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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신앙과 신학에서 우리의 동료 - 한스 마리스 교수(Dr. Hans W. Maris)

Bavinck Byeon 2014. 5. 7. 01:26

Augustine, An ally in Faith an in Theology - Dr. Hans W. Maris.pdf


 

아우구스티누스

신앙과 신학에서 우리의 동료

 

한스 마리스 교수(Dr. Hans W. Maris)

(아펠도른 신학대학 교의학 교수)

 

 

서론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후 400년경에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와는 멀리 떨어진 시대와 장소에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생애와 사역에서 한 가지 점에 대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강의에서 그의 생애 전체를 그려 내거나 그의 사상이 시대를 초월하여 갖는 의의를 전부 확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 시간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계심에 대한 그의 신학적 성찰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의삼위일체론(De trinitate)은 약 20년에 걸쳐서 쓴 책입니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묵상하고 강설하고 또한 저술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에 대하여서 사람의 이해로 모두 파악할 수는 없다고 분명히 확신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요한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음과 신학에서 전적으로 자기 형제라고 생각하여서 "전체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것"(Augustinus totus noster)이라고 말하였는데, 이러한 칼빈의 표현을 들으면 21세기에 개혁 신자들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칼빈이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두드러지는 것은, 신학이 그 자체를 위한 이론적 원칙이 아니었고 실제적 지식을 다루었다는 점입니다. 칼빈은 우리가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할 때에, 그 어떤 무익한 사색보다도 더 확실한 지식을 갖게 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방식의 사고는 우리의 지성을 자극할 뿐 아니라 우리 영혼을 굳게 세워 줍니다.

 

우리가 삼위일체론에 초점을 맞추려 할 때에, 우리 시대의 신학적 질문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의 작은 부분을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루는 주제는 가장 근본적이고 실존적인 것입니다. 서론적으로 몇 마디 말씀을 드렸지만, 신학, 특별히 교의학 혹은 조직 신학은 어떤 가능한 이론에 대한 것이 아니라 회중의 신앙에 대한 것임을 이러한 데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 후보생들은 교의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신학 수업 과정에서 교의학은 그들을 상아탑에 갇힌 신학자로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은 좋은 신학자가 될 것이지만, 무엇보다 교의학은 신학생들이 교회에서 좋은 목자와 선생이 되도록 인도합니다. 목자와 선생이 된다는 것은 목사에게서 구별된 두 부분이 아니라 한 가지의 양면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함에 관한 매우 중요한 질문

 

그렇다면 교의학에서 신학자가 목표로 삼는 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에서 계시하신 내용을 차서가 있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이해에 대한 것이면서 동시에 믿음으로 생각함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교의학은 진리에 비판적이거나 주님의 도에서 벗어난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이며, 또한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회중에게 설명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 전체를 위한 양식을 거기서 공급받을 수 있는지 말해주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렇게 섬기는 일을 신학자들이 어떻게 시작하고 진행시켜 가야 할지에 관하여 제기되는 여러 가지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계심을 고백하는 것이 신학에서 얼마나 근본적인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대단히 근본적이라는 사실은 매우 분명합니다. 한 분이시고 동시에 성부와 성자와 성신으로 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신자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이 지난 여러 역사에서 공통된 확신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의 신앙은 이처럼 근본적입니다.

 

그런데 이 교훈이 우리가 고백하는 전체 진리에 대하여 갖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교의를 출발점으로 삼아, 거기에서부터 우리 신앙에 대한 다른 진리들을 전개시켜 나가야 하겠습니까? 삼위일체를 중심적인 교의 혹은 교의학의 원리로 보아야 하겠습니까? 제가 가르친 학생 중에서 몇몇은 이 고백으로부터 다른 모든 교리가 파생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매료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창조와 섭리, 죄 아래 있는 인간과 구원받은 인간, 은혜의 언약,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구속과 화목, 성신께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적용하심, 교회와 그리스도의 재림 등을 모두 그렇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주제들을 교회의 교리 안에서 요약할 때에, 분명히 우리는 성부의 사역이나 성자의 사역, 혹은 성신의 사역으로 볼 수 있는 특별한 면들을 만나게 됩니다.

 

19세기에 독일에서 활동하였던 알렉산더 슈바이쳐(Alexander Schweizer)라는 신학자는, 개신교 안에 몇 가지 중심 교의가 존재하고 그것으로부터 신학 체계 전체를 구성할 수 있다는 사상을 옹호하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루터교회는 칭의 교리에서 시작하여 차례로 발전시킨 것이었고, 칼빈주의는 예정론을 중심에 두고서 신앙의 체계 전체를 거기에서부터 끌어낸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삼위일체의 교리를 그러한 중심적 교의로서 내세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주장하기를, 종교개혁의 신학에서 그 '형식적' 원칙은 '오직 성경'이지만, '내용적' 원리는 칭의나 믿음, 하나님의 뜻, 섭리나 예정 같은 중심 교의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로 이 주장에 대하여 계속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특히 칼빈을 둘러싸고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칼빈의 작품에 중심 교의 같은 것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어떤 사람은 "칼빈 신학에서 중심 교의를 찾으려는 시도는 여전히 아무런 결과를 내놓지 못하였다"하고 단언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은 아마도 '중심 교의'라는 개념이, 처음에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과는 달리 별로 추천할 만하지 않음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표시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과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그의 접근에 초점을 맞출 때에 다시 한번 언급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 시대에 이루어진 삼위일체 교의의 발전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이 분명한 지식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근본적인 위치를 치지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4세기에는 아직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언급된 보편 교회 신조가 있고, 사도신경에 그 내용이 잘 보존되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후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중요한 회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치 성부께서 하나님이신 것과 동일하게 하나님이신지에 대한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마 여러분께서 아리우스(Arius)라는 이름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드님이심을 부인하였고,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영원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계시지 않으신 때가 있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중요한 공의회에서 그의 의견은 정죄되었으며, 거기서 작성된 신조 안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심을 공적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 단계에서는 성신에 대하여서는 매우 조그만 언급되었습니다. 한 문장으로 "[나는] 성신을 믿습니다"하고 언급하였을 뿐입니다.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니케아 신경은, 50년 후인 주후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그 한 문장을 더 확대하여 고백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성신 하나님에 대한 다음과 같이 매우 아름다운 고백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성신님,

곧 주님이시고 생명의 수여자이신 분을 믿습니다.

그분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성신의 신성을 성부와 성자와 같은 수준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공적인 신앙고백 문서에서 최초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신조를 귀하게 여기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라고 바르게 부르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신으로 계시다는 성경적 증언은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증언한 것들이며, 주후 1세기 이래로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었습니다. 주후 약 200년 전후로는 터툴리아누스를 위시하여서 여러 신학자들이 성경에서 계시된 진리, 곧 성부와 성자와 성신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서 계시된 내용을 체계적으로 진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적인 고백을 확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이단들과 논쟁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특히 4세기 중반, 325년의 니케아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기간에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때에 어떤 사람들은 성신께서 위격(Person)이심을 부인하였고 대신에 성신은 신적 능력의 표현이며 영감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음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4세기 내내 신학자들만 그렇게 무겁고 감정적인 소모가 있는 토론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토론은 교회의 일상이었습니다. 일반 신자들도 삼위일체에 대한 당시의 논의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함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때로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다가 서로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교리가 신학의 전체 영역 가운데 본질적인 것이라는 공통된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그룹은 역시 신학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주후 325년에 아리우스(Arius)를 정죄하는 결정을 내릴 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라는 분을 아실 것입니다. 그분의 소천 이후에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들로는 갑바도기아 출신의 세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소아시아에 있는 갑바도기아 출신의 주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말하자면, 카이사레아의 주교인 대 바실리우스, 그의 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그리고 절친한 그의 친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입니다. 그들의 중요성을 정당하게 논하려면 한분 한분에 대하여 일련의 강의를 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분들은 성신께서 하나님이시고 성부와 성자와 동일 본질이라고 가르쳤는데, 그것이 그 단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세 위격이 모두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 하나님이 되심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잘 이해하기 위해 그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서 시간과 기원과 이유를 초월하는 하나님으로서 영원히 또한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분이심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신성 안에서 세 위격은 모두 그분들의 공유하는 상호 내재적(perichoretic) 존재에서부터 서로에게 상호 침투합니다(interpenetration).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들의 수고가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매를 맺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교회는 성자뿐 아니라 성신의 완전한 신성도 확증하였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을 완전하게 구별된 존재로 제시하려고, 그들은 무엇보다도 세 위격(hypostases, 혹은 persons)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부께서 모든 신성의 근원이시고 또한 성자와 성신에 대하여서는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s)이시라고 고백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세 위격을 단일체로서 굳게 붙잡았습니다. 신적인 세 위격이 함께하는 방식의 특징을 그들은 '페르코레시스'(상호 내재, 혹은 상호 침투)라는 개념으로 말하였는데, 대체로 이 개념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렸던 381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27살이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에야 그는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가서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가깝게 지냈고, 하나님께로 회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형식으로 쓴고백록에서 이 일을 언급하면서, "주님, 주님께서 저를 주님께로 회심시켰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그는 기독교인 저술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2년 후에 그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근처에 있는 히포의 주교가 되었는데, 그때에 그는 삼위일체에 대한 대작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책은 탈고하기까지 25년이 더 걸렸는데, 그동안 그는 다른 일들도 많이 수행하고 다른 책들도 많이 썼습니다.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접근 방식이 다른 것을 놓고서, 신학자들 사이에 상당한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성자와 성신의 신성을 강조하여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부께서 하나님이신 것처럼 성자와 성신께서도 동일 본질로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여야 했습니다.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성자께서 하나님이심을 부인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성신께서 성부와 성자와 하나님이심을 말하면서도 그분들께로부터 독립된 위격으로서 존재하심에 대하여는 부인하였습니다. 따라서 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은 셋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에 등장한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그러한 시대적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저술 작업을 시작할 때에 교회의 신조를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성경을 탐구하면서 일하였으며, 그러한 가운데 '삼위일체는 한분이시고 유일하고 진실된 하나님이다'는 굳은 확신을 갖고서 저술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십니다. 하나님의 한 분이심에 대한 이러한 확신에서부터 그는 생각을 전개하고 책을 써내려갔습니다. 이것은 매우 다른 출발점입니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삼위일체의 각 위격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한 반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분 하나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신 분을 고백하면서 시작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함께 관여하시고, 오직 한 위격만 언급된 데에서도 그렇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성부께로 가신 후에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신 구절을 해설하면서(17:7), 이 구절이 성신을 보내는 일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협력하심을 나타낸다고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하여 숙고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께서 가변적인 몇 가지 속성을 '가지신'(has) 실체가 아니심을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그분의 모든 속성과 자질들'이십니다'(is).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실체(substantia)라는 표현보다는 존재(essentia)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하나님을 묘사할 만한 사람의 언어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우구스티누스도 바른 표현을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위격들에 대하여 말하기로 하면서 즉시 경고를 덧붙이기를, 세 분의 신적인 위격을 말한 것이 곧 세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사람이 말로 표현하려는 시도들이 항상 불충분할 뿐임을 늘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성부와 성자가 함께한다고 하여도 성부 혼자이신 것보다 더 크지 않습니다. 각 위격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각 위격은 하나님의 속성들인 전능하심과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영원하심 등에서 전부이십니다. 우리가 위격들 사이의 관계를 살필 때에만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자나 성신이 아니라 오직 성부께서만 낳으십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을 마치 그분들이 사람인 것처럼 서로 대립적으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세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결론에 도달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한 분만 계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고 따라서 세 위격은 본질상 동일한 신적 존재이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복수형의 표현을 써서 말하는 것을 결코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안의 세 위격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유일무이하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설명할 예를 찾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흔적들(vestigia trinitatis)을 찾으려는 시도에 주의를 많이 기울였습니다. 그 한 가지 예로서, 그는 사람의 자기 인식이 통찰력(intelligentia)과 기억(menmoria)과 의지(voluntas)의 요소를 갖고 있으면서 함께 일종의 삼위일체(triplicity, trinity)를 이루는 것을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더 많은 시도를 하였으나, 정직히 말하자면 그 설명들 가운데 어떤 것도 진정으로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인 것은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한 시도들을 하였음에도, 사람의 지성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지혜를 진정으로 아우를 수 없음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사고에서 매우 가치 있는 부분은, 그가 사람을 향한 성신 하나님의 사역을 묘사한 방식입니다. 성경에 따르면(7:37-39; 4:7-14; 4:7), 하나님의 신은 하나님의 선물(domum) 혹은 그리스도의 선물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신은 여전히 하나님 자신이시며, 사람에게 주어지신 경우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신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불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좋은 예가 되는데, 그 사랑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그 사랑을 가리킵니다. 성부는 성신 안에서 성자를 사랑하십니다. 성자는 성신 안에서 성부를 사랑하십니다. 성신은 자기 안에서 성부와 성자를 사랑하시고, 동시에 성신은 삼위일체에서 제3위이시며, 그분이 친히 선물을 주시는 분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삼위의 이 거룩한 관계에서 그분들 사이의 통일성이 조금이라도 감소하는 일은 한 순간도 없습니다.

 

성신께서 성부와 성자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로서 언급될 때에, 그분은 동시에 죄인이 은혜로 하나님과 연합되도록 하는 그 사랑이십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우리가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였습니다. 우리를 아는 지식(se nosse)에는 진리가 있었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이 의와 함께 진리와 사랑이 파괴되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소외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될 때에는 어떤 일이 있어나겠습니까? 그때에는 성신께서 '사랑의 유대'로서 의와 진리를 회복해 주시고, 실로 완전히 부패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주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은 성신 안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붙잡고 결국 하나님과 한 영(one Spirit)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뵙게 될 때에 결국 하나님의 형상도 다시 완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참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사실에 끝까지 충실하였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문들이 모두 죄인들을 향하여 열려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신은 우리에게 보내심을 받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온 어떤 분이 아닙니다. 성신의 사역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를 우리에게 주고 계시고 죄악된 인간을 사랑 안에서 자기와의 교제로 데려 가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성신 안에서, 주시는 분과 주신 선물이 같습니다. 사랑하시는 분과 사랑이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와 신학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 교리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겠습니까? 삼위일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가지고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을 전개시킬 수 있는 어떤 원칙으로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모든 진리의 체계를 이미 내포하고 있는 중심 교의와 같은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주신 계시의 말씀들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 역할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앞에서 제가 종교개혁의 신학에서 어떤 역할을 한 중심 교의가 있었다는 식의 생각들에 대하여 말한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성경을 형식적 원칙이라고 하고, 내용적 원칙으로는 그들이 택한 중심 교의를 지목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의 교의에 대하여 우리고 하여금 바르게 고백하도록 도와주었던 내용이, 이 질문을 푸는 바로 그 열쇠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 대답을 우리 손에 가까이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교리를 우리 손으로 완전히 소화해 낼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거듭 말하였듯이, '하나님께서 삼위이신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신비를 파악하려는 우리의 모든 시도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는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자신과의 차이를 의식하였습니다. 그들은 삼위의 위격에서 시작하였고, '상호 침투'(perichoresis)라는 개념의 도움을 받아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 참으로 진실되게 남아 있었습니다. 반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단일성에서 출발하였고, 거기에서부터 삼위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차이를 가지고서 동방의 헬라 교부들과 서방의 라틴 신학자의 대표인 자기와의 사이에 큰 간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 모두는 자기들의 사고나 저술에 한계들이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가장 중요한 교리가 신학에서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창조주이며 구속주인 그분께서 또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고백하는 이 교리를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몇 가지로 답을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알고 경배하고 믿음으로 신뢰하도록 하려고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존재를 이해하거나 그분의 능력과 지혜와 영원함을 설명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습니다만(crredo ut intelligam). 그럼에도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높이 계신 만큼 우리의 이해가 제한되었음을 매우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36:26).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면(3:20),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거룩한 존재를 꿰뚫어보려고 소원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분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셨습니다. 유한하고 죄악적인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을 뵙고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13:22).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성부와 성자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분을 사랑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벧전1:8). 우리가 성부를 계신 그대로 보는 일은 오직 미래에 실현될 것입니다(요일3:2).

 

셋째, '하나님께서 계시의 말씀을 주셨다', 혹은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안다' 함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바로 이 계시의 말씀이 삼위 하나님의 값진 사역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곧, '우리의 지식이 직접적인 지식이 아니라 매개체를 통한 지식'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성신의 이러한 사역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은 '지혜와 계시의 성신'으로 불리는 분입니다(1:17). 이 표현은 단지 성경이 성신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신께서 회중 안에서 일하시면서 우리의 마음눈이 밝아져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되도록 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1:18). 성부께서는 성신을 주시며(1:17), 그러면 우리는 부활하시고 능력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점점 더 분명하게 뵙게 될 것입니다(1:20-23). 이 모든 것이 믿음과 관련이 있고, 또한 배우는 영적 과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성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우리 마음에 거하심을 아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3:14-17). 결코 삼위일체의 교리를 우리가 취하여 도구로 삼을 수 있는 원리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자로서든 신학자로서든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넷째,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아오시는 방편입니다. 성경의 계시가 성신의 사역이라면, 또한 성부와 성자의 사역이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삼위일체를 신학의 원리로 삼는 유일하고 타당한 방법은 성경을 충실히 대하는 것입니다. 성부로 인해, 성자와 성신으로 인해, 신학이 믿음을 다루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몸이자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신으로 거하시는 교회에 바짝 붙어 있게 될 것입니다(2:20-22). 또한 그럴 때에 우리의 신학은 겸비한 자세로, 신앙과 신학에서 우리가 진리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우리가 다스림 받음을 항상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부에 대하여 말할 때에, 그 자리에 성자와 성신께서도 계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성부 없이 혹은 그분의 보내신 성신 없이 그분 홀로 존재하시지 않음을 압니다. 성신에 대하여 말할 때에도, 우리는 그분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성신이시고 그분 안에서 우리를 성부께로 인도하심을 의식합니다.

 

이 신학교가 우리의 기도로 둘러싸이도록 합시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터 위에서 지식과 이해와 믿음을 계속하여 자라나게 해 주시기를 구합시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표는 신학의 위대한 거장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비하여 주님을 섬기는 종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이나 아우구스티누스, 루터와 칼빈, 청교도 선배들과 그 외에 수많은 사람들처럼, 우리에게서도 참으로 종들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출처: IRC신학교

 

Augustine, An ally in Faith an in Theology - Dr. Hans W. Maris.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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