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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불꽃 마틴 루터 - 원 광연

Bavinck Byeon 2015. 1. 26. 20:14

종교 개혁의 불꽃 마틴 루터

 

원 광연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큰 폭풍우 속에서 벼락이 내려치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죽음이 코앞에 닥치는 것을 예감하고 공포에 질려서 길바닥에 엎드려 이렇게 서원을 했다. 150572일에 일어난 이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인하여 당시 촉망받는 스물 두 살의 법학도였던 청년 루터의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어떤 의미에서 16세기의 위대한 개신교 종교 개혁은 바로 그 사건에서 이미 싹이 트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보름 후인 717, 그는 정말로 자기가 행한 서원을 그대로 지켰다. 법학 공부를 중도에 포기하고 에르푸르트(Erfurt)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간 것이었다. 법학을 공부하여 법률가로서 가문을 빛내주기를 바랬던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ther)는 아들의 그런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로 인하여 아버지의 사망 시까지도 두 사람은 서로의 앙금을 완전히 풀지 못했다. 훗날 루터는 그 당시 자신의 그런 선택이 조금도 가치 없는 큰 죄였음을 고백하였다. 자유로이 마음의 간절한 소원을 따라 수도사가 된 것이 아니고,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뇌 때문에 떠밀려서 하는 수 없이 즉흥적으로 서원을 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의 죄악된 선택을 통해서도 선한 결과들을 얼마나 많이 이루셨는지 모른다라고 하였다.

 

마틴 루터는 14831110일 독일의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출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가족은 만스펠트(Mansfeld)로 이주했고 그는 그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그를 막데부르크(Magdeburg)로 보내어 학교를 다니게 했고, 이어 아이제나흐(Eisenach)로 학교를 옮겼다.

 

1502년 열 아홉 살의 루터는 57명 중 30등으로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5051월에는 에르푸르트 대학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이때는 17명의 후보생 중 2등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법학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바로 그 해 여름 그 문제의 폭풍우와 벼락 사건을 만난 것이다.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수도원 서고(書庫)에서 처음으로 라틴어 성경을 접하게 되었는데, 일반 사람들에게 읽어주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이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보배요, 또한 장차 그가 그 보배를 발견함으로써 온 세계의 역사를 바꾸게 될 엄청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는 것은 그 당시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처럼 루터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은밀하신 은혜의 섭리가 그에게 역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터는 영적인 고뇌를 떨치고 안식을 얻기 위한 하나의 노력으로 수도사의 갖가지 임무들을 최선을 다해 철저하게 감당하였다. 훗날 그는 그 시절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이십 년 가까이 수도사로 있으면서, 기도와 금식과 철야 등으로 나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쳤고, 추위에 내 몸을 얼어붙게 만들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다시는 절대로 행하고 싶지 않을 만큼 가혹한 고통들을 나 자신에게 가했다. . . . 혹시 사람이 수도사의 생활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있다면, 바로 내가 그렇게 천국에 들어갔을 것이다. 나를 아는 모든 수도원 동료들이 그 점을 증언할 수 있다. . . . 만일 수도원 생활이 더 길어졌더라면, 나는 철야와 기도와 독서와 기타 노동들 때문에 거기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영혼의 안식을 찾기 위하여 얼마나 힘쓰고 애썼는가를 잘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런 육체적이며 영적인 처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150752일 그는 처음 소위 미사를 집전하였는데, 그 일로 인하여 크나 큰 영적인 고뇌에 시달리게 되었다. “내가 누구기에 감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살()을 사람들에게 떼어 나누어 줄 수 있단 말인가? 죄인인 내가 감히 어떻게 그리스도의 살을 손에 들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행위야말로 신성모독이 아닌가?” 적어도 그는 로마교회가 가르쳐온 소위 화체(化體)의 교리”(doctrine of transubstantiation: 사제가 기도하는 순간 성찬의 떡과 잔이 겉모양은 그대로 있으나 그 본질은 진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뀐다는 가르침)를 마음에서부터 확고히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루터는 평생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생각을 마음 깊이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성경 연구나 기도나 미사 집전 등의 의무들을 결코 기계적으로 습관적으로 아무렇게나 행할 수가 없었다. 이런 모든 일 하나 하나에서 언제나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의식하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임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던 그에게 또 한 가지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가 임하고 있었다. 바로 요하네스 폰 슈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tz: 1460-1524)라는 훌륭한 인물을 상관으로 만난 것이다. 루터는 고해 사제인 슈타우피츠에게 날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그러나 다른 수도사들과는 달리, 그는 1시간, 2시간, 혹은 심지어 3시간씩 마음으로 지은 갖가지 죄를 낱낱이 고백하였고, 혹시 잊고 고백하지 못한 것이 생각나면 다시 가서 고백하곤 하였다. 그가 그런 일로 어찌나 괴롭히는지,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죄를 고백하려거든 사람을 죽이던가 하여 진짜 죄를 짓고 와서 고백하게!” 라고 말할 정도였다. 루터의 심중에는 정말 심각한 고뇌가 있었다. “내가 과연 고해성사를 하면서 진정으로 회개한 것일까? 혹시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회개한 것은 아닐까?” 라는 식의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진정 완전히 회개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자, 차라리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한탄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이러한 깊은 영적인 고뇌를 이해하였고,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해 줄까 하여 여러 가지 방도를 강구하였다. 그는 루터에게 신비주의 신앙가들의 글들을 읽어보라고 권하였다. 그리하여 루터는 성 베르나르(St. 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의 글도 읽었고, 일종의 신비주의 신학을 체계화시킨 게르만 신학(Theologia Germanica)을 읽고 한 동안 마음의 평안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신비주의도 영적인 평안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 가지 미묘한 부분이 있기는 하나 신비주의의 가르침은 결국 자기 자신을 완전히 굴복시키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일은 겉모양으로 의를 행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또 하나의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는 루터를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수도원으로 보내어 거기서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게 하였다. 학문에 몰두하는 동안 루터의 영적인 갈등이 해소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1509년 루터는 성경 연구로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다시 에르푸르트로 돌아왔다. 때마침 수도원에서 로마에 문서를 보내야 할 일이 생겼고,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혹시 거룩한 수도 로마를 방문하게 하면 그의 문제가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하여 1510년 그는 로마를 방문하였다. 로마를 처음 보자, 그는 감격에 젖어 땅에 엎드려 손을 높이 들고, “오 거룩한 로마여, 축복 있으라!”고 외쳤다. 그러나 사제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부패한 모습을 접하면서 이런 감격은 씻은 듯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로마가 온갖 부정과 무서운 죄악과 방탕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한 번씩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성 베드로 성당의 계단을 올랐으나, 오히려 환멸이 더 가중될 뿐이었다. 계단을 다 오르고 나서, 그는 이것이 진리인지를 과연 누가 안단 말인가?”라고 외쳤다.

 

여전히 영적인 괴로움 가운데 있는 루터를 위해 슈타우피츠는 신학박사 학위 공부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시에는 중세 로마교회의 신학자 피터 롬바르트(Peter Lombard: 1095-1169)의 신학 연구가 학위 과정의 필수적인 요건이었고, 그리하여 루터는 그의 작품들을 읽고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연구 과정 중에 자연스레 어거스틴(혹은,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e: 354-430)을 접하게 되었고, 그의 고백록, 하나님의 도성, 참된 종교와 기독교 교의등을 읽으면서 다시 사도 바울에게로 나아가게 되었다. 루터는 어거스틴과 바울의 가르침이 롬바르트를 비롯한 중세 로마교회의 가르침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특히 인간의 의지意志와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가르침이 서로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의 루터는 아직 중세 로마교회의 가르침을 전반적으로 추종하는 상태에 있었다.

 

1512년 그는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로서 성경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1513년부터 1515년까지는 시편을, 1515년부터 1516년까지는 로마서를, 그 후 1518년까지는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를 각각 가르쳤다. 강의 준비를 위해 성경 본문을 접하는 동안, 성경의 가르침과 로마교회의 가르침 사이의 모순이 점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그리스도, , 구원 등에 대해서 성경 자체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당시의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그 문제들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루터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우리의 죄는 마치 나무의 뿌리와도 같다고 보았다. 뿌리가 나무의 핵심으로서 나무 전체를 관통하는 것처럼, 죄도 그렇게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을 관통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신학적 원리들이 서서히 발견되기 시작하였고, 이것들이 대학 내에서 점점 영향을 미쳐가고 있었다.

 

* * * *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동안 성경적인 바른 진리를 향한 뜨거운 열망이 더욱 넘쳐났다. 그는 성경과 씨름하였고, 특히 시편과 로마서 공부에 진력하였다. 특히 그에게 있어서 로마서는 성경을 깨닫는 열쇠였다. 로마서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약 성경의 진정한 걸작이요 가장 순결한 복음이다. . . . 율법, 복음, 형벌, 은혜, 믿음, , 그리스도, 하나님, 선행, 사랑, 소망, 십자가 등,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을 이 서신서에서 가장 풍성하게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기독교의 복음적 가르침 전체를 이 서신서에서 간결하게 정리해주고, 또한 구약 성경 전체에 대한 서론을 제시하려 한 것 같다.

 

이 어간에 그에게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소위 "탑 속의 체험"(Turmerlebnis)이라 불리는 영적인 각성이 바로 그것이다. 정확히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는 확실치 않은데, 역사가들이 제시하는 연대는 1512년부터 1519년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루터는 로마서와 씨름하는 중에 도무지 풀리지 않는 난제로 인해서 마음에 큰 번민이 있었다. 1: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의 하나님의 의가 보통 이해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그 완전한 의라면, 인간은 그 에 이르지 못하며 따라서 죄인으로 정죄되어 심판과 저주를 받을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복음일 수 있는가?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은 결코 복음”, , 기쁜 소식일 수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혐오하기까지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루터에게 은혜를 베푸사, 이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고 생각하게 하셨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시편의 말씀(31:1; 71:2)의 도움을 받아 결정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다. , 1:17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를 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그 완전한 의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고, 인간은 믿음으로 그 의를 받아 자기 것으로 누리게 되니, 이 어찌 복음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이해하니, 복음의 전체적인 윤곽이 뚜렷하게 깨달아졌다. 그는 이때에 깨달은 이 놀라운 신학적 원리를 계속 발전시켰고, 이는 루터의 신학 사상의 근간이 된 것은 물론, 종교개혁 신학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 훗날 그는 이때의 감격을 다음과 묘사하고 있다:

 

나는 이제 완전히 거듭 났고, 활짝 열린 문을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성경 전체의 전혀 다른 얼굴이 여기서 내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 . . 전에는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그렇게도 혐오하였으나 이제는 거꾸로 그만큼 그 단어가 사랑스러워졌고, 그 단어를 높이 기리게 되었다. 내게는 바울의 그 본문이야말로 진정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15171031, 루터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아니 개신교의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한,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나, 유럽 전체의 역사가 송두리째 바뀌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어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만천하에 알리고,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 당국과의 토론을 제기한 것이다. 그의 교회에 속한 교인들조차 도미니칸 수사인 요한 테첼(Johann Tetzel)의 설교를 듣고 그에게 면죄부를 사는 것을 보고서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그렇게 항거한 것이었다.

 

로마 교회는, 교회가 많은 덕()을 쌓아놓고 있으므로 그것으로 온갖 죄들을 보상할 수 있다는 식의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수장인 교황에게 속죄의 권한이 있고, 그의 휘하의 각급 대리자들(주교, 신부 등)에게 그 권한이 위임되며, 따라서 일반 교인들은 그들에게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쳐왔다. 그리고 이것이 더욱 악하게 변질되어, 교회의 재정 충당을 위하여 면죄부(免罪符: Indulgence)를 판매하기에 이른 것이다. 테첼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면, 당사자의 죄는 물론 이미 죽어 연옥에 있는 자들까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선전하였다. 그는 동전이 돈궤에서 뎅그렁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솟아나옵니다라고 외치며 다녔다.

 

루터는 95개 조문에서 면죄부의 부당성은 물론 로마 교회의 구원론 전체의 그릇됨을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그는 신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 되기를 원하셨다.

 

32: 면죄부를 가졌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렇게 가르친 자들과 함께 영벌을 받을 것이다.

 

37: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죽었든지 살았든지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축복에 참여하며, 이 일은 면죄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신다.

45: 불쌍한 사람을 보고도 면죄부를 사는데 돈을 쓰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이 가르침 받아야 한다.

 

62: 교회의 참된 보배는 영광되고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복음이다.

 

95: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십자가, 십자가라고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십자가를 인정하지 않는 모든 선지자들을 멀리하라.

 

루터의 95개 조문은 당시 발명된 인쇄술 덕분에 유럽 전역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문제의 심각성을 안 로마교회 당국은 카예탄 추기경(Cardinal Cajetan)을 보내어, 루터에게 모든 것을 철회하도록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15184월 하이델베르크의 논쟁에서 자신의 견해를 더욱 선명하게 제시하였고, 이때에 스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자 마틴 부처(Martin Bucer:1491-1551)의 지지를 받았다. 15197월 루터는 라이프찌히에서 요한 엑(Johann Eck)과 대면하였고, 여기서 그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종교개혁의 한 가지 원리를 천명하였다.

 

1520년이 되자 루터의 개혁의 열풍이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는 게르만 민족의 귀족들에게 주는 호소”, “교회의 바벨론 유배 상태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세 편의 논고를 통해서 교황을 비롯한 로마교회의 신학적 사회적 횡포를 규탄하였고, 이것이 독일의 민족적인 정서를 자극하였던 것이다. 그 해에 로마 교황은 엑수르게 도미네”(Exsurge Domine: 주여 일어나소서!)라는 교서(敎書)를 내려 루터를 출교시켰는데, 12월 루터는 대중이 보는 앞에서 그 교서를 불태웠다.

 

그리고 1521년 그는 보름스 회의(the Diet of Worms)에 소환되었다. 황제를 비롯한 각급의 교회 당국자들 앞에 소환된 루터는 그의 모든 저술들과 가르침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4시간의 여유를 줄 것을 요청한 루터는 다시 회의석상에 나아가 담대히 외쳤다: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달리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찰스 5세 황제에게 그는, “성경이 내 모든 책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주니 내 양심이 성경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내가 그릇되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으면, 나는 철회할 수가 없나이다.”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담대히 복음의 편에 선 것이었다. 황제는 칙령을 발표하여, 21일 후부터 아무도 루터를 보호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며, 그를 체포하여 당국에 넘길 것을 명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는 황제가 그를 염려하여 보낸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바트부르크 성(Wartburg Castle)에 은신하고 이후로 융커 게오르그(Junker Georg)라는 가명으로 숨어 지내게 된다. 루터는 바트부르크 성을 그의 밧모섬이라 부르며, 그 동안 독일어 성경 번역에 전념하게 된다. 10개월 동안의 번역 작업 끝에 1522년 독일어 신약 성경(Das Neue Testament Deutsche)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구약 성경 번역 작업을 계속하여 1534년 독일어 구약 성경을 완성하게 된다. 루터는 독일어 성경 번역을 통해서 독일어의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1525642세의 루터는 카타리네 폰 보라(Katharine von Bora)를 아내로 맞았다. 그녀 역시 남편처럼 수녀의 종신 서원을 파기한 사람이었다. 그는 카라리네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통해서 여섯 자녀를 낳았고, 이 가운데 다섯을 잘 가르치고 양육하였다. 매 주일 오후에 자녀들과 다른 손님들을 집에 모아 가정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바트부르크 성에서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프레데릭 선제후(Frederick the Elector)의 보호와 후원을 받아 1546년 마지막 소천 때까지 계속해서 그 곳에서 가르치고 종교개혁을 위하여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교회를 담임하지 않았으나, 수없이 설교하였다. 마을의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주일에 두 차례, 주중에 한 차례씩 설교하는 적이 많았다. 어느 전기 작가에 따르면, 그는 1510년부터 1546년까지 약 3,000회의 설교를 했으며, 일주일에 여러 번 설교한 적이 많고, 하루에 두세 번 설교할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비텐베르크에서 1522년에는 117, 그 이듬해에는 137회의 설교를 했다. 그에게는 주말에 쉬는 것도, 주중에 하루씩 휴일을 갖는 일도 없었다. 단 한 번도 휴일을 가진 적이 없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설교하고 가르치고 사사로이 연구하고 저술하고 상담하는 일에 완전히 자신을 바쳤던 것이다.

 

또한 그는 독일어 번역 성경 외에도 평생토록 엄청난 양의 저작을 남겼다. 그는 표준 바이마르 판을 기준으로 권당 750면 가량으로 된 무려 94권의 전집을 남겼다. 존 칼빈의 거의 두 배나 되는 엄청난 양이다. 이러한 왕성한 설교와 저작 활동을 통해서, 종교개혁의 초석을 마련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룬 것이다. 루터는 또한 평생 부지런한 성경 연구를 쉬지 않았다. 1533년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일 년에 성경을 두 차례씩 읽어오고 있다. 성경이 크고 울창한 나무요 그 모든 말씀들이 작은 가지들이라면, 나는 그 모든 가지들을 두드려서 거기에 무엇이 있고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열심히 알아보았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경 연구는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특히 목회자에게 성경은 그가 열심히 땀 흘려 수고해야 할 포도원과도 같다고 하였다.

 

또한 난해한 성경 본문에 대해서도 그것을 깨닫기 위해 최선을 다해 씨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난해한 본문이 닥치면 모세가 광야의 반석을 내리쳐서 목마른 백성을 위하여 물이 나오게 한 것을 기억하고 그처럼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성경은 놀라운 샘이다. 퍼내고 마실수록 갈증을 더욱 자극하는 것이다.” 1526년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전도서를 강의했는데, 이 시절 한 친구에게 쓴 편지 중에서 말하기를, “전도자 솔로몬이 나를 매우 힘들게 하고, 마치 자기에 대해 강의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처럼 나를 매우 힘들게 하는데, 그는 반드시 내게 굴복할 것이네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루터가 오로지 성경 연구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그는 시편 119편에서 시편기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 기도하고 그것을 묵상하지만 동시에 고난을 당함으로써도 그것을 깨닫는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71). 의의 길을 걸으며 고난당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을 깨닫는 필수적이 열쇠였던 것이다. 루터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학을 공부하는 법을 여러분이 터득하기를 바랍니다. 나 자신도 스스로 이 방법을 실천해오고 있습니다만 신학 공부의 세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이는 시편 119편에서 계속해서 제시되는데, 곧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Oratio, meditatio, tentatio, , 기도와 묵상과 환난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환난이 초석(礎石)과도 같다고 하였다:

 

이 법칙은 성경을 알고 깨닫도록 가르침을 줄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올바르며 얼마나 참되며 얼마나 감미롭고 얼마나 사랑스러우며 얼마나 힘이 있으며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를 몸소 경험하게 해 준다. 성경이야말로 최고의 지혜인 것이다.

 

그는 시험과 환난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직접 입증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그 즉시 마귀가 여러분을 괴롭게 하고, 여러분을 진정한 신학자로 만들어 주며, 그의 각종 시험들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사랑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저 자신의 경우를 말하면, 저는 로마 교황주의자들에게 정말 많이 감사해야 합니다. 그들이 마귀의 격한 부추김을 받아 저를 때리고 압박하고 겁을 준 덕분에 제가 그래도 상당히 좋은 신학자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저 혼자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었을 목표에 그 덕분에 도달했으니 말입니다.

 

또한 신앙적인 독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유익한 조언을 해 주고 있다:

 

수고가 헛되지 않으려면 좋은 저자의 책을 읽고 또 읽어서, 이를테면 그 저자가 자신의 피와 살로 변하게까지 되어야 한다. 굉장히 다양하게 책을 읽는 것은 혼란스럽게 할 뿐이요 아무 것도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독서는 온갖 곳에 다 거하면서도 한 군데 일정하게 거하는 곳이 없는 사람처럼 되게 만든다. 친구들이 많아도 그들 모두와 매일같이 교제를 나누지 않고 선택한 몇 사람과만 교제하는 것처럼, 우리의 공부도 그러해야 한다.

 

루터는 1546218일 새벽 363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종교개혁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받은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지하여 모든 화를 무릅쓰고 담대히 일어나 거대한 로마교회의 권력을 상대로 복음의 순전한 회복을 외쳤고, 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평생을 쉼 없이 수고하였고, 결국 그로 말미암아 그 이후의 유럽의 역사가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독일어와 라틴어로 “Wir sein Bettler, Hoc est verum”(“우리는 거지들이다. 이것은 참말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끊임없이 구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마지막 임종 때까지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