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Other Theologians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

Bavinck Byeon 2014. 5. 22. 23:09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

 

 

1. 인간의 상태

 

(a) 원죄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죄인들이 되었다." 아담이 죄를 짓고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을 때, 그의 자손들 역시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그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 된다고 추론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 자신의 책임으로 인해서 죄인이 되지 않았다면, 그는 처벌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으로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죄인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것은 처벌을 받아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 즉 죽도록 운명 지워진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hom. 10 in Rom. [on Rom 5. 19]>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한 사람이 의로운 일을 행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된다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며, 하나님에게 더 적합하다. <hon. 16 in Rom. [on Rom 11. 10]>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어떤 죄를 짓는 잘못을 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세례를 준다. <ad neoph>

 

[이 글로부터 에클라눔의 율리안은, 크리소스톰이 원죄를 믿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들(복수형)이란 개인적 죄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원죄에 대한 만족할 만한 교리를 발견한 문구들을 인용했다. (C. Julianum 1. 21 f.)]

 

(b) 은총

 

하나님은 당신의 크신 관용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그분에게 드리는 기회들을 기다리신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은 게으름으로 인해서 우리들 자신에게서 그분의 선물을 제거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그 대신 덕을 향한 길을 향하여 출발하도록 열심을 가지고 서두르자. 그래서 우리가 위로부터 오는 도움을 얻어 우리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위로부터 오는 중요한 영향의 이익을 즐기지 않는다면, 정말로 선한 어떤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hom. 25 in Gen. 1>

 

(c) 자유 의지

 

우리의 선택은, 언제는 이랬다가 또 언제는 저랬다가 하면서 굉장한 변이성을 보인다. 그것은 악에 대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 은총은, 우리의 선택의 자유를 해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의 의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준다. … 하나님은 우리를 부른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에 의해서 그에게로 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우리가 그에게로 갈 때,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이 베풀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도움을 베푼다. <hom. 12 in Heb. [on Heb. 7. 2, 3]>

 

2. 그리스도의 위격

 

(a)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공존함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질문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아버지보다 더 어리지도 않으면서 아들이 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어디로부터 출생한 모든 것은 반드시 그것의 기원보다는 시기적으로 늦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 즉 그런 주장은 인간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 태양의 광선이 태양 자체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혹은 어떤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그것이 태양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록 그 광선이 더 나중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태양은 광선이 없이는 결코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당신은 왜 이것이 불가시적이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가? …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를 광채라고 부른 이유이다(히 1:3).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기원적 존재와 영원한 공존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모든 세대와 모든 시간의 척도가 그에 의해서 창조되지 않았는가? … 그러므로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는 어떤 시간적 간격도 없다. 이와 같이 본다면, 아들은 '후'일 수가 없으며, 영원히 공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과 '후'는 시간을 암시하는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 <hom. 4 in Jo. 1>

 

(b) 말씀과 육신의 결합

 

결합과 연결에 의해서 말씀 하나님과 육신은 단일체이다. 여기에는 어떤 본질들의 혼동이나 폐지도 없으며, 다만 말로써는 형용할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결합만이 있을 뿐이다. <hom. 11 in Jo. 2>

 

"그는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까지 완전히 비우셨다"는 말씀을 통해서 당신은 어떤 변화나 형상의 변화, 혹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폐지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 그는 예전의 그분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계시면서, 동시에 예전에 갖고 있지 않던 모습을 취했다. 그는 비록 육신이 되었으나, 하나님으로 남아 있었다. 이런 면에서 그는 말씀이었다. 그의 육신 가운데서 그는 인간과 같았다. 따라서 '인간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거기에 어떤 혼동도 없었다. … '그가 … 되었다.' '그가 … 모습을 취했다'라는 문구들이 '신성'을 지배하기 위해서 사용된 적은 결코 없다. … 오히려 '인간성'을 지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는 인간이 '되셨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이었다. 우리는 어떤 혼동도 만들어서는 안 되며, 또한 분리를 인정해서도 안 된다. 한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인 한 그리스도. 그러나 내가 '한'이라고 말할 때, 나는 결합을 말하는 것이지 혼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본성과 결합되는 것이다. <hom. 7 in Phil. [on Phil. 2. 7]>

 

(c) 그리스도의 인성적인 경험

 

"나는[그리스도] 인간의 모습을 취하였다. 그러나 그 인간됨은 항상 신적 활동과 섞여서 있었다. 나는 때로는 인간처럼, 때로는 하나님처럼 행동해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나의 [인간적] 본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리고 동시에 성육신으로 신앙을 붙들고 있다. 그리고 보다 천한 것들은 인간의 본성으로, 그리고 보다 고귀한 것들은 하나님의 본성으로 간주되어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런 행위들의 불평등한 혼합에 의해서 본성들의 불평등한 결합을 설명한다. 인성적인 경험들에 대한 통제에 의해서 나는 나의 고통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음을 보였다.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본성을 한정시켰으며, 사십일 간의 금식을 감내했다. 인간으로서, 나는 배고팠고, 피곤했다. 하나님으로서, 나는 바다의 요동을 잠잠케 했으며, 인간으로서, 나는 마귀에 의해서 시험을 받았다. 나는 마귀를 쫓아내었다. 인간으로서 나는 인간을 대신하여 고통을 당하고자 한다." <in quatrid. Laz. 1>

 

그러므로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육신으로 정말로 옷 입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과, 두려워하면서 죽음으로부터 몸을 움츠리는 것이 육신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때때로 그의 육신에게서 그 자신의 활동을 제거시키고 빼앗긴 채로 있게 했는데,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육신의 연약함을 보여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육신적 본성을 믿는 것을 도와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는 때때로 이런 연약함을 숨겼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그가 단순한 사람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하나님으로서, 그는 미래를 미리 아셨다. 인간으로서, 그는 마음의 고통을 겪으셨다. <in eos qui ad syn. 6>

 

3. 그리스도의 사역

 

(a) 패배당한 악마

 

"이제 이 세계에 대한 심판이 있도다. 이제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이것은 마치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심판이 있으리라. 그리고 정의가 행해지리라.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질까? 사탄이 첫 번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도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라는 말씀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 안에서 그는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나를 공격했는가, 그리고 나를 사망에게 넘겨주었는가? 왜 그는 유다의 마음속에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결심을 불러 넣었는가?" 이제 내게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던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는 사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지혜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악마가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관찰해 보자.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이 내 안에서 심판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사탄이 회기 중에 있는 법정에서 조사받고 있는 것과 같다. "좋아, 당신은 그들이 죄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당신은 왜 그리스도를 사형에 처했는가? 네가 정의롭지 못하게 처신했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모든 세상이 그를 통하여서 죄 사함을 받으리라."

 

내가 이것을 한 예를 통해서 설명해 보겠다. 자신의 권력 수중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을 그 선례가 없는 고통으로 괴롭히는 광폭한 독재자에 대해서 상상해 보라. 만약 그가 왕, 혹은 왕의 아들을 맞이하여서 그를 정의롭지 못하게 죽였다면, 그의 죽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까지 사면을 확장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혹은 자신의 빚을 수거해 들이고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가정해 보자. 그는 그의 채무자들을 때리고 그들을 감옥에 처넣었다. 그리고 나서 똑같은 광기를 가지고 그가 그에게 전혀 빚을 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투옥시키는 것에 대해서 가정해 보자. 그런 사람은 그가 채무자들에게 행했던 것에 대한 벌을 내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죄 없는 자가 그를 파멸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독생자에 대한 경우이다. 사탄은 그가 뻔뻔스럽게도 그리스도에게 행했던 것에 대한 결과로서, 그가 너에게 행한 그 일로 인해서 처벌받을 것이다. <hom 67 in Jo. 2[on John 12. 31]>

 

(b) 구속

 

우리는 처벌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모든 사악함들을 멀리 던져버렸다. 우리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났다. 우리의 옛 인간적 본성은 땅에 묻혔고, 그리고 우리는 다시 소생했다. 우리는 다시 이름 지어졌고, 신성하게 되었으며, 양자들로 택함을 받았다.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았으며, 독생자의 형제들이 되었으며, 그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가 되었고, 같은 몸을 소유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의 육신으로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몸에 결합되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우리가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기에 적절한 약품뿐만 아니라 건강과 미, 명예, 영광, 그리고 우리의 본성을 훨씬 넘어서는 지위까지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은총의 풍성함'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이 각각의 것들은 그 자체만으로서도 죽음을 파괴할 수 있는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함께 결합하게 되면, 그러면 죽음은 완전히 폐기된다. 그리고 그것의 흔적이나 그림자도 남지 않는다 …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가 당연히 당해야 할 죽음을 훨씬 넘어서는 것에 대한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마치 끝없는 대양이 단 하나의 물방울을 능가하는 것만큼이나 차이가 나게 말이다. <hom. 10 in Rom.>

 

(c) 희생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누구에 의해서? 물론, 그 스스로에 의해서. 여기서 작가는 그가 제사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희생 제물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그의 드리신 바 된 것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반 되셨고." 왜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인가?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믿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신으로서는 정말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의 죽음과 맞먹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hom. 17 in Heb.>



[헨리 비텐슨, 후기 기독교 교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