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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대하여 - 이금용 목사

Bavinck Byeon 2016. 8. 22. 23:36

신앙에 대하여


이금용 목사(IRC, 전주한사랑교회)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 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 고전 15: 2절 -


이제 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말은 사전(Century Dictionary)에 의하면 “완전한 증거가 구비되지 않은 명제(命題)나 진술(陳述)의 진리성에 대한 마음의 동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믿을 내용과 믿는 자의 자세에 의하여 나오는 마음의 현상인데, 결국 그 내용이 참된 것이 되어야 하고, 그에 대하여 바른 자세를 가지는 가운데서 참된 믿음이 거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에 그 사람이 믿고 있는 그 내용이 무엇이냐 ? 하는 것과 그 사람이 어떻게 믿고 있느냐 ? 하는 것에 따라서 믿음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가 어떤 사실에 신뢰를 가지고 나간다 하더라도 그 사실이 참이 아닐 때는 그의 믿음은 별 가치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그의 믿음은 자신을 오도(誤導)시킬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내용이 진리라 할지라도 그가 바른 태도로 대하지 아니하면 그 진리가 자신에게 전혀 어떤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믿음이란 믿을 객체(客體)와 믿는 주체(主體)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자가 다 진정한 것 일 때에만 그 믿음으로 말미암은 가치가 발생하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1. 신앙의 대상과 내용(內容)이 중요함


사도 바울께서는 신앙의 내용과 신앙의 자세에 대하여 두가지를 다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한 그 말이 곧 신앙의 내용으로서 손색이 없는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 - 갈1:11-12 -


만일 그것이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믿을 수도 없고, 또 믿는다 하더라도 믿음의 유익이나 효과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도바울 자신의 입으로, 글로 전달되더라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그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의 대상과 그 내용이란 성삼위 하나님과 그 분으로 말미암는 계시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어느 정도 계시를 통하여, 성신의 역사로서 받아서 믿기 시작하고 그후 점점 더 갈수록 알아가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보이신 여러가지 사실들도 갈수록 더 알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더욱 견고하여져 가는 것입니다. 결국 건강한 신앙이란 그가 믿는 내용과 대상에 의하여 만들어 집니다. 무조건 믿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믿을만한 분과 믿을만한 내용을 믿어야 좋은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여야 할 대상은 오직 성삼위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게 되는데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사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그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 역시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참된 효과를 발휘하는 믿음이란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방향을 바꾸어서 잠깐 생각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데 있어서는 같은 신앙의 내용을 가질지라도, 거기서 나아가 우리가 어떤 소원이나 기대나 일을 수행할 때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될 줄로 믿는다는 말을 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여 주실 줄 믿고 하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잘되지 않을 때는 믿음이 없어서, 내가 믿음이 없는 연고로 그 일이 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그 분의 능력을 믿는다는 것과 내가 원하는 어떠한 일을 될 줄로 믿는다는 것과는 별개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그 능력을 신뢰하고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초로하여 거기에 의지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것을 의심하여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우리가 구하는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지 나의 신심(信心)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내가 구하는 그것을 될 줄로 믿는 것은 나의 문제이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여 주신다는 것하고는 별도의 문제인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실 것이라는 객관성있는 근거가 구체적으로 나에게 주어졌다면 그것은 그렇게 될 줄로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없다면 그 요구는 나의 소망사항으로 머무는 것이지 나에게 이루어 주실 사실로서는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간혹, 하나님께 대한 열렬한 믿음이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신념(Belief)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항간에 소위 신앙운동(Believeism)이 많이 있는데 그것은 신념운동이지 올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믿고 구하라는 것은 구하는 자가 가져야 할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에 대한 신뢰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이제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실 수 있는 관계,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고 무엇을 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믿고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믿지 못하거나 의심하여 가면서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구하는 것을 아버지께서 다 주실줄로 믿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인 것입니다. 믿으라는 말은 그렇게 믿으라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는 이만큼 해두고, 적어도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반드시 믿어야 할 내용이 무엇이냐 ? 할때에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인류에게 주신 객관적인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는 어떤 개인의 문제를 놓고 개인에게 주어진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약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언약, 또는 계약은 과거에는 말씀의 형태, 곧 언약의 형태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그 이전의 족장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서는 하나의 실제사건, 사실로서 세워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신약시대에 있어서 언약이란 예수 그리스도 사건 자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말씀을 통하여 듣게 되는데 성경말씀은 그래서 크게 이야기 하면 그 구원의 사실을 중심으로 하여 기록되기 때문에, 이 성경말씀, 곧 계시를 우리는 믿고 받아 들여야 그 언약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약간 구별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든지, 말씀을 믿는다든지 하는 것은 곧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그 복음이 말하고 있는 그 사실 자체, 곧 언약자체(言約自體)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가지는 믿음이란 복음의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서 복음의 사실 자체를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주께서는 내 피로 새언약을 세운다고 하셨는데, 그 새 언약은 곧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듣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전달된 내용을 믿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전달된 사건자체, 언약사건 자체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내용을 믿기 때문에 그 내용이 말하는 그 사건쪽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구분하면 그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 복음이 담고있는 사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사심의 새언약의 사건 자체에 자신을 의존(依存)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죄인인줄도 깨닫고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인 것을 알게 되는데, 이러한 것이 깨달아지는 사람은 성신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깨닫게 하시는 역사(役事)를 그 사람속에서 하신 것입니다.


이때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실을 우리가 힘입어야 함을 깨닫게 하고, 거기에 의존하게 하는 소위 믿음을 일으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 전달되는 말의 내용을 받아들인다는 것만 아니라 그 복음이 말하는 사건 자체에 나를 의존하게 되는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말을 믿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을 받아들인다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이 말하는 사건이 곧 나를 위한 사건임을 알고, 그 거룩한 새로운 언약 가운데 자신을 맡기는 마음과 생존과 인생의 태도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앙은 결국 사건, 사실에 대한 신앙이지 어떤 설명이나 전달 그 자체에 대한 신앙으로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실은 그 사실에 대한 보도를 통하여 알게 되고, 그 정확하고 올바른 진리성있는 보도는 우리로 사실에 인도하여 그 사실로 부터 효력을 얻게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전달이나 설명은 그 사건 자체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에 신뢰할 만하고, 또 믿어야 할 내용입니다. 그 소리를 듣지 않으면 그 사실에 대하여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어서 믿고, 그 복음의 내용이 가리키는 그 사실 자체에 접하게 되고, 사실적으로 그 사건에 자신을 의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에 대한 신앙으로, 즉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실에 자신을 거기에 동일화(Idenfication)시키는 그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구원의 실질적 효과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새 언약에 가담하는 약속에 대한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세워진 그 계약에 따라 자신을 그 죽으심과 사심에 의지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10:9)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 그 자체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서 그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온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은 믿음을,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믿음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10절)는 것은 어떤 행위보다 마음의 태도라 할 그 믿음이 곧 예수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에 자신을 일치시켜 의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앞에서 언약에 참여한 자가 되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의롭다 함(救援)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원에서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복음의 전체 내용을 말하기 보다는 믿음이란 그 믿는바 내용과 그 사실이 먼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고, 그리스도로 부터 전달받은 그 복음 내용을 그대로 기억하고, 그 사실을 참되게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2. 헛된 신앙의 형태들


지난 시간에 서론적으로 신앙이란 그 신앙의 정당한 대상이나 내용과의 관계에서 그 정당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에 "무엇을 믿는가?"하는 그 신앙의 내용이 분명하여야 하고 또 그 내용은 그것을 믿는데서 오는 그만한 효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렇다면 믿는 자의 편에서도 그만한 신앙의 자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하는 주체나 신앙되어지는 객체가 다 정당한 것이 될 때에야 거기에서 가치가 생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신앙하는 사람의 모습을 볼때 외견상으로는 구별하기가 쉽지않게 하나의 믿음이라는 것을 가진 것 처럼 보이나 별 효과를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 으로 말하면 신앙이란 원래 구원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있어서 필요한 도구와 같은 것입니다.


구원의 효과를 내지 못하는 믿음이란 성경에서는 진정한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방도로서, 즉 구원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한 방편으로서 믿음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그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 (롬10:10)


그러나 간혹 기독교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그 믿음이 아닌 형태의 신앙이 있어서 스스로 속거나 혼란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신앙과 헛된 신앙이 다같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혼란되어 있어서 자신도 속고 다른 사람도 속이는 신앙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혁 교회에서는 그 헛된 신앙을 세가지 종류로 나누어서 이야기 하여 왔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신앙은 신앙이라고 부를 가치도 없지만 스스로 신앙이라고 장식하고 나서기 때문에 우리는 편의상 신앙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1.역사신앙(歷史信仰)(눅8:28)


역사적인 어떤 사실을 인정하듯이 기독교의 역사적인 여러가지들을 인정하고 승인하지만 자기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데 필요한 요소들이 그 신앙속에 부재(不在)한 경우를 말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할때에 세계 2차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하여 항복을 받아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역사적인 사실을 승인합니다. 그러나 그 승전의 사실을 승인한다는 것이 나에게 어떠한 특별한 의미를 반드시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년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찬동은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렇다고 믿을 수도 있는 것이며, 자신이 가담하고 있는 종교적인 분위기가 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인정하고 나아가기 때문에 자신도 거기에 찬동을 하여와서 이제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승인하고 나아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이나 살아나심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특별한 미를 주는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경우가 역사신앙 (Historical Faith)이라는 것입니다.


이 역사신앙이라는 것은 역사적 신앙 (Historic Faith)과는 다릅니다. 역사적 신앙이란 뚜렷하게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전승되어 내려온 신앙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신앙"이란 자신에게 주는 어떤 특별한 효과가 없이 어떤 사실을 하나의 지식으로 인정하고 나아가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에도 나는 그것을 믿는다고 말은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러한 신앙은 다른 말로 표시하면 지식신앙 (知識信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는 신앙입니다. 예를들면 예수님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고 그가 어떤 분이셨는지에 대하여 여러가지를 들어서 알고 거기에 인정을 하지만, 예수님과 자신과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으며 그가 나에게 어떻게 중요한 분이신지에 대하여서는 아는 바가 없는 신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귀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서 엎드리면서 말하기를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 ”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상 그 당시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곧 신(神)이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그것을 배워나가는 과정에 있었던 때입니다.


그러나 그 귀신(악령)은 알았던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 “ 너희가 하나님이 한분이신 줄 믿느냐 ? 잘하는도다 ! 귀신들도 또한 믿고 떠느니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의 유일신관(唯一神觀)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믿는 사람이고, 귀신까지도 그 사실을 믿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적 신앙"을 가진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귀신도 성부, 성자, 성신을 알고 믿고 그 앞에 떨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믿고 떤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 사실을 인정하고 마는 정도의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셔서 그를 경배하는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검토하여야 합니다. 그저 성경의 어떤 내용이나 사실들을 수긍하고 나간다고 해서 구원받은 신앙으로 족하다고 여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새로운 지식을 자꾸 배우고, 모르는 것을 지식으로 자꾸 섭취하는 일을 재미있게 여겨서 그 지식의 증가에 치우쳐서 나아갈때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일은 신학자들이나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일이나 예배를 올리는 일은 대강으로 하고 주의를 하지 않으면서 성경을 공부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나가면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활동이나 과시나 학문의 즐거움이나 다른 목적으로 취하여 공부를 하는 것이냐 ? 구원의 은혜의 방도로 취하느냐 ? 하는 구별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을 얻게하고, 나아가 신령하게 장성하여 가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 된다는 데에 그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을 그렇게 그러한 간절한 자세로 공부하지 않고, 종교상의 지식을 취하는 자세로 대한다면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대부분 오래 교회를 다니고 종교상의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별로 자라난 흔적이 없고, 하나님께서 어느 시기에 위기를 주시면 넘어지고 마는 경우가 많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가 성경의 사실을 다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도(Media Gratiae)로써 자기에게 쓰여지지 않으면 진정한 신앙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항상 이런 점을 주의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가짐으로서 가정이 좋아지고 또 거기에서 오는 혜택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러한 경우 성경이 주는 일반적인 혜택을 가지는 정도에서 머무르고 피상적인 종교상 지식의 교류는 오고 가지만, 실질상으로 은혜의 결과를 자신이 누리는 사실이 별로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속에서 "역사신앙" 또는 "지식신앙"이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 27절에서 28절을 참고하겠습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이 내용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한 말인데 여기서 믿는다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선지자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안다는 정도를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이라 할지라도 단순히 알고 인정하는 정도의 신앙이란 진정한 구원적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칼빈 선생께서는 이러한 형태의 신앙을 형식적 신앙 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환상 이요, 그림자 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형태의 신앙이라는 것은 믿음이 가져오는 중요한 결과, 즉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 멸망치 않는다는 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구원을 얻는다는 점에서 독특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2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라고 하였는데 이말을 달리 풀어서 이야기 하면, 이 현세에서는 구원이 자기에게 있다는 그 증거로서 자기속에서 믿음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안에 있는 믿음은 구원의 실증, 즉 나의 구원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적 신앙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는데(엡2:8), 이 신앙이 우리에게 있어서 작용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사실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요, 실증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실증이 될만한 믿음, 곧 구원적 신앙에는 그만한 요소가 거기에 내포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점에 대하여서는 앞으로 다루겠지만 우선 우리는 먼저 그러한 구원의 사실을 확실하게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증명하여 줄만한 신앙이 아닌 것들을 구별하여 놓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바로 "역사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역사적 사실의 내용을 안다고 해서 구원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을 하여서 어떤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서 어떤 내용을 알고 있으며, 기독교에 오래 접하여서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혹시 기독교가 사회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떠들어도 그것은 역사신앙으로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이며, 기독교를 하나의 지식체계로 학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곧 구원적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구절을 보아도 악령들도 하나님이 한분이신 줄을 믿고 떤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참 신이시요, 그분은 거룩하시고 천지의 대권을 가지시고 다스리시며, 사탄과 그의 세력들을 다 심판하시는 엄위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심을 알고, 자신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그리고 믿었지만 그믿음이 자신의 구원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기독교의 신관이나 체계나 어떤 지식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으로서 그가 신앙인이라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생활의 열매가 나타나지않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 생활상으로 작용되어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러한 신앙이라면 귀신들도 가지고 있는 신앙이 아니냐고 지적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적 신앙"이라고 할것 같으면, 거기에 생활상으로 나타나는 작용과 요소가 있는 법인데 그것이 없으니 그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 나왔던 그 귀신이 하는 말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눅8:28) 즉, 엘 엘리욘 이라 하면서 예수님은 그 분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마8:28-29의 같은 병행구절을 보면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라고 하였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벌써 귀신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도 알았고,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경륜을 알아서 아직 자기들이 심판을 받을 시기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자기들은 이 예수님을 통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까지도 알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의 경륜사(經綸史) 또는 구속사의 구조까지 알고 자신의 멸망까지도 믿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와같이 구원적 신앙으로서는 아무 실증없는 신앙을 가지고서 여러가지 지식을 가지고 신앙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 검토를 하여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직책이나, 성경 상식이나, 교회의 제도나 관행을 잘아는 것이나, 오래 교회에 나갔다는 사실만으로 증명해 주지 못합니다.


앞으로 계속 복음과 신앙에 대하여 잘 들어서 확실하게 자기를 파악하시고, 자기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여 나아가야 할 것인가 ? 를 결정하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일시신앙(마13:5-6,20-21)


다음으로 헛된 신앙의 형태로써는 일시신앙(Temporal Faith)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전도를 받고 즐거워하면서 모든 것이 수용적이고 잘 받아들이고 어떤 종교 행위에 반응도 즉시 보여서 매우 희망적인 신자로 생각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는 매우 기뻐하면서 신속하게 종교에 가담하여 날로 자라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누구나 “아 그 사람 성장을 잘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 구원의 신앙이 아닌 "일시신앙"인 경우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가운데 그 점을 보여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 마13:5-6 -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을 통하여 전파되어 가는 성격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전파되는 말씀에 대하여 보이는 반응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이 그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 하는 것과 아울러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땅에서 천국복음이 전파되고, 그 말씀에 올바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어 나갈 때에, 그 반응이라는 것이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반응이 언제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정당한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이든 유사한 반응을 보이고 나설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를 놓고 생각을 해보면, 그러한 자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21절)라고 풀어 주셨는데, 이 사람이 넘어졌다는 점에 있어서는 구원의 길에 서지 못하였다는 것이요, 그가 넘어진 것은 그에게 정당한 신앙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가 즉시 기쁨으로 받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어떤 형태의 신앙이라는 것을 잠시라도 보이고 나섰다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이 가진 일종의 신앙이라는 것은 구원적 신앙이 아닌 잠시 신앙의 형태를 유사하게 취하고 반응을 보이고 나온 경우인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은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을 구원하면서 이 땅위에서 진행하여 갈때는 그렇게 일시신앙 과 같은 형태도 발생을 한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 천국 복음을 들어서 진정으로 깨닫고 결실을 하는데서 나타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지 그러한 "일시신앙"의 구조와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넘어지지 않고 견디고 나가면 결실 있는 신앙이 된다는 권면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 잠시 있다가 넘어진 신앙의 경우 가운데서 그가 그럴 수 밖에 없는 필연을 살펴보고, 그리고 정당한 구원의 신앙속에 있어야 할 그 요소가 그에게 없었다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 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에나 지금에나 복음을 듣고 받을 때에 그릇된 태도로 받았다면 이제는 정당한 자세를 가지고 받아야 할 것입니다.


(1)첫째로, 여기 일시신앙은 "신속한 종교적 반응"을 보이고 나선다는 점입니다.


씨가 뿌려져서 곧 싹이 나오듯이 말씀을 듣고 즉시 말씀을 받은 그 반응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반응이라는 것은 어떤 종교상의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지 정상적인 구원적 신앙의 반응은 아닌 것입니다.


마치 씨가 싹을 낼 때에 암반위의 얇은 흙에서는 뿌리가 든든하게 될 여건이 차단이 되기 때문에 위로 힘을 발휘하여 금방 싹을 내게 되는 것과 같이 일시신앙의 경우도 속도가 빠른 반응을 금방 내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말씀의 양분을 자신이 추구하는 쪽으로 뽑아 써 버리고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2)그리고 둘째는, 일시신앙은 종교적 감정을 동반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기쁨으로 받되”라는 말씀과 같이 그는 큰 기쁨을 가지고서 즐겁게 종교생활에 참여하기도 하고 여러가지에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쁨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의 큰 사실을 깨닫게 되고 알게 되는 데에서 오는 거룩한 정서를 가지며, 그가 하나님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얻는데서 오는 그러한 기쁨이 아닙니다.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기뻐하여 돌아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자(마13:44)와 같은 그러한 기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쁨은 천국이라는 그 값진 보화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려서라도 소유하고자 하는 자신의 전체의 신속한 희생적 자세가 있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일시신앙 은 전혀 그러한 자세가 없는 형태의 신앙입니다. 단지 어떤 이유때문에 기쁨으로 받은 것 뿐입니다.


(3)따라서 셋째로, 그는 잠시 있다가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 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싹이 나오는 것은 곧 나오나, 잠시 견디다가 곧 넘어지는 자 입니다. 그런데 그가 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될 때 입니다.


결국 여기에서 그는 어떤 마음의 동기와 태도에 의하여 말씀을 받아들이는 형태의 신앙을 가졌느냐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는 처음부터 "자기"를 위하여, "자기의 번영"을 위하여 신앙의 형태를 취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감정과 신속한 종교적 반응은 바로 자신의 행복이나 번영을 위하여 도움이 된다는 동기에 의해서 나타난 모습들 입니다.


결국 그 천국 말씀이 자신의 그것을 침해하고 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이 되었을 때에 그는 곧 넘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발휘와 자기 명분과, 자기 증진을 누리면서 종교를 소유하려 하였던 그가 말씀을 받아서 그 쪽으로 취하고, 자기 자신과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앞에 더이상 허용하지 않으려는 입장에 서는 한 암반과 같은 자아에 의하여 말씀은 그 마음속에서 어떠한 정상한 효과를 내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그 말씀때문에 자기 증진에 어려움이 오고, 자기 보존에 위협을 느낀다고 할때는 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어떤 특별한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러한 상태는 그의 임종시까지 지속되면서 곧 넘어지지는 않고 평생까지 갈 것이나, 그는 여전히 "일시신앙"이요, "구원적 신앙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는 현세동안만 잠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유지하나 영원한 구원을 얻는 신앙인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앙을 "현세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올바른 신앙의 태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16:24-25)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자기와 세상적인 한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갈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거기에는 기독교의 신앙이란 부재(不在)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자기를 전부 드리고, 그의 나라를 향하여 자기 인생의 방향을 틀고서 자기의 인생의 가치를 오로지 그 나라안에서만 찾고자 하는 태도인 것이지, 자아를 윤택하게 하고 자기 행복을 거기에서 구하여 보겠다 하면 정당한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도 자기를 닦고, 자기를 위로하고 증진시키는데에 필요한 것이니까 자기의 전부가 아닌 한 부분으로 취하고 살아가는 경우는 기독교의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열심과 열정을 보이고, 신속한 어떤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적 신앙의 모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일서 2장 19절에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 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에 속하지 않고 구원적 신앙을 가지지 않은 채 유형적인 교회가운데 적(籍)을 두고 있다가 나간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일시 신앙인들 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9절도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하였는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같은 이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인데 이들은 일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징계하여 출교함으로서 교회가 이 사람들로 말미암아서 훼방을 받지 않게 하였던 것입니다.(20절)


교회는 이러한 "일시 신앙인들"의 작해(作害)에 의하여 그 신령한 행진에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들을 잘 분별해야 하고, 각자 스스로를 늘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시 신앙인들"도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반적인 혜택에 참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가 히브리서 6장 4절에서 6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한번 비취임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신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욕을 보이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교회에 베푸시는 은혜에 참여하여 자신의 그 신령한 장성에는 도움을 받지 못하지만 일반적 경험과 일반적인 혜택은 잠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초보에 머물러 있어서 그것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를 살펴야 합니다. 교회가 단순히 몇가지의 초보와, 일반적으로 경험한 어떤 체험들을 가지고 나가면 상당 수가 일시 신앙인들 로 채워질 것입니다. 항상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고 분별의 지각이 없이 살아가는 것은 장성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히5:12-14) 거기에 일시 신앙이 많이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합당한 채소를 내면 복을 받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불 사름을 당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6:7-8)


바른 신앙은 성도를 섬기는 사랑과 소망과 오래 참는 믿음과 같은 그 장성한 모습을 가져서 구원에 가까운 사실을 증거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9-12절)


3. 기적 신앙


어떤 역사적 사실을 지식으로 찬동하고만 나가는 형태의 신앙을 역사신앙(Historical Faith)이라 하고, 현세에서만 잠시 종교에 가담하여 있다가 처음에는 신속하고 열정있게 나아가지만 나중에는 넘어지고 마는 경우의 신앙을 "일시신앙(Temporal Faith)"이라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구원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어서 헛된 신앙의 형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적 사실을 단순히 인정한다고 해서 구원의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며,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서 신속하게 기독교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종교세계에 참여하였다고 하여서 구원적 신앙 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헛된 신앙의 형태에 한가지를 더 첨가한다면 기적 신앙(Miracle Faith) 이라는 것입니다. "기적신앙"이라는 것은 기적을 인정하고 믿는 신앙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奇蹟)들을 다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시간과 공간하에서 이루어지는 세상이며,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가지고 움직일때 그것이 곧 정상적인 상태이며, 그것이 가장 상식적인 차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세상은 단순히 인간들을 위한, 인간들에 의한, 인간들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간혹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의 상식과 정상적인 상태를 초월한 비정상한 특별한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단순히 어떤 신비적인 인물이 하나님과 접촉하여 주술적인 성격으로 이끌어내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예지의 섭리에 의하여서,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전체의 목적에 부합하여 거기에 합목적적(合目的的)으로 나타나는 섭리에 의하여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기적적인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


요리문답(要理問答) 제 7, 8 문에서 언급하는 것 처럼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作定)은 그의 창조와 섭리(攝理)에 의하여 시행되어지는데, 그 시행은 때로 기적을 동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기적신앙"이라는 것은 어떤 기적이 있을때에 그 기적에 의하여 일종의 신앙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그릇된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어떤 사람이 기적과 같은 비상한 일을 행하고, 신기한 능력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반드시 구원적 신앙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기적을 행하는 어떤 일종의 신앙을 가지고서 기적은 행할지라도 그것이 구원적 신앙이 아닌 세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뿐만아니라 어떤 사람이 성경상의 기적이나 어떤 신적(神的)인 기적을 받아들이고 믿는 그러한 신앙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신앙이 반드시 구원을 얻는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러한 기적에 의하여 신앙세계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어서 "기적신앙"에 머물러 있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기적을 믿는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 신앙이 반드시 구원을 얻는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15-29절은 그 점을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종교가, 또는 신앙가는 일종의 기적을 행할만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믿음은 기적적인 일들을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앙과 기적의 능력은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그를 따르게 만들고, 결국 헛된 신앙으로 이끌어가게 됩니다. 그는 주께서 선지자로 세우신 적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선지자 노릇을 합니다.(22절) 그러므로 그는 거짓 선지자로서 기적을 행할만한 믿음을 가지고서, 그 믿음으로 능력도 행하면서 사람들을 노략질하여 그릇된 신앙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예수님과 관계없는 종교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관련해서, 곧 기독교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들은 “주의 이름으로”(22절) 활동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먼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였다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을 더욱 가장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다니면서 주의 이름을 많이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주님을 찾고, 주여(아도나이여) 하고 부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정상적인 판단과 진리의 파악을 흐리게 하는 종교적인 발언들과 명령들과 일종의 책망과 선동을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역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귀신을 쫓아 낼만한 능력을 가졌고, 그것은 그들대로의 신앙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을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시행하였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쉽게 어느 누가 분별해 낼 수 있겠습니까 ? 사람들은 그러한 기적적인 현상에 현혹이 되어 바른 관찰을 하지 못하고 저사람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종이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적을 행하는데에 필요한 믿음을 가지고서 주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실제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22절), 즉 많은 놀랄만한 일들(many wonderful works)을 능력있게 행하는 거짓 신앙인이 있음을 경고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최근의 19-20세기에 걸쳐서도 많이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여 가면서 그릇된 사상과 이론을 가르쳐 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는 능력있는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거의 기독교 이단들을 보면, 그들은 발달된 종교적 기질과 예언자적 속임수가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들이었고, 큰 능력을 행하였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누구보다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절)고 하셨습니다. 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까요 ? 그들이 행한 그것이 가짜라는 말입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그 행한 일은 사실이요.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간에 그것은 주님이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주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구원적 신앙과는 관계없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아닌 전혀 다른 신앙의 세계의 법칙아래서 움직이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도 기독교안에 일종의 신앙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구원얻을 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주위에서 이러한 기적신앙 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를 조심하려야 하는 것입니다. 기적만으로 형성된 신앙은 이렇게 기적을 행하는 자들에게서도 있지만, 기적을 보고서 그 종교적인 신기한 능력이나 기이함에 놀라 거기에 깊은 호감과 관심을 보이고 나아가는 가운데서도 발생을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8:9-25을 보면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종교의 법칙에서 움직이는 마술을 통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스스로 큰자가 되어 신의 능력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 도시 사마리아에 와서 복음을 전하는 빌립의 능력과 기적을 보고서 놀라 빌립을 따라 다니면서 일종의 신앙을 소유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쉽게 분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세례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신앙은 얼마가지 않아서 여지없이 드러나고 맙니다.


그는 성신의 은사를 자신의 명예와 사욕을 위하여 돈을 드려서 사고자 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단호히 선언하였습니다.(20-21)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 ”


시몬은 "구원의 신앙"이 아닌 일종의 기적에 의한 신앙을 가지고 잠시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신의 역사(役事)를 보았을때에 그 본심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는 성신의 역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의 구현을 위하여 나타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자기도 권능을 가지고 행사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몬처럼 어떤 큰 기적을 보고 거기에서 신앙을 가지는것 같지만, 참된 신앙은 소유하지 못할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기적은 예수그리스도의 능력과 관계없이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어떤 사람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상한 일을 행한다 할지라도 주님의 판별의 법칙,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7:20)하신 말씀을 따라 분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시행하신 기적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의존하여 그 이상의 신앙상 성격을 구비하지 못하면 그 신앙은 "구원의 실증으로서의 신앙"으로서는 희박한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비상하고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였던 사람들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앙으로 가장 얼룩진 사람들도 그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가장 기적을 추구하고, 신비를 추구하였던 시대가 바로 가장 영적으로 어두었던 시대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삶은 그 기본이 정상적인데 있는 것이지 비상한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간다는 것이나, 성신님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생활속에서 진정한 인간답게 산다는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지, 우리가 성신의 능력을 누리며 하나님을 잘 믿고 잘 살수록 비정상한 기인(奇人)이나 도인(道人)이 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정상적인 삶 을 도피하고 거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으므로서 비인격적이거나 비합리적인 종교로 떨어지게 되기 때문에 어두움이 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그리스도안에 있을지라도 시.공속에서 비정상적인 생활이 아니라,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한 사람으로 여전히 있는 것이며, 그는 자연스런 하나의 인간이어야 하고 지극히 인간스러운 인간이어야 하는 것이며, 거기에 성신님의 충만하신 역사가 잇어서 그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창조의 본의(本意)에 따르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지, 항상 신비한 초월의 세계에서 비상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기인풍(奇人風)이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정상적인 생활을 도외시하고, 정상적인 스타일의 삶을 소홀히 하면서 항상 비상을 추구하면,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그 교회와 개인은 서서히 어두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적은 언제나 신앙의 척도가 될 것이며, 이율배반적으로 그는 현실을 위하여서 항상 초자연적인 어떤 힘을 요청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곳에서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기독교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중세시대의 수도원적 은둔주의가 타락의 온상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구원적 신앙의 요소들은 살펴 보았지만, 요즈음의 기적운동을 보면서 여기에서 결론적으로 생각할 것은,


첫째는, 기적신앙에 주저앉아 있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교회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면 기적신앙자가 많아지고 결국 교회는 어두움과 타락으로 빠져들어가게 되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질병이란, 자연치유도 가능하고, 심리충격 요법으로도 가능하고, 영혼 구원에 의한 치료도 가능하고, 최면술이나 사귀의 술법으로도 가능하고 하나님의 응답에 의한 경우도 있는 법인데, 마치 자신이 무슨 능력을 가지고 고친것처럼 기적주의에 빠져서 사람들을 몰고다니는 일이 많습니다. 무릇 그 태도와 자기를 나타내는 모습들 속에서 그가 거짓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구원의 실증이 될만한 신앙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살아가는 사실에서 분별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살아가므로서 증명이 되어질 것이며, 그 믿음이야말로 나의 구원을 실증하여 주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를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볼수 있습니다. 거기에 나타나는 모든 경우를 보면 두가지의 큰 사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신앙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그 신앙이 행위로 증명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행실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3. 구원적 신앙


1. 믿음은 성신께서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심으로 발생됨


앞서 보았듯이 사도 바울은 믿음은 들음, 곧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는데 있어서 말씀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단순히 우리의 마음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이며, 무엇을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비유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의 씨가 뿌려져서 그 말씀의 결과(열매)에 의하여 건설되어져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오직 이것(성경말씀)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요20:31)고 하셨는데, 우리가 믿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믿음과 생명을 얻음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때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우리의 마음의 기능이 믿을만한 능력이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우리의 마음가운데 적용을 하시는 성신님의 역사가 있어서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믿음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신께서 그 마음가운데 신비스런 역사를 하셔야 합니다.


성신께서는 그러한 역사를 하실때에 그에게 들려진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십니다. 말씀을 들을때에나 들은 적이 있는 말씀을 가지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을 가지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신님께서는 마음에 빛을 비춰주셔서 자신의 죄를 알게 하시고, 의와 구원의 도리를 깨닫게 하시고, 심판을 알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십니다.


“그의 성신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 - 요일4:13 -

우리가 성신의 역사로 말미암아 중생(重生)될 때에 성인이라면 거기에 믿게 하시는 역사가 말씀을 사용하여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는 것도 우리가 전하는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성신께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기를 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통하여)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 되지만, 믿음이나 구원이나 모든것이 은혜로 인하여 오는 것이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때, 주께서는 “이를 너에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16:17)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신앙을 소유하게 된 것은 성신님의 역사에 의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인데(요17:3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시며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를 안다는 것은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성신께서는 우리의 내적교사(內的敎師)가 되셔서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신께서 예수께로 인도하지 아니하면 예수께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 - 요6:44 -


간혹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자신의 믿음이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원인이 되어 구원을 얻는 줄 압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자신의 힘으로 믿어서 구원을 얻은 줄로 압니다만 그렇게 오해하는 이유는 성신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역사를 일으킬 때에 우리 자신의 인격적 기능들을 무시하지 않고 우리의 인격적 요소들을 그대로 두고 거기에 역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것은 나의 신앙이지 내 신앙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신의 역사 가운데서 나타나는 결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성신께서는 우리와 그리스도를 연합시켜주시는 영이시요, 성신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신앙의 근거가 되는 것은 말씀이 아니면 우리의 신앙은 유지할 수 없는 것이며, 말씀을 떠나서는 우리의 신앙은 남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 입니다. 그 말씀의 권위와 신뢰성은 하나님의 권위와 진실성에 의존하며,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이성(理性)으로만은 되지 않기 때문에 성신의 역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신님의 비춰주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말씀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가지시는 뜻을 아는 지식에 도달하게 되고 거기에 믿음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성신의 역사와 믿음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요, 성신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알게 하시며 믿도록 하여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은 성신의 역사와 복음의 말씀과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잘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때의 일을 말합니다. 그는 어떤 자세에서 전도를 하였는가를 말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부활)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전도의 결과는 자신의 지혜있는 설명으로서가 아니라 성신님의 역사하심에 의하여 나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이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5절) 하였습니다. 복음의 사실을 전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사람이 알게 되는 것은 성신님의 역사에 의하여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 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 - 고전2:12 -


성신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알게 하시고, 아는 거기에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성신의 역사와 말씀은 다같이 없어서는 아니될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말씀으로 더불어 깨닫게 역사하시는 성신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의 죽으심과 사심을 믿고, 거기에 의지하게 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 - 롬8:14-15 -


우리는 성신님의 인도와 역사를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절부터 살펴보면 모든 사람이 믿어야 할 생명이시요, 빛이신 분이 나옵니다. 그분은 로고스이신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영혼의 기능, 즉 인격적 작용이 정당한 인식을 할 수 없게 되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맨처음 타락하면서 나타난 가장 심각한 결과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의 타락과 부패는 하나님의 생명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의 정신적, 이성적 활동이라는 것은 거룩한 세계, 빛의 세계 곧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관한한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우리 인간의 인격적 작용가운데서 먼저 중요한 것은 그 인식작용일텐데,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두신 거룩하신 뜻과 경륜에 대하여 무지하게 되고 스스로 깨달을 수도 없고, 오히려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롬1:20-23)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 요한이라는 증거자가 나타나서 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여, 그 빛을 믿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증거는 예수님에 대한 증거이므로 복음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분이 누구시며, 왜 오셨는지를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요1:29-33 참고) 그런데 이렇게 세례 요한이 복음을 증거하였지만, 사람들은 그 말씀을 믿지아니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였습니다.(11절)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사람의 혈통이나 육신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난자들이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셨는가 ? 그것을 요한복음 3장에서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신의 역사로 다시 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성신께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신 것은 단순히 개과천선하게 하셨다거나, 종교인이 되게 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신으로 말미암아 우리안에 영원한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넣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어린이나, 정신환자가 아닌 이상 성인(成人)의 경우에는 그가 들은 말씀과 더불어 성신께서 역사하심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성신께서 생명을 주시므로 그의 영혼의 기능이 새로운 작용을 하여 복음이 깨달아지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 성신님의 중생케하시는 일로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의 전체 기능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신령적인 일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나게 되어 하나님을 알게되고, 그의 구원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신앙이란 이성(理性)을 가진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법인데, 사람에게서 믿음이 발생하게 되는 데에는 두가지 원인이 거기에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하나는 믿음이 발생될만한 객관적인 근거나 증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믿을 근거나 증명을 보고서 믿게 되는 주관적인 활동이 그 사람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을 근거가 없으면 믿음은 생기지 않는 것이며, 믿음이라는 나의 주관적 반응이 없이는 또한 믿음이 거기에 발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타락과 죄의 오염으로 말미암아 그 이성적 활동에 크나큰 타격을 입게 되었기 때문에 역시 그 믿음이라는 활동도 크게 타격을 입게 된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의 시절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존의 자세가 매우 순전하고 풍부하였습니다. 그것은 기쁨과 경외가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변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경외와 즐거움이 있는 의존이 되지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 아래서 성신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주시고, 새롭게 하셔서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에도 새로운 변화와 가능성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성신의 역사아래서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믿음이라는 것을 가질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신께서 바로 우리의 주관적인 세계에 역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2.믿음의 위치


기독교의 신앙이란 다음의 성경구절에서 간명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심이여 야곱을 향하여 노가 맹렬하며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가 올랐으니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연고로다” - 시78:22 -


기독교의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내신 그 구원을 의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두고 한 말씀인데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과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로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컷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내신 구원의 길,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의지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그 믿음이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 하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는 믿음을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아니될 하나의 원인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서 3:22에서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義)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하였는데 역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데 있어서 믿음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로마서 10:9에서도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도 역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요소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말미암는 줄을 안다고(갈2:16) 한 것처럼, 믿음이 없이는 의롭다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11:6)고 한것처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아무도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면서도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던 것은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히3:18)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들어도 그 말씀이 유익이 되지 못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그 듣는 자가 믿음을 거기에 화합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히4:12) 이렇게 복음의 말씀과 믿음이 화합되어야 우리에게 구원의 결과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그 믿음은 말씀과 더불어서(cum Verbo) 성신께서 역사하심으로 발생하게 된다고 배웠는데, 이렇게 성신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과 말씀이 화합해야 결과가 있게 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 전하여져도 그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이렇게 귀중한 것인데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인가 ? 믿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가 ? 하는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답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은 우리의 믿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세주와 그의 사역의 결과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하였듯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 곧 십자가의 죽으심과 사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롬4:25)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믿음이 그 자체내에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고 강조하였던 것은 자신들의 어떤 종교적인 행위나 업적을 통하여 그 의(義)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교정하고 참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말씀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롬3:24)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이라는 또하나의 나의 행위를 구원의 원인으로 삼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믿음을 구원을 위한 행위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믿음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것이며, 그 믿음은 나의 믿음인 것이 사실인데, 나의 믿음은 무엇이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는 우리안에서 유기적인 작용을 통하여 그 일을 성취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나의 영혼의 활동과 무관하게 하지않고 나의 지.정.의의 기능들을 사용하셔서 하시는 것입니다. 성신께서 중생시키심으로서 그 믿음은 나의 행위로 나오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거기에서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나온 믿음이라 할지라도 믿음은 나의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수단, 중재적 위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안에 그 수단으로서의 선물을 주셔서, 일으키셔서 구원을 얻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믿음의 위치는 도구적 요인(instrumental cause) 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동력적 요인이 아니라, 수단으로서의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마음의 잠재력에 의하여 나오거나, 노력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나오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결과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그의 구원에 전부를 의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국 그가 만일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란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신뢰를 가지고서 적극적으로 의탁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영혼과 삶을 전적으로 맡겨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우리에게 주셔서 구원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엡2:8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구원을 깨달을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부패한 사람인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을 수 있는 조건을 가지도록 하심으로서 구원의 수단을 구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주신 그 믿음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증거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시기를 바라면서 다만 복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증거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어라고 말하는 것 입니다. 믿어라고 촉구하는 것이지 달리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고 그 사실을 믿기를 촉구할때 하나님께서 그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셔서 그에게 믿음을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9)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랑하지 않고 겸허하게 그 은혜를 아는 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의 의(義)를 세우지 아니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의(義)를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까지도 그것을 원인 으로 하지 않고 수단 으로 삼으셨음을 깊이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4. 믿음의 지적 요소


우리는 이미 헛된 신앙의 양태들을 살펴보았고, 또한 신앙에 관한 몇가지, 곧 믿음의 가치나 그 발생 또는 그 위치와 같은 것들을 공부하였습니다. 이제는 구원적 신앙이 되려면 거기에 반드시 갖추어져서 함께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 몇가지의 믿음의 필수적인 요소를 공부하여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간혹 믿음을 생각할때에 우리의 마음의 어떤 부분적인 현상을 놓고 쉽게 믿음이라고 단정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로마 캐톨릭에서는 믿음을 “마음의 동의” 정도로 국한하였습니다. 이러한 캐톨릭의 신앙 개념은 맹신(implicit)의 결과를 가져와서, 겸손한 태도를 가진 경건한 무지를 신앙으로 생각하는 과오를 범하였습니다.


칼빈 선생은 이러한 그들의 신앙 개념을 말하면서 그들은 “이것이 교회의 믿음이다 !”라는 단서만 붙이면 무엇이든지 확실한 것으로 믿는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결국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가에 대하여서는 생각지 않고 카톨릭 교회의 판단과 권위에 찬동하여 따르기만 하면 그것이 곧 신앙이요, 그러한 사람은 신자라고 정의하는 캐톨릭의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러한 폐단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의 일에 크게 반대하지 아니하고 동의하고 협력하는 사람을 다 신자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고, 어떤 종교적인 수행(修行)을 열심으로 하여 나가는 것으로만 쉽게 신앙인으로 단정하는 경향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교회에 잘 다니고, 기도도 많이 하고 헌금도 잘한다는 것으로, 때로는 교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서 활동한다는 것으로 스스로나 다른 사람도 그를 신자(信者)로 쉽게 속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교회에서는 구원적 신앙이란 거기에 있어야 할 몇가지 요소를 함께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찌기 가르쳐 왔습니다. 그 요소란 지적인 요소(notitia)와 정서적 요소(Assensus)와 의지적 요소(fiducia)입니다. 그 세가지 요소, 즉 지적(知的)인 인식과 정서적 동의와 의지적인 의뢰가 믿음의 어느 단계나 수준에 관계없이 포함되어 있어야 그 신앙을 구원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막 믿음의 출발을 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이 세가지는 그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을 대상에 대한 지적(知的)인 인식이 없이는 정서적(情緖的)인 동의가 있을 수 없으며, 그 인식과 동의가 없이는 자신을 그에게 의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을 의탁하는 사실이 없이는 거기에 진정한 신앙이란 발생하지 않는 것이고, 우리가 믿을 어떤 대상이나 사실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고 그에대해서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믿는다고 말하는 것도 진정한 신앙이 아니며, 마음으로 그에 대한 신뢰감과 소원이 없는데 그에게 자신을 의뢰할 수도 없어서 진정한 신앙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에 이르기까지 구원적 신앙에는 이 세가지 요소가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가지 요소를 놓고 생각할 때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 동의(Assensus)의 요소라고 생각되는데, 이 동의는 무엇을 확실하게 믿는 정신 작용을 말합니다. 다시말하면 확신하는 정신작용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내신 구원의 사실을 확신하는 동의적 태도가 믿음의 정서적 요소입니다. 참된 신앙자는 반드시 이러한 정서적인 마음의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하는 정서적 작용은 어디에 근거하느냐 하면 그 사람의 의뢰하는 의지적 작용(Fiducia)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식하는 지성의 작용(Notitia)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앎(知)이 하나님께 대한 확신(情)을 가져오고, 그 확신이 하나님께 대한 의뢰(意)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때에 우리가 맨먼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은 믿음의 지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믿음이 형성되는데 있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 믿음이 출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은 지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구원적 신앙이 되기 위하여서는, 구원의 실증이 될만한 신앙, 그의 신앙을 보고 그의 구원을 인정할만한 신앙이 되기 위하여서는 먼저 구원얻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의 내용과 지식의 작용이 그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 내용이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그리고 그 만큼은 그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의 신앙은 구원적 신앙이라고 자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일찍부터 주장하여 오기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에게 이미 주신 그의 사고작용(思考作用)을 가지고 성신님께서 비춰주시는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성경계시)을 깨닫고, 알아서 믿고, 거기에서 자꾸 진리를 터득하고 전개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경험상으로 믿을만한 것은 믿고 기타의 것들은 미지(未知)의 세계에다 항상 놓아두는 태도, 알 수 없으니 그져 믿고 나간다는 태도를 찬성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중요한 문제를 감정운동에다가 두고서, 신비한 무엇을 추구하고 앉아서 어떤 현상이나 자기가 기대하는 어떤 것이나, 또는 하나님과 직접으로 영적으로 교통을 한다는 이름으로 자신의 감정의 포만을 추구하는 일들을 경계시키고, 그러한 것들 보다는 성경말씀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성경말씀을 통하여 올바른 지식을 흡수할 때에만 정당한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칼빈 선생께서는 참되고 건전한 지식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라고 하면서, 인간은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난뒤 그 다음 자기 자신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는 한 결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 말은 모든 지식은 하나님을 알때에야 가능하다는 것이고, 따라서 모든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귀결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깨달아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경륜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감정상으로 느끼고, 위로를 얻고, 어떤 황홀경속에 들어가고, 무슨 은사를 받고 하는 것보다 무엇을 안다는 것에 중요성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힘써서 찬송을 하고, 말끝마다 주여를 찾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믿기위하여서 알아야 할 것을 대신 채워주지 않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여전히 모르는 것으로 있는 것이고, 무지(無知)는 여전히 무지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고 그래서 믿을 바를 믿고 또한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 증가시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으로 무엇을 행하여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만 그것은 오직 지적(知的)인 지지를 받을때에만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을 기초로 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요, 그것은 경신(輕信)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성(理性)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을 비이성적이라 해서 그 쪽의 지식을 부정하기 쉬운데, 우리의 이성(理性)은 우리의 이성(理性)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분야의 이성적인 지식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히 구원적 신앙이 되기위하여 가져야 할 지식으로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추호도 죄악을 용납하지 않고 심판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매우 따뜻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더욱 풍부하게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구원의 신앙이 더욱 풍부하여져서 흔들리지 않고 든든하고 확실하여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큰 사실과 그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구속의 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하고, 그 구원이 왜 나에게 있어야 하고,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물론 사람이 기독교의 도리를 풍부하게 다 알아야만 구원의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기초적인 도리는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거기에서 신앙이 발생될 근거가 달리 없는 것입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여러가지 종교상의 제도나 규례들을 잘알고 행사들의 절차를 잘 알아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조직을 해서 회의를 모이고, 활동하는 일을 잘하고, 또는 기도를 많이 한다든지, 열심히 무엇을 한다든지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상 자신의 구원적 신앙에 있어서 가져야 할 지식에 있어서는 매우 빈곤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그가 신앙생활을 오래하였으면 한 만큼 그 지식들이 더욱 풍부하여서 확실하게 자리하고 있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지식을 가진다거나, 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라고 하신 주님의 기도에서 보듯이, 그 안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사실이나 사물을 나의 의식세계에다 반영하여서 인지한다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와 개인적으로 관계되어아는 지식이요, 상호간에 인격적 경험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구약 시편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시34:8)라고 했듯이 그 안다 는 것은 사랑과 애모를 담은 지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구속경륜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식은 매우 확실한 것이어야 합니다. 불분명하거나 모호하여서는 안됩니다. 막연하게 이론적으로 세상이 있으면 세상을 지은 하나님이 계시겠지 하는 정도로서 신개념을 가져서도 안되고,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종교성에 의해서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특별히 부정하지 않고 유신론(有神論)적 입장에서 기독교를 취하는 식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과연 그러한 하나님이고, 나는 과연 그 하나님을 섬겨야 할자이고, 그의 은혜를 누려야 하겠구나!하고 확실하게 자기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히 11:6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알고 믿어야 하고, 그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맞이하여 주시고 후하게 갚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는 그 지식은 자기가 만들어내거나 상상하여 낸 하나님 관념이나 지식이 아니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하여 보여준 하나님이어야 하고 그러한 하나님 지식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역사상에 큰 일을 도모하여 오셨고 그 사실을 성경에 기록하여서 우리에게 전달하게 하였음으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아는 일을 거기에서 부터 배워서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말씀에서 부터 하나님을 배워나가게 됩니다.


이제 정리를 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첫째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찾는자들을 후하게 맞이하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사상계에 초연신론(deism)이라는게 있었는데 이 사상은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셨지만 거기에 법칙을 두셔서 세계는 그 법칙대로 운행하고 창조하신 이후에 더이상 관여하시지 않는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는 사상이었습니다만 우리는 이론상 이러한 초연신론을 가지지 않지만 실천적인 생활상의 초연신론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를 믿는자는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를 찾는자들을 후하게 갚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세째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느냐? 할 때에 최소한 구원받을 자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자비로우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때에 간단하게 “예수 믿고 천당가라!”고 하거나 “예수 믿고 만사 형통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여 가지고는 구원적 신앙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들어서는 그가 예수는 누구이고 왜, 무엇을 하신 분이시고, 천당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11:22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하심이 있으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면 그 인자하심이 너에게 있을 것이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힐 것이다!”


그 다음 넷째로 우리가 가져야 할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되 단순한 역사적 예수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요 나의 중보자로서의 예수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의 중보가 아니면 하나님의 엄하심 앞에서 살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지식들은 처음부터 확실하고 분명하게 자기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의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 신앙이 견고하고 확실하게 장성하여 가기 위하여서는 계속하여 더욱 풍부하게 알아가야 합니다. 무엇을 몰라도 잘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은 벌써 그 말속에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모르는 가운데서는 신앙이란 형성이 되지도 않는 것이며, 장성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간혹 기독교안에서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방식으로 생각하여서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정성만 드리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꾸 지도하고 무얼 자꾸 가져가고 하면 신앙이라는 것이 성립되는 줄 알지만 신앙에는 그 안다는 문제가 항상 따라 다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안에 들어와서도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경영의 내용들을 안다는 일에 대하여는 희미하고, 기독교안에서 무엇을 내가 얻을 것인가? 하는데 집중하고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거기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것은 좋은 신앙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바르고, 건강하고 풍부한 하나님 지식을 못가지는 것이며, 거기에는 구원의 신앙의 확실성이 서지 않는 것입니다.


5. 믿음의 정서적 요소

 

믿음의 요소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지적(知的)인 요소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그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이점에 대하여서는 후에 더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만 좀더 이야기 하여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물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1:19-20에 보면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만물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나 그 신앙을 볼 수 있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알만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본성의 빛 이라고 부릅니다. 이 본성의 빛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어서 만물속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서는 구원얻을 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와 통치속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를 다스려 가시는 속에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의 진행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구속역사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에 거기에서 이 세상의 역사에도 함께 가담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위에 나타나게 됩니다.


때로는 심판하시는 사실로서도 나타나고,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거나 보존하여 가시는 사실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품성도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구원을 위한 역사행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속에서 성삼위 하나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우리의 본문에서 우리는 성경대로라는 말씀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뚜렷하게 하나님과 그의 구속경영을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의 빛이 단독적으로가 아니라 성신님의 비춰주시는 도우심을 받아서 성경의 안경을 쓰고서 만물과 역사를 보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구원적 신앙에 있어서 또하나의 요소는 정서적 요소 입니다. 신앙에는 감정의 요소가 있습니다. 이 감정은 그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아는데서 비롯되는 감정이지, 단순한 종교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만일 그 지적(知的) 바탕이 없는 종교적인 감정으로나 의존감정으로만 움직이면 신앙주의(Believism)가 되어서 그릇된 신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사이 기독교내에도 흔히 종교 열정주의로 빠지는 경향이 있는데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인 것입니다. 그것은 지적(知的)인 감정이 되지 못하고, 자신의 느낌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하기도 하고 종교를 자신의 감정으로 생각하는 폐단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깨달아가면 자연스럽게 자신속에 확신과 안전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의뢰하는 심정이 생기고 또한 하나님과 관계되는 소원이 생기게 됩니다. 나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품안에서 안위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에 대한 확신을 품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애모의 심정이 생기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거기에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정서가 자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그 출발시에 있어서 구원적 신앙을 가지는 자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대하여 의존하는 감정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평안도 오고 안도감도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경외의 감정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으로 생각되어 두려워 하고, 그래서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섬기고 경배하고 높이고자 하는 동경의 심정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6. 신앙의 의지적 요소


그 다음에 신앙의 요소로서 셋째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의뢰의 요소입니다. 다시말하면 의지적(意志的)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나와 나의 미래와 일생을 이제 하나님께 다 맡긴다 하고서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의지적 요소라는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한 확실한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방향도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쪽으로 가겠다는 인생의 태도를 확정하고 그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인생길을 스스로 정하고서 그쪽으로 살아가고자 하지 않습니다.


처음 믿을 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고 구하면서 깨달음을 주시는 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면 갈수록 성신께서 인도하시는 도리를 더욱 알아가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뜻과 그 경영의 크신 방향을 깨닫고 그 속에서 자기 인생의 작은 발걸음을 분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회개라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믿음과 회개는 서로 나누어 질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마가복음 1:15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라사대 때가 찾고(πεπληρωται)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ηγγικεν) 회개하고(μετ-ανοειτε) 복음을 믿으라”(πιστευετεεν τω ευαγγελιω)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셨을때 때가 찼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준비되어 온 어떤 일이 착수 될 시간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나님의 나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림할 때가 이제 되었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 가까왔다는 말은 현재 완료형으로 쓰여져서 어떤 동작이 이미 시작되어 그 동작의 결과가 현재 주어져 있는 상태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내가 이미 교회당에 왔고 지금 여전히 여기 서서 있다는 식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는 천국에 들어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말은 흔하게 천국을 장소적으로 말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천국이 우리에게 온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천국을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의 개념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오심을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로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세상 가운데서 실행되고, 사람들이 전에 다른 세력에 지배를 받던 자리에서 구원받아 은혜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림 가운데로 들어오는 때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임재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여러 부분에서 확실하게 공부한 바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미래적으로만 아니라 현재적으로, 장소적으로만 아니라 역동적인 통치적 개념으로 먼저 이해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은 현재적이면서도 통치적인 개념으로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4:17)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회개하는자가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이고 회개는 무엇이냐? 이제 회개에 대하여 생각하여 봅시다.


사도행전 3:19-21을 보면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터인데 그가 만유를 회복하실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없이 하시고, 장차 만물까지 포함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키실 분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결국 회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태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30-31을 보면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라 하니라고 하였는데, 그리스도의 부활과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아래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다시 사도행전 26:18-20을 참고하겠습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여기에서는 회개를 돌아간다는 말로 사용하였습니다.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하나님의 통치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회개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님은 사도행전 20:21하나님께 대한 회개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부분의 해석에서 회개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turning round : conversio)을 의미하고 믿음이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구별하였는데, 이렇게 회개를 전향(turning)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시말하면 회개란 정치적 전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지배로부터 다른 지배세력으로 전향하여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는 그는 자신의 무능과 비참함을 깨닫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 나라로 그의 다스림 가운데로 들어가기를 소원하여, 하나님께 의지하여 손을 들고 백기를 들고 돌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그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우고, 그를 의지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받아주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믿음 없는 회개가 불가능하고, 회개 없는 믿음이란 역시 불가능 합니다. 진정한 회개속에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진정한 믿음속에는 과거의 세계에대한 회한과 전향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회개가 없이는 진정한 믿음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2:38)고 하였습니다. 물론 회개 가운데는 자기의 죄를 깊이 느끼고 통분히 여기는 자세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능도 역시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회개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뢰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결 어


성경은 믿음을 아무것이나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복음주의라는, 또는 신교(新敎)라는 테두리 안에서도 믿음과 자기 신념이나 자기 최면을 혼동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성경은 올바른 구원적 신앙이 되기 위하여는 두가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사도들을 통하여 전달된 그 말씀 자체를 굳게 지켜야, 즉 우리의 기억속에 뚜렷하게 붙잡아 두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헛되이 믿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그 내용과 믿음의 태도가 바로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듣되 확실하고 뚜렷하게 소유하지 못하면 그릇된 것과 함께 섞여서 결국 복음 자체를 상실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우리는 그 예()를 성경에서 볼 수 있는데, 소위 갈라디안주의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신자들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그 복음속에 그릇된 율법주의를 혼합시킬 위험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본래 복음은 사도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것입니다.(1:12) 그런데 그 복음과 여러가지의 종교의 전통과 유전이나 사상들을 혼합시키는 일이 발생을 합니다. 결국 그릇된 것이 섞여버린 복음은 복음일 수 가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 1:6 -


여기의 다른 복음은 복음과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를 혼합하는데서 나온 이론입니다. 이러한 위험은 어느 지역에서나 마찬가지로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마 그 점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의 신자들도 그릇된 이교 사상과 습관들에 의하여 복음을 변질시킬 위험이 있어서 그렇게 편지하였는지 모릅니다.


어느 시대에나 복음을 바로 알지 못하고 희미하게 알거나 대강으로만 알고 있으면 복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그릇된 것을 거기에 늘어 붙일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물론 구원도 거기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복음에 대한 이해는 희박하면서, 하나의 종교 계율로서 열심히 기독교에 참여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교회의 신앙에 있어서 주의하여야 할 것은 다음 두가지가 복음에 혼합될 위험이 있는데, 하나는 계율주의적 요소요, 다른 하나는 구복(救福)사상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이 복음의 진정한 가치를 상실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계율주의적 신앙형태는 참된 복음의 자유와 기쁨을 빼앗아 갔습니다. 따라서 그 계율을 지키는 자신의 종교의 수준이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앞에 의()가 되었으며, 여기에서 복음의 가치는 점차 소멸되어 가게 된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기복(祈福)주의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사명이라는 전체의 파악속에서 하나님께서 왜 그 복을 주셔야 하겠는가 ? 하는 타당한 인식이 없이 행복론적인 종교로 탈바꿈시켜서 결국 복음을 변질시킬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화울러 교수는 신앙의 6단계를 말하였는데, “1단계는 벌을 피하는 방식으로 사는 원초단계, 2단계는 혜택(물질적, 정신적)을 받고자 하는 것이 행동요인이 되는 단계, 3단계는 애정을 받기위한 단계, 4단계는 무조건 법을 지킨다는(악법에도 따름) 법질서 유지의 단계, 5단계는 하나님의 법을 믿고 실천하는 단계(인간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그 법을 어김), 6단계는 아가페의 최상적 사랑의 단계라고 하였습니다. 하급단계에서 나타나는 모습에 주의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강렬하게 종교를 형성하여 가고자 하는 계율주의와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기복주의라는 양 극단의 긴장사이에서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복음의 세계를 풍부히 이해하고 그것을 굳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희미하게 가지고 있는 복음을 결국 한편으로 가지고 가서 혼합시켜서 변질된 또하나의 종교를 나름대로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전하여 받은바 복음의 세계를 바로 깨달아 지킨다고 하는 것은 복음의 풍부한 세계를 전체로서 이해하여 간다는 것과도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가 편협하거나 부분적인 것이 되면, 그만큼 그에게는 풍성한 사상이라는 것이 품어지지를 않게 됩니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란 언제나 그가 깨닫고 있는 복음의 분량과 관련되어 있는 만큼, 그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결핍되기 마련인데, 만일 부분적으로 이해된 터위에 세워진 그의 신앙생활이나 그 부분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것은 그 대부분을 제하여 버린고로 결국 왜곡된 신앙이나 교회를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러한데서 사이비 기독교가 나오게 되고 그 사이비에서 이단이 발생하게 됩니다.


교회가 복음의 전체를 온전하게 이해하여 가려고 하지않고 어느 부분을 붙잡고 그 쪽으로 운동하여가면, 그것이 기도운동이든, 선교운동이든, 성신운동이든, 문화운동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기독교를 왜곡시켜 버리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무엇 하나를 부분으로 붙잡아 밀고 나가면 그를 얼른 이단이라고 할 수 없을지라도 그 밑에서는 많은 사이비와 이단이 발생될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운동하고 나간 그 부분이 기독교 전체인 것으로 왜곡될 수 있으며, 성경에 나타나 있다고 하는 한가지 이유로, 또는 명하고 있는 일이라고 하는 이유로 그 방법론까지도 스스로 만들어서 도달하려고 하는 비성경적인 결과를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들을 생각하면서 바울께서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라고 하신 말씀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자꾸 풍성하고 생생하게 계통있게 그리고 넓게 전 분야에 걸쳐 이해하여 마음속에 간직하도록 하여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헛되이 믿지말라! 하는 말씀에서 우리가 믿는 모습도 정당하여야 하겠다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미 믿음의 요소를 생각하여 보았지만 믿음이란 복음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서 하나님과 그 복음에 대한 거룩한 심정이 있고 거기에 찬동을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따라서 자신을 전적으로 거기에 의탁하고 의뢰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믿음이란 전인적(全人的) 행위에 속하는 일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감정, 그것도 정당한 복음의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닌 종교적인 감정으로서 움직여 나가면 헛된 신앙이 되에 됩니다. 우리는 이것도 조심하여야 합니다.


요즈음은 교회들이 이 감정주의로 흘러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종교심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열정을 자꾸 유발하여 무슨 일을 하면 그것을 좋은 신앙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 종교 감정주의는 종교적인 방식으로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쪽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황홀경을 추구하는 신앙 형태로도 나아가게 됩니다. 때로는 그러한 종교적 정열이 경건주의 운동으로 나아갑니다.(딤전6:5)


어떤 종교행위들을 강조하여 열심으로 행하고 나아가지만, 진정한 복음의 능력으로 나오는 것이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웃사가 법궤를 손으로 붙들다가 죽은 것처럼 자신의 객기(客氣)를 써서 하나님께 무엇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올바른 믿음의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순수한 복음 그리고 전체로서 파악된 복음을 받아서 간직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은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고전1:18, 2:4-5) 지금도 복음은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받아 자신을 거기에 의뢰하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살아나신 이 사실을 알고 자신을 의뢰할때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것은 계속하여 우리에게 큰 능력으로 작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 줍니다.



7. 구원의 신앙과 사명의 신앙

 

(14:1-12, 21:4-9)


우리는 지금까지 구원의 신앙이라 할 수 없는 헛된 신앙의 유형을 살피면서 구원신앙의 여러 면을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구원의 신앙이 어떻게 실증되어 질 수 있으며, 구원의 신앙이 반드시 갖추게 되는 요소들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구원받은 자라면 그 사실이 시간이 감에 따라 뚜렷하게 나타나는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구원의 신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선명하게 실증되는 것인데, 오늘은 그 가운데 한 가지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I. 사명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그 신앙이 증명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왜 구원받았는지? 왜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여 내셨는지 ? 하는 것이 점점 뚜렷하여져 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로써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구원받은 자로써의 존재의의가 무엇인지? 하는 것이 더욱 선명하여 갑니다. 자신의 존재의의사명에 대한 자각이 더욱 뚜렷하여 간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신앙은 시간이 감에 따라 사명에 대한 자각이 뚜렷하여 가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초보가 지나면 사명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구원에 대한 체험이나 감격이 있는 것만으로는 실증되지 않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감격해 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모습이 있는 것만으로는 구원의 신앙이라고 할만한 증거가 미약한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그러한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는 체험을 통해서 구원의 감격도 있었고,찬송도 있었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사건, 쓴물이 단물이 되는 사건, 하늘에서 양식이 내려오는 일과 같이 숱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40년의 광야생활과 더불어 다 죽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14:11)


나의 영광과 애굽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14:22-23)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차례 하나님의 이적적인 역사를 통해서 구원의 손길과 인도하심을 체험하고서 감격해하고 찬양하기도 하였습니다(15). 그러나 그러한 이적에 대한 체험으로 인한 감격과 찬양이 있었지만, 그러한 체험이나 감격이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신앙의 형태였던 것입니다. 그들안에 구원의 신앙이 있었다고 할 만한 증거들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구원의 기쁨도 있습니다. 숱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경험들도 있습니다. 미래의 영광스런 천국의 소망도 있습니다. 그러한 그것이 나를 위하여 좋은 것들이기 때문에 따라왔고, 쫓아 가지만 내가 왜 구원되어졌는지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 좋은 것들도 얼마가지 않아 원망으로 변하여 불신의 자리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유익을 위하여 계시고,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니까 따라갑니다. 예수믿고 천당간다니까, 예수 믿고 만사형통 한다니까 따라가는 식입니다. 이런 정도의 신앙형태로서는 그의 구원이나 영생을 확실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리 감격이 있고 기쁨과 감사가 있다 할지라도 혹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간증들이 무성할지라도 그것으로는 그가 구원적 신앙을 가졌는지 분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2.구원의 신앙은 사명에 대한 자각으로 실증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적에 대한 체험과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는 감격도 하고 찬양도 하였는데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간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 오늘 우리가 읽은 두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14:3과 민21:5에 있는 그들의 말에서 잘 나타납니다. 우선 출애굽 1세대들의 말을 들어보시지요! 그리고 이어서 출애굽 2세대들의 말도 들어보시지요!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대대로 이렇게 한결같이 걸려 있었던 문제는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는가?”를 알지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두루 두루 체험하고 그때마다 감격하고 찬양을 하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일련의 구원의 손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는지?”에 대해서는 배우지를 않았습니다. 그저 좋은 것을 주시기에 감격해 했고, 찬양했을 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셨고, 어떠한 세계로 인도하시려는 것인지? 그러한 세계에 들어가서 어떠한 사회를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는지?” 하는 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때마다 감격해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들어가려는 세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위기에 처하자 원망을 하였습니다.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는가? 차라리 애굽에서 죽도록 놔두실 일이지 여기까지 데려와서 죽이실려고 하시는 것인가?” 하고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내셔서 맡기신 사명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결과 그들은 약속의 땅, 사명의 땅, 가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동안 쓸모없는 인생으로 배회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신앙을 구원의 신앙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구원 받았다는 감격만 가지고서 주저앉아 있으면서 왜 구원하셨는지? 어떠한 사명을 위해서 구원하셨는지? 하는 자각이 자꾸 생겨지지 않으면 신앙을 버리게 되는 때가 오는 것이요, 구원의 신앙임을 확증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신앙은 시간이 감에 따라서 사명에 대한 자각이 뚜렷하여져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생한 후 시간이 가면서 깨달아 지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왜 구원되어 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되어진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게되는 것입니다. 사명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들어가야 할 가나안이 어떠한 세계이며 무엇을 위하여 들어가야 하는가를 깨닫고, 그 거룩한 사명을 귀중히 여겨 약간의 어려움도 극복했어야 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가를 깨닫고 사명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이후에 언제까지나 이 사실을 생각지 않고 살면, 그의 신앙을 구원의 신앙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내셨는가에 대한 자각이 점점 뚜렷하여 갈때에, 어떠한 위기앞에서도 하나님께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는 감격만을 가지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구원해 내셨는가를 자꾸 각성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구원하신 본의에 합당한 자로 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부르심에 합당한 자의 모습을 자꾸 갖추어 가는 모습이 시간선상에서 뚜렷하여 갈 때에, ‘아 저 사람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구나!’하고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사명에 대한 자각이 있게 될까요?


그런데 우리가 사명에 대한 자각을 갖게 된다고 할 때에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명이란 사명 받았다고 모든것 내던지고 운동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말아지 않습니다. 무엇을 해여만 사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자리에서 자기를 하나님 백성답게 가꾸는 일입니다 . 존재적인 사명은 생각지 않고, 사역과 관련된 사명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일차적으로 우리에게서 일어나게 되는 자각은 자신의 존재의 성격이 어떠해야 하겠는가를 깨닫고 그러한 사람으로 자꾸 가꾸어져 가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태나 품성을 얘기하고서, 곧 이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사명을 언급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렇게 소금과 빛이로써의 맛과 성격을 드러내면 그것으로써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자꾸 무엇을 해야만 사명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일차적으로 어떠한 존재로 가꾸어져 가야겠는가 하는 것에 사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빛과 소금으로써의 존재의 성격을 상실하고서도 무엇을 자꾸 하기만 하면 사명이 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두가지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1.일과 관련해서 자꾸 활동을 하는 쪽에서의 사명은 이차적이고 비본질적인 사명입니다!

2.존재의의나 성격에 부합한 모습으로 자 신을 가꾸어 가는 것이 일차적이고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사명의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가?


역사적 과정속에서(시간이 지나가면서)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자꾸 터득하여(배워)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배푸신 배려(配慮)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사명에 대한 자각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 역사적인 과정에서 여러가지 배려를 하셨습니다.


우선 출애굽으로부터 시내산까지의 광야여정을 통해서 가시적인 표적들을 베푸심으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하심을 계시하해 주셨습니다. 도우시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재에 대해서 계시하여 주셨습니다(사건계시).


그리고 시내산에 이르러 1년 동안 사명을 자각케 하시는 말씀을 주셨고, 여러 제도(성막과 제사제도)와 율법을 주셨습니다. 말씀계시와 제도계시를 통해서 사명을 자각케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거룩한 나라요, 제사장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나라로써 모습을 가꾸어가야 할 사명이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문화를 이루어 내야 할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자태를 이방 나라에 증시하여 어느 시점에 가서는 이방인들도 그 나라의 찬란함에 반하여 들어오도록 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2.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자세히 배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베푸신 기적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서 알아가지 못하였고, 기적만을 추구하는 기적신앙으로 나아갔습니다. 성막이나 제사제도를 통해서 얼마나 거룩한 나라가 되어야 하는가를 배우지도 않고, 제도만을 세워나가고 반복하는 형성주의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의 질서나 정신을 배우고 터득하지 못하고, 율법을 조항으로써 열심히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계율주의로 나아갔습니다.


3.그 결과는 사명의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배도하였습니다.


일련의 역사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배푸신 여러 계시들(사건계시와 말씀계시)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를 파악하려고는 않고, 기적자체나 제도만을 추구하고 세우는 쪽으로 나아간 결과로 사명에 대한 자각이 서지를 않았습니다. 사명에 대한 자각이 없게 되자 사명을 감당해야 할 시점에서 닥치는 작은 어려움에도 배도(背道)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사명의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배도하게 되고, 그러한 신앙이라면 구원의 신앙이라고 말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입니다.


.사명의 신앙으로 나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꾸 더 깨달아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계시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사건들이나 제도율법’, 등 다양한 장르의 말씀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일하시고,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것을 늘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데 어디에서 나를 구원하여 내셨고, 왜 나를 구원하여 내셨는지? 어떠한 세계로 이끄실려고 건져내셨는지? 그러므로 나는 어떠한 존재가 되어가야 하는지? 하는 사명에 대한 자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 경륜하에서 사용하신 여러 제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일하시는지 내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자꾸 터득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도나 신행들을 자꾸 반복해서 하는데 의의를 두지 말고, 그러한 제도나 의식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고, 나는 어떠한 존재로 살아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형성주의적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한 제도들이나 신행들이 은혜의 방도로 전혀 쓰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존재파악이 뚜렷하여 가는 쪽으로 사용될 때 은혜의 방도로 쓰이는 것이 됩니다.


율법을 통해서도 법정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성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터득하여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성격을 터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건들도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경영해 가시는가를 터득하여 가고, 그렇다면 자신은 하나님께서 경영해 가시는 그러한 역사속에서 어떠한 성격의 행보를 해야 하겠는지를 자꾸 터득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세계로 자신을 이끄시기 위해서 구원하시고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시는가를 자꾸 깨달아 가야 합니다.


그럴때에 사명의 신앙으로 나아가게 되고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그러한 사명을 위하여 매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취하고 나가야 할 삶의 성격을 포기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출처: 페북 [개혁신앙 공동체] 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