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 Reviews/Korean

칼빈주의 예정론 - 작성자 미상

Bavinck Byeon 2014. 6. 18. 20:09

칼빈주의 예정론



제 1 장 예정 교리의 서술

 

1. 하나님의 계획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목적이 절대적, 무조건적인 것이며, 이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지배되지 않는 것, 또한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이 영원의 목적에만 원인을 갖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의 방향을 정하고 역사의 과정을 세밀한 점에까지 지배하시는 위대하고, 비범하시며, 그리고 강력한 왕으로써 숭앙이 되시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지배 아래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종국을 향해서 진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달점은 모든 피조물이 향하여 나아가는, 「아득하고 거룩한 사건」인 것이다. 영원의 옛날부터 하나님은 지금 당장 하고 계신 것을 정확하게 하시려는 목적을 가지셨다. 하나님은 우주의 주권적 지배자셨다.「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내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 4 : 35)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있어서 보여준 이러한 대 원리를 창조와 섭리와의 영역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시종 일관해서 이것을 적용한 것이었다. 종교개혁에 있어서, 걸출한 조직신학자 요한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성정을 우리들은 예정」이라 말한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인한 각 개인과 어떠한 관계가 되어 가는가를 그 자신안에 결정지으셨다. 즉, 인간은 모두 동일 운명으로는 창조되지 아니하며, 어떤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그리고 어떤 자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 두 개 중의 어느 하나를 결말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인간이 생명인가 죽음인가의 어느 쪽엔가 예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비쇼프는「세계는 혼돈하여 우왕 좌왕하고, 또 모든 사물은 맹목적으로 혼란과 뒤죽박죽의 무질서 안에 아무렇게나 쑤셔 쳐 넣어 둔 것 같이 생각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를 연쇄로 하고, 또 알고, 이러한 것들이 부조화와 불일치로 보이는 장소에서, 완전한 조화로 생겨나게끔, 이것을 통치하시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현대는 인간을 높이 끌어올리고 하나님에게는 다만 한정된 부분을 출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A‧A‧하지가 「새로운 신학은 낡은 신학을 좁다고 비난하고, 하나님의 예정의 교리를 낡은 신학자들이 조작한 것이라 내어버리고 오늘날의 문화인에게는 만들만한 것이 못 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시작한 일은 아니다. 마치, 올빼미가 일시적인 일식을 한 밤중으로 잘못 알고 자기에게 안 보이는 것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거라 믿고 경솔하게도 독수리를 조소하는 따위다」라고 말하고 있는 그대로인 것이다.

 

무한의 지혜, 무한의 힘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명확한 계획 없이 세계를 창조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와 같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 계획은 세계의 모든 부분에까지 닿아 있어야만 되기 때문이다. 단지 하루만에 만들어진 것에 불과한 인간 모든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인간마저도 행동하기 전에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가? 계획도 목적도 갖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기업이 크면 클수록 우리들에게는 면밀한 계획이 더욱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모든 사업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계획 없이 배를 만들고, 계획 없이 철도를 부설하고, 계획 없이 국민을 다스리려고 하는 사람은 정신착란자라 간주될 것이다. 만일 이것이 인간에 관해서 진실하다면, 하나님에 관해서는 더욱 진실하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이 우주에서행하는 전반에 걸친 “계획없이” 이것을 창조하시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만일 하나님이 사건의 과정을 예정하지 않고, 아직 정하지 않은 어떤 것의 성부(成否)를 기다린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제정은 영원도 불변도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주의 자는 하나님이 계획을 갖는 것을 부정한다. 알미니안주의 자는 하나님은 총괄적 계획은 갖지만 특정한 계획은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주의 자는 하나님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건까지도 포함하는 바 특정한 계획을 가지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계획의 완전성을 부정한다면 무신론을 막아낼 수 있는 견실한 방벽은 어느 곳에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이 질서를 갖고 창조의 업을 완성시키셨다. 그 하나님이 선택하신 계획을 우리들은 하나님의 예정 혹은, 하나님의 결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큰 계획을 잘 생각할 때 우리들은 그것을 계획하고, 그리고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영지(英地)와 무한의 힘에, 찬양을 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2. 하나님의 주권

 

생각이 깊은 많은 사람들은 어떤 주권이 자기의 생명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인정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 태고나고 싶었던가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가 물어보지를 않았다. 또 그들은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은가도 질문을 받지 않았다. 30세기에 태어나는게 좋은가, 홍수 전이 좋다든지, 백인이 좋은가 흑인은 어떤가 라든지, 미국에서 나는 것이 좋은가, 중국에서 나는 것이 좋은가 라고도 질문을 받지 않았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일체의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의해서, 그 만드신 만물의 절대적 소유자, 구극적 주재자이신 것이다. 만일 이 세상의 왕의 권력이 그 왕국의 법률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의 율법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우주통치의 왕좌에 앉아계시는 전능의 하나님으로 우리들에게 표명되어 있다. 하나님이 성(聖)이라는 사실이 그가 해 내는 모든 업이 올바르다는 보증인 것 같이 하나님의 전능은 세계의 경과가 하나님의 계획에 일치한다는 것의 확실한 보증이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전능의 조물주는 한 가지로 또 만들어진 모든 것의 절대적 지배자로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영원한 왕으로서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 29 : 20)

 

하나님의 힘은 불변이다. 하나님은 전력을 다해서 인류와 항쟁을 계속하지만 그리고도 그 목적을 달하지 못한다든지 하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심한 모독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대의 경향은 인간의 의지의 자율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의 교리를 배척하는 것이다. 가령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다든지, 하나님이 괜한 노력을 한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피조물의 수준에까지 끌어 내리는 것이 된다.

 

3.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의 업이란 것은, 하나님의 전 피조물과 그 모든 행동의 가장 깨끗한, 슬기로운, 강력한 유지와 통치다.」(웨스트민스터 소교리 문답 11)

 

성경전체를 통해서 자연의 법칙, 역사의 과정, 개개인의 저마다 다른 운명 등은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적 지배로 돌아 간다. 모든 것은 하늘에 있는 것도 땅에 있는 것도, 세라핌인으로부터 세미한 원자에 이르기까지 틀림 없는 섭리에 질서 있게 되어져 있다. 우리 각 개인이 언제 어디서, 어떤 사정 아래 태어나서, 생활하고 죽어야만 되는가를, 또 우리들이 남자로 태어나는가 여자로 태어날 것인가, 혹은 희게, 검게, 어질게, 어리석게, 모든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것은, 거의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바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것을 가지고 그가 바라는 바를 해 내신다. 혹은 신앙을 통해서 구원에 인도되며, 다른 자는 불신앙 안에서 멸망으로 버림을 받는다. 영적이거나 지상적이거나 이러한 하나님의 은사를 받는 자는 순수한 은혜에 의해서 이것을 받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은사를 받지 못하는 다른 자에 관해서는, 단지 하나님이 그것을 주기를 꺼린 것이었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혜를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해서 그들을 쓰신 것이다.

 

하나님은 단순한 우주의 방관자는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고, 그리고 모든 곳에 계시고, 또 활동하신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지하는 기반이며, 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힘이다.

 

모든 일은 진전하여 모두가 예정된 결말로 향하는 것이다. 윌필드 박사가 말한 것 같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란 종을 환영하기 위해서 리브가를 샘가에 오게 해서(창 24장0, 혹은 요셉을 애굽에 보내서(창 45 : 8~50 : 20), 그리고 그것을 선으로 고치신 것이었다. 또 하나님은 바로의 딸을 갈대로 만든 상자로 인도하여 모세를 구출했던 것이며, 그러한 일은 절대로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성경은 이 심리적 지배가 보편이며, 강력하고, 슬기롭고, 또 깨끗하다는 것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게 어떻게 해서 인간의 자유행동과 조화하는가는 아무 곳에도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들의 전부가 알아야만 되는 것은 하나님은 그 창조물을 지배한다는 것과 그들 위에 하시는 하나님의 지배는 그들의 성질을 무(無)로 돌리는 따위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 하나님의 지배는 하나님 자신이 깨끗하다는 것과 훌륭하다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예지(豫知)

 

예정에 대한 알미니안주의 자에 반대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대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이 아시는 것이라면, 그 본질에 있어서 그가 예정하시는 일과 한가지로 본질적이고, 또 확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한편(豫定)이 인간의 자유행동력과 모순하는 거라면, 또 한편(豫知)도 마찬가지이다. 예정은 사물을 확정적으로 하지만, 한편 예지(豫知)는 사물이 확정되어 있다는 전제에 서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 자가 하나님의 예지를 논증할 때에 미래의 사건의 확정성 또는 불변성은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도 인간의 자유 행동의 문제를 논할 경우에는 자유행위자의 행동은 불확정하고 최종적으로는 그 사람의 선택에 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를 즐긴다. ―이것은 분명히 모순된 입장이다. 인간의 자유행동이 불확정이라 주장하는 견해는 인간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예지의 완전과 불변성과를 부정하는 것은 피조물로 인해서 하나님 자신이 실망하고, 또 패배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그리고 알미니안주의가 하나님의 예지를 부정하지 않는 한 칼빈주의의 시종일관한 논리 앞에는 무방비로 서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예지는 확정을 포함하고, 확정성은 예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미래에 관한 성정(聖定)을 안하셨다면, 창조 전의 영원한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러한 것에 관해서 확정성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예지와 예정과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예지는 예정을 필수조건으로 한다. 그러나 예지는 그것 자체가 예정은 아니다. 자유행위자의 행동은 그것이 예견되어 있으니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게 확정적이니까 예견되는 것이다. 내가 「나는 내가 할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경우, 나는 이미 결심하고 있는것과 나의 지식이 결심에 선행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 따르고, 그 위에 근거를 갖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알미니안주의 자의 주장이 만일 올바른 근거에 서는 것이라면 예지도, 예정도 모두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지는 예정 위에 서는 것이며, 하나님이 예지한 후에 예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 예지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알미니안주의가 결국 아무 것도 논증할 수 없는 것이라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5. 모든 신앙체계의 개략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길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체계는 사실상 다음의 세 가지가 있을 뿐이다.

 

(1) 보편 구제주의(유니버셜이즘)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런고로 전 인류는 이 세상에 있어서든 또는 미래의 시련을 통해서든 결국은 전부 구원되는 것이다.

 

(2) 알미니안주의

 

그리스도는 인류 각 개인을 위해서―구원되는 자를 위해서와 한가지로, 멸망되는 자를 위해서도―공평하게, 무차별하게 죽으셨다. 선택은 하나님의 염원적인 또는 무조건적인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다. 그 은혜를 받느냐 거역하느냐는 그 사람의 자유라는 것이다.

 

(3) 칼빈주의

 

모든 인간은 그 자신이 유죄하고, 부패하고, 절망적인 상태가 된다. 이 타락한 집단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앙에 있어서 어떤 자를 구원으로 선택하고 불신앙 관계로 어떤 자는 버림 받는다. 그리스도는 순수하게 대리적인 속죄에 의해서 그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서 보내신 자였다. 성령은 선택된 자에게 그 속죄를 유효하게 적용하신다. 이렇게 모든 선택된 자는 확실히 구원을 받아들이는 거라 설명한다.

 

원래 인간은 그 목전에서 칭찬하고 그 사람을 추켜 올려서 기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악평하는 것보다는 순진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욱 환영을 받는다. 알미니안주의가 보다 대중적인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그 보여 주는 것이 냉혹하고 무섭게 느껴져도 그것이 보다 사실에 접근된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의 독자의 감정과 의견을 도덕적 원리와 같이 잚소 알고 스스로를 속인다. 그러나 우리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신앙체계를 발전시킨다는 자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 박사는 말한다 「이러한 신앙사상 체계가 진리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은 그 어느 편이 우리들의 감정에 의해서 받아 들여지기가 쉽고, 또 우리들의 이해에 보다 그럴 듯 하게 보이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어느 평이 성경의 교리와 경험의 사실과 시종일관 합치되는가에 따라서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라고.

 

6. 부당한 사변에 대한 경고

 

이 고원한 예정의 교리를 취급함에 있어서 거기 붙일 부당한 사변한 호기심에 대해서 여기서 조금 경고해 둬야만 하겠다.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주장은 그 자체가 지극히 복잡한 과제이기 때문에 인간의 호기심에 의해서 지극히 번잡한 것으로 인정되고 따라서 위험한 것이 되었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첫째로, 예정에 관한 지식을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보여주는 이상으로 얻어낼려고 할 때에는 통행 불가능의 길을 갈려고 하고 혹은 어둠 속에서 볼려고 하는 것과 한가지로 심한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마음에 새겨둬야만 된다. 하나님의 상관적 목적에 관해서 무지한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조언자(助言者)로서의 자격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알아 낼려고 하는 것은 태평양을 헤엄쳐서 건너 갈려는 것과 한가지가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칙의 신비를 해명할려 하고,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데는 너무나 지식이 빈약하다. 우리들은 예정에 관해서 하나님이 계시할려고 하는 것을 조금 알 뿐이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하나님은 계시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은 성경이 인도하는 곳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한 것이다.

 

제 2 장 칼빈주의의 5대교리

 

칼빈주의 체계는 특히 다섯가지의 특징 있는 교리를 강조한다. 이것은 전문적으로는 「칼빈주의 5대교리」“The Five Points to Calvinism"로 알려져 있고 이 초석위에 대건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 5대교리는 T-U-L-I-P(튜맆)이란 말로 기억하면 대단히 편리하다. 즉,

 

T. Total lnability(全的 無能力)

U. Uncontional Election(無條件的 選擇)

L. Limited Atonement(制限的 贖罪)

I. Irresistible Grace(不可抗力的 恩惠)

P. Perseverance the Saints(窮極的 救援)

 

※<역주> 원래, 칼빈 자신이 그 중심사상을 이와 같은 형으로 나타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이 칼빈주의 전체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뒤에 알미니안주의 자가 다섯가지의 반론으로, 거기 항변한 데서 이와 같은 형태로 정돈한 것이다. 다른 용어, 다른 표현을 쓴 자도 있다.

 

1. 전적 무능력(全的 無能力)

 

바울, 어거스틴, 또는 칼빈은, 아담이 범죄해서 모든 사람이 이미 「핑계치 못할 것은」(롬2:1)라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했다. 바울은 반복해서 우리들은 죄와 허물 아래 죽고, 하나님에게서 이탈되어서 이미 구원될 방법이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자유행위 자이지만 그 심중에는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인간의 의지는 그것이 그 이외의 어떠한 힘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는다는 의미에 있어서 자유인 것이다. 날개를 꺾어놓는 새는 나는 자유는 갖지만 그러나 날지는 못한다. 이와 같이 순진한 인간은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자유는 갖지만, 그러나 접근할 수는 없다. 사람이 죄를 사랑하는 동안은 어떻게 회개할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을 미워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인간이 고민하는 바 의지의 무능력이란 것이다.

 

인간은 사랑하는 능력을 갖는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능력을 갖는다고 단정하는 것은 물이 흐르는 힘을 갖는다. 그런고로 언덕 위로 흘러 오르는 능력이 있다고 단정하고 또 사람은 산의 정상에서 골짜기로 몸을 내어 던질 힘을 갖고 있다. 그런고로 골짜기에서 정상으로 몸을 솟구치게 하는 것과 한가지로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의 타락한 성질은 하나님의 사건에 관해서는 가장 완고하게 맹목적이고, 어리석고, 오히려 적대적이기도 하다. 그의 의지는 단맛을 쓴맛으로 선을 악으로, 악을 선으로란 식으로 어둡게 된 이해력의 지배하에 있다. 타락한 인간은 획일적으로 죄에 의해서 행동하지만 결코 죄를 범하는 것을 강제 당하지는 아니하고, 자유로 죄를 범하며, 또 그것을 기쁨으로 아는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라.」 (고전 11 : 14). 이 성구에 관해서 쉬운 상식적인 해석을 취하면서 어떻게 인간의 능력에 관한 교리를 주장할 수가 있는가? 우리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영적인 식별력이 없다. 그의 이성 혹은 오성은 맹목 인간이 되고, 기호와 감각과는 거꾸로 서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가지 진리를 다른 형태로 가르치셨다. 그는 바리새인에게는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 : 43-44)라고 말했다.「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가 있으리이까」(욥 14 : 4).

 

이 원칙을 따라서 모든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는 가증한 것, 더러운 것이고, 그의 마음을 매혹하는 것은 사악뿐이다.(욥 5 :14-16참조). 인간의 마음의 부패는 이와 같이 깊다. 그런고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 생활의 개혁에 관한 오직 하나의 희망은 심정의 변화이며, 그 변화는 그 원하는 때와 곳에 따라서 활동하는 성령의 주권적 재창조력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육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롬 8)는 것이며, 인간은 전연 무능력한 것이다.

 

이상 얘기한 것에 따라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구원은 절대적으로 또 오직 외골수로 은혜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 주권적인 올바른 의지를 따라서 하나도 구하시지 않을 수도 소수를 구원하시는 것도, 혹은 다수를 구원하실 수도 또 모두를 구원하는 것도 자유이며, 그의 절대적인 완전성과 전연 모순이 안된다.

 

2. 무조건적 선택

 

선택의 교리는 예정, 또는 예지의 일반적 교리의 적용 즉, 죄인의 구원이란 문제에 관해서 생각된다. 웨스트민스터의 신앙고백에서는 이 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하나님의 경륜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인간과 천사들 중에 어떤 이는 영생으로 어떤 이는 영원한 죽음에 경륜되었다.(3장 3)」

 

하나님은 선택된 자를 영광에서 예정하는 것과 한가지로 그의 의지가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목적에 의해서 수단도 미리 정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 스스로가 물어야 할 제 1의 문제는 이 교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다.

 

우선 에베소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보자.「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였으니」(엡1:4-5), 또 로마인의 편지 8:29-30절에는, 영원부터 영원에 걸친 속죄와 황금의 사슬이라 할만한 가르침이 있다.「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성경은「선택」을 개인의 공적과는 관계 없이 그것을 과거에 있었던 일과 같이 또 전연 주권적인 것으로 해 주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문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성경에는 사람을 선택하는 자, 사람을 하나님께 접근시키려는 자는 하나님이라 가르치고 있다. (시65:4 참조) 알미니안주의는 이 선택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 인간의 손에 넘겨 줄려고 한다.

 

만일 선택이 사람의 신앙과 복음적 순종에 근거를 갖는다고 한다면 비꼬는 말이긴 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예견하시는 이로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자만을 조심스레 선택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구원은 전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는 거라고 언명하면서도, 선택의 교리를 부정하는 자는 자기 모순의 입장에 서게 되는 자이다. 구원은 인간의 소원이나 노력에 의하는 것은 아니며,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에 의하는 것이다.(롬16) 왜 그가 구원되는가, 왜 이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구원되는가? 다만 그 이유는 만물을 자기 의지가 있는 곳을 따라 정하시는 하나님의 의향에 의해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이 영원, 무조건의 선택의 교리는 때로는 개혁주의 신앙의 심장이라 일컫는다. 이것은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마니안주의는 제공된 은혜의 수용을 결정하는 바 인간의 신앙과 순종하는 행위를 강조한다. 신비중의 신비는 무한의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 이 유죄한 인류의 전부를 구원에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고 그 몇 사람이라도 구원에 선택하셨다는 사실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예정은 예지(豫知)위에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예지되는 것은 확정된 것이다. 그리고 예지된 자만이 한정된 자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 선택의 교리가 혹은 일반적으로 예정까지도 예지위에 세울 수 있다고 가르치는 구절로서 곧잘 지적을 받는 절이다. 이것은 로마서8:29-30이다.「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도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 있는 「아는」이란 말은 곧 단지 있는 일을 인지(認知)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에 쓰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와 같이 「알려진」자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의 특별함이며, 독특한 대상이란 것을 보여준다. 이것을 유대인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암3:2)라고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바울이 「미리 정한다」는 말을 선택이 단순히 예지「豫知」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써 먹는다면 그것은, 선택이 다만 하나님의 뜻에 의한다는 성경의 어디에서나 보이는 그의 주장과 모순이 된다는 점에 같이 주의를 해야만 되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의 견해는 선택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손으로 넘겨진다. 이것은 전능자인 하나님의 목적을 배신한 인간의 불확실한 의지에 의해서 조건이 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일시적인 사건을 영원적인 행위의 원인이 되게 할려는 것이 된다. 그서은 마치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옳은 일을 하도록 고심을 하면서도, 언제나 그들의 사악한 의지로 배신당하는 마음씨 좋은 아버지와 같이 취급할려고 한다. 이처럼 바보 같은 교리는 다만 비성경적이고 불합리일 뿐 아니라 정녕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해야만 된다.

 

원래 인간의 신앙도 또 하나님의 은사이며 회개도 또 하나님의 은사였다.「하나님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이방인에게도 주셨다」(행11:18)는 것이다. 또 세례 요한의 유아에 관해서 말한다면「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15)라 한 것과 같이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사인 것이다.

 

빌립보서 2:12-13절에서 우리들이 두려워 떨며 자기의 구원의 달성에 힘써야 한다고 격려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그 뜻과 업을 행해 나가기 때문이다. 회심이란 하나님의 파격적이고 주권적인 은사다. 죄인은 스스로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어떠한 영적인 선을 행하는데도 그것에 앞서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전향되고 새로워 지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 자신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또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 선택된 것이며 그가 그서을 행할 것을 예견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행22:14-15) 하나님의 자애의 성실이 두드리는 자를 위해서 열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두드리게 하고 그리고 구하게 하는 것이다.

 

선행이 구원의 근거는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열매 또는 증거로서 절대적이며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여는 것 같이 자연스럽게 신앙에 의해서 산출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구원은 「행위에 의하는」것이 아니고,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인 것이며, (엡 2:9-10) 선한 행위는 그리스도 신자에 있어서는 호흡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호흡하는 것이며, 여기서 살고 있는 이상은 호흡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 견해는 이에 관한 신빙성에 따른다. 그것은 자연인이 생각할 수 있는 견해는 아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 부름받지 않는 한,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우리들의 편견 또는 선입관념에 합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정에 관한 성경의 교리를 포기해 버리는 것은 전연 사려가 없는 태도로 간주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행위는 창조자인 하나님을 피조물인 인간의 법정에서 심판하는 일이 되며, 우리들이 자기가 이해할 수 없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지혜와 그 공의를 부인하게 되며 게다가 하나님의 계시를 허망, 기만이라고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그 지혜를 가지고 씻지 않은 더러운 손으로 감히 하나님의 깊은 신비함을 알려고 하는 것은 실로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건방진 행위이다. 대 사도 바울조차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겠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롬11:33-34)라고 말씀할 정도였다.

 

선택의 교리를 지지하면서도 정죄되어 있는 자를 멸망하기로 작정한다는 교리를 부정하는 자에게 한마디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쪼록 시종일관해 주기를 바란다는 사실이다. 전자를 긍정하고 후자를 부정하는 것은 예정의 제정을 이치가 안맞는 것이라 하여 한쪽에 기울어진 취급을 하는 거라고 욕을 면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전자에 관해서 성명(聲明)을 보내면서 후자를 부정하는 신앙은 한쪽 날개로 날려고 하는 독수리와 갚은 것이다. 바울은 분명히 정죄의 주권까지도 선택의 주권과 같은 것으로 명확하게 단정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주권적으로 야곱을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내고, 한가지로 하나님을 주권적으로 에서를 미워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가 하나님은 그 원하는 자를 불쌍하게 생각한다고 언명(言明)한다면 동시에 그는 하나님은 그 원하는 자를 완고하게 하신다고 언명하는 것이다.(롬9장 참조)

 

잠언 16:4절에는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되어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악한 자에게 있어서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어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8)라고 가르쳤다.

 

만일 그리스도교 교직자와 그리스도교 신도, 그리스도의 제자-학구자(學究者)인 사실에 만족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 교회를 위해서 또 이 세계를 위해서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교회는 사실 거의 모든 시대에 그의 이성능력의 과도한 자부심에 의해서 부패하고 또 저주를 받아온 것이다. 그들은 그의 이성을 넘어선 필연적으로 순수한 계시에 속하는 교리의 그 합리 불합리를 판단할려고 기도한 것이다. 철학자는 사실을 가지고 만족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만족해야만 된다.

 

기묘하게도 3위1체의 교리를 배울려고 하는 사람은 그 모든 선입관을 버리라고 주장하며 또 하나님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없는 인간 이성에 의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또 성경을 의심 이 권위 있는 지도자로서 받아들여야만 된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한 번 예정 교리의 연구가 되면 그러한 것들의 규칙에 따를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인 그리고 영원적인 성정(聖定)에 의해서 인류의 일부를 구원으로 선택하고, 다른 이를 멸망에 보내신다고 단정하는 예정 교리의 이 일면은 하여튼간에 우리들이 갖는 정의에 관한 일반적 관념에 위반되는 것으로 우리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이다. 그런고로 여기 대해서 변명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해야만 되는 것은 후자에 대해서 부당한 재액이 가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나 이 결정에 대해서 반대하는 권리를 갖지 않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아무 죄도 허물도 없는 인간에 대해서 행해지는 처사라면, 그 일부의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옳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와 허물이란 상태에 있는 인간에 대한 조치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부정한 것은 아니다. 범죄자는 그 권리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멸명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행해지는 것이며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궁휼을 보이실 경우에 다른 자에 대해서도 정의를 보여주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우리들이 하나님을 부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우주 통치에 의심을 갖는 것이 된다.

 

인간은 자기의 덕으로 구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의 죄로 벌을 받는 것이다. 칼빈주의를 냉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람을 그 성경, 죄과에 관계 없이 구원에 선택하고 혹은 멸망으로 선택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이란 그와 같이 되어가는 것은 아니다.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멸망의 소극적인 원인일지도 모른다. 마치 의사의 부재가 병자의 죽음으로 으뜸 가는 원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칼빈주의의 반대자가 곧잘 그려내는 구원을 찾아 사모하고 찾아오는 자에 대해서, 구원을 거절하는 하나님의 잔인한 그림은 너무나 야비한 만화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구원을 소원하는 모든 자를 구원해 주는 분이시다. 그러나 성질이 변치 않는 자는 아무도 구원을 원치 않는다. 하나님이 많은 죄인을 용서하므로 그의 궁휼을 나타내려고 영원 전부터 정한 것을 바른 일이라 한다면 하나님이 다른 죄인을 처벌하는데 있어서 그의 정의를 나타낼려고 영원으로 정한 일에 왜 강한 반대를 할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사실 하나님의 행위는 하나님의 영원부터의 행위라는 진리와 인류의 일부만이 구원된다는 진리와 이 두 개의 진리는 선택과 정죄의 교리를 완성하는데 충분하다.

 

만일 알미니안주의 자의 이론, 즉,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위해서 죽어서 그의 죽음의 은혜는 실제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이론이 참이라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 대한 복음의 전달을 위해서 무엇인가의 대비책을 마련해야만 될 것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복음을 듣고 이것을 받아 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을 부정하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가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3-14). 이것을 바꾸어 말한다면 구원의 오직 하나의 길인 그리스도에 관해서 아직 들은 일이 없는 이교도가 어찌 구원되겠는가 하는 의미이다. 사실, 복음을 갖지 않는 이방인은 멸망한다는 신념은 외국전도의 열의를 갖게 하는 가장 강한 이유이다. 만일 우리들이 그들 자신이 갖는 종교가 그들을 구원하는데 충분한 빛과 진리를 포함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는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설명할 필요성은 전연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의 외국전도에 대한―국내전도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태도는 거의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 의해서는 대부분은 결정이 되는 것이다. 중국 서부의 오지의 암흑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라디오, 비행기, 근대 천문학, 기타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받지 못한 것과 같이 구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조건에 하나님이 인간을 두실때에 확실한 것은 일년 내내 동결되어 있는 시베리아의 북부에는 조금도 밀농사가 안되는 것 같이, 하나님은 그들이 구원되어야만 한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이 만일 다른 계획을 가지셨다면 그 목적을 위해서 무엇인가의 기회를 주실 것이다.

 

이 정죄의 교리―하나님이 어떤 자를 정죄하고 멸망에 내어놓는다는 설은 알미니인주의 자가 즐겨 공격의 씨로 하는 교리의 하나이다. 그들의 목적은 분명하다. 그들은 이 교리를 헐뜯고 여기 대해서 사람들의 감정에 편견을 갖게 하고 혐오의 감정을 갖게 하는 사실은 쉽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잘 칼빈주의 자가 주장하는 바 견해를 굽혀서 표현하고 말을 다해서 반대의 주장을 한 후에 정죄를 한다든가 버림을 받는다든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선택 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논증하는 것이다.

 

이 교리에 관해서 먼저 알아두어야 될 것은 우리드리 이 교리에 관련된 모든 비의(秘義)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책임은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책임은 이 교리에 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말한다는 것 뿐이다. 이상과 같은 어리석은 말장이에 대해서 바울이 던져준 충분한 오직 한 마디는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의 지혜 안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인 것이다.

 

절대 주권에 관련을 지으셨다. 그는 거기 일체의 근거를 두셨다.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를 두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알미니안주의 자는 여기서도 참 난문을 피하지 못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모든 일에 관해서 예지를 가지시는 것을 인정하는 그들은 왜 하나님이 죄있는 생애를 보내고 복음을 거역하며, 회개하지 않고, 죽고 영원의 멸망에 괴로움을 당한다고 예지하시는 자를 창조하셨는가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자기가 이 세상상에서 정죄되고 버림받는 자라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정죄되고 버림받는 오직 하나의 불림이 없는 증거인 결정적인 불순종은 죽을 때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회개하지 않는 사람도 회심의 변화가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를 회개시키지 않고 또 그를 구원하지 않는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만일 누구나가 자기 심중에 양심의 고통을 느끼는 자가 있으면 그야말로 하나님이 그를 끌어당기기 위해서 쓰시는 수단일거라 생각이 된다.

 

복음은 팔레스틴이 얼마 안되는 읍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단순히 지방적인 사건이 아니라 전세계를 향한 메시지였다. 변함없이 풍부한 성경의 증거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의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섹 9:10) 및 이스라엘은,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행 13:47)라고 하는 것 같이, 그 사명을 위해서 선택된 것이다. 에스겔에게서 보여주는 환상에는 문지방 밑에서 물이 흘러 처음에는 발목을 적시지만, 다음에는 무릎 허리에 이르러 큰 강이 되어, 건너기가 어려울만큼 되었다 (겔 47:1-5). 또 다니엘의 환상에 있어서 짐승은 성도들과 싸우고 한 때는 성도를 지게 했지만, 그러나 「그 때가 와서 성도들은 나라를 얻었다는 것이었다.」(단 7:22)

 

3. 제한적 속죄(制限的 贖罪)

 

지금 여기서 제한적 속죄라는 토픽아래 논의하려는 문제는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해서 차별도 예외도 없이, 모든 개인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으로 바친 것인가, 혹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선택된 자에게만 특별한 관게를 갖는 것인지, 바꾸어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인간의 근원을 가능케 하는 것인가, 혹은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자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는 것인가 어느 쪽인가이다. 이 교리가 선택의 교리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임을 곧 분간이 가능할 것이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속죄의 가치 혹은 능력에 한도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이 점을 오해하고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제한하고 보다 많은 고통을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속죄의 가치는 전 인류를 구원하는데 충분하지만, 선택된 자만을 유효하게 구원하시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의 교리에 의하면, 속죄는 단지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해서 그들 자신을 구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데 불과하다―만일 그들이 원한다면―이란 것이 된다.

 

속죄는 그 본질상 범위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단순히 구원을 가능케 한다는 정도의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속죄가 유효적으로 구원을 보증한다면 그것은 선택된 자만이 관계를 갖는다고 말해야만 될 것이다. 윌필드 박사가 말한 것 같이 「우리들이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비싼 가치를 갖는 속죄인가, 넓은 범위의 속죄인가, 이 두 개는 양립되지 않는다」라고 그리스도의 사업은 이것을 보편화한다면 그 실질은 물을 탄 것이 되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이것을 양적으로는 제한하지만 질적으로는 불변이다.

 

칼빈주의 자에게 있어서 속죄는 좁은 다리이긴 하나 이것은 완전하게 건널 수 있는 다리이다. 알미니안주의 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강의 중간까지 밖에 갈 수가 없는 크고 넓은 다리이다. 사실 알미니안주의는 칼빈주의 보다도 훨씬 신랄한 제한을 그리스도의 사업에 가하고 있다. 만일 속죄의 은혜가 뵤편적이고 무제한일 것 같으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요구한 것 같은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더욱 낮은 구원을 보여주셨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에 물을 타서 지극히 쉬운 길이 제공되게끔 한다. 말하자면 지불능력이 없는 죄인에게 한 달에 15센트를 탕감해 주는 것 같은 안이한 은혜가 되는 것이다.

 

한편 칼빈주의 자는 최초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완전복종의 율법은 영원의 율법이며 그 율법의 요구는 너무나 엄격하고 혹은 그 형벌이 가혹하다는 인상을 제거해 주는 것 같은 일은 전연 하시지 않았다는―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은혜―순수한 은혜는 구원의 필요조건의 저하(低下)에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그 백성을 위한 몸값으로 하신 것이어서 그것은 비뚤어지지 않고 파기되지 않고, 바르게 존중받음으로서, 그 탁월성이 나타나 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몸을 대신하여 구원되는 자아게도 또 영원한 형벌에 복종을 당하는 자에게도 그 엄중한 율법은 강제되어 집행되는 것이다.

 

만일 알미니안주의의 교리가 참이라면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지만 그러한 사람들은 나중에는 멸망되고 그리고 속죄된 자와 같이 보인 많은 자에게 구원은 적용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한 예를 든다면 이교도의 생활에 어떠한 은혜를 지적할 수가 있는가? 또는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로부터 무엇을 받았다는 것이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피조물에 의해서 몇번이나 방해를 받고 파괴되었다는 것이 된다. 그것은 또 하나님의 그 뜻은 천사들 사이에는 지키게 할 수 있지만 그 원하는 바를 지상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행하게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란 그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義)는 단순히 사람들의 구원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죽은 데 대해서 실제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다.

 

속죄의 성질에 관한 알미니안주의의 견해에서는 만일 모든 인간이 그 권리를 사용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역한다면―물론 수학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그리스도의 모든 고난은 다만 하나의 죄인도 구할 수가 없게 되고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목숨에 의한 구속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갖추어 준 하늘의 후사를 아무도 받지 못하고 또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업은 완전히 실패에 돌아가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는 그 백성을 위해서 “RANSOM"(구속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주(譯註)―랜섬이란, 노예의 몸값의 돈이란 의미이다.「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주의해야 할 것은 주 예수가 여기서는 많은 「사람을 위한 구속」이라 하고, 「모든 사람의 구속」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은 일이다. 구속의 성질은 이와 같은 것이다. 즉, 구속이라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지불되고, 받아들여질 때에 그가 지목한 사람을 자동적으로 자유케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구속이 아니다. 율법은 구속된 자에게 어떠한 책무로부터도 자유하기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선택된 자만의 구속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사업의 공적은 모든 인간에게 균등하게 전달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영원한 형벌은 누구에게도 정당하게 가해지지 못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이 엄한 형벌을 이중으로―하나는 대상자(代償者)에게서, 다음에는 사람들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부정(不正)이라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가 그 때문에 보증을 서 주시는 자에게, 한정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성하는 자에게 한정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성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속죄는 유효한 것이다.「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라고 예수가 말했을 때에 예수 자신은 그 죽음의 목적을 제한하신 것이다.

 

그런고로 만일 그가 자신의 목숨을 양을 위해서 버리신 것이라면 그의 사업의 속죄적 성격은 결코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10:26). 「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 8:44)라 말한다. 주 예수께서 이와 같이 그들을 지적하고 제외한 것을 알면서, 도대체 누가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서 그 존귀한 목숨을 버리셨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요셈에게 나타난 천사는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 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0-21)라고 고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모든 백성은 아니며 자기 자신의 백성이라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업은 절대로 헛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고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선택된 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속되는 자, 성령에 의해서 깨끗함을 입은자― 바꾸어 말한다면 선택, 구속, 거룩하게 되는 것은 동일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이나 요한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며, 바로 왕이나 가롯 유다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산양이지 양은 아니다. 우리들은 바로나 유다가 그리스도의 벗이며,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가르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류는 두 종류로 분류된다. 그리고 그 한편에 있어서는 명확하게 긍정되지만, 한편에 있어서는 암암리에 부정된다. 그리스도가 그 백성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씀하실 때에는, 그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균등하게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무질서한 전체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아니다. 그의 백성, 그의 신부, 그의 교회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농부는 자기의 밭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거기 나는 식물을 균등하게―가라지도 밀도―돌본다고 생각할 자는 없을 것이다.

 

옛날의 이스라엘의 대 제사장과 우리들의 대 제사장인 그리스도와의 사이에는 주목할만한 비교가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전자는 후자, 즉 그리스도의 모형이지만, 대 제사장은 속죄의 큰 날에 이스라엘의 12 지파의 죄를 위해서 희생을 바쳤다. 제사장은 그들을 위해서 다만 그들을 위해서만 화해를 시키셨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들을 위해서만 기도를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백성에 대한 긍휼은 알미니안의 조건적 선택과 무제한적 속죄와의 교리에 있어서 보다도, 칼빈주의의 무조건적 선택과 제한적 속죄와의 교리에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문제의 결론에 있어서 칼빈주의 자는 일반 인류가 그리스도의 속죄에서 중대한 은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한마디 하지 않으면 안된다.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아담의 죄 때문에, 전 인류에게 가해져야 할 형벌을 받지 않는 것, 또 그리스도의 속죄가 복음선전의 근저가 되며, 많은 도덕적 감화를 세상에 가져오고, 많은 악한 감화를 억제하는 것을 인정한다. 하나님은 태양을 악한 자에게도, 선한 자에게도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에게도, 불의한 자에게도 내려주신다. 많은 현세적 축복이 구원을 보증하는데는 부족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이와 같이 보증하는데는 부족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이와 같이 보증하는 것이다.「특정적인 구원, 혹은 제한적 속죄를 주장하는 자는, 인류 일반 드디어는 멸망될 자조차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무엇인가 은혜 혹은, 이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들이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 죽음의 본래적인 특유한 결실로서의 축복―그리스도의 대 속의 죽음의 특수성격에 있어서 축복을 전 인류에게 가져 왔다는 것, 즉, 그리스도가 용서와 화해를 전 인류에게 가져왔다는 것이다. 많은 축복이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인류에게 넓게 흘러온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은혜는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실려고 할 때에 예견되는 것이다」라고 컨닝함이 말한 그대로이다.

 

그런고로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다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알미니안의 모든 주장을 절대적으로 부정해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선택된 자에게 있어서, 즉, 그들의 구원에 대해서 효과적이라는 특별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자에게 생기는 효과는 이 큰 목적―선택된 자의 구원―의 부수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4. 불가항력적 은혜(不可抗力的 恩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불가항력적 은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생명으로 예정된 모든 사람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만을 자기가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인정한 때에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실제로 불러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총과 구원의 자리에 들어가게 하신다. 또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있도록 영적으로 또한 구속적으로 계몽하신다.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없게 하고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셨다. 선을 원하게 하는 절대적인 전능으로써 그들의 뜻을 새롭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실제로 가까이 나오게 하신다. 이 때에 그들은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며 은총으로써 그것은 원하도록 변화를 받는다.」(10 : 1)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은 그 자연의 상태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부패하고, 그 자신의 어떠한 힘에 의해서도 깨끗해질 수가 없고, 또 행복하게 될 수도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의할 수 밖에 없다. 만일 죄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려면 그는 새로운 성질을 받아야만 된다. 그는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요3:3). 그런고로 죽은 사람은 자기가 자기 몸을 운신(運身)할 수가 없는 것 같이 구원의 최초의 행동은 안으로부터 일어날 가망이 없다. 죄많은 인간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유인(誘因)이나 원조(援助)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도록 충고하고, 격려하고, 호소하고, 도와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었다.

 

구원은 마음의 변화를 분명히 포함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 변화를 갱신(更新)이라 부르고 있다. (딛 3:5) 이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한 것과 한가지로 큰 능력에 의해서 행해지는 영적부활이다.(엡1:19,20) 그리고 이 변화의 주체는 새로 창조된 자라고 말한다.(고후5:17) 이러한 기록은 갱신을 인간의 활동이라 보는 알미니안의 견해에 완전히 반대하는 것이다. 영혼의 갱신은 우리들에 의해서 되어지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을 향한 순간적인 변화이다. 이것이 일어나는 순간에 있어서 영혼은 나사로가 예수에 의해서 생명으로 되돌아 온 것과 마찬가지로 전연 수동적이 된다.

 

갱신은 성격의 변화를 포함한다.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나무를 좋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은 자기의 육체적 탄생에는 전연 관여하지 않는다. 자기의 탄생을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로 받는 것 같이 우리들의 영적인 탄생도, 우리들 자신이 아무일도 하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로 받을 뿐인 것이다. 이 영과 육과의 탄생은 어느거나 우리들 자신의 힘, 혹은 우리들의 동의가 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신앙에서 탈락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나님에게는 그것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는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강한 힘이 그 명령을 효과적인 것으로 했다. 나사로는 먼저 목숨이 되살아나고 그리고 숨을 되찾고 먹었다. 이와 같이 죄 가운데서 영적으로 죽은 자도 먼저 영적인 생명으로 갱신되어, 다음에 신앙과 회개가 주어지고,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택된 자는 복음을 듣고, 그리고 믿는다―그것은 반드시 최초에 들었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정한 때에―그러나 선택되지 못한 자는 들어도 믿지 않는다. 그것은 증명이 불충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내적 성질이 성(聖)에 적대하기 때문이다.

 

물질세계도 영적 세계도, 한가지로 하나님의 창조이다. 물질세계에 있어서 물은 주권적으로 술이 되고, 문둥병자는 한 번 손을 대면 고쳐진다. 알미니안은 물질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힘을 승인한다. 왜 그들은 영적 세계에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지배를 넘어서는 것 같이 하나님의 힘을 부정하는 것일까? 육체의 눈은 한 번 장님이 되고나면 아무리 많은 강한 빛을 눈에 가져와도 시력을 회복할 수가 없다. 죄로 죽은 영도 또한 한가지다. 아무리 많은 복음의 진리를 제공해 봐도 그것으로 영적 시력을 갖게 되지는 않는다. 시력회복은 외과의사의 나스나 또한 기적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으면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혼의 갱신에 의해서 빨라지는 것이 아니면 절대로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이다.

 

아담과의 계약에 있어서 인간의 운명은 그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었다. 우리들은 그 시험의 결과를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올바른 생활을 할 때에도 자기 자신이 자기를 구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인간이 타락한 후에 그 기회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알미니안의 큰 결점은 인심에 활동하는 성령의 초자연적 힘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이다. 만일 알미니안이 말하는 것같이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회개를 열심히 구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바로 이 사업에 큰 실패를 하고 계신 것이 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성년(成年) 인구중에 하나님이 한 사람의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마 25명의 인간을 구원에 실패하고 그들을 지옥에 보낸 계산이 되는 점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하나님의 존엄을 손상하는 것이다. 전능한 하나님의 창조력을 이와 같이 죄인이 파괴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는다.

 

부활의 주는 말씀하셨다.「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마28:18) 이 권세는 무한하다.「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4:35)

 

성경의 어디에 하나님이 힘을 다해서 사람들을 납득시킬려고 충고하고 주장해도 그 피조물인 어떤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목적을 성취할 수가 없었다고 써 있는가? 만일 하나님의 소명이 유효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나는 모든 이간이 구원되는 것을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뜻이 아닌 까닭으로 나는 드디어 할 수가 없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라 상상하는 따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순응한 기독교 신자라면 하나님이 그와 같이 자기 자신의 피조물에 지시되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구원에 관해서 그리스도가 「만유 안에 계시느니라」는 바울의 언명(골3:11)에 첨가하시기를 구원 사업에 관해서 인간 자신은 전연 무력하며, 자기 자신 안에는 구원에 해당될 만한 아무 가치도 없다고 말해도 된다. 우리가 복음은 충고가 아니고 좋은 소식이란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우리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우리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들을 구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고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주 예수께서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하신 바 구 속의 업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한 그 의미는 「전부 성취했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알미니안의 입장은 트프레디의 말과 같이 자유로 이것을 받아들이고 또는 거절하는 힘을 지니는 자는 그리스도를 향해서 「아니, 당신은 속죄를 이루었다(성취했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일부를 성취했을 뿐이었고 그 위에 인간 자신이 무엇인가를 더해야만 된다. 그렇게 못하면 당신이 해낸 전부는 무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해야만 되는 것이다.

 

알미니안의 체계에는 언제나 보편주의적 맥박이 농후하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한결 같이 사랑하고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시고 성령이 속죄의 은혜를 모든 인간에게 가할 수가 있다면 분명히 다음의 두가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1) 모든 사람은 한결같이 구원된다.

(2)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하는 일에 일체의 일은 인간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은 다만 인간이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데 맡겨둔다.

 

전자는 성경에 모순된다. 후자에 관해서 말한다면 만일 하나님이 그 구원의 모든 사업을 하신 후에 이것을 「받아 들이든가」「거부하든」간에, 인간에게 맡겨둔단 판정한다면, 전능한 하나님의 사업에 대한 거부권을 인간에게 주고 그리고 구원은 구극(究極)에 가서 인간의 손에 달려있는 거시 된다. 이 사상 체계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아무리 구원 사업의 대부분을 하실려고 해도 결국은 인간의 최후가 요인(要因)이 된다. 구원하러 오는 이는 그 자신에게 무엇인가 소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멸망하는 자에 대해서 무엇인가 자랑할만한 것을 갖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멸망하는 자에게 경멸의 손가락을 내밀어「너는 나와 한가지로 좋은 기회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너는 거절하고 나는 받다 들였다. 그런고로 너는 괴로워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자랑하게 된다. 이것은 바울이 언명하는 바대로「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오직 믿음의 법이로니라 라고 한 말씀과 칼빈주의의 교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칼빈주의의 인간은 믿어도 하나님에 대해서 돌아가는 것을 그 뜻과 반대로 강제당하고, 구원의 일에 관해서는 인간이 기계와 한가지가 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목석과 같이 또 노예와 한가지로 취급되어 그 의지와 반대로 구원을 강제로 구하도록 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 마음은 성령의 빛에 비쳐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에 대해서, 죄에 관해서, 전 의식이 변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서 그 사람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비심과 은혜를 찬미하고 인격적으로 순종하도록 기분 좋은 속박 아래 놓아 두시는 것이다. 중생된 자는 새로운 동기와 소원에 의해서 그 자신이 지배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또 과거에는 미워한 것을 지금 사랑하고 요구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어떠한 외부적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영혼 안에 창조되는 바, 새 생명의 원리에서만 달성되고 그리고 다만 그가 구하는 영의 식물에 의해서만 그 혼은 만족이 되는 것이다.

 

영적율법은 선행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여기 대한 유비(類比)는 세상에 흔히 볼 수 있다. 하나의 예로서 법률 아래 있는 시민과 범인과를 비교해 보자, 법률 아래 있는 국민의 대부분은 그 국가 또는 민족의 법률을 의식하지 아니 하고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다. 그에게는 위정자나 경찰관이 친구 같이 보인다. 그들은 국민이 존경하고 기뻐하고 권하는 관헌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국민에게 있어서 법률은 그의 생명을 보호하고, 그가 사랑하는자, 또 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비유이긴 하지만 극악인에게 있어서는 어떠한가, 그 사정은 전연 다르다. 그는 아마 일반의 사람들 보다도 더 자세하게 법률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법률의 제재를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판결을 무효로 하기 위해서 법률을 공부한다. 그는 언제나 공포가운데 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그 밀실에 방탄 커텐을 달고 경찰관이나 그밖의 사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겁내며 언제나 권총을 가지고 다닐 것이다. 그는 언제나 속박 아래 있다. 그의 자유 사상은 경찰관을 물리치는 일이고, 법정을 매수하는 일이며, 그가 한 그 일에 관해서 사회의 습관과 법률을 비판할 것이다.

 

유효적 은총이라 하는 특별은총은 때로는 불가항력적 은혜라고도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불가항력적 은혜란 말은 인간위에 있는 압제적인 힘이 가해짐으로서 인간이 그 뜻에 위반되어 행동할 것을 강요당하는 것 같은 암시를 받기가 쉽고 잘못되기 쉬운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의미하는 바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선택은 하나님의 힘에 의한 감화이며 자비로운 선택의 행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헤이 와트(Hewlitt)박사는 과거에 연주된 가장 아름다운 음악에 의해서 혹은 지축을 뒤흔든다고 생각할만큼한 큰 우뢰에 의해서 무덤 속의 시체가 소생할 것인가? 죄와 허물에 의해서 죽은 죄인이 율법이란 우뢰에 의해서 일으킴을 받을 것인가?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렘 13:23) 에 있는 것과 한가지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5. 궁극적 구원

 

성도의 지키심의 은혜에 관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자 안에서 용납하시고 실제로 부르시고 또한 성령으로써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는 없다. 그들은 마지막 날까지 그 상태에 있을 것이며 또한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다.」(17 : 1)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절대 무조건적으로 영원한 생명에 선택하시고 성령의 구속의 은혜를 그들에게 유효하게 적용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구원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은 불가피적인 결론이다.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현재 이 세상에서 생활하는 신자들 보다 행복하긴 하지만 안전성에 있어서는 어느거나 한가지이다. 이와 같은 선물의 수여(授與)는 그것을 받는 자를 구원하실려는 하나님의 목적의 계시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하나님의 손에서 떠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 자가 말하는 것 같이 참 그리스도 신자가 된 자에게도 멸망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왜 그들을 그들이 아직도 구원의 상태 안에 있을 동안에 이 세상에서 제거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하나님이 그들의 장래의 배교를 예견하지 못해서라고 말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구속되어 하늘로 옮겨간 자는 거룩한 가운데 보호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더구나 만일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성도들을 그들의 자유 행동을 방해하는 일 없이 보호하지 않으시겠는가 중생된 그리스도 신자가 하늘의 아버지에 대해서 그 아들이 되는 관계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은 지상의 아버지에 대해서 그 아들이 아들되는 입장을 잃는 일이 없는 것과 한가지이다. 참 기독교 신자도 타락하고 멸망하는 수가 있다는 사상은 중생된 영혼에 주어지고 영적 생명의 원리에 관한 개념을 잘못하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바울은 믿는 자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가르치고, 그러므로 신자는 율법아래 있지 않는고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정죄하는 일이 없다고 말하고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 4:15)이라 가르치고 만일 행위에 의해서 가르침의 최소 부분이라도 할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은, 「그는 율법의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자라」(갈 5:3)말하고 있다. 즉, 그들은 자기의 힘으로 완전하게 순종하고 그것으로 자기의 구원을 얻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 무한, 신비한 책은 그들이 절대로 멸망되지 않기 위한 보증이다.「사랑은 본질적으로 부동이며, 하나님의 실재와 같이 불변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한 1서 4:10)

 

히브리서의 기자가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히 12:2)이라고 말할 때에,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자는 결코 멸망 당하는 일은 없다고 가르친다. 이것으로 우리들의 구원의 전 과정은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고, 하나님에게 인도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 신자가 타락하는 수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 은혜를 걷어버리고 그의 구원의 방법을 변경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율법 아래 되돌려 버리는 것이다.

 

선택된 자의 구원에 관해서 루터는 「하나님의 예정은 강하고 확실하고, 그리고 그 결과인 필연도 한가지로 불변이며 반드시 성취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더욱 더 우리들의 순결을 지켜주심과 구원의 보증과 우리 자신들의 약한 성질에 의하지 아니하고, 전혀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지지력(支持力)에 의한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보전의 교리는 기독교 신자가 일시적으로나마 범죄하고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슬픈 일이긴 하나 우리들은 너무나 빈번하게 범죄한다. 가장 훌륭한 신자라도 일시적인 배교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전연 패배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 위에 그의 은혜를 부어주시므로 가장 약한 성도도 최후적으로는 배교에서 확실히 지켜주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의 개인적 경험에 관해서는 대 사도 바울조차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라고 고백을 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 신자에게 있어서는 범죄를 하는 것은 모순이다. 히브리서의 기자도 범죄하는 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 : 6)고 말했다.

 

기독교 신자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그의 상태는 전쟁과 같은 것이다. 그는 일시적으로는 실패하는 일도 있고, 어떤 때는, 전연 신앙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한 번 참으로 구원된 자라면 그는 은혜에서 전연 이탈할 수는 없다.

 

A‧ H‧ 스트롱은,「믿음이 있는 자는 마치 언덕을 기어오를려는 사람과 같다. 어떤 때는 미끌어져 떨어지는 일이 있어도 그 얼굴은 언제나 정상을 쳐다 보고 있다」라고, 또 C.H (stong)스펄죤은 「믿음이 있는 자는 큰 배를 타고 있는 자와 같은 것이다. 곧잘 갚판위에서 딩구는 일이 있어도, 그러나 바다에는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참 그리스도 신자로 보이는 자가 최후적으로 배교로 떨어져버린 경우의 취급도 절대로 해석이 곤란한 것은 아니다. 성경도 우리들의 경험도, 친구에 대한 우리들의 판단은, 곧잘 잘못되는 것을 가르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참 그리스찬인가 아닌가를 확실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외적인 고백이 반드시 영혼이 구원되었다는 보증은 못된다. 예수는 제자를 훈계하여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이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24)라고 말씀하시고 바울은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 하나니 (고후11:13)라고 주의를 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가 아무리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일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회라」(계2 : 9)라고 더러운 사실을 아시는 것이다. 요한은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라고 말하고 있다. 타락해서 영원히 떠나가는 모든 자를 바로 이와 같은 따위의 것들이다. 이와 같이 신앙 고백으로부터 떨어지는 자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자는 없는 것이다.

 

단순히 교회의 신도가 물론 참 그리스도 신자의 보증은 안된다. 때로는 어떤 목적으로 외면적으로 복음의 고백을 하는 자도 있다. 그들은 잠시 동안은 외면적인 도덕생활을 강요당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친하게 사귀는 일도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그들의 심정의 참 동기를 본다면 그들이 과거에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들 모두는 염소이지 양은 아니며, 또 사나운 이리이며 순한 양은 아니다. 베드로는 그들에 관해서「개가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하고,「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라든지 하는 속담대로이다. (벧후 2:22)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과거에 선택된 백성에 속한 일은 없었던 것이다.

 

자유의지의 교리와 은혜로부터의 타락의 교리와를 지니는 철저한 알미니안 주의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결코 그의 영원한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 진실로 그는 현재의 구원의 확신은 가질 수 있겠지만 궁극적인 구원에 관해서는 희망을 가질 수가 있다는데 불과하다. 만일 알미니안주의가 진리라면 그리스도 신자의 장래는 그의 피조물적인 의지가 바른 길을 계속 선택한다는 공산(公算)위에 서 있기 때문에 지극히 불안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알미니안주의의 구원의 보증은 전능하여 불변한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아니하고 약하고 죄많은 인간의 손에 돌려놓고 있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 자의 논리에는 그리스도 신자가 되도록 빨리 이 세상을 떠나야 되며, 자기에게 약속되어 있는 무한의 가치 있는 후사를 확보하는 일이야 말로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타락해 버린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 신자가 이 세상에 머물러 이 세상의 얼마 안되는 생활을 위해서 이 영원한 구원을 손해 시킬 가치가 있을 것인가? 영적인 사실에 관해서 의심의 상태는 불행한 상태다. 이와 같은 교리는 우리들을 위협하고 영원토록 거기서 피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가능하다면 내가 목숨을 의탁하는 이 배가 항해에 견디고 뱃길을 떠나면 반드시 안전하게 목적의 항구에 도착하는 것을 알고 싶은 것이다.

 

알미니안주의 자는 성경 안에서 믿음이 있는 자가 구극(究極)의 타락의 가능성을 포함한다고 논증하는 바, 배교, 타락에 대한 경고의 말을 열거한다.

 

하나님이 타락의 공포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임하신 것은 그의 타락을 인정한다는 목적을 지니기 때문은 아니다. 이와 같은 공포는 하나님이 그를 타락에서 지킬려고 하시기 위한 수단이다. 이와같은 경고는 믿음을 갖는 자에게 있어서 보다 더 큰 신앙과 기도를 하라는 격려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그의 거룩의 결여와 하나님의 의존을 확신케 한다. 그리고 그들은 불신자의 제한으로 도움이 되고 또 그들의 변명의 여지를 없게 하는 것이다.

 

제 3 장 예정 교리에 대한 반론

 

1. 예정론과 운명론

 

예정론에 대해서 그것은 일종의 운명론이라고 논박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예정론과 이교의 운명론과를 혼동하는 데서 오해를 한다. 예정 교리는 영원한 옛날부터 하나님이 하나의 통일적 계획 또는 통일적 목적을 가지시고 그것을 이 세상의 형편의 이법(理法)통해서 완성시키시는 거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예정론은 그 계획 안에 결정된 목적이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 둘재로 하나님의 백성의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과 반대로 운명론은 구극원인(究極原因)의 이론을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운명론은 우주통치의 고삐를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에서 빼앗아 맹목적 필연에다 맡기시는 거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것은 자연이 가는 길과 인류의 경험과를 미지의 불가항력적인 힘에다 돌리는 것이요, 그 힘에 대한 항쟁은 헛되고 여기 대해서 불평을 말하는 것은 유치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운명론에는 종교에 사랑, 궁휼, 거룩, 정의 지혜 등을 넣을 여지가 없고, 또 그러한 것들을 자극하는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예정론은 이러한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강한 근거를 준다 그런고로 예정론과 운명론과는 마치 인간의 행동과 기계의 활동이 다른 것 같이, 혹은 하늘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의 다할 수 없는 사랑과 지구의 중력이 서로 다른 것 같이 다른 것이다. 칼빈은 이 예정론의 교리가 운명론이라는 비난을 극력부정하고 있다.

 

세상에는 시종일관하는 운명론자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철저한 운명론자라면 만일 오늘 죽는다면 기왕 죽는 거니까 먹을 필요가 없다. 「만일 몇 년 사는 거라면 어떻든 살 테니까, 먹을 필요는 없다. 그런고로 먹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어느 시기까지 살리기로 예정해 둔 것이라면 하나님은 단식이라는 어리석은 자살 행위를 피하는 것까지도 예정 안에 넣어두실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는 것이다.

 

2. 예정론과 도덕적 책임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행동력과 도덕적 책임이 양립되지 않는다는 반론에 대해 여기서 우리들이 직면하는 문제는 만일 인간의 행동이 영원부터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자유롭게 책임이 있는 행동자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유롭고 책임이 있는 행동자로서는 이성적 자기 결정을 갖고 행동하는 지적 인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예정이란 하나님이 영원부터 모든 인간의 생애와 자연계에 있어서 일어난 사건들의 실제적 과정을 필연적인 것으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난문제의 참 해결은 그 어느 편인가를 부결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두 가지 모두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모든 사건을 결정하신 하나님이 그러한 사건들 안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를 결정하셨으며, 이 자유는 다른 모든 사건과 한가지로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인간의 자유가 분명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하나님은‧‧‧‧‧‧일어날 모든 것을 자유롭게 또한 변함없게 제정하셨다」라고 언명하고, 그 후에 「그러나 하나님이 죄를 조성하시거나 인간에게 허락하신 의지를 부정하시거나 또는 이미 제거된 제2의 원인에 대하여 아무 관계가 없거나 우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확립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이 집을 건축할려고 할 경우와 흡사하다. 그 사람은 먼저 설계를 한다. 다음에 목수, 미장이, 상하수도의 기술자를 고용하고, 그리고 각각 일을 시킨다. 이 사람들은 자유로 일한다. 그런데는 어떠한 종류의 강제도 없다. 고용주는 단지 임금과 노동조건을 적당하게 정해서 고용된 사람들이 자유로, 그리고 기쁨으로 일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그 사람이 세운 계획은 세부에 있어서까지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의지가 그 집의 건축에 있어서는 제1원인이며, 그들 고용인들의 의지는 제2원인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좀 역설적인 말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민주적인 왕국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는 「피통치자의 합의」이다. 그것은 믿는 자의 합의는 무시하고, 그들 위에 강요되는 일은 없다. 그들은 희망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권자의 뜻을 행하는 것을 그들 생애의 기쁨으로 알도록 감화되는 것이다.

 

예정이 인간의 자유행위와 양립(兩立)되지 않는다는 반대는 한가지로 하나님의 예지의 교리와도 반대하는 것이 된다. 만일 하나님이 장래에 일어날 사건을 예지한다면 그것을 예지된 것과 한가지로 확정적이다. 따라서 만일 한 쪽이 인간의 자유행위와 모순되는 거라면, 한쪽에 있어서도 모순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자유행위자의 활동에 의해서 성취된 바 대소 몇 가지의 일들이 예언되어 있다. 보통 이러한 자유행위자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시키면서도 예언을 성취시키는 것을 의식마져도 못했던 것이다.

 

조금 예를 들어보겠다. 유대인이 예수를 거절한 일, 로마병들이 예수의 옷을 제비뽑은 일,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일, 닭이 우는 것, 예수의 시체를 창으로 찌른 것,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대인이 타국의 포로로 끌려가는 일 등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예지는 비록 유다와 베드로의 경우라도, 절대로 그들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았다―적어도 그들 자신도 그렇게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판 후에 후회하고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라고 말했다. 또 베드로도 닭이 우는 것을 듣고, 예수의 말을 생각해내고 밖에 나가서 통곡했다. 여기 한 사람의 강직한 재판관이 뇌물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혹은 또 어떤 수전노가 금덩이를 집을려고 하는 것을 예지한다고 해서 그들의 성질을 고치고 그들의 행동의 자유를 저해할 것인가? 그런고로 어떤 행동의 확실성은 그것을 실행하는 행동자의 자유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러한 행동을 확실한 것으로서 예지하지를 못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의 교리는 함께 서든지 함께 넘어지든지 한다.

 

어떤 사람의 행위가 절대적으로 확정적이라는 데서 그 사람이 다른 행위를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일 그가 다른 길을 택한다면 그것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유다와 그의 공범자들은 그 생각대로 그들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들은 그 사악한 성향(性向)대로 행동했다. 베드로는 그들을 범죄자라고 비난하는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행동한 것을 표명했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2:23)라고 말한다.

 

다시 다른 이유에서 확정성은 자유행동과 모순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줄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아버지는 어떤 사정으로 그 아들이 어떻게 행동하는 가를 알고 있고, 그 사정을 제어함으로서 그 자녀들의 행동을 미리 결정한다는 것은 곧잘 보는 일이다. 그러나 영원히 자녀들의 행동은 자유이다. 하나님의 성정(聖定)은 사건을 낳은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생기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행동의 확실성을 결정하는 이 하나님의 성정(聖定)이 동시에 행동자의 자유를 결정하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사람은 그 선택의 자유, 또는 그의 당연한 책무를 방해하는 바, 외부적인 강제 아래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만 자유를 갖는 것이 된다. 사람은 그 타락의 상태에 있어서는 우리들이 노예의 자유라 부르는 자유를 가질 뿐이다. 그는 죄의 속박아래 있고 자연히 사탄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루터의 교리에서도 배울 수 있다. 「인간은 무슨일을 하려고 해도 아무런 의식적 강제를 받지 않지만 필연적으로 그것을 한다. 그는 하나님이 영원부터 뜻을 가지시고, 그리고 그가 그것을 한다는 사실을 예지하시는 것만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의지는 효과적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예지는 확실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또 「그런고로 이것을 아는 것은 그리스도 신자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필요하고 또 유익하다. 즉, 하나님은 그 영원하고 불변하며 잘못이 없는 의지를 따라서 모든 것을 예견하고, 기획하고, 행동하시므로, 결코 우발적인 일로서 예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그러나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시시로 인간이 못하는 일을 하라고 명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반론하는 사람이 있다. 성경에는 무수하게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는 전연 행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명하는 예가 있다. 손이 오그라진 사람에게 대해서 손을 펴라고 명하시고, 중풍병자에게는 서서 걸어가라고, 또 죽은 나사로에게는, 무덤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셨다. 또 사람들은 믿으라고 명령받고 있지만,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그들이 위에서 주어지지 않는 예수를 믿지는 못했던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가져온 도덕적 세계에 있어서 그들의 무능력을 그들의 그 의무에서 해방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내부의 감정, 외부의 환경, 그리고, 습관, 소원, 동기 기타를 통어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하는 것을 자유로 행하는 것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느니라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으니」라고 되어 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당부하고 있지만 이 말에 계속해서, 곧 그 이유를 설명해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고 말하고 있다.

 

피조물의 행동은 하나님이 그것을 창조해 주실 때에 특별한 “성질”을 그 위에 각인하므로써 대개의 범위를 결정하신다. 알기 쉽게 말한다면 인간은 말과 같이 네 발로 걷지 아니하고 말과 같이 울부짖지 않게 미리 정하신 것이다. 행동이 외부에서 결정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러나 만일 행동이 내면에서 이성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유다. 하나님의 예정은 바로 이와 같이 활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 관해서 우리들은 이렇게 믿고 있다. 인간의 자유행동을 파괴하는 일 없이, 손상하는 일도 없이, 하나님은 그들 위에 특별한 섭리를 주어 또 성령에 의해서 그들의 내면에 활동하고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와서 또 그리스도를 섬기며 변치 않도록 해 주는 것이다.

 

구원되는 자와 멸망하는 자와의 관계를 잘 나타내는 존슨 박사의 예화를 소개한다. 「여기 2백명의 범죄자가 법을 범하고 투옥되어 있다고 하자, 나는 그들의 용서를 위해서 변호한다. 그 결과로 정의는 만족을 얻고 법률은 지켜지고 더구나 죄수는 자유를 얻는다. 옥문은 열려지고 쇠빛장은 제거되고 사면이 약속되며, 모든 죄수는 자유인으로 출옥하게 된다는 보증이 주어진다. 그러나 하나도 움직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사면을 위해서 나의 변호는 헛일로 끝내지 않게 할려고 결심한다. 그러나 그중의 150명의 범죄인을 하나 하나 찾아보고 열심히 사랑으로써 출옥하도록 설명한다. 이것이 선택이다. 이 사실은 내가 나머지 50명을 옥중에 가두어 버린 것이 될 것인가? 사면을 위한 준비는 여전히 충분하다. 옥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 내어딛고 그것을 얻는다면 각자에게 자유는 약속되어 있다. 옥에 있는 각인의 뜻이 있다면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머지의 50명을 옥중에 가뒀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註 Johnson -Pamphlet-The Love of God tor Every Man)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일치하여 활동한다는 생각은 성경이 쓰여지는 방법을 생각할 때에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성경 기자에게 그들 스스로의 지혜로 그들의 말, 그들 자신의 문장을 쓰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을 쓸 때에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그들을 오류에서 지키고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세세에 걸쳐서 전할려고 하신 바 특별한 진리를 나타내려 하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성경을 단일한 책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그 1부를 떼어내도 그 전체에서 받는 상처는 걷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註 Basis of Christian Father p.162)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이와 같이 통어하시는 게 아니라면 그는 무수한 피조물들에 의해서 가져오는 영향의 결과를 상쇄하는 새 수단의 안출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만일 자유행위자의 행위가 전연 불확정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단지 개략적으로 아는 것 이외로 미래의 사건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새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놀라고 그 지식도 나날이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하나님에 대해서 큰 욕을 가하는 것이 되고 동시에 그것은 불합리하고, 또 비성경적이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스스로 인간의 미래의 행동을 알려고 하시지 않는다는 약한 반박은 성경에서난 이성에서도 지지되지는 못한다. 만일 하나님이 외부적인 힘이건 또 그 자신의 자발적인 행위이건 간에 자신을 제한하신다면 하나님은 유한의 하나님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알미니안주의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은 열심히 죄인의 회개를 위해서 노력하지만, 그 성질을 손상하지 않고는 설득력 이상의 기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옛날의 페루샤인의 세계관에 있어서 선악 이원론―서로 영원토록 싸우는 이원론 사상과 별로 다른 점이 없다. 이와 같은 생각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손에서 그 통치궈을 빼앗고, 그 힘을 강탈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행동자이다. 그런고로 그의 독자적인 행동에는 언제나 충분한 원인이 없어선 안된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는 달갑지 않은 것도 선택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각각의 경우에 다른 여러 가지 동기가 있어서 그에게 영향을 주고, 그에게 선택하게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이(爾)를 뺀다고 하자. 그 사람은 그것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지만 달리 무엇인가의 유인조건이 생겨서 적어도 당장 그의 의향을 강하게 한 까닭이라 할 수가 있다. 실제에 있어서 인간의 결심은 그 자신의 성질로 통어되고 그 사람의 소원, 기질, 기호, 지식, 성격과 조화하는 것이다.

 

인간의 결심이 그 사람의 성격을 근저(根低)로 하지 않고 또 그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결심이 아니며 따라서 거기 대한 책임을 지게 되지도 않는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7:16-17) 나무는 임의로 좋은 열매나 나쁜 열매를 맺게 할 자유가 없다. 그것은 그 나무의 성질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열매가 좋다는 것이 나무의 좋은 것의 원인이 아니며 전혀 그 반대이다. 이와 같이 시론(試論)을 위해서 의지는 자유라고 주장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의지는 인간의 성질의 소산이며 또 나타남이라고 보아진다. 예를 들면 사람이 의지를 활동시켜서 강도나 살인을 했을 경우에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이것은 참 성격이 나타난 것이라 결론짓고, 또 그와 같이 그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다.「결심은 인간의 성질의 참 표현이다」라는 사실이야말로 구원된 자와 멸망될 자의 다음 세상 상태의 항구성의 보증이다.

 

만일 단순한 자유행동력이 필연적으로 인간을 죄로 끌어들인다면 구속 받은 자가 천국에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확실성은 없는 것이 된다. 그리고 타락한 천사와 같이 그들도 지옥에 던져질 가능성이 있게 된다. 그러나 칼빈주의 원리만이 의지(意志)는 사람의 성질과 주어진 유인조건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설명된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결론을 지니고, 「우리들과 너희들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여기서 그쪽으로 건너 갈려해도 건너갈 수가 없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올 수도 없는 것이니라」라고, 있는 것같이 구속된 자와 멸망될 자와의 상태는 한가지로 항구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다.

 

문제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인간이 큰 자유를 가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자랑하는 그 자유를 지금 좀 자세하게 검토하면 최초에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제한된 자유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은 어항을 그 원하는 곳으로 가져갈 수가 있다. 그러나 어항 안의 금붕어는 자유로 헤엄쳐 다니고 스스로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한가지인 것이다.

 

예정과 자유행동은 대전당(大殿堂)의 두 개의 큰 기둥이다. 이것은 인간의 시력이 미치지 못하는 아득한 구름위게 가서 서로 합해 있다. 혹은 또 그것은, 평행선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칼빈주의 자가 그 평행선을 맺지 못할 것이며, 알미니안파도 이것을 교파시킬 수 없을 것이다.

 

3. 예정론과 죄의 책임

 

예정론은 하나님이 죄를 만든 자라는 반박이 있다. 즉, 만일 하나님이 이 세계에 일어나는 일을 모두 예정하신 거라며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죄의 문제는 논리나 이성을 기본으로 해서는 절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비논리적 비이상적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악에 관한 무서운 신비를 취급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성질에 어떠한 약간의 죄도 암시하는 일이 없도록 지극히 조심스럽게 설명하고 있다.「죄의 깊이는 피조물에서만 발생하는 것이며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고 또 가장 바르게 계시고 죄의 작자 혹은 승인자가 아니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5:4)

 

하나님은 그 은밀한 뜻으로 어떻게 해서 인간의 죄많은 행동을 지배하고 통제하시는지는 우리들이 설명할게 못되지만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하신다 해도 자신의 완전한 정의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죄의 부분적인 해석은 인간은 성경에 죄를 범하지 말라고 명하셨지만,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죄를 선택한다면 그것을 범하는 것도 용납된다는 사실로 발견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허가가 아니다. 즉 인간의 성질과 죄를 범하는 경향에 대해서 완전한 지식을 가지시는 하나님이 어떤 죄를 범하는가 깡그리 폭로가 되어 그 사람을 그 환경에 놓아두신 것이다.많은 사람들인 이 점을 잘못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은 인간이 악을 행하는데 바른 의지를 나타내신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숨겨진 섭리적 지배에 의해서 사악한 인간의 마음에 지도적 감화를 주어서 그들이 의도한 악보다 선을 결과로 주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죄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은 안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해서 이간의 부패한 성정을 통어하신다고 말하나, 그들은 그의 죄로 처벌되며 또 그들 자신의 양심에 허물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성경전체를 통해서 죄있는 행위가 허용되고 그리고 그것을 통제하여 선을 향한 막대한 실례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면 야곱이 눈 먼 늙은 아버지를 속인 것은, 그것 자체가 죄의 행위였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용납되었고 형이 아우를 섬긴다는 하나님이 이미 계시한 계획 수행의 말하자면 쇠줄의 하나의 고리로서 쓰여진 것이었다. 또 이스라엘 위에 선언한 발람의 저주는 축복이 되었다.(민24:10) 나사로의 죽음은 마르다, 마리아 그 밖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의 인간적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큰 불행이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것이었다.(요11:4)

 

하나님은 이따금 일시적으로 사람을 악마에게 내어 주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육체적 또는 정신적 고통이 오히려 그의 구원이 되기 때문이다.(고전5:5) 바울이 받은 고난은 그가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될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1:12)라고 말한 것 같이 그것이 유익이 된 것이었다. 이 일반적 진리는 칼빈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빛, 어둠에서 나오라고 과거에 말씀하신 하나님은 만일 그 뜻이 있으시면 지옥 자체에서 구원을 가져오고, 어두움 그 자체를 빛으로 고칠 수도 있다」라고, 또 차알스 호지(C.Hodge)박사는 「초대 교회를 박해한 사악한 행동은, 복음을 보다 빠르게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정한 바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많은 속성은 세계의 창조와 이치에 의해서 나타났지만 그러나 정의의 속성은 형벌에 해당되는 피조물에만 나타나고 또 긍휼이나 혹은 은혜의 속성은 불행 중에 어떤 피조물에만 보여준다. 우리들이 배운 한계에서는 인간의 타락한 죄와 거기서 구속이 이르기까지 이러한 속성은 활동시키지 않고, 또 뚜렷하게 보여주지도 아니하고 따라서 영원부터 하나님 자신 이외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만일 피조계(被造界)에 죄가 들어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속성은 영원토록 나타나지 않은대로 넘어갔을 것이다. 이러한 속성의 지식을 갖지 않는다면 세계는 마치 태양빛을 갖지 못한 지구와 같다. 그러므로 죄는 죄의 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고 죄의 형벌에 있어서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나기 위해서 용납되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과 아담에게 시작되는 인류의 타락도 결코 우연이나 갑자기 생겨난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이 숨겨두신 또 안에서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알려지고 있었지만」세상의 죄를 위해서 그 희생으로 오신 것이었다.(벧전1:20 참조) 바울은 죄의 구속이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말했다.(엡3:11)

 

속죄의 계획이 이와 같이 영원한 옛날 창세 이전까지 소급해 간다고 하면 인간을 구속해 낼 죄에 빠지는 것을 용납하는 계획도 영원한 옛날까지 소급해 갈 수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구속의 기회는 없는 것이 된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구속은 영원한 옛날부터 하나님의 자유로 은혜 같은 계획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타락한 폐허에서 최초의 창조보다도 더욱 영광스러운 영적 창조의 사업을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알미니안파는 하나님을 아담이 타락하는 동안에 의심하며 방황하고 그 사실을 방관하고 있던 태만한 방관자이며, 자기 손으로 만든 피조물인 인간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방해를 받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우리들은 하나님이 타락을 미리 알고 대비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 어떤 의미에 있어서나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을 본 후에도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을 억지로 타락시킨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단지 아담이 확실히 타락하지 않는다는 구속적 은혜는 주지 않았다는 정도다. 이 은혜를 받고 있었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이 선택했다면 그는 거기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해서 생각해 본다면 아담의 타락은 확정적이었다. 아담은 성약이 없었던 것처럼 자유로 행동했지만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었던 것같이 불가피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 자유행위란 점에 관하 그리스도의 뼈를 꺾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할 수가 없었다.

 

성경에는「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34:20)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약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신다. 아담은 타락에 있어서 그의 의지의 자연적 감정을 자유로 활동시킨 것이다. 타락의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롬11:32)라고 말한대로 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람이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타락을 용납하고 이것을 제어하기 위해서 그의 은혜의 축복,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행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타락의 본질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을 거싱다. 아담은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는데 가장 좋은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 자신과 그의 자손들도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는 낙원에서 많은 아름다운 것에 에워쌓여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오직 하나의 나무 열매를 제외하고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 허락되어 있었다. 그에게 속박이라 생각되는 결코 없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에덴동산에 내려가서 아담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틀림 없이 분명한 말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을 때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 나무의 열매는 그가 하나님께 복종하느냐 않느냐의 순수한 시험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자체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나무의 열매 자체에 죄의 힘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하나님께 복종을 계속하는 한 그는 이성적인 피조물로 다른 많은 것들의 보호자 또는 부모로서 언제나 변함 없이 동산에서 평화로운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그 많은 유리한 조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숙고(熟考)한 나머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드디어 죽음이란 결정적인 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육체의 소멸이상의 사실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본래 시간적이었고 영원적인 쌍방의미에서 영적인 죽음, 또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 모든 방면으로부터 하나님의 돌보심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담과 그 자손에 떨어진 죽음의 본질은 구속된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갖는 생명과의 대비에서 볼 수 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이 이 세상의 무슨 소리도 들을 수가 없는 것 같이 그는 그리스도 신앙에 의한 구원을 전연 감지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타락된 상태에서 사람은 어떠한 초자연적 현상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아담은 그 타락 때문에 전면적으로 또 절대적으로 파멸되었다. 우리들은 아담에 의해서 저주를 받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물론 아담의 죄에 관해서 개인적으로 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인간사에 있어서 실제로 이렇게 통괄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성약은 절대적이고 포괄적(包括的)이다. 따라서 민족도 개인도 모두 그들의 몸에 생기는 모든 선이나 악에 예정지워져 있는 사실을 우리들은 믿는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의 모든 일들의 전과정을 예정하시고, 그리고 그 과정을 선으로 결정하셨지만, 그 과정이 선의 범위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우리들은 환란 날에 반드시 서지 못할 것이다.

 

성경이 교리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죄를 어느 한도내에 억제해 두고 그 뜻하는 바 악으로부터 선을 가져오며, 또 그 악까지도 영광을 위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만일 또 죄가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과 그 허락아래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연한 때에 생기는 것이라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악이란 독립되어 제어할 수 없는 원리가 되고, 그리고 이교적 이원론적인 우주관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자유행동력의 성질 그 자체 안에 죄 반역 암흑의 힘이 있어서 그러한 힘이 하나님의 전능성을 능가한다는 교리가 있지만 그것은 영광 중에 있는 성도의 안전과 행복까지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죄를 생기게 하는 실제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은 여러 번 하나님이 완전하고 주권을 가진 지배자 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하며 세계의 현재 과정은 하나님이 영원부터 그 일어나야 할 것을 계획한 것이라고 증명하고 있다.

 

악마의 사업조차도 하나님의 목적에 이바지가 되도록 지배하고 제한한다. 첫재로 악한 자가 고통을 받게 되도록 정한 것은 하나님이다. 사탄은 단지 그 허락아래 그들 위에 벌을 내리는데 불과하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 같이 하나님은 선의(善意)를 가지고 있고 사탄은 악의(惡意)를 가지고 있다. 세상의 죄로부터 구원을 위해서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바로 그에 적중한 예가 될 것이다.

 

4. 예정론과 인간의 노력

 

예정론은 인간의 노력의 전반적인 동기를 저해한다는 반론이 있다. 이와 같은 반론은 목적과 수단에 관계 없이 정해져 있다는 그릇된 사고에 입각되어 있는 것이다. 예정이란 다만 단지 여기 저기에 고립되어 있는 약간의 일만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고 전사상(全事象)이 전체적으로 연결 되어 있고 내적 관계로 관련되면서 예정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구원되는 것을 예정하신다면 하나님은 그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는 것까지도 정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 뜻대로 행하신다」는 서술과 같이 하나님의 섭리적 지배가 널리 자기들의 생애의 모든 일에 걸쳐 있다는 진술을 받아들이는 자까지도 그것이 자기들의 자유와 조금도 저촉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대론자는 하나님이 사람들의 세속적인 일에 대한 행위보다도 그 주권 안에 결정하신다는 것을 믿을 것인가 하나님이 그들의 죽음의 때와 그 상태를 정하신다 해서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거역하고, 병났을 때에 약을 거절하겠는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 때에 알미니안파라 해도, 그가 곡해한 예정의 교리가 논지적으로 난문제인 것을 잊어버리고 당장 감사하고 그의 회심을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에 의한 것으로 인정한다. 이 은혜 없이 단지 그의 의지나 그 자신의 업으로는 결코 새 사람이 되진 못하는 까닭이다. 그는 하나님의 예지와 완전성을 분리 못할만큼 하나님의 영원의 목적인 지혜와 연결된 것으로 보고 있느 것이다.

 

본래의 사건은 우리들에게 숨겨져 있고, 미지(未知)의 것인 까닭에 거기 관해서 전혀 결정된 것이 없는 것같이 우리들은 자기들의 사업에 힘을 쓰고 열심히 우리들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에게는 미래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결과에 있어서는 확실하다. 그런고로 전도서에,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11:6)라고 되어 있는 것 같이 우리들은 이 이유―미래가 우리들에게 확실하지 못한 것 같이 한층 더 활동할 것을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설교를 듣고 돌아가는 도중에 안전한 길을 가지않고 일부러 위험한 길을 지나며 마차를 파괴한 한 농부가 그 여행이 끝나기 전에 「하여튼간에, 나는 바보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소명과 나의 선택을 성취된 것으로 확인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떤 사람은 만일 창조력 이외의 무엇이든지 우리들을 회개시키고 믿게 하지 못한단면 우리들은 그 힘이 올 때까지 다만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고 말할는지 모르나 우리들은 다만 적당한 방법을 다해서, 그리고 다른 행동력의 협력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명상하는 사람은 실은 성령에 의해서 갱신된 자이다. 그런고로 죄인이 스스로 자기를 구할 수가 없다는 말은 적어도 하나님이 결정한 길에 그의 구원을 찾고 구하는 것을 태만하여서는 안된다. 인간은 타락되고 파괴된 무능한 피조물이다. 이 사실을 알기까지에는 희망이 없고, 한나님이 없이 세상에 살고 있는 자이다.

 

이러한 진리의 실제의 경향은 노력을 배가하도록 힘을 내게 하는 것이다. 이성도 경험과 함께 그의 성공의 희망이 크면 클수록 노력하는 동기가 강대해질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확고한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된 수단에 순종하고 경건하게 이용하는 자가 축복을 받는다는 약속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노력에 대한 최고의 가능한 동기를 갖는 것이다. 아직 한 번도 사도 바울 이상으로 명백하고 강력히 예정의 교리를 나타낸 자가 있을까? 그리고 또 진실로 바울 이상으로 그 활동에 있어서 열심 또는 백절 불굴의 사람이 있었을까? 그의 신학―그 선택의 교리―는 그를 전도자로, 그리스도를 절대적인 그리고 승리의 종교로 세상에 나타낸 것이다. 각 시대의 교회의 경험은 이 교리가 결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무시 둔중(鈍重)한 무관심,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인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복종과 하나님의 힘의 확실한 신뢰로 이끈 것이었다. 하나님의 힘의 확실한 신뢰로 이끈 것이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의 자손은 큰 민족이 된다고 약속해 주셨다. 그러나 에서가 그와 그의 가족을 죽인다고 생각했을 때 필요한 수단을 써서 자기를 지킬려고 하는데는 조금도 방해하지 않았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거기거 증거하라고 지시를 받았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조금도 목숨을 함부로 한 일은 없었다. 그는 예루살렘의 폭민에 대한 부당한 박해에 대해서도 자기의 몸을 지킬려는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행23:11;23:10,11:27:9,10) 배에 있는 자를 전부 구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한 바였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작정은 뱃사람들의 자유롭고 용감하게 단련된 활동에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이 교리의 실제적 결과는 사람들을 이끌어 그들이 끊임 없이 열심으로 기도 드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것을 알게 하고, 그들의 생활의 모든일이 하나님의 조치라는 사실을 아는 일이었다.

 

5. 예정론과 하나님의 공평

 

예정론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편견(偏見)이 있다는 것, 불공평한 사랑을 하는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모든 인간이 죄로 죽고 자신의 힘으로 영적인 생명을 회복할 수 없다고 한다면 왜 하나님은 그 전능의 힘을 움직여서 어떤 자는 갱신시키고, 그리고 다른 자는 멸망가운데 남겨두느냐고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 반칼진주의적 제 체계는 아무런 회답도 주지 않는다. 칼빈주의 자도 이것이 난문제(難問題)인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칼빈주의 체계에만 특유한 문제가 아닌 것을 주장하고, 그리고 그들은 성경에 주어진 부분적 해결로서 만족하고 있다. 성경은 사람을 거룩하게 창조했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범했기 때문에 죄에 빠졌다. 그리고 그 타락한 결과로 아담의 자손은 세상에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 태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보다 깊은 죄에 밀어넣지는 않는다. 그 뿐 아니라 이성 있는 피조물이 진실한 회개와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구하도록 감화한다. 즉 모든 성의를 가지고 회개하고 그 은혜를 구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전능의 힘의 실행에 의해서 본래 그 죄의 상태를 계속하게 될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사람에게 편견을 갖는다는 것은 심판자로서 행동하며 그 앞에 서는 자를 그들의 성격에 따라 취급하지 않고, 어떤 자에게는 정당하게 그들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을 젖혀놓고 또 다른 자에게는 당연히 그들의 것이 아닌 정의와 법률에 의하지 않고 편견과 악의에 의해서 지배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런 의미에서 사람을 편견(偏見)하는 자라는 의견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만일 예정론이 하나님을 이와 같은 자로 나타낸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불의한 하나님이라 비난하는 것이 된다고 인정할 수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과 사이에 구별을 두지 않으며 편견을 갖지 않는다고 베드로는 말했다. 유대인은 그 전 역사를 통해서 자기들이 단일 민족으로 독점적이 하나님의 돌보심의 대상이라고 믿고 있었다. 에베소서 6장5-9절에는 노예와 주인은 서로 바르게 지내야 된다. 그들의 주되신 하나님은 사람에게 편견이 없으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야곱은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부한 자의 사이에 구별을 두지 않으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와 더러운 옷을 입은 자를 차별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야고보서2:1-9 참조) 이상의 모든 장절에 있는 「사람」이란 내면의 사람이 아니고 영혼도 아니며 곧잘 우리들에게 영향을 주는 외모의 사람이다. 그런고로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편견이 있다」고 말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과 한 가지로 취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계서 이 사람은 구하고, 저 사람은 버린다는 이유란, 이 사람이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 또는 부하고 가난하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세계통치는 모든 인간에게 동일 또는, 평등한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칼빈주의 자는 경험에 입각한 현재의 생활에서 인간은 내부의 성질에 있어서나 외부의 환경에 있어서 어느편이나 불평등한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어떤 아이는 건강과 고귀와 보다 부유한 좋은 조건하에 태어나서 좋은 가정과 부부에 의해서 어릴 때부터 주의 훈도와 훈계 아래 양육된다. 성경에 있는 모든 진리를 배울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아이들은 병약하고, 하층계급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며, 또 기독교를 거역하고 조소하고 경멸하는 방탕자의 타락한 양친―아이들이 복음의 감화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양친밑에서 길러진다. 하나님은 이 신비한 섭리 아래 사람을 대단히 다른 영향아래에 둔다. 그리고 그 결과도 아주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은 물론 그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러한 다른 결과를 예정한다. 이러한 것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고 또 묘하게 둘러 댈 수도 없는 사실이다.

 

칼빈주의 자는 다만 하나님은 그 구원의 은혜를 주는데 있어서도 다른 사람의 돌보심을 베풀 때와 같이 실시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만일 영적 선물의 분여(分與)에 있어서 기울어지는 것이 하나님계 부정(不正)이 된다면 지상적인 은사의 분여에 있어서 기울어진 것도 마찬가지로 부정이 될 것이다. 유대인은 약소하고 순종하지 않는 민족이지만 하나님은 세계의 어떠한 민족에게도 주지 않은 은혜를 주었다. 마태복음11:25, 26에 주 예수께서,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신 것을 우리들은 읽는다. 이러한 말로 예수님은 알미니안파가 부정(不正)이라 떠들고 불공평하다고 비방하는 그 일을 하늘의 아버지에게 감사하시는 것이다.

 

사실은 이 타락된 인류중에 어느 누구도 조물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수에 맞지 않는 대접을 받는 자는 없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외부의 초청은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 대답한다.「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이야말로 구원의 기회다. 그리고 그가 믿는 일에 방해되는 것은 그 자신의 성질 이외 다른 것이 없는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난용한 후에 하나님이 그에게 특별한 은총―갱신의 은혜를 주시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을 불평하는 것은 거룩하고 영원한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이여, 당신은 과거에 나를 회심킬려고 힘쓰셨지만, 지금 다시 시험을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알미니안파도 그리스도는 타락한 천사나 악마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위해서 죽으신 것을 인정한다. 이것은 알미니안파가 제한된 속죄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칼빈주의 자가 그리스도는 선택된 자를 위해서만 죽으셨다고 논하는 것과 원리적으로는 같은 구별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왜 하나라도 어떤 자가 영원한 멸망에 빠지는 것을 용납하느냐는 것은 하나님이 왜 다른 자가 아니고, 이 사람을 구원하는가 하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는 이해하기 곤란하다. 하나님이 어떤 자를 처벌한다면 모든 사람을 처벌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논리상 가능하지만, 그러나 아무도 그와 같은 극단의 주장은 아니한다. 구원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불공평하게 행하신다고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이렇게 이의를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이 단순한 피조물로써 인간을 다루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을 요구하는 모든 권리를 잃어버린 죄 있는 피조물로 대하신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죄의 처벌은 부채, 정의, 응보의 문제로 사악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구출된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무상 부당한 은혜다. 그런고로 그 정죄단 죄인이 그 형벌에 해당이 안된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며, 또 성도가 그 보상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큰 소리를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또한 주는 자비심이 많으므로 원하는 자에게 은혜를 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의의 심판자이기 때문에 모든 자에게 주지 않으실 때도 있고, 어떤 자에게는 거기 상당한 이상의 것을 주어서 그 자유로운 은혜를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자에게 그것을 주지 않고 모든 자의 죄를 선언하시는 것이다.

 

반대자들이 보통 사용하는 의밀의「불공평」이란 은혜의 분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들은 때로 이 거지에겐 주고 다른 거지에게는 안 줄 때도 있다. 그것이 우리들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포도밭 노동자의 비유의 중심적 교훈은 하나님은 그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데 있어서 전연 주권적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구원된 자에게도 「나는 너희들에게 아무 것도 부당한 일을 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질문할는지도 모른다. 이 갱신된 인간, 죄 안에 남아 있는 선택되지 못한 인간 영원의 형벌에 복역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는 인간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라고 여기 대해서 우리들은 「원죄의 교리로 돌아가라」라고 대답한다. 아담에게 있어서 즉, 인류의 대표자, 그의 모든 자손의 대표자로서의 아담에게 인류는 구원의 은혜의 기회를 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슬프게도 그는 이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고로 멸망되는 자 중에 누구하나 부당하게 처벌되는 자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들이 영원히 불행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고통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정당한 형벌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은 불공평 하다. 우리들이 어떤 자에게 사랑을 받는다해서 우리들이 모든 자에게 그것과 한 가지 사랑을 평등하게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까닭은 없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예정론은, 하나님은 불공평하다는 반론에 대해서 우리들은 확실히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무정하고 불공평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6. 예정론과 도덕

 

예정론은 좋은 도덕을 손상한다는 반론이 있다. 예정론은 사람들이 자기는 이미 영원한 행복을 확보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그 도덕행위와 은혜 안에서 성장에 관한 부주의와 무관심하게 된다고 이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 논박은 본래 선택과 성도를 지키는 은혜의 교리에 대해서 주로 말할 수 있는 주장이다.

 

만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밭에 옥수수의 수확을 미리 예정하신단면 한 가지로 그 사람의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기르고 그 밖에 옥수수의 수확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하도록 예정하시는 것이다. 선택 예정된다는 것은 제 멋대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 영원한 생명에 예정되는 것은 거룩하고 유덕한 사람으로서인 것이다. 바울이 알기 쉬운 말로 선택의 참 목적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라고 가르치고 있는 그대로인 것이다. 또 우리들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롬8:29)는 것이다. 그리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행13:48)는 것이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목숨을 15년 연장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 건강을 함부로 하지 않고 그 식사에도 조심을 했다. 그는 「나는 비록 불에 뛰어들거나 물속에 들어가거나 독을 마셔도 괜찮다. 나는 틀림 없이 오래 살 것이기 때문이다」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성경은 거룩에 있어서 지켜주시는 지키심 이외는 알 바가 없다. 또 성경은 현재의 나날이 늘어나는 거룩과 무관계한 안전감 같은 데는 아무런 고무도 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원한 세계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위한 안전한 행복을 작정하고 이 세상에서 이 행복의 일부를 작정하고 계신다.

 

인간을 움직이는 큰 두 동기는 확신과 이념, 그리고 감정과 정서다. 이러한 어느 것이 지배하는가에 의해서 도덕적 성경은 형성되는 것이다. 확신과 이념에 의해서 통어되는 사람은 견고하다. 감정과 정서에 의해서 통어되는 인간은 박약하다. 알미니안파는 종교적으로는 감정의 사람이며 정서의 사람이다. 모두 눈을 좋게 하고 귀를 즐겁헤 하는 곳으로 기울어진다. 이와 반대로 칼빈주의는 정서보다 이념에 감정보다 양심에 호소한다. 이것은 영혼에 말을 하는 하나님의 소리를 모든 행위의 인도로 한다. 칼빈주의 자의 첫째이며 또 최후의 질문은,「그것은 바른가 어떤가」이다. 그는 먼저 그것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실제적인 문제는「양심」이 첫째로 문제되는 것이다.

 

칼빈주의 자는 종교적인 감정에 호소할려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견고함과 힘에 의해서 특징 지워지고 때로는 완고, 준열에 지나칠 때가 있다. 만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의 좋은 행위에 의한다고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사랑은 미온적인 사랑을 넘어서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수고와 죽음에 의해서만 구원된다는 것을 감사로 가득차고 바울과 같이 조금이라도 그리스도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그 전 생애를 바치는 일밖에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기적인 공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감사야말로 하나님에게 용납되는 순종의 연료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과 감사야말로 높고 순수한 도덕이 흘러나오는 유일한 요소다. 그런고로 선택된 자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최극한의 이유를 갖는 것이다. 예정론에서는 방종에 기울어지지만 좋은 도덕을 손상한다는 것은 전혀 중상이다.

 

칼빈주의는 예정론이 좋은 도덕을 해친다는 비난에 대해서 이론으로 반박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거짓된 주장에 반대되는 전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답변하겠다. 루터‧칼빈‧쯔윙글리, 그리고 그들의 직접적인 협력자들은 모두가 철저한 칼빈주의 자였다. 그리고 어느 세대에도 그 가장 큰 영적인 부흥은 그들의 영향아래 일어났던 것이다. 영국에 있어서 청교도, 스콧트랜드에 있어서 카베난타(Covenanters) 프란스의 유그노 등은, 같은 신앙과 같은 도덕적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었따. 마크페트릿지(Mcfetridge)는 청교도에 관해서 「미국에 있어서 그들 뉸잉그랜드의 칼빈주의 자, 즉, 청교도―는 도덕적으로 비길 데 없는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들의 종교는 진실로 그들의 생활이었다. 그들의 사상과 생활에는 모두가 그 신앙에 녹아 있었다. 그들은 근면, 검소, 진취적이고 결과는 부유해지고, 그리고 그들의 자식 또 자손엑까지 전해진 것이었다」고 말했다.

 

헨리, 웓, 비쳐(Henry, Ward, Beecher)는 「도덕적 탁월과 품성의 순결과의 이념을 극도까지 강화하는 점에 있어서 칼빈주의를 따른 체계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칼빈주의는 사람을 부도덕과 절망에 이끄는 체계가 아니라 일상생활에 있어서 전연 그 정 반대의 걸음을 계속해 온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이 퍼져간 곳에는 어느 곳이나―화란이건, 스콧트랜드건, 미국이건 가난한 나라들을 장미가 피는 동산과 같이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 사실은 마코레(Macaulay)와 그 밖의 다른 많은 학자들도 인정한 것이며 지극히 위안을 주는 사상이다.

 

7. 예정론과 복음전도

 

예정론은 복음 전도의 성질을 가로막는다는 논이 있다. 복음은 이것을 원치 않는 자, 또는 극단적인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자에 대해서도 제공된다. 더구나 그것은 지극히 성실하게 제공되는 것이다. 알미니안파는 복음을 믿고 받는 자도 이것을 거역하는 자도 하나님은 예지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또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행동에 있어서 설실하지 않다고는 생각하질 않는 것이다. 우리들은 앞으로 올 모든 것을 위해서 넉넉하게 마련이 있을 것과 또 성실하게 받아들이는 바 모든 자의 구원될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입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예화로서 말씀하신 비유를 알고 있다. 아버지는 그 방탕한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아직 먼 곳에 있는데도 뛰어가서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하나님은 이 방탕한 아들을 환영함과 같이 어떠한 탕자도 기쁨으로 환영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아놓고 바로 왕에게로 가서 삼일간의 여행을 하고 광야에 가서 제사를 드림과 하나님께 희생 드리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도록 명하셨다. 더구나 그 다음 구절에 하나님 스스로 「그러나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너희가 가는 것을 애굽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다가」(출3:19) 거절당할 거라 알고 있는 초대라도 성실하게 못할 것은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좋은 믿음으로 공물을 바디는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강제적으로 사람들에게 하게 하는 힘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슬기 있는 이유에서 결코 그들의 동의를 강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어느 사람의 가족이 다른 많은 자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가족에게 대한 사랑에서 그들의 몸값을 지불했다.

 

그러나 그 몸값은 그러한 포로의 전부를 석방하는데 충분한 액수였다. 그러면 그것은 특히 일부의 포로들만을 위해서 의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몸값 때문에 전원의 석방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이 전체적으로 인류에게 주어질 때에 그것을 받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을 막는 사람은 사람들 측에서 그것을 받기를 거역하는 죄에 불과한 것이며, 어떻게 막고, 어떻게 넘어짐의 돌로 그들의 길에 놓여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알미니안파는 반대하여 하나님은 그의 숨겨진 목적 안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결정된 자에게는 복음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이 바로 이일을 하실 것을 분명하게 성경 안에서도 발견하는 것이다. 바로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마찬가지지만 에스겔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집에 가서 말하도록 파견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듣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다.(겔3:4-11) 선택의 결정은 비밀이다.

 

따라서 설교자가 선택된 자에게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택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경에는 명백히 모든 자에게 그것을 제공하도록 명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깊은 독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부름이란 전반적인 사실은 아니다. 즉,「목마른 자」「굶주린 자「바라는 자」「지친 사람」「무거운 짐을 진 사람」에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어떤 필요도 의식하지 않는 회심을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청중 가운데 누가 선택되었으며 누가 선택되지 않았는지 설교자에게는 감춰져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누가 구원에 이르도록 알아 들었는지, 혹은 누가 심판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알 수가 없다. 설교의 효과는 설교자의 손에는 없다.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설교자의 자유로는 안된다. 그래서 실패라 생각되는 설교가 성령의 힘으로 효과적이 되어 힘을 발휘하는 일이 사실은 곧잘 경험하는 바이다.

 

최후에 선택되지 않는 자에게도 설교를 하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그 까닭은 이와 같이 그들은 제 멋대로 범할 죄에서 그들을 억제하고 또 지도하는 감화력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8. 예정론과 만인 구제설

 

예정론은 성경의 만인 구제 장절(章節)과 모순된다는 반발이 있다. 이러한 반대자는 그리스도는「모든 사람」또는,「전 세계」를 위해서 죽으시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확실히 디모데전서 3 : 4절에서 바울은「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많은 사람의 구원을 바란다 해도 그것을 작정하신 것은 아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작정하고 또는, 명령적으로 바란다 해도 그것을 작정한 것은 아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작정하고 또는 명령적으로 의도한다고 가르치는 장절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지배하는 것 또, 어떤 자는 형벌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나타내는 성경의 다른 부분과 모순된다.「바람=Will」이란 말은 성경에 있어서도 또 우리들의 일상의 대화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쓰여진다. 어느 때, 그것은「명령」 또는,「목적」의 의미로 TM여지고, 어떤 때에는「욕구」 또는,「소원」의 의미로도 쓰여진다. 바란 재판관은 사람이 옥에 들어가거나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즉,「욕구」 그러나 동시에 또, 그는 죄 있는 자가 바르게 처벌되기를 바란다. 즉,「선언, 판결」 한 가지 의미로 상당한 이유아래 사람은 그 수족을 절단한다든지 혹은 눈알을 후벼내기를 바란다. 혹은 결심한다고는 하지만 그는 그것을 절대로 바라지는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모든」이란 말도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깡그리 개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온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막1 : 5) 고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 또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켜 세워주었을 때에「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더라」 (행 4:21)는 경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눅 21:17)라고 예언하였을 경우, 결코 문자 그대로의 모든 개인을 말한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선언했을 때 분명하게 전 인류를 의미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역사는 결코 인류의 모두가 그가 있는 곳에 오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분명히 복음과 참 하나님에 관하여 무시한 가운데서 죽은 자를 하나님 나라에 허락지 않는다. 그의 모든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전 세계 각국과 각 계급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15:22절은 아마 알미니안파가 칼빈주의를 공격할 때에 가장 빈번하게 인용하는 구절인 것이다. 그것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산 것임이라」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연 합당하지 않다. 이 구절은 바울의 유명한 부활장의 인용이며, 그는 여기서 이 세상의 생명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생명도 영적 생명도 아니며 진실로 부활의 생명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바울이「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생명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과거의 일이 아니고 또 현재의 일도 아니며 미래에 관한 일이다. 그런고로 이것은 알미니안파와 칼빈주의와의 논쟁에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모두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의미는, 구속된 자가 어린 양의 보좌 앞에서 부르는 노래(계 5:9), 즉,「…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에 의해서 보다 한층 분명하게 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는「모든」이란 말이 복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방인의 구원이란 전 시대에는 알려져 있지 않던 신비였다.「하나님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이방인이게도 주셨다」고 되어 있다 (행 11:18, 엡 3:4-6).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에 대하여는「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한 1서 2:2)로 되어 있다. 또 그는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요12:47)라고 말씀하셨다. 그 의미는 다만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한 가지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업 중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에 관한 말씀은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고 (요 1:7)하였다. 요한의 사명은 전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기회를 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요한은 이방인에게는 전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로「세상」이란 말은 다만 세계의 대부분을 말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악마는「전 세계를 속이는 자」이며「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제 13:3)로 되어 있다. 요한이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요한 1서 5:19)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한가지며, 그가 말할려고 하는 것도 만일 전 인류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가 편지를 보낸 자들 역시 악마아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요한은 하나님께있는 자에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전 세계가 문자 그대로 악에 속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자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들은 보통 실업계나 교육계 혹은 정치 사회등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실업가 또는 교육가 정치가 라는 의미가 아니다. 예를 들면 어떤 자동차 제작업자가 「모든 사람에게 자동차를 판다는 경우, 그것은 실제로 각 개인에게 판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값을 지불하고 살려는 사람들에게 파는 것이다.

 

어떤 책의 저자는「하나님은 바로를 사랑하셨는가(롬9:17)? 하나님은 아말렉인을 사랑하셨던가(출17:14)? 또 가나안인을 사랑하셨던가?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지 않고 땅에서 제거하기를 명했던 것은 아닌가 (신20:16)? 또 하나님은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을 사랑하셨던가? 하나님은 그들을 영원토록 그의 주의 회중에 받아들여선 안된다고 명하지 않았던가 ( 신 23:3)?라고, 그리고 또 하나님은 사악한 자를 미워하시지 않았던가 (시 5:5)? 또 그는 「멸망되어 마땅한 진노의 그릇」(롬 9:22)을 사랑하는가? 그는 에서를 사랑하셨는가(롬 9:13)?라고 질문하고 있다.

 

선지자는,「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라고 부르고 있다.(사 55:1) 이것도 위에 말한 견해와 모순이 없다. 인류의 대다수는 목마른 자가 아니고 죽은 자이다. 죄에 죽은 자 소망이 없는 자이며, 의를 갈망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악마의 종이 된 자이다. 생명에 예정된 자에게 그 뜻을 주고 소원을 자극하는 것은 하나님이다(롬 11:7, 8, 9:18). 크라크(clark)박사는, 알미니안파는「모든 욕망하는 자는 오라」혹은,「모든 믿는 자는 구원된다」라는 언명에 대하여 믿고 결심하는 것은 전혀 인간의 행위인 것 같이 또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상쇄(相殺)하는 것으로 인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명은 결코 의논의 요점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즉, 사람은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바라는 자가 되는가에 있다. 만일 그들이 요구한다면 그들은 분명히 결심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반역하는 깊은 죄의 성질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영,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에 의해서만 욕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만일 디모데전서 2:4절에 있는,「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도 알미니안적으로 해석 한다면, 하나님은 그 소원을 달성할 수가 없어 실망하든가 또는 예외없이 모든 인간이 구원되는가 하는 그 어느편이어야만 된다. 이미 제한적 속죄의 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것은 시대 또는 나라,성격 또는 환경 등 일체의 것에 대해서는 타락하고 그리고 집합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 되었다. 그의 사업은 전 인류에게 지상적이고, 또 물질적 축복을 가져오며 또 그것을 듣는 모든 자에게 복음을 제공하기 위해 기초를 세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수미일관 모순이 없는 것이다. 만일 그 자체가 두 개의 해석이 가능한 장절을 발견하고, 그리고 그 해석의 하나가 성경의 다른 부분에 조화된다고 해도 다른 하나가 조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그 전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의무이다.

 

제 4 장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

 

1. 은혜의 계약

 

죄많은 인간의 구원이 순수하게 은혜로 말미암은 것은 성경이 증명하는 것이다. 아담의 죄가 돌아 온다―즉, 우리들이 아담에 의해서 죄인이 되었다는 대표적인 원리에 의해서 우리들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돌아가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들은 두 계약의 다른 것을 명확히 기억해야 한다. 한 가지는 아담이 그 아래 있게 된 인류의 죄로 타락에 이르게 한 행위의 계약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가 그 아래 구속자로서 보내심을 받은 은혜의 계약이다. 「은혜」란 말은 그 고유의 의미에 있어서 무가치한 자였던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로 부당한 사랑 혹은 호의를 의미한다. 인간이 선을 가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리고 갖지 않았다면 그것은 물론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이고 도덕적으로 완전한 하나님은 그 지적인 창조물에 대해서 거짓없는 순결과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 이 완전은 그들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때묻지 않은 의를 주었다. 하나님은 구속된 자를 보실 때에 그리스도의 의(義)의 결백한 옷을 입은 자들을 보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행하는 인간의 좋은 행위가 영원한 생명의 축복에 상당하는 것 같이 상상을 아무리 다한다 해도 그것은 적중되지 않는다. 우리들은 실제로 다만 받는 자 이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으며 그리고 영원히 그와 같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구속, 또는 속죄를 자신의 비용으로 마련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소유이며, 그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누가 구원되는가를 그 절대적 주권 안에서 선택하시는 것이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하는 일체의 독선적인 생각을 제거해 버린다. 이 교리는 구원된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만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는 것을 영원토록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연히 자기들이 구원을 얻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점에 어떤 용의가 있는 사상체계는 쉽게 그들을 끌어 당기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 같은 추리에 도끼질을 가해서「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 3:21)고 말하고 있다. 예수도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눅 17: 10)

 

우리들의 의에 관해서는 이사야가 말한 것 같이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다만 더러운 옷과 같은 것이다. (사 64:6). 구원은 성경에 분명히 가르친 것 같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일면 그것이 실제적이든 예견된 것이든 간에 어떠한 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을 사랑하신다면 우리들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그 자신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부당한 은혜는 우리들의 공적의 행위에 선택된다. 사도의 활동에서 우리들은 신앙의 발단 그 자체가 은혜에 의한 것을 아는 것이며,(행 18:27) 영원의 생명으로 작정된 자만이 믿는 것이다(행 13:48).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열고, 복음에 마음을 기대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대권(大權)이다(행 16:14). 바울은 구원을 자기들의 공적에 근거를 둘려고 하는 자에게 관해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롬 10:3)고 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자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轉嫁)된다고 가르치느 장절(章節)을 보며, 그 후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된다고 가르치는 장절에 주의하자.「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로 우리들을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에게 전가되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 22).「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난 의라」(빌 3 : 8, 9).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서, 대단히 고심하고 있다. 만일 그것이 우리들의 행위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은혜는 아닌 것이다. (롬 11 : 6 참조)

 

현재의 상태에 있어서는 세계 인류의 전체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취급하고, 그리고 구원의 기회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른 심판자 앞에 죄의 심판을 기다리는 죄인의 상태가 해도 좋을 것이다. 더구나 인간에게는 구원을 요구하는 자격은 전연 없는 것이다. 성경은 반복해서 구원이 은혜에 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마치 사람은 그들 자신의 활동에 의해서는 구원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곤란을 예상하는 것 같이 가르치고 있다. 은혜와 행위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다. 구원에 있어서 은혜와 행위를 하나로 하려는 것은 지구의 양극을 합하게 할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조건적 은혜」란「사들인 은사」라 말하는 것과 같다. 은혜라 말하는 것이 절대성을 잃었다면 이미 은혜는 아닌 것이다.

 

2. 선택된 자의 확증

 

모든 그리스도 신자는 그들이 영원한 생명에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알아야만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은사다. 그리스도의 신앙이 구원의 수단이 되고, 그 신앙은 선택된 자 이 외에는 아무에게도 주지 않는다. 그런고로 이 신앙의 소유자는 선택된 자 안에 있는 것이 확증되는 것이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구주로서 그를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하며 사랑으로 따르는 자가 하나님의 선택에서 빠지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소원을 지니는 자는 선택 안에 있는 자이다. 선택되어 있지 않는 자는 결코 이 사랑과 소원을 갖지 못한다. 이와 같은 자는 도리어 그들의 죄의 성질을 따라서 악을 사랑하고, 의를 미워하는 것이다.「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마치 선량한 국민이 그 국가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듯이 참 신앙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해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사실 이 세상에서 전연 죄가 없는 생활을 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그가 도달할려고 소원한 이상적 표준이다.

 

우리들은 자기가 선택된 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이것은 마치 흑과 백, 또 명(明)과 암(暗), 혹은 감미와 산미(酸味)를 어떻게 구별하는가를 질문하는 것과 같다. 우리들이 흑백, 명암, 감산(甘酸)을 식별할 수 있는 것 같이 성경과 양심이 우리들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있는가 어떤가에 따라서 명료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성경에는「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 : 16),「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그 증거를 자기의 마음 안에 갖고 있다」(요일 5 : 10)라고 되어 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에 복음을 기쁘게 맞는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복음을 배척하는 것이다.「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 : 6).「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드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 : 36).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신자에 관한 확증을 가졌다고 하는 사실은,「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살전 1 : 4, 5)라고 쓰여 있다. 많은 선택된 자의 회심은 더욱 미래에 걸려 있지만 누구나 자기, 혹은 타인이 선택된 자 안에 있다고 적극적으로 언명할 권리는 없다. 하나님이 자기와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을 마련하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정론의 실천적 중요성

 

예정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이 냉혹하고 막된 공론적(空論的)인 이론이 아니다. 또 많은 사람이 믿을 경향이 있는 기이하고 부자연스런 교리도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설명하는데 가장 따뜻하고 생생한 생명에 없지 못할 중요한 교리다. 이 교리를 그 마음에 간직한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천국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것, 그것이 그 개인을 위해서 예정된 길이며, 그것이 또한 좋은 길임을 아는 것이다.

 

라이스는 「이것은 위험 중에 있어도 의로운 자에게 보호의식을 주고 의무의 길이 안전과 번영의 길이라는 보증을 주며, 또 최대의 비난과 박해에 부딪칠 때까지도 그들을 격려해서 덕을 실행하게 하는 특수섭리의 교리이다」라고 말한다. 영국 국교회의 신조 제 17조에는「예정 또는 그리스도에 있어서 우리들의 선택에 관한 경건한 고찰은 깊은 신앙의 사람에게는 감미롭고 즐거운 말로는 표현 못할 위로로 넘쳐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아무 일에나 근심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우주의 보좌에서 실제적으로 통치하시는 것, 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결정하신 것을 알 때에 우리는 흔들림 없는 평화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참 칸빈주의 자는 모든 사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손과 목적을 보기 때문에 그 고난, 비통, 박해, 실패 조차도 우연이나 운명의 결과가 아니며, 예견되고 예정된 일, 또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계획된 징계, 혹은 훈련하는 채찍임을 아는 것이다. 이것에 관해서 성경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 : 28)고 되어 있다. 우리들의 예정은 우리들의 구원의 오직 하나의 확실한 보증이다. 다른 일들도 우리들에게 위로를 주겠지만 그러나 예정의 은혜만이 우리들에게 구원의 확실성을 준다. 칼빈주의 체계는 논리적이고, 엄격하지만 사람을 슬프게 하거나 의욕을 꺾기보다 오히려 용기와 활동적이게 한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을 보편적 통치자인 오직 한분인 절대 주권자로 모시고 그 앞에 일체의 권위자를 낮춤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을 구별하고, 전적으로 동일한 수준에 있는 자임을 보여준다.

 

알미니안파의 교리는 구원에 관해서 인간의 편을 강조하는데 대해서 예정론은 하나님 편을 강조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아직 구원되지 않는 자에 대해서 보다 동정이 깊고 관대하게 되며, 우리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해 영원히 깊은 감사를 갖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확실한 계획을 갖는다면 그 계획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은 지극히 소중한 일이다. 그들은 칼빈주의의 신앙과 교리가 성령의 영감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유일한 참종국의 철학체계인 것을 주장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 교리의 모든 부분 사이에 있는 조화와 각 부분의 하나에 관한 오류나 진리는 크건 작건 다른 모든 부분에 영향을 준다. 반칼빈주의 자는 총괄적으로 말해서 속죄와 성령의 기능은 인간의 유죄와 무능력, 갱신 등의 중요한 교리를 아주 빈약하게 만들며, 거의 공허한 말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리스도교의 운명은 칼빈주의의 운명과 같이 결합되어 있다고 굳게 믿는 것이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파간의 구별은 이미 본대로 넓고 또 중대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틀별히 이러한 진리를 연구하기까지는 알미니안파의 체계 중에 얼마나 많은 이단적인 색채가 들어 있는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알미니안파는 그 은혜종교와 행위종교와의 중간적인 불철저한 위치 때문에 근대의 자연주의적 경향에 대해서 거의 대항할 수가 없다. 싸움은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와의 사이에 행해진다. 거기 대한 모든 타협적 기획은 실패로 운명지워진다. 논리적으로 철저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칼빈주의에서 평안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칼빈주의 논리를 과도히 존중한다는 비난은 당치도 않으며, 또 확실한 근거가 없다. 만일 우리들이 그 어느 것인가의 잘못을 벌한다면 감정에 기울어질 경우에 일어나는 잘못보다도 지식에 기울어지는 경우에 생겨나는 잘못된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마 칼빈주의만큼 아주 또 때로는 일부터 잘못 전해진 사상체계는 없을 것이다. 예정론은 특히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보며 그와 반대로 세상의 지혜가 예정론을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다. 이 교리는 호악(好惡)의 감정을 끼우지 않고 그 관계와 시종일관 논리적으로 연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교리는 이미 말한 것 같이 자연인은 발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어리석은 자로 사로잡을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뽀쁘의 말을 인용한다면 그는「어중간한 예정론은 오히려 위험하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이 숭고한 교리는 성경의 군데군데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 두 요소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는 아무런 설명의 계획이 없다. 무한의 지혜와 힘을 가진 선한 실재자가 우주를 창조한 후에 이것으로 길잡이가 없는 큰 배와 같은 상태로 표류하게 했다는 것이 있었다고 하면, 바로 우리들의 근본적인 신학 사상을 뒤집어 놓는 가정(假定)이며 이것은 또 성경이 반복해서 증언한 가르침에 위반되는 것이고, 우리들의 평소의 경험과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예정론은 칼빈주의 체계 중의 다른 특수한 교리와 한 가지로 공개해서 가르치고 또 설교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참 신앙자가 하나님의 사랑과 궁휼과의 특별한 대상인 것을 알고 또 그가 그 구원의 확신을 더욱 환인하고 강화시키기 위해서다. 우리들은 「전 세계에 나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을 받았다. 만일 우리들이 복음의 어떠한 부분이라도 손상하고 또 무언 중에 빠뜨린다면 그것은 그 명령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 된다. 어거스틴은 그 시대에 있어 그 교리를 무시하는 자를 비난했다. 뒤에 예정론에 관해서 자유로 설교를 너무 많이 한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에 그 비난에 반박해서 성경이 인도하는 대로 우리들은 순종하면 된다고 답변했다. 칼빈은 선택의 교리를 교회의 신앙 고백을 중심해야만 된다고 주장했다. 만일 교회가 이것을 강조하지 않는다면 그 놀랄만한 교리는 매장되고 잊어버림을 당할 것을 각오해야 마땅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의 사상이 정확한 것은 이것을 강조하지 않았던 그룹의 실정에 의해서 보여준 것이었다. 하여튼 간에 영국, 스코트랜드, 화란, 미국과 카나다에 있어서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그 사상은 완전하게 잃어지고 말았다. 물론 여기 관한 설교는 무엇인가의 논쟁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논쟁은 악이 아니다. 잘못이 있는 한 논쟁이 없어서는 안된다. 예정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교리이다. 이 교리는 지고(至高)하고, 고원(高遠)하다. 이 세상에서 여기 도달하는 자는 지극히 적다.

 

장로교회 또는 개혁교회에서 안수된 모든 교사와 장로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엄숙하게 성경에 가르친 교리의 체계를 포괄하는 자로 이 교회의 신앙고백을 성실하게 받아 들이고 채용할 것을 서약했다 그런고로 알미니안파가 칼빈주의 교회의 교직에 설 권리가 전연 없다. 만일 알미니안파로 칼빈주의 교회의 교직자가 되는 자는 건전한 신학을 갖지 못하며, 건전한 도덕성도 갖지 못한다. 하나의 일을 서약하고 증언하면서 이것을 부정하고 혹은, 이와 반대의 일을 믿는다는 것은 정직한 인간의 성격이 양립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장로교회의 안수례의 서약은 완전한 칼빈주의 일인데도 그 교리를 충실하게 선전하는 교직은 지극히 적다. 오늘날 소위 칼빈주의 교회의 강단에서 참으로 개혁주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지극히 곤란하다. 우리 장로교회의 강단은 그 간행물, 학교, 신학교와 마찬가지로 공적과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알미니안적 교리로 이름이 난 것은 아닌가? 만일 이 예정론의 교리가 참이라면 그들은 분명히 또 적극적으로 우리 교회에서, 또 신학교, 대학에서 가르치고 변호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교회가 칼빈주의에서 이탈되어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에는 아주 융성하던 나라에서 오늘날은 대부분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영국에 있어서 거의 그 자취가 없다. 그러나 기쁜 일은 스코트랜드에 있어서는 대부분 비참한 타락 가운데서 영웅적인 자유교회가 증거의소리를 지르고 있다 역사는 영적 부흥의 때와 영적 침체의 때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원래 신앙과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특별한 은사이기 때문에 세상의 불신에 놀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세상에서 가장 슬기롭고 가장 우수한 사람들이라 해도 그 은사가 없이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은 지식인의 생각이 허무한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현명하시고 개끗한 주권자이시다. 자연인은 죄로 말미암아 맹목이 되어 반역자이다. 그는 지배자를 원치 않는다. 특히 절대적 지배자란 것은 원치 않는다. 복음이 자연인에게 기쁨과 좋은 것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바울이 선전한 복음은 아닌 것이다.

 

오늘날 칼빈주의가 안되는 다른 원인은 그 초자연성의 강조에 있다. 영원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 가운데서 칼빈주의는 하나님을 본다. 우리들이 사는 시대는 반초자연주의인 까닭에 특히 칼빈주의에 처해서는 아주 적대시한다. 오늘날은 자연주의에 입각한 사상과 감정이 강조되는 합리주의의 시대다. 근대주의 기독교는 그 원리에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순수한 자연주의이며 자력구제적이고, 칼빈주의와는 전연 대립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주의 자에게 실망을 느껴야 할 이유는 없다. 죄많은 인간이 그 하나님에 대한 의존감을 버릴 수 없는 것 같이, 또 전능자가 그 우주통치의 자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 것 같이 칼빈주의가 지상에서 결코 소멸될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