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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 -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 원 광연 역

Bavinck Byeon 2015. 1. 26. 19:54

조나단 에드워즈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 박사

원 광연 역

 

 

『다음의 글은 1912년 프린스턴 신학교의 벤자민 워필드 박사가 쓴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한 짧은 글로서 에드워즈에 관한 개괄적인 사실을 아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본문은 Benjamin B. Warfield, “Edwards and the New England Theology,” in Studies in Theology (1932, reprinted. Edinburgh: Banner of Truth, 1988) pp.515-538에 실린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자(聖者)요 형이상학적인 철학자요, 부흥사요, 신학자로서 영국 식민지 하의 아메리카의 지성계에 진정 위대한 인물로 우뚝 서 있다. 현대 문명의 초입(初入)의 시기에 출생하고 자라고 생애를 보내는 동안 그는 인간 사고의 가장 위대한 두 가지 주제 - 하나님과 영혼 - 에 대해서 탐구하고 논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자기 목소리를 아주 훌륭하게 전한 인물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조르쥬 리용(Georges Lyon)은 에드워즈의 중요성에 대해서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쓰고 있다:

 

18세기의 인물들 가운데 조나단 에드워즈만큼 큰 명성을 얻은 사람은 별로 없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비평가들과 역사가들은 조나단 에드워즈야말로 아메리카가 낳은 최고의 형이상학자라고 평하며, 메킨토쉬(Mackintosh), 두갈드 스튜어트(Dugald Stewart), 로버트 홀(Robert Hall), 심지어 피히테(Fichte)까지도 그의 강력한 논리적 힘과 사고력을 열광적으로 칭송해오고 있다. 만일 이 사람이 철학과 과학의 전통과는 거리가 먼 상당히 미개한 땅에 출생하지 않고 우리의 옛 세계(유럽을 뜻함. 역자주)에 출생해서 거기서 현대적 사고의 자극을 직접 접했더라면 과연 이 사람의 독창성이 어느 정도까지 높이 올라갔을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다고 모두들 입을 모아왔다. 만일 그랬더라면, 그는 숭고하면서도 생경스런 신학에 정력을 쏟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불멸의 사상 체계를 세운 라이프니츠(Leibniz)와 칸트(Kant)에 비견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랐을 것이다. 그의 신학은 우리의 이성을 놀라게 하며 우리의 마음에 거부감을 일으키며, 공포의 대상인 동시에 감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위대함은 그런 식으로 그저 추측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그는 절대 말을 잘 못하고 부끄러움을 타는 밀튼(Milton)”이 아니라, 정말로 분명함과 정연함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 스스로 아주 섬세한 형이상학자로 비쳐지긴 했지만, 우리가 그를 크게 칭송하는 것은 형이상학자로서가 아니다. 그가 형이상학자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은 주로 그의 존재론에 대한 사색 때문인데, 그것은 그의 아주 젊은 청년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는 그런 나이가 되자, 그는 그 문제를 뒤로 제쳐 두었음이 분명하다. 리용이 말하는 대로, 성숙한 나이에 이르러서 에드워즈는 그의 예리하고도 끈질긴 사고를 온통 신학에, 특히 죄와 구원의 문제에 집중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그는 순전히 신학으로서만 접근한 것이 아니라, 아주 강한 실천을 수반한 것으로 이해하고 접근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상가였던 것만큼 행동가였으며, 놀라운 힘으로 일했고, 남은 모든 에너지를 일에 쏟아 부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의 주 관심사에 대해 거의 동의하지 않는 현대의 철학자 리용 같은 사람이 오히려 그를 훨씬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하겠다. 우드브리지(F. J. E. Woodbridge)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분명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저 자기 시대의 사상을 표현하거나 그 사상을 전통적으로 내려온 정신과 일치시킨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사상을 일으키고 형성시킨 인물이다. 후에 드러나게 되지만, 뉴잉글랜드의 사상은 이미 그 색깔 없는 무미건조한 신학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것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 시대의 신학은 확고한 알미니안주의였다. 그것을 그가 칼빈주의로 바꾸어 놓았고 . . . 그의 시대로는 도저히 그를 설명할 수가 없다.

 

에드워즈는 놀라운 철학적 성향을 지녔다. 그러나 신적인 것들에 대한 그의 감각과 취향은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드브리지의 결론처럼 - 그의 결론은 최소한 상대적으로는 정당하다 하겠다 - “우리는 그를 아메리카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아메리카의 가장 위대한 칼빈주의자로서 기억한다.”

 

에드워즈의 준비기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가 아주 부패해 있던 시절인 1703105일에 출생하였다. 청교도 이주민들이 신세계(新世界)에 전해 준 신앙적 열정은 3, 4 세대를 지나면서 식어지고 변질되었다. 1678년에 이미 인크리즈 메이더(Increase Mather)는 이렇게 탄식했었다: “자라나는 세대는 모두 회심하지 않은 멸망해 가는 불쌍한 세대다. 주께서 성령을 부어주시지 않으면 이들은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다이 시대에는 기독교 세계 전반에 걸쳐서 이런 영향이 일반화되어 있어서 영적인 삶을 침체에 빠뜨리고 있었는데, 뉴잉글랜드에서도 그런 현상이 없을 리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척박한 땅에서 살아야 하는 어려운 형편 때문에 그런 현상이 더 가중되었다. 어디서든 생각이나 삶이나 할 것 없이 전부 바닥을 향하여 내려가고 있었다. 영적인 상태만이 아니라 도덕성까지도 쇠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들은 과거부터 유산으로 내려온 그 높은 이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음이 변화했다는 증거가 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생활만 건전하면 교회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던 터였다. 부모가 세례를 받기만 했으면 자녀들을 세례 받게 하라고 권했고 - 소위, “중도 언약”(Half-Way Covenant: 1662년 뉴잉글랜드의 회중 교회 총회에서 통과한 언약으로, 신앙의 도리를 이해하고 동의하며 생활에 흠이 없는 사람이면 회심의 체험과 믿음에 대한 고백이 없더라도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이도록 규정하였다. 역자주)에 따라서 - 그들 스스로도 자동적으로 성찬에 참여하였다. 성찬을 사람을 회심시키는 규례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가정은 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갖가지 악에 물들지 않도록 그를 보호해 줄 뿐만 아니라 그의 영적, 지적 생활을 크게 자극시키고 격려해 주었다. 그는 여섯 살에 라틴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열세 살이 되어서는 당시 대학의 교과 과정의 일부였던 세 가지 학문적 언어” -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 에 대한 지식이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만 열세 살이 채 되기도 전인 17169, 그는 커넥티컷 대학교”(Collegiate School of Connecticut: 예일 대학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2학년에 재학하는 동안 그는 존 로크(John Locke)[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인간 오성에 관한 논고)]에 심취하였고, 학과 공부보다도 오히려 그것을 공부하는 데서 더 큰 만족과 즐거움을 느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그것이 주는 즐거움은) 극심하게 인색한 구두쇠가 갓 발견한 보석 상자에서 금이나 은을 한 주먹 꺼내 쥐었을 때에 느끼는 만족감과 기쁨보다 더 했다고 한다.

 

그는 1720년 열일곱 살이 채 못 되어 우등으로 예일 칼리지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신학 공부를 위해서 1722년 여름까지 2년 더 대학에 머물러 있었다(그 당시의 관례가 그랬었다). 1722년 여름 그는 설교할 자격을 인허받았고, 17228월부터 17234월까지 뉴욕시()의 한 작은 장로교회의 강단을 지켰다. 집으로 돌아온 후 17246월 그는 예일 칼리지의 강사(tutor)로 지명되었고, 그로부터 2년 동안 (17269월까지) 그 대학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뛰어난 능력으로 그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그가 강사직을 사임한 것은 당시 메사추세츠 주의 노스헴프턴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그의 외조부 솔로몬 스토다드(Soloman Stoddard)의 부목사 및 후계 목사로 청빙을 받은 때문이었다. 그는 1727215일 목사 안수를 받아 노스헴프턴 교회에 취임하였다.

 

에드워즈의 준비기는 노스헴프턴 교회에 취임함으로써 종결된다. 그의 준비는 그 깊이에 있어서나 그 폭에 있어서나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학구적인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고 출생하여, 에드워즈는 거의 유아기 때부터 손에 펜을 잡고 살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기에게 무슨 창조적인 생각이 일어나면 항상 그 결과까지 추적하여 종이에 적어 놓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에 행한 그의 관찰과 사색의 결과들이 아직도 많이 보존되어 있어서 그가 도무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숙(早熟)했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에드워즈가 그의 영적인 형이상학의 문제들을 사색한 것은 이런 어린 시절의 기록들에 남아 있는 것들인데, 그가 우리의 철학사에 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 인정받는 것은 주로 이 기록들의 강점 때문이다. 그의 사상의 전 체계는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쓴 존재에 대해서”(of Being)라는 작은 글에서 이미 그 요체가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 어린 시절의 사색들에 나타나 있는 의견들을 그가 나중에 철회했다고 믿을 이유는 전연 없다. 오히려 반대로, 그 어린 시절의 의견들이 그의 속에서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는 암시들이 이따 끔씩 - 심지어 그의 최후의 저술에서까지도 -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일 칼리지의 강사 시절 이후부터는 한 번도 외형상으로 그런 문제를 논의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런 주제들에 대한 그의 사색은 분명히 그의 성장기에, 곧 적극적인 목회 사역의 임무들과 좀 더 시급한 문제들에 둘러싸이게 되기 이전 시기에 속하는 것이다. 이 어린 시절, 버클리(Berkeley)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이 분명했고, 또한 빛과 색깔에 대한 뉴튼(Newton)의 설명과, 지각(sense)을 관념의 근원으로 보는 로크의 논지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무슨 제안이나 도움을 받은 일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관념론(Idealism)의 완전한 체계를 스스로 완성시켰다. 그의 관념론은 그저 현상론(Phenomenalism)의 경계선에 위태하게 서 있는 것이었으므로, 만일 살아계신 하나님을 강렬하게 깨닫지 않았더라면 그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선포하기를, “가장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 자신 이외에는 실체(實體: reality)라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우주는 하나님의 마음 속 이외에는 어디에도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우주가 육체에만해당되는지 아니면 유한한 영()에도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입장이 오락가락했던 것 같으나, 결국 더 포괄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자신의 영혼의 필요를 소홀히 할 만큼 그런 사색에 심취했던 것은 아니었다. 성장기 전체를 통틀어서, 그는 무엇보다도 신앙의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아주 어린 소년 시절부터 깊은 신앙적 감화를 받았었고, 이 준비의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신앙적 본질을 배양하는 일에 지극한 열심을 기울였다. 그 자신이 우리에게 나의 구원을 찾는 일을 내 인생의 주요 임무로 삼았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나서 그의 내적인 긴장과 걱정을 완화시켜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생각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반감을 일으켰었다: “그것은 내게 아주 끔찍스러운 교리인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졌다. 그리고 점점, 그 자신도 추적할 수 없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바로 이 교리가 그에게 당연한 것으로 다가오게 되고, 오히려 그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교리가 된 것이다: “그 교리가 엄청나게 즐겁고 밝고 감미로운 것으로 느껴지는 것을 굉장히 자주 경험해왔다. 이 절대적인 주권을 나는 진정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여 올리기를 사모하고 있다.” 어느 날 그는 디모데전서 1:17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이라는 말씀을 읽는 중에,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느낌에 사로잡혀서 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다른 것과는 전연 다른, 느낌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늘의 하나님께 완전히 사로잡혀서 그에게 영원히 삼켜버리기를사모하였다. 그 때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일들에 대한 이해가 날로 늘어났고, 하나님에 대한 즐거움이 자라났다. 물론 침체의 상태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에, 그의 성장은 꾸준히 지속되었고 거룩하게 자신을 구별하는 일도 점점 완전해져갔다. 1727년 초 바로 이 경건한 젊은이는,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가슴에 안고서 그의 화려한 학문적인 생활과 철학적 사색을 완전히 뒤로 제쳐두고, 노스헴프턴의 목회자의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목회자 에드워즈

 

에드워즈는 1727215일 외조부 솔로몬 스토다드 목사의 부목사로 안수를 받게 되고, 2년 후 외조부가 사망하자 그 교구의 담임 목사직을 계승하게 된다. 노스헴프턴은 상대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그 지방의 절반가량이 시골이었는데, 노스헴프턴은 그 한 가운데 있는 마을이었다. 그러므로 그곳은 그 인근 지역에서는 일종의 작은 수도(首都)와도 같았고, 사람들은 자기들의 문화와 정력과 독립 정신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 마을에는 교회가 하나 밖에 없었는데, 아마 보스턴(Boston) 외곽 지역에서는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교회였을 것이다. 그 교회는 정서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지 못했고, 가끔씩 파당으로 나뉘어 분쟁이 일어나곤 했다. 그러나 솔로몬 스토다드 목사의 강력한 설교 사역 아래서 여러 번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었다. 이런 각성의 역사는 에드워즈가 목회하는 동안에도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교회가 부흥의 역사로 유명해졌고, 부흥으로 인해서 교회의 회원 수도 증가했다. 한 때 그 교회의 회원 수는 620명이었는데, 이는 그 마을의 성인(成人) 전체의 숫자에 가까운 것이었다. 스토다드는 교회의 성례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완화해야 한다는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이었고, 18세기 초부터 노스헴프턴 교회는 회심의 고백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성찬에 참여하도록 개방하는 일을 시행해오고 있던 터였다. 에드워즈도 처음에는 이런 현실을 그대로 묵인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이라는 확신이 들면서 한 동안 그것을 고쳐 보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그것이 그 자신에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교회의 구성원은 혼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더구나 부흥의 역사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람들이 신앙적 감화를 받아 교회에 들어와 회원 수가 늘어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중요한 교회를 목회하고 보살피는 일에 에드워즈는 전심으로 자신을 바쳤다. 끊임없이 집집마다 방문하는 일은 그의 일상적인 일과가 아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교인들에 대해서 무관심하다거나 목회를 소홀히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한 것은 에드워즈 자신의 특별한 은사와 소질에 대하여 스스로 내린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질병이 있다거나 특별한 필요로 요청할 경우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교인들의 집을 찾아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대신 그는 자유로이 자기 집을 찾아오도록 교인들을 권유했고 교인들이 찾아오면 전혀 주저함이 없이 그들의 개인적인 요구 사항들을 들어주는 데 시간과 정력을 드렸다. 그는 목회하는 동안 줄곧 신학도로 남아 있었고, 하루에 보통 열 세 시간을 연구에 소비했다. 이런 신학적 연구를 목회 사역과 별도로 분리시킨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목회 사역에 종속시켜서 행한 것이다. 예일 대학교 시절에 그렇게도 깊이 행했던 순전한 학문적 사색들을 단호하게 정리하여 그만 두었을 뿐 아니라, 23년 동안의 노스헴프턴의 목회 생활 동안에도 순수한 신학적 저작들을 저술한 일도 없다. 이 시절에 나온 그의 저작들은 설교 아니면 모두가 실천적 신앙에 관계되는 논고들뿐이다. 그 논고들도 그의 설교의 열매로 나타난 신앙적 대 각성으로 말미암아 제기되는 문제들을 다룬 것들이 태반이다.

 

에드워즈의 연구는 설교를 통해서 가장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다. 그는 회중을 교훈하는 일에 자기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정규적인 일들을 신실하게 감당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특별 강좌와 강론들을 행하였고, 또한 신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시기에는 이웃의 교회들을 돕기 위해 자주 출타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그는 아주 놀라운 설교자로 인정을 받았다. 사람의 주의를 끌어당기며 각성케 할뿐 아니라 매우 교훈적인 설교자로 여김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위엄을 거스르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반기(反旗)를 드는 죄의 사악함을 깊이깊이 인식하여, 그는 스스로 청중들을 일깨워 하나님의 진노하심 아래 있는 그들의 처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또한 그런 가운데서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또한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축복을 지극히 감동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죄를 용서받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러우며 버림받은 상태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생하게 묘사하여 정말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 것이다. 더욱이 지극히 진지한 강력한 확신으로 그런 설교를 행했으니, 그 효과는 정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1735년 말, 그 교회에 영적 대 각성이 시작되어 삼 백 명 이상의 회심자가 그리로 모여들었고, 그런 현상이 커넥티컷 지역 내의 교회들마다 확산되었다.

 

그리고 1740년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방문을 계기로 또 다른 신앙적 열기의 파장이 일어났고 그 파장은 엄청난 힘으로 그 땅 전역에 퍼져나갔다. 에드워즈는 그런 신앙적 열광의 시기에 악()의 요소가 선()과 함께 뒤섞인다는 사실을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완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과도한 현상들을 억제하고자 부지런히 노력했고, 또한 알곡과 가라지를 분간하는 일을 위하여 성심으로 애썼다. 그러나 가라지와 함께 알곡까지 던져버리는 잘못을 에드워즈만큼 강하게 반대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참여한 여러 부흥의 모든 현상들을 지극히 예리한 분석적 연구를 통해서 살펴보았고, 그리하여 그는 자기 기만(欺瞞)이 가능하며 또한 그런 데 사로잡히면 곧바로 거짓된 흥분 상태에 빠진다는 점을 인정하는 한편, 진정한 은혜의 역사도 정신적인 흥분 상태로 - 심지어 육체적인 흥분 상태로까지도 - 표현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주장하였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 부흥 현상들의 부수적인 열매 가운데 하나로서, 그는 종교적 흥분 현상에 대한 가장 철저한 조사 연구서를 세상에 내어놓았다. “신앙적 정서”(Religious Affections)에 대한 그의 위대한 논고를 통해서 이른바 영적 진단법”(spiritual diagnostics)의 가장 완전한 체계를 제시한 것이다.

 

23년 동안 에드워즈는 노스헴프턴에서 열매 있는 사역을 계속하였고, 그의 지도 아래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동네’(5:14)가 되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러나 1740-1742년 사이에 일어난 부흥으로 말미암아 에드워즈의 편에서 사람의 마음을 예리하게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고, 마침내 교회와 결별하게 되고 만다. 이 부흥 기간에 노스헴프턴의 성인(成人) 인구 전체가 실질적으로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은 그 시기에 있었던 신앙적 흥분 상태에서 교회로 들어왔고, 더욱이 이미 오래 전인 1704년부터 솔로몬 스토다드 목사의 주도로 시행되어 온 한 가지 정책에 따라서 무조건 교회에 받아들여졌으니, , 성찬을 포함하여 교회의 모든 규례들을 사람을 회심시키는 규례”(converting ordinances)로 본 것이 그것이다.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 사실을 전제로 교회의 성례들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자들을 그 성례들에 참여시킴으로써 마음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여 성례를 시행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교회 내의 많은 회원들이 그러한 마음의 변화를 체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런 변화가 있어야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데, 그들은 그런 변화를 체험했다는 것을 전혀 증거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드워즈는 홀로 이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였고, 결국 진정한 회심을 스스로 고백하는 자들만 성찬에 참여케 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성찬을 더럽히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은 목회자로서 또한 회중의 지도자로서 담당해야 할 그의 의무였다. 더구나 그는 자신이 분명히 깨달은 임무를 시행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두 가지 분명한 조치를 취하였다. 교회 내에 있는 기존의 무자격 회원들은 징계를 통해서 제거하고, 새로운 회원을 받아들이는 일에 훨씬 더 신중을 기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징계를 시행할 권한과 기능이 교회에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미 교회 회원의 자격 조건에 대해서 아주 느슨한 사고가 만연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징계를 시행하는 일이 부패에 빠져 있었다.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문이 공식적으로 활짝 열려 있었고, 이런 느슨하고 이완된 정책이 이미 반세기 이상 시행되어 와서 확고한 전통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에드워즈가 반드시 관철하여야 한다고 느낀 것은 바로 이론적으로는 물론 실천적으로도 회중 교회의 본래의 강령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 교회를 가장 철저한 의미에서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모임체로 보며, 따라서 깨끗하게 씻음을 입지 않은 자들은 그 누구도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없다는 원칙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입장이 그의 강점(强點)이 되었어야 옳고, 또한 결국 나중에 이런 입장이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그가 세운 운동에 승리를 가져다주게 되지만, 그 자신의 경우에는 오히려 이것이 약점(弱點)으로 작용하였다. 그런 입장으로 인해서 그가 표방하는 개혁 운동이 그의 주장과는 전연 달리 아주 급진적인 성격을 띈 것처럼 비쳐진 것이다. 1744년에 일어난 징계의 한가지 실 예와 관련한 논쟁에 대해서나 성찬에 참여하는 자격 조건 때문에 그 이후에 생긴 교회내의 어려움(1748-1749)에 대해서는 구태여 상세히 다룰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국 에드워즈는 2년 동안의 첨예한 대립 끝에, 1750622일 결국 노스헴프턴의 목회지에서 물러나게 된다.

 

신학자 에드워즈

 

47세 때에 노스헴프턴의 목회지에서 물러남으로써, 에드워즈의 생애의 두 번째 기간 - 정력적인 목회의 기간 - 이 갑자기 끝을 맺게 되었다. 몇 개월 후 그는 스톡브리지(Stockbridge)라는 변경 지역의 작은 마을(백인이 열두 가족 밖에는 살지 않는 곳이었다)로 옮겨갔다. “뉴잉글랜드와 및 인근 지역 복음 전파를 위한 런던 선교회에서 그 지역의 후사토닉 인디언들(Housatonic Indians)을 위한 선교사로, 또한 백인 정착민들로 구성된 그 곳 작은 교회의 목회자로 파송 받은 것이다. 그는 이처럼 외딴 곳에서 생활하며 글을 쓸 여가 시간을 많이 갖기를 소망했다. 당시 만연되어 있던 알미니안주의를 대항하여 칼빈주의적 체계를 변호하는 저작을 쓰기를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고, 또한 그 일을 위한 준비가 상당히 많이 되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평화와 고요함은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인디언들을 돕기 위하여 마련된 자금을 유용하는 행정 담당자들의 탐욕과 부패와 힘겨운 싸움에 얽혀 들어갔기 때문이다.

 

필요한 여가 시간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는 스스로 그런 시간을 만들어 십분 활용했다. 그리고 이 스톡브리지의 생활을 통해서 그는 신학자로서의 최고의 명성을 얻게 해 주는 중요한 논고들을 썼다. , 의지(will)에 대한 위대한 저서(1753년에 완성되어 1754년에 출간됨), 원죄(原罪)에 대한 저작(그가 사망하던 1758년에 출간됨),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 (하나님의 세상 창조의 목적)Nature of True Virtue (참된 덕성의 본질) - 이 두 권은 그의 사망 후인 1765년에 출간됨 - 과 또한 미완성 작품인 History of Redemption (구속사: 1772년에 출간됨)]가 그것이다. 이런 저작들을 위해서 전에 이미 수집해 놓은 자료들을 활용한 것은 물론이다. 그는 실질적으로 손에 늘 펜을 들고 살았고, 방대한 량의 자료들 - 소위 그의 최고의 생각들이라고들 부르는 그 자료들 - 을 수집하여 기록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의지에 대한 저작은 사실 오래 전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1747년 초에 이미 그는 그 저작을 위하여 열심히 연구를 한 사실을 볼 수 있고, 또한 계속되는 방해로 그의 집필 작업이 오랜 동안 이어지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노스헴프턴을 떠나기 전에 이미 상당한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이 집필 계획을 시행하는 일이 아주 깊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753년의 단 몇 개월 동안에 이 위대한 작품을 속히 완성시켰다고 해서 그냥 겉보기처럼 그가 정말 놀라운 천재적 재능을 발휘했다는 식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스톡브리지의 7년이야말로 명실공이 에드워즈의 신학적 작업의 결실기(結實期)라 불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스톡브리지의 7년 생활은 1757년 가을 그의 사위인 아론 버어 목사(Aaron Burr)의 후임으로 프린스턴(Princeton)의 뉴저지 칼리지(College of New Jersey)의 학장으로 초빙을 받는 사건으로 종결을 고하게 된다. 그는 정말 마지못해서 그 초빙을 받아들였다. 그로서는 그리로 가게 되면 자신의 평생 최고의 대작이라 할 수 있는 저작 - 그는 알미니안주의 논쟁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몇 권의 연작들을 계획하고 준비 중이었다 - 의 집필 작업이 무산될 위험이 다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린스턴의 그 대학은 그가 평생을 바쳐온 뜨거운 열정이 담긴 부흥의 경건에 대해서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세워 지금까지 유지해 오고 있는 터였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초빙을 사실상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친구와 동료들의 자문을 받아, 그 초빙을 받아들였고, 17581월 그 새로운 직무를 향하여 프린스턴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해 213일 그곳에서 천연두(smallpox) 예방 접종을 받았는데, 그로 인하여 천연두에 걸려 3225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에드워즈의 신학 저작들이 그렇게 두드러지는 것은 지극히 풍성한 신앙적 감성과 최고의 지성적 능력이 그 속에 한 데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뭐니 뭐니 해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생애 전체의 성격과 그의 모든 저작들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그러나 그의 강한 신앙적 감성은 최고의 정신력과 논리적 엄밀성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는 깊은 감성의 소유자였고 또한 동시에, 에즈라 스타일즈(Ezra Stiles)의 지적처럼 강력한 추론가”(strong reasoner)였던 것이다. 예리하고 세밀한 분석력에 있어서는 아마 어느 누구도 그를 능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처럼 뛰어난 분석력을 지닌 한편 신앙적 진리를 폭넓게 파악하고 있어서, 그 진리를 전체로서 바라볼 수 있었고 또한 그 진리의 여러 부분들을 과장이 없이 그 체계 전체와의 관련성 속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평생토록 순전하게 고수한 것은, 그리고 그것을 무시하려는 당시의 경향에 대항하여 변호하는 데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 바쳤던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칼빈주의였다. 그는 칼빈주의에 속한 주요 대변자들의 해명해 놓은 그 신학 체계의 본질적 요소를 어느 부분에서도 의식적으로 이탈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전적인 대변자들을 통하여 해명되어온 칼빈주의에 대한 그의 지식이 얼마나 광범위했고 또한 엄밀했으며, 그리고 그가 얼마나 완벽하게 칼빈주의를 자신의 사상 체계에 채용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과소평가하는 예를 자주 보게 된다.

 

그를 학식가’(學識家: a man of learning)라기보다는 사상가’(思想家: a man of thought)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어떤 면에서 매우 일리 있는 시각이라 하겠다. 18세기 중엽 서부 매사추세츠 주에는 큰 도서관 시설이 없었다. 그의 생각에 어떤 문제가 부딪쳐 오면 스스로 그 문제를 추론해 나가는 것이 그의 천성적인 기질이었는데, 이것이 그의 연구의 습관을 통해서 한층 강화되었다. 어떤 주제든 중요한 것이 눈에 띄면, 그는 가장 먼 논리적 결과들에 이르기까지 전 내용을 항상 종이에 기록하여 전개시키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성(理性)의 시대”(age of reason)에 살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그는 진정 그 시대에 속한 인물이었다. 더 나아가서, 어떠한 문제를 다루든 간에 그에게는 권위에 호소하는 일이 쓸 데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참 독특하게도, 칼빈주의 체계를 대적하는 자들을 이성의 법정에 끌고 가서 이성의 심판을 받게 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에드워즈가 자기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과거의 권위들을 자주 인용하는 예는 오로지 교훈적 성격이 짙은 - 논쟁적인 성격의 논고와는 달리 - “신앙적 감정에 관한 논고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과거의 학자들이 자기를 뒷받침하고 있음을 에드워즈 스스로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그는 자신이 변호하는 그 사상 체계(, 칼빈주의. 역자주)의 대 학자들에 대하여 아주 광범위하고도 세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메시우스(Amesius: 윌리엄 에임즈[William Ames]를 지칭함. 역자주)와 볼레비우스(Johannes Wollebius)는 예일 칼리지 시절 그의 교과서들이었다. 예일 대학의 정선된 도서들을 그가 철저하게 탐독했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예일 대학에서의 신학 공부가 끝나갈 무렵, 그는 교리서나 신학 논쟁서를 읽는 일을 마치 하루의 정해진 일과에 속한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그는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들을 섭렵했고 그들의 사상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까지도 본받아서 자기의 사상과 삶을 이루어갔다. 예를 들어서, 청년 시절 그는 토마스 맨튼(Thomas Manton)시편 119편 설교를 영적인 안내서로 부지런히 이용한 것을 보게 된다. 그의 저작들 속에서 과거의 권위들을 언급하는 예가 간혹 나타나는데, 그 예들을 보면 그가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존 프레스턴(John Preston), 토마스 블레이크(Thomas Blake), 안써니 버지스(Anthony Burgess), 스티븐 카녹(Stephen Charnock), 존 플라벨(John Flavel), 떼오필러스 게일(Theophilus Gale),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존 오웬(John Owen),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토마스 셰퍼드(Thomas Shephard),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플라톤주의자인 존 스미스(John Smith), 그리고 아리우스주의자인 사무엘 클라크(Samuel Clark) 등을 친숙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자기와 동시대 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정확히 평가하였다. 아이작 왓츠(Isaac Watts)와 필립 도드리지(Philip Doddridge)는 물론, 토마스 보스턴(Thomas Boston)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보스턴의 The View of the Covenant of Grace (은혜 언약론)에 대해서는 그 논지의 흐름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솔직히 고백했으나, 그의 Fourfold State of Man(인간 본성의 사중 상태)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물론 칼빈(Calvin)의 말로 맹세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칼빈에 대해서도 철저히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뛰르뗑(Francis Turretin)에 대해서도, “위대한 뛰르뗑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판 마스트리히트(Peter van Mastricht)에 대해서는 심지어 뛰르뗑보다 훨씬 낫다고 말하는가 하면, 좀 더 열정적으로 내 생각으로는 성경을 제외한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책보다 낫다고까지 평한다. 그러므로, 최고로 존경받는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가르침과 그의 가르침이 아주 근사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은 의식적인 것인 동시에 의도적인 것이다. 그들을 인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그들에 대해 무지했다거나 그들을 경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습관이 그러했기 때문이요 또한 그가 감당하고 있었던 특별한 임무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여 말해서, 그가 가르치는 내용은 완전한 형체를 갖춘 표준칼빈주의 그 자체인 것이다.

 

물론 그는 독자적인 사상가였고, 따라서 그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표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생각에서까지도 독특한 점이 나타나고 있다. 인류와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일체성(一體性: identity)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인격적 일체성 교리에 기초하는데, 그것은 결국 인류와 그 머리의 일체성이 하나님께서 임의적으로 구성하신 것’(arbitrary constitution)이 되어서 그 이후의 계속되는 순간들을 모두 하나로 묶어 버리게 되는데, 이러한 것은 오직 에드워즈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원죄 교리에 대한 반론에 답하면서, 그는 중간의 어느 과정에서 슈타퍼(Stapfer)를 거론하면서 그를 따라, “간접적 전가”(mediate imputation)로 알려져 있는 그런 형태의 가르침에서 쓰는 언어로 논지를 전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개인의 생명이 그 연속되는 순간들 속에서도 하나가 되도록 정해 놓으셨는데 이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온 인류도 진실로 하나라는 그 자신의 견해를 예증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가 간접적 전가의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그 다음 문맥에서 나타난다. 거기서 그는 오히려, 아담과 그의 후손은 지극히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 하나이며 아담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그 후손에게 있어서도 부패한 기질이 처음 생김으로써 야기된 죄과아담의 첫 범죄의 죄과와 절대로 구분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논고 전체를 통틀어서 그는 통상적인 칼빈주의적 교리에 따라서 논지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장 두드러진 독특성은 신학 분야보다는 철학 분야에서 나타난다. “참된 덕성의 본질에 대한 논고에서 그는 모든 덕성(德性: virtue)은 궁극적으로 자기 사랑(self-love)에로 집약될 수 있다는 견해에 반대하여, 존재 일반(being in general)에 대한 사랑에 덕성이 존재한다는 다소 이례적인 이론을 전개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물론 그 다음 시대의 뉴잉글랜드 신학을 위한 하나의 배아(胚芽)의 역할을 하게 되지만, 그의 다른 저작들 어느 곳에서도 이런 논지는 다시 접할 수가 없다. 이러한 그의 특이한 논지들은 어떤 경우라도 절대로 그의 가르침의 특징이라 할 만한 것들이 아니다. 그는 독창성을 과시하려고 애쓴 일이 전혀 없다. 그는 분명 자신을 독자적인 사상가로 생각하였고, 또한 말하자면, “칼빈 같은 신학자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남들의 평가를 철저히 반박했을사람이었다. , “칼빈 같은 신학자에게 의존한다는 말이 칼빈이 믿었고 가르쳤다는 이유만으로 맹목적으로 그 교리들을 믿고 가르친다는 그런 의미라면 말이다. 그러나, 이런 반박 그 자체가 바로 칼빈의 사상에 동의한다는 하나의 선언이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것을 정확하게 칼빈이 가르친 바대로 믿은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자신이 맹목적인 칼빈의 추종자로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확신에 의하여 칼빈주의를 변호한 사람으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한 가지 관심사는 위대한 칼빈주의 해명자들의 사상 체계 위에 더 무언가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통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칼빈주의의 체계의 주요 요소들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트집 잡을 수 없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놀라운 창의력은 오로지 칼빈주의의 주요 요소들을 세울 수 있는 설득력 있는 가능한 논지들을 발견하고 이를 충만하게 전개시키는 데만 사용된 것이다. 심지어 그의 위대한 의지에 대한 논고에서도 이런 사실이 드러난다. 이것이 그의 모든 논고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들 통상적으로 판단하는데, 그런 통상적인 판단이 옳다. 그러나 이 논고의 가르침은 정확히 칼빈주의 신학도의 가르침 그 자체인 것이다. 오래 전부터 들어온 말이지만, “이 논고가 새롭고 신선한 것은 그것이 취하고 변호하는 입장이 신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수많은 증거들과 논지의 풍성함과 절실함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의 독창성은 그의 사상의 내용에 있다기보다 그의 사고를 진행하는 자세와 방식에 있다 하겠다. 그는 그에게 전수되어 내려온 그 위대한 전통 속으로 몸소 들어가서 자기의 개성을 거기에 불어넣어서 생기를 주며”, 또한 그의 사고의 생명력으로 인해서 그의 논고가 가치와 독창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수고의 효과는 그의 목적에 상당히 부합되었고, 그의 위대성과 어긋나지 않았다. 칼빈주의를 대적하는 운동이 그 땅에 계속 확산되고 있었는데 그런 운동이 상당히 많이 점검을 받았고, 또한 그의 말처럼 칼빈주의를 제거하는 일이 뉴잉글랜드의 사상계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이 되는 시기가 임박한 상태에 있었으나, 그의 수고를 통해서 그 시기가 백 년 이상 뒤로 미루어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