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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가정에 대하여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7. 5. 4. 21:07

교회에 대하여


김홍전 목사


5:6-24


오늘은 특별히 한 가지 사실에 유의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가 설립한 이래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처례차례 후생들이 장성을하여 혼인을 하고 가정들을 가지게 되어서 자연히 교회에 가정의 수가 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가정의 수가 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적인 사회 발전의 형식을 통해서 그 만큼 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항상 건실한 가정이 핵심이 되고 중추가 되어서 건실한 중견의 사회를 형성함으로써 튼튼하게 움직여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와 가정의 관계 또 사정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뜻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누구나 다 가정의 사람으로 나오지 않은 사람이 없고 또한 앞으로 자라나는 젊은이들은 가정을 세워야 하므로 그 사실들을 잘 배워야 할 것입니다.


동일한 믿음이 연면해 내려가는 가정


가정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는 심오한 여러 가지 내용이 있지만 그 것을 단시간에 다 규명할 수는 없고 그중에서 한두 가지 가르침을 중심으로 상고하겠습니다. 먼저 상고할 말씀은 딤후1:3-5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생각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가정의 혈통의 관계로 이어지고 또 사랑의 관계로 맺어집니다. 그리고 그 구성은 부부를 근간으로 한 부모와 자녀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런고로 부부의 관계와 부모 자식의 관계가 각각 혹은 합쳐서 가정이라는 말로 표시됩니다. 그런 까닭에 성경은 가정에 대한 교훈을 할 때 부부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경우도 있고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조상이라는 말로 자기 자신의 가정 관계를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의 가정을 들어 교훈하는데 그의 경우에 대해서는 부계(父系)를 들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외조모, 어머니, 아들 디모데해서 동일한 믿음이 어머니의 계통으로 연면(蓮綿)해 있는 것을 본다는 말입니다. 동일한 믿음이 연면해 내려가는 것, 그것은 가정 관계 가운데 나타나는 아름답고 중요한 현상입니다. 동양의 부계 사회적인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의 계통이 아닐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현상이 신앙이 있던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외손자에게 연면해 내려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정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중요한 암시를 받습니다.


가정 관계의 진정한 요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그 다음에 볼 말씀은 마12:46-50절입니다(참조.3:31-35; 8:19-21).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밖에 섰나이다.’예수께서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하시더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모친, 형제, 자매의 관계야말로 정당한 가정 관계로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바른 것을 가장 잘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혈통 관계만을 가지고 모친,형제, 자매를 이야기하지 않고,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을 가켜 당신의 모친, 형제,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이 사람들을 보라. 굉장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고요히 앉아 기다라고 그것을 배우고 있다. 그런 사람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느 사람들이 내 모친과 형제와 자매다.” 에수님은 이렇게 해서 모친, 형제 자매라는,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이른바 천륜관계(天倫關係)보다는, 오히려 하늘에 계신 마버지, 즉 지상과 천상의 대권을 가지신 분이 당신의 뜻을 계시해 주실 때 사람들이 거기에 마음을 두고 그대로 순종하는지의 여부에 근거하여 모친, 형제, 자매라는 의미를 다시 해석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덧붙여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직전에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가 가까이 계신 것을 보고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면서 보라, 저가 네 모친이다하고 일러주신 사실이다. 그 제자는 사도 요한인데, 그는 곧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그랬습니다.(참조. 19:26-27) 자기 집에 모셨다는 것은 벌써 어머니로 섬긴다는 말 입니다. 사도요한으로서는 모친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에수님이 가르치신 큰 교훈을 생각해 가면서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 것도 우리가 생각해야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에베소서5:1-6:9의 가정에 대한 교훈

 

오늘 읽은 에베소서 5장에 있는 말씀은 처음에는 일반적인 성도의 실천 사항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듯 보이지만, 그 말 속에 담겨 있는 큰 뜻은 결국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그 다음에는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와 또 상전과 종의 관계에까지 미쳤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종도 식구의 한 사람으로 인정히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을은 가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상전과 종의 관계에 대해서까지 말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먼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이야기가 22절부터 시작되는데, 사람들을 대체로 이 구절부터 33절까지를 떼어 읽음으로써 마치 이 문맥에서부터 새로운 교훈이 시작되는 것같이 생각하기가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5장 서두에서 말하기를,“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1-2)고 한 다음에,21절에 가서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맨 먼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 다음에는 성도간에 피차 복종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다음22절부터 계속되는 부부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사랑복종이라는 이 두 큰 사상이 부부 관계에서 대강령(大綱領)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첫째, 남편 된 삶은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하고, 둘째, 아내 된 사람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남편에게 복종히라고 합니다. 5장 서두에서 시작된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5장 서두에서 시작된 교훈이 가정에 대한 교훈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랑 가운데 행하라


많은 혼인 예식에서 따로 떼어져 인용되는 이 엡5:22-23말씀은 앞에 있는 가르침의 어조와 사상과 감정을 그대로 발전시켜 결국 그것이 가장 구체적이고도 종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부부간의 관계라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5장에서 바울 사도가 가르치는 내용을 대강 살펴보면 먼저 교인들간에 서로 사랑할 것을 가르치고 (1-2), 교인들간에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말도 낼 수 없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3), 누추하고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 그것도 마땅치 않으니 돌이켜 서로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4). 그러면서 그와같이 누추하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遺業)으로 받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5). 그런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사회에 도입하는 일도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않는 이 세상의 추한 현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아주 난잡하고 악한 일을 행해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입에만 올리는 것이라도 누추한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순결하라는 말씀입니다. 교인들 가운데서는 이렇게 순결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가질때는 사랑하는 대상을 짓밟고 유린하고 더럽히지 않고 항상 순결하게 보존하려고 합니다. 사랑이란 원래 그런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사라하면 사랑하는 대상을 순결하게 보존하고 아껴 주려고 하지, 그것을 짓밟고 부수고 더럽게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대의 최선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원래 사랑의 기본적인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사랑이라는 말에서 연역(演繹)해서 그 다음에 순결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자기 자신이 순결하기 위해서는 누추한 사람이나 누추한 것에 접촉을 해서는 안 되므로 그런 자들과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빛에 거함


그 다음에는 빛에 거하라고 합니다(8). 빛에 거한다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순결릏 지키는 것과 별개의 일이 아닙니다. 빛에 거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깜깜해 가지고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되지 않고 항상 진리의 대도(大道) 가운데 들어가서 자꾸자꾸 깨닫는 사람들이 되어 나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빛에 거한다면 빛의 열매가 있게 마련입니다(9). 열매를 보고 빛이 있는지 없는지 압니다. 지식을 많이 흡수했다고 해서 빛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빛의 열매란 모든 착한 것과 의로운 것과 진실함에 있습니다(9). 착하다는 것은 그 본성이 하나님의 성격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도에 맞춰서 사는 것을 진실하다는 것은 일관성을 가지고 변함이 없이 항상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빛에 거한다면 그런 열매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런 열매들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아는 데서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세상에서 접할 수 있는 지식들에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귀결해 가야 합니다. 자연 과학의 지식을 통해서도 궁극적으로는 우주를 통재하시고 홀로 만유의 주가 되시는 만유에 충만하신 주님의 거룩하신 자태를 아는 데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런나 그런 지식을 풍성히 가지는 것이 필요한 일일지라도 그 방법으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갖는 인격적 관계에서 얻게 되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를 가지산 분이심을 선포하시는 가운데 나타내신 당신의 속성들과 우리들에 대한 요구들을 배우는 가운데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차츰 꺠달아 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품성이나 지적인 품성을 자꾸 궁구하고 깨달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적인, 도덕적인 속성을 아는 데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사(意思)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부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빛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10). 그리고 그것도 빛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11).


지혜 있는 자가 됨


바울 사도는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을 즉 주의 뜻을 찾으라고 한 말에 이어서 말하기를 그런즉”- 이상의 기본적인 덕이 저희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므로 그 다음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고 하니-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합니다(15-16). 지혜있다는 것은 단순히 꾀가 많다는 말이 아닙니다. 원래 지혜란 현실적이고도 특스한 지식으로서 그것은 인생의 대도와 목표를 가진 사람에게 비로소 있는 것입니다. 아무 목표가 없든지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욕망 달성을 위한 행복 추구의 목표를 가지면 참 지혜를 얻지 못합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세운 본래의 크신 목적의 테두리를 알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내신 본래의 큰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서부터 지혜가 생깁니다. ,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겠다는 송구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에게만 지헤가 생깁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일관되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면철이니라고 가르쳤습니다(9:10).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런고로 참된 지혜는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생깁니다. 주께서 무엇을 위해 나를 만드혔는가에 대해서 하나하나를 자세히는 모르더라도 좌우간 성경의 그르침을 통해 자기가 서 있는 현실을 돌아보면서 이방향, 이 테두리 안에서 나를 만드히고 이런 일을 위하여 나를 지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지혜를 주십니다.


바울 사도가 거기에 덧붙여 가르치는 것은 세월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연히 허영을 찾아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면서 세월을 낭비하지 말아라. 이 시대는 악한 시대다. 낭비하면서 유유창창히 가게 되어 있지 않다. 네가 기회를 낭비하여 지금은 갈 뻔한 알을 내년에 가려고 하면 못 갈 수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세월을 아껴라. 시대가 악하다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대가 악하고 기회도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서 하나님이 일조의 광명을 비춰 주시는 동안에 신속히 해야 할 일을 하고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세월을 낭비하면 지금은 조그만한 보가 막혀 있지만 나중에는 태산이 와서 가로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는 이어서 가르치기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합니다(17). 네 인생의 길을 어떤 방식으로 가야 할 것인지도 주께서 정하신 뜻이 있을 것이므로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정은 향락을 위해서 세워지지 않았음

 

우리는 이 말씀에서 가정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 가정이 왜 존재합니까? 서로간의 행복을 향락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시리라고 했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그를 위하여 향락하고 즐길 수 있는 매필을 지어야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부엇을 해야 할 것인데 그가 그가 해야 할 일을 와서 방관하거나 비판 혹은 파괴하는 사람이 아니고 도울 사람을 만들어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맨 처음의 가정을 만드실 때 가지신 생각이었습니다. 다른 것을 이야기하시지 않고 사람이 독처하면 사람으로서 나타내야 할 것을 다 나타내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돕는 매필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사도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러 해놓고 그 다음에는 술 취하지 말라하는 말을 갑자기 썼습니다. 왜그러느야 하면 방탕한 것이다”. 개인으로도 그렇고 가정으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방탕한 것이나, 너희가 가정 안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가지기를 원하느먀냐? 술을 먹음으로써 가지게 되는 기분을 즐길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 개인이나 가정이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것은 벼락같이 종교적으로 변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가정이 정당하게 지녀야 할 깨끗함과 거룩합을 지니면 된다는 말입니다. 또 그릇이 작은 상태에서 갑자기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해보겠다고 나거라는 말도 아님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이미 지어진 그사람, 지어진 그가정이라는 그릇 안에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작은 그릇일지라도 성령께서 거기 가득히 임재하시면 그만 아니라 그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지 않으시더라도 너희들만이라도 지배하시면 너희에게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나올 것이 아니냐 그말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비록 작은 단위라 할지라도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참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19-20).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하되 서로화답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갑사하라고 했습니다. 참 신앙의 경계(境界) 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감사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다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가장 선하신 뜻대로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 십니다. , 당신의 자비와 오래 참으심과은혜로 만세 전에 택정하신 우리의 영화(榮華)를 위해서 모든 것을 섭리해 나가십니다. 그런 하나님이심을 생각할 때 매사에 갑사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그런고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그 다음에 -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경외하는 점에 있어서 모범이 되는 사람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상명하복(上命下服)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그리스도를 더 잘 복종할 것 같으면 그리스도를 더 잘 복종하는데 따라서 순종해 나가야 할 것 아니냐 그것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은 남편만이 항상 주장자가 돼 가지고 신앙에서 선두에 선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내도 얼마든지 신앙에서 선두에 서서 나가면 남편은 그를 따라가야 할 것이다. 그것입니다. 이것이 피차 복종하는 태도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을,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을


이상과 같이 바울 사도는 서로 사랑할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피차 복종할 것을 가르친 다음에 이 도리를 남편과 아내에게 적용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22-33)


교회에서 지체들간에 서로 가져야 할 사랑과 순결과 빛의 행실과 지혜와 근신과 복종을 가르친 바울은 가정도 그런 터 위에 있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또 사실상 그런 덕()들이 가장 긴밀하게 나타날 수 있는 곳은 가정입니다. 사도는 앞에서 한 교훈을 함축성 있게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적용하여 가르치기를,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또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함같이 하라고 합니다. 동일한 양과 동일한 수준의 사랑과 복종을 발휘하라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질()의 사랑과 복종을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상대가 빈약하고 쓸모없다고 해서 버리거나 뚜드려 해주려는 데에 그 방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방향을 지닌 사랑을 남편은 아내에게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과 동일한 질의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그리스도의 흠 없고 거룩하신 명령과 지도와 인도에 대해서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무슨 악을 행하더라도 복종하라는 맹목적인 복종을 여기서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수종하듯이 순종하려면 먼저 잠편이 그리스도적인 지도를 해야 하는 것이고, 거기에 따라서 아내는 교회적인 순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적인 지도라는 것은 항상 하나님 나라 안에서 거룩한 진리 안에서 하는 지도를 가리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지만 그 다움에 발생하는 중요한 관계는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이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서 먼저 자식은 어떤 의무를 가집니까? “자녀들아, 네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6:1). 여기서도 복종으루가르쳤지만 덮어놓고 복종을 가르친 게 아니라 도둑질을 하라든지 악을 행하라든지 그리고 이 세상 주추한 곳에 자꾸 섞여 들어가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왜 그리고 가느냐? 너도 이 세상에 섞여서 자꾸 성공해 가지고 훌륭하게 되어야 하지 않느냐이런 말에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요구하시는지를 부모가 가르치고 교훈할 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철없는 생각으로 무엇을 꾸며 가지고서는 마치 거미줄 같은 것을 이상(理想) 입네 하고 잡으려고 하지 말고 한 살이라도 앞서서 맏고 깨달은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칠때는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자녀가 복 받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런 편에 서 주시는 것이지 그가 어긴다고 해서 그를 붙둘어 가지고 억지로 성공시키지 않으십니다. 어기고 가면 간 만큼 멋대로 될 것입니다. 마치 노새나 멍에 매지 아니한 나귀와 같이 제멋대로 뛰어 나갈 것입니다. 에서와 같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약속이 있는 첫계명


사도는 자녀들에게 교훈하기를 주안에서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리켜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합니다. 계명 가운데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십계명 가운데 제5계명을 잘 아시지요? 이 계명은 사람에게 대한 계명중 맨 처음에 나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해놓고, 그냥 하라 한 것이 아니라 약속을 붙였습니다.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20:12). 하나님께 대해서는 가령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하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것이라든지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할 것이라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서는 안 되겠다든지 안식일을 기억해서 지켜야겠다든지 등에 대해서는 특별히 그러면 이렇게 해주마하는 약속을 안 하셨어도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대해서는 명문(明文)으로 약속을 붙여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 그런 사람은 자기 부모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지도할 때 순종한 까닭에 바로 잡혀서 자라난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들이 땅에 오래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려서 누구에게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리를 배우고 누구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방법을 훈련받고 어디서 자기가 그것을 실천해 보느냐 하면 아직 철없을 때부터 부모를 통해서 가정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식들에게 선천적으로 한 가지의 품성 혹은 한 가지의 경향을 주셨습니다. 부모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서 보호하고 흠이 없게 하려는 간절한 요구가 있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부모라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자식을 나중에 커서는 암만 난봉꾼이 될지라도 어렸을 동안에는 부모를 그리워하고 따르고 붙들고 매달리고 그 보호를 받으려고 그러고 부모를 의지하고 난 다음에는 마음의 평안을 얻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런 것을 동양에서는 천륜(天倫) 이라고 그라지만 하나님께서 각각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심어 주신 바 독특한 심성 혹은 본은적인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런 것이 어려서 바르게 훈치(訓治)되고 연마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 주는 것이 부모의 의무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눍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22:6). 이것이 주의 말씀입니다. 자녀는 이렇게 해서 장성해 가는 것입니다. 방루 사도는 이 사실에 대해서 라그치기를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종들아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사도는 가정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종들에 관한 이야기도 합니다(참조. 6:5-8). 그 이야기를 요약해 보면 이러한 말씀이 됩니다. ‘네가 적어도 가족으로서 섬길 때 눈가림만 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하고 섬기라. 왜냐하면 네가 그 집 종이지만 그 집 식구로서 맡은 일을 충실히 한다는 것은 곧 주를 섬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노예 제도를 철폐한다고 처음부터 주창하고 나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권의 존엄성이라든지 혹은 인명의 귀중성을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잘 가르칩니다. 본문에서 사도가 종들과 상전들에게 주는 교훈을 잘 읽어 보면 그 사실을 뚜렷이 알 수 있습니다. 사도는 결국 오에도 상전도 하나님 앞에서 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며 진정한 상전은 하나님이심을 명심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교훈을 배우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나중에 사회적인 세력이 될 때 노예 제도는 자연스럽게 폐지되는 것입니다. 사도가 노예 제도를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존재한 조예제도에 대해서 아무 해결책을 안 주고 덮어놓고 혁명을 일으키고 뚜드려 부수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일종의 사회악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쉽게 떠엎을 수 없는 그 상태를 어떻게 하면 가장 선도해서 결국 하나님 나라의 바른 자태롤 이끌고 나갈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사도의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인간이요, 인간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는 필요악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만들어 놓은 많은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악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제도상의 악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을 단번에 뚜드려 부수려고 혁명을 일으킨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천국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원래 오랜 역사를 지낸 후에 비로소 교훈을 받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배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장래를 모르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러한 제한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자기의 역사를 지어 나갈 때 점짐적으로 깨닫고 생각해 나가고 또 같은 꺠달음을 가진 사람들이 점전적으로 사회적인 세력을 이루어 퍼져 나감으로써 일을 이루어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람의 사회에 심어 주신 법칙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이 거룩한 사회의 법칙을 전제로하여 교훈을 하는 것입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6: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계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상전이나 종이나 다 같이 복종해야 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상전(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즉 상전이나 종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같은 인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편의를 위해서 만들어 놓은 제도하에서 사람들을 보시지 않고 종이든 상전이든 각 사람을 본연의 인권을 가진 존재로 여기고서 보시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엡5장과 6장 서두에 있는 말씀을 보았는데 이 말씀들을 기초로하여 가정에 관한 몇가지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정은 이 땅에 국한된 제도로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전모는 드러내지 못함


가정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명을 받은 남편을 도와서 그 일을 잘 이루기 위하여 배필이 지어진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가정으누장차 이루어질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상적인 관계를 목표로 삼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 이상적인 관계를 예표해 주는 존재로 있는 것이 바로 보이는 교회(有形敎會)와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보이는 교회의 기초적인 단위로서 언제나 교회의 건실한 세포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정과 교회라는 말을 생각할 때 주의해야 할 문제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모든 관계가 이 세상에서 보게 되는 현상의 가정에서 다 발생하거나 확연히 다 확인될 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가정이 지니는 독특한 현상을 받드시 교회 안에서 다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교회가 모든 부면(部面)에서 가정의 이상형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영원하고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고 땅에 있되 하나의 교회인 것입니다. 가정은 하늘 위에 있지 않고 오직 땅에만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한 번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혼인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문제를 가지고 질문을 했는데 이때 예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는지 여러분은 잘 아시지요?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천사와 모든 점에서 같다는 것이 아니라 혼인을 않고 산다는 것이 즉 혼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점에서 천사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은 어디까지나 욱신을 입은 사람의 세계에 있는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스러운 몸을 입어야만 비로소 충만한 자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땅의 몸으로는 교회 모든 특수한 요소들을 온전히 다 드러내기에는 심히 부족한 그릇인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은 그리스도와 교회가 지니는 모든 관계를 다 드러내지 못하지만 몇가지 중요한 관계에 대해서는 원형으로 모형으로 드러낼 수 있으며 또 가정은 그것을 드러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실재의 세계에 참으로 존재하는 크고 중요한 관계를 가정은 땅 위에서 모형으로 현실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지으셨고 또 그렇게 되라고 하십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됨


그리스도와 교회가 지니는 관계를 가정이 또한 지니는 첫째의 관계는 부부가 일신(一身)이 됬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일체를 이루었다는 것이 이 세상 다른 어떤 사회가 드러내지 못하지만 부부의 관계에서는 드러나게 만드셨습니다. 둘째의 관계는 부부간의 사랑과 순종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이 세상 다른 어디에서보다도 가장 고조(高調)히 있을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처럼 사랑과 거기에 따른 순종이 순결하고 책임 있게 나타나는 곳은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도 친구가 친구를 사랑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친구가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만일 헬라 말을 빌린다면 어디까지 필리아(Φιλια)에 속하는 일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친구간의 사랑을 그런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친구가 친구를 위해서 죽기까지 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필리아일 뿐입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그것을 포함한 에로스의 사랑이 하나님의 승인하에 가장 순결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가정 이외의 다른 관계에서는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 사랑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모든 요소는 가정 안에서만 원만해지고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혼인을 하기 전에 사랑하던 두 사람은 혼인하기 전의 사랑이 최고의 사랑이 아닌 것을 알고 참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면 혼인한 다음에 비로소 그 사랑이 높은 수준을 향해서 올라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혼인을 연애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한 지엽적인 요소만을 구해 왔다는 표시밖에 되지 않습니다. 참사랑은 혼인한 후 일생을 지내면서 점차 깊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사란의관계뿐 아니라 순종의 관계도 가정만큼 잘 발휘 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요새는 세상의 개화(開化)했다고 해서 이른바 여권(女權)이 커졌다고 합니다. 지난날 사회와 가정에서 여성을 차별하고 학대하는 비인간적인 관습을 파괴하고 여성의 인권을 회복하여 여성과 남성이 모든 일에 공히 동등해져야겠다고 해서 여성 해방운동도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인간의 존엄성을 인류 사회가 더 깊이 느끼고 그렇게 하지 못한 지난날의 행태에 대해서 반성하고 개선한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면도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본질을 호도하여 하나님이 냇니 남녀의 개성과 가정의 질서 자체를 구제도로 여기고 타파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새로운 악을 만들어 내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소위 연애라 할 때는 독립된 두 인격이 서로 사랑해 나가는 까닭에 상대의 인격과 기능을 존중하고 그래서 상대의 개성을 찬연하게 빛나게 해주는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이 훌륭한 생각입니다.


부부의 사랑에는 일정한 목표가 있음


그러나 두 남녀가 부부가 된 후에는 상대방을 충분히 존중해 준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하나의 목표가 있게 됩니다. 둘이서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하나의 사상을 향해서 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가정의 원형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더라도 아내는 이런 신학을 생각하고 남편은 저런 철학을 생각하고 둘이 별다른 사상의 세계에서 산다면 그것은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둘이 똑같은 사상의 세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같은 목표를 향해 가야 합니다. 사상의 수준에서 심천(堔淺)은 물론 있겠지만 그것은 어쩔수 없는 일입니다. 아내와 남편이 모든 점에서 똑같이 예민하고 똑같이 깊은 지식을 가지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방향은 같이 해야 하며 부족한 사람이 앞선 사람을 따라가야 합니다. 만일 아재가 하나님 나라의 도리에 심오하고 깊으면 낰편은 그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더 은혜를 주사 누구를 쓰셔서 그 빛을 전달하려고 하셨는지를 가정에서 서로간에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령 여자 사사 드보라를 세워 가지고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고 치고 하셨으면 남자라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로이스나 유니게 같은 훌륭한 신앙 있는 인물도 남편이 다 있었을 텐데 그 남편들의 이야기는 성경에 없는 것을 볼 것 같은면 분명히 그들이 현저한 신앙의 사람은 아닙니다. 디모데가 받은 시앙은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신앙이지 그의 아버지 헬라 사람에게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마 헬레니듬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만일 그 경우에 로이스나 유니게의 남편 되는 사람들이 따라 가기로 한다면 누구를 따라갔어야 옳았겠는지를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 보세요.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말씀이 푸용히 있어서 빛을 비추려는 사람에게 어두운 것은 뒤로 소산(消散)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특징은 지도자라고 뽐내고 나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캄캄한 데서 탁류가 도도하게 흘러가는데서 어디에 징검다리가 있어서 빠져 죽지 않고 건너갈 수 있는지를 잘 아는 데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뒤를 따라가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내가 그 길을 잘 다녀서 알았다면 남편 되는 사람이 내가 남편이니까 내가 앞서겠다고 갔다가 빠져 죽어야 합니까? 아내가 징검다리를 밟고 지나가면서 내가 밟는 데만 밟고 오시오하면 그래야겠다고 하면서 뒤따라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세상의 사리에서도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사리에는 더 그런 것입니다. 홍수가 나 가지고 탁류가 흐르는에 그 속에 징검다리가 있는 것을 평소에 알고 있는 아내가 발을 딛고 가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남편으로서도 구원받는 길입니다.


남편이 그리스도적인 머리 역할을 할 경우 아내는 순종해야


에베소서 본문은 아내에게 교훈하기를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남편이 그리스도적인 머리 노릇을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적인 머리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지혜에서 일보라도 앞섰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제 않을 때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그리스도적인 머리로서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이런 점은 성경이 많은 예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경에 남편은 시원찮고 이름이 없는데 아내의 이름은 훌륭하게 나온 경우가 있는 것을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가정이 파되지 않은 이상에는 남편이 아내를 따라갔을 것입니다.그러나 남편이 만사에 아내를 복종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요컨대 가정이라는 한 개의 단위 사회를 움직여 나갈 때 항상 누가 지휘를 해야 하느냐? 지휘봉 혹은 지휘의 채를 누구한테 줘야 하느냐 하면 남편에게 줘야 합니다. 아내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가 둘이 의논해 가면서 살아가지만 지휘권은 항상 남편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구식도 아니고 신식도 아닌 영구히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이런 것을 뒤집어엎어 가지고서 수백 년 동안 혹은 수천 년 동안 남자들이 부게사회를 좌우했으니까, 이제는 여권을 확대하여 모계 사회를 만들어 부인들이 다 채를 잡고 남편은 앞치마 두르고 부엌에 나가서 밥 하고 설거지 하고 뒤따라오게 하가고 야단 내 봐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회를 형성하지 않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원래 지금까지의 역사가 그것을 그렇게 승인하도록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우연한 기회 때문에 그냥 부계 사회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필연의 원인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사람의 구성 요인 가운대 그것이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성경도 교회에서 여인들이 머리가 되어 가지고 지배하고 지도하는 것을 금했던 것입니다. 여인들이 교회에서 전혀 가르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남자가 있은 후에 하는 것입니다. 남자의 재가(裁可)하에서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못난 남자라도 남자니까 덮어놓고 통재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먼저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에 볼 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하나님께서는 자녀가 어렸을 때에는 자기 부모를 전부로 삼고 부모면 전부 다 되는 줄을 알고 의지하고 만족하게 만드셨습니다.자녀가 크면 차츰차츰 부모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기도 하고 또 정도 이상으로 부모를 비난하는 심정도 생기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어렸을 동안에는 부모를 하늘같이 믿는 그런 경향이 부명히 나타나는 것이고 부모도 자녀가 어렸을 동안에는 자기가 죽을지언정 자식을 살리려고 하는 본능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특별히 어머니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을 갖정에서만 볼 수 있고 현상의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사실입니다.


가령, 가정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 왜 이런 잘못을 저질렀느냐? 회초리를 맞아야겟다!”하고서 회초리로 때린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그 아이는 비록 매를 맞았지만 그래도 결국 아버지와 함께 살고 또 그 아이의 심정 여하에 따라서는 역시 부모에게 순종하고 그로 말미암아 교정되어 나갑니다. 요새는 젊은이들의 반동이 심해서 회초리를 때리면 그것으로써 반성하고 교정이 되는 것보다는 반발심으로 더 악해지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 점에 대해서 분명히 가르쳐 놓았습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13:24). 성경은 회초리를 그 당시의 부득이한 제도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징계하는 원칙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회초리가 아닐때는 다른 것으로 그만큼 심신의 타격을 줘 가지고 잘못에 대해서는 그 결과를 자연적으로 받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현역사에서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 따라 심판하실 때 그 심판이 직접접으로 내리는 게 아니라, 세상에 두신 여러 사회의 제도를 통해내리기도 하시는 것임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징계: 부모의 책임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징벌하신다는 것을 아이가 어렸을 떄부터 가르치면 그 아이는 잘 배우고 자라날 수 있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바로잡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가정에서만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보이는 교회에서는 대체로 그 일을 효과적으로할 수가 없습니다. 보이는 교회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또 그 터에서 징계하는 일을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보이는 교회에서 어떤 젊은 아이의 잘못을 보고 목사가 꼭 그의 아버지같이 일어나서 네가 잘못했다 회초리를 맞아라!” 고 하면 당장에 반발하고 나갈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한테는 욕질을 못해도 목사한테는 목사가 뭐냐? 그이가 우리 아버지냐? 어쨰서 때린단 말이냐?” 하고서는 당장에 반항하고 나갈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또 교회에는 그런 정도의 사람들이 대체로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보이는 교회라는 것은 결코 가정만큼 이상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법도의 전달을 하기 어려운 데가 많습나다. 가정만큼 이상적으로 소위 훈육(discipline)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느슨한 점 방만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과 교히가 대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중요한 핵들로서 그 핵들이 모여 가지고 거룩한 교회를 형성하는데 교회의 목사나 혹은 교역자들이나 장로나 교회의 어른들이 교회의 후생(後生)들에게 직접적으로 하기 어려운 것들은 가정이 맡아서 하는 것이고 또 교회안에서 충분히 실현하지 못하는 거룩한 사랑의 정화를 가정이 또한 드러내는 것입니다.


가정은 교회의 핵


그런고로 가정은 그것 자체가 교회의 중요한 핵으로서 그가정 안에 있는 사랑이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거룩되고 목적이 있고 합리적일 때 또 가정 안에서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가 항상 정당한 둰위와 복종과 교훈과 또 교양을 받는 관계에 있으면서 정당하게 장성할 때 그런 가정을 많이 가지고 있는 교회는 그만큼 교회 자체의 속성에 많은 은혜와 능력을 발휘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런 의미에서 가정들은 교회의 중요한 임무를 맡은 핵들로서 가정 안에서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임무들을 교히가 직접접으로 하지 않는 것 교회에 있는 제도로 직접적으로 운용해서 할 수 없는 것들을 가정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가정은 그만큼 교회를 형성하고 그 속성을 구성해 나가고 발휘해 나가는 데 심히 중요한 임무를 띠고 활동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