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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쉐퍼의 "이성으로부터의 도피" 서평 - 박동근 목사

Bavinck Byeon 2016. 2. 21. 19:25

프란시스 쉐퍼의 "이성으로부터의 도피" 서평


박동근 목사


I. 서론


프란시스 A. 쉐퍼(Francis A. Schaeffer)의 「이성으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Reason)는 쉐퍼의 주요 3부작(Triology) 중에 포함된 한 책이다. 그의 3부작은 「거기 계시는 하나님」(The God Who is there), 「이성으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Reason), 그리고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이다. 이 저서들은 쉐퍼의 변증관이 그대로 논의되고 있는 초기의 저서들을 지칭한다. 쉐퍼 자신도 이 책들을 일컬어, “나의 모든 사상의 틀을 제시하는 것은 이 세 권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전문적인 학자로서 활동하지 않았으며, 특별히 저술을 위해 책을 쓰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강의를 출판할 의도를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있어서 역사적 기독교의 위치에 대해 중요한 강의가 유럽과 미국의 대학교에서 행해지고, 계속되는 좋은 반응과 사람들의 요구로 인해 출판된 책이 나오게 되었다. 「이성으로부터의 도피」는, 미국의 휘튼 대학에서 행한 일련의 강의의 열매였던 「거기 계시는 하나님」의 서론에 해당하는 책이다.


쉐퍼의「이성으로부터의 도피」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적, 성경적 원리들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이 불변의 진리들을 그것이 살고 있는 세대 ‘속에’전달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라는 그의 신념이 선명히 반영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통찰의 목적과 결과는, 현대사상과 문화가 지닌 문제성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본서를 분석함에 있어 주시되어야 할 점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현대사상 및 문화적 경향에 대한 쉐퍼의 분석 및 평가이다. 쉐퍼는 이 과정을 ‘예비적인 전도’(Pre-Evangelism)이라고 부른다. 이 과정의 목적은 전도이다. 쉐퍼는 인류 역사를 문화의 역사로 보았고, 철학적, 과학적, 종교적 접근 등의 종합적인 문화 분석을 시도하였다. 그는 이러한 기초 위에서 복음을 전했고 실제로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쉐퍼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접촉점을 중시하였다. 쉐퍼는 본서에서 불신자와 갈등하는 그리스도인과의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들의 ‘사고방식의 언어’를 이해하지 않을 때 기독교 신앙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없다고 믿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시대의 공통된 특징들’이 존재하므로 그것을 찾아내고 분석한 후 이를 의사소통의 접촉점으로 삼아 복음을 전하려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사상과 문화 속에 내포된 모순과 병폐이다. 이러한 경향은 상층과 하층의 두 층 구조, 하층의 상층을 집어삼킴의 문제, 아퀴나스로 시작해 키에르케고르에 이르러 정점에 달한 절망선과 비합리적 비약, 이로 인해 파생된 문화적, 예술적 변형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러한 사상과 문화적 경향이 기독교 신학과 신앙을 어떻게 잠식해 들어갔는지를 밝히고 있다. 현대인은 이 이원론의 두 층으로 인해, 절대적인 것의 영역을 잃어버렸고, 상대주의에 빠지게 되었으며, 두 층의 통합과 통일을 이루려는 소망이 깨어짐으로 일어나는 절망의 상태와 허무주의에 속박되게 되었다. 인간의 자율성 속에서 이들의 대안이라는 것은 퇴폐와 마약, 무의미한 비약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의미없는 구호로서 예수를 섬기는 일들로 요약될 수 있다.


둘째는, 현대인의 병폐를 진단한 후 그가 제시하는 성경적 대안과 복음적 제시이다. 그는 현대의 철학과 문화적 경향들이 지닌 모순성과 자기 분열적 병폐를 성경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성경은 우주와 인생의 전 영역에 있어 일관되고 통합된 진리의 체계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확신은 그의 개인적 경험의 영역에서 체험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17세 때, 진리의 문제로 고투하였다. 6개월의 기간 동안, 그는 성경과 Ovid를 비교하고 대조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가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스 철학이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그럴듯한 대답들이 제공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다른 한 편으로는, 성경은 많은 답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 답변들의 대부분이 창세기에서 발견되었다. 성경은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왜 우리는 여기 존재하는지,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를 말해 주었다. 그것은 세상을 통해 얻을 수 없는 선과 악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전 영역의 의미에 대한 기초를 제공했다. 쉐퍼의 성경의 자증 능력과 무오성에 대한 확고한 확신은 이러한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본서의 일관된 제안은 현대사상과 문화적 노력들의 병폐에 대한 해결책이 성경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서평은 위에서 쉐퍼가 추구하는 두 가지 목적이 어떤 논리와 체계 속에서 그 내용을 진술해 나가는지 살펴 볼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상적, 문화적 접근과 평가 후에 쉐퍼가 제시하는 성경적 대안이 어떻게 진술되며, 어떤 내용과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쉐퍼의 변증의 효과와 결론적 평가를 제시할 것이다. 특별히 이러한 분석을 위해서는 그의 사상을 정확히 전달하고자 그가 사용했던 용어와 기본 주제들을 신중하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II. 본론


A. 저술의 배경: 20세기 현대인들을 향해 쉐퍼가 직면한 문제


20세기를 살아가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자 지도자로서 쉐퍼가 직면한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시대의 ‘반지성주의’이다. 그는 이것에 도전하고 있다. 쉐퍼는 그의 책, 「거기 계시는 하나님」, 제1장 초반부에서 “따라서 내가 알기로는, 우리가 지식과 진리에 이르게 되는 길에 관한 개념에 있어서 이러한 변화가 오늘날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라고 말한다. 쉐퍼가 한 말의 의미는, 현대인들이 진리와 지식에 접근하는 방법에 있어서 절대 기준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 핵심적 문제라는 것이다. 현대는 더 이상 전제에 입각해 인식하거나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쉐퍼에게 이것은 ‘절망의 선’으로 표현된다. 20세기의 반지성주의적 경향의 최대약점은 철학적 실존주의에 편승한 비이성적 경향이었으며, 그것은 17세기에 이어 다시 한 번 이성의 수난기를 맞이했음을 의미한다. 쉐퍼는 1890년 이전의 유럽과 그 이후의 유럽을 구분하면서 비기독교인이 진리를 상대적인 것으로 주장하게 되는 구분을 ‘절망선’이라 부른 것이다.


그 일례로 푸코(M. Foucault)는 이성의 우매함을 찬양하고 이성의 해체를 주장했다. 그 외의 다수의 철학자들이 더 이상 합리적 이성과 전통적인 철학의 과업에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인간의 불안과 긴장에 모아졌다. 그리고 그것들과 맞서 투쟁했다. 금세기를 풍미했던 실존주의는 인간의 불안과 긴장을 다루는 철학이었으며, 그에 대한 현실을 깨닫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우주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전통적 ‘철학’은 사라졌다. 스키너(R. Skinner)는 그것을 ‘거대 이론의 붕괴’라고 말했고, 쉐퍼는 ‘통일적 지식의 붕괴’라고 불렀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상적 변화와 현상들이 기독교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는 데 있다. 쉐퍼가 ‘의사소통’과 ‘문화적 접촉점’내지 그 시대의 ‘사고방식의 언어’이해의 중요성을 전도와 관련시킨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쉐퍼는, 신앙이 단지 ‘감정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실존주의에 함몰된 청년들을 실제로 만나고 접촉했다. 그리고 많은 히피족들이 비관주의에 빠져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많은 낭만주의를 표방하던 많은 유럽 청년들은 그 허무함을 마약이나 쾌락, 모종의 종교적 신비주의 속에서 채우려 달래려 했다. 당시 교회적 상황을 보면, 그 시대의 선구자적 지식인들마저도 ‘상대주의’가운데 표류하고 있던 터라 교회에 성실히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청년들까지도 지적 무기력증에 빠져 들고 있는 실정이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 후에 형성된 정치적 냉전 체제와 인본주의적인 사상의 영향으로 인해 모든 문화 영역에서 기독교적 영향력이 현저하게 후퇴하게 되었으며 교회의 지도적인 위치가 상실될 위기에 이르렀었다. 그것은 기독청년들의 위기이며 기독교 전체의 위기로 평가될 수 있다. 이처럼 쉐퍼가 접한 현대인의 문제는 그 철학에 뿌리를 두고 문화의 각 영역으로 스미어 신앙과 삶을 붕괴 시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는 현대 사상의 모순성을 파악하고 비판하기 위해 그 사상적 뿌리를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그리고 그 철학적 영향력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문화 속에 스미어 실제적 삶의 영역, 과학, 미술, 음악, 대중문화 속에 작용하였는지를 분석하고 비평한다. 결국 이러한 철학적, 문화적 경향들이 기독교 진리에 해악을 끼쳤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성경적 세계관, 문화관을 통해 진리를 변증하는 것이 쉐퍼의 사역의 목적이요 열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쉐퍼는 이러한 현대사상과 문화에 접하여, 그 문제를 파헤치고, 그 대안을 성경적으로 제시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쉐퍼가 어떤 논리와 체계로 현대사상과 문화를 비평하고 그 대안을 제시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B. 현대 사상과 문화의 병폐 진단과 변증적 대안


1. 현대 사상적 동향의 역사적 근원: 역사적 고찰


쉐퍼는 본서의 서문을 통해 오늘날 사상의 동향들이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고 언급한다. 쉐퍼는 이점에 대해서“오늘날의 사상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상황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확인해야 하고, 동시에 철학적 사고방식들이 어떻게 전개 되어 왔는지도 상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쉐퍼는 현대 사상의 근원적 뿌리를 캐내고자, 아퀴나스와 칸트, 루소, 헤겔 그리고 키에르케고르를 역사적으로 분석한다. 그리고 각 시대에 있어 그들의 사상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문화 속에 적용되었는지, 과학, 미술, 음악, 대중문화의 영역의 묘사들을 제공한다.


여기서 우리는 상층과 하층의 이원론적 구분과 하층이 상층을 집어삼키는 결과들을 볼 것이다. 그로 인해 사상계에 어떤 병폐가 찾아왔고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흔들었는지도 살피게 될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20세기의 핵심적 문제는 반이성주의가 수반한 절대적 진리관의 붕괴와 상대주의적 인식론이다. 이는 정치, 예술 등 전 문화 영역에 스미어 인류 문화의 퇴보와 부패를 조장하였다. 그러면 그 뿌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을 위해 쉐퍼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로부터 출발한다.


a)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자연과 은총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과 은총’(nature and grace)으로 불리는 문제에 관한 논의의 길을 최초로 열어 놓은 사람이다. 아퀴나스의 ‘자연과 은총’ 구분은 오직 천상의 영역만을 강조하던 비잔틴적 사고 방식을 극복하고 두 영역의 불연속성을 제거하려는 데 있었다. 곧 자연과 은총의 통일성을 추구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아퀴나스 이후 두 가지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는 긍정적인 면이 존재하나 궁극적으로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아퀴나스 이후로 오랜 세월 동안, 자연과 은총의 통일성에 관한 갈등이 전개되었고, 합리성은 양자에 관한 어떤 사실을 말해줄 것이라는 소망을 가졌으나 결과는 부정적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은 르네상스적 휴머니즘 요소들이 탄생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연이 좀 더 적절한 위치를 갖게 되었지만-이것은 성경적 창조관에 비추어 타당한 것이지만-인간의 인식과 삶이 하나님과 결별되는 인간 지성의 자율성의 영역이 배태되는 기초가 되기도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문제는 그의 타락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의지는 타락했지만, 인간의 지성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러한 불완전한 타락론으로부터 많은 난점들이 파생된다. 르네상스는 이러한 허점을 빌미로 인간 지성에 감당할 수 없는 왜곡된 자율성(the autonomous)을 부여했다. 아퀴나스의 타락론의 결과 성경과 독립적으로 추구될 수 있는 자연신학이 성립되었다. 물론 아퀴나스는 자연신학과 성경의 상관성을 존중하고, 통일성의 소원 속에서 사상을 전개했지만, 그 결과는 안타깝게도 자율적 영역의 수립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자율로부터 철학과 인식이 하나님의 계시와 분리되게 되었다. 결국 아퀴나스의 위층과 하층의 구분은 하층이 위층을 집어삼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휴머니즘 철학자들이 더욱 자유롭게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자리를 잡게 되었고, 르네상스가 그 절정에 달했을 때, 자연이 은총을 집어 삼켜 버렸다.


여기서 강조될 것은 자연이 자율적인 것으로 되면, 그것은 파괴적이 된다는 사실이다. 자율적 영역의 개념을 허용하는 순간, 우리는 아래층의 요소가 위층의 요소를 집어 삼키기 시작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아퀴나스의 ‘자연과 은총’의 구분으로 철학이 성경과 분리되고, 세계관은 위층과 아래층으로 이원화되었다. 그리고 아래층은 위층을 잡식했다.


b)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① 종교개혁의 위층과 하층의‘통일성’제공: 쉐퍼는 이 지점에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주목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상이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통일성의 문제를 풀기 위해 인문주의자들이 의지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로마 카톨릭 교회 속에 점증하던 전통적 휴머니즘, 인간의 자율적 지성을 결과한 불완전한 타락의 개념, 성경과 상관없이 추구될 수 있는 자연신학의 가능성 모두를 부인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전적 타락이라는 성경적 개념을 수용하고 전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았지만, 그의 지성과 의지를 포함한 타락이 있었으며, 하나님만이 자율적 존재라는 사실을 확고히 붙들었다. 이것은 두 측면에서 참이다. 첫째로 최종적 권위의 측면에 있어서 자율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신학은 없으며, 오직 성경만이 참된 진리이며 그것에만 의존해야 한다. 둘째로 구원의 특면에 있어서 자율적인 존재로서 인간이라는 개념이 없다. 오직 구원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한다.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은 신앙의 빈손을 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오직 믿음으로-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성경과 오직 신앙이다.


② 종교개혁과 인간관: 성경은 두 종류의 지식을 제공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 및 자연에 관한 지식이다. 이는 칼빈을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입장과 맥을 같이 한다. 칼빈도 하나님에 대한 이중적 지식을 언급한 바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지식은 성경에 기초에 의해서, 완벽한 지식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참되고 통일된 지식을 의미한다. 개혁자들의 사상적 탁월함은 본서의 주제에 비추어 볼 때, 아퀴나스가 구분한 상층과 하층부가 하나님의 계시 곧 성경 아래 통일된 영역이 된다는 데 있다. 성경은 자연-우주와 인간-에 관한 참된 계시를 주셨다. 종교개혁 사상 속에는 ‘지식의 참된 통일성’제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과 자연, 예술과 과학, 전 문화 영역에 있어 자율성을 제거하지만, 그 안에 참된 자유를 부여한다. 성경은 이 모든 영역을 지배하며, 각 영역은 성경 아래 종속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유하다.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은 인간의 자율성을 제거함과 동시에, 현대적인 결정론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의미있는 역사 속에서 의미있는 인간의 개념을 창출한다. 성경은 인간에게 타락된 존재로서 참된 도덕적 죄책을 부과할 뿐 아니라, 실제적이고 참된 선택을 했기 때문에 참된 도덕적 죄책을 지닌 인간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성경은 하나의 체계를 지니고 있다. 만물은 처음으로 돌아가고, 그리하여 기독교 체계는, 만물이 그 체계의 정점 아래 있기 때문에, 유일한 미와 완전성을 소유한다. 만물은 ‘거기 계시는 하나님’의 본질과 함께 시작한다. 이것이 전체의 시작이며 정수라고 쉐퍼는 주장한다. 만물은 전혀 모순없이 이것으로부터 연원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격적이시며 무한하신 분이라 계시하며,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계시한다. 만물은 무로부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러나 자연과 기계와는 달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격적 존재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관계한다.


③ 르네상스의 부도덕과 종교개혁의 전인(全人):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사상 차이에서 비롯된 실제적 결과들이 존재한다. 쉐퍼는 ‘여성 해방 문제’를 예로 든다.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는 모두 여성 해방에 기여를 했지만, 르네상스의 여성 해방 개념은 부도덕성이란 큰 부작용을 낳았다. 쉐퍼는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온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자연과 은총에 관한 이원론적 구분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위층은 “정신적 사랑”과 “관념적 사랑”을 가르치는 소설가들과 희극시인들이 차지한다. 자율적 인간은 일원론에 입각하여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여기서 확인하는 단순한 사실은 이 자연-은총의 구분은 르네상스 시대의 전반적인 삶 속에 스며들었고, 또 자율적인 “아래층”이 항상 “위층”을 잠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성경관은 휴머니즘이나 플라톤적 이원론-영혼은 중요하고 육신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매우 달랐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은 전인을 지으셨고, 그러기에 전인에 관심을 두신다. 둘째, 역사적 시공간에서의 타락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전인에 영향을 미쳤다. 셋째, 구세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우리가 성경의 계시에 따라 소유하고 있는 지식의 기초에 따라, 전인에 대한 구속이 있다.


여기에 전인을 지배하시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주되심이 존재한다. 따라서 성경은 위층과 아래층에 동일하게 주되신 그리스도를 계시한다. 여기에 통일성이 있다. 쉐퍼는 이러한 의미에서, 인본주의적 르네상스의 인간의 딜레마에 대한 종교개혁의 답변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반대로 르네상스 인간의 이원론은 근대의 슬픔과 더불어, 휴머니즘의 근대적 형식을 낳았다고 지적한다.


c) 칸트(Kant)와 루소(Rousseau): 자유와 자연

이는 헤겔에 이르기 전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대에 이르게 되면, 자율의 의미가 충분히 전개된다. 따라서 이 과정에 있어 상층과 하층의 자리잡은 개념의 변화가 발견된다. 이전에는 ‘자연과 은총’의 구도였던 것이 18세기경에는 은통의 개념이나 계시의 개념은 사라지고 ‘자연과 자유’(nature and freedom)이라는 말과 구도로 변화되었다. 쉐퍼는 이것을 세속화된 상황을 표현하는 격변이라 표현했다.


칸트의 체계는 현상적인 자연의 세계를 본체적인 보편자들의 세계와의 관계속으로 이끌려는 시도로 인해 암초를 출현시켰다. 칸트에 와서는 위층과 아래층 사이의 경계선이 더욱 두꺼워 졌다. 이 시기에 자연은 결정론이 나타나기 시작할 정도로 더욱 완전한 자율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물리학적, 기계적 영역에서 다루어진 결정론이 인간에게 적용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결정론이 아래층에 포함되더라도 여전히 인간은 자유를 갈망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 역시 자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제 자유와 자연은 모두 자율적이다. 곧 ‘절대 자유’가 도래한 것이다. 자유를 보전하려는 투쟁은 ‘루소’에게서 나타난다. 절대적 자유를 갈망하면 갈망할수록 자연주의적 과학이란 무거운짐과 기계로서의 인간을 압박하는 아래층의 상황이 자유의 갈망과 부딪혀 갈등을 만든다. 자율적 자유와 자율적 기계는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며 투쟁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합리적 세계에서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은 자유이므로, 과학은 저주와 욕설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루소와 같은 노력은 다만 자유에 대한 소망으로 그치고, 개인적 자기표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여기서 잘못된 것은 무엇인가? 쉐퍼는, 자연이 자율적이 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총, 자유, 그리고 결국에는 인간을 게걸스럽게 잡아먹는 것으로 귀착됨을 경고한다. 우리는 루소와 그의 추종자들처럼 자유라는 말을 필사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한동안 자유에 매달릴 수 있지만, 자유는 결국 무자유(nonfreedom)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과정으로 살펴볼 헤겔이전의 철학들은 합리주의, 합리성, 그리고 통일된 지식영역에 대한 소망이란 고전적 찰학과 사상이 견지한 세 요소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헤겔로부터 큰 변화가 발생한다.


d) 헤겔(Hegel): ‘절망의 선’으로 문을 연 인물

헤겔 이전에는 모든 사상과 모든 삶을 포괄하는 하나의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존재했다. 그러나 칸트 시대에 이르자 합리주의적 합리적 가능성들이 고갈된다. 합리주의적 전제들과 함께 시작하면서, 위와 아래의 층들의 극단적 긴장이 형성된다. 이런 점에서 칸트와 헤겔은 현대인에 이르는 관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헤겔은 어떻게 사상을 전개했는가? 헤겔 이전의 철학과 사상들의 시도들은 반정립의 기초 위에서 행해졌다. 철학적 휴머니즘은 합리주의, 합리성, 통일된 영역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아무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판단되었다. 이에 대한 새로운 제안이 헤겔에게서 나타났다. 그는 지식에 관한 이론과 지식의 한계와 타당성을 다루는 인식론과 우리가 진리와 인식의 문제를 접근하는 방법인 방법론에 있어 크나큰 변화를 만들었다. 그 핵심은 더 이상 번정립에 따라 사고하지 말고, 종합(synthesis)이라는 답변을 가지는 정립(thesis)-반정립(antithesis)의 원리에 따라 사고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상대적이다. 이러한 변화는 합리주의(rationalism)의 거듭된 실패로 인한 절망으로부터 초래된 것이다. 이 시도는 합리성(the rational)을 희생시켜서라도 합리주의를 고수하는 것이었다. 쉐퍼가 헤겔을 절망선으로 내려가지 않고 거기에 이르는 문에 불과한 것으로 본 것은 그가 이성의 종합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망선이란 종교적 의미를 얻고자 이성(합리성)을 포기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를 위해 종교적 언어를 사용했지만, 그 내용까지는 아니다. 결과적으로 헤겔을 통해 상대주의가 도래했고, 종합은 이것도 진리고 저것도 진리라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e)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절망의 선과 비약

쉐퍼에게 키에르케고르는 전정한 현대인이다. 왜냐하면 그는 통일된 지식 영역에 대한 소망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 모든 합리성(하층)은 비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낙관론(상층)은 비합리적인 것이어야 한다. 절망선은 절대기준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는 지점을 의미한다. 절망의 선은 신앙의 비약(the leap of faith)로 귀결된다. 이 비약은 통일성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이다. 두 영역의 연계성에 관한 소망은 사라진다. 상호교환의 참여는 전혀 없고, 위층과 아래층 사이에는 완전한 분리만 존재한다. 아래층의 합리성의 영역에서 인간으로서의 인간은 죽는다. 거기서 우리는 단순히 수학, 특수자들, 그리고 기계론을 가질 뿐이다. 인간은 의미도, 목적도 가치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합리성의 영역에서 인간은 비관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비합리적, 비이성적 비약에 입각하는 위층 곧 낙관주의를 제공하는 비합리적 신앙이 놓여 있게 된다. 완전한 현대인의 이분법이다.


이러한 절망선과 비약을 중심한 실존주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사상과 문화적 지류를 형성했다.


첫째, 세속적 실존주의를 낳았다. 이들은 모두 합리적인 ‘아래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체계의 기초는 비합리적인 비약에 있다.


① 장 폴 사르트르: 합리적으로 볼 때, 우주는 부조리 하다. 그러므로 여러 분은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해야 한다. 어떻게? 그것은 의지의 행위를 통해 여러분 자신을 증명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② 야스퍼스: ‘최종적 경험’ 즉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확 실성을 심어주고, 의미에 대한 소망을 제공하는 경험에 관해 말한다. 이 개 념이 지닌 문제는 그것이 합리적인 것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어 떤 다른 사람이나 또는 당신 자신에게 그 내용을 전달할 방법이 전혀 없다 는 것이다.


③ 하이데거: 그는 불안(Angst)이란 개념에 모든 것을 연루시켰다.


둘째, 종교적 실존주의이다. 이들은 종교적, 영적 문제들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분리시킨다. 곧 기독교가 가지는 계시의 객관성에서 비롯된 합리성을 제거한다. 성경은 오류를 포함하지만, 신앙의 가능성은 있다. 성경은 객관적이고 명제적인 계시가 아니다. 신앙은 이성으로부터 분리된다. 그들은 상층부에 비합리적인 것으로서 내포어들을 두고, 하층부에 합리적인 것들 곧 정의어를 둔다. ‘비약의 신학’은 정의되지 않은 말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그런 의미에서 틸리히는 “하나님 배후에 있는 하나님”(God behind God)에 관한 말한다.


셋째, 이러한 실존주의의 절망선과 비약은 문학과 예술 분야 속에 나타났다. 하이데거의 시 개념 속에, 예술에 있어 앙드레 말로, 피카소, 번스타인, 외설문학, 대중문화 그리고 복음주의 자들의 어떤 태도 속에 스며있다. 실존주의의 병폐는 이들 문화 속에서 소통의 상실, 퇴폐, 마약, 신비주의 등으로 표출된다. 하층 곧 합리성에 대한 절망으로 인해 일어나는 허무주의를 상층의 비약으로서 극복하고자 하는 경향이 외설과 마약, 비논리적인 신비주의 등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 나타나는 문제는, 그들이 전제들을 입증하거나 반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를 만나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에 있다. 쉐퍼는 명제적 성경의 진술보다 경험을 더욱 중시하려는 경향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신앙은 예수를 의미없는 구호로 부를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되고 명시된 예수를 신앙해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성경과 상관없는 예수를 스스로 만들고 부르며 사랑하고 수고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철학적, 문화적 이원론적 두 층(상층, 하층)구조는 삶의 모든 영역에 모순과 절망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허물어뜨리고 왜곡시켰다. 아퀴나스로 비롯된 두 층의 구조는 하층이 상층을 집어삼키므로 신앙의 영역을 침식시키고, 절망의 선과 비약의 구도에 이르러 성경과 신앙을 분리시킴으로 의미없는 구호로서 예수를 섬기게 만들었다. 그러나 쉐퍼는 두 층의 유일한 통일을 제공하는 체계로서 성경의 계시를 제시한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문화, 예술의 모든 것들을 통일된 체계 안에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성경인 것이다.


2. 쉐퍼의 변증적 대안


a) 합리성과 신앙

쉐퍼는 비성경적 방식으로 신앙을 합리성과 대치시킴으로써 따르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 결과는 도덕과 관련된다. 신앙을 그 합리성으로부터 분리하게 되면, 위층의 기독교와 일상생활에서의 도덕의 영역의 관계를 설명할 수가 없다. 이런 구도 속에서는 위층에 범주가 존재하지 않으며, 범주를 제공할 방도도 없기 때문에, 상대적 도덕들만 갖게 된다. 두 번째 결과는 적절한 법의 기초를 갖지 못한다. 세 번째 결과는 악의 문제에 대한 답을 상실하게 된다. 기독교의 답변은 역사적, 시공간적, 실제적 그리고 완전한 타락에서 찾아진다. 실제로 프로그램화되지 않은 인간이 존재하며, 사탄의 악의 결과로 임한 악과 인간의 역사적 공간의 반역과 더불어, 하나님이 의미있는 역사 속에서, 의미있는 인간을 만드셨다는 기독교의 답변이 행해질 수 없다. 넷째, 기독교를 위층에 둠으로써, 곤경의 한복판에 있는 20세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박차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합리주의를 거부하고 합리성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현대인은 검증과 토론에 열려있는 것의 기초를 따라 삶에 대한 통일적 답변을 가지면, 합리성을 되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해 하나님 자신과 성경이 역사와 우주를 다루고 있는 영역에 관해 진리를 말씀하는 성경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과 피조물로서 인간은 무한성의 측면에서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만, 인격성의 측면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으므로 관계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우리는 표류하는 존재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통일되고 일관된 진리의 답변을 취할 수 있는 존재이다. 예수님 자신은 자신의 권위와 기록된 성경의 권위를 구분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의 권위의 통일성과 성경의 내용에 따라 행하셨다. 여기서 쉐퍼의 중요한 개념이 도출된다. “이 모든 것 속에 인격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삶의 모든 국면을 지배하시는-주님이시다.”


b) 성경은 스스로 설 수 있다.
성경은 내가 해야 할 바를 내가 할 수 있는 이유에 관한 답변-즉 나 자신과 함께 시작하는 것-을 제공한다. 성경은 태초에 항상 존재하셨던 인격적-무한한 하나님에 의해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말씀한다. 또한 성경은 범신론을 부정하는 의미로서 하나님 자신의 외부에 만물을 창조하셨다. 이런 이유로 세계는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존재이다. 참된 역사적 원인과 결과가 존재한다. 참된 역사의 기원이 존재하고, 역사 자체가 존재하며, 참된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특별히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관을 가르친다. 인간의 기본관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위를 향한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아래쪽 방향에서 발견하려 할 것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최종적으로 동물과 관계하게 된다. 오늘날 현대인이 갖은 병폐와 신음은 자신을 기계와 관계시키려는 추구 속에 함축되어있다. 성경이 주는 위의 사실들이 부인될 때, 인간은 통일적 지식의 체계와 전제를 잃음으로 인해 표류하고 절망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명확하고 합리적인 전제와 통일된 인식과 삶의 체계를 제공한다. 쉐퍼는 17살 때 회심 경험으로 인해 이를 몸소 경험했다.


c)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말의 의미
이 말을 사용함에 있어, 두 가지 개념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합리주의적 또는 휴머니즘적 개념이다. 이것은 완전히 독립적으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시작하는 인간은 궁극적 진리를 향한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신념이다. 그러나 이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히 넓은 영역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구축하려는 오만과 상통한다. 이들은 이것을 주장하지만, 그렇게 할 능력도 방도도 없다. 따라서 이를 추구하게 될 때의 귀착점은 절망과 부조리뿐이다. 둘째, 기독교적 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자신과 함께 시작할 수 있다. 무한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인격적인 존재로 서 있다. 인간은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 아니므로 인간은 여전히 가치있는 존재이다.


d) 필요로 하는 지식의 원천: 성경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향해 인격적이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께서는 언어의 형식으로 기록된 명제적 진리 안에서 의사소통을 허락하신다. 기독교는 토론될 수 있는 단위의 이념들로 구성되는 체계이다. 이 체계에는 출발점이 있고, 그 출발점으로부터 모순없이 진행한다. 그 출발점은 모든 다른 존재의 창조주로서의 무한한-인격적 하나님이시다. 기독교는 완전히 검증이 불가능한 ‘어둠 속에서의 비약’에 기초된, 애매한 비소통적 경험의 단위와 대조된다. 회심이나 영성은 이런 비약이 절대로 아니다. 회심과 영성은 거기 계시는 하나님과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지식과 확고하게 관계되어 있다.


쉐퍼는 우리 자신에게 말하든,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든, 혹은 비기독교인들에게 말하든, 복음을 소통하기 위해 추구할 때, 반드시 파악할 것 두 가지를 언급하므로 그의 글을 마감한다.


첫째, 참으로 불변적인 사실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체계를 존재하는 그대로 유지시키며, 가변적인 조류와 구별할 필요성이 있다. 이는 소통의 간극을 극복하기 위해 기독교 진리를 변화시키려는 경향을 가진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고 경계된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 주변의 획일적 여론과 아무런 차이가 없어지고 말며, 기독교를 전달하지도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이러한 불변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완고한 폐쇄주의와 구별되어야 한다. 쉐퍼는 진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진리를 붙들고, 이와 함께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깨닫는 것과 그들의 사고방식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그 시대와 복음을 전할 대상의 사상을 반영한 언어들을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이렇게 하여 쉐퍼는 이 책의 목적을 표명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단순히 지성적 논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20세기에 기독교 복음을 전달하는 것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정말로 중요하다.”


III. 결론


우리는 「이성으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쉐퍼가 직면했던 문제를 보게 된다. 그가 직면한 문제는 17세 때의 회심 사건 직후 스스로 직면해 보았던 문제이며, 이제 지도자로서 그가 전도할 대상들이 짊어진 문제이기도 하였다. 쉐퍼는 이 문제를 이 책에서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전도라는 중요한 목적을 위해 두 가지 필요성을 깨달았다.


첫째는 전도 대상자들이 속해 있는 현대라는 시대가 안고 있는 사상과 문화에 관한 진단이다. 이는 전도적 목적 속에서 분석되고 평가된 20세기 문화관 비평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전도의 예비적 단계로서 취해졌다. (Pre-evangelism). 20세기의 신앙문제는 그 사상과 문화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잃고 방황하는 데는 사상적 뿌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이 문제의 핵심을 ‘반지성주의’에 두었다. 실존주의는 신앙을 비약의 영역에 두고 상층과 하층의 통일성을 포기해 버렸다. 이는 절대기준에 준거해 인식하거나 행동하는 것에 대해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사상의 역사적 뿌리는 아퀴나스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잘못된 타락론에서 비롯된 자연과 은총의 이원론적 구분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구분은 하층이 상층을 집어 삼키고, 결국은 자연과 자유의 구조로, 실존주의에 가서는 절망선에 이르러 하층의 모든 합리성은 부인되고 상층으로의 의미없는 비약으로 귀결되었다. 쉐퍼는 이러한 상황을 전도자는 이해해야 하며, 토론을 통해 전도대상자들이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쳐 기독교 복음이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시될 가능성의 여지가 배태된다고 생각했다.


둘째, 이러한 과정을 거쳐 쉐퍼의 귀결점은, 상층과 하층의 분열을 치료할 유일한 대안으로서 성경을 제시한다. 성경은 무한하지만, 인격적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무로부터 지으셨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특별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아 인격적 측면에서 하나님과 소통의 가능성을 갖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명제적인 계시 곧 언어로 기록된 객관적 계시를 통해 소통하시고자 하셨다. 이런 이유로 인해 기독교는 토론될 수 있는 단위의 이념들로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창조주로서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체계는 출발점으로부터 모순 없이 진행된다. 예수님 자신은 이런 의미에서 자신과 성경의 권위를 동일시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삶의 모든 국면을 지배하시는-주님이시다. 주님의 통합된 주권사상(신칼빈주의의 영역주권과 유사한)으로 인해 상층과 하층의 통일이, 천상의 것과 지상의 것의 통일이, 신앙과 실제적 삶과 도덕의 통일이 가능해 진다.


쉐퍼는 이러한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과정과 진술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쉐퍼는 복음전도와 문화의 상관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 시대의 그리스도인이자 지도자로서 시대를 이해하고 그 안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치열한 싸움과 열정, 그리고 영혼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한다.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본질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삶의 국면에서 주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준데 있다. 이러한 통찰은 진리와 세속적 사상과 문화의 긴장과 투기장 속에 우리가 용감히 서 야할 소명의식을 고취시킬 것이며, 이 싸움에 있어 성경이란 엄청난 방패와 무기가 우리를 안위할 것이라는 소망도 고취시킨다. 우리가 시대성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진리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시대를 읽어내고, 용감히 복음을 전하도록 고무하는 쉐퍼의 외침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출처: 박동근 목사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