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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란? - 김지호 교수

Bavinck Byeon 2014. 6. 18. 19:11

칼빈주의란?

 

김지호 교수(칼빈신학교)

 

1. 칼빈주의 기본원리

 

칼빈주의란 존 칼빈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사상체계인데 이것은 칼빈이 창작한 것이 아니고 칼빈이 성경을 해설한 것이다. 이 사상은 어거스틴 교설의 부흥이고 그보다 수세기전의 바울교리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주의는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하는 집합체로서의 사상의 총화가 아니라, 기본 원리를 공동의 토대로 하는 유기체적인 총체이다. 그리고 그 통일성은 신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예술, 정치, 사회, 과학 등을 포괄하는 사상체계이다.

 

칼빈주의의 기본원리는 하나님 중심 사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사상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워필드는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 배후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손을 보며, 기도하는 태도로 자기의 전 생애를 살아가는 자이다. 그는 구원에서 자아의존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칼빈주의에 원리에 대한 오설(誤設)들 중 예정론은 칼빈주의 기본원리라기보다는 구원과 관계된 칼빈주의의 결론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목표는 되어도 칼빈주의 자체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원리로 하여 인간의 전 생활(신학, 과학, 예술 등)의 부분에 관한 체계를 구성하였다. 그 체계는 하나님의 창조, 인간은 범죄, 예수님의 구속을 통한 계시록의 회복을 지향하는 체계이다.

 

2. 칼빈주의 체계에서의 성경과 신앙의 위치

 

성경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자연을 자연계시 또는 일반계시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어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칼빈주의 고백에 "자연계 전부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성한 법정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인류는 범죄로 눈이 어두워져서 성경이라는 특별 계시의 안경을 써야만 자연 계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죄인의 구원에 대해서나 이 땅에서의 삶의 모든 부분들도 특별 계시인 성경의 지도를 받아야 하게 되었다. 칼빈주의자에게 있어서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성경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오직 순종뿐이다.

 

그 이유는 성경을 축자 영감된 - 유기적으로 -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체계와 생활에서 성경은 중심 원리며 생활의 법칙과 표준이다. 신앙 신 신학 혹은 자유주의자라고도 불리는 사람들은 초자연을 부정하며, 신앙의 근거를 이성에 둔다. 이들은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세력으로 보고 성경도 특별계시로 믿지 않는다. 결국 이들은 자기 자신과 자기가 보는 것과 자연 세력만을 믿을 뿐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신 신학과는 반대로 초자연적이며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다. 신앙은 계시에 근거를 두며 계시의 유일한 원천은 특별계시인 성경이다. 이들은 죄로 인해서 신앙의 필요성을 느끼며 신앙을 통해 이들은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하나님의 보내신 거룩하신 자이신 줄 알게 된다.

 

신 신학자는 과학주의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학적으로 관찰될 수 없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세상과는 구별되시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의 신앙의 방법은 하나님이 주시는 확신에 근거한다. 성경에는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는 창조론, 내세론, 삼위일체, 동정녀 탄생, 이적 등이 많이 있다. 이런 이유로 교부들은 "신앙이 지식보다 앞선다"고 했으며 터툴리안도 "나는 하나님에 대해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믿는다"고 고백하였다.

 

3. 칼빈주의관

 

(1) 칼빈주의 경제관

 

들어가는 말

 

성경은 경제를 가르치는 경제 이론이나 교과서는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경제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칼빈주의의 근본사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인간의 모든 삶의 원리요, 표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주의의 경제관은 그것이 곧 성경적 경제관이다. 그런데 독일의 경제학자 웨버(Marx Weber)는 자본주의의 기원은 기독교 정신 즉, 칼빈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경제의 개념

 

경제란 무엇인가? 에 대하여 명백하고 쉽게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어원을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경제란 말의 근원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에서 생각할 수 있는데 치국(治國)이라는 말은 경국제민(經國濟民)이란 것이다. 이 말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즉 경제란 국가적인 스케일에서 사용되는 용어였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영어의 Economy나 독일어의 konomie는 헬라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그것은 집을 뜻하는 O s(오이코스)와 법을 뜻하는 s(노모스)란 단어가 합하여 된 것이다. 즉 서양에서 사용하는 경제라는 말은 가정적인 크기에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통적인 경제학설에 의하면「생산과 분배와 소비라는 기초적인 삼단계」를 의미한다고 하지만 복합적인 면에서는 인간들의 물질생활을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관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생산을 위한 노동, 노동의 결과로 얻어진 생산물, 분배, 교환 및 화폐를 매개로 한 유통, 인간생활을 위한 소비, 다음의 생산을 위한 축적, 그리고 재생산 등의 모든 관계를 의미한다.

 

경제의 이념

 

1. 인간의 무한한 욕망에 대한 충족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욕망은 욕구대로 충족시킬 수는 없다. 인간이 충족시킬 수 있는 객체의 분량은 인간의 욕구와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 “상대적 희소성”즉, 인간의 욕구 충족 대상의 희소성을 인간은 극복하여야 하며 인간은 무한히 변화하는 욕구를 되도록 지속적으로 충족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 충족에 있어서 평화적으로 행사하여야 하며 전쟁, 약탈, 폭력 등에 의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수단의 “상대적 희소성”“평화적인 행사”와 두 가지 요건이 경제생활의 기본특징이다. 수단의 상대적 희소성 극복을 위해 많은 물자가 필요하며 방법은 노동을 통하여 자연에 작용하면서 자연에서 물자를 얻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자연과 밀접한 상호교섭을 하는 것이다.

 

2. 인간 상호간의 사회관계를 중요시한다.

 

인간은 고립하여 물자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일정한 사회관계 안에 들어가서 물자를 얻는다. 그러기에 경제생활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인 동시에 인간 상호간의 사회관계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하여 많은 물자, 재화를 필요로 하는데 이를 농업, 어업, 광업 등을 통하여 얻는다. 농업, 어업, 광업을 통해 얻은 물자는 공업 등을 통하여 담당하는 것이 상업 유통 과정이다. 이와 같이 물자의 생산, 유통, 분배의 과정을 밟으면서 우리의 생활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경제실태이다.

 

3. 생산, 분배, 소비(생산을 위한 축적), 재생산 등의 순환을 중요시한다.

 

경제이념은 생산을 위한 노동, 노동의 결과로 얻어진 생산, 분배, 교환 및 화폐를 매개로 한 유통, 소비, 다음의 생산을 위한 축적, 그리고 재생산 등의 모든 관계가 정상적으로 순환하는 것이다.

 

경제의 원리

 

1.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모든 인간들에게 바른 삶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경제질서란 “생명보존에 필요한 물질적 상품이 생산되고 분배,그리고 소비되는 과정을 말한다.”(에밀 부르너)

 

2. 경제질서는 다른 말로 경제윤리이다.

 

이것은 경제형태와 조직 및 계급의 계급의 구성 등이 변천됨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그러나 신학적 경제윤리는 크게 재화에 대한 금욕적 태도와 하나님의 창조와 실제적 필요성에 입각한 긍정적 태도 이 두 가지 입장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 이 금욕과 필요의 이중성을 어떻게 실천적 이론적으로 표현하는 가에 따라 기독교의 경제윤리관은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3. 역사상 경제행위가 적극적으로 시인된 것은 종교개혁을 할 때이다.

 

칼빈주의에 의해 현세의 세속적 노동이 종교적으로 신성시되고 직업윤리가 확립되었다. 이들은 경제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사회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한 당연한 의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른 경제윤리를 파괴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이다. 이에 대해 기독교는 경제생활을 규율할 수 있는 최고의 윤리적 힘을 사랑에 두고 이것을 이기심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항 수단으로 삼는다.

 

우리의 물질관

 

1. 물질의 취득방법

 

약자를 압박함으로 부를 증대시키는 것을 금하고 또 책망하고 있다.(출 20:15, 렘 22:13, 약 2:6 ; 5:4) 물질이란 이웃을 위해 선한 목적에 사용될 위탁물이지 이웃을 해칠 목적으로 맡겨진 것이 아니다.

 

2. 물질의 사용방법

 

물질은 세력을 얻는 일에만 사용되지 않는다. 물질은 인간의 방종과 과장을 위해서도 사용된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목적으로 물질을 사용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치나 자녀교육을 위한 지나친 낭비나 탐심에서 오는 물질의 남용을 말아야 한다.

 

3. 물질에 대한 마음의 태도

 

인간은 누구에게나 물질에 대한 욕망이 있다. 성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할 것이지 타인의 것에 욕심을 가진다든지 자신의 특수한 기술의 부족을 속이는 방법으로 해서는 안된다. 기독교 기업인은 이윤을 극대화해서는 안되며, 항상 고객이나 종업원에게 최대 가치를 주는 경제 행위가 가장 가치 있는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특별히 성도들은 주인의 소유권과 사용권과 회수권 그리고 감사권을 인정해야 한다.

 

(2) 칼빈주의 교육관

 

들어가는 말

 

칼빈주의는 현대 교육에 지대한 공헌을 이룩해 놓았다. 즉 현대 교육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칼빈주의의 영향이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교육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근대 정신의 지주를 이루는 포괄적 사상 체계로서 교육을 포함한 모든 문화면에도 큰 영향을 끼쳐 왔던 사상이다. 칼빈의 교육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책을 따로 쓴 것은 없으나 그의 교육 목적이나 학교교육의 중요성, 조직 등은 “기독교 강요”를 위시하여 그의 여러 책에 잘 나타나 있다. 기독교 교육이 무엇인가로부터 기초, 대상, 목적, 내용, 방법 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교육의 개념

 

교육이란 educare(에두까레)라는 라틴어에서 온 말로 “끌어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불완전한 상태에서 완전한 상태로 향상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기독교 교육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쉐릴(L. J. Sherill)은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 사회, 이웃, 세계, 자신과의 관계에서 변화가 일어나도록 참여하고 지도하는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들의 노력이다”한 마디로 교육은 변화이고 변화를 위한 모든 활동이다 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 교육의 기초

 

1. 기독교 교육은 성경에 기초한다.

 

칼빈은 1538년에 작성한 제네바의 학교(The Genevan Gymnasium)의 프로그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배움의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을 알려주며,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삶의 방향을 제시할 뿐 아니라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2. 기독교 교육은 신학에 기초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체계화한 학문 즉, 칼빈주의적 신학 토대 위에 기독교 교육은 세워지는 것이다.

 

3. 기독교 교육은 시회문화에 기초한다.

 

교회가 사회의 한 부분이며 집단이다. 따라서 사회 변동과 제도의 영향을 받으며, 사회 문화는 기독교 교육에 영향을 준다. 창 2:15에서 에덴 동산을 위임받은 아담의 생활은 곧 문화를 의미하며 이런 인간의 행위로부터 결과되어진 것이 곧 문화이다. 인간의 사회적 생활은 역사적으로 변천해 왔으며 인간은 변천하는 문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기독교 교육의 근본 진리는 변치 않으나 그 방법은 변화 받는 것이다.

 

4. 기독교 교육의 대상

 

교육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임으로 인간 이해의 진지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 교육의 대상

 

기독교 교육의 대상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사람이 참된 의미에서의 유일한 교육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나면서부터 부족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 교육은 이 부족한 상태로 태어난 부분들을 채워 주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영. 육안에) 그런데 칼빈주의 교육관에서는 교육의 대상인 사람에 대하여 지녀야 할 선 지식이 필요하다.

 

몇 가지로 살펴보면 : 사람은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존재(피조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 중 가장 존귀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이 불순종하여 범죄 함으로 타락하였다. 이 타락은 사람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고귀성과 공의, 지혜, 선, 참지식, 의 등을 영원한 저주와 멸망의 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비참한 자리로 전락된 인간에게도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지성, 이상, 양심, 만물 통치권 등이 남아 있었다. 이 비참한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 얻게 하셨다. 이 구원론적 근거가 모든 궁극적인 해답이다. 즉, 사람은 이런 지식을 얻은 가능성을 받았기 때문에 지식의 습득과 인격의 변화를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기독교 교육의 목적

 

칼빈주의 교육의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른 크리스챤으로서의 생활을 하도록 변화시키는 작업이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영혼 구원 눅 19:10)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쓰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딤후 2:5)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하게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하기 위해(딤후 3:17)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고전 10:33, 롬 11:36)

 

기독교 교육의 내용(신 6:4-9)

 

일반적인 교육 내용은 첫째는 기술교육이다.(시 144;1, 출 36:1) 둘째는 지도 교육이다. 셋째로는 도덕교육이다.(잠 1:7) 그러나 칼빈주의는 교육의 내용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하나님께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에게 관한 지식이다. 하나님께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여호와를 아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며, 교제하는 것을 포함한다.(신 6:4-5) 사람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근거하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 줄 아는 자로 가르쳐야 한다.(눅 10:27) 하나님을 사랑으로 섬기고 봉사하며 이웃을 위해, 교회를 위해 봉사할 줄 아는 자로 양육해야 한다. (엡 4:11-12, 딤후 3:16-17)

 

기독교 교육의 방법

 

1. 너는 마음에 새기고 모범을 통해 가르쳐야 한다.(신 6:6)

 

학사 에스라는 에스라 7장 10절에서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 EX : 예수 그리스도, 사도바울

 

2. 사랑으로

 

EX : 예수 그리스도(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 보다 더 큰사랑이 없나니……) 사도바울(살전 2:8)

 

3. 부지런히(깨어 있는 모든 시간. 신 6:6-9)

 

집에 앉았을 때, 길에 행할 때, 누워 있을 때, 일어 날 때, 강론하고 손목에 매며 문설주에 붙이라.

 

(3) 칼빈주의 국가관

 

들어가는 말

 

국가관이나 정치에 관한 칼빈주의적 적용은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칼빈주의가 신학체계를 갖추기는 충분하지만 소수의 일반적 진리 외에는 정치계에 공헌할 진리가 없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칼빈주의는 정치적 체계를 발전시킨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세계사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교차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정신사적으로나 정치사적으로도 그러하다. 정치의 원형 종교와 정치의 통일체를 우리는 멀리 헤브라임의 원류인 이스라엘의 신정정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원형이 인간의 수중에 주어졌을 때 급속히 와해와 실패의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어서 정치 고유의 문제성은 헬레니즘의 원천인 도시국가에 소급된다. 과연 민주주의적 건설은 어떠한 기초를 요구하며? 기독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발언해서는 안되는가? 또는 발언해야 하는가? 이 점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주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국가의 기원

 

1. 국가는 인간의 자연적 본능으로 인하여 자연히 생겨졌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사회적 충동에서 국가가 생겼다. 사람에게는 “군서 본능”이 잇다. 그래서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가족, 씨족을 이루게 한다. 칼빈주의자는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사람에게 이 “군서 본능”을 주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회적 본능만이 국가의 기원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2. 칼빈주의에서는 국가의 기원을 아담의 범죄로부터 찾는다.

 

인간이 죄악상태에 빠지게 됨으로 질서가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국가를 세우시고 정부와 관헌을 인정하시어 타락한 인간을 통치하신다는 것이 성경에 근거한 칼빈주의 국가관이다. 인간의 죄로 죄의 제재, 사회 공적 질서 유지, 교회가 선교사명 성취를 위하여

 

3. 칼빈주의자들은 국가 정치에 있어서도 성경을 표준으로 생각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을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유일한 법칙으로 믿는다. 그러면서도 자연과 역사를 무시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불완전함으로 진리의 표준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둘 뿐이다. 정치학의 기초도 성경에서 찾는다.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인 국가

 

칼빈은 국가가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지상의 권세가 왕이나 다른 통치자의 손에 주어진 것은 인간의 완고한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그의 거룩한 명령에 따라 된 것이다”(Inst. Ⅳ. 20. 4) (cf 단 2:21) 그리고 칼빈은 충성스러우며 순종하는 왕들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다윗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훌륭한 양심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조금도 경솔히 행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야망이나 부패한 욕망을 가지고 국가의 변동을 찾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자기가 하나님의 정하심에 때라 왕이 되었다는 것을 철저히 믿고 그러한 것을 탐내지 아니하였으며 더욱이 그런 것은 생각조차도 아니하였다”라고 하였다.(시 2:1-3, 주석) 칼빈에 의하면 통치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아 신적 권위를 부여받은 자이다. 사실상 그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Inst. Ⅳ. 20. 4) (cf. 시 82:6; 딤전 2:2; 벧전 2:13; 렘 27:6)

 

국가의 임무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와 국가,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과 세속정부가 서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만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 놓았다. 이 두 영역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양자가 다같이 그 기원을 하나님께 두고 있다는 점과 하나님의 목적달성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각자가 상호간의 봉사를 통하여 서로 관련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통치자들(정부국가)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하여 똑같이 그들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유지하며 공예배를 보존하는 일이다.

 

통치자(국가)가 세속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육체적인 복리를 돌보는 것이 그 본래의 임무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그리스도인 사회에서 종교가 공적인 인정을 받아 참된 인간성이 득세하도록 힘쓰는데 있어야 하는 것이다.(Inst. Ⅳ. 20. 3)

 

2. 교회를 보호하는 일이다.

 

권세자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임무는 복음의 순수한 설교와 이 설교의 책임을 맡은 교회를 보호하며 돌보아 주는 일이라고 칼빈은 생각하였다. EX) 로마 카톨릭교도인 찰스5세 황제에게도 칼빈은 교회개혁이 신속히 이루어지도록 경고 세베투스를 반박하는 논문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에게 대하여서는 필요하다면 권세자들이 검으로 간섭해도 된다고 주장하였다.(cf: 사 49:23)

 

3. 법과 질서를 보존하는 일이다.

 

국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일국의 민법은 전적으로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그 시민의 생활을 다스리는 법률이요, 다른 민족의 경우에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은 반드시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시는 사람의 영속적인 규범에 맞도록 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사상이다 공동의 평화와 안녕 질서를 도모하는 것 공공의 복지를 반대하는 악인들과 반대자들을 엄격하게 처벌하는 것

 

국민의 의무

 

칼빈은 국민의 의무에 주의를 일으키는데 조금도 피곤해 하지 않았다. 칼빈은 권세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게 순종함을 뜻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대표자로 세우신 통치자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된다고 주장했다.(cf: 롬 13:1. 주석) 따라서 국가가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지 관계 할 것 없이 크리스챤은 기쁜 마음으로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칼빈은 강조한다. 칼빈은 악한 군주까지도 인간의 죄를 벌하기 위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채찍으로 보았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폭군이라 하더라도 어떤 점에서 인간사회를 공고히 하는데 도움이 안된 폭군은 없었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에서 성도들에게 구원의 수단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기도하는 일이다. 악한 지배자가 선정을 하도록 기도할 것 이 악정이 우리 자신의 죄 때문이며 이 고통의 채찍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할 것 정의의 질서가 세워져 온 인류가 일치하여 하나님을 경외 할 수 있는 정부를 세워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역사상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는 네 가지 형태가 존재해 왔다. 구약의 신정정치와 중세의 교황지배와 같이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는 형태 교회를 국가의 많은 기관 중 하나로 보고 국가가 교회를 지배하는 형태 황제숭배를 거부함으로써 박해를 받았던 초대 기독교와 같이 교회와 국가가 배타되는 형태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는 형태이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원칙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다고 보는 형태 등이다.

 

(4) 칼빈주의 노동관

 

들어가는 말

 

오늘 한국사회는 과연 노동철학이 있는가? 실업자가 200만을 넘었다고 하는 한국사회이지만 3D 업종에는 아직도 인력난을 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 것인가? 이와 같은 현상은 한마디로 노동에 대한 바른 철학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노동의 철학을 가져야 하는가? 왜 노동은 해야만 하는가?

 

몇 가지 측면에서 보면 :

 

유물주의적 노동관 : 노동의 목적이 단순히 생계유지와 부의 축적을 위하여 일함.

 

인본주의적 노동관 : 자아실현과 자기만족을 위한 출세주의가 노동의 목적이다.

 

칼빈주의적 노동관 : 어떤 영역에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사람의 목적이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한 것이니 만큼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것이 노동의 윤리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노동

 

1.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명령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마지막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문화명령을 주셨다(창 1:28).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문화창달을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은 먹고, 자고, 놀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힘써 에덴동산을 관리하고 경작하고 개척하는 노동이 필수적이었다. 죤 밀턴(J. Milton)은 “하나님이야말로 위대한 고용주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노동은 사람의 기쁨과 환희가 되었고 사람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2. 노동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는 바로 열심히 노동하고 난 다음에 주는 안식의 복을 주기 위함이었다. 즉, 안식은 곧 노동을 전제한 것이며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로서 영광을 돌리지만 노동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어떤 이는 좀 지나치기는 하지만 “노동을 예배의 한 부분”이라고 했다. 모든 칼빈주의자들은 노동을 하나님의 은헤와 축복으로 보고 있다. 특히 바빙크(J. H. Bavinck)는 하나님의 창조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우리 인간의 노동에 대한 소명은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얀 메이스터(Jan Meester)목사는 “노동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봉사”라고 규정했다. 그러므로 종교생활은 거룩하지만 노동은 속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이론적인 생각이다.

 

인간타락과 노동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깨어짐을 의미한다. 인간의 죄는 곧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며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망동이었다. 이때부터 인간의 노동의 의미는 변해 버렸다. 하나님 없는 노동은 비록 땀을 많이 흘린다고 해도 하나님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문화적 명령이 취소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노동의 의미도 목적도 없는 것이다. 땀을 흘려 노동을 하지만 그 열매를 가지고 죄를 짓는데 사용하게 되고 그 노동을 통해서 얻어진 문화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타락한 탕자 문화를 만들어 낼뿐이다. 노동에는 육체적 노동도 있고 정신적 노동도 있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간에 불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창 3:17-19). 인간의 범죄로 종신토록 수고해서 그 소산을 먹을 것이고 땅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고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것이고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사회가 인간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가 사회를 병들게 했고 환경의 오염이 있기 전에 인간의 오염이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하면 죄가 노동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노동

 

타락한 인간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속함을 받았다. 이것은 또한 인간의 노동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에는 노동이 하나님 없이 내 욕심을 위해서 또는 죽지 못해서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함을 얻은 그리스도 인들의 노동은 자연히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기쁨으로 일하는 것이 되었다. 같은 일인데도 죄 가운데 살 때의 노동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후의 노동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나게 된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이 우리의 모든 분야에 미치듯이 노동의 의미도 달라진 것이다.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부르시는 소명이다.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칼빈주의자들의 노동관이다. 칼빈은 노동을 기독교적인 삶과 엄격히 관련시켰다. 그는 복음이 노동을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노동은 신앙생활의 또 다른 표현이 될 수 있다.

 

노동의 윤리

 

하나님의 면전에서(Coram Deo) 사는 것이 노동윤리의 표준이다. 노동하고 일용할 양식을 먹음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된다(살후 3:10). 노동을 하고 일용할 양식을 얻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살전 2:12, 엡 4:28). 노동을 통해서 선한 일 곧 다른 사람에게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한다. 노동과 직업에는 귀천이 따로 없다고 하나 비도덕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직업이 정당화 될 수 는 없다. 노동자와 고용주의 관계는 수직적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되고 그들은 수평적인 관계로 놓으면서 수직적으로는 위에 다 하나님을 두어야 한다(엡 6:5-9).

 

(5) 칼빈주의 문화관

 

들어가는 말

 

종교와 문화는 우리 인간적 삶의 두 가지 차원이다. 양자를 피차 구분되나 서로 불가분적인 관계 속에 있다. 틸리히의 유명한 명제를 빌려서 양자의 관계를 표현한다면, “종교는 문화의 실체요,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양자는 실체와 형식의 관계를 갖는다. 종교적인 정신이 저변에 없는 문화는 없다. 이렇게 볼 때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인 답변과 대안은 무엇인가? 도대체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고 이해해야 하며 문화의 유형은 어떤 것이 있으며 기독교적인 문화관은 무엇이고, 그 이념은 도대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란 말은 “경작한다”“개간한다”(“to till” or “to Cultivate”)라는 뜻은 라틴어“Colore”에서 온 말이다. 이것은 땅을 가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 마음, 또는 감정을 도안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넓은 의미에서 문화란 “도구, 언어, 추상적 사유의 체계를 사용하여 지식을 배우고 다음 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의 능력에 종속하며, 사고와 언어와 행위와 가공물의 형태로 구체화된 인간의 제반 행동 양상(文化)과 그 산물(文明)이다.”이렇게 볼 때 문화란 하나님의 피조계를 경작한 결과라고 말해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자연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과 ∼가치관이 표현되는 행위양식이 문화이다.

 

문화의 유형

 

1. 분리 모델

 

이는 사회의 구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문화 창조에 활동적인 노력을 하지 않음으로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온갖 시도를 다 포함한다.(EX : 터툴리안- 중세기 수도원 규정이나 소종파 운동)

 

2. 동일시 모델

 

이는 문화와 타협하거나 문화와의 긴장을 인정함으로써 삶의 구조에 참여하는 것을 옹호하는 모델이다. (EX :릿출을 중심으로 19C 자유주의 신학)

 

3. 변혁적 모델

 

이 모델은 삶의 구조란 복음을 통해 지금 여기서 또 궁극적인 역사의 목표를 통해서 미래에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EX :바울, 요한, 어거스틴, 칼빈, 카이퍼)

 

기독교적 문화 상대주의

 

1. 문화 상대주의 : 긍정

 

각 문화는 그 자체의 기준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문화는 상대적으로 가치 있고 인정해야 한다.

 

2. 윤리적 상대주의 : 비판

 

문화 상대주의는 윤리적 상대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즉, 반대한다. 윤리적 상대주의란 상황윤리(Situation Ethics)를 말하는 것으로 객관적 규범을 부정한다.

 

3. 절대적 문화 상대주의 : 비판

 

모든 문화에 대하여 어떠한 가치 평가나 판단도 가할 수 없다는 엄격한 중립적 입장을 표방한다. 즉, 인간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자로 문화 상대주의를 절대화시키는 자들이다.

 

4. 기독교적 문화 상대주의

 

문화 상대주의를 공정하지만 기독교적인 문화의 긍극성을 주장한다. 창조의 명령과 문화 인간 범죄로 문화의 부패성을 가져옴 인간 문화의 잠전성과 신율적 문화의 궁극성

 

기독교적 문화의 이념(理念)

 

1. 자율적 문화의 변혁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의 뜻과 의지에 따라서 살고자 하는 자율적 문화를 변혁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신(無信)사상에서 온 것이다. 인간의 자율(自律)을 강조하는 Humanism에서 온 것이다.

 

2. 타율적 문화의 변혁

 

타율적 문화란 초월자 내지 초자연적인 규범에 의해서 지배되는 문화이다. 이것은 초월적 신사상에 의해서 지배됨 이들은 은둔, 도피, 내지는 패배주의가 특징이다.

 

3. 신율적 문화 창조

 

신율적이란 신의 섭리와 뜻에 의해 지배되는 문화활동 등을 말하는 것으로 신율적 문화의 본질은 인간과 신, 그리고 우주와의 완전한 조화를 말한다. 그리고 신율적 문화의 전제는 인간의 변화 즉 중생 구원 및 성화이다. 즉 인간 됨으로부터 시작 가능하다.

 

마치는 말

 

기독교 신앙은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은총 창조명령을 인정한다. 기독교 신앙은 구체적인 역사와 세계 속에 문화를 변혁하고자 한다. 기독교 신앙은 신율적 문화를 지고의 이상으로 삼는다.

 

 

※ 참고문헌


김영한, 한국 기독교 문화신학, 서울: 성광문화사, 1992.

Niebuhr, H. Richard. 그리스도와 문화, 김재준역, 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96.

Webber, Robert E. 기독교와 문화, 이승구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84.


(6) 칼빈주의 예술관

 

칼빈주의와 예술

 

유물론과 합리론에 의하여 위축되어 있는 인간 마음이 자연스럽게 시들어져 가는 과정에 대한 해독제를 예술적 본능에서 찾는다. 냉랭하고 비종교적이고 실제적인 시대에 예술에 대한 이 헌신의 따뜻함은 우리 영혼의 많은 고상한 열망을 여전히 살아있도록 했다. 우리는 예술적 본능이 보편적 인간 현상이지만 민족 유형과 기후와 나라와 관련되면서 그 예술적 본능의 발전이 국민가운데 전혀 다르게 구분된다.

 

예술은 종교에서 가장 부요로운 동기를 이끌어내었다. 종교와 예술의 동맹이 종교적 발전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간적 발전의 저급한 단계를 표상한다. 행정관과 성직자의 리더쉽 아래서 거대한 구조물의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고 그것들을 꾸미고 장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게 된다. 칼빈주의는 종교의 영역에서 국가의 권력을 부수었고 상당한 정도로 사제주의의 종언을 고하게 했다. 이 결과, 상징적 예배형식을 버리고 예술의 요구에 따라 화려한 기념물로 종교적 정신을 구현하기를 거부했다. 종교와 예술은 최고의 발전단계에 도달했을 때 독자적 실존을 요구한다. 칼빈주의의 더욱 고상한 노력은 종교와 신적 경배를 감각적 형식에서 점점 해방시키고 그 활기찬 영성을 고무시키는 일이다.

 

우리의 지적, 도덕적, 종교적, 미적 생활은 자신의 영역을 요구한다. 이 영역은 평행선을 달린다. 물론 예술은 우리의 사유 방식이나 우리의 윤리적 본질보다 종교에 훨씬 가까이 결합되어있다. 전 포괄적인 예술 양식은 우리의 가정 내면적 존재에서 작용하는 무한자로부터 온 독특한 충동의 결과가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다.

 

칼빈주의는 오직 종교적 원리의 도움을 받아 일반적 예술 양식을 창출했으며, 칼빈주의가 종교적 발달의 훨씬 높은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 원리는 가시적 감각적 형상으로 이루어지는 종교의 상징적 표현을 금지했다.

 

예술의 본성에 대한 어떤 해석이 칼빈주의에서 나오는가? 칼빈이 예술의 합법적 사용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격려하고 심지어 권장했다는 것은 그의 말을 보면 바로 입증된다. 그는 하나님이 예술적 본능으로 유발과 그의 후손을 희귀한 재능으로 부유케 하셨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는 예술의 창조적 능력이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임을 솔직하게 말한다. 칼빈에 따르면, 자연 생활의 이 고귀한 것들은 원래 성령님 덕택이다. 예술은 저주에 의한 삶과 자연의 부패를 막는다.

 

우리의 오락과 향유를 위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탁월한 호의 가운데 예술은 칼빈의 마음에서 가장 놓은 자리를 차지한다. 예술을 자연에 대한 단순한 모방으로 결코 보지않고 이 죄악되고 부패한 세계가 우리에게 주는 것보다 높은 실재를 인간에게 열어 보이는 고상한 소명을 칼빈이 예술에 돌렸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술은 이 죄악된 세계가 제공하는 것보다 높은 실재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예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대로 이용하도록 하신 은사를 드러내는데, 이제 죄의 슬픈 결과로서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 우리에게서 달아나 버렸다. 예술은 잃었던 아름다움의 산물로 우리에게 그 완전한 장차의 광채를 기대하게 하는 신비한 과제를 갖고 있다. 예술적 능력, 예술적 재능 자체가 인간 본성에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예술 양식이 없음이 칼빈주의에 대한 반론이 되기는커녕 반대로 칼빈주의의 점더 높은 발전 단계를 가리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중세의 학문과 예술은 교회의 보호를 받지않고는 번창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예술이 생겼다. 종교는 좀더 높은 영적 수준으로 올라간 다음 생명을 불어넣는 호흡이 온 세상을 활기있게 하도록 상징적인 옷을 벗어던져야 했다. 그것을 최초로 파악한 것이 칼빈주의이다.

 

이스라엘이 종교를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면, 이는 그리스도인이 철학의 영역과 예술의 계시를 위하여 똑같이 선택받은 것과 로마인이 법률과 국가의 영역에서 고전적인 발전을 위하여 선택받은 것이다. 르네상스는 칼빈주의에 죄악된 영향으로 제시되지않고 하나님이 정하신 운동으로 제시되었다. 예술은 학문이나 정치나 종교 생활이나 심지어 계시가 비출 수 없는 창조의 규례를 드러낸다.

 

칼빈은 예술과 학문과 종교를 나누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 세가지 핵심적 세력 모두가 모든 인간 생활에 침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단일 부분을 무시하지 않고서 자신의 찬란한 세계로 종교를 포함한 인간 생활의 전체를 받아들이는 예술이 있어야 한다. 예술에 관한 칼빈주의의 공로는 인간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좀더 주관적인 예술에서만 공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림 : 16-17세기에 솔과 조각침으로 만든 화란의 작품들, 칼빈주의의 보호를 받아 후대 민주주의 생활을 예언하는 그림 예술은 맨 처음으로 국민의 성숙성을 선언했다. 이제 하나님이 자신을 위한 짐꾼과 노동자를 어떻게 택하셨는지 보면서 예술가는 세상 사람의 머리와 모습과 전체 개성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모든 계급과 지위에 대한 인간적 표현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교회 권력은 더 이상 예술가를 속박하지 못했으며 왕의 황금이 예술가를 더 이상 족쇄에 채우지 못했다. 칼빈주의가 열방의 마음에 일깨웠던 사람들의 성숙성과 자유사랑에 대한 선언으로 말미암아, 일반적이지만 풍부한 생활이 예술에 전혀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음악 : 그레고리우스의 평범한 성가가 지배적이었다. 교회만이 음악을 만들 수 있는 특권을 가졌으며, 반면에 백성들이 만든 것은 예술의 위엄에 끼지 못하는 것으로 무시되었다. 소예배당에서도 백성들은 거룩한 음악을 듣기만 했지, 찬송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술로서 음악은 독립된 위치를 거의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전통 성악에 얽매었던 줄을 끊고 대중의 선율을 뽑아 썼으며 신자 일반의 제사장됨의 개념을 가지고 모든 이의 음악이 되게 했다. 후대에는 칼빈주의가 음악에서 그 지위를 잃었다.

 

(7) 칼빈주의 학문관

 

칼빈주의적 학문의 자세

 

칼빈주의자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새 것을 발견하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해석을 확인하기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 속에 맞추어간다. 따라서 자기의 기술과 함께 자신의 지식의 한도를 깨달음으로써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의지하면서 활동을 지속한다. 하나님의 도움을 바란다고 해서 과학적 연구의 일반적인 방법을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공분야에서 증명된 최신의 기술을 이용하되 자신의 과오의 가능성을 깊이 자각하고, 또 진리의 성령이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지켜줌으로 더욱 깊은 원리까지 알 수 있게 하실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칼빈주의는 주권적이고 인격적인 창조주, 구속주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함으로 시작하여 이 우주가 합리적 세계라는 확신을 갖고 마친다. 참된 과학적인 진전은 신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과학이 '하나'의 우주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 우주가 '우연'의 소산이 아니고 '확고한 질서'에 따라서 '하나의 불변의 경륜'을 목표로 '하나의 원리'로부터 존재하고 발달해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는 칼빈주의적인 신앙과 일치한다.

 

이원설 교수는 신앙과 학문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학문의 세계에서도 인정하고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학문연구를 재조명하자면서, 이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학문을 연구하면 숭배 대상이 아닌 이해의 대상인 자연의 원리를 관찰함으로 자연과학의 실험연구 발전에 큰 이익을 주게될 것이라고 말한다.

 

카이퍼는 신앙과 과학 사이의 대립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모든 과학은 어떠한 신앙으로 출발한다고 보고, 과학의 대립이 우주가 정상적 상태인가 아니면 비정상적인 상태인가 하는 '상태론'과 '변태론'의 문제에 있다고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학문하는 사람들은 이 두 세계관으로 나뉘어서 다투고있는 것이다. '상태론자'는 자연적 논거를 통해 모든 현상의 동일한 해석을 발견하기 위하여 원인과 결과의 논리적 추론을 시도한다. 따라서 이들은 실질적으로 창조의 관념을 거부하고 단지 진화론만을 승인한다. 철저하게 자연적 논거의 권내에 국한시켜 출발점과 끝이 모호한 영원하고도 끝없는 진화를 숭배한다. '변태론자'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독립적인 종이며 죄에 의해 인간 본성이 파괴되었으며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기적을 요구하며 주장한다. 따라서 자연적 논거에서 이상적인 규범을 찾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 가운데서 발견하고자 한다. 한편, 상대적 진화론을 공정하게 평가한다. 이 대립은 출발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평행선처럼 계속적으로 투쟁하여야 할 대립이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는 이 대립의 본질적인 문제로서 '인간의식'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한다. 모든 학문의 전제는 인간의식의 문제이다.

 

칼빈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의식을 가진다. 즉, '죄의 의식', '신앙의 확실성', '성령의 증거' 등이다. 저들은 이를 부인한다. 오직 동일한 의식만을 강요한다. 인간의식의 다양성을 말하는 우리들에 대한 저들의 태도는 곧 저들의 논리적 모순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자세는 상태론자들의 과학적인 자유를 논파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과학적 자유와 권리를 지킨다.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압도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의식을 갖는다고 해서 그들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 우리는 저들의 정력과 철저성을 자극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신앙과 원리로 돌아가 자신의 책임을 심각하게 느끼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다른 분야는 저들의 손에 맡기고 신학만 파수하겠다고 하는 생각은 타조의 어리석음과 같다. 결코 안전지대는 없음을 알고 우리의 학문적 자세를 모든 분야에서 기본적인 의식과 원리를 가지고 주신 사명을 감당한다는 책임감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카이퍼는 강하게 주장한다.

 

칼빈주의적 학문연구에 있어서 성경적인 개혁사상이 기초가 됨은 명확하게 논증되었다. 이어서 제기되는 문제는 개혁사상을 학문의 전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이성에 의함인가 아니면 신앙에 의함인가 하는 것이다. 미터가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세가지 방법에 대한 비교는 우리의 논의에 해결점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1)비교종교학적인 방법

 

각종 종교를 비교 검토하여 참된 종교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정 위해서는 어떤 표준을 사용해야만 한다. 기독교 국가권에 속한 자라면 기독교가 무비의 종교라 할 것이다. 이 방법은 상당히 주관적인 요소의 개입이 크기 때문에 그다지 신빙성이 크다고 할 수 없다.

 

(2)기독교 변증론과 증험론적 방법

 

기독교가 참 종교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개가능한 모든 논증을 찾는다. 변증론적 논증은 신자 자신에게 자기 신앙의 합리성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최후의 결정은 개인 자신의 이성적 평가에 의존하므로 의견의 많은 갈랫길을 갖게됨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절대 유효한 논증이 되게 하지는 못한다.

 

(3)신앙적 방법

 

신앙은 합리적 논증에 기인하지 않는다. 합리적 논증을 가지고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결론에 이른다고 할찌라도 그것은 기껏해야 역사적 신앙을 알게할 뿐 구원의 신앙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구원신앙은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영혼에 새겨져 확신에 이르게 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이성을 밝혀 사물을 보게한다. 즉, 새로운 통찰력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도 합리주의적인 생각이 숨어있다. 곧, 밝혀진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을 믿는 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신앙은 직관적이다. 곧, 추리적 이론을 거쳐서얻은 결과인 확신이 아니라, 직접으로 영혼에 오는 확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에도 역시 이성적임을 배제할 수 없다. 구원신앙은 어떤 진리에 대하여 지적으로 승인하는 이외에 인격적 신뢰의 요소를 포함한다. 신앙 그 자체는 하나님께 근거한다.

 

성령의 증거는 성경 이외에 하늘에서 어떤 새로운 계시나 생각으로 주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신자로 하여금 성령의 힘을 체험케 함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게 하는 것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신자로 하여금 그의 밝혀진 이성과 합리적 논증의 결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결론을 내리게하는 것으로도 성립되지 않는다. 오직 성령께서 신자로 하여금 성경 자체가 소유한 신적 권위를 자유롭게 또는 자발적으로 승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 신적 권위가 그 신자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복종하게 만든다. 성령이 신자의 영혼에 신성성을 인쳐놓는 것이다. 그 다음에 신자가 그러한 확신의 힘에 의하여 성경을 참된 것으로 인정한다. 그 확신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솔직하게 말한다. "모른다." 성경의 초이성적인 부분은 성령에 의하여 밝혀진 이성이 그것들을 참되다고 증명하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가르친 대로 그렇다'는 하나님의 증거 때문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에 학문연구는 가능하고 성경적인 개혁사상이 그에 기초가 되고있음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학문적 자세

 

(1)학문은 기독교를 이해하며 보수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2)학문연구에 있어 성령의 힘에 완전히 의뢰한다.

(3)모든 재능, 능력이 성령의 선물임을 알아야 한다.

(4)학문연구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5)지식의 전분야는 그리스도인의 연구와 탐구를 고대하고 있다.

(6)하나님의 창조, 보증, 구속하신 실재를 이해하는 것은 사람의 본분이다.

(7)학문이 자신에게 법칙처럼 자신의 본성을 잃게해서는 안된다.

(8)하나님의 생각에 따라서 성경과 창조, 역사에 계시된 신의 생각을 생각한다.

 

 

참고 : 칼빈의 생애

 

1. 유년기

 

출생

 

1509년 7월 10일 파리에서 동북쪽으로 약 60마일가량 떨어진 노용(Noyon)시(市)에 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Gerard Calvin)는 본래 노동자였으나, 부지런하고 조직적이 고 독립정신이 강해서 노용 감독구의 서기가 됐다. 그의 어머니(Jeanne Le Franc)는 그 성내에서 신앙의 인물로 존경받는 부인이었다.

 

어린시절

 

칼빈은 노용(Noyon)에서 14살때까지 살며 지방학교에서 열심있는 학생으로서 관심 있는 학과를 빠른 속도로 정복해 나갔고, 친구들로부터 같은 동료라기 보다는 선생님으 로 생각될 정도의 감탄과 칭찬의 말을 들었다. 한번 만난 사람과 한번 배운 학과는 모 두 기억하는 비상한 천재적 소질을 발휘하던 그는 우뚝솟은 성당의 영향력 아래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경건생활을 하였던 것은 그의 부모의 영광이었다.

 

대학생활

 

1523년 존 칼빈은 파리로 가서 마르세대학에 등록하여 마두린 코디어(Mathurin Cordier)교수에게 라틴어를 직접 사용하는 것을 배우다가 그해 겨울에 몽테규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코디어교수와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후일에 하나님의 교회에 유효하게 쓰임받을 훌륭한 준비였다. 몽테규대학으로 간 칼빈은 그곳에서 금욕주의의 학칙을 철 저히 준수하며 장기간 공부하는 습관을 익히고 논변술과 논박법을 배웠다.

 

2. 청년기

 

부르지대학

 

파리의 대학에서 5년의 훈련을 마친 뒤 1528년 칼빈은 신학연구자격시험에 통과하였으나, 그의 부친의 권유로 법학을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법조계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해서 신학의 길을 아예 자른 것은 아니다.) 오르레안대학의 피터 타아잔 문하에서 법학 을 약 1년간 배웠으나 그는 부르지대학에서 강의하던 안드레아 일키아티 교수의 명성을 듣고 부르지대학으로 옮긴 수 멜케오어 볼마르 문하에서 강의하던 그의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칼빈은 볼마르 교수의 교육(언어, 문화, 고대문화연구, 신약원문연구)아래서 조 직적인 개혁수행하고 주석을 쓸 수 있는 기초를 잡은 것이다.

 

파리의 왕립대학

 

1931년 파리의 왕립대학은 성경이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연구되었다. 법학을 권유하 던 칼빈의 아버지는 그해 병으로 돌아가셨다. 이에 칼빈은 파리로 돌아가 왕립대학에서 헬라어, 히브리어 공부를 하였다. 또한 그는 1932년 그곳에서 세네카의 관용론 주해서 를 출판하기로 했다.

 

프로탄테스트

 

인도주의적 색깔을 강하게 띄던 칼빈은 1532년 오르레안으로 갔다가 (학업을 위해) 이듬해 아시 파리로 돌아올 때 그는 프로테스탄테였다. 1532년에 그는 갑작스런 회개 를 경험한 것이다. 그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였다. 그는 즉시 복음사역자로서 그리고 종교개혁가로서 두가지 사명을 동시에 깨닫게 된 것이다. 칼빈은 그의 친구 니 콜라스 콥을 위하여 프로탄테스트 선언문을 쓰고난 후 힐책과 비난으로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그곳은 앙굴렘(Angoulem)이었다. 칼빈은 이곳에서 "기독교 강요"의 체계를 세워 나갔다.

 

3. 사역기

 

기독교 강요

 

1536년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프랑스의 신교들들의 박해에 대한 탄원서로서 프란시스1세에게 보내는 글로 썼다. 그의 글은 조직적이고 질서와 논리가 정연한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로 개혁교회의 가장 큰 이정표가 된 것은 그 책의 성경에 대한 충실성 때문이다.

 

제네바 개혁운동

 

하나님의 섭리속에 칼빈은 제네바의 개혁지도자 화렐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화렐의 "요나의 비유"를 통한 설득에 칼빈은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극도로 타락한 제네바에 머물게 된 칼빈은 이름없는 종교 개혁가로서 종교개혁의 첫발을 내딛었다.

 

1536년 로잔에서 신교와 구교사이에 성찬문제로 토론회가 있을 때 칼빈은 교부신학을 자유로이 인용하여 신교의 주장이 성경적임을 갈파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 작했다. 1537년 제네바시의 소의회와 2백인 회의에서 그의 '요리문답'을 정식 채택되었 고 아이들을 비롯한 모든시민은 칼빈의 신앙요리 문답을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시민들은 그를 이단으로 몰아갔고, 개혁자들은 끝까지 신앙고백을 강행하려다가 시정부 와 충돌하게 되었다. 습격, 협박등의 소용돌이속에서 결국 시의회의 가결에 의해 칼빈 과 화렐은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스트라스 버그

 

칼빈은 바젤(Basel)로 갔다가 1538년 9월 프랑스 난민 교회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신학을 강의하였으며 로마서 주석도 내었다. 그는 스트라스 버그에서 약 3년간 있으면서 매우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 시기에 그는 결혼도 하였으며 기독교 강요 제2판도 내었다. 분주한 가운데 행복했던 칼빈에 비하여 제네바는 반대였다. 1540년경 반대파의 세력이 약해지고 부패는 더하여 져서 제네바시는 칼빈을 재초청하였다. 칼빈은 응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동역자 화렐의 간곡한 권유에 의해 1541년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다시 제네바로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은 시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자 그의 개혁 이상을 실현하기에 노력하였다.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와 처음 행한 일은 시의회에 나가 법에 의지하여 교회를 다스릴 것과 교회법규를 제정할 것, 그리고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에게 시 위원회의 고문위치를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법규"가 1541년에 대중앞에 낭독되고 정부와 시민에 위해 채택되었다. 하지만 1543년 시의회는 장로원으로부터 제명권을 박탈하고 1548년에는 칼빈의 모든 책은 출판전에 검열을 받도록 규정하였다. 1553년 추방을 각오하고 사실상 교회에 작별을 고하는 설교를 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계속된 투쟁은 1553년말 칼빈의 적수 세르베투스(Servetus)의 죽음으로 승리를 쟁취하였다. 세르베투스를 지지하던 자유파의 많은 지도자들은 제네바를 등지고 도망하였다. 장로원은 제명권을 찾았으며 그 결과 징계권 행사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는 엄밀히 분리되었다.

 

4. 노년기

 

성취

 

1559년은 칼빈으로서 성취의 해였다. 제네바시가 그에게 시민권을 줌으로 경의를 표한 것 보다 더 가치를 준 것은 그가 학술원(Accdemy)설립허가를 받은 것이었다. 교육받은 지도자를 교회에 공급하고자 했던 칼빈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그는 건강이 아주 나뿜에도 불구하고 연 200회의 강의와 200외의 설교를 하였다. 성경 각권을 주석하였고 '기독교 강요'를 계속 재편집하며 20편에 달하는 신학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그의 제작 전집은 총 59권에 달한다고 한다.

 

죽음

 

1564년 그의 건강은 기울기 시작해서 그해 2월 마지막 강의와 마지막 설교를 하고 4월 마지막 예배에 참석하며 성찬에 참여 한 뒤, 1564년 5월 27일 칼빈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칼빈의 서거 소식은 제네바를 울음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칼빈의 유언에 따라 그의 장례식은 아주 간소하게 치뤄졌으며, 그의 무덤 역시 비석하나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소나무 곁에 묻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