요 개인 국민의 의무는 아니라는 것이다. 즉 기독자는 참전하게 될 가능성 있는 그 전쟁이 자기로서 양심적으로 참전할 수 있는 정당한 전쟁인지를 생각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신자가 그 전쟁을 부정당한 것으로 결정하고, 전쟁에 참가한다면 하나님께 범죄할 것이라고 생각될 때에만, 정부보다 높은 권위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의미에서 자기를 다스릴 권위를 가진 정부에게 순종하기를 양심적으로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양심적 참전 거부자


어떤 시민이 어떤 일에 대한 정부의 요구를 보다 높은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문제시할 때에, 그 정부는 그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정부로서 정권을 너무 지나치게 사용하지나 않았는가, 또는 확실한 하나님의 금령이 붙은 일에 월권하지나 않는가 하고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정부는 그 국민의 양심을 존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된다. 일반적인 양심은 인간의 도덕적 의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 도덕법칙은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에서 분명하고 객관적인 해석을 발견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양심이란 인생에 대한 최고 판단자인 하나님의 도덕적 법칙에 인생이 구속되어 있는 것을 스스로 앎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양심의 자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반대들이 아무리 진실 할지라도, 그것들이 모두 다 반드시 양심적 반전론으로 인정될 수는 없다. 유물론적 사회주의들과 공산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도 전쟁에 반대할 경우가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권위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혹은 인도주의적 근거에서 전쟁을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에 대하여 정부는 어떤 시민들이 법을 해석함에 있어 정부와 다르게 단지 주관적 의견들을 가진다고 하여, 결코 그들의 준법 의무를 면하게 해 주어서는 안된다. 양심은 단지 주관적 의견이 아니고 항상 정부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하나님 말씀)의 근거를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 때문에 정부의 권위가 양심의 권위 앞에선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양심적 반전론자들이 병역 면제를 주장하는 근거의 세 가지 종류를 보면, 어떠한 전쟁을 막론하고 집총을 금하는 종교 단체의 회원인 관계로 병역 면제를 요구한다. 이러한 종류는 신우파(神友派, Friends)에 속한 자이다. 교파론적으론 전쟁을 비난하지 않으나 양심적 반전론을 가진 교인들의 권리를 공공연하게 보증하는 종파들이다. 이를테면 聖公會가 그러하고 감리교파도 어느 정도 그러하다. 칼빈주의의 신앙을 신봉하는 교회, 개혁파와 장로파는 위의 두 종류 중 어느 하나와 같이 분류될 수 없다. 칼빈주의 신앙 소유자는 "정부가 정당하고 필요할 때에는" 전쟁을 해도 무방하다고 주장한다. 자기 교파의 의견은 관계할 것 없이 정당 여부를 개인이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전론자 등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교회는 침례 교회의 교인이다. 이러한 양심적 반전론자들이 군대 복무를 거절하고 정부는 국민을 군무에 소집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할 때, 정부는 양심적 반전론자를 군대 봉사에서 면제시키지 말 것이나, 직접 일선에 나가지 않는 의무를 이행하도록 하는 것으로 해결하여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정부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의 양심을 유린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반면, 시민은 하나님께 대한 숭엄한 양심을 어기어 가면서 전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에 그 시민이 취할 태도는 오직 한 가지,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산헤드린의 종교와 정치적 당국자들 앞에서 대답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는 각오로 어떤 벌금형이나 투옥, 사형이라도 받을 각오를 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가의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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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미터의 "칼빈주의"


제 1 장 칼빈주의의 기본원리


칼빈주의란, 죤 칼빈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사상체계를 가리킨다. 칼빈주의는 칼빈이나 칼빈 주의자들에 의해 주장된 의견들의 집합체나 사상의 총화가 아니고, 하나의 기본원리를 공동 토대로 하고 있는 유기적 총체이다. 신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상체계이다. 그 사상의 범위에 신학과 동시에 정치, 사회, 과학, 예술 등에 대한 사상도 포함한다. 이 사상 체계는 인생관 우주관 세계관을 제공하는 것으로 사실상 지금까지 인간에게 제공된 몇몇 기본적 사상 체계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다.


칼빈주의의 기본원리는 두말할 것없이 그것은 바로 칼빈주의 자들의 복음적 교리 속에 게재되어 있다. 이 교리들은 단지 추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살아 있어 생기있는 진리로 취급된 것이니, 이 진리들은 칼빈주의의 기본 원리가 하나님 교리에 관한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곧 '하나님 중심 사상'에 기본 원리들 두고 있다. 즉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이란 성경 말씀의 진리를 생활 원리로 삼고 실현하려고 한다.


반면에 칼비주의의 기본원리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 중에서 오류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권을 어떤 활동에 제한하는 설은 칼빈주의의 근본원리를 말하는데 정당하지 않다. 선택 혹은 예정교리를 칼빈주의의 원리하고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말이다. 하나님의 사람의 영주처를 숙명적으로 제정하셨다고 믿는 사람이 바로 칼빈주의라고 생각하는 견해는 곧 버리지 않으면 않된다. 칼빈주의의 예정론과 숙명론은 오직 한점에서만 일치되나니, 곧 "양자가 만사의 결과에 절대적 확정성이 있는 줄로 생각함이다. 그러나 야자가 그 확실성의 근거, 확정성을 확보하는 세력의 성질, 예기된 목적들, 또는 그 확실성이 인간의 이성과 양심에 미치는 영향에 있어서는 서로 같지 않다."


예정론이 칼빈주의의 기본 원리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예정론은 항상 사람에 관련된 것이요, 또 그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예정은 단지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을 취급하는 것이고 타락하기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처우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예정은 도덕적 실존들의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활동에 국한하여 말하고, 자연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난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상에 있어서 그런 제한을 알지도 못한다. 어디서든지 그는 하나님 사상을 앞세운다. 그러므로 이론적 견지에서, 예정은 칼빈주의의 기본원리로 생각될 수 없는 것이 판명된다.


다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칼빈주의의 기본원리라고 하는 또 하나의 의견이 있다. 이는 칼빈주의의 집단에서 볼 수 있었던 공통된 의견이 있다. 곧 하나님은 가장 높이 영화롭게 되셔야 하며 사람은 제일 낮아져야 된다는 것이 칼빈주의의 체계라고 결정되어 왔다. 이러한 주장에는 매우 중요한 진리가 있다. 칼빈주의자는, 인간의 전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제일 되는 목적으로 여겼다. 그러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하나님의 활동을 너무나 크게 제한하였다. 칼빈주의자는 생의 목적에서만 하나님을 포함할 뿐 아니라. 만물의 기원과 만물의 섭리적 통솔을 생각할 때에도 역시 하나님 중심르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 추구의 의의만 가진 술어는, 칼빈주의의 기본 원리로 지시되기에는 충분한 내용을 가지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칼빈주의 체계에 기본적 의의있는 다음 몇가지 사실을 가르쳐 준다. 곧, ① 성경에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은, 만물 위에 계신 주권자이시며 창조된 만물과는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는 사실과 ② 하나님과 그의 형상을 가진 인간과 관계, 곧, 종교란 언약의 성질로서 그것이 벌써 의로운 상태에 있는 원인(原人)에게는 특별히 계시되었다는 사실과 ③ 그러나 금일의 세계는 순결한 상태에 있지 않고 죄악의 세계로 변하여 버렸다는 사실이다. 타락된 세계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의 사실을 주장한다. 곧 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되었고, 또 인간이 지배하도록 되었던 세계도 인간의 범죄 결과로 오늘날 부패한 사태에 처하여 있다는 사실과 ② 죄의 대가로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 왔다는 사실과 ③ 그러나 절대로 주권자인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중보자,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개인과 사회가 변화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가설들이 철학적 체계의 전제가 되는 것처럼 성경에서 얻은 이 모든 훌륭한 사실들은, 칼빈주의 체계의 전제가 된다. 이 사실들이 여러 가지 분맥으로 칼빈주의 체계 속에 흐르고 있으며 또 주관한다.


제 2 장 칼빈주의 체계에서 성경의 위치


칼빈주의 체계가 '하나님'을 '모든 것의 주재자' 라고 보는 사상이 라면,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이 원하는대로 만사를 관찰하며 만사에 신의를 나타내려고 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여기에서 칼빈주의자의 체계와 생활에는 성경이 중심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생활 '원리(canon)'로 삼는다. 또 '신앙'의 법칙이요(그의 지성을 인도함), 또 실 '생활'의 표준이다(그의 매일 생활을 결정함). 실재로 하나님이 자기에 대한 두 가지 계시, 곧 두 책을 주셨으니 하나는 자연에 관한 책이요, 다른 것은 성경이다. 이것들이 하나님에게서 온 계시라고 주장하는 것이 칼빈주의자에게는 중요한 원리이다.


자연의 책이라고 하면 그것이 칼빈주의자에게는 단순히 광물, 동식물, 사람 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적 대상 그 자체 이상으로 무엇을 더 알게하여 주는 것이다. 이 모든 자연물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또한 역사 속에서 그것들의 운동 일체를 주장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과 역사속에 인간 자신도 포함켜야 한다. 칼빈주의자는 우주관과 인생관을 전개시켜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또 한권의 책이 있으니 그것은 성경이다. 본래는 새 자연의 책만 있었는데 거기서 아담이나 구속받은 사람은 자기의 마음과 자기 주위에 둘러 있는 자연계에서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이미 보았으며 장차 영원한 세계에도 그렇게 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범죄로 특별계시인 둘째책 성경이 필요하였다. 이 책은 우리에게 구원 얻는 길은 가르쳐 주는 것 외에 신앙과 생활의 원리들을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칼빈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절대적이라고 주장한다.


제 3 장 칼빈주의 체계에서 신앙의 위치


초자연적인 것들을 다 부정하는 신신학자는 하나님을 믿을 여지가 많지 못하다. 그러나 칼빈주의자에 있어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매우 광범위한 부분을 차지하며 실제로 그의 생활에 있어서 결정적인 위치를 점령하게 된다. 칼빈주의자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믿는다. 이 하나님은 자연계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 행동, 곧 계시와 영감으로도 자기를 계시하신다. 신신학자들은 경험에서 종교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들끼리 모아서 분류한 다음 중요한 것들을 남겨놓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내버릴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그가 순수한 귀납적 또는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종교의 순순한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하고 그 결과는 과학적으로 옹호될만한 종교가 될 것이라고 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것들을 알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그 중에서 많이 택하는 한가지 방법은 자연과학의 귀납적 방법이다. 이것은 비교 종교학적으로 이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다. 비교 종교학을 연구하여 여러 가지 탁월한 견해를 발견해서 참 종교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확신에 이르기에는 어렵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기독교 변증론과 증험론이다. 이 방법은 기독교의 하나님은 참되신 하나님이요, 성경은 그의 계시오, 또 기독교는 참된 종교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전개시킬 수 있는 논증을 찾는 것이다. 이 변증론적 논증은, 역시 신자 자신에게 자기의 신앙의 합리성에 대하여 충분한 증거를 제공하여 준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인 논증에서나 혹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명 등에서 너무 기대 하지 말 일이다. 왜냐하면 최후의 결정은 개인 자신의 평가에 의존하므로 항상 의견의 많은 갈랫길을 가지게 할 여유가 있다. 신앙은 인간 자신의 통찰에 근거하여 무엇을 참되다고 함이 아니고, 다른 사람 곧, 하나님의 증거권위에 근거하여 그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 신앙은 이 한가지 중요한 점에서 일반적 신앙, 혹은 역사적 신앙과 같지 않으니 곧, 어떤 진리에 대하여 지적으로 승인하는 이외에 인격적 신뢰의 요소도 포함한 점이다. 신앙 그 자체는 하나님에게 근거한 것이다.


제 4 장 균형적 체계인 칼빈주의


칼빈주의의 종교를 연구할 때에, 칼빈주의자가 믿는 서로 다른 교리들을 강조함에 있어서 적당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칼빈주의자는 이 모든 것이 기독교의 중요한 요소임을 인정하나, 그 중 어느 하나를 강조하여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을 우주의 주권자'라고 하는 진리를 신학의 중심으로 삼을 때에는 모든 다른 교리들은 정당한 곳에 놓여지고 또 적당히 강조될 것이다. '예정'과 '인간'의 '자유'를 생각하여 보자. 요한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은 전적으로 절대적 예정을 믿는다. 당신이 어떻게 이 둘(예정과 자유)을 조화시키느냐? 하고 칼빈주의자에게 묻는다면 "내가 조화시킬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둘을 조화시키시기 때문이다. 또 그것으로 나는 만족한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둘의 조화 문제는 오묘하여 인간이 알기 어려우니 만큼 칼빈주의자는 그것을 신비로 남겨두고 만족하게 여긴다.


제 5 장 칼빈주의 신학의 요점


종교는 인간을 축복하는 것일지라도 인간을 위하여 있지 않고, 결국은 하나님을 위하여 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두가지 방법으로 활동하신다. (1) 우주의 일반적 사역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2)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장하시는 둘째 방법은 이적이니 특별 계시, 영감, 기사, 화육, 육체, 부활, 중생, 성화 등이다. 칼빈주의자의 성경 책은 구원받는 방법을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책이다. 하나님은 이 책의 매 페이지에서 인간의 구원과 또는 인생의 모든 행할 바 본분에 관한 계획과 목적을 알려 주신다. 교회 정치에 있어서도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특징으로 가진다. 하나는 권위이고, 또 하나는 자유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교회의 유일한 주권자이시오. 그의 원대로 모든 일을 교회가 행하여야 한다.


칼빈주의자에게 있어서 도덕 생활이 잘 발전되게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은 자기가 전적으로 타락했음을 아는 의식이다.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기 때문에 유달리 성령의 필요를 고조한다.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하게 살아야 된다는 이와 같은 주장은 두가지 (1)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인한다는 것이고, (2) 그 계약에 합당한 질서있는 생활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의 도덕상 강조점에 대하여 또 한가지 사실을 지적하여야 될 것이 있다. 곧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실 때에 그의 전 인격을 구원하신다고 칼빈주의자는 믿는다. 생활의 중심이 하나님이요, 구원은 하나님에게서만 오고,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힘에 의하여 생활의 일체를 하나님을 위하여 바칠 때에, 그 이상 더 고상한 종교적 이상은 생각할 수 없다.


제 6 장 일반은총에 대한 칼빈주의의 견해


1. 불신자의 선행에 대한 칼빈주의자의 견해


성경이 불신자들의 소행을 가리켜 악하다 하였으나, 그들이 행하는 "선행"이 있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 그처럼 훌륭한 그들의 선행을 악한 일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선행은 법을 지키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마음도 순결하여야 된다. 하나님 한분 외에 한 사람도 선하다고 하지 않는 성경이, 때로는 사람의 행동을 선하다고 하였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을 가리켜서, 선한 일에 "열심"이 있다고 하였다.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격렬한 정욕을 제재하고, 여러 가지 외형적 선행을 나타재게 하고, 저들의 심정에 있는 죄악적 원리와는 반대로 저들의 타락한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감화력을 가리켜서 칼빈주의자는 일반적 은혜라고 한다. 분량에 있어서 꼭 같지는 않아도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진 은혜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곧, 택함 받지 못한 자들에게도 하나님이 호의 혹은 은혜를 보이셨다. 그러나 이 일반적 은혜가 후에 저들이 받을 형벌을 증가시킬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 일반 은총을 감사할 줄 모르고 회개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자퇴하지도 말고, 이 세상과 짝하지도 말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사용하는 것을 의무로 하는 것이 칼빈주의자의 태도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칼빈주의자의 의무요 영광스러운 이상이다.


제 7 장 칼빈주의의 문화


문화의 정의 - "교양시키는 행동 혹은 교양 받은 결과로 이루어진 상태"라고 한다. 무죄 세계에 있는 문화 : 만일 사람이 낙원에 있어서 범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는 문화의 과업을 담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문화 운동에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다. 문화 운동은 "발전"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먼저 말하여야 될 것은 농작이다. 땅을 갈아서 곡식이 되게 한다. 다른 종류의 일들이 있으니 주로 인간의 정신 노동이요, 육체적 노종은 비교적 적게 드는 것이다. 문화란 것은 항상 인간이 정신적으로 자연계 특히 자연계의 기계적 세력이나 화학적 세력을 정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를 말할 때에 우리는 특히 과학과 예술에 대한 활동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인류의 정신이 자연계를 가장 위대하게 정복한 일들이 과학과 예술 방면에 있기 때문이다.


자연 과학이나 인문 과학을 물론이고 상상할 수 있는 과학은 모두 다 고려하여 볼 것이다. 본질적 의미를 알고, 그것들에 적당하게 이름을 주는 것이 바로 과학의 사명이다. 과학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취하여 연구하고, 그 속에 잠재해 있는 의미와 그 관련성들을 찾아 내서 거기 해당한 명칭들을 주는 것이다. 구성의 전체에 조회되는 기를 결정하는 탐구이다. 발견한 것이 우주의성질 전체에 대한 성경 교훈과 일치할 것이다. 하나의 특성이 어떤 사물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그것의 가치를 알아 보는 것이다. 과학에 의하여 완성된 모든 것을 우주의 위대한 조물주이신 하나님의 발 앞에 가지고 가서 드리는 일이다.


예술은 그 사물의 의미에 해당한 감각적 형태를 나타내는 일에 종사한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가장 관념적이요 또 가장 정신적이다. 죄가 사람의 문화 사업에 영향을 끼친 관계와 또한 문화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생각하여 보자. 우리는 죄악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그대로 지킬 수는 없다 할지라도 아담의 시대와 꼭 같이 금일에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의무가 있다. 죄가 주장하고 있는 곳에도 피조 세계에 대한 문화 개발이 결코 충분하게 또는 조화있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죄악은 항상 파괴하려 하고, 하나님의 피조세계는 결코 문화적으로 발전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죄악만이 이방에서 활동하는 세력이라면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 은총(혹 일반 은혜)에 대하여 고려할 때에 알게된 것과 같이 이방에서도 하나님은 죄의 파괴적 세력을 대비하여 이를 막는 세력이 역사하게 하신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지 만세 반석(그리스도) 위에 세운 것은, 교회나 하나님 나라나 또 무엇이든지 영원히 남아 있다. 그리스도가 문화의 세계에서도 왕이신 것을 알려지기 위하여 주님의 소명을 받은 어느 자리에서든지 기독교적 기초 위에서 기독교적 이념을 위하여 전력을 기울여 노력하는 것이 여러분과 나의 의무이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칼빈주의자가 가져야 되는 참으로 강조할 사명이다.


제 8 장 칼빈주의와 정치학과 성경


칼빈주의의 정치사를 연구해 본다면, 분명히 놀랄 만한 일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칼빈주의가 자체의 정치적 원리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정치설들이 이 원리에 기인되었고, 또 근대에 와서 여러 나라에서 이 원리가 적용되었다. 칼빈이 정치사상 실제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패어배언씨가 지적하였다. "역사에 있어서 칼빈이 가장 높이 평가된 것은 그의 입법자로서의 성공에 기인한다." 칼빈주의자에게 있어서 모든 면에서 신앙과 행위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정치 부문에 있어서도 법칙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앙과 행위의 법칙이므로, 칼빈주의자는 그것을 자기의 정치적 활동에 있어서도 지침으로 삼는다.


칼빈주의자가 성경을 정치학의 기초로 채용함은 독특한 처지이다.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가 자기에게만이 아니라, 백성 전체에 유효한 관계가 있음을 주장한다. 사람이야 좋아하든 싫어하든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주권자인 사실이 고백되어야 함과 같이, 성경도 모든 사람의 모든 일을 결정하는 법칙인 것이다. 신앙과 생활과 또 정치 문제에 있어서, 성경을 무조건적으로 또 적극적인 법칙으로 채용하는 큰 이유는 우리가 칼빈주의적 정치관에 대한 여러 부문을 연구할 때에 점점 더 분명하여질 것이다.


제 9 장 국가의 기원과 기능


국가가 어떻게 생겼는가? 우리가 이 의문을 가지므로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다. 국가마다 다 꼭 같은 모양으로 기원하지 않았음을 솔직한 역사적 사실이다. 국가의 구성은 옛날 풍습(혹은 습관) 이외의 다른 것에 의하지 않았다고 어떤 이는 말한다. 국가는 민족의 발달 과정에 있어서 단순히 종족적 습관이나 전승에 의하여 생겼다고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이상적 사회 상태는 결코 정부나 혹은 어떤 다른 자연적 방법에 의한 자연적 발달로 생길 수 없음을 역사가 증명한다. 이 위대한 이상, 완전한 국가인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서만 실현될 것이니, 곧 자연적 방법에 의할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 은혜에 의하여 실현될 것이다. 그 나라를 그가 벌써 이 세상에 심어 놓았다. 그것이 중생에서 시작하여 성화로 계속되며, 이 세상에선 영적 실재로만 있다가 장래에는 영적 또는 물적으로 아울러 완성될 날에 이른다. 정부의 기능을 말할 때에 칼빈은 두가지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첫째는 국가와 천국을 동일시 함을 경고하였고, 둘째는 이 양자가 서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고하였다.


제 10 장 가장 완전한 국가 형태


하나님이 국가에게 전연 다른 영역을 맡기신 것이 사실이다. 교회의 일을 하기 위하여 국가가 불리운 것은 아니다. 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국가를 제정하신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도 자기 영역에 관계된 일에 국한하여, 교회나 개인들처럼 하나님 말씀의 제약을 받도록 되어 있다. 국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침으로 삼아 정부로서의 권위에 대한 존경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제도에 의해 죄를 범하고 공무원이나 신민의 허물과 책임 문제 단속을 무시하려 하지 않고 결혼과 가정의 신성성을 보존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자선 사업을 추진시키고 교회와 그의 이 세상에 대한 사명을 존경하며, 또 기타 어떤 면에서든지 그것이 정부 자체의 부문과 관계되는 한 거기서 기독교 정신에 물든 자로 보일 때에 그러한 국가는 기독교국이다.


칼빈주의의 국가관은 본래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인데 개인 가족 또는 그것들의 이해 관계에 발전될 그 어떤 부문들과도 다르다. 국민 전체가 협력해서 해야 될 문화개발의 사업들을 돌보는 것이다. 천국은 현존하는 국가에서는 계속되지 않는다. 국가가 할 일이 또 있는데 죄악이 이 세상에 들어온 때문에 인류 사회의 성원들이 서로서로 또는 사회 전체에 대하여 정의를 시행하도록 하는 일이다. 이러한 일을 할 때에 국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해야될 것이다. 국가의 영역은 특별 은총이 아니라 일반 은총에 속하였으므로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에 직속되지는 않았다 해도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 하에는 복종하여야 된다.


제 11 장 정부의 형태


칼빈주의의 정치적 이상의 특성으로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안전 보장책을 열거하였다. 첫째로, 이 죄악 세상에서 어떠한 세계적 단일 국가나 혹 너무 지나치게 큰 국가를 칼빈주의는 반대한다. 칼빈이 말한대로 독재적 세력이 소수의 수중에 들어갈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칼빈주의는 더 작은 국가들을 찬성한다. 둘째로, 칼빈주의는 작든지 크든지 일개의 국가 안에서 한 사람이나 소수의 사람에게 세력이 집중되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 셋째로, 소수의 수중에 권리가 집중되는 것을 반대하는 또 하나의 안전 보장책은 정부를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 분립제로 세워서 각자가 서로 예속하지 않게 한 것이다. 넷째로, 인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안전 보장책은 사사의 각 분야가 그 자체 안에 불가침의 주권을 가진다고 칼빈주의자는 주장한다. 이를테면, 가정, 학교, 사업기관 기타 사회적 조직체들이 그런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칼빈주의자들의 정치적 견해로서 중앙 정부에 대한 시민권리와 자유 문제에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견해는 지방분권과 지방 자치라는 말에 포함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민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칼빈주의의 안전 보장원리들을 소개하되 특히 칼빈주의자가 웅호하는 정부 형태에 영향을 주는 종류에 한하여 말하였다.


제 12 장 정부의 직무


(1) 정의를 실시하고 (2) 국가와 국민의 일반적 복리를 증진시킴이다. 대범하게 말한다면 이것이 칼빈주의 관념에 의한 정부의 이대 직무이다. 어떠한 정부이든지 첫째로 할 일은 정의를 수행함에 있다. 인류 사회에서 법의 신성성을 옹호하는 것이 정부의 일이다(롬13:1-4).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이 우주의 주권자라면 국가로서 시행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성경이 절대적 표준으로 이에 의하여 국가가 지켜야 할 법을 결정해야 된다면 국가가 성경의 얼마만한 분량과 관계를 맺어야 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길 것이다. 국가의 임무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또 성경 전체에 산재해 있는 정부의 지킬 율법과 원리가 우리를 위하여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다. 국가의 복리를 위하여 국가는 행정이 상대하는 종류의 국민 도덕을 장려할 의무가 있다. 그런 종류의 도덕은, 종교적 견지에서 볼 때, 물론 최소한도의 윤리일 것이다.


칼빈주의자는 정부가 경제적 혹은 사회적 모든 기관의 개개의 영역에 개입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고 하지는 않으며, 또한 정부로서 그것들을 소유하며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의견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면서 칼빈주의자는 개인이나 어떤 사회 단체가 자체의 권리의 한계를 넘어서서 개인이나 혹은 국가 자체의 권리를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침입할 때에는 그것을 제재하는 법을 제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라고 믿는다. 또 적극적으로 칼빈주의자는 실업과 경제와 사회적 모든 세력에 대한 법규를 제정하여 모든 사람들이 더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정부의 의무라고 믿는다. 정부는 그 나라의 권리와 영토를 침략하느 모든 외국 세력을 방어할 의무를 갖고 있다.


대외적으로 두 번째 중요한 의무는 국가가 국제적 일원으로서 여러나라들 사이의 관계에 생기는 국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협조하는 일이다. 국민의 일반적 복리를 추진시킴이다. 칼빈주의자는 국민의 공동 복리를 취급하는 임무를 정부에 귀속시키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칼빈주의자는 정부의 정강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정치 프로그램에도 있는 여러 가지 임무를 포함시켰는데, 그것은 국가로서 어떤 공익 기관들을 소유하고 운영하며, 자연재원을 개발하며, 노동 은급법을 재정하며, 어떤 경우에는 정부가 공장들을 소유하는 것 등이다.


사회주의자나 국가주의자들의 목적은 정부가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상은 국가에 의하여 새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결코 국가와 사회를 동일체로 취급하지 않는다. 모든 조직체들은 각자가 그 자체의 주권을 지니고 있는 천부의 영역을 가졌다. 이 모든 것을 국가에 예속하게 한다면 이 부문들을 압제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는 국민 전체에 관계된 물질적, 지식적 또 자선적 문화 개발을 추진시키는데 관한 어떤 활동을 국가의 할 일로 주관하며 또한 사회적 단체로서 그 맡은 일을 못하든지 안하든지 할 때에 그 일의 추진을 위한 정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칼빈주의는 국가로서 그만한 정도의 사회 생활에 대한 간섭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주의와는 다르다. 칼빈주의자가 사회주의자와 구별되는 결정적 원리는 '언제나 또 어디서나 강요되지 않고 움직여지는 개인이나 사회의 자발적 활동'들을 중요시 함이다. 칼빈주의는 국가로서 무의 무탁한 자들을 위한 구제나 사회적 안전보장이나, 노쇠한 자들을 위한 대책을 세움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는다. 칼빈주의는 개인들이나 단체들이 각기 자체의 원리에 의하여 복잡한 사회에서 각기 하나님이 주신 사명대로 충분히 자유롭게 활동하게 되도록정부에 의하여 경제적, 사회적 규정이 실시되기를 원한다.


제 13 장 정부의 권위


권위는 감화, 존경 혹은 신임 등을 요구할 수 있는 인격의 힘 보다도 다른 무엇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명령할 수 있는 권한과 순종하게 하는 권리를 의미한다.


칼빈주의자들은 국가 적대주의자들과도 공명할 수 없으니 그들에 의하면, 국가는 무엇이든지 최고 판단이며 지배자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궁극적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 그(곧 정부)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었음이라(롬13:1-4)고 하였다. 국민은 집정자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알고 저들의 권위를 존중히 여기며 '존경'하여야 한다. 성경은 국가의 공무원들을 경시하는자들을 경책한다. 둘째 의무는 '순종'이다. 정부가 합법적으로 하는 일에 있어서 국민이 반드시 '순종'하여야 한다. 국민으로서 공무원을 순종하여야 할 또 한 가지 이유는 굼무를 정당하게 또는 신속히 집행하는데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의무는 정부를 위하여 반드시 봉사해야 되는 것이다. 정부를 위한 봉사는 투표하는 의무이다. 투표권 제도는 정치적 시책 결정에 대한 국민들의 참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배자들도 국민의 전체 생활에 대한 절대적, 또는 최종적 권위는 결코 가지지 못한다. 저들의 통치권은 언제나 정치적 임무에 국한되어 있다. 국가의 지도자들의 권한은 항상 자체의 적당한 기능을 발동하는데만 국한되어 있다. 또 한가지 주의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통치자들이 그 직위에 있는 한 하나님의 사자요 또 사자로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저희들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우시지는 않으셨다. 공무원이 국민에 대하여 명심해야 할 통치원칙은 그들이 반드시 복리를 가져 오도록 정치할 일이다. 그 이유는 국민에게 복리를 받게 하기 위한 것이 공무원들에게 권세를 주신 하나님의 원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은 공무원들에게 과도한 영예를 돌리는 것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국가를 경배하거나 신격화하는 행동을 반대하며, 또한 왕을 국가의 인격적 상징이라 하여 경배하며 신격화하는 행동도 반대한다. 통치자나 공무원의 권위 내용은 ① 이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니 언제나 하나님의 권위로 존속된다는 것, ② 이 권위는 하나님이 결코 통치자와 공무원들에게 아주 양도해 버리지 않았다는 것과 저들은 하나님의 사자로 있을 뿐이라는 것, ③ 저들의 권위는 각기 맡은 행정권 안에서만 제한되었다는 것, 그것은 시민의 생활전부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가정, 학교, 교회, 기타 사회 부문은 각각 하나님에게서 받은 영역이 있으니 거기에 국가의 권위가 미치거나 침해할 수 없다는 것, ④ 이 권위는 백성의 복리를 위하여 있다는 것, ⑤ 정부나 통치자나 관리들은 백성을 경유하여 선택되었으며, 그들은 백성의 동의를 얻어가면서 행정해야 한다는 것, ⑥ 백성이 하나님을 위하여 정부에게 정당한 존경, 복종, 봉사를 해야한다는 것, 즉 하나의 개인적 시민으로는 결코 행정적 권위를 받지 못하였고 다스릴 권리도 없으니 하나의 개인적 시민으로서 저들이 하여야 되고, 또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안 할 수 없는 최선의 행위는 그들의 양심에 반대되는 일을 관리들이 요구할 때에는 언제나 소극적 저항을 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제 14 장 시민의 자유


정부는 물심 양면으로 백성을 옹호할 것이고, 그 백성으로 하여금 충분한 이유없이는 방해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생활 영역 안에서 자유로이 활동하게 할 의무가 있다.


첫째, 백성(교회, 교육 기관, 상업 기관, 자선 기관들과 같은 국내 시민단체들도 포함함)은, 저들의 정당한 권리들을 침해하려는 모든 사람에게서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둘째로, 백성이 주장할 수 있는 특권은, '국내에 있는 그들의 특수활동 분야'에 관계된 것이다. 국가는 이런 분야들에서 시민들의 일을 간섭하면 안된다. 국가는 차라리 국민들의 이런 임무 수행에 요구되는 자유 확보를 위하여 거기에 필요한 모든 조건과 관계를 촉진시켜야 된다. 셋째로, 국가의 임무는 백성의 '물질적 복리'에 관계된 것이다. 백성이 인간 위신에 맞추어 친수로 확보할 수 있을 환경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넷째로, 국가가 시민들을 위하여 보증하지 않으면 안될 특수한 종류의 특권은, 그들의 '정신적 존재'에 관계된 것이다. 정신적 자유를 추진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정신적 자유란 것은, 곧 사람의 영혼 자유이다. 양심 자유란 것은 정신계에 있어서 국권으론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다.


국민의 권리와 자유가 옹호되게 하는 방법은 합법적 대표들에 의한 헌법 저항이다. 칼빈주의가 행한 두가지 일이 있으니, (1) 이 자연권이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 권위의 기초 위에 성립되도록 상호 관련시켰고, (2) "자연권"설은 국가에 관한 다른 여러 가지 학설들처럼 필요한 개혁을 가져올 힘이 없었던 것을 칼빈주의가, 그것으로 하여금 폭군 앞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함에 유효한 것이 되도록 변화시켰다. 지교회의 정치는 평신도들이 선택한 목사와 장로의 권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리는 결국 평신도에게 주어진 것이다. 칼빈주의자가 성경을 엄격히 믿어 그것이 자기 생활에 무제한의 세력으로 관계하는 것인 줄 생각함도, 역시 자유 정신을 추진시키는데 가세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되는 이유는, 칼빈주의자가 성경의 규례대로 주님을 믿어 구원받을 자유를 원하는 사실에만 개재하지 않았다.


또 하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념이다. 지배적 지위를 가진 이 사상이, 칼빈주의자로 하여금 정치적 권위에 대한 깊은 존경심으로 준법하는 시민이 되게 한다. 그 이유는 그가 법에도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권위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자기도 하나의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야 될 자이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영적 귀족이요, 은혜로 능히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되어진 왕족이니 이 세상 왕들이나 귀족들이 부러울 것 없다고 칼빈주의자가 왜 정치상 자유의 발전에 유력한 원동력이 되었는가를 알려면, 위대한 선택 교리를 기억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 교리는 역사상 칼빈주의가 성행될 때에 그 신봉자들에게 매우 강한 힘이 되었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줄로 인식하는 그들로 하여금 한층 더 고상한 도덕적 의무를 감당하게 하였다. 칼빈주의자가 한사코 주장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시하는데 있다.


제 15 장 사회 모든 부문의 주권


칼빈주의자는 국가나 교회나 기타 사회의 모든 합법적인 세포 단체들을 하나님이 세웠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저들이 자기 몫에 태인 자주의 권리들을 가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칼빈주의에 의하면 사회는 서로 상관없는 개인들의 조잡한 집합체가 아니고,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 곧 커다란 사회적 유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사회의 문화 개발의 임무를 맡은 자들로서 개인, 가정, 사회의 자치 단체, 교회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제5기관을 생각할 수 잇다. 국가가 할 일 가운데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소극적인 것으로 사회 여러 분야의 기관들로 하여금 그 천품적 임무에 있어서 정상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들을 국가로서 방비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적극적인 것으로 저들의 문화 개발상 모든 과제를 성취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여러 가지 조건과 관계를 국가로서 추진시키는 것이다. 칼빈주의자가 항상 정부에 귀속시키는 또 하나의 과업이 있으니 그것은 공의 시행을 위한 일과는 같지 않다. 국가란 죄악 사회의 법과 질서를 확보하기 위하여 건설된 기계적 조직체라고 지적함이었다. 어떤 특수한 인물들이 사회 전체를 대표하기 위하여 임명될 수 있다. 그 인물들을 채용할 때에 두가지 종류의 인물들이 요구되거나, 한 종류는 그 사업 운영에 있어서 정의 시행을 위한 공무원들이고, 다른 종류는 사회의 일반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자들이다. 칼빈두의자들은 그러한 일반적 임무들을 정부에 귀속시키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제 16 장 교회와 국가의 관계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사회 생활의 모든 부문에 관계한다고 인정되어야 하며, 따라서 정부의 영역에도 그렇다고 해야 된다고 믿는다. 양심이란 것이 방편은 되나 목적은 아니다. 정사에 있어서 객관적 규범으로서 논쟁할 여지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언제나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공무원과 시민의 양심에 의하여 판정될 것이다. 기독자 시민으로서는 그들의 국가에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그들의 위대한 책임이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서로 조화하며 협력하는 관계이어야 한다. 둘이 다 하나님의 기관이다. 양자는 다 죄를 제지하려는 기관으로서, 하나는 일반 은총의 부문에 속하고, 다른 것은 특별 은총의 부문에 속한다. 이 두 기관은 하나님이 밑긴 과업들을 실현하기 위하여 가능한한 최대의 협력으로 일할 것이다.


교회에 대한 국가의 의무는 첫째로, 국가가 일반적으로 종교에 대하여 중립적 태도를 위할 수 가 없다. 둘째로, 국가는 결코 여하한 종류이든지 국교를 건설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셋째로, 국가는 신령한 일들이 아니고 '세속적인 일'들에 한하여 교회에 관계할 권리를 가졌다. 넷째로, 양심의 자유, 따라서 종교의 자유는 모든 시민과 불신자에게도 보증되어야 한다. 교회의 복음을 전할 때에, 정치 상의 사리들을 위시하여 인생 생활의 모든 방면에 관계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들을 명백히 가르칠 것, 기독교인인 과학자들과 기독교대학은 기독교적 기반에 입각하여 국민 생활관계의 성경진리들을 해명하여 전개시킬 것, 기독교 출판물과 기독교방송과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들에 대한 일반민중의 호의를 얻도록 영향을 끼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제 17 장 국제주의


국제간 상호 관계에 있어서 모든 국가를 지배하는 법전은, 국제법이라고 불려진다. 스토익파의 이 학설은, 헬라 사람보다 법률을 애호하는 로마인에게 더 호의를 샀다. 그래서 이 학설을 기케로가 자기 법학 체계에 채용하였고, 시간이 감에 따라서 로마인들 중에 가장 우세한 견해가 되었다. 로마 제국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나중에 그것을 정복한 때에는 기독교가 벌써 확고한 세계적 종교가 되었다. 결국 국기들이 로마 제국과 정치적으로 독립됨에 따라서 세계적 단일 국가주의는 무너져 버렸고, 또 그와 동시에 국제 주의 정신도 독립된 국가들의 국가 정신이 대두되었다. 모든 개체 국가들을 배제시키는 하나님의 세계적인 제국이 아니고 각국이 자유로이 자체의 문화를 발달시키며 국제법에 의하여 정당하게 관련되며 조정하는 가족연한 국가군이다.


제 18 장 국제주의 국제연합, 칼빈주의


기본적인 원리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행17:20)"라는 성경의 말씀이 있다. 이 기독교적 근거에서 만민이 다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진 국제법이 확실히 있는 것이다. 국제 연합과 그 사업 계획들이 아직도 대체로 발전 과정에 있는 것인 만큼 우리는 소원한 태도로 그것을 대할 것이 아니라, 정당한 조건을 가지고서 그 기구가 유익한 것을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될 것이다. 칼빈주의자가 소중히 여기는 많은 가치 있는 일들을 인정하는 것은 좋은 점이다.


제 19 장 국 제 법


국제 연합은 중앙 행정기구인 어떤 종류의 국제 법정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 국제 연맹에 협력할 목적은 ①국련의 권리가 발달되게 하며 그 결과로 국가들 사이의 쟁의를 평화적으로 해결시키는 동시에 또한 불의한 세력을 필요에 따라 국련의 무력 행사로 해결하게 된다. ②사회를 발달시키며, 국가들 사이의 법률과 정의에 해당하는 협정적인 교역에 의하여, 영적 또는 물질적 복리를 일반 민중에게 가져오게 함이다" 반대론에 대하여, 기독 신자는 세가지 답변을 제출할 수 있다.


첫째로, 신자 자에에게는 하나님의 뜻 이외에 의존할 만한 아무런 다른 법적 근거가 있을 수 없다. 신의의 해석자는 성경 뿐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자들의 사상과 성경을 표준으로 믿는 그들의 견해가 불신자에게는 용인 될 수 없고 따라서 현세에 적용될 수 없다는 반대측 의견은 진리가 아니다. 셋째로, 실제에 있어서 국제법의 규준으로서 기독 신자가 주장하는 성경적 표준에 대치될만한 효과적인 것이 없다. 미국 연방정부의 경우와 같이 국제 연합기관에 있어서도 그 의무는 두 가지 방향으로 되어 있다.


다수 국가간에 국제정의를 수행함과 일반적 공동 복리를 증진시킴이다. 일반적 공동 복리란 것은 모든 국가가 독립적으로 할 수 없는 문화 사업을 민활히 성취시킴과 같은 것이다. 개체 국가에 속한 일이나, 혹은 사회의 어떤 문화 단체에 속한 일은 다 국제 연합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나라든지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주장할 만한 권리들은 세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로, 각국의 자체 보존과 독립의 권리를 소유하였다. 둘째로, 자아를 발전시킬 권리들을 소유하였다. 셋째로, 국가의 존엄성을 주장한다. 이것은 타국에 보내는 국가의 사절과 기타의 대표와 국기와 국가의 휘장등에 대하여 적당한 존경과 경의를 표할 것을 요구할 권리를 이름이다.


제 20 장 전쟁사


전쟁의 이유를 성립시킨 두 가지가 생겼다. 첫째로, 이 세상이 반대되는 두 세력의 대립이다. 둘째로, 죄악이 이 세상에 들어옴으로 생긴 전쟁의 원인은 인생 생활 그 자체를 부도덕하게 만드는 죄악의 부패성이다.


제 21 장 성경과 전쟁


전쟁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문제는 이 죄악 세상에서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도 정의가 확보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전쟁의 첫 원인은 이 세상에 있는 두 가지의 반대되는 원리들의 대립이다. 전쟁은 다툼이나 탐욕이나 또는 진리와 정의에 반대되는 그릇된 이상에서 생길 수도 있다. 전쟁하는 동안 교전자들의 정당한 행동에 관한 것이다. 칼빈주의자가 전쟁에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종말적인 승리할 때에 따라오는 평화의 종막을 취급하는 점이다. 신자가 이 세상에 소금과 빛의 직분을 행하는 의무는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개인에게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아직 구주이시다.


제 22 장 기독교인 된 국민과 전쟁


첫째로, 하나님을 위하여 위에 있는 권세를 복종하여야 되므로, 시민은 정부에 순종할 의무를 가졌다는 일반적 원리를 기억함이 필요하다. 둘째로, 기억할 것은, 국민에 대한 정부의 권위가 절대적이 아니고 일정한 제한을 가졌다는 것이다. 셋째로, 도 한가지 기억할 것은,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정부의 의무요 개인 국민의 의무는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는 그 국민의 양심을 존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된다. 양심이란 인생에 대한 최고 판단자인 하나님의 도덕적 법칙에 인생이 구속되어 있는 것을 스스로 앎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양심의 자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전시에도 마찬가지로 정부는 국민을 군무에 소집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도들과 많은 순교자들처럼 저들도 벌금형이나 투옥이나, 혹은 사형이라도 받을 각오를 하여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가의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출처: 지명교회까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