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Other Theologians

암브로시우스(Aurelius Ambrosius, 340)

Bavinck Byeon 2014. 5. 24. 19:25

암브로시우스(Aurelius Ambrosius, 340)

 

 

1. 인간과 죄

 

(a) 원의(Original Righteousness)

 

아담이 낙원에 있었을 때, 그는 천성적인 존재였다. <in Ps. 118. 15, 36>

 

그는 최고로 행복했었으며, 천상의 공기를 마시면서, 이러한 삶의 근심이나 권태로움을 전혀 알지 못했다. <in Ps. 43. 75>

 

(b) 원죄 - '종자적인 동일성'(Seminal identity)

 

우리 모두는 첫 번째 사람 안에서 죄를 지었다. 그리고 본성적인 유산에 의해서 죄의 유산이 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사람 안으로 이전되어져 왔다 … 아담이 우리들 각자의 안에 있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통해서 죄가 모든 사람에게로 전해졌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인간의 본성[condicio humana]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apol. Dav. 2. 12, 71>

 

아담은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존재했었다. 아담은 멸망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멸망했다. <in ev. Luc. 7. 234>

 

나는 아담 안에서 타락했다. 나는 아담 안에서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했다. 나는 아담 안에서 죽었다. 만약 하나님이 나를 발견한 곳이 바로 아담 안에서가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상기하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내가 아담 안에서 죄에 묶이게 되고, 죽음의 빚을 지게 된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다. <de excess. frat. Sat. 2. 6>

 

(c) 유전된 죄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전염에 의해서 더럽혀진다. 우리가 빛을 즐기기 전에, 우리는 출생의 상처를 얻게 된다. 우리는 '죄 중에 잉태' 되었다. (이 죄가 우리의 죄인지 혹은 부모의 죄인지는 분명하게 진술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모친은 '죄 중에서' 우리를 낳는다. 그러나 여기서 모친이 출산을 하는 것이 그녀 자신의 죄 중에서인지, 혹은 태어나는 어린이에게 이미 어떤 죄가 있는 것인지는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두 경우가 다 의미되어져 있는 것일 것이다. 잉태는 죄에 의해서 더럽혀진다. 왜냐하면 부모가 그 타락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하루밖에 안된 어린이라 할지라도 그 어린이에게 죄가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apol. Dav. 1. 76>

 

만약에 낙원에 살면서 하나님과 이야기 했던 그 첫 번째 사람이, 비록 더럽혀지지 않은 땅으로부터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쉽게 타락할 수 있었다면 … 우리의 육신이 죄를 범한 후세의 저주에 의해서 운명 지워지지 않았던 때에, 죄와 수치에 의해서 아직 오염외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인류가 계속적인 세대들을 통해서 타락해왔을 때, 죄를 향한 그 미끄러운 길이 그 이후로 얼마나 훨씬 더 쉽게 인류에게 곤두박질하는 전략을 가져왔겠는가. <ep. 45. 13>

 

베드로는 깨끗했다. 그러나 그는 발을 씻을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첫 번째 사람으로부터, 뱀이 그의 발을 걸려 넘어지게 하고는 그로 하여금 명령을 어기도록 설득한 그 때 시작된 그 죄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전된 죄가 제거되도록 그의 발은 씻겨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개인적 죄들은 세례에 의해서 제거되기 때문이다. <de myst. 32>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왜 그런가? 왜냐하면 세례 안에서 모든 죄가 씻김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는 떠난다. 그러나 아담은 악마에 의에서 걸려 넘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발들은 독에 의해서 물들었기 때문에, 당신은 악마가 공격했던 그 부분에 첨가적인 성화의 수비가 주어질 수 있도록 당신의 발들을 씻는다. 그래서 이후로는 악마가 당신의 발을 걸려 넘어지게 할 수 없도록 말이다. 당신은 뱀의 독을 씻어내기 위해서 당신의 발들을 씻는다. <de sacr. 3. 7>

 

2. 그리스도의 위격

 

(a) 두 본성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설득적인 논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의 명백한 명시에 놓여져 있는 것이므로, 단어들에 대한 쓸모없는 논쟁에 대해서는 끝내도록 하자. 신성과 육신의 차이점을 관찰해 보도록 하자. 이 둘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이고 같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왜냐하면 이 두 본성들은 하나이며 같은 주체 안에 현존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말씀하시는 분이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같은 방식으로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그 안에서 당신은 어느 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어느 때는 인간적인 감정을 볼 것이다. <de. fid. 2. 77>

 

내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성경이 당신으로 하여금 신성의 본질과 육신의 본질 둘 다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을 제시했을 때, 그것은 이곳에서 [즉, 요 1:30,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육신으로 시작한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는 어떤 일관된 규칙도 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으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성육신의 신비[sacramenta]로 내려간다. 그리고 우리는 신성의 영광으로 올라간다. … 여기서 작가는 주님의 육화로부터 시작을 하고, 그리고 그는 그의 신성에 관해서 계속 이야기한다. 인간적이고 신적인 요소들을 혼동하는 그런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그 둘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de. fid. 3. 65>

 

(b) 속성간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우리가 "영광의 주가 십자가에 못박혔도다"라는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그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영광의 차원에서 상상해서는 안 된다. 영광의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목박혔다고 이야기 되어지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이기 때문이다(그의 신성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이며, 육신을 취하였기 때문에 인간이다.). 왜냐하면, 그가 인간과 신의 이 두 본성을 다 취한 이래로 그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서 그의 고통을 당하셨는데, 이것은 구분이 없이 고통을 당한 그가 '영광의 주로' 불리어지고, 그리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가 성경의 표현대로 '인자'로 불리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de. fid. 2. 58>

 

(c)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적인 영혼

 

그러므로 나는 몇몇 사람들이 어떤 근거 하에서 한 영혼이 주 예수님에 의해서 취해지지 않았다고 가정하는지 묻고 싶다. 이런 가정은 그리스도가 인간적 관능을 가짐으로 인해서 타락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인가? 육신의 욕망이 마음의 법과 싸우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이야기되어졌다. 그러나 이것을 말한 저자는 그리스도가 육신의 법에 의해서 죄의 굴레 속으로 빠지게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사실, 그는 정말로 그가 인간적 연약함으로 인해서 곤궁에 처했을 때, 그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그가 육신을 취하셨을 때, 그것은 그가 성육신의 완전함과 충만함을 취했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는 불완전함이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육신에 생명을 가져오기 위해서 육신을 취하였고, 한 영혼을 취하였다. 그러나 그가 취한 것은 완전하고, 이성적이고, 그리고 인간적인 영혼이었다. 그 자신이 "내가 잠을 자기 위하여 나의 영혼을 눕히노라."라고 말할 때, 그가 한 영혼을 취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de inc. dom. sacr. 64-6>

 

말씀 하나님은 그 자신의 것이었던 육체 가운데, 이해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성적 영혼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니다. 말씀 하나님은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성적인 영혼을 그 자신 위에 취하였다. 우리들의 것과 똑같은 본질을 지닌 인간의 영혼을 취한 것이다. 그는 우리들의 육신과 똑같은 본질로 된, 우리들의 것과 같은 육신을 취하셨다. 그는 정말로 완벽한 인간이었으나 죄로 인하여서 전혀 물들어 있지 않았다. <de inc. dom. sacr. 76>

 

3. 그리스도의 사역

 

(a) 죄 없는 희생물(Victim)

 

예수는 아담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올무로 다가갔다. 그는 사라져버린 것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왔다. 우리는 모두 수고하며 일한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대대로 이어지는 인간의 죄에 의해서 야기된 굴레에 묶여있지 않은 자이다. 탐욕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지 않거나, 혹은 속임수에 의해서 노예가 되어있지 않은 자이다. 예수님만이 홀로 보로 그런 분이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을 이 육신의 굴레 속에 가두었을 때도, 그는 사로잡히지도, 올무에 걸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굴레들을 깨고 그것들을 풀었다. 그리고 그 덫을 통해 내다보면서, 그리고 수고로운 고생을 벗어나면서, 그는 교회 또한 굴레들에 의해서 속박되는 것으로부터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를 배우도록 교회를 그 자신에게로 불렀다. 그러나 사실, 그는 결코 굴레를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심지어 우리들을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자유로웠다." 즉 그는 죽음을 폐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로웠다. … <in Ps. 118. 6. 22>

 

속임을 당한 악마

 

[고전 2:7f.] "만일 그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즉, 그들은 주님의 죽음을 통해서 나의 구원을 결코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들을 위하여 권세들을 속였다. 그는 정복하기 위해서 속였다. 그는 시험을 받을 때, 질문을 받았을 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렸을 때, 그가 어떤 경우에도 그 자신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마귀를 속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세상의 왕들'을 속였다. 왜냐하면 비록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말했을 때, 잠시 동안 의심을 했을지라도, 마귀는 결국 그를 깨닫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떠났다." 귀신들은 그를 알아보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귀신들의 악함은 심지어 숨겨진 것들일지라도 쉽게 파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사사로운 것들에 골몰해 있는 자들은 신적인 것들을 알 수가 없다. <exp. ev. Luc. 2. 3>

 

[시 56:7: "그들이 나를 위해 파 놓은 구덩이에 스스로 빠졌나이다."] 이 책략은, 우리 주 예수님이 육신을 취함으로써 마귀에게 시행되어졌어야 했다. 그리고 부패되고 약한 신체를 택함으로써 그랬어야 했다. 그래서 그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서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말이다. <exp. ev. Luc. 4. 12>

 

주님의 굶주림은 속임수였는데, 마귀가 주의를 기울이며 더 큰 능력을 두려워하는 곳에서, 이런 굶주림의 모습에 의해서 우쭐하게 되어, 그가 마치 단순한 인간인 것처럼, 그를 시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승리가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속임수였다. <exp. ev. Luc. 4. 16>

 

(b) 빚의 지불

 

'채권자'라는 호칭에 의해서 놀라지 말라. 우리가 전에는 성마른 채권자 아래 있었다. 그는 완전하게 돈을 돌려받을 수 없었고, 채무자가 죽어야만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자였다. 주 예수님이 오셨다. 그는 우리가 빚더미에 의해서 묶여있는 것을 보셨다. 어느 누구도 순결한 유전을 가지고는 그의 빚을 갚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풀어 줄 어떤 것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는 나에게 새로운 종류의 거래관계를 완료시켜 주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나의 채권자를 바꾸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빚을 갚을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빚진 자로 만든 것은 본성이 아니라 죄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들로 인해서 막중한 빚을 지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상실했다. 그리고 책임을 져야할 신세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채권자의 돈이 어느 것이 되었든 그 돈을 받았던 채무자이기 때문이다. 죄는 마귀로부터 온다. 그 사악한 자(마귀)는 사실 그렇듯이, 그의 세습재산 안에 부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가 덕인 것과 같이, 죄들은 마귀의 부이다. 그는 상속받은 채무라는 무거운 죄에 의해서 인간을 영원히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채무는 원래 빚을 졌던 우리의 선조가 빚의 유산에 의해서 그의 후손들에게 전수해준 것이다. 주 예수님이 왔다. 그는 그 자신의 죽음을 우리 모두의 죽음을 위해서 제공하였다. 그는 우리 모두의 피를 위해서 그 자신의 피를 흘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채권자를 바꾸었다. 우리는 빠져나온 것이 아니다. 아니 혹은, 빚은 남아있지만 이자는 취소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빠져나왔는지도 모른다. … 성경은 그가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고 제하여 버리사, 우리의 모든 죄'를 아낌없이 사했다고 말한다. <ep. 41. 7, 8>

 

4. 삼위일체

 

아버지와 아들의 단일성

 

아버지 안에 신성의 충만함이 있다. 아들 안에 신성의 충만함이 있다. 이것은 다양한 신성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혼동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떤 다양성도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어떤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와 합하는 자는 모두 한 영이니라."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한 남자와 여자가 "한 육체가 된다"고 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본성에 관한 한 하나의 본질로 되어져 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인간이 비록 많기는 하지만 하나를 이룬다고 말한다. 인성적인 위격과 신적인 위격 사이에 어떤 비교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그런 결합이 있을 수 있다면, 본질나 의지에 있어서 어떤 차이도 없는 신성 안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결합은 오죽하겠는가. <de fid. 1. 17-19>



[헨리 비텐슨, 후기 기독교 교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