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Other Theologians

푸아티에의 힐라리(Hilary of Poitiers, 315)

Bavinck Byeon 2014. 4. 3. 00:17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Hilary of Poitiers, 315)

 

 

1. 삼위일체

 

'동일 본질'(Homoousion)과 '유사 본질'(Homoiousion)

 

homoousios(하나의 본질로 된)이라는 용어는 참된 신앙에 대한 이해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만에 빠진다. '유사성'은 단지 외관[speciem]의 유사성이 아니라 기본적인 실재[genus]의 유사성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만일 그것을 본질의 차이와 유사성의 조화에 적용한다면, 우리의 가르침은 우리의 종교의 진리와 일치한다. 우리가 별개의 실재물들의 유사성을 의미하는 '한 본질'을 취하여, 그 결합이 숫자적인 단수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하다. … 비록 두 이름으로 나타날지라도, 만일 '본질이 하나인 아버지와 아들'이 단일한 실재물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취해진다면, 우리는 아들을 이름으로 고백할 수 있으나, 만일 '하나의 볼질'을 고백함으로써 하나의 단일한 존재 자신이 아버지시며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면, 생각 속에 있는 아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가 스스로 나누고, 자신의 일부분을 잘라서 그의 아들이 되게 했다고 생각하는 오류가 발붙일 곳이 있다. … 또한 세번째 오류가 있는데, 그것은 '한 본질인 아버지와 아들' 이라는 말을 채택하여 아버지와 아들 둘이 똑같이 공유하는 우선적인 본질을 가리키려는 것이다. 정통주의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 본질' 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부터 출발해서는 안된다. 또한 그는 그것 없이는 참된 신앙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이것을 주요한 진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는 "아버지는 출생하지 않고,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그의 기원과 존재를 갖고, 그는 선함, 명예 그리고 본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다" 라고 처음으로 말할 때, 위험 없이 '한 본질' 이라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그는 자기 존재의 기원으로서의 아버지에게 종속된다. … 그는 무에서 나오지 않고 출생되었다. 그는 출생하지 않은 분이 아니나, 무시간성을 공유한다. 그는 아버지가 아니지만, 그분에게서 나온 아들이다. 그는 부분이 아니고 전체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이다. 그는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이다. 그러나 그는 기본적인 본질에 있어서 다른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위격에서가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다. <de syn. 67-9>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나는 어떤 사람들이 동등성은 부정할지라도, 유사성은 인정한다는 것을 안다. … 만일 그들이 유사성과 동등성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면, 나는 동등성의 기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왜냐하면 만일 아들이 본질과 선함 그리고 영광과 시간에 있어서 아버지와 유사하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는 동등하지 않게 나타나는지를 묻는다. … 만일 아버지가 고통을 느끼지 않게 낳은 아들에게, 자신의 본질과 다르지 않은 바로 자신의 본질을 주었다면, 그것은 그가 준 자신의 본질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사한' 은 '자기 자신의' 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은 차이가 없는, 동등성을 수반한다.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들은 위격의 결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질의 동등성에 의해 하나이다. <de syn. 74>

 

2. 그리스도의 위격

 

두 본성들

 

그리스도 예수를 동시에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신의 생명에 무지하다. 그리스도 예수나 성령 하나님이나 우리 자신의 육신을 부정하는 것은 똑같이 위험한 일이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 그리스도는 교회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 안에서 중보자로 지명받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신비[sacramentum] 속에서 그는 하나의 존재이지만, 그는 하나님이며 인간이다. 두 본성들의 결합에 의하여 그는 두 본성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실재이다. 그러나 각각의 수용력에서 다른 본성의 아무것도 결여하지 않는 그러한 방법으로 있으므로, 그는 인간으로 태어남에 의해서 하나님이 되기를 그치지 않았고, 또는 하나님으로 남아있음으로 해서 인간이 되지 못하지 않았다. 이것은 인간적인 행복을 위한 참된 신앙이어서, 하나님과 인간을 선포하고, 말씀과 육신을 시인하며,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 인정하지 못하지 않고, 또한 그가 말씀이기 때문에 그 육신을 보지 못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면서 인간으로 태어났다. 이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이해와 모순된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났을지라도 하나님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적인 소망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등한 본성이 저급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은 저급한 본성이 고등한 상태로 태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세계에 있는 사물들의 친숙한 질서를 본떠서, 우리의 소망들의 성취는 성육신이라는 신적인 신비 행위보다 더 쉽게 이해된다. 왜냐하면 존재하게 되는 모든 것에서, 세상은 증식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소할 가능성은 없다. 나무들, 작물들, 그리고 가축들을 생각해보다. 이성적인 창조물인 인간을 주목해 보라. 인간은 언제나 증식에 의해 진보한다. 인간은 감소에 의해 축소되지 않지만, 그의 증식은 그가 자신이기를 중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진보하는 오래 세월을 통하여 실패하거나 죽음에 의해 단절될지라도, 시간의 변화를 겪어나 생활양식의 종말을 맞이할지라도, 감소에 의해 새로운 자아를 창조하기 위해, 즉, 늙은 사람으로부터 유아로 작아짐으로써, 현재의 그가 되기를 중단하는 것은 그의 능력 밖의 일이다. 물질세계의 법칙은 증식을 향하여 우리의 본성이 진보하는 것이 필수적이게 한다. 그러므로 본성의 고등한 상태로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증식은 본성에 따른 것이고, 감소는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항상 존재했던 존재이기를 그치지는 않지만, 과거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이 되는 것은 적절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 본성을 입고 태어나지만 하나님이기를 그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임신, 요람, 유아로까지 자신을 축소시켰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신비[sacramentum]는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 인간이 되신 것은 하나님에게는 진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굴욕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우리의 유익이다. 그는 인간을 위하여 신성을 획득할지라도, 하나님의 신분을 상실하지 않는다. <de trin. 9. 3, 4>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며 하나님이다.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존재는 그가 인간으로 태어날 때 시작된 것이 아니고, 또한 그가 인간이 될 때 하나님이기를 중단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의 인간적인 삶 후에는 그의 신성 안에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이 있다. … 세 가지 신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즉 인간적인 삶 이전의 하나님, 그리고 신-인간, 그리고 그 후의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신분이 그것이다. <de trin. 9. 6>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을 지닌 하나의 위격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이러한 논점들을 간단하게 확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죽기까지 복종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존으로 남아있는 자가 종의 형체를 취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실존이 종의 형체 속에 있지 않은 것과 같이, 죽음의 복종은 하나님의 실존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적인 섭리의 신비[sacramentum]를 통하여, 종의 형체로 있는 자는 하나님의 실존으로 있는 자와 똑같다. 종의 형체를 취하는 것과 하나님의 실존으로 남아 있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두 형체의 결합은 모순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실존으로 남아있는 자는 자기를 비움[evacuatio]에 의하지 않고는 종의 형체를 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비운 자는 종의 형체를 취한 자와 똑같은 자이다. 만일 그가 존재하기를 중지한다면 그는 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취한다는 것은 취하는 자의 존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비운 자는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고 취한 자는 계속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형체가 자기를 비우는 것은 본성을 폐지한다는 것은 아니다. ‘비우는 자’(emptier)와 ‘취하는 자’(taker)의 동일성은 신비[sacramentum]를 포함하지만, 존재하기를 중단한다는 것[interitus]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 그리스도는 외적인 모습[habitus]을 바꾸고 그것을 다시 입었을 때, 한 분이며 같은 분이었다. <de trin. 9. 14>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사람의 아들이다. …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똑같은 위격이다. 하나님의 실존을 지닌 그는 종의 형체를 취한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난 자와 똑같은 자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결정한 본성에 의해 인간이 몸과 영혼의 피조물로 태어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신적인 능력을 통하여 육체와 영혼으로 합성된 인간이며 하나님이었다. 그는 자신 안에 완전한 인성의 실체와 신성의 완전한 실체를 지니고 있었다. <de trin. 10. 19>

 

3. 성령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관계

 

보혜사(Advocate)가 올 것이고, 아들을 그를 아버지로부터 보낼 것이며, 그리고 그는 진리의 영으로서 아버지로부터 발출한다. …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보낸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받아들여진 대로, 혹은 보내진 대로, 혹은 출생된 대로인가?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부터 보내게 될 것을 보내는 양식들 중의 하나를 의미함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발출(proceeding)이 명백하게 지시되기 때문에, 받는 것(receiving)이라는 것은 배제된다. 우리는 공존하는 존재가 나오는 것, 혹은 독생자의 발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지의 문제에 관한 우리의 결정을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이 남아 있다. 그는 아들에 의해서 보냄 받고 또한 아버지로부터 발출되기 때문에, 아들로부터 받는다. 나는 아들로부터 수여되는 것이 아버지로부터 발출되는 것과 똑같은지에 대해 묻는다. 만일 차이가 있다고 믿어진다면 … 아들에게서 받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분명히 전제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이, “그는 나의 것을 받아 그것을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아버지가 가진 것은 모두 내 것이라…”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de trin. 8. 19, 20>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그렇게 거할 때, 하나님도 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도 거한다. 그리고 그것은 거하는 하나님의 영 이외의 다른 영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성령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de trin. i. 26>

 

나로서는 그리스도가 창조물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 나는 창조물이라는 이 명칭이 성령에 결부될 수 있다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 그리고, 나는 당신만이 출생하지 않았고, 독생자가 당신에게서 태어난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성령이 태어났다고 말하기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코 그가 언젠가 창조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내가 당신에 의해 존재하게 된 만물과 공유하는) 그러한 용어에 함축된 무례가 당신에게까지 확장될까 두렵다. … ‘창조물’ 이라는 칭호에 의하여 내 안에 거하는 본성의 능력이 독생자를 통하여 당신으로부터 나왔다고 표현할까, 차라리 모욕할까? 당신의 독생자가 영원 전에 출생되었다고 할 경우, 우리의 모호한 말은 실패하고 우리의 인식의 갈등들로 한계를 느낄 때, 그는 출생된다는 사실만이 남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지력으로 파악할 수는 없을지라도, 당신의 성령은 그를 통해 당신에게서 온다는 의식을 굳게 잡는다. … 나는 감히 내 지력의 이해력을 넘어서려 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당신의 독생자에 대하여 그 밖의 어느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는 출생되었다고 말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감히 인간의 사고가 미칠 수 있는 곳 이상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성령이 당신의 영이라는 것만 제외하고는 성령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로 하여금 언쟁에 개입하지 않게 하고, 그러나 나로 하여금 요동하지 않는 신앙을 계속해서 고백하게 해달라. <de trin. 12. 55, 56>

 

그 많은 선물들을 사용하고 이 가장 본질적인 은혜를 사용하도록 하자. …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령을 받았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신 선물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에게 지식을 주기 위해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인간의 육체는 그 기능의 필수적인 상태가 약화되면 쓸모없이 되는 것처럼…[즉, 볼 수 없는 눈,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귀], 인간의 마음도, 신앙에 의해 성령의 은사를 갖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이해하는 본성적인 기능을 가질 것이지만, 지식의 빛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물은 모두에게 똑같이 유효하다. 그것은 어느 곳에서도 보류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자발성에 비례해서 각자에게 주어진다. 그것은 그것을 받을 가치 있는 자발성에 비례하여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기다리는 위로이다. 그것의 은사들이 작용함에 있어서 그것은 미래에 대한 우리 희망의 담보이며, 우리 마음의 빛이며, 우리의 마음에 빛나는 광휘이다. <de trin. 2. 35>

 

만물의 창조자 한 분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한 분이고, 그로부터 만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며, 그를 통하여 만물이 존재한다. 그리고 성령도 한 분인데, 그분은 만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그것들 자신의 능력과 장점들과 함께 질서 있게 배치된다. 하나의 권능이 있고, 그것으로부터 만물은 존재한다. 한 자손이 있고, 그를 통하여 만물이 존재한다. 완전한 소망의 선물이 하나 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영원자 속에 있는 무한성, 그의 형상 속에 있는 그의 유사성, 그 선물 속에 있는 그의 이용 가치성을 이루는, 완전성의 결합에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발견될 수 없다. <de trin. 2. 1>



[헨리 비텐슨, 후기 기독교 교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