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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은혜의 방편 - 유해무 교수

Bavinck Byeon 2015. 1. 21. 15:26

기도, 은혜의 방편

 

유해무 교수

 

 

"그대가 신학자라면 참되게 기도하리라. 그대가 참되게 기도하였다면, 그대는 신학자이다."

 

현금 한국의 몇 웹 사이트가 매주 몇 편의 설교 본문 전문을 공개하고 있다는 소문이 항간에 돌고 있다. 지나치게 분주한 한국 목회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친절함에 매료될 위험은 아주 크다 하겠다. 그러나 기도 중에 이루어지는 주해와 묵상이 생략된 설교를 팔고 사는 것은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이 자행하였던 바와 같이 도둑질에 해당됨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교회당에 앉자 마자 먼저 기도부터 한다. 설교를 통한 성령의 조명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설교는 지성만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설교를 하는 자와 듣는 자가 동시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설교를 할 수 있으며, 또 그 설교를 깨달을 수 있다. 이처럼 성도는 설교자를 위하여 미리 기도하고, 설교자는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설교 전에 간구한다. 이는 고대 동방교회에서 정착된 성령부름’ (epiklhsij)에 해당되는 아주 아름다운 전통이다.

 

기도에 관해서는 대륙-개혁파와 영국-장로교 전통 사이에 모종의 차이가 있다.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은 가장 중요한 감사의 항목으로서의 기도를 말하는 반면에, 웨스트민스터표준서들은 기도를 설교 및 성례와 함께 은혜의 방편으로 본다. 전형적인 개혁파 기도해설서로는 드 퀘벵의 기도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성화의 맥락에서 기도를 다룬다. 그는 기도가 개혁자들에게는 신학의 중심 주제였으나, 개신교 정통주의에서는 그 중요한 위치를 상실하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교의학자들이 기도를 백안시함으로써 실천신학자들을 궁지에 밀어넣고 있다는 투르나이젠의 말을 인용한다.

 

헨드릭 벨코프도 기도가 신앙론에서는 무시당한 주제라고 불평하였다. 그는 칼빈을 예외로 들면서, 그가 기도에 25항들을 할애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루터파의 슈미트(H. Schmid)와 개혁파의 헤페(H. Heppe)16세기와 17세기의 루터파와 개혁파의 저서들로부터 교의학적 주제들을 채집하여 정리한 교의학에는 기도라는 항목이 아예 나오지 않았지만, 다시 현대의 여러 신학자들이 기도를 새로운 신학적 주제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비판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두커스는 벨코프의 이런 주장에 반하여 개신교정통주의시대의 개혁파신학자들이 기도를 아주 장황하게 다루고 있음을 잘 반증하였다. 사실 개혁 이후, 기도는 교의학이 아니라 윤리학에서 다루어졌다는 것을 벨코프는 간과하고 있다. 게다가 기도는 그가 지적한 것 이상으로 현재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많이 취급되어졌다. 그럼에도 그의 비판에는 일리가 있다. , 신학 연구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 실제로 신학자들이 기도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기도가 감사의 표현인지, 은혜의 방편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경건함과 기도는 사실상 같으며 하나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영향으로 독일어권에서는 기도는 경건성을 재확인하는 가장 신뢰할만한 표지라는 입장이 정착되었다. 최근에는 기도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다. 교의학 뿐 아니라 신학의 각 분과에서 기도를 주제로 한 단행본들이 많이 출판되었다. 이처럼 대륙의 신학에서도 기도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고,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의 핵심이 기도라는 의견이 정착되었다.

 

그런데 이런 연구서들은 기도를 경건의 표지 또는 성화의 일면으로 본다. 따라서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보는 웨스트민스터신조의 입장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입장은 여하한 다른 신조에서도 나타나지 않으며, 최근 연구문헌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은혜의 방편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하며 당신의 은혜에 참여하게 하는 신앙을 일으키는데, 이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 은혜의 방편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오시는 것을 말한다. 웨스트민스터신조는 은혜의 방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은혜의 방편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은덕들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외적이고 정상적인 방편들이며, 이것들은 당신이 제정하신 것들인데, 특히 말씀, 성례와 기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리문답은 기도가 그리스도의 은덕들을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다음과 같은 기도의 정의를 제시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감사함으로써 인정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은혜의 방편이라는 측면보다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로 설명되어 있다. 요리문답은 계속하여 주기도문을 강해한다. 왜 요리문답이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불렀는지가 불분명하여 진다.

 

그렇다면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부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가? 특이하게도 청교도나 장로교신학자 중에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기도를 다루는 예가 거의 없다. 우리는 이 대답을 루터와 칼빈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루터는 기도에 대하여 아주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는 감사가 아니라 인간의 소원이 주를 이루는 중세의 미사를 비판하였다. 미사에서는 받은 은사에 대한 감사보다는 인간적 위기나 위험에서의 구출이 전면에 등장한다. 루터는 이를 반대하면서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더 강조하였다. 그는 기도를 믿음의 사역으로 보면서, ‘감사의 예배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례에서 당신의 교중에게 하감하시는데, 하나님의 하감을 우리는 오직 감사의 예배를 통해서만 영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은혜의 방편들로써 은혜를 시혜하시며, 교중은 하나님의 이 사역을 믿음의 기도와 감사로써 수혜한다. 루터에게는 찬양의 제물로서 감사의 제사가 기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 관계는 수혜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잘 이해되어진다. 감사의 예배에서 신자는 이미 받은 은사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기도를 통해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장래에도 주실 은사들을 대망한다. 이미 받은 은사들은 수혜하시는 하나님의 장래적인 계시에 대한 소망인 기도를 계속 하게 하는 방편이 된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은 인간적인 행위인 기도의 공로로 보아서는 안 된다. 흔히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부상(浮上)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지속적인 기도를 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끌어내려 기도를 듣고 응답하게 할 수 있다는 식이다. 이것은 기도를 공로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에 대해서 기도가 하나님의 계명이요 약속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기도는 계명이요 명령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도를 항상 들어주시며, 이 응답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된다. 기도의 약속은 곧 응답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기도가 지니는 사죄의 요소도 지적한다. 이처럼 그는 기도를 공로로 보는 잘못을 경계한다. 기도에서는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올리워진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오시는 길이다. 즉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며 당신의 중보사역 없이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다.” 그리스도는 기도자가 제물로 바쳐지는 제단이며, 그리 하여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 이 점에서 기도와 찬양의 제사는 상호 교차한다.

 

물론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뿐 아니라 기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오시는 길이라는 사실도 부각시키려고 한다. 기도는 우리의 중보자께서 실현시키신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이다.

 

칼빈은 성령론의 성화의 맥락에서 기도를 다룬다. 그는 기도의 두 요소를 부각시킨다: 기도는 신앙의 주된 사역이며, 기도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은덕들을 매일 받는다 (III,xx). 기도는 신앙의 사역이며 이 점에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덕들을 기도를 통하여 받기 때문에, 기도가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는 길이라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모든 선한 것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고, 구원의 수단들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떠나서 자기 바깥에서 구원을 찾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기꺼이 그리고 넘치게 계시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모든 비참 대신에 구원을 제시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천국의 보물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붙잡게 하신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보물을 받게 된다. 신앙이 복음에서 나오듯이, 우리의 마음도 복음의 훈련을 받아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천국의 보물을 발굴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섭리와 능력의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것을 간구하며,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며 지키시고 도와주신다. 또 죄로 인하여 가련하여진 우리를 하나님은 당신의 인자하심을 통하여 은혜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신다. “, 기도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며 당신을 계시하여 주실 것을 간구한다.”(III,xx,2)

 

위에서 보는 대로 칼빈은 기도가 지닌 계시의 성격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기도의 교사인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사 옳은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의 정념을 제어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게 하신다(III,xx,5).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를 파생적 의미에서은혜의 방편이라 부를 수 있다. 칼빈은 기도를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III,xx,2)라 부르기도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계시한다는 말을 살피려고 한다. 그는 이 문맥에서 이 용어를 두 번이나 사용하는데, 이 말은 상당히 강한 표현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하여 당신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특성을 잘 들어내어 보인다. 이 점에서 기도는 은혜의 방편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아야 하며, 이 약속이 우리의 마음에 인을 쳐야 한다. 어떻게 이것이 일어나는가? 바로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칼빈은 말한다.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심을 알게 된다.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써 기도해야 하며, 이런 기도는 우리를 우리 바깥으로 인도한다.” 하나님과의 이 교제는 인간적인 경건의 표현이 아니며, 이 간절한 마음은 오직 말씀의 능력 아래 있다. “내가 말씀 위에 서 있을 때 나는 기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를 가능하게 만드시는 영원한 중보자이시다. “중보자를 의뢰하고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만이 기도할 수 있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접붙여진 다음에야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수 있다.”

 

위에서 본 대로 루터와 칼빈은 기도를 교제로 보았으며, 이에 기초하여서 하나님의 계시로 보았다. 이들의 기도론에서는 그리스도가 중심 위치를 차지한다.

 

물론 기도가 개혁자에게 중요한 주제였지만, 그들이 기도를 비로소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다. 중세와 고대 교회에서도 기도가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교회사를 통하여 기도에 대해서 많은 글들이 쓰여졌다. 이 중에서도 우리는 거의 무시당하였으나, 칼빈이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도가 지닌 계시의 성격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때 대개 기도는 계시된 말씀과 더불어 취급된다. 말씀은 하나님과의 교제인 기도를 통하여 기도 중에서 깨달아진다. 우리는 유스틴, 클레멘스 그리고 오리겐 등 고대교회의 세 명의 신학자들을 다루면서 이 점을 확인하려고 한다.

 

먼저 유스틴을 살펴보자. 유대인 노인은 유스틴이 플라톤 사상을 추종했다는 말을 들은 뒤에, 영혼이 신적인 존재와 닮았다는 이유로 불멸하다고 주장하는 사상을 즉각 비판하였다. 도리어 그는 창조주 하나님을 제시하였고, 그분에게 인간의 생명이 의존하고 있임을 설파하였다. 이미 철학자들이 출현하기 전에 이 진리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성령으로 충만했던 의로운 선지자들을 통하여 선포되었다. 그 당시에도 존속하던 그들의 저작들은 논증(meta apodeixewj)을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는 논증을 능가하며, 진리는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은 만물의 아버지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고,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예언하였다. 구약과 하나님 및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연결시킨 뒤에, 그 노인은 유스틴에게 권고하였다: “무엇보다도 기도하시오. 그러면 빛의 문들이 그대에게 열릴 것이요. 이런 것들은 만인이 파악하거나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요. 오직 하나님과 당신의 그리스도가 지혜를 베푸는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소.” 진리의 깨달음에는 논증이 아니라 믿음이 요구된다는 것과, 기도의 의미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유스틴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성경 읽기와 기도를 통해서였다. 이 것은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기도 사이에 있는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클레멘스는 그릇된 영지주의를 논박하면서 자신을 진정한 영지주의자로 불렀다. 그는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정의하였다. 영지주의자는 지속적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도 중에서 추구한다. 이 목표가 성취되면, 그는 무의미한 모든 것을 떨쳐버린다. 그는 기도 중에 하나님과 함께 있기(suneinai men speudwn qew)를 갈구한다. 이로써 그는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완전함에 도달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마치 기도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게 되는, 기도 생활에서 나타나는 자아도취적인 자만을 경고한다. 비록 모든 선한 것들이 다 우리의 권리 주장 없이 다 은사로 주어지지만, 간구는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그는 덧 붙혔다.

 

이제 영지주의자는 이웃이 신지식(神知識)에 이르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 그들이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유일하게 선하신 구세주를 알게 되도록 기도할 수 있다. 클레멘스는 계속하여서 신앙은 기도의 한 형태라는 특이한 발언을 한다. 다시 한번 더 그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선언한다.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다 기도로 승화된다면, 이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기회를 피할 이유가 없다. 영지주의자의 거룩과 하나님의 완전하신 선하심은 상통한다. 회개한 자는 신앙과 지식과 그 위에 사랑의 완전을 간구한다. 이 사랑의 정상을 정복한 영지주의자는 영지적인 묵상(qewria)이 지속되고 성장될 것을 바라면서 기도한다. 지고의 선은 신지식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거룩하고 경건하다. 영지주의자는 종국적으로 자신이 경건한 자임을 입증한다. 경건한 영지주의자의 생애 전체는 잔치이다. “그의 제물은 기도요 찬양이요, 식사 전() 성경 읽기요, 식사 시와 취침 전 시편과 찬송이요 또 심야의 기도이다. 이를 통하여 그는 영원한 기억 중에서 묵상에 집중하면서 신적 찬양대에 합류한다.” 물론 클레멘스는 기도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감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기도가 지닌 대화의 성격을 그는 동시에 강조한다. 그리고 기도에 나타나는 송영의 측면도 함께 강조한다.

 

이제 클레멘스가 지고선인 신지식과 교제를 어떻게 연관시키는지를 살펴보자. 그에게는 이 지식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 말은 하나님을 앎’, ‘하나님을 봄또는 하나님을 소유함이라는 뜻을 지닌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고의 묵상이며, 이 때 말씀은 안내자가 되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천국의 항구로 인도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거룩한 신비에 들어가서 그 곳에 준비된 모든 것들을 즐길 것이다. 유일한 선은 성부이시며, 성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사망이고, 불멸한 이(부활의 주님)를 통하여 당신을 아는 것은 영생이다. 이 지식에서 벗어남은 곧 파멸이다. 불멸함은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식은 결코 지성주의적으로 채색되어져 있지 않다.

 

위에서 나타나는 대로, 클레멘스는 신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연관시킨다. 그리고 이 지식은 인간의 신격화를 향한 길이다. 이 본문은 교회사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인간의 신격화에 관한 언급이다. 인간의 신격화는 성자를 통하여 참되게 입양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를 하나님은 아들과 신이라 부르신다. 이처럼 기도와 신지식, 그리고 신격화는 상호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오리겐은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편 119:8)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기도와 성경 이해의 관계를 아주 멋지게 표현한다. 율법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으면, 선지자들이 기도하였듯이 우리도 깨닫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 물론 오리겐의 풍유적 해석을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가 성경을 깨닫는 데에 기도를 관련시킨 것은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오리겐은 기도의 단계를 서술한다. 먼저는 비록 영적이지만 제한적인 것을 간구함이요(dehsij), 그 다음은 하나님과의 순수한 교제 중에서 우리 자신을 바침이요(proseuch), 마지막은 기도에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들어내는 송영이다(docologi,a)이 송영의 단계에서는 하나님과의 합일 (enwsij)이 강조된다. 물론 여기서도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나타난다. 그럼에도 이 구별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기도의 가장 최고봉으로서 송영이 언급되어 있다. 이 것은 사심 없는 기도라 할 수 있다. 송영에서 기도자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지향한다. 신자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높이 고양되며, 이 상태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다. 그는 사소한 것을 간구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무가치한 축복을 구하지 않고, 크고 신적인 것을 구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허락 하시사,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당신에게만 있는 구원을 얻게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중심 역할을 한다. 예수님 안에서 신적인 것과 인적인 것이 연합하여서 인간은 그 분 안에서 신적인 것과 교제하여 신적으로 된다. 바로 이런 삶을 예수님이 사셨고,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서 사는 모든 자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을 누리게 된다.

 

오리겐은 그레고리 타우마투르구스에게 성경 읽기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고 한다. 두드리고 찾는 데에만 만족하지 말라. 무엇보다도 기도는 하나님의 일들에 관한 지식에서 불가피하다. 구주께서도 기도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권하신다. .. 그대가 동참자가 되고 그대의 기업이 날로 번성하여 그리스도께만 참여하지 않고 하나님에게도 참여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는 기도 생활에서 이루어진다.

 

오리겐은 간구나 사죄 기도보다는 삼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더 강조한다. 기도에서 제일 먼저 송영이 나오고 그 다음이 하나님의 은덕에 관한 감사이다. 셋째는 사죄 기도요 마지막이 간구이다. 그리고 기도는 다시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리는 송영으로 마쳐야 한다. 비록 삼위일체론이 오리겐에게는 여전히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지 않지만, 기도는 삼위를 향한 송영으로 시작하여 삼위를 향한 송영으로 마쳐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만물이 성부에게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아오듯이,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삼위 안에 있는 삶이 우리의 삶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오리겐은 책을 쓰면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이것은 나중에 힐라리나 어거스틴에게서도 나타난다.

 

유스틴, 클레멘스 그리고 오리겐에게서 기도는 기록된 말씀을 이해하는 역할을 한다.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써 신앙에 이른다. 기도로써 말씀을 이해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른다. 기도의 또 다른 기능은 신비적 경향인데, 하나님과의 합일을 지향한다. 이 측면이 제 아무리 위험하다 하더라도 기도가 지닌 이러한 교제적 성격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기도는 인간의 자세, 즉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도의 내용은 부차적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중세 서방교회에서는 기도가 주로 간구로만 이해되었었다. 그러나 특히 루터에게서 본 대로 개혁자들은 기도에서 간구보다는 경배의 측면을 더 부각시켰다. 이 것은 바로 삼위 하나님을 향한 찬양, 곧 송영이다. 송영을 우리는 기도의 최고봉이라 부르려고 한다.

 

우리는 기도의 구조를 신학의 구조로 발전시키려고 한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언설이다. 그러나 신학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물건이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는 인격이시다. 신학의 대상은 동시에 그 주체이다. 하나님은 주체로서 당신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신지식이란 우리와 교제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모종의 정보를 얻기 위하여 추적하는 탐사자의 입장에서 읽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상을 소유하고 통제하고 조작하려는 주체로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치면,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 이것을 우리는 기도에서 잘 살펴보았다. 우리는 기도 중에 대상을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만난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교제라 할 수 있다. 기도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면서 동시에 하나님도 우리에게로 오셔서 당신을 삼위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 즉 기도는 이와 같이 은혜의 방편이다. “기도는 여타 종교적 행위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의 총체가 기도에서 이루어진다.” 신학은 대화와 교제라는 기도의 구조를 채용할 수 있다. 우리는 쉬임 없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그 분이 누구신지를 먼저 그 분으로부터 듣고 배워야 한다. “신학은 기도에서 시작하여 기도에서 마친다. 교회는 신학을 언설하기 전에 먼저 기도한다.” 하나님과 쉬임 없이 교제하는 기도의 구조가 신학의 구조가 되어야 한다.

 

송영은 기도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송영은 성경에서 종종 이인칭의 형태로 언설된다 (6:13). 그러나 대개 삼인칭의 형태로 많이 나타난다 (14:20; 2:14; 11:36 이하). 송영에서 하나님은 이인칭 당신에서 삼인칭 로 호칭되고, 때로는 와 교중의 우리는 사라지면서, 하나님만이 전부가 되신다. 아주 강하게 객관적으로 등장하는 이 표현은 사실 객관적 표현이 아니라 엄격하게 말하자면 자기 부인이요, ‘자기 제사이다. “송영에서 는 제물로 바쳐졌다. 사실 송영은 찬미 제물이요 자기 포기이다.”

 

송영은 하나님이 이미 가지신 영광을 찬송함이다. 하나님이 영원토록 가지고 계시나, 우리에게 나타난 그분의 영광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찬송함이 송영이다. 야곱의 총애를 받지 못한 레아는 넷째 아들을 낳고서 비로소 그의 이름을 유다, “내가 이제는 야웨를 찬송하리로다”(29:35)고 고백했다. 물고기 뱃 속에서 요나는 나는 감사(찬송)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야웨께로서 말미암나이다”(2:9)라고 고백했다. 특히 시편에는 이런 송영이 더욱 빈번하게 나온다(28:6, 31:23, 66:20, 72:19, 144:1 이하). 하나님의 구체적 구원 행위를 감사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 하나님은 언제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송영이 터져 나온다(18:9 이하; 4:14; 103:8; 11:5). 송영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그 구원의 하나님에게로 나아간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11:36, 딤전 1:17, 7:12). 송영은 삼위의 구원사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원의 삼위 하나님을 찬양함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당신의 거룩한 제단에 감사의 제물을 영원토록 드리리이다, 오 성부여, 로고스여, 성령이시여.” 이와 같이 송영에서 신학과 경륜이 연합한다. 나아가 이런 본문들에서는 구원 행위 전이나 후에도 하나님은 여상하시며,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지혜로우신 분이심을 찬송한다(24:27; 삼하 18:28; 왕상 1:48, 5:7; 대상 29:10 이하; 에스라 7:27-28; 119:12 이하, 144:1 이하; 1:68; 고후 1:3; 벧전 1:3). 또 구원의 하나님이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이심을 찬양하게 된다. 하나님은 창조와 섭리의 사역에서 당신의 위엄, 지혜, 선하심과 은총을 계시하신다(8:2, 104:2-3, 148; 4:11). 그러므로 창조와 우리가 지은 바 된 순간부터 삶의 의의와 목적은 찬송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야웨를 찬양할찌어다”(150:6). 송영은 창조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속하며(6:13), 이 나라 백성의 임무는 찬송이다(47:7-8). 이처럼 송영에서는 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이 우리의 경배 앞에 현현한다. 예수님에 관한 이런 관점에서 송영도 나타난다(9:5).

 

우리는 신학이 송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은 찬미의 제사여야 한다(13:15). 성경의 계시는 이성으로만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을 지니고 있다. “전체적인 예배는 영적 차원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신학적 반성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기도의 법은 믿음의 법이다.” 학은 학이로되 학만이 아닌 지혜요, 또 이성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이성만으로는 벌거숭이가 될 수밖에 없는 로고스(Logoj), 이것이 신학의 길이다. 이성은 신비와 지혜의 영역 안에서 자기를 실현한다. 즉 이성이 자기를 신앙 안에서의 합리성으로 이해할 때 신학의 신학적 특징이 드러난다. “삼위일체론은 궁극적으로는 사고의 방식으로 드리는 송영이다.” 이에 대한 전형적인 예를 우리는 힐라리와 어거스틴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저작 삼위일체론을 삼위 하나님을 향한 송영으로 마친다. “주께 간구하오니, 저의 이 경건한 신앙이 더러워지지 않게 지켜주소서. 제 영혼이 떠나갈 때라도 이 것이 내 확신의 말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던 때의 중생의 고백에서 말한 바를 영원토록 지키게 하소서. 폐일언하고 저로 하여금 우리 아버지이신 당신과 동시에 당신의 아들을 찬양하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당신의 동생자를 통하여 당신의 성령의 은총을 입게 하소서. ‘아버지여,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니다고 말씀하시는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신앙의 증인이시니, 그는 당신 안에 당신과 계시며 영원토록 축복받으실 하나님이시이니다.” “우리는 쉬임 없이 오직 한 분이신 당신을 찬양하면서 한가지만을 말하리이다. 우리는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 주님 홀로 한 분이시요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이시여, 제가 이 책에서 말한 것은 당신에게서 왔아오니, 저들이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인정하게 하소서. 저의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당신께서 용서하여 주소서. 아멘.” 신학은 신비를 장악할 수 없다. 도리어 그 신비의 끝없는 깊이를 노래할 뿐이다. 신학은 곧 송영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11:33-35) 이는 知的否定 신학이 아니라, 자기 포기의 송영이다.

 

신학은 송영이요, 신학은 송영으로 시작하여 송영으로서 마쳐야 한다. 교의학은 종말론으로 마칠 것이 아니라, 송영으로 마치는 것이 더 아름답다. 이처럼 모든 신학저서들이 하나 같이 삼위 하나님을 향한 송영으로 마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신학연구와 설교에는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는 기도의 자세가 선행해야 한다. 신학자가 신학을 말씀과 기도로써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신앙을 송영으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기도에서 나타나듯이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성경말씀에 의탁할 때에만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기도가 어쨌든 모든 신지식의 방편인 것처럼 기도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의 방편이다.” 복음 사역에 있어서 기도는 설교보다 결코 경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들은 교중을 향해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6:4)고 요청하였다. 고대교회에서는 신학이 기도로 흥왕하였고, 캅바도기아 신학자들이나 힐라리 및 어거스틴에게서 볼 수 있듯이, 신학은 묵상으로 수행되었다. “기도는 신앙의 시금석이요 기도의 신학은 모든 신학의 시금석이다.”

 

우리는 루터가 세 용어로써 요약한 신학의 방법을 언급함으로써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기도, 묵상, 추구.” 신학은 송영이며, 신학은 기도로써 시작되고 수행되며 완성된다. “기도의 법은 신앙의 법을 구성한다."

 

 

 

출처: 개혁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