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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선택의 표준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4. 6. 17. 20:29

배우자 선택의 표준

 

김홍전 목사

 

인생의 중대사 : 혼인

 

오늘 특별히 말씀드릴 내용은 주로 청년 여러분들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부형 되시는 분들에게도 오늘 드릴 말씀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줄 압니다. 다름이 아니라 혼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한 평생을 살면서 몇 가지 중대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중에는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불가항력적으로 닥쳐오는 것들도 있고, 자기의 의사와 행동 여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런 중대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라시는 태도는 항상 여일(如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치기를 먼저,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모든 염려를 맡기고 살라고 하시고(참조, 벧전5:7), 또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라고 하십니다(참조. 고전10:31). 즉 우리는 어떤 일에 임해서든지 우리의 생명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길을 적극적으로 찾고 이행해 가야 합니다. 다른 문제들에서도 그렇겠지만, 특히 혼인의 문제만큼 이런 믿음의 태도가 절실히 필요한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혼인에는 그만큼 자신의 결정에 대한 중대한 책임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혼인 적령기에 있는 청년들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혼인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을 바로 배우고, 그 터 위에서 배우자를 선택하거나 혼인에 관계된 여러 가지 일들을 결정하고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혼인에 대해서 가르친 내용이 여러 가지 있을지라도 그것을 공부하지 않고 그저 예수 믿는 두 사람이 진실하게 가정을 이루고 행복스럽게 산다는 막연한 관념 가운데에서 혼인이라는 인생의 중대사를 결정해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런고로 교회가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소홀히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까닭에 오늘 특별히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혼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거듭나게 하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들어오게 하셨다는 것과, 따라서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적인 품성과 사명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 이 시간에 다시 논구(論究)하지 않을지라도, 이미 배우신 내용들을 잘 기억하시면서 이 혼인의 문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혼인에 대한 뚜렷한 표준을 가져야 함

 

혼인 적령기의 자녀를 둔 부모는 자녀의 혼인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해야 하고, 더군다나 그 당자(當者)들은 비록 외부에 말을 안 할지라도 속으로는 이 문제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문제에 대한 자기 생각의 표준이 서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 저녁에 우선 필요한 몇 가지를 생각하겠습니다.

 

여러분, 다 같이 성경을 펴서 창세기 1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닷새 동안 천지의 여러 가지를 창조하시고, 여섯째 되는 날 먼저, “땅은 그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1:24-25).

 

그 다음 26절에 비로소 사람을 창조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주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1:26-31).

 

여기에 하나님이 최초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를 하실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계시하셨는고 하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의 형상을 따라 내 모양대로 내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물론 히브리어에서는 문장에 주어를 반드시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동사의 어미를 변경시키면 자연히 주어도 표시되는 것이니까 여기서도 동사를 복수 제1인칭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복수로 계시면서 동시에 단수이신 하나님

 

‘엘로힘’(םֱִ֑יהלֹאֱ)이라는 하나님의 성호는 복수형(複數形)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신론(多神論)을 표시하는 단어는 아닙니다. 위에서 본 말씀에서도 ‘우리’라는 용어를 쓰신 하나님께서 바로 다음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자기네 형상’이 아니라 ‘자기 형상’이라고 해서 단수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단일복수형(單一複數形), 즉 복수이면서 동시에 단수인 속성이 나타납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구약 다른 곳에서도 한 문장 안에서 ‘우리’라고 하셨다가 ‘나’라고 하시는 경우가 나옵니다(참조. 사6:8).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三位一體)이시니까 ‘엘로힘’이라는 성호도 쓰셨고 또 ‘우리’라는 표현도 쓰신 것이 아니냐고 얼른 단정하기가 쉽지만, 본문에 나오는 그런 표현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주로 가르치기 위해서 쓰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은 당신의 속성이, 당신의 존재 자체가 항상 복수형인 동시에 단수형이십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나타난 계시에 따르면 한 분이신 당신께서 세 분의 인격(person)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인격이라고도 하고 품위(稟位)라고도 합니다. ‘한 분 안에서 세 인격으로 계시는 하나님’(God in three persons in one)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세 품위로 계시면서 또한 단수형으로 한 분이신 하나님’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신비한 내용을 우리가 다 규지(窺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께 대하여 생각할 때 수의 개념을 우리의 제한적인 수 개념으로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제한적인 사고의 범주, 즉 ‘시간’이라든지 ‘공간’이라든지 ‘관계’라고 하는 그러한 선험적인 사고의 형식 가운데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선험적인 사고의 형식 중 가장 기초적인 범주의 하나로서 ‘수’(數)를 듭니다. ‘수’라는 논리 형식에 따라 항상 하나라든지 둘이라든지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세계에 있는 까닭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그런 물리적인 법칙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당신이 벌써 ‘동일한 장소를 두 개의 물체가 점령할 수 없다’는 법칙에서 벗어나 계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문을 닫았으면 문이 점령한 그 자리를, 혹은 벽으로 막았으면 벽이 점령한 그 자리를 다른 것이 점령할 수 없는 것이 자연 법칙이지만, 예수님은 그대로 들어오셨습니다. 이런 것이 예수께서 시공(時空)의 제한에서 벗어나셨다는 구체적인 실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각하는 제한적인 수의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을 자꾸 추상해 나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 곧 계시(啓示)된 하나님을 알려고 할 때 ‘단수다. 그러니까 복수가 아니다’하고 단정해 버리면 그것은 하나님을 수(數)의 카테고리 안에 있는 신으로 편협하게 이해하게 되고 맙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단수로서 유일한 하나님으로 나타나지만, 그러나 나의 존재는 단순히 복수에 대한 단수라는 상대적인 관념의 존재가 아니다’ 하는 것을 표시하십니다. ‘당신은 만유를 통일하실 뿐만 아니라 만유 안에 가득하시고, 만유의 전부가 되시는 까닭에 우리가 규지할 수 있는 우주 안의 모든 속성을 다 보유하신다면, 존재한다는 속성도 당신은 보유하셔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이것을 가리켜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라고 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존재라는 속성도 있으니까 존재하신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반드시 스콜라 철학만의 생각은 아닙니다. 자꾸 깊이 생각하고 추리를 해나가면 결국,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다. 하나님은 전체가 되신다.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분에게서 모든 것이 나오고 필경은 그분에게로 돌아간다’ 이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물이 대저 주께로부터 나오고 주에게로 돌아가나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롬11:36).

 

모든 ‘수’라는 것도 그분에게서 나왔고, 그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 이야기는 그런 정도로 하고,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표시하실 때 어느 때는 복수형을 쓰시면서 결국은 복구가 아니고 단수라는 것을 표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양태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 교회, 부부

 

여러분, 이렇게 신비한 것이 가장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교회)는 각각 두 개의 인격이지만, 신비하게 연합해서 하나의 인격을, 하나의 큰 몸을 이룹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라 할 때 과연 우리는 우리의 의식과 인격적인 개성을 다 포기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고 그것이 오히려 더 명료하게 살아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지체 노릇을 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개개의 개성을 다 포함해서 전부가 마치 손가락이나 발가락과 같이 움직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하나인 송시에 여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는 원상(原象, prototype)으로 세상 가운데 세워져 있습니다.

 

이 교회에 가장 방불하게 나타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이 매일매일 인류의 역사 세계에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부부입니다. 그러므로 부부의 원형은 교회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교회를 부부의 원형이라고 했지, 부부가 교회의 원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부부와 같이 할 것이니라’고 가르치지 않고, ‘부부는 교회와 같이 할 것이니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교회는 곧 부부가 배우고 표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전범이고 원형입니다.

 

부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표준삼아야

 

이제 우리가 성경 한 군데를 더 보면서 이야기하십시다. 에베소서 5:22-33인데, 여러분은 이 말씀을 보실 때 될 수 있는 대로 그 뜻을 알아보려는 태도로 보시기 바랍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된 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된 것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 할지니라”(22-24절). 언제든지 그 표준을 어디다 세우느냐 하면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이 아내는 남편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25-30절).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해 하시는 모습이 남편이 아내에게 대해 해야 할 전범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대단히 신비한 말이지만, 그러나 아주 원칙적인 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내 친구를 낸 몸과 같이 사랑해도 그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끝까지 내 친구를 사랑하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곧 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고 성경은 아주 명료하게 가르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1-33절).

 

여기서 먼저 볼 것은 부부에게 ‘하나가 될지니’라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말을 쓰지 않고, ‘한 육체가 될지니’라는 매우 현실적인 말을 쓴 점입니다. 내외란 이렇게 두 개의 육체가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육체로서 존재합니다.

 

또 한 가지 볼 것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 대해서 취해야 할 태도를 어떻게 가르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 어떻게 순종하느냐?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 하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 어떻게 사랑하느냐?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사 위하여 당신의 몸을 주심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내외간에 서로 나누어야 할 사랑의 중요한 표준이요 전범입니다.

 

순종의 의미

 

여기서 주의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순종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 하라.’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할 때 자기의 의식을 다 버린 채 무감각한 기계가 돼 가지고 ‘이렇게 하라’ 하면 ‘예’, ‘저렇게 하라’ 하면 ‘예’, 그렇게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 자신이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뜻을 더욱 궁구하고 살펴서, 그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식별해서, 그래서 우리가 알았을 때는 자진해서 즐겁게 성신님을 의지하여 순종하고 나갑니까? 그것은 물론 그렇게 자기가 인식하고 각성하여 자기가 확신한 다음에, 이번에는 자기가 성신님을 의지해서 자진해서 순종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이요, 그렇지 않으면 기계적인 굴종일 뿐입니다.

 

성경이 아내에게 가르치는 것은 자기 남편에게 굴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순종하되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순종하라고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어떻게 순종합니까?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 하나하나는 각자의 개성과 의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교호가 전체적으로 어떤 중요한 문제에서 그리스도께 순종한다 할 때는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것이 알려지면 그것이 과연 그런가 하고 확인하고, 확인한 다음에는 ‘다 같이 성신님을 의지해서 그리고 갑시다’ 하고 한 마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미리 잘 알아 두십시오. 왜냐하면 아내가 어떻게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인가를 잘 깨닫기 위해서는 이 점을 중요히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실이 주님의 뜻이라고 판단되고 확인되면 자기의 개성과 자기의 전체의 인격을 거기에 즐거이 바치고서 순종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도리입니다. 그런데 아내도 남편에게 그렇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 나타난 혼인에 대한 교훈

 

그러면 창세기고 돌아가서 더 보십시다. 이번에는 창세기 2;7부터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여기서 사람이란 아담을 가리킵니다. 원문 성경에서는 ‘사람’이라는 말을 ‘이쉬’(ֶשׁיאִ)라고 썼습니다. ‘이쉬’란 남자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사람을 쉽게 ‘맨’(man)이라고 그러지만, 그러나 그것은 남성 명사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이쉬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이쉬가, 즉 남자가 네페쉬하야(生靈)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산 영혼, 곧 생동해서 움직이는 영혼이 있는 피조물이 됐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그 다음에 계속됩니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님께서 동방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8-9절).

 

먼저 생명나무가 있는 것을 명시했습니다. 이후에는 한번도 생명나무가 어떻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없고, 요한계시록에 가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회복하실 때 다시 이 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주께서 만유(萬有)를 회복하시고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신 본래의 목적이 온전히 완성되었을 때 거기에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맺어서 그것으로 만국을 소성케 한다고 그랬습니다(계22:2-3). 그러나 그 중간에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는 생명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어디에서도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기 전에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이라는 거룩한 법칙을 계시로 내리시기 전에 생명의 계시를 하신 것입니다. 생명나무가 있어서 아담이나 하와가 그것이 생명나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계시가 있은 다음에 무엇을 하면 죽는다 해서 비로소 죽음에 대한 경고가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법을 하나 두셨습니다. 그것이 선악과가 됐든지, 그렇지 않으면 짐승을 죽이는 것이 됐든지 혹은 돌을 던지는 것이 됐든지, 좌우간 하나님이 여기 어떤 법을 썩 내주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으면 안 되는 줄로 알고, 자기는 명령을 받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선악과 자체가 그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먹어 가지고 금방 동티난 일을 없습니다. 보통 말하는 대로 선악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사람이 범하고 그리고 들어간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에덴동산에서 발원하여 흘러 나가는 강들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10-14절). 이 강들에 대한 말씀을 보면 유프라테스와 힛데겔 강, 즉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의 상류 일대가 에덴이라는 지방이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에덴은 어떤 지역의 이름이고, 그 에덴 지역에 동산을 하나 지으신 것입니다(8절). 그리고 이 아름다운 동산에 사람을 두셨습니다. 그 다음에 15절로 넘어가서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땅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하시기에 앞서(참조. 1:28), 그 시작을 사람이 가장 거하기 좋은 이 에덴동산에서부터 하게 하신 것입니다.

 

선악과 금령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16-17절).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아야 했던 것은 그 실과 안에 사람을 죽게 하는 독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담이 실과를 먹은 결과를 보더라도 아담은 물리적인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분명히 그날 죽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죄의 부패가 들어가고, 분명히 그날 죽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죄의 부패가 들어가고, 죄를 범한 것 때문에 죄책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금령을 어김으로써 하나님과 떨어지게 된 상태가 벌써 죽음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이 끊어진 것,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사람은 원래 만들어지기를 장래의 일을 모르게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런 상태로 만드신 이유는 앞으로 될 일에 대해서 당신을 의지하고 당신과 늘 같이 지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잠시도 끊임없이 살아야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눈을 볼 수 없으나 보이지 않는 그분의 거룩한 생명 안에서 항상 교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런 식으로 살게 하셨고, 거기서 끊어져 나갔을 때는 자기가 혼자 산다고 떠들고 호흡이 있을지언정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입니다(참조. 딤전5:6).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한 이유

 

다시 창세기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이제 여기서부터는 하나님께서 여자를 짓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즉 내외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 이 내외간이 생기는 거룩한 사실을 보임으로써 우리에게 큰 원칙을 규지하도록 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혼자 사는 것이 쓸쓸해 보인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셨습니까? 그 자세한 이유를 그 절(18절)에는 쓰지 않았지만, 그 위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사람이 독처해서는 아마 그 일을 못하게 됐나 보다’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8). 이런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생명나무와 실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두신 곳에는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었다면 결국 인간이 도달할 최후의 이상형에 도달할 뻔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인간의 이상형 가운데 도달했을 때 생명나무의 열매를 모두 먹게 될 것을 다시 거기서 보여 주는데, 생명나무는 그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아담은 처음부터 굉장히 훌륭하고 아름답고 또 죄 없이 순결하게 지어졌지만,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이상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담을 비롯하여 우리 모든 인류는 처음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의 경지에 도달해 가도록 지어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일의 첫 열매이셨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사건은 하나님이 처음에 사람을 만드셨을 때의 거룩한 경영이 어김없이, 실패 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담은 거기에 도달해야 할 판입니다. 물론 아담도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거기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그 다음의 영광의 단계, 즉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던 그 영광에서 이제는 천지를 심판하러 내려오시는 그때 사람은 마침내 그 경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힘으로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목저 없이 그저 복된 현실을 즐기도록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으신 다음에는 그와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것도 그로 하여금 그 영광의 목표를 향해 발전해 가도록 하시려는 의도로 내신 것이었습니다. 그 언약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법률을 공부해 보면 아마 아실 것입니다. 무슨 금지가 선포되면 그것에 순종한 행위에 대해서는 상이 따르고, 어긴 행위에 대해서는 벌이 따라야 합니다. 금지가 선포되지 않는다면 상도 벌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금지가 선포돼서 어긴 사람이 벌을 받는다면 반대의 경우, 즉 그것을 순종하면 상을 받습니다. 그렇게 양쪽으로 실행되어야 그 법은 공평합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하나님의 공의의 관점으로 볼 때, 만일 선악과를 먹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끝까지 잘 지켰다면 어떤 상을 받았을까? 우리가 힌트를 얻는 것은 생명과를 먹고 생명으로 말미암아서 그가 더 영화되었으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은 까닭에 그 반대쪽인 타락과 부패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만일 먹어서 타락과 부패로 들어가는 그런 금령이라면, 안 먹고 그것을 신실히 지켰을 때는 그 금령으로 인해 향상하게 되는 거룩한 뜻이 내함(內含)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법을 제정할 때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법이 무엇을 금할 때는 덮어놓고 하지 말라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어서 자유롭게 있을 때는 가부(可否)가 없습니다. 해도 안 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이렇게 이렇게 하면 나쁘므로 이만큼 너는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을 끝까지 잘 지키면 그 대신 상을 받는다.’ 공정한 법은 이런 양면성을 다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이 창세기 본문에서 그것을 자세히 다 규지할 수는 없으나, 좌우간 아담과 하와는 이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돕는 배필을 지으심

 

그러면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아담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해서 돕는 배필을 짓기 이전에 그에게 배필에 대해 생각할 만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는가를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그것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다 지어 주었습니다. 여기 분명히 이른 것은 하나씩만 온 것이 아니라 암놈 숫놈이 함께 왔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은 거기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시와 경륜이 있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만은 혼자였습니다. 자기도 다른 동물처럼 흙이라는 원소로 지음을 받긴 했으나, 자기는 그보다 고귀하게 이성(理性)을 가진 그런 피조물이고 다른 동물의 이름까지 짓고 자기의 고귀한 영성(靈性)을 발휘했는데 말입니다. ‘나에게는 그럼 무엇이 있나? 하나님께서 저러한 금수(禽獸)에게도 다 짝을 주셨다면 나에게도 나에게 해당하는 짝을 주실 것이다.’ 아담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오신 각종 들짐승과 공주의 각종 새들에게 아담이 이름을 지어 준 이야기가 있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지어 주시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이쉬에게서 취하였은즉 이샤(השא)라 칭하리라 하니라.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하리라”(20-23절). 우리말 성경에서는 ‘자’(子) 자가 같고 히브리 말대로는 ‘이쉬에 대해서 이샤라 칭하리라’ 해서 끝에 여성형 어미만 변형시켜서 썼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4절).

 

‘우리’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되, 하나님이 ‘우리’이시면서 또한 하나이신 것같이 사람들도 서로 ‘우리’라고 할 수 있으면서도 또한 ‘나’라고 할 수 있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의 실재로 만드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부부 창조의 신비가 나타납니다. 돕는 배필을 언제 창조했느냐? 아담이 피조함을 받고 사명을 받고 자기의 사명의 거룩한 길을 행하고 있을 때, 또 상당히 그 사명을 수행하느라고 짐승들에게 이름을 다 주었을 때, 이성의 중요한 활동을 발휘한 다음에 아담의 배필을 창조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창조하셨습니까? 돕는 배필이 있어야겠다고 해서 창조하셨습니다.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를 취해서 창조하셨습니다. 발바닥에서 취하지도 않고 정강이에서 취하지도 않고 머리에서 취하지도 않고, 갈빗대에서 취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머리에다 이고 다니지 말고, 발아래에다 놓고 밟고 다니지 말고, 가슴에다가 품고 다니라’ 그말입니다. 그러나 갈빗대에서 취했다는 말에는 또한 무슨 뜻이 있느냐 하면, 하와는 아담 자신에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와는 아담의 한 부분 가운데에서 취하여 만들어진 한 개의 인격자입니다.

 

갈빗대 자체는 아담의 뼈의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은혜와 능력이 역사하셨을 때는 한 개의 인격자가 됐습니다. 한 개의 인격자이지만 소종래(所從來)는 아담입니다. 아담과 한 몸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하신 경영입니다. 남자가 그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격이지만, 원칙상 하나님께서 경영하신 대로는 그게 하나의 몸이요 하나의 살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육체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합치면 다시 하나의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갈빗대 자체로는 하와가 돕듯이 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아담에게서 취하여져 한 개의 개성 있는 인격이 되었으므로, 인격자이기에 아담을 도울 수 있습니다. 얼마나 도울 수 있느냐? 창세기 그 다음을 보면 시험을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을 지금 읽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하와가 시험을 받아 가지고 타락해서 인류 역사상 더할 수 없는 비극에 이르렀는데, 아담 자신도 결국 하와 때문에 그 비극 가운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 위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배필입니다. 남편을 끌고서 시험받아 같이 영원한 멸망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힘을 발휘한 것입니다. 만일 그 영향력을 바로 발휘했더면 같이 영원한 생명 가운데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영향력을 가졌습니까? 갈빗대 하나로는 의미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한 개의 개성과 인격을 주었을 때는 아담을 이끌고 멸망으로 가든지 영생으로 가든지, 갈수 있는 그런 큰 원조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한 결과: 남편과 함께 죽음의 길로

 

하와가 시험을 받을 때 자기 혼자 시험받아 가지고 떨어졌다면 자기 한 몸만 영원한 나락에 떨어져서 방황하고, 하나님은 아담의 다른 쪽 갈빗대를 마저 빼 가지고 배필을 만들었으면 될 텐데, 아담은 어쩌자고 아내가 주는 것을 그냥 받아먹고 갔습니까? 계시를 누가 받았습니까? 아담이 받았습니다. 그는 사명을 받았고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받았다 말입니다. 하와를 만들었을 때는 이미 선악과의 금령이 있는 다음인 까닭에, 하와는 아담에게서 선악과 금령을 배웠습니다. 아담은 계시를 전달해 주고 계시를 해명해 준 사람입니다. 즉, 그는 하와에게 대해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고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고 그것을 해명해 주었습니다. 그러한 아담을 하와가 어디로 끌고 들어갔느냐 하면 죽음으로 끌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이 하와를 따라갈 때 그리로 가면 안 된다 하지 못하고 따라간 것은 하나님의 법을 하와같이 의심해서 그랬겠습니까? 하와는 하나님께 직접 듣지 않고 아담에게서 배웠으니까, 아마 그렇게 희미하게 알 수도 있었겠지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그 말씀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그가 뱀에게 대답하는 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형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변형된 말을 했을까요? 아담이 시원찮게 가르쳤을까요? 하와는 불과 얼마 전에 그 말씀을 들었고, 또한 그것은 중요한 문제이니까 잘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 아담은 예지(叡智)가 도저(到底)한 사람이니까 잘 일러주었을 것입니다. 잘 일러주었다면 하와는 왜 이렇게 비틀어지게 이해했나? 아마 아담은 잘 설명했어도 하와가 잘못 들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늘 곁에 있어서 가르쳐 주니까 적당하게 그중에 중요한 말, 중요한 뜻 하나만 삼켜 버리고서는 그 하나하나의 세부의 의미를 자세하게 잘 알려고 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또 그러기가 십중팔구입니다. 사람이 무슨 말을 전하면 그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소화를 않고 거기에 있는 제일 인상적인 것만 딱 취해 가지고서는 다 알았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하와는 분명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은 그것을 교정해야 하는데, 교정하는 대신 하와와 같이 먹고 금령을 범하는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하와가 그것을 먹고서는 다음에 그에게 주었거든요. “보세요, 내가 이것을 땄는데 같이 먹읍시다” 한 것이 아닙니다. 내외간에 그렇게 금슬이 좋았지만, 그때는 혼자 먼저 먹은 모양입니다. 그렇게 먹고서는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그것을 받고 난 다음 아담은 ‘아,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먹었으니 이젠 죽었다. 하나님이 죽으리라고 하셨다. 네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살까보냐. 나도 같이 죽어야겠다’ 그리고서 먹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하와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있었던 까닭에 비록 죽음이 무엇인지, 또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몰랐어도,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몰랐어도, 사랑하는 하와와 떨어지기 싫어서, ‘그러면 같이 먹자. 나도 따라가겠다’ 아마 그랬을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먹는 날에는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아담은 먹은 그날 당장 죽어 가지고 장사 지낸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아담은 분명히 그날 죽었습니다. 그후로도 930세나 더 살았지만, 참된 의미의 죽음이란 그날 시작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생명과는 떨어져 버렸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냥 저대로 돌아다닌 것입니다.

 

아내의 영향력

 

아담은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명령을 받고 사명을 받았는데 그만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와를 지으셨습니까? 아담을 돕기 위한 배필로 지으셨습니다. 돕는 배필을 어떻게 지으셨습니까? 갈빗대 하나를 갖다가 지으시되 갈빗대로 그냥 남겨두지 않으시고 인격자로 지으셨습니다. 어떤 인격자로 지으셨습니까? 영향력이 강하고 위대한 인격자로 지으셨습니다. 세상 다른 여자에게 아무리 영향을 안 받는 사람이라도 자기 아내한테 영향을 안 받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청년들 가운데 특히 여자 청년 여러분들이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혼인 생활을 하면서 자기는 대수롭지 않게 하는 말이 남편에게 굉장하게 영향을 미치는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아내에 대해서 늘 주의를 하고 관심을 가지는 남자일수록 아내에게 영향을 자꾸 받는 법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아내의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에 자꾸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와는 그런 굉장한 영향력을 가지고 아담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신을 보고 아름답고 훌륭해서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라”고 크게 찬사를 올리고 환희의 기쁜 소리를 외친 그 대상을 끌고서 영원한 죽으므로 들어갈 만큼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하와는 그런 영향을 끼칠 만큼 큰 능력을 가진 돕는 배필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큰 능력을 가지고 무엇을 돕게 만들어졌습니까? 그것은 아담이 받은 거룩한 사명을 이루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아담이 받은 거룩한 사명, 아담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순종하고 나타내는 일을 돕고 북돋우어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아담이 혹시 선악과를 바라보고 있을지라도 하와가 쫓아가서 “당신 무엇을 그렇게 바라보시오?” “저 선악과가 아름다워서 바라보는데......”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면 괜찮소?” “바라보는 것이야 뭐 어때. 저것 따먹는다면 맛이 괜찮을거야. 맛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른 것은 다 아는데 저것은 모르겠어. 그러니 한번 따먹으면 어떨까?” “여보시오, 그게 무슨 소리요? 먹으면 죽으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가령 죽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일을 왜 합니까?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싫어하시는 일인데 그런 일을 왜 한단 말이오?” 하와가 그 말 한마디 했으면, 아담은 ‘이크,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참 잘못했다’ 하고 그 이야기를 다른 어떤 사람이 하는 것보다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 있을 뻔했습니다. 죽는 모사(謀士)를 하는데도 따라간 사람인데 살러 가자는데 안 따라가겠습니까? 하와는 아담에 대해서 그렇게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영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받은 바 그 사명, 곧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을 다스리되 먼저는 이 낙원을 다스리는 그 일을 도와서 했다면 참 좋았을 것입니다.

 

혼인에 앞서 사명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혼인의 목표라는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을 추출할 수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그 목표는 같겠지만, 특별히 그것을 여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준 그 거룩한 사명을 참으로 공감하고 확신하고 붙들어서 희미하던 것은 분명하게 하고, 연약하던 것은 강하게 하고, 그리고 지지부진한 것은 밀어 가지고 같이 끌고 나가기 위해서 혼인이라는, 즉 배필로서 자기의 위치를 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신 큰 목적입니다. 사랑과 행복이라는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나는 혼인을 해야겠다? 여러분, 사랑하니까 혼인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발견한 대로 믿고 확신하는 바 자기 일생에 걸쳐 떠받쳐야 할 사명에 대한 확실한 인식과 해명과 자기 각성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흔히 로맨티시스트들은 혼인하려고 할 때 ‘나는 상대를 사랑하니까 혼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은 보통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혼인해서 3년 동안은 그것으로 버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3년 살고 나면 ‘그것 참, 그때는 요조숙녀인 것 같고 천사처럼 뵈더니 천사가 아니야’ 그런 소리를 하기 쉽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그 사람이 아내를 얻든지 남편을 얻는 판단의 척도를 원칙적인 데에다 두지 않은 까닭에 그렇습니다. 사실상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중요한 은사지만, 그것을 그 자체의 가치보다 더 중시하고 나갈 때에는 축복이 아니고 큰 걸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사랑을 제 위치에다가 놓을 때에는 사랑이 끊임이 없지만 - 왜냐하면 그것은 실망이 없는 사랑이 될 테니까 - 사랑을 그 자체의 가치 이상으로 높이 보기 시작할 때는 크게 실망할 때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한참 연애할 때는 눈에 뭐가 낀 것 같고 또 장질부사나 걸린 것 같아서 그때는 사랑하는 상대의 모든 것이 그냥 다 좋게 보입니다. 무엇이든 다 아전인수 격으로 생각하게 되고, 모조리 다 신사나 혹은 요조숙녀인 것처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깨어나는 날이 있습니다. 장질부사도 앓고 낫는 날이 있다 그 말입니다. 앓고 난 다음에는 이제 홈도 보이기 시작하고, 전에는 웃는 것이 아름답게 보이더니 아름다운 게 아니라 웃으니까 이빨이 여기 비틀어지고 저건 저렇게 생기고 하면서 자꾸 탈을 잡기 시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영속성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남녀 관계에서 한때 우련히 불붙듯이 일어나는 감정은 그것이 숯불 붙듯이 일어나니까 꺼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꺼질 때가 오면 사랑했던 보람이 사라집니다. 그것 때문에 혼인했는데, 그것이라는 큰 목적이나 이유가 없어진다면 무슨 보람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없으니까 시시하고 재미없고 나중에는 차례차례 탈이 자꾸 보이고, 보일 뿐만 아니라 탈을 잡기 시작하고, 그러다 결국 그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될 것 같으며 큰소리 나고, 그 다음에는 밤낮 불퉁거리고 하는 식이 됩니다. 소위 행복이라는 것을 찾았다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나 행복이 목표가 된 그릇된 혼인

 

또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혼인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대한 과오입니다. 내가 거룩한 목적과 거룩한 사명 아래 진실되이 살아나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은 참으로 감사한 것이고, 그것은 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 까닭에 세월이 가도 변함없이 신선하고 건강한 것이지만, 자기가 추구해 나가는 행복은 자기 보기에 행복스러운 것이니까, 자기 멋대로 처방한 약과 같습니다. 자기가 처방해 가지고 취해 나오는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독이 될 수도 있고 부작용이 얼마든지 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그냥 자꾸 만들어서 자기에게 붙여 놓은 다음에 행복스럽다고 한다면 어느새 자기도 알지 못하는 큰 불행이 닥치는 것입니다. 사람은 객관적인 조건이 주관적으로까지 만족을 끼쳐야 행복을 느끼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을 느끼는 것인데, 객관적인 조건들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그 주관이 시시각각 변한다는 데에 사람의 약점이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원래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가 서른 살 때 ‘이렇게 하면 행복스러우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마흔 살 되었을 때 생각하면 ‘그것 뭐 그렇게 시시한 것을 가지고 그랬나’ 하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것을 다 경험했을 것입니다. 열 살 때 여러분의 욕망은 오늘날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서 살 때의 행복은 어머니가 초콜렛이나 껌을 몇 개 사 주면 그것처럼 행복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초코렛이나 껌 몇 개 사 주면 나는 가장 행복스럽겠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숙해 가고 커 갈수록 행복에 대한 욕구도 변합니다. 그런데 불과 20여 세에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고 하면서 그때 자신의 바로미터를 가지고 그 욕구를 만족시켜 줄 대상을 찾아 나갔다가 10년이나 20년이 지나 자기의 주관이 변한 다음에는 ‘하이고, 그때 내가 왜 그랬나? 이제는 짊어다 줘도 싫다’ 그러는 날이 오고 맙니다.

 

삶의 원칙: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칩니다. 로마서 14:7-9을 볼 것 같으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자기 행복을 위하여 산단 말입니까? ‘자기 행복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품고 살아야 할 생활의 큰 원칙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깨달아 거기에 다 부응해 드리려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신께서 우리 가운데 계셔서 져 주시는 짐인 까닭에 여려운 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땅히 져야 할 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고, 그리스도적인 사명입니다.

 

남편이 이러한 그리스도적인 사명을 수행하는데, 아내가 그 사명에 대해서 공감을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그렇다. 저것이 또한 내 사명이다’라는 확신을 받았을 때 그 두 사람은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란 이렇게 같은 부르심을 받아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척도를 버려두고 자기의 행복이나 그렇지 않으면 애정과 같은 자기의 정서에 표준을 두고 상대를 구해 나가면, 첫째, 그리스도의 법을,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가 바라던 행복도 얻지 못합니다. 그 당시에는 물불을 가리지 못하고 좋을지 모르지요. 열병에 걸린 것처럼 야단을 내는 때니까 어쩔 줄 모르지만, 그것이 어떻게 됐든지 다 해독돼 가지고 시들어진 다음에는 ‘글쎄, 그것 참 허무한 일이다. 좀 더 그때 정신을 차려 가지고서는 착실히 생각했어야 하는데…….’ 세월이 지나고 제 정신이 들면 그런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배우자를 선택할 때, 자기가 어떤 계획이 있어서 그것을 이루기에 적당한 사람을 얻으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요령꾼입니다. 요령을 잘 부려 가지고서는 ‘요렇게 조렇게 해서 저 사람이 생활 능력이 이만큼 있는데, 나는 이 정도로 능력이 약하니까 길고 짧은 것을 싹 들어맞춰 가지고 살아야겠다’고 그렇게 묘한 요령을 부립니다. 단순한 사랑이나 막연한 감정,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자기 행복을 위해 혼인을 하는 사람보다는 이런 사람이 훨씬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에 가서는, ‘그냥 살았으니까 붙어살아야지 별수가 있나?’ 하고 단념하고 체념가운데에서 사는 것이지, ‘하나님이 과연 내게 주셔서 감사하다’고 감사하면서 살게 될는지 의문입니다.

 

남편은 머리 역할을, 아내는 심장 역할을

 

그런 까닭에 혼인을 하려고 할 때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실제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혼인에 대하여 가장 먼저 가르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5:23-32을 보면, 먼저 남자는 여인의 머리가 된다고 가르쳤지요? 그리고 또 그 다음에 여인은 항상 남자를 돕는 배필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남자로서 여자를 구하려고 할 때는 자기가 분명히 여인의 머리가 된다는 위치에서, 고린도 전서 11:3에, “남자는 여인의 머리요”라는 위치에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된 것같이 내가 여자의 머리가 된다’ 하는 생각 가운데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자를 이고 다니게 생겼다면 생각을 고쳐야 합니다.

 

세상에는 남자가 여자를 떠받치고 다니는 풍습도 있는데, 저는 미국에 있을 때 이런 풍습을 보면서 그것이 만일 그리스도인의 정신 가운데 들어가면 좋지 않은 영향을 줄 만한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어떤 젊은 부부가 길을 가다가 부인의 구두끈이 풀어지니까 부인은 발을 떡 내밀고 서 있고, 남자는 쭈그리고 앉아서 구두끈을 매 주고, 그런 다음에는 “됐어요, 갑시다!” 하면서 여자는 앞서 가고 남자는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풍습이니까 그런가 보다 하지만, 만일 속까지 그렇게 됐다면 큰일이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떠받들고 다니면 나중에는 머리에다 이고 다녀야 할 것 아닌가? 머리에다 이고 다니면 되나…….’ 그러나 머리에다 이고 다녀도 남자가 머리 노릇만 잘하면 됩니다. 남자는 머리 노릇을 해주고 여자는 그의 심장 노릇을 해주면 됩니다.

 

남편은 항상 아내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바른 사상과 바른 해명을 주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적령기의 여자가 상대를 고를 때는 항상 상대방 남자가 내 머리가 될 수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덮어놓고 나보다 많이 알고 나보다 말을 잘하고 나보다 사상가인 사람을 찾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본래의 뜻이 있다. 그 선하신 목적을 위해서 나를 재창조하셨으니 그 길고 나를 이끌고 가실 텐데, 그 사람이 결국 내가 가는 그 길에 있어서 항상 앞서 가르치면서 갈 만한 사람이냐?’ 이런 점을 늘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은사를 낭비하지 않게 되는 혼인이어야

 

그러면 여기서 얼른 생각하는 것은 ‘나는 일생 무엇을 해야 할 사람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 말씀은 사람이 장래의 일을 알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선후사를 알게 할 자가 누구냐”(전10:14). 그렇지만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정하고 나갈 때 방향을 잡을 만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또 내가 주를 사랑하는 까닭에 나에게 주신 은사를 낭비없이 써서 일하는 동안에 점차 주께서 내 일생의 업으로 주시는 일에 접촉하게 됩니다. 그것을 늘 생각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려고 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첫째, 이 일은 내가 주를 사랑하는 까닭에 하는가? 둘째, 이 일을 하기 위한 충분한 은사가 내게 있느냐? 셋째, 하나님께서 한 걸음씩 이 길로 나를 인도하신 분명한 경험을 내가 가지고 있느냐?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낭비를 주지 않느냐?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혼인에도 마찬가지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내가 그 남자를 선택한 것은 애가 그를 사랑하기보다는 내가 주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께 훨씬 더 유용한 도구가 되는 까닭에 내가를 사랑하느냐?’ 이것을 먼저 판단해야 하고, 둘째는, 이 일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은사, 즉 충분한 기능이 내게 있느냐? 또한 내가 그와 혼인함으로 말미암아 내 기능이 낭비되지 않고 충분히 사용될 수 있는 부부가 되겠나? 내가 그와 혼인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러 가지 은사를 땅에다 묻어 버리고, 달란트를 땅에다 묻어 버리고 장사를 못하고 말지는 않겠는가? 여러 가지 구애되는 일이 있어서 큰 짐을 짊어지고 허덕거리면서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의 큰 은사는 무시해 버리고 낭비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나? 셋째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를 한 걸음씩 그 앞으로 인도하신 확실한 생활의 경험이 내게 있는가? 그것을 따져 가면서 상대에게 향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남자가 됐든지 여자가 됐든지 내게 주신 은사가 다섯 달란트면, 아내가 남편을 맞이해서는 오히려 다서 달란트가 열 달란트가 돼 가지고 더 많은 이익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훌륭한 청지기 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다섯 달란트 가운데 몇 달란트는 땅에다 묻어 버리고, 별로 의미 없는 공연한 일로 은사를 낭비하고 소모하게 만드는 혼인이라면, 내가 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서로 헤어져서는 못 살 것 같을지라도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주의하십시오. 사랑해 가지고 정이 들어 못 떨어진다는 소리를 하기 전에 미리 주의를 해야 합니다. 나중에 정이 들어 가지고 못 떨어지겠습네 하면 참 문제입니다. 억지로 그것을 떼어놓는다는 것도 사실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누가 떼어놓을 사람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요새 사람들은 부모라도 떼어놓았다가는 집에서 야단을 낼 테니까 떼어놓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있기 전에 항상 우리는 주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뒤따라 다니면서 항상 눈을 밝히고 주시해도 본인이 주의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부모가 자식의 발을 묶어 놓은 것도 아니고 뒤를 밤낮 쫓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이런 착잡한 도시 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다 일일이 그 생활을 알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본인이 항상 주의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낭비가 안 되겠나? 내게 주신 이 달란트를 충분히 발휘해서 지금까지 나온 그 길에서 더욱 위로 가게 되는 것이냐? 아니면 지금까지 가던 길을 포기하고 저 아래로 내려가서 다시 무엇인지 시작해야겠는가?’ 그것을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이 퍽 공리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의 경제법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달란트를 사람 마음대로 소모하도록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신 목적은 그것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언제든지 존절히 절약하여 써서 반드시 그 달란트로써 무엇을 남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든 일에 있어서 중요하지만 특히 혼인을 하는 일에서는 참으로 판단의 요체(要諦)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요체하에서 항상 상대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터 위에서 훨씬 냉정하게 따지는 것이 대단히 좋은 태도입니다.

 

정(情)이나 행복보다는 사명에 대한 절실한 자각으로

 

서로 친구로 다정하게 지내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친구로 다정하게 지내다가 부지불식간에 정들었으니까 혼인을 해야겠다? 당초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끼리라도 친구로 다정하게 지내면 나중에는 정이 드는 것입니다. 정들었으니까 자별하게 왔다갔다 하고 이야기도 정답게 하는 것이지만,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겠다고 않는 것입니다. 여자들끼리라도 처음에는 만나서 서먹서먹하고 그 다음에는 인사나 하고 지내다가, 나중에는 정답게 돼 가지고서 자기의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하고 지내지만, 그러니까 혼인해야겠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혼인이란 그런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혼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내신 제도로서, 남편과 아내 둘이 한 몸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의 크신 일을 같이 감당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사명을 새로 주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은 혼인하기 전에 부부 두 사람에게 벌써 다 심어 주셨습니다. 사명의 크신 은혜를 은사라는 형식으로 심어 주신 것입니다. 그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벌써 은사를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은사가 없는 사람이 이게 내 사명이라고 덤빌 일이 아닙니다.

 

은사라는 것은 어떤 특수한 일을 이루기 위한 적용된 기능을 말합니다. 즉, 은사가 있다는 것은 특수한 일을 이루기 위한 적응된 기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혼인의 대상을 찾을 때는 그 기능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선용돼서 하나님께서 내게 참으로 요구하신 바 열매를 맺느냐 하는 것을 먼저 바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남편이나 아내의 감을 고를 때의 표준이 참 희박해집니다. 먼저 내 자신의 은사는 하나님 나라에서 어떻게 유용하게 쓰일 것인가? 여기에 대한 자기의 분명한 해명이 생긴 다음에 비로소 이렇게 혼인을 해놓으면 그것이 낭비가 될 것인가 아니면 더욱 열매를 맺을 것인가 하는 것을 따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그와 같은 것을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헤와 기능을 주셨으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지, 그런 것을 다 무시해 버리고서 정들었으니까 한다거나, 아니면 ‘저 사람은 돈이 많고 아내를 어떻게든지 극진하게 떠받치고 다닐 사람이니까 그리고 가면 호강하겠다’ 거나 ‘거기는 시어머니도 없고 시아버지도 없고 둘이만 재미있게 살테니 하겠다’ 거나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이렇게 가르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워주셔야 집이 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억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모시는 문제나 관혼상제 등의 사회 관습에 대해서도 정당한 표준을

 

이후에 우리는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 같은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당하겠는지를 생각해 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 사회 안에서는 유교(儒敎)적인 전통에 의해서 여러 가지 무리가 발생합니다. 그런 역사를 따라 흘러오다 이제 그런 역사에 그리스도의 새로운 정신이 들어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제는 어떤 정당한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가지고 덮어놓고 외국의 모양만 성급히 본떠 가지고 ‘부모는 부모고 나는 나다’라고 딱 떼어 버리는 식의 방법은 정당치 않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든지 개인개인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사명이 있으나, 그 사명이라는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전제로 한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으로서 사랑이라든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성품의 태도라든지를 무시하고 사명만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사명, 사명’ 하면서 무슨 일을 한다고 그러지만, 그것은 사회적인 성격의 문제이지, 먼저 하나님이 값으로 따지는 열매라는 것은 그의 품성의 생활에서, 도덕적인 성격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도덕적인 성격이라고 할 때 참된 사랑이라는 말 한마디를 가지고 보더라도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참된 사랑이면 부모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참사랑이겠는가?’ 그것도 우리가 냉정히 생각해야 합니다. 덮어놓고 제도를 고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우리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안고 있는 문제가 단순히 과도기적인 문제만은 아닙니다. 아직도 전통이라는 것이 흘러 내려오고 있고 그 가운데 여러 가지 무리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 이 세대에 처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테스트로, 중요한 도전으로 다가와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은 더 주의해서 살펴가지고 어떻게 우리가 이 현실에 대해서 바르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예비를 했어야 할 텐데, 교회가 지금까지 그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한 일이 없습니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잘 생각해보지 않고 이렇게 만든다 저렇게 만든다 하면서 덮어놓고 중요한 원칙을 항상 무시하고 만들어 놓은 까닭에 자꾸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율법주의적으로 자꾸 변해 갔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덮어놓고 서양의 형식을 뒤따라가면서 자꾸 이야기하려는 정도였습니다. 이런 것이 오늘 저녁에 여기서 다 할 이야기는 아니나, 그것은 여자가 혼인을 하면 당장 남의 집 며느리가 된다는 문제가 되는 까닭에, 심각히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남자가 사위가 된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왜? 아직까지도 한국에서는 말로는 장가를 간다고 그러지만, 자기 집안에 신부를 데려오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혼인뿐만 아니라 또한 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참으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자녀가 잘못한다고 해서 무조건 호령을 해야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뭐라고 가르치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겠나? 유교적 관습에 배어 있는 이런 사회제도 안에 있는 우리로서는 자식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런 것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맺음말

 

어쨌든지 먼저는 대상을 구할 때에 무엇이 표준이 되겠는가 하는 것을 오늘 저녁에 우리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앞으로 더 생각하고 더 배울 수 있는 좋은 발판이 되기를 바라고, 실질상 이제부터 여러분이 자기의 상대를 구하게 될 때 잊지 말고 간직해야 할 중요한 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실 때 원칙하에서 만드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담이 사랑할 대상이 없어 가지고 쓸쓸해서 안됐다. 쓸쓸하니 참 불쌍하다. 내가 사랑할 대상을 하나 주마. 행복스럽게 둘이 사랑하고 살아라’ 그것이 아닙니다. 둘이 멋대로 행복스럽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이 법을 주었다. 너는 이 금령을 지키고 늘 나와 관계를 가지고 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도록 큰 힘을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부부는 그 힘을 가지고 거꾸로 그것을 범하고 죽음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이러한 최초의 큰 실패의 사실은 그 후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다 만회하셨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이상적인 부부의 전형으로 딱 서 있다는 점입니다. 혼인을 할 때도 그렇지만, 혼인을 한 다음에도 생활의 중요한 요체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배워 갈수록 그것이 곧 그대로 부부의 생활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첨부할 것은, 과거 우리 한국에서 특별히 대한예수교 장로회에서 특별히 어떤 준칙을 세우고 혼인을 하게 했는데, 처음에는 준칙을 내려서 혼인은 믿는 사람끼리만 하라고 했다가, 그것이 차츰차츰 해이하게 되고 나중에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라도 대개 학습()을 주어서 시키든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 와서는 원입교인()이면 한다는 것이 현재 가지고 있는 법이올시다. 원입교인이라고 할 때는 학습도 안 받았다 할지라도 ‘나도 예수 믿겠다’ 하고 들어오면 그냥 들어올 수 있다 하는 말입니다. 누구나 장가가려고 나도 예수 믿겠다고 한마디씩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 나는 장가가기 위해서 그런 소리는 못한다’고 뽐내지만, 나중에는 가고 싶으면 그 말 한마디 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거의 관행이 돼 버렸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한 법칙에 따르면 믿는 자가 혼인의 대상을 구하려고 할 때는 믿지 않는 사람 가운데서는 못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을 모호하게 했던 과거의 태도나 그런 습관을 우리가 그대로 가지고 나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대상을 나에게 보여 주시고 만나게 하여 주시는 것이지, 교회 안에 적당한 사람이 없으니까 할 수 없이 교회 밖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정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일본에 가니까 그 문제를 가지고 간곡하게 묻는 목사님들이 있었습니다. 일본에는 아무래도 믿는 사람의 수가 적으니까 적령기의 여자는 자꾸 나이를 먹어 가는데 상대가 없다 그 말 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래서, “다른 수가 있겠습니까? 나가서 열심히 전도를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자꾸 불어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당초에 예수 믿는 사람을 안 주겠다고 그런 일이 있습니까?“ 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 한국에서는 큰 문제가 안 되지만 문제가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적당한 사람이 교회 안에는 없고 밖에 있다는 말은 가장 중요한 조건을 무시하고서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라는 것을 무시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믿고 안 믿는 것보다는 사명이라는 문제가 크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정도에서 잘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김홍전, 혼인 가정과 교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