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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장로교 정치의 현주소 - 이상규 교수

Bavinck Byeon 2017. 6. 25. 20:17

『이 발제문은 13일 총신대에서 열린 제6회 죽산기념강좌 발제문이다.』


한국교회 장로교정치의 현주소

장로교 정치제도와 한국장로교회에서의 교회정치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시작하면서


한국장로교회에서 교권이 행사되고 있고, 교회의 치리기구가 정치집단화 되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또 장로교회가 감독교회화 되거나 계급적 구조로 변질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에서 여러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있어 반성과 자성을 요청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여 이 글에서는 장로교회가 지향하는 장로교제도(presbyterianism)가 어떤 제도인가를 검토한 후, 이 제도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신학적 의의를 살펴본 후 그런 장로교회가 한국에 소개 된 후 유교적 문화토양에서 어떤 특징 혹은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가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또 한국장로교회에서 제기된 인연(人緣)이나 지연(地緣), 혹은 학연(學緣)에 기초한 교회나 교회 치리회에서의 교권이나 정치운동의 몇 가지 사례들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 장로교회의 현실을 반추해보고 반성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1. 장로교회와 장로교정치제도


1.1. 정치제도로서의 장로제


흔히 교회의 정치형태는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감독제(監督制), 회중제(會衆制), 장로제(長老制)가 그것이다. 그 외에도 교직제도를 부인하는 파라 처치(para-church)가 있다. 천주교회의 ‘교황제’(敎皇制)를 별도의 유형으로 구분한다면 4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지만, ‘교황제’도 ‘감독제’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감독제란 천주교, 성공회 그리고 감리교회가 따르는 정치형태로서 상회와 하회의 구분이 뚜렷하고, 교회 직분자 간의 계급적 차이를 두어 지역교회 간의 평등성과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정치형태를 말한다. 이 제도는 일종의 독재적 성격을 띠고 있다.


회중제는 회중교회나 침례교회가 따르는 제도로서 계층구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교회정치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지역교회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조한다. 즉 개 교회나 목회자간의 평등을 강조하고 계층구조를 반대한다. 또 회중제는 회중에 의한 목사의 선택, 예산집행이나 권징의 자율적 실시를 강조한다. 회중제를 따르는 교회들은 교회연합을 강조하다보면 교회구조가 계급화 할 위험이 있다고 보아 노회나 총회와 같은 형식의 치리회(治理會)를 반대하고, 개 교회주의를 지향한다.


반면에 장로제는 장로교회의 정치형태로서, 근본적으로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장로와 장로사이, 교회와 교회간의 평등을 강조한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계층적 혹은 계급적 구조를 반대한다. 동시에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연합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특히 장로교회는 감독제와 같이 어느 특정한 직분자에게 절대적 권위를 두지도 않고, 회중제와 같이 회중의 결정을 절대시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회중이 선출한 장로(지금의 목사와 장로)가 교회의 치리를 담당하는 제도이다. 그래서 장로교는 대의제(代議制)라고 불리기도 한다. 장로교회는 개 교회의 독립성, 평등성, 자율성을 강조하면서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에서 연합을 강조한다. 감독제도 외의 교회 제도는 종교개혁 이후에 생겨난 제도인데, 이 점은 감독제도의 교권적, 계층적 제도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해 준다.


1.2. 2직분론과 3직분론


장로교회를 문자적으로 말하면 ‘장로에 의해 다스려지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데, 장로교회는 이 제도가 사도시대부터 있어왔던 정치제도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흔히 장로제는 가장 성경적인 제도, 가장 사도적인 제도, 가장 민주적인 제도라고 불리기도 한다.1)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어떤 제도가 가장 이상적인 제도인지 혹은 교회는 어떤 정치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신약시대의 교회는 조직화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으므로 오늘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구체화된 제도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신약성경에는 ‘장로’와 ‘감독’ 직이 나오는데, ‘장로’라는 말은 신약성경에만 60회 이상 사용되었으나, 감독이란 말은 신약성경에 오직 5번만 사용되었다(딤전3:1,2, 딛1:7, 빌1:1, 행20:28). 이 두 직분이 동일직인가 아닌가에 대한 이견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장로교 전통에서는 동일직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 점을 지지해 주는 성경적 근거로 사도행전 20장, 디모데전서 3장, 디도서1장, 빌립보서 1장 등이 인용되고 있다.


‘밀레도 강화’라고 불리는 사도행전 20장 17절 이하의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에게 설교하면서(행20:17) 동일한 대상을 ‘감독’(행20:28)으로 호칭하였다. 말하자면 ‘장로’라는 말과 ‘감독’이란 말이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와 동일한 경우가 디도서 1장에도 있다. 바울은 각성에 장로들을 세우도록 명하면서(딛1:5) ‘장로’의 자격을 말하는 중에 디도서 1장 7절에서는 ‘감독’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어 이곳에서도 ‘감독’과 ‘장로’라는 말이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동일한 대상을 감독으로 혹은 장로로 호칭함으로서 장로와 감독은 별개의 직분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장로와 감독이 동의어라는 점을 암시하는 또 한 가지 본문이 디모데전서 3장이다. 디모데전서 3장 1절 이하에서는 감독의 자격을 말하고 있는데, 동일한 내용이 디도서1장 5절 이하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디모데전서 3장 1절 이하에서 감독의 자격과 집사의 자격을 말하고 있지만, 장로의 자격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것은 장로는 감독과 동의어였기 때문에 별도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빌립보서 1장도 장로와 감독이 동일직이라는 점을 암시해 준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 서두에서(1: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는 말로 인사하고 있다. 여기서  ‘성도’와 ‘감독’과 ‘집사’는 언급하고 있지만 ‘장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장로가 감독과 동의어였기에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이 장로와 감독은 동의어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장로’와 ‘감독’의 차이가 있다면, ‘장로’(長老)는 연령적 측면에 강조를 둔 표현이라면, ‘감독’(監督)은 직분의 역할에 강조를 둔 표현일 뿐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교회는 신약교회의 직분은 오직 두 가지, 곧 ‘집사’와 ‘장로’(혹은 ‘감독’)로 구성되었다고 보는데, 이를 2직분론(二職分論)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감독 제도를 따르는 교회들은 장로와 감독을 동의어로 보지 않고 별도의 직분으로 이해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여러 장로들 중에서 다스림의 위치에 있는 어느 한 사람을 감독으로 부르면서 장로와 감독을 구분하고 계급화 시켰다. 이런 입장을 3직분론(三職分論)이라고 부른다. 감독과 장로를 동일 직분으로 보지 않고 계층화한 것이 교회구조를 계급구조로 변질시키는 시작이 되었다. 그래서 2세기를 접어들면서 서서히 감독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교회가 인간 중심의 계급 구조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95년 혹은 96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서신은 로마교회의 우위권이 인정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이미 1세기 말에 교권체제가 형성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2세기 중엽의 속사도 교부들은 ‘감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점은 익나티우스의 글 속에 현저히 나타나는데, 120년경부터 감독을 정점으로 하는 교회조직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2) 이런 현상은 150년 이후 보편화된다. 예컨대 이레니우스는 먼저 장로가 되었다가 178년 폰티누스의 뒤를 이어 리용(lyon)의 감독이 된다.


윌리엄 커닝햄(william cunningham)은 첫 2세기 동안의 기독교회사를 취급하는「역사신학」(historical theology) 제1권 7장에서 계층화 된 성직계급(prelacy)의 출현을 은혜의 교리에 대한 모호하고도 잘못된 견해와 덕(virtue)과 성만찬의 효과에 대한 오도되고도 과장된 개념의 대두와 함께 교회관의 변질을 보여주는 징후로 지적한 바 있다.3) 감독제도는 역사적인 발전의 과정을 거쳤고, 이런 과정에서 당시의 정치적인 여건, 곧 공화정치가 아닌 왕정(王政)의 영향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4)


4세기를 접어들면서 이런 계층적인 교회 구조 즉 감독제는 심화되었고, 곧 교황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니케야회의(325)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세 감독을 동일시하여 다른 지역 감독들보다 높은 대감독(patriachs)의 칭호를 수여하도록 결정하였고, 콘스탄티노플 회의(381)는 콘스탄티노플 감독에게도, 칼세돈 회의(451)는 예루살렘 감독에게도 대감독의 칭호를 부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5세기 중엽 이후 전기한 5개 지역에 ‘대감독’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를 제외한 4개 도시 대감독들이 콘스탄티노플 대감독의 영향 하에 있었음으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는 교회의 주도권은 지니게 된다.


170년경부터 베드로는 로마의 첫 감독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레니우스, 키프리안 등은 로마감독의 우위권을 주장하였다. 4세기 말 로마의 감독 다마스 1세(damasus i, 366-384)는 마태복음 16장 18절을 이용하여 자신의 감독직는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사도적 전승’을 계승한 것임을 공포하였고, 제롬(jerome)에게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토록 지시하면서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로마감독의 권위를 이 번역에 반영토록 지시하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로마감독의 권위가 크게 부상하여, 476년 서로마제국의 붕괴 이후 교회가 국가권위를 대신하게 되었다. 또 로마 감독은 세속까지도 통치하는 교황(caesar papacy)이 되었다. 그 후 그레고리 i세 때는 로마교회가 절대적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왕권(imperium)에 대한 사제권(sacerdotium)의 우위를 주장하게 된다.


이처럼 계층구조적인 교황제도는 역사적 발전과정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순수한 ‘말씀의 봉사자’가 ‘사제’가 되어 성례전 수여 등과 같은 소위 은혜의 수여자가 된 것이다. 이 사제는 사도적 계승이라는 명분 하에 교권주의가 계급주의(hierarchism) 곧 교황주의(papism)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중세의 교황제 혹은 감독제 하에서도 장로 제도를 성경적인 제도로 알아 이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계속 있어 왔는데, 이들이 바로 개혁자들이었다.


1.3. 칼빈과 장로교 제도


교회제도와 관련하여 볼 때 루터와 칼빈의 교회관의 차이는 교회제도에 대한 차이를 반영한다. 루터는 교회를 ‘성도의 모임’(communio sactorum)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여 제도로서의 교회를 강조하지 않았다. 즉 루터는 제도화 된 로마 가톨릭에 대해 반발하면서도 제도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생각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루터교회에는 로마 가톨릭의 감독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은 교회는 성도의 모임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institution)로 이해했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로서의 교회 개념이 성도의 모임으로서의 교회 개념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있고, 여기에 대한 응답으로서 신자들의 모임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칼빈은 로마가톨릭과는 다른 제도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5)


교회정치제도와 관련하여 칼빈에게 가장 큰 관심은 과연 성경은 어떤 형태의 교회정치제도를 지지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또 사도시대의 교회정치제도는 어떠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점에 대해 성경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칼빈은 이 문제를 가지고 고심했다.


그러나 칼빈과 장로교 전통에서는 신약성경의 두 본문에 근거하여 신약시대 혹은 사도시대에는 비록 장로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장로교제도가 있었고, 그것이 가장 성경적인 제도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6) 그 두 본문이 사도행전 15장과 디모데전서 4장 14절이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의 결과로 이방인의 할례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안디옥교회가 단독으로 결정하지 않고, 교회 대표를 예루살렘에 파송하였고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 문제를 처리하였다. 만일 안디옥 교회가 단독으로 결정하였다면 이는 회중제도임을 보여주지만, 지역교회가 파송한 교회 대표가 모여 이 문제를 논의한 것은 오늘의 노회(혹은 총회)와 같은 제도를 보여주고 있어 시도시대 교회에 장로제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 디모데전서 4장 14절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면서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장로의 회’(the body of elders)란 ‘장로들의 일단’ 혹은 ‘장로단’이란 말로서 지금의 노회에 해당했다. 그래서 칼빈은 장로제도는 가장 성경적인 제도이고, 이것이 신약교회의 정치형태로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제네바에서의 교회개혁운동을 통해 이 제도를 회복하고자 했고, 결과적으로 로마가톨릭의 계급적인 감독제도와 다른 장로교주의를 주창하게 된 것이다.


1.4. 장로교 정치 제도의 의의


16세기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교회정치 문제는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관심사였다. 첫째는 국가 혹은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 교회의 독립성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교회내의 질서를 유지하고 바른 교회건설을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국가와 교회와의 정당한 관계의 정립은 개혁자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국가 혹은 시의회 등 국가권력 기구는 교회 문제에 개입하고자 했고, 교회는 독립성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가 치리권(治理權)의 행사와 관련하여 제네바에서의 시의회와 칼빈과의 대립이었다.7)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정치제도는 중요한 관심사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 내의 질서와 훈련, 치리를 위해서도 교회정치 제도는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칼빈이 1541년 제네바에서 작성한 교회헌법(ecclesiastical ordinances)은 이런 관심의 반영이었다.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서 교회가 국가보다 우선하고 교회는 국가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다는 황제-교황주의(caesar-papism)도 잘못이지만, 반대로 국가가 교회보다 우선한다는 에라스티안주의(erastianism)도 잘못이다. 그러면 교회와 국가는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 로마 카톨릭은 교회의 세속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고, 성공회는 왕이 교회의 수장임을 인정했다. 루터교는 국가의 교회간섭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방(領邦)교회로 발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칼빈은 어떤 정치제도가 성경에 가장 부합되는 바른 제도인가에 대해 고심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국가와 교회는 각각의 고유한 기능이 있고, 국가가 교회문제를 간섭하거나 교회가 국가의 기능을 대치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장로교제도(presbyterianism)가 가장 성경적인 정치제도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비록 성경이 구체적으로나 명시적으로 장로제를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특히 사도행전 15장의 할례 문제처리에서 개별 교회가 독단적으로 처리하거나 어느 한 지도자가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예루살렘 공의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처리한 것을 보면 예루살렘 공의회는 지금의 노회와 같은 기구라고 보았다. 또 디모데전서 4장 14절의 “네가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은 것을 기억하라.”에서 ‘장로의 회’는 지금의 노회와 같은 제도로 이해했다. 그래서 칼빈은 사도시대의 교회는 비록 ‘장로제’ 혹은 ‘장로정치’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으나 이미 장로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칼빈은 교회론, 예배론, 성찬론에 있어서 스트라스부르크의 개혁자인 마틴 부서(martin bucer)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장로교 정치제도도 예외가 아니다. 부써는 1538년 「참된 목회에 관하여」(von der waren seelsorge)를 출판했는데, 이것은 장로교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수년간의 노력의 결창이었다. 칼빈은 이 책으로부터 큰 도움을 입었고, 부서가 1536년에 출판했던 「로마서 주석」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2판(1539년 판)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회중정치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계층구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교회정치 형태로서 지역교회의 자율성 (곧 목사의 청빙, 예산의 집행, 치리의 자율적 집행 등)과, 교회와 교회 사이, 목사와 목사 사이의 평등을 강조하며, 어떤 형식의 계층구조도 반대한다. 이들은 교회연합이 계층구조를 취할 수 있다고 보아 교회연합을 반대하고 개 교회주의를 취한다. 그러나 장로교 정치는 회중교회의 자율성과 평등성을 수용하면서도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 때문에 연합해야 한다고 믿고, 치리회로서 당회, 노회 그리고 총회를 갖는다. 이것이 회중교회 제도와 다른 점이다.


정리하면, 장로교 정치원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아래서 모든 지체와 지 교회들이 누리는 평등성(equality),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하여 직분자들을 통해서 운영되는 자율성(autonomy), 지 교회의 대표들을 통해 연합하는 연합성(unity)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국가권력과 독립하여 교회의 직분자(특히 치리를 하는 직원으로서 목사, 교사, 치리 장로)에 의한 치리, 연합을 통한 교회의 통일성, 그리고 개체 목사와 장로의 평등성은 장로제의 3대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8)


웨스트민스터회의(1643-1647)9)에서도 교회정치문제는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다른 교리적 문제는 큰 논란이 없었으나, 교회정치 문제에 대한 토론은 무려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이  때에도 중요한 이슈는 국가권력과의 문제였고, 어떤 제도가 가장 성경적인 정치제도인가가 관심의 핵이었다. 오랜 토론을 통해 작성된 이 신앙고백서10)에서 장로교 제도가 잘 석명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는 영국에서의 장로제의 대두와 더불어 의회와 신학자회의 간의 대립을 보여주었는데, 그 대립의 핵심 사안은 치리권의 문제였다. 치리권이 의회에 있는가 아니면 교회에 있는가? 이런 대립된 주장의 와중에서 의회가 ‘9개 항목의 질의서’를 신학자회의에 보냈는데, 이 질의서에 대한 응답의 형식으로 런던의 시온 칼리지(sion college)의 목사들이란 이름으로 1646년 12월에 출판된 문서가 「교회정치의 신적 제정」(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이었다. 이 문서에서 치리권은 위정자나 교회 회중에 있지 않고 교회의 치리회에 있다고 주장했다. 교회정치의 권위 곧 치리권이 “교회의 회중, 곧 신앙의 공동체에 있지 않다는 지적은 당시의 독립파교회가 교회정치의 권위가 신앙의 공동체에 있다고 한 것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다.


결국 장로교 제도란, 1. 국가권력의 한계성을 지적해 주고, 2. 국가권력으로부터 교회의 독립과 자율성을 지켜가며, 3, 교회의 질서와 치리를 통해 바른 교회를 세워 가는 제도라고 볼 수 있다.11)


2.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와 교권주의


이상에서 장로교회가 어떤 정치제도를 취하는 교회인가를 역사적으로 고찰하였다. 역사적으로 장로교회는 중세적 계층구조로서의 교회제도를 반대하는 성격과 교회의 자율과 독립을 강조하는 이중적 성격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중세적 계층구조를 부정하는 가장 안이한 길은 회중교회와 같은 개 교회주의를 택하던지, 아니면 교직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소위 자유교회(free church)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제도적으로 이런 양 극단을 지양한다. 즉 교회의 계층화를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 교회주의나 자유교회적 경향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장로교의 역사와 전통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의 장로교회는 앞의 양 극단의 형태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천주교적 계층화와 교권이 행사되고 있는가하면 그 반대적 경향, 곧 개교회적 경향도 심화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장로교회가 감독교회화 되고 있다는 지적이 높다. 뿐만 아니라 노회, 총회가 권력화 되어 교권을 행사하는가 하면 정치집단화 되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한국교회 일각에서 나타나는 개교회적 경향은 따지고 보면 교회 구조의 계급화, 과도한 교권 행사 혹은 교회 조직에서의 정치집단화에 대한 반동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한국 장로교회의 감독교회화 현상이나 교권의 행사는 다분히 한국적 문화토양에서 형성된 특면이 깊다. 한국에 장로교회가 소개된 이후 한국의 고유문화, 곧, 유교의 권위주의 혹은 신분주의의 영향으로 장로교회에 로마교적 계층주의가 나타나고, 권위주의적 교권이 행사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주된 요인들을 다음의 몇 가지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2.1 교회의 계층화와 감독교회화


장로교는 계급적인 구조는 본질적으로 신약교회 원리에서 어긋나며, 교회의 구조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즉 초기 기독교회에서 직분자들은 서로를 “함께 종 된 자”(골1:7), “함께 군사 된 자”(빌2:25), “같은 장로”(벧전5:1), 혹은 “동역자”(빌2:25, 4:3, 몬1:24)라고 불렀다. 이 시대교회는 계급적인 구조가 없었으나 2세기를 거쳐 가면서 교회 구조의 변질과 함께 교회는 계층화되고 감독정치가 자리 잡게 되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회중교회는 계층구조를 반대하고, 교회연합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교회연합을 강조하다보면 교회조직이 계급 구조로 변질될 위험이 있고, 계급구조화 될 때 교권이 행사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중교회는 개체 교회의 자율과 평등을 절대적 가치로 수용하는 개 교회주의를 지향했다.


그런데 장로교회는 장로와 장로, 교회와 교회간의 평등을 강조하며, 또 감독정치의 계급적인 구조를 반대하면서도,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에서 연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 점이 감독제도를 반대하는 점에서는 회중교회와 동일하지만 연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회중교회와 차이가 있다. 그래서 장로교회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모든 지체들이 누리는 평등성(equality), 직분자들을 통해서 운영되는 자율성(autonomy), 교회 대표를 통해서 실시되는 연합성(unity)를 기본 정신으로 하고 있다.12) 즉 장로교회는 평등과 자율을 강조하면서도 연합을 반대하는 회중주의와 다르며, 연합을 강조하지만 평등과 자율을 거부하는 감독정치도 반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장로교회가 소개되고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게 되자 교회가 점차 교권화 되고 장로(목사)와 장로(목사) 간의 평등, 교회와 교회간의 평등의식이 희박해 지고 계층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점은 장로교회 제도에서 오는 내적 원인과 한국의 문화현실에서 오는 외적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내적 원인이란 말은 장로교회가 감독교회 정치에 대한 반발로 나왔지만 장로교회는 제도적으로 감독교회화 혹은 교권의 권력화가 될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외적 원인이란 한국이 처한 유가적(儒家的) 문화 토양에서 교회구조의 계급화가 일어날 소지가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먼저 내적 원인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루터는 ‘만인사제직,’ 혹은 ‘만인 제사장론’을 강조하여 어떤 점에서 교직자와 평신도 간의 구별이나 차별을 해소하였으나 칼빈은 이런 용어를 사용한 흔적이 거의 없다. 즉 칼빈의 글이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에서 ‘만인사제직’이라는 용어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오직 불링거가 작성한 ‘제2 스위스신앙고백서’에서만 ‘민인제사장’은 계층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모든 교인이 하나님 앞에 평등함을 뜻하는 말이라고 해석하고 있을 정도이다.13) 루터의 만인제사장론은 극단적으로 교직제도를 부정하는 방향으로까지 발전하였으나, 칼빈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즉 장로교회는 루터만큼 평신도와 다른 교직자와 위상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칼빈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로서의 교회 개념이 성도의 모임으로서의 교회 개념보다 우선한다고 지적했는데, 이런 칼빈의 교회관 때문에 말씀의 사역자로서 목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교회가 있는 것이므로 교회를 말할 때 목사는 교회와 대칭이 되며 교회를 있게 하는 직분으로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런 원리에서 목사는 지역교회에 속하지 않고 목사단, 곧 노회에 속한 것으로 제도화 되어 있다.14) 다시 말하면 장로교회에서 목사는 노회에 적을 두고 있으며, 지역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교인과는 다르다. 다시 말하면 장로교회는 제도적으로 목사와 평신도(교인) 간의 구별이 있다. 비록 장로교회는 중세의 계층화된 감독교회를 반대했지만 장로교 제도에는 교회의 계층화 혹은 감독교회화의 여지를 안고 있다. 목사와 평교인 간의 2층 구조의 장로교회 제도를 중세교회나 현재의 로마 카톨릭의 교회 구조와 혼돈하지 않고 구별할 수 있는가는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물론 평신도인 장로가 노회나 총회의 회원이 되며 각종 회의의 의결권을 갖는다는 점이 로마 카톨릭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사안의 전문성이라는 점에서 목사가 주도하게 되고 구조적 계층화 현상은 완전히 배제될 수 없다. 즉 장로교회는 목사의 직분을 소중하게 여기는 전통적인 이해 때문에 중세적인 계층제도로 빠져드는 여지를 안고 있는 것이다. 장로교회는 어느 정도의 계층적 구조를 인정하고 있는 샘이다. 어떤 점에서 장로교회는 회중교회도 아니고 감독제도도 아니지만 회중제도 보다는 감독제에 근접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내적 구조가 교회의 계층화와 감독교회화의 여지를 남겨주었다고 볼 수 있다.


2.2 유교적 위계질서와 권위주의


한국장로교 치리회의 권위주의적 성격이나 정치 권력화에 영향을 주는 또 한 가지 요소는 유교적 가치이다. 유교적 가치는 한국인의 실존적 삶에 영향을 미쳤고, 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비록 서구문화의 이식 이후 유교는 봉건적 잔재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유교적 가치는 여전히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사고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유교는 일종의 인간관계의 철학으로서 봉건적 정치질서의 기반이 되었고, 한국에서도 3가지의 강령(綱領)과 5가지의 인륜(人倫), 곧 삼강오륜은 사회의 기본적 윤리로 존중되어 왔다. 즉 유교는 수신, 제가, 치국이라는 인생관에 따라 정치적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추구한다. 그래서 유가적 가치는 신분, 직함, 직책에 대한 애착이 높아 한국교회에 권위주의적 영향을 끼쳤다. 넓게는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제도에서 이 유교적 권위주의는 다음과 같은 한국교회 특유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첫째는 교회에서의 상하관계와 신분주의가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직분은 섬김의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계급으로 이해하게 되어 평교인, 서리집사, 안수집사, 장로 등으로 서열의식을 갖게 되었다. 또 유교적 신분주의는 세계교회에 유례없는 직분과잉 현상을 초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구교회의 경우 장로, 혹은 집사의 수가 제한적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한국교회의 경우 전 교인의 약 50%가 직분자일 정도로 직분이 남발되고 있다. 호칭에 대한 지나친 애착도 입신양명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일단 장로가 되면 ‘장로’라는 직함은 자기 현시의 정체성으로 인식한다. 특히 장로를 항존직으로 보는 한국 장로교의 전통과 결합될 때 이러한 신분화는 정당시된다. 서양 교회 전통에서 ‘장로’라고 할지라도 mr로 호칭하지만 한국에서 이러한 호칭은 커다란 결예로 인식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이런 현상을 유교주의의 영향으로만 해석할 수 없지만, 외국인 학자들의 지적처럼 이런 현상들은 유교적 신분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파벌의식과 당파성 또한 유교적 영향으로 지적된다. 즉 유교적 입신양명에의 추구가 주도권 쟁탈이 내적 요인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장로교회의 가장 큰 약점은 교회의 고질적인 분열상인데, 현재 한국에는 100여개가 넘는 교단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이런 분열은 어느 한 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신학과 역사적 배경을 달리하는 선교부의 경쟁적 선교활동, 진보와 보수의 신학적 대립, 일제 하에서의 박해와 신사참배 문제, wcc에 대한 nae와 ncc의 견해차, 한국인들의 지방색과 파벌주의, 그리고 지도자들 간의 주도권 경쟁 등 다양한 요인이 있다.


분열의 요인이 무엇이었던가에 관계없이 그 이면에는 유교적 영향, 곧 학문적인 토론이나 이설(異說)을 허용하지 않는 엄격한 정통 집착증, 파벌주의가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이 파벌은 해 집단의 이익을 위해 교권을 행사하고, 또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정치집단화 되기 싶다.


2.3. 집단주의(collectivism)


한국에서 기독교가 ‘개인’과 ‘개인주의’를 발전시킨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은 한국 기독교의 중요한 기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교회에는 개인적 특성보다는 한국의 전통문화 유산인 집단적 특성이 강하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서 결단하고 기독교적 삶을 추구하기 보다는 다른 이와 함께 하는 교회의 공적 집회나 모임에 참여하는 일에 더 적극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윤리적 존재로서 개인의 삶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구현하는 다소 소흘하다. 이런 점도 집단주의의 영향일 것이다.


이런 집단주의는 조직 속에서는 중앙집권적 경향으로 나타난다. 즉 어떤 조직체에서 결정권이나 집행권은 소수의 엘리트에게로 이양 내지 집중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향이 한국교회에서도 나타나는데 그것이 장로교회의 감독제화 현상이다. 즉 한국장로교회에서 나타나는 감독제화 경향은 집단주의의 열매라는 점이다.

또 이런 집단주의가 인연이나 지연 학연을 매개 파벌을 조장하고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게 만드는 정치 집단화하는 요인이라고 본다.


3. 한국에서의 교회정치와 교권


이제 구체적으로 한국장로교회의 교회 정치 혹은 교권행사의 경우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고자 한다. 한국교회에서 언제부터 교권이 행사되고 교권적 대립이 있어왔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주지하는 바처럼 한국장로회는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하였고, 1912년 총회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미 1920년대부터 이런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구체적인 사례는 1920년대에 지연(地緣)에 바탕을 둔 교권 대립의 시례가 나타나지만, 그 조짐은 이미 1900년부터 나타나기 배태되고 있었다.


3.1 서북지방과 비서북지방의 대립


1900년부터 흔히 서북(西北)지방으로 불리는 황해도와 평안도지역에서 교회성장은 타 지역을 완전히 앞지르기 시작한다. 1905년의 경우 서북지방의 신자수는 18,300명으로 전국의 23,300명의 80%를 점하고 있다. 교회당의 경우 서북지방은 218개 처로써 전국 298개처의 85%를 점한다.15) 1910년에는 결정적이 차이가 나타나는데, 이때의 교세를 보면 아래와 같다. 평북: 7,901명, 평남: 10,842명, 황해 4,740명, 경기충청 2,975명, 경상 5,726명, 전라 및 제주 5,509명이었다. 이 통계를 보면 서북지방으로 불리는 황해도와 평안도지방의 신자수는 23,483명으로 경기충청의 2,975명보다 8배 앞선다.16) 서북지역 이외의 기독교 인구를 다 합해도(14,210명) 서북지역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비율은 그 이후에도 계속 유지된다. 이런 서북지방 기독교세의 강세는 다양한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았지만 우선 선교사들의 수에 있어서 경기충청지방을 크게 앞서고 있었다. 1887년부터 1910년까지 서북으로 불리는 평양, 선천, 정주, 재령에는 45명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었으나 서울에는 25명의 선교사들이 상주하고 있었다.17) 즉 서북지방의 압도적 성장 때문에 그 세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세력화가 교권의 행사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18)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될 때가지 한국인 목사가 없었기 때문에 노회에는 한국인 장로가 참석하게 되었는데, 서북지역에서 장로가 대표로 참석한 곳은 25개 처인데 반해서, 기청(畿淸) 이남은 8개 처에 지나지 않았다.19) 1907년 독로회가 구성된 후 1912년 총회가 조직되기까지 5회의 회의 중 서북지역에서 회집한 경우가 3번이었고, 1912년 총회도 평양에서 소집되었다. 1907년 한국인 최초의 목사 7인 중 6명이 서북지역교회에 배치되었고, 이기풍목사는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기청 이남 지역에는 한 사람도 파송되지 못했다.20) 1910년에 가서 한석진이 안동교회 전도목사로, 서경조가 새문안교회 동사목사로 부임했다. 1911년 새문안교회가 처음으로 한국인 조사를 임명하려 했을 때 “남(男) 조사는 평북 선천에서 고빙하여 오기로” 결정한 것도 서북지향적 발상이었다고 민경배는 해석하고 있다.21)


이런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력은 지연(地緣)에 기초한 교권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즉 비서북 지역교회 지도자들은 지난 50년간 평양을 비롯한 서북교회 지도자들, 곧 서북파가 총회를 좌지우지했다고 믿고 있었고, 성경 찬송에서 평양사투리가 남아 있어도 시정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총회 임원도 북한 지역 인사가 독식하고 있었다. 이런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1924년에는 이자익목사를 13회 총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남해 출신이지만 전라도 김재에서 성장했기에 호남인이었으므로 경상도 지방에서는 크게 만족하지 못했다.


1934년 서북지역 교회들은 ‘교권의 정착을 노려’ 총회 총대를 교인 200명당 목사 장로 각 1인으로 하는 의산(義山)노회의 헌의를 적극추진한 일이 있었으나,22) 비서북지역과 경성 함북 노회의 반대로 무산된 일도 있었다.


당시 교회의 지역적 갈등과 서북파의 교권의 문제를 헤아린 첫 인물이 송창근(1898-?)과 김인서(1894-1964)였다. 함경북도 웅기출신인 송창근은 서북교회의 중심 교회인 1931년 평양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이후인 1934년 12월에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하고 있다.


요즘 천하 공지하는 바에 조선교계에도 무슨 당(黨)이 있다. 누구의 파(派)가 있다하야, 서로 노려보고 못 믿어하는 터이요, 게다가 같은 조선 사람으로써 핏줄이 서로 다은 내 동족인데도 남놈 북놈하여 스스로 갈등을 일삼으니 이 어찌함인가? 북놈이 잘되고 남놈이 잘못되어도 조선이 망하는 것이요, 북놈이 꺼구러지고, 남놈이 승(勝)한다 해도 결국은 조선교회가 망하는 것 외에 소득이 없을 터인데, 그래도 피차의 성찰이 부족한 듯하니 오십년 희년(禧年)인가 오십년 희년(噫年)인가?23)


송창근은 미국선교사 도래 50년을 맞는 1934년이 축복의 해(禧年)인가 아니면 탄식할 해(噫年)인가를 묻고 있다. 당시 서북과 비서북, 이북과 이남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조성되고 교권이 행사되고 있음을 보고 있었고 그것이 심각한 현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인서의 관찰은 이런 대립이 심상치 않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서도(西道) 사람이 세력이 있건, 서울사람이 세력이 있건, 다 같은 조선놈끼리 그다지 싸울 것이야 무엇인가? ... 대체 분우(紛憂)하는 제씨의 눈에는 서도사람, 경성(京城)사람만 눈에 보이고 예수는 아니 보입니까?24)


한국에서의 지연을 배경으로 한 서북과 비서북, 이북과 이남 사이에 긴장과 대립이 형성되었고, ‘당’ 혹은 ‘파’가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이미 한국교회는 부정적 의미의 교회정치 혹은 교권이 행사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위기에 대해서는 남쪽에서도 우려하고 있었다.


경남지방 인물인 최상림은 1934는 경남의 한적한 해안촌락에 불과한 남해교회에 부임하면서 행한 첫 설교가 “일사각오의 기로에선 한국교회”였는데, 이 설교에서 희년을 맞은 한국교회가 지역주의에 빠져 그 폐단이 심각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지도층이 일사각오로 요청하고 있었다.25) 최상림목사는 장로 있던 1924년 1월 경남노회 서기로 피임된 이래 연 10회가 5년간 서기로 일하면서 서북파와 비서북파, 혹은 남북교회 간의 교권적 대립을 보게 되었고 이를 심각하게 받아드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경남노회 인사들은 당시의 지역주의 폐단의 심각성을 우려하고 있었고 총회를 남북으로 분할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해 있었다. 1934년 6월 5일 진해 경화동 예배당에서 회집한 제33회 경남노회에서 최상림목사 외 4인은 총회분립안 헌의한바 있다. 말하자면 북한과 남한을 구분하여 별도의 총회를 조직하자는 제안이었다. 수적 우세에 근거한 북한지역 (특히 서북지역)교회에 대한 심리적 배타심, 북한지역 교회의 교권의 장악에 대한 심리적 박탈감이 얼마나나 컸던가를 헤아릴 수 있다. 이 제안은 당시로서는 심각한 현안이었으므로 장시간 논란 끝에 헌의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당시의 지역적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노회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최상림 목사 외 4인이 총회를 분립하자고 헌의하자는 건은 헌의하지 아니하는 것이 좋은 줄 아나이다.26)


한국 장로교회 내에 존재하는 지연과 교권적 대립은 한 개인의 인식이라기보다는 노회적 차원에서 논의되리만큼 심각한 현안이 된 것이다. 이 점을 김인서는 확인해 주고 있다.


조선교회는 황해도 이서(以西)에 반 이상이 있다. 따라서 조선교회의 주력이 서부에 있는 것이다. ... 재래의 조선교회 대소사를 서부(西部) 교인이 지배한다는 것이 남북 현격(懸隔)의 원인이 되었다. 더구나 서방에 근거를 둔 정당적 모 단원들이 교회 기관을 잡고 당파심을 조장하는 이상 남서(南西)의 감정은 조화되지 않을 것이다. ... 당대의 조선에서 남(南)이니 서(西)이니 하는 못된 관념은 근조조차 제멸(除滅)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리고 모 단원들도 총회의 직접 기관에서 양퇴하여 교권농단의 수단을 버리고 사단(私團)과 교회의 관계를 명백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27)


여기서 말하는 ‘정당적 모 단원’이란 만족주의 단체인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곧 흥사단(興士團)을 칭하는데, 서북 교세와 관련되어 있었다. 반면 기청지역은 혁명동지회, 곧 동지회(同志會)와 관련되어 있었다. 기독교와 관련된 민족주의 단체인 흥사단과 동지회는 각기 다른 지역을 배경으로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28)


남북교회 갈등이 보다 구체화된 때는 1936년이었다. 그해  9월 11일 광주 양림교회당에서 개최된 25회 총회에서는 박승명 사건, 기독교보와 기독신보 사건, 정 찬송가 사건, 경중노회 사건 등으로 남북간의 대립이 심화되어 분열 직전까지 간 일이 있었다. 평양 서문밖교회의 임종순목사 등 중립파의 수습에 의해 가까스로 대립은 봉합되었다. 이런 경험 때문에 그 이듬해에 열린 26회 총회는 처음으로 대구 남산교회 이문주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이전에 총회 임원이 아니었으나 1936년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선출된 바 있다. 경상도 출신 이문주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함으로써 영남지역교회를 끌어안았던 것이다.29)


그로부터 2년 후 홍택기를 비롯한 서북파의 친일세력이 총회를 주도하고 신사에 굴복하게 된다. 영남, 특히 부산 경남지방에서 이런 조치에 반발하고 신사를 반대한 것은 서북파에 대한 반발의 심리를 없었을까 하는 점은 검토해 볼 만 하다.


일반적으로 서북과 기청, 혹은 비서북으로 대별되던 교회정치적 맥락은 해방 후 교회 분열의 계보와 상통하는 점이 없지 않았는데, 서북교회는 예수교장로회로, 감리교의 경우 총리원파 구룹으로, 기청계는 기독교장로회로, 감리교의 경우 호헌파 구룹으로 형성된다.30)


3.2. 박승명 사건


1927년 총회에서 서북파와 비 서북파 혹은 남북교회 간의 정치적 대립을 노정했던 한 가지 경우가 박승명사건에 대한 처리방식이었다. 박승명 사건은 경남 노회를 소란케 한 화제꺼리였을 뿐만 아니라 서북과 비서북지역 간의대립을 가져온 사건이 되었다.


박승명(朴承明)은 평양신학교 제18회(1925) 졸업생으로 1926년에는「종교변증론」을 저술한 인물이기도 하다. 장로이자 조사였던 박승명은 1924년 12월 30일 마산문창교회에 부임하여 1925년 1월 9일 위임 목사가 되었다. 그런데 얼마 못가 목사 사면을 위한 공동의회를 소집하였고, 담임목사 사면서를 당회에 제출했다. 위임한지 얼마 안 되어 사임하지 않으면 안 될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사건이란 문창교회 교인 윤덕이와 이옥동에 의해 제기된 추문, 곧 간음 사건이었다. 이미 박승명은 이런 류의 전력으로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 1902년에 설립된 안성읍 서리(西里) 교회에서의 일이다. 사건 발생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선교사 피득이 시무한 후에 조사 박승명을 파송하여 전도케 함으로 전진의 망(望)이 ?白하더니 악마의 작희(作戱)로 기괴(奇怪)한 사건이 생(生)하여 조사는 송환되고 교회는 해산의 상태에 재(在)하더니... 31)


악마의 작희로 일어난 “기괴한 사건”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고 있으나 음행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런데 동일한 사건이 문창교회에서 다시 제기된 것이다. 이 문제 확대되어  총회적 사건으로 비화되었을 때가 1927년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당회는 교인 5명을 선정하여 당회를 도와 조사하게 하고, 그 결과 윤덕이에게는 목사의 추문을 공포한 죄로 무기책벌하고, 이옥동에게는 모오한 말로 교회를 분규케 한 죄로 4개월간 책벌하였다. 책벌을 받은 이옥동은 당회 결과에 불복하고 당회를 노회에 고소하였고, 윤덕이는 박승명을 고소하였다. 노회는 박승명의 사임원을 수리하고 이옥동, 윤덕이의 고소건을 증거 불충분의 이유로 문창교회 당회에 반려 심의케 하였다. 또 박승명 문제는 사감에서 나온 것이고 사실이 없음을 석명하였다.32)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교인 일부는 박목사의 결백을 주장하고 그 반대편에서는 박목사의 간음사건을 문제시하였다. 결국 교회분규는 분열로 이어졌다. 경남노회에서 권고사직을 당한 박승명은 당석에서는 순종하는 듯 했으나 곧 노회를 비난하고 문서를 배포 하면서 경남노회에서의 배척이 지역감정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서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결국 개교회의 문제는 총회 차원에서 서북파와 비서북파의 대결구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개 교회 목사의 윤리적인 문제로 간단히 해결 될 수 있는 사안이었으나 총회적 사건으로 비화되고 논란이 야기된 것은 지역을 매개로 한 동정적 혹은 부정적 접근의 결과였다. 말하자면 지연에 근거한 교권의 대립은 윤리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균형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북파는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교권을 행사한 것이다.


3.3. 경남노회에서의 대립


한국에서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와 교권이 행사되는 가장 분명한 경우를 해방 이후 경남노회 분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때의 교권적 대립과 갈등은 그 이후의 교회정치와 교권 행사에서 가장 분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교권의 힘을 빌려 공적 회개를 거부했던 일은 한국교회에서의 치리 기능을 약화시키는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33)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에서 주도권 장악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특히 친일 전력의 타협적 인물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독일의 경우 나치 정권 하에서 협력했던 이들은 소위 프랑크포르트선언 혹은 슈트가르트선언을 통해 자진 사퇴를 선언하고 물러남으로서 나치에 굴복하지 않고 정치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이들과의 긴장이나 대립이 형성되지 않았으나 한국에서의 경우는 달랐다.


해방 후 한국에서의 친일전력의 인사들은 인퇴(引退)나 자숙보다는 자신의 기득권을 확보하고자 했으므로 교권의 확보는 시급한 과제였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교회 정치라는 수단은 정사(正邪)의 윤리성을 고려할 대상이 되지 못했다. 바로 이런 동기에서 교회정치라는 불의한 교권이 한국교회 현실에 뚜렷이 자리 잡기 시작했고 이들은 후일 ‘교권주의자’(敎權主義者)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북한에서의 경우 홍택기를 비롯한 신사참배론자들은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한 이들이나 고생은 마찬가지였다”고 말하면서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라며 공적 회개를 거부했다. 홍택기의 주장은 한 집단의 의사를 대변했고 이 우격다짐을 합리화(forced rationalization)하기 위해서는 교권의 뒷받침이 필요했다. 1945년 11월14일 선천에서 모인 교역자 퇴수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교회 쇄신론자들과 친일적 신사참배론자들 간의 최초의 대립이었다. 홍택기 중심의 지도자들의 교권 확보를 위한 정치운동이 전개되자, 박형룡은 “교권유지에만 급급한 현실을 목도하고 실망한 가운데 만주로 돌아갔다.”34) 이들은 교회 쇄신론자들에 저항하며 교권 확보를 시도했으나 공산정권의 수립으로 좌절되었고, 오늘까지 침묵의 교회로 남게 되었다. 서울에서의 경우 친일 혹은 부일(扶日) 전력의 인사들은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존속을 의도하고,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에서 남부대회란 이름으로 교단대회를 소집하기도 했으나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교권확보를 통한 기득권 유지는 신속한 변신을 통해 거듭 시도되었고, 남부총회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말하자면 교회정치 운동을 통한 교권의 확보는 해방 이후 보다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교권확보를 위한 정치운동은 특히 경남노회 지역, 곧 부산 경남 지방에서 줄기차게 전개되었다.35) 해방을 맞은 지 약 2주일 후인 1945년 9월 2일 김길창, 권남선 친일전력의 인사들은 노진현, 심문태, 최재화 등 중도파 인사들을 끌어들려 ‘신앙부흥운도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변화된 상황에서 신속한 변신을 시도했다. 이것은 기득권 유지를 위한 주도권 장악의 시작이었다.


1945년 9월 18일 경남노회 자숙안에 제기되자 친일적 인사들은 이에 저항하면서 교권 확보를 위한 정치운동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그 이후의 교권행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이들은 교회쇄신론자들에 저항하면서 집단의 힘을 이용하여 자숙안을 거부했다. 김양선은 이렇게 썼다. “일부의 교권주의자들은 교묘한 수단을 동원하여 노회의 영도권을 장악함으로 자숙안을 폐기시켰다.”36) 김길창 일파는 특히 1946년 12월의 정기노회를 앞두고 교권 장악을 위해 정치운동을 전개하는데, ‘사전 선거운동’을 통해 결국 노회장에 피선된다. 이렇게 되자 신사참배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게 하고, 고려신학교의 인정취소와 신학생 추천도 취소할 것을 결정한다. 정치운동을 통한 친일세력의 교권확보는 쇄신론자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고, 한상동의 시한부 탈퇴, 평신도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위기에 몰린 김길창 세력은 잠정적으로 총사퇴하게 되지만 노회에서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교회정치의 필요성과 그 힘을 확인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박형룡이 고려신학교를 떠난 이후 소집된 1948년 5월의 제34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총회 정치부장 김관석목사는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무관함으로 천서를 써 줄 필요가 없다”는 말에 고무되어 김길창, 김영환, 배성근, 진종학목사 등은 “고려파와 소위 신성파에 관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그해 9월 21일 부산 항서교회서 모인 경남노회 제49회 임시노회에서 노진현 등 중도파를 끌어드려 44:21로 고려신학교 인정 취소를 결의했다. 말하자면 해방 후 상황에서 자파의 이익을 위한 주도권 확보를 위한 교회정치가 보다 구체화되고 노골화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1948년 12월 7일 마산 문창교회서 회집한 경남노회 제50회 노회에서 김길창이 위기에 몰리자 그 일파는 1949년 3월 별도의 사조(私組) ‘경남노회’를 조직하고 이탈했다. 이것이 경남노회의 분열이자 한국장로교회의 분열로 이어진다.


경남노회의 분열에 대한 당시의 남부총회 처리 또한 ‘정치적’이었다. 친일 전력의 인사가 주도하고 있던 남부총회는 김길창 일파의 사조노회의 총대권을 부인하지 않았고, 경남노회 문제 처리를 위한 5인 전권위원회는 김길창의 불법 사조노회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채 경남노회 3분안을 제시하는 등 부당한 조치를 취했다. 교권을 배경으로 한 정치적 고려였던 것이다. 1950년 4월 21일 대구제일교회당에서 회집된 제36회 총회는 개회 벽두부터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였고 한국교회사상 최초로 경찰이 투입되는 치욕적인 총회였다. 이 극심한 대립은 장로교신학교(박형룡)와 조선신학교(김재준) 지지자들 간의 대립과 경남노회 총대권의 문제로 발생한 소요였다. 이때의 대립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자파의 교권확보를 위한 대립이었다. 이제 한국장로교회의 교권투쟁, 교회 정치는 세상의 그것과  별 차이 없는 것임을 드러낸 것이다. 경남 노회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별위원(別委員) 7인의 활동도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이들은 김길창의 노회 분리를 정당화시켜 주고,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을 초래한 것이다. 자파의 이익 추구라는 정치운동은 교회 분열이라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3.4. 1950년대 이후 정치운동과 교권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은 신학적 혹은 신앙고백적 동기라기보다는 정치적 성격이 깊다는 점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1953년의 기장의 분열이 그러했고, 1959년 합동과 통합의 분열이 그러했다.37) 1950년대 초 한상동 중심의 보수적 ‘고신측’과 김재준 중심의 진보적 ‘조선측’의 양극단이 제거되어 온건 중도성격의 한국장로교회는 평화가 올 것을 기대했으나 불과 몇 년이 못가 다시 분열의 아픔을 겪게 된다.38) 일반적으로 승동과 연동 측으로의 분열은 박형룡의 3천만환사건, wcc 가입 문제, 경기노회 총대건의 문제로 논의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박형룡과 한경직을 둘러싼 두 인맥 구성에서 야기된 대립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분열에 신학적 요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39) 박형룡, 한경직을 두 축으로 한 파당적 대결로 발전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40)


이제 한국장로교회에서 교권과 교회정치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그 이후의 한국장로교회의 도덕적, 윤리적 균형감각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교권의 행사는 유교적 권위주의에 힘입어 권력화 되고 집단화 되었다. 이제는 교회 분열이라는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그 분명한 증거가 1970년대 초에 전개된 합동과 고신교단에서의 분열이었다. 1970년대 합동교단은 교회정치문제로 깊은 수렁에 빠졌고, 결국 수다한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교회 분열이 아니라 분열에 이르게 한 교권과 교회 정치의 폐단이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때의 분열의 아픔은 그 분열이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지켜가기 위한 고투의 결과가 아니라 교회정치와 교권 대립의 결실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동일한 시기 고신의 경에서도 동일했다. 고신의 경우 부산노회를 배경으로 한 한상동과 경남노회를 배경으로 한 송상석의 대립은 반고소 고려파의 분립을 가져오는 등 내분에 휩싸였다. 물론 합동의 경우든 고신의 경우든 내세우는 신학적, 윤리적 명분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지연이나 인맥, 노회를 배경으로 한 교권대립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이런 유형의 교권 대립이나 교단 내의 정치활동은 과거에 비해 더욱 심화되었다. 대형교회의 출현과 노회나 총회 역할의 증대가 큰 영향을 끼쳤다. 노회장, 총회장의 위세가 강화되자 재단 이사나 학교법인 이사 등의 권세도 막강해졌다. 이런 현실에서 특정 파벌이 등장하였고, 치리회에서의 주도권 확보는 생존의 요건으로 인식된 것이다.


교회 내의 파벌은 총회를 전후하여 분명하게 드러나고, 총회임원 선출이나 재단 법인이나 학교 법인 이사 선출시 극명하게 대립한다. 합동의 경우는 고신보다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만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이 동양적 예의에 속할 것이다.


맺는 말


장로교 제도는 부써나 칼빈에 의해 창안된 제도가 아니라 성경적인 원리에서 재 발견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장로교 제도는 로마 카톨릭의 교황제의 독선을 반대하고, 급진종교개혁자들의 무정부적인 반 제도적인 교회관을 반대하며, 동시에 제네바 교회에 대한 제네바 시의회의 간섭을 배제함으로서 교회의 자율과 독립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장로교 제도를 주창했지만 그것을 절대적인 제도로 보지는 않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제도는 고정된 원리가 아니라고 이해했다. 이 점에 대해 칼빈은 고린도전서 11장 2절을 주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각 교회는 각 교회가 처한 환경에 걸 맞는 직제형태를 자유롭게 세울 수 있다. 그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더욱 그러하다. 왜냐 하면 주님 자신이 그런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방향가지는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도 그러한 원리에 따라 고린도교회를 건실하고 참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모든 것이 질서 속에 이루어지도록 교회의 기초를 놓았던 것이다.41)


칼빈은 고린도전서 14장 34-37절을 주해하면서 교회의 외적인 통치나 조직형태는 정황에 따라 가변성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특히 그는 도덕적으로 중성인 교회의 행정 체계나 제도는 영원히 우리의 양심을 묶어둘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42) 우리는 장로교 전통의 교회정치 원리를 존중하되 한국교회 현실에서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보완적 제도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한국장로교회의 감독교회화 현상을 직시하고, 파벌이나 부당한 교회 정치운동을 잠재우게 될 때 교회로서의 권위를 회복하고 신뢰받는 교회를 세워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