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Other Theologians

닛사의 그레고리(Gregorius of Nyssenus, 335)

Bavinck Byeon 2014. 4. 23. 16:35

닛사의 그레고리(Gregorius of Nyssenus, 335)

 

 

1. 인간

 

(a) 창조와 타락

 

만일 전 세계의 존재가 말씀의 능력에 달려있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세계의 여러 부분들의 유일한 원인은 말씀 자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를 통하여 사물들에 대한 계획이 생겼다. 만일 누군가가 그를 말씀, 혹은 지혜, 혹은 권능, 혹은 하나님, 혹은 어떤 다른 높여지고 영화롭게 된 이름이라고 부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와 다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주체를 묘사하기 위해 밝혀지는 용어나 이름이 무엇이든지, 존재한 모든 것을 유지하고, 존재하게 될 모든 것을 예언하는 하나는 그 표현들에 의해 지시되는데, 즉 영원한 능력의 하나님, 존재하는 만물의 창조자, 존재하지 않는 것의 발견자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말씀(혹은 지혜, 혹은 권능)은 논리적인 주장에 의해 인간의 본성을 만든 자로 보여지는데, 그는 인간을 창조할 필연성에 의해 강요된 것인 아니라, 무한한 사랑을 통하여 그러한 존재의 원인을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빛이 보여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신성에 속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다른 모든 것들이 게을러서, 아무와도 그들을 공유하고 즐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선한 것들을 공유하기 위한 이러한 목적을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면, 그는 불가피하게 그러한 선들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채 창조되었음에 틀림없다. 그 눈은 와서 자연스럽게 그 속에 심겨진 광선에 의하여 빛에 참여하며, 그것의 내적인 수용력을 통하여 그것과 비슷한 것을 끌어당긴다.

 

똑같은 방법으로 신같은 것들과 유사한 어떤 것은 인성과 섞여서, 이런 유사성에 의해 그것과 동질인 것을 향한 충동을 가질 것이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물이나 공기가 그들의 환경으로 할당된, 비이성적인 피조물들은 그들의 삶의 방법에 적용된 체질이 주어져서, 그들 신체의 독틍한 구성 때문에, 어떤 종류의 공기 속에서, 다른 종류는 물 속에서 각각 자기 자신과 동질적이고 유사한 요소를 발견함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한 것들을 즐기기 위해 존재하게 된 인간이 자신의 본성 속에 그가 공유할 수 있는 것과 동류인 어떤 것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는 생명과 이성과 지혜와 하나님께 적합한 자질들을 갖추어서, 그 결과 그것들 각각을 통하ㅕ 그는 그와 동질인 것을 얻으려는 욕구가 있다.

 

신성에 속하는 선한 것들 중의 하나는 영원성이기 때문에, 우리 본성의 구성은 이 속성을 빼앗겨서는 안되지만, 그러나 영원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서, 그의 내적인 수용력에 의해 인간은 초월적인 것을 인식하고 신의 영원성을 얻으려는 욕구에 사로잡혀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었다. 창조 이야기는 사실상 이것을 실증했는데, 포괄적인 표현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존재하게 되었다는 한 구절로 실증했다. 왜냐하면 '형상을 따라'인 '유사성' 속에서 우리는 신성의 특징이 요약된 것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세가 이들 특징들에 대해 설명하는 모든 것이, 역사적인 기록에 의해, 똑같은 가르침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에게 이야기 형식으로 교리들을 주었기 때문이다. 낙원과 진기한 과일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먹었다면 맛본 자들의 식욕을 만족시켜줄 것은 없지만, 그들에게 지식과 영생을 주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이전의 관찰들과, 즉 우리의 인성은 처음에 선했고 선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것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현재의 사물들의 상태를 관찰하고 우리의 주장의 허위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간은 지금 그러한 상태로 보이지 않고 거의 정반대의 상태로 보인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영혼 속 어디에 이 신같은 요소가 있으며, 고통 없는 몸의 자유가 있으며, 그 영생이 있는가? 인간의 생명은 순간적인 것이며, 그는 고통에 종속되어 죽도록 운명지어졌고, 몸과 영혼 속에서 모든 종류의 고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이 지금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다는 사실은 그가 동시에 선에 둘러싸여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타당한 증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작품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선 때문에 이 피조물을 존재하게 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가 악에 둘러싸인 자기의 창조주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고 그럴듯하게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선이 그의 구성 요인이기 때문이다. …

 

그 자신의 유일한 선에 첨여하도록 인간을 만들고, 그의 모본성의 모든 자질을 통하여 동류에 상응하는 동류의 운동에 의해 그의 충동이 돌려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본성을 모든 종류의 아름다운 성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력으로 갖춰 준 그분은, 결코 그 가장 고귀하고 가장 값진 선을, 즉 자유와 자유의지(self-determination)라는 선물을 그에게서 빼앗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필연성이 어떤 점에서 인간의 생명을 지배했다면, 그 '형상'은 유사성이 부족에 의해 그것의 원형으로부터 멀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 점에서 그것은 왜곡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필연성에 정복되고 노예가 된 어떤 본성이 왕의 본성의 '형상'이라 불릴 수 있었을까? 확실히 모든 점에서 신성을 닮은 것은 불가피하게 그 본성 안에 자유의지의 근본 요소를 소유하여, 선에의 참여가 덕의 상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 범위에 걸친 우수한 자질들로 영광받아왔던 그가 선한 것들을 악한 것들과 바꿨다고, 의문을 가질 수가 있을까? 존재하게 된 어떤 악도 신적인 의지에 그 기원을 갖지 않는다. 확실히, 악은 만일 그것이 하나님을 창조주와 아버지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면 비난받지 않았을 것이다. 악은 어떤 점에서 보면 내부로부터 생기고, 영혼이 선에서 후퇴할 때 의지 속에서 일어난다.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활동인 반면,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자연스러운 활동의 상실이다. 덕과 악 사이에는 비슷한 대립이 있다. 왜냐하면 악의 기원을 선의 결여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빛이 제거되면 어둠이 잇따른다. 한편 빛은 현존하고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선이 그 본성 속에 있는 한, 악은 자신의 권리로 존재하지 못한다. …현존하는 악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의 본성을 억제되지 않고 자유롭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은 보다 좋은 것들보다 보다 악한 것들을 선택한 비뚤어진 의지에 있다.

 

(b) 육체적이고 도덕적인 악

 

최대의 슬픔은 몸의 파멸을 생각하고, 우리들의 이생이 죽음으로 파멸되어야 한다는 것을 잔인한 것으로 간주하고, 죽음에 의한 우리 존재의 멸절이 가장 악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로 하여금 이 우울한 사태를 통하여 신의 자비가 충만한 것을 주목하게 하라. 생명에 참여하는 자들은 생명의 기분 좋은 특성들을 즐기기 때문에 가질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안다. 고뇌 속에서 살아가는 어떤 사람은 고통 속에서 존재하는 것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우리를 살도록 해준 그가,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야 되는 것과 다른 목적을 꾀하고 있는지 시험해보자.

 

그런데, 우리는 자유의지를 행사함에 의해 악과 교제하고, 꿀로 달콤하게 된 해로운 본질과 같은 쾌락에 빠짐으로써 악을 우리의 본성과 섞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고통과 떨어진 자유와 연합하는 행복으로부터 멀리 이탈했다. 이 이유 때문에 인간은 죽어서 토기와 같은 땅으로 돌아가서, 그가 획득한 타락은 분리되어 나갈 수 있고 부활에 의하여 그의 원형으로 재형성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모세가 역사적인 이야기로 가장하여, 비밀스러운 형식으로 우리 앞에 보여준 가르침의 종류이다. 그러나 숨겨진 용어는 분명한 가르침을 전해준다. 첫번째 인간들이 금지되었던 것에 연루되어 그들의 원래의 행복이 벗겨졌을 때, 주님은 자기가 처음으로 창조한 존재들을 가죽 옷으로 입혔다고,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내가 보기에, 모세는 그러한 가죽들을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다. 그들에게 옷을 만들어주기 위해 어떤 종류의 동물들을 죽여서 가죽을 벗겼는가? 아니 오히려, 가죽은 동물과 분리되었을 때는 언제나 죽어있기 때문에, 그 의미는 우리의 악의 치료자가 그의 예견 가운데, 인간이 타락 후에 그에게 죽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능력은 짐승의 특성이었으나, 영원히 지속되도록 의도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옷은 우리에게 결쳐지는 외적인 것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잠시동안 몸의 필요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이고, 우리의 자연스러운 자질의 부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짐승으로부터 취해진 죽어야 할 운명은 조정에 의해, 불멸하도록 창조된 본성 위에 입혀진 것이다. 그것은 외부를 덮고 내부를 덮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지각적인 요소에 애착을 갖는다. 그것은 실제적인 하나님의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지각력이 있는 요소는 단지 용해되지만 소멸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소멸은 비존재로 넘가는 것인 반면, 용해는 그 구성요소를 취한 흙이라는 기본적인 재료들로 다시 흩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 본성의 지각적인 부분은 용해되어, 이질적인 본질이 제거되어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형성된다.]

 

영혼과 몸은 모두 사악한 속성들 속에 참여함에 의해 함께 결합되기 때문에, 몸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 사이에는 또한 유비가 있다. 육신의 경우에 우리는 지각이 있는 생명의 분리를 죽음이라고 부르며, 영혼에 관하여는 실제적인 생명의 분리를 죽음이라 부른다. … 용해라는 죽음은 영혼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합성되지 않은 것이 어떻게 용해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죄가 영혼 속에 일으킨 오점들은 어떤 치료에 의해 제거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덕이라는 약은 이생에서 그러한 결점들을 치유하기 위해 적용되어 왔다. 만일 영혼이 치유되지 않은 채 남아있어야 한다면 치료법은 그 후의 생명 속에 저장되어 왔다 … [수술과 같은 치료법은 고통을 수반한다]. … 이와 같이 만일 어떤 사람이 우주를 지배하는 자의 지혜의 궁극적인 목적을 꾀한다면, 그는 비이성적이고 소심하여 인간의 창조주를 악의 창시자로 부르면서, 그는 무엇이 일어나려고 하는지에 대해 무지하거나 인간을 미래에 대해 완전히 알도록 창조함으로써 그는 악의 충동에 사로잡혔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 일어날 것이지를 알았고 실제로 일어난 것을 향한 충동을 막지 않았다. … 무엇이 더 좋은 과정이 될 수 있었을까? 그는 이 미래의 존재가 선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존재하게 하지 않는 것이었을까? 혹은 회개에 의해 그가 병들게 되었을 때조차 회개에 의해 그를 은혜의 원상태로 돌아가게 하고 회복시키는 것일까?

 

그러나 인간 본성의 불안정성의 필연적인 결과인 신체적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악의 창조자라고 부르는 것, 혹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있다고 생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를 인간의 창조주로 간주하기를 거부하는 것, 그것은 선과 악을 단지 감각의 기초 위에서 판단하는 자들에 의해 보여진 극단적인 소심성이다. 그들은 고유한 선만이 신체적인 감각과 결합되지 않다는 것과, 실제적인 악만이 참된 선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

 

원래의 은혜의 상태로 인간을 되돌리는 것은 누구의 일이었는가? 타락한 자들을 회복시키고 잃은 자들을 되돌아 오게하고, 방황하는 자들을 손으로 이끌어주는 것에 누가 관심을 가졌는가? 처음에 생명을 준 자만이 그것이 소실되었을 때 그것을 회복시킬 능력과 권리를 가졌다.

 

인간의 탄생, 유아로부터 성숙할 때까지의 성장, 먹는 것, 마시는 것, 피로, 잠, 슬픔, 눈물, 그릇된 고소, 재판소, 십자가, 죽음, 매장, 이 모든 것들은 계시에 포함되고, 더 소심한 자들의 신앙을 둔하게 하여, 결국 그들은 그 전조 때문에 그 결과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의 부적절한 환경들 때문에, 부활을 신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총체적인 육신으로부터 약간 우리의 논증을 제거함으로써 시작하고, 본래 선한 것과 그 반대인 것을 생각하고, 그것들 각자가 인지되는 특징들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필수적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에 관하여 신중하게 생각한 자는 아무도, 하나가, 그리고 하나만이, 본질적으로 불명예스럽고, 그리고 그것은 도덕적인 악이며, 한편 도덕적인 악에서 자유로운 것은 어떤 종류의 불명예에도 낯선 것이라는 주장을 논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명예의 혼합물을 갖지 않은 것은 확실히 선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참으로 선한 것은 그 반대의 혼합물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선의 범주에서 발견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한다. … 만일 그의 생명과 죽음의 환경이 도덕적인 악에서 자유하다면 …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단조롭게 주장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단지 애처롭게 여길 수 있다. <or. cat. 8. 9>

 

2. 그리스도의 위격

 

(a) 내재와 성육신

 

신성이 우리의 본성을 입고 탄생했다면, 그것은 개념들이 너무 제한받지 않는 자들에게 이상한 새로움으로, 그 자체를 이성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 사물들의 전체적인 계획을 개관하면서, 신성을 옷입고, 그것을 인식하며, 그 안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신성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유치한가? 왜냐하면 스스로 있는 자(Him-Who-Is)에게 의존해 있다면, 스스로 있는 자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일 만물이 신성 안에 있고 신성이 만물 안에 있다면, 하나님은 지금조차 인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므로, 하나님이 인성을 입고 태어난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주는 계시 속에 드러난 신적인 계획에 왜 사람들은 당황하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임재하는 그 기적이 그의 성육신의 기적과 똑같지는 않을지라도, 여전히 그때와 같이 지금 우리 안에 그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똑같이 인정한다. 이제 그는 존재 속에 있는 본성을 유지하는 것으로서 우리와 함께 합쳐졌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본성이, 이렇게 신성과 혼합됨에 의하여, 그 자체가 신성이 되고 죽음에서 구조되고 적의 왕이 닿지 않는 곳에 있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우리의 본성과 섞여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돌아옴으로써 죽을 인류를 위하여 생명으로 돌아가는 시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or. cat. 25>

 

그가 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것은 그가 자신 안에 있는 것처럼, 자기의 신성에 관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창조 전부터 존재하는 그는 육체로 탄생함을 입은 것이지 그의 존재를 받은 것이 아니다. 성령은 아들 자신의 권세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준비했다. 아들은 특별한 '거처'를 준비하기 위하여 어떤 신체적인 재료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나, 지혜에 대해 말해지는 바와 같이, 그는 인성과 섞여짐에 의해, '자신을 집으로 만들어', 동정녀로부터 나온 '먼지' 인간 속으로 들어갔다. <antirr. 9>

 

(b) 하나님-육신: 하나님-사람

 

아폴리나리우스는 젖먹이는 것, 아기옷을 감싸는 것 … 성장, 피로 … [수난에 대한 상술] 장사, 무덤, 돌 등의 원인을 어떻게 돌리나?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과 일치하는가? 왜냐하면 만일 그의 '육신을 입은 하나님'은 그가 마리아로부터 태어난 결과로서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며, 나타난 것은 신성이고 신성은 그 모든 것을 경험하며, 신성은 젖먹여지고 … 피곤하고, 잠자고, 슬퍼하기 때문이다. … 신성이 무화가 나무로 달려가고, 그 나무가 언제 열매를 맺을지 모른다. 신성이 그 때와 시간을 모른다. 신성이 매질당하고 묶이고, 희롱당하고, 못질 당하고, 피를 흘리고, 시체가 되고, 장사되어 새로운 무덤에 놓인다. …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다고 누가 울었는가? 만일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한 신성이었다면, 누가 버렸는가? … [그 신성이 똑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리우스주의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통과 겸손을 드러내는 그러한 말들과 경험들을 인성에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신성이 인간적인 고난과 결합될 때조차 변할 수 없고 고통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antirr. 24>

 

아폴리나리우스는, "희랍인들과 유대인들은 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에 대해여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믿기를 단호히 거절한다"라고 말한다. 왜 그는 그의 탄생에 대해 말할 때, 비록 육신에서 난 것은 의문의 여지없이 육신일지라도, 주님이 한 곳에서 말하는 것처럼, 말없이 육신을 간과하는가? 그러므로 그는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전에 육신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한 여자라는 도구에 의해 태어났고, 인성을 떠맡은 필연적인 결과로서 죽음을 경험했다." 이러한 주장에 의해 그는 참된 인성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고통에 종속시키지만, 인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떻게 흙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으로 말해지는 것이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성서는, 인성은 아담에게서 기원되고, 그는 처음에 흙으로부터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가가 '요셉의 아들로 간주된' 자의 족보를 작성함에 있어서, 그의 조상들을 통하여 그의 후손의 기원을 차례차례 거슬러 올라가면서, '아담의 자손'이라고 끝내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인류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는 확실히 사람이 아니라 어떤 다른 종류의 존재이다. 그렇다면 만일 이 '육신을 받은 하나님'이 인류와 실제로 결합하지 않았으므로 인간도 아니고, 비육신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하나님도 아니라면, 그는 무엇일까? …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불수레를 탄 엘리야] 불은 본래 위로 향하는 경향이 있으나, 신적인 능력에 의해 그것은 땅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엘리야는 하늘의 불길에 쌓였을 때 높은 곳에서 들림받았는데, 그 불길은 그 후 본성적으로 윗쪽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급히 되찾았다. 같은 방법으로 물질이나 형태가 없는, 지고한 자의 능력이 동정녀를 통하여 받는 위격(hypostasis)을 입고 종의 형체를 받고, 그것을 그것의 신적이고 불멸의 본성으로 변형시키면서, 그것을 그 자체의 장대함의 상태에 이르게 했다. <antirr. 25>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도 아폴리나리우스가 선재하는 천상적인 육신을 가르쳤다(즉, ep. 101. 6에서)고 비난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분개하여 그런 공상을 부인했다. "우리는 구세주의 육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주장하지도 않고, 그이 육신이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신성과 결합되어 하나의 위격을 이룬다는 점에서 하나님이다"(fr. 164. Lietzmann).]

 

(c) 두 본성들: 속성간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아폴리나리우스는 우리의 주장을 그릇되게 묘사하여, 독생자 하나님이 언제나 그리스도인 것은 아니었다고 우리가 주장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는 섭리의 때만이 아니라, 그 후에도 언제나 존재했다. 왜냐하면 인성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또한 그 육신은 하늘에 오른 후에, 그 자체의 속성들을 지니고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알았다면, 우리는 아직 그를 이런 방법으로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육신은 계속해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변화에 종속되어 있는 반면, 신성은 불변한다. 그러므로 신성은 모든 변화에 직면하여 움직이지 않고 남아있고 변하여 나빠지지도 않는다(왜냐하면 그것은 타락을 허용하지도 않고, 개량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은 변화를 겪어 더 나아지는데, 멸망하기 쉬운 것에서부터 불멸하는 것으로 … 단명에서 영원으로, 육체적인 것으로부터 비육체적인 것으로, 신체적인 형상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고난받은 자는 바로 인간이며 하나님이 아니라고 우리가 말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듣게 하라. 우리는 신성이 고난받은 자 안에 있었다고 확언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난받을 수 없는 본성은 고난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부인한다. 인성은 지성적인 영혼이 몸과 결합함으로써 그 본체를 취한다. … 일반적인 사람의 경우에, 영혼과 몸으로 이루어진 인간이 형성된 결과로, 물질에 어떤 생명을 주는 힘에 대하여 우리는 생각한다. 동정녀 탄생의 경우에 지고한 자의 힘은 더럽혀지지 않은 몸 속에 비물질적으로 심겨지고, 동정녀의 순수성을 육신을 위한 재료로 취하여, 그것을, 인간의 형체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 참으로 새로운 인간인 자를 형성하기 위하여 동정녀의 몸을 드린 것으로, 사용했다. 그 신적인 능력은 이 복합적인 모든 본성을 통하여 동등하게 퍼져서, 그 결과 어떤 부분도 신성을 공유하지 않는 부분이 없게 되었다. 두 부분 안에서(즉, 몸과 영혼 안에서) 그 두 요소들(신성과 인성)은 적당히 연합하고 조화를 이뤘다. … 신성은 상응하는 정도에 따라 몸과 영혼 모두 속에 심겨지고 둘에 연합되었다. <antirr. 53. 54> 

 

그가 고난을 받아들인 몸은, 신성과 결합되어, 혼합을 통하여 그것을 떠맡은 본성과 동일하게 되었다. … 인간을 사랑하는 그의 신적인 계획의 성취로 우리의 비천한 본성 속에 떠맡은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또한 신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변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행 2:36, "하나님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 성서 구절은 두 가지의 것들, 즉 유대인의 손에 고난받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이 한 위격에 발생했다고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한 위격이 고난받고 다른 위격이 고양됨으로써 영광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즉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올려지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해준다. 누가 올려졌는가? … 하나님은 지고한 자이기 때문에 확실히 올려질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 인성이 올려졌다고 말함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은 주와 그리스도가 됨으로써 올려졌다. 그리고 이것은 수난 후에 일어났다.  십자가에 못박혔던 그의 비천한 본성은  무한하고 제한이 없는 선의 본성과 결합에 의해, 더 이상 그 자체의 속성의 한계에 제한된 채 남아있지 않고,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신적인 요소와 함께 들어올림 받았고, 종 대신에 주가 되었고, 신하 대신에 왕 그리스도가 되었고, 비천한 자 대신에 지고한 자가 되었고, 인간 대신에 하나님이 되었다  <c. Eunom. 5. 5>

 

우리는 생각 속에서 육신에 의해 신적인 계획에서 일하는 것과 저절로 생각되어진 신적인 능력을 구분한다 … 육신은 신성으로 변형될 때까지는 신성과 일치되지 않는다. 그 결과 속성들 중의 한 짝은 말씀 하나님에게 적합하고, 다른 한 짝은 '종의 형체'에 적합한 것은 당연하다.  고난의 결과로 '높이 올려진' 그는 실제로 주와 그리스도인 그와 함께 연합함을 통하여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다. 우리가 가르침 받은 것을 통하여, 신성은 언제나 동일하고 모순되지 않지만 육신은 본질적으로 이성과 촉각이 파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성과 결합되었을 때 더 이상 그 자체의 본성적인 속성들의 한계 안에 머물지 않지만, 우세하고 초월적인 수준으로 올려진다. 그러나 육신과 신성의 다른 속성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이들 각자를 따로 묵상하는 한 혼동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말씀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으나 육신은 이 마지막 때에 존재하게 되었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완전히 바꾸지 못하고, 그 육신은 현세 이전의 것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그 말씀은 최근에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육신은 본성적으로 수동적이지만 말씀은 능동적이다. 육신은 우주를 창조할 수 없으나, 신성의 능력은 고통을 받을 수 없다.  

 

나사로(Lazarus)를 일으킨 것은 인성이 아니다. 그를 위해 우는 것은 무감각한 능력이 아니다.  고난의 타격들은 자기 안에 주님이 있는 종에게 속하지만, 영광은 종에 의해 가려진 주님에게 속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 결과 결합관계 때문에 각 본성의 속성들은 둘에게 공통적이 되고, 주님은 종의 채찍자국들을 자신에게 취하는 반면, 종은 그 주님의 영광에 의해 영화롭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영광의 주'의 십자가라고 말해지고, '모든 입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시인한다'  

 

신성은 인성 안에 들어오기 위해 '자기를 비우고' 인성은 신성과의 결합을 통하여 신적이 됨으로써 새로워진다.  흔히 나무 표면 밑에 감추어져 있는 불이, 그 나무를 보거나 만지기조차 하는 자들의 감각에 의해 관찰되지 않으나, 그것이 불붙어 불꽃이 될 때는 명백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그는 '영광의 주'이기 때문에 인간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말하자면, 그의 죽음에 의해 신적인 계획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의 육적인 본성 밑에 있는 그의 생명의 잔화는, 그 자신의 신성의 능력에 의해 다시 타서 불꽃이 되어, 죽음에 이르렀던 것을 생명으로 따뜻하게 하며, 우리 본성의 제한된 첫 열매를 그의 신적인 능력의 무한성 속으로 쏟아 붓는다. 이렇게하여 그는 그것을 과거의 자신이 되도록 하며, 종의 형체를 주가 되게 하며, 마리아의 인간적인 아들을 그리스도가 되게 하며, 약함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그를 생명과 능력이 되게 하며, 말씀 하나님께 속하는 것으로 공손하게 생각된 모든 것을 또한 말씀이 떠맡은 것 안에 있게 한다. 그 결과 그러한 속성들은 더 이상 구별과 나뉨에 의해 각 속성 안에 있는  것처럼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신성은 인성보다 우세하기 때문에, 멸망하기 쉬운 본성은 신성으로 함께 결합됨에 의해 재창조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그것은 신성의 능력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바다 속에 섞인 식초 방울이 그런 혼합에 의해 바닷물로 변하는 것과 같은데, 그 액체의 본성이 우세한 요소의 무한성 속에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약함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그 안에 거하는 그의 우세한 능력을 통하여, 사실상 그 거주자가 존재하는 것과 칭호, 즉 그리스도와 주님이 되었다. <c. Eunom. 5. 5>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단순한 한 인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한 죽을 수 없는 신성이 고난을 받고 죽을 여지가 있다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태초에 있었던 말씀이 하나님이었다'라는 것과 그 후에 '육신이 된 말씀'은 땅에 나타나고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선포하는 영감받을 발언들을 우리는 확실히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영감받은 발언과 일치하는 그러한 사상들을 우리의 신앙 속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가 빛, 능력, 의, 생명, 그리고 진리이며, "그를 통하여 전 우주가 만들어졌다"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그러한 모든 진술들을 믿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그것들을 하나님인 말씀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고통, 잠 궁핍, 고통, 속박, 손톱, 창, 피와 상처, 장사와 무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다른 것들에 대해서 들을 때, 비록 이런 것들이 다소 위에 언급된 형용어구들과 모순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믿어지는 것들로, 그리고 말씀과 함께 우리의 신앙의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육신에 관하여 참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육신에 고유한 속성들을 '태초에 있었던' 말씀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성의  속성들을 육신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에 관한 복음의 가르침이 신성과 천한 속성들과 일치하는 장엄한 요소들의 혼합을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특유한 개념을 우리의 오성에 계시되어온 본성들 중 하나에 혹은 다른 것에 끼워넣는다. 그리고 인간적인 요소를 인성에 돌리고, 장엄한 요소를 신성에 돌린다. 하나님으로서의 아들은 전적으로 무감각하고 부패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의 고통이 복음서에서 언급될 때, 그는 고난을 받을 수 있는 그의 인성에 의해 고통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성은 확실히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몸에 의해 인간의 구원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고난은 몸에 속했고, 그러나 성취는 하나님의 사역이었다. … 

 

인성은 그가 그것을 취함으로써 영광받고, 신성은 이 겸손한 행위에 의해 스스로를 겸손하게 했으나, 인간적인 요소를 고통에 위임하고, 반면 신적인 능력을 통하여 고난받은 요소의 부활을 성취했다. 이리하여 죽음의 경험은 인성[the man]이 그와 결합했기 때문에 우리의 수동적인 본성에 참여한 그에게 돌려진다. 한편 신성과 일치하는 장엄한 호칭들은 인성[the man]에 내려왔다. 그 결과 십자가 위에 드러난 그는, 그의 신성이 비천한 요소와 합쳐졌고 그 호칭들의 은혜가 신적인 이름으로부터 인간적인 이름으로 이동되었기 때문에 '영광의 주'라고 불리었다. … 

 

말씀 하나님은 비천한 것을 높였고, 인간적인 이름을 가진 그에게 모든 이름들 위에 뛰어난 이름을 부여했다. 이리하여 인간적인 작음과 신적인 거대함의 형언할 수 없는 혼합과 결합이 발생했다. 그것에 의하여 장엄한 신적인 이름들조차 인성에 올바르게 적용되었고, 신성은 반대로 인간적인 이름들에 의해 불리었다. 왜냐하면 모은 이름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가지고, 예수라는 인간적인 이름 아래 모든 피조물에 의해서 역시 경배받는 자는 바로 똑같은 위격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에 모두가 무릎 꿇고 절할 것이며 … 그리고 모든 입술이 예수를 주라 시인할 것이다." <c. Eunom. 6. 1 , 2, 4>

 

(d) 두 의지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 22:42.] 인간적인 약함에 속하는 고통에 직면했을 때 두려워하는 것이며 …  신적인 계획과 신적인 능력에 속하는 신적인 계획의 성취로 그 고통을 인내하는 것이다. 신적인 의지와 인간적인 의지 사이에는 차이가 있고, 우리의 고난을 자신의 것이 되게 한 자는, 자신의 인성으로부터 하는 것처럼, 인성의 약함에 어울리는 말들을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가치있는, 높여진 뜻이 인간의 뜻보다 우세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두번째 말을 덧붙였다. '나의 뜻대로 마시고'라는 말 속에서, 그는 그의 인성을 가리켰다. '그러나 당신의'라는 부언 속에서, 그는 그의 신성이 아버지의 신성과 결합되어 있음을 나타냈다. 그리고 본성을 공유하기 때문에, 그 신성 안에서는 의지의 차이가 없다. <antirr. 32>

 

3. 그리스도의 사역

 

(a) 악마로부터의 구속

 

자기가 입에 물고 가지고 가고 있던 음식이 물 속에 비친 그림자를 본 개에 대한 이교 우화가 있다. 그는 자기의 입을 크게 벌려 그림자를 삼켜버리려 하다가 실제 음식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는 배고파졌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마음은 속임받아 실제로 선한 것에 대한 욕망을 빼앗겼고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이 돌려졌고, 사악함을 옹호하고 꾸며내는 자의 설득을 받아 선을 그와 반대되는 것과 혼란시키게 되었다. 왜냐하면 만일 선의 그릇된 모습이 미끼같이 악의 갈고리 위에 흩어지지 않았다면, 그의 책략은 무력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이 인간의 곤궁한 상태였다. 그는 자발적으로 자기의 생명의 적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한편,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일치하는 선, 지혜, 정의, 능력 … 등과 같은 속성들을 조사해 보라. 선하게, 그는 타락한 인간을 불쌍히 여긴다. 지혜롭게, 그는 그가 회복될 방법을 잘 안다. 그리고 정의의 결단은 지혜의 결단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참된 정의는 어리석음과 결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났을까? 우리를 동요시킨 자에 대항하는 전제적인 권능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 그들의 자유를 돈을 받고 판 자들은 그들을 산 자들의 노예들이다 … 그리고 만일 누구든지 그렇게 원한다면, 노예제도 때문에 사람을 사는 것이 완전히 합법적일지라도, 구입자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똑같은 원리로 … 정당한 회복방법이 자기의 선으로 속박에서 우리를 건진 자에 의해 고안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 방법은 이와 같은 것인데, 그 노예와 교환으로 주인이 소유하려고 하는 어떤 몸값이라도 그 주인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 악해지려는 경향의 기원[사탄 속에서]과 기초와, 말하자면 다른 모든 악의 어머니는, 그에게 병이었던 권력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그의 소유물과 교환으로, 물론 더 높고 더 좋은 것을 제외하고, 무엇을 받으려 하고, 그 결과 거래를 통하여 이익을 봄으로써 그는 자기의 우쭐해진 자만심에 더 큰 만족을 줄 수 있을까? …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탄생과 그이 이적들 속에 나타난] 권능을 보고서, 적은 자기가 소유한 것과 교환으로 그에게 이익을 줄 제안된 거래계약을 자기 안에서 인정했다. 그러므로 죽음의 감옥에 갇힌 자들의 교환의 속전으로 그를 선택했다. 그러나 정체를 드러낸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그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단지 악을 통하여 옛날에 정복한 육체적 본성의 일부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볼 것이다. 그것이 신성이 육신을 입고 가려져서, 사탄이 비슷하고 동질적인 것을 보고 두려움 없이 초월적인 권능에 접근하게 한 이유였다. 그는 단지 그의 이적들 안에서 점점 더 조용히 빛난 권능을 볼 수 있었고, 그가 본 것은 그에게 두려움보다는 욕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어떻게 선이 정의 와 결합되며, 지혜가 포함되는지를 본다. 왜냐하면 신적인 권능이 인간의 몸으로 싸임으로써 다가가기 쉽게 되어, 우리를 위한 신적인 계획이 신성의 현시로 일으켜진 두려움에 의해 좌절되지 않도록 한 계획 안에서, 당신은 선, 지혜, 그리고 정의의 실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을 구하기로 선택한 것은 그의 선의 증거이다. 포로를 속량하는 것을 교환의 일로 삼는 것은 그의 정의를 나타낸다. 한편 그의 탁월한 지혜는 어떤 것이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적에게 접근하기 쉽게 되는 계획에 의해 증명된다.

 

우리와의 교환이 그것을 구했던 자에 의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신성은 인성의 베일 아래 감취었고, 그 결과 탐욕스런 물고기에게 그런 것처럼, 신성의 갈고리는 육신이라는 미끼와 함께 삼켜질 수 있었다. <or. cat 21-24>

 

['마귀의 속임'이라는 개념은 이레나이우스(Irenaeus), 오리겐(Origen), 암브로시우스(Ambrose),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pp. 180 f; 222를 보라), 대 레오(Lee the Great), 대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에게서 나타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그것을 비난한다(p. 150을 보라). 낚싯바늘과 미끼의 비유는 이퀼레이아의 루피누스(Rufinus of Aquileia) (약 400년)의 자유로운 번역으로 서방에서 친숙해졌고, 대 그레고리(moral. 33. 7. 3)에 의해 재현되었다.]

 

(b) 화해

 

["나를 만지지 말라. …"(요 20: 17)라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한 말씀에 관하여.]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그것의 높고 천상적인 곳으로의 복귀는 그 자체로 도움받지 않은 계획으로는 불가능했다. 이 이유 때문에, 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죄를 알지 못하는 자가 죄있는 것으로 되고', 우리의 저주를 자신의 것으로 삼음으로써 우리를 저주에서 자유롭게 해주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적의를 흡수하여 (그 사도의 말로 하면) '자기 자신의 위격 안에서 그 적의를 도말했다.' 참으로 그 적의는 죄였다. 그리하여, 그 자신의 위격을 통하여 과거의 우리가 됨에 의해 그는 다시 인성을 하나님께 결합시켰다. 왜냐하면 순수를 통하여 그는 '신성의 완전한 충만이 육체적인 형태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새로운 인간'을, 우리의 본성을 지닌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그는 그의 인간적인 몸을 공유하고 그와 유사한 모든 본성을 똑같은 은혜의 상태로 가져왔다. 그리고 이 여인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그는 이 복음을 그 제자들에게 뿐만이 아니라 또한 현재까지 말씀의 제자들이 된 모든 자들에게도 선포한다. 복음은 인간이 더 이상 버림받은 자가 아니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축출된 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총체적인 인성이 그 첫 열매들과 함께 거룩하게 된다는 점에서, 다시 아들이며 하나님의 신하이다. 

 

그는, "볼찌어다, 나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녀들이라"라고 말한다. 우리를 위하여 살과 피를 공유한 그는 당신을 취하여 당신의 벗어난 곳으로 다시 데려다 주고 당신이 죄 때문에 단지 살과 피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반역으로 이탈했던 그는 우리의 아버지와 하나님이 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아버지여 너희의 아버지이고, 나의 하나님이며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말 속에서 주님은 이 은혜의 복음을 선포한다. 그 말들은 아들의 굴욕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그것들은 하나님과의 화해의 복음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서 발생한 것은 믿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 이 은혜가 한 여인의 매개로 계시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해석한 것과 일치한다.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라고 그 사도는 말한다. 그녀의 불순종에 의하여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반역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인이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어, 그녀가 부활을 믿음으로써 그녀의 죄의 결과인 재앙을 만회할 수 있게 된 이유이다. 그녀가 처음에 그녀 자신을 뱀의 제안들의 조장자와 지지자가 되게 함으로써 악의 시작과 그 결과를 인간의 삶 속에 들여온 것처럼, 그렇게 배반자 뱀을 죽인 자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달함에 의해 그녀는 죽음에 대한 첫번째 선포가 정당하게 무효화되게 한 믿음에서 남자들에게 지도자가 되었다. <c. Eunom. 12. 1>

 

(c) 회복

 

[사탄의 속임은 신적인 정의와 지혜에 상반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정의의 본질적인 특성은 각자에게 그의 상벌에 따라서 주는 것이다. 정의의 특성은 정의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인류를 사랑하는 선한 목적을 정의의 결의와 분류시키는 것도 아니지만, 그 둘을 능숙하게 결합시키는 것이다. 정의에 관해서는, 상응한 보상을 돌려주는 것이며, 선에 관해서는, 인류를 위한 사랑의 목적으로부터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특성들이 발생한 것 속에서 구별될 수 없는지 여부를 관찰해 보자. 상응한 보상은, 그것에 의해 속이는 자는 스스로 속는데, 정의를 나타낸다. 그 거래의 목적은 그것을 수행한 자의 선을 증언한다. 바로 심겨진 씨앗의 종류에 따라 땅이 그 생산물을 돌려주는 것과 같이, 원인과 시작에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할당하는 것은 정의의 속성이다. 상당한 보상을 주는 방법으로 사랑의 더 좋은 목적에서 실패하지 않는 것은 지혜의 속성이다. 

 

고의적인 살인자가 음식에 약을 섞을 수 있다. 의사도 고의적인 희생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 그것은 독약이고, 후자의 경우는 해독제이다. 그리고 치료방법은 자비로운 목적을 망치지 않는다. 두 경우에 약은 음식과 섞인다. 그러나 다른 의도를 주목하고, 한 사람은 찬양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분개한다. 후자의 경우에 속인 자는, 정의의 요구에 따라서,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자기가 심은 씨앗들이 돌려주는 것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는 쾌락의 미끼로 인간을 속였고 그에게 인간을 건네줌으로써 그 자신이 속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행위의 목적은 그것의 성격을 바꾸고 그것을 선하게 만든다. 전자는 인간성을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속였고, 동시에 정의롭고 선하며 지혜로운 후자는 파멸된 자를 구원하기 위해 속임수라는 책략을 채택한 것이다. 

 

이것은 파멸된 자들에게 이익을 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를 파멸시킨 자에게도 이익을 준다. 왜냐하면 죽음이 생명에로, 어둠이 빛에로, 부패가 비부패로 이렇게 접근하는 결과는, 무로 스러지는 보다 나쁜 요소들이 사라지는 것이고, 이러한 악으로부터 깨끗해진 자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열등한 재료가 금과 섞여있을 때 정련사들을 이질적이고 무가치한 물질을 제거하고 가치있는 금속을 그것의 자연스러운 광택으로 회복시키는 것처럼 … 신적인 능력의 접근은 불처럼 작용해서 비본성적인 함유물을 사라지게하며, 비록 분리가 고통스러울지라도 정화시켜서 그 성질에 이익을 준다. 이렇게 적 자신조차 만일 그가 주어진 복을 인지하게 되면, 그 행위가 정의롭고 유익하다고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수술을 받거나 부식제로 치료받는 자들이 그 수술의 고통으로 통증을 느낄 때 의사들에게 화를 낸다. 그러나 만일 건강이 회복되고, 고통이 지나가면, 그다음 그들은 그 치료를 해준 자들에게 고마워한다. 

 

같은 방법으로, 지루한 과정 후에 인성과 섞여서 그것과 성장한 악이 추방될 때, 그리고 지금 악 위에 누워있는 자들의 원래의 상태로 회복이 발생할 때, 그때는 전혀 정화가 필요하지 않은 자들로부터처럼 정화과정에서 응징받은 자들부터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로부터 감사의 합창이 나올 것이다. 그러한 것은 성육신이라는 큰 신비에 의해 주어진 은혜이다. 인성과 섞여서, 탄생, 양육, 성장과 같은 우리 본성의 모든 뚜렷한 특징들을 공유하고, 그는 인간을 악으로부터 자유케 하고 악의 고안자 자신조차 치유하면서, 전술한 그 모든 결과들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질병의 제거는,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병약함을 치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or. cat. 26>

 

(d) 인간의 응답

 

만일 누군가가 그 치료를 적용한 후에조차 인간의 생활은 그의 오류들로 조화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의 주장을 논쟁하려고 생각한다면, 비슷한 경험으로부터 오는 예로써 진리로 그를 인도하자. 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머리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도 있지만, 뒤에서 나선처럼 돌들만은 것은 머리와 함께 생명이 곧바로 박탈당하지 않는다. 머리는 죽지만, 꼬리 부분은 그 자신의 정신에 의해 계속 살아있고, 생명의 움직임은 없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치명적으로 강타당했으나, 여전히 그 잔여물로 인간의 생명을 괴롭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계시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이 불평을 포기하면서, 우리의 적들은 믿음은 전 인류에게 퍼져있지 않다는 것을 고소의 근거로 삼는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왜 은총은 모든 인류에게 오지 않았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 말에 집착하지만, 개종하지 않고 남아있는 부분은 작지 않다. 하나님은 자기의 은혜를 아낌없이 모두에게 부여할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일까? 혹은 그는 아주 능력이 결여한 것일까?" …

 

자, 만일 우리의 주장에서 믿음이 운명적으로 인간에게 분배되어, 어떤 사람들은 부름받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부르심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입장을 우리가 채택했다면, 우리의 계시와 충돌하는 이러한 비난을 가져오는 경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부르심은 서열, 나이, 혹은 인종의 구별없이, 똑같은 보행으로 모두에게 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에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면서, 그 말을 받은 자들은 신적인 영감에 의해 모든 민족들의 언어를 말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아무도 그 가르침의 축복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던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말이 모든 사람을 지배하게 되지 못했다 해서 누군가가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전 우주를 통제하는 그는, 그가 영광 속에서 인간을 품고 있는 그 넘치는 영광 때문에, 어떤 것을 우리의 통제 아래 있도록 허락했는데, 그것 위에서 각 개인은 홀로 통치자이다. 이것은 노예의 처지가 될 수 없는 자유의지인데, 그것은 우리의 사고의 자유 속에 거하는 자기 결정의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그 비난은 더 정의롭게 믿음에 집착하지 않은 자들게게 옮겨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까다로운 응답에 당황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만일 하나님이 원했다면, 그는 전력을 기울여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에 완고한 자들을 억지로 끌고갈 힘을 가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의지는 어디에 있었는가? 공적을 쌓을 어떤 여지가 있겠는가? 도덕적인 성공에 대해 칭찬해 줄 어떤 여지가 있겠는가? <or. cat. 30. 31>

 

(e) 십자가의 의미

 

[또 하나의 반대: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볼품없고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특히 십자가형이 그렇다. 그러나 죽음이 없었다면 인성은 불완전할 것이다.] 그러나 계시를 온전하고 정확하게 이해한 자는 죽음이 탄생의 필연적인 결과로 뒤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죽기 위해서 탄생이 받아들여졌다고 더 정당화시키면서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히 존재하는 그가 육체적인 탄생에 종속되지 않은 것은 그가 살고 싶어했기 때문에 아니라.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되돌리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필수적인 것은 우리의 본성 전체가 죽음으로부터 생명의 회복으로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말하자면 쓰러진 몸에 손을 펼치고, 우리의 죽은 시체에 구부려서 우리의 죽을 운명의 상태와 접촉할 정도로, 그리고 자기의 몸의 의해, 자기의 권세를 통하여 자신과 함께 인간 전체를 일으킴으로써 인성에 부활의 기원을 부여할 정도로, 죽음에 가까이 왔다. 왜냐하면 신성을 받고 부활을 통하여 신성과 함께 일으킴받은 그 인성은 다름아닌 집단적인 인성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체 안에서 감각기관들을 지닌 자의 활동이 특별한 멤버와 결합된 전체적인 체계에 의해 공통으로 느껴지는 감각을 전달하는 것처럼, 전 인류가 마치 하나의 생물체인 것처럼 한 멤버의 부활이 전 인류에 밀어닥친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의 계속성과 유대성 때문에 일부로부터 전체에게까지 분배된다. 그렇다면 똑바로 서있는 자가 넘어진 자를 일으키기 위해 그에게 구부렸다는 계시 가운데서 우리가 가르침받은 것 속에 있는 가능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 있는가?

 

십자가는 신비 해석에 정통한 자들에게 알려진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다음은 우리에게 내려온 전통적인 가르침이다. 복음서에 있는 모든 말들과 사건들은 고차적이고 신적인 의미를 지니고, 그 속에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러한 말이나 행동이 인간적인 수준에서 발생하는 곳에서,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섞임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한편 그 비밀스러운 의미는 신적인 요소를 나타낸다. 당연히 이 특별한 경우에 우리는 한쪽 면은 주목하면서 다른 쪽은 무시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사실로 인간적인 요소를 주목해야 하고, 반면 그 죽음의 방법으로 신성을 보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만물에 침투하고 모든 부분에 있는 자연적인 전 존재 구석구석까지 확장하는 것이 신성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한 사물은 존재로 남아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계속해서 존재하지 못할 것이며, 신성은 적절히 그리고 본래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들의 계속성 때문에 우리는 이 신성이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서, 중앙에서부터 나온 네 개의 돌출부가 있는데, 그 중앙에서 전체의 모양이 모인다. 이것은, 자기의 죽음에 의해 구속계획을 성취할 때, 운명지어진 시간에 뻗쳐진 그는 모든 것들을 자신에게 묶어서 존재하는 것들의 다양한 본성들을 조화롭고 일치하는 단일체로 모으는 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는 위에 있는 것, 혹은 밑에 있는 것이라는 개념이 있거나, 그밖의 다른 생각인 반대편에 있는 경계로 가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만일 당신이 하늘 위의, 혹은 반대쪽에 있는 우주의 경계의 구조를 생각한다면, 모든 곳에서 당신의 생각은 신성에 의해 선행되고 만나지는데, 그 신성은 홀로 모든 곳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서 관찰되며 만물을 함께 존재하도록 떠받친다. …

 

대 바울은 에베소서를 시작할 때 십자가의 광경부터 시작하고, 무엇이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 그의 가르침을 통해, 그 권능을 그들에게 불어넣는다. 왜냐하면 그는 적당한 호칭에 의해 십자가의 각 돌출부에 이름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부분을 그는 '높이'라 부르고, 낮은 부분을 '깊이'로, 양쪽에 뻗친 부분들을 '넓이와 길이'라 부른다. 그리고 내가 볼 때, 빌립보 사람들에게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두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라고 말했을 때, 다른 페이지에서 그는 이러한 사상을 훨씬 더 명백하게 한다. 이 페이지에서 그는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묘사하기 위하여 '땅 위에'라는 구절을 사용함으로써, 하나의 명칭 속에 중앙의 십자가-들보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십자가 형상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교훈이다. <or. cat 32>

 

[아타나시우스(de inc. 25), 이레나이우스(5. 17, 4),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de doctr. christ. 2.4)에 비슷한 해석들이 있다.]

 

4. 성령

 

신성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동등함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은 이 칭호[즉, 하나님의]는 본성을 가리키고, 성령의 본성은 아버지와 아들과 공유하지 않으며, 따라서 성령은 공통적인 이름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수단에 의해 그들이 본성의 다양성을 인정하였는지를 보여야 한다. 그런데 만일 신성이 있는 그대로 관찰될 수 있다면, 그리고 직접적인 관찰에 의해 무엇이 그것에 적합한지와 무엇이 이질적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질문하는 주제를 파악하기 위한 논증이나 다른 증거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성은 그 주제를 그렇게 파악하기에는 너무 높다. 그리고 우리의 지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가능성의 근거 위에서 추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활동의 증거에 의해 인도된 신성을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만일 우리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활동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안다면, 행동들의 다양성으로부터, 그 활동들의 뒤에 있는 본성들이 다르다고 추측할 것이다. 또한 본성에서 구별되는 것들이 그들의 행동의 형태에서 결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은 얼지 않으며, 얼음은 따뜻하지 않다. 본성들의 차이점은 그것들에서 비롯되는 활동들의 차이점으로 이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활동이 하나이며 같다는 것을 보고, 어느 면에서도 차이점이나 다양성이 없음을 보이고, 그리고 나서 이 활동의 동일성에서 우리는 반드시 본성의 단일성을 추론할 수 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똑같이 거룩하게 하고, 기운애게 하고, 조명하고, 위로하고, 이밖에 모든 것을 똑같이 한다. 아무도 복음서에서 구세주가 자기의 제자들에 대하여, "당신의 이름으로 저들을 거룩하게 하사"라고,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을 들을 때, 특별하고 배타적인 축성의 능력을 성령의 활동에 돌리지 않는다. 똑같은 방법으로 다른 모든 활동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 똑같이 가치있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실행된다. <[바질] ep. 189. 6, 7>

 

누가는 '주의 나라가 임하다'라는 구절의 의미는 성령의 도움을 간청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백히 한다. 왜냐하면 그의 복음서에서, '주의 나라가 임하다'라는 곳에서, 그는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사 우리를 정결하게 하옵시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이들은 성령에 반대하여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어떻게 그들은 왕권의 위엄을 노예의 비천함으로 변형시키려고 궁리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누가가 '성령'에 대해 말하는 곳에서 마태는 '나라'라는 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적들은 이렇게 묘사된 것을 종속적인 피조물의 수준까지 격하시킬 수 있을까? 이것은 지배자의 상태로부터 신하의 상태로까지 끌어내리는 것일 것이다. 창조물이라는 것은 노예 신분을 의미하고, 그리고 노예라는 것은 왕의 신분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은 왕의 신분이다. …

 

"성령이 임하사, 우리를 정결하게 하소서." 그 복음서의 그 말은, 죄를 깨끗이 하고 용서하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능력이며 활동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 증언은 성령의 신성에 대한 명확한 단언을 전하는 것이다. 그 사도는 독생자에 관하여 아주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그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고 아버지의 위엄의 오른편에 앉았다."라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성령의 활동은 그리스도의 활동과 일치한다. 그리고 활동의 동일성은 불가피하게 본성의 동일성을 암시한다. … 아들은 본성에서 아버지와 동일하고, 성령의 활동들은 성령이 본성에서 아들과 동일하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본성에 있어서 성 삼위일체의 단일성에 대한 증거가 된다. <de or. dom. 3>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한 신분을 지녔고, 그 결과 경건이 사상으로나 이름으로 신성에 돌릴 수 있는 어떤 속성에서 그들 사이의 차이점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우리는 성서에 따라, 위격적인 본체[hypostasis]에 관하여, 그의 특별한 속성들을 지닌 것으로 관찰된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성령이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비출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와 혼동될 수 없다. 또한 그는 독생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들과 혼동될 수도 없다. 이런 식으로 그는 정해진 속성들에 의해 구별되지만, 다른 모든 점에서 그는 그들과 분리될 수 없다. <c. Maced. 2>

 

우리의 적대자들은 성령은 주님에 의해 제자들에게 주어졌으므로 순서에 있어서 세번째이며, 그래서 완전한 신성이라는 우리의 개념과 동떨어졌다는 주장을 자기방위로 사용할 수 없다. 은혜로운 행위에는 감소나 변경이 없다. 숫자적인 순서가 본서에서 어떤 감소나 변경을 지시한다고 생각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것은 마치 인간이 구별된 불꽃이 타고 있는 세 개의 횟불을 볼 수 있고(그 불꽃은 첫번째 횟불에 의해 두번째로 전달되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첫번째 불꽃이 다른 것들보다 더 많은 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고, … 세번째 것은 비록 타서 불처럼 빛나고 모든 면에서 불과 같을지라도, 그것은 전혀 불이라고 말해질 수 없다는 것과 같다. <c. Maced. 6>

 

5. 성 삼위일체

 

(a) 로고스와 성

 

우리의 교리의 범위를 넘어서는 자들조차 로고스 없는 신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 그런데 인간의 말[logos]은 똑같은 용어로 표시된다. 그리하여 인간적인 활동들의 유비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발언[logos]이 말하는 자의 본성에 상응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보다 고차적인 개념으로 인도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정황에서 관찰할 수 있는 일종의 권능과 생명과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와 똑같은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하나님께 돌려진 생명, 권능, 지혜 등이 인간적인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말들의 의미는 우리 인간의 본성의 낮은 수준까지 일정한 비율로 내려왔다. 우리의 본성은 파멸될 수 있고 약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덧없는 것이며, 우리의 권세는 허울 뿐이고, 우리의 말[logos]은 안정감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초월적인 본성을 언급할 때, 그것은 단순한 언어행위로 그것의 실존[hypostasis]을 가지는 것으로, 그리고 나서 우리의 발언이 그러한 것처럼 비존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본성이 파괴되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말[logos]도 그렇다. 그러나 불멸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본성은 영원하고 실존적인 말[logos]을 가지고 있다. …

 

세상은 선하고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지혜롭고 솜씨좋게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만물은 말씀의 작품들인데,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살아있고 실존하며, 살아있기 때문에 의지로 결정하며, 또한 그 말씀은 자기의 의지를 수행할 권능을 가지고 있으며, 완전히 선하고 지혜로운 것을 바라며, 우수함을 나타내는 그 밖의 모든 것을 바란다. …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 말씀이 자기의 말씀인 자와 구별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그 말씀의 아버지는 불가피하게 그 말씀과 함께 함축되기 때문에, 상대적인 용어를 가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말은 누구의 말로 있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인간적인 정황에서 우리는 말이 마음에서 온다고 말하는데, 그 말은 마음과 완전히 일치하지도 않고 그것과 전혀 다르지도 않다.  왜냐하면 말은 마음에서부터 온 것으로서 구별되지만, 그것은 마은 자체를 나타내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질상 마음과 일치하지만 분리된 주체로서 구별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실존이라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과 구별되지만, 하나님께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속성들을 그 자체 속에서 나타냄으로써 그것은 똑같은 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인정되는 자와 본질상 동일하다. …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인간 본성이라는 실재로부터 높이 떨어짐으로써 초월적인 본성을 지닌 말씀을 인식했다.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 인성 속에 있는, 묘사할 수 없는 성령의 능력을 닮은 것과 그림자와의 유사점을 관찰함으로써 성령의 개념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서 영[breath]은 공기를 흡입하는데, 그 공기는 다른 본성을 지닌 것이며, … 말을 할 경우에는 그 말의 의미를 표현하는 소리가 된다. 신성의 경우에 성령[breath]의 존재는 종교적인 믿음으로 간주되었다. … 그러나 우리의 호흡의 경우와 같이, 낯선 어떤 것이 하나님 안으로 유입된 것같이 외부에서 들어와 그 안에서 성령[breath]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경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들을 때마다 … 의지적으로, 언제난 활동하며, 전능하게, 본질적으로 자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말씀을 수반하며 그것의 활동성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이 있다는 것을 배울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단순한 호흡을 내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 그러나 타고난 권리로 자존하는 것으로 간주된, 참된 존재를 지닌 능력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존재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도 없고, 그것이 수반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는, 능력으로 생각한다. 또한 성령은 무로 용해되지 않고, 의지를 지니고, 자동적이며, 능동적인 하나님의 말씀같이, 개체적인 존재가 언제나 선을 선택하는 것처럼 존재하며, 모든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의지에 상응하는 능력이다. <or. cat. 1. 2>

 

(b) 단일성과 차이점

 

이와 같이 신비의 깊이를 주의해서 조사하는 사람은, 신(神)인식론을 어느 정도 제한적으로 자기의 영혼으로 비밀리에 파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표현할 수 없이 심오한 신비를 말로 분명하게 나타낼 수 없다. 그는 어떻게 똑같은 것이 수를 허용하면서 숫자적인 설명을 벗어나고, 차이점들을 허용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단일체로 파악되며, 개체적인 실존으로 구별되고 기질[hypokeimenon]에서 나누어지지 않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존에서 성령과 말씀은 별개이고, 또 말씀과 성령이 속하는 것도 별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러한 차이점들을 생각할 때, 본성의 단일성은 여전히 구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군주정체는 구별에 의해 다른 신성들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진술은 유대교적인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는 두 개념들 사이의 중간에서 기인하고, 그들 각자로부터 유용한 것을 받으면서 그 두 이단들을 폐지시킨다. 유대교적인 교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령을 믿음으로써 폐지되고, 그리스 학자들의 다신론적인 오류는 본성의 단일성이 가정된 다신론을 취소하기 때문에 무효화된다. 한편 유대교적인 개념에서, 본성의 단일성이 얻어지고, 그리스적인 학설에서는 단지 실존들의 구별이 얻어짐에 틀림없다. 양쪽편에 있는 불경한 관념에 대한 교정책이 충족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의 수는 말하자면 단일성에 관해 오류에 빠져있는 자들에 대한 교정이며, 한편 단일성에 대한 단언은 그들의 믿음이 신성들의 복수성 사이에 분산되어 있는 자들에 대한 교정이기 때문이다. <or. cat. 3>

 

[하나님의 본성은 불가해적이어서, 우리는 단지 그의 속성들과 기능들 중 약간만을 알 수 있다.] '신성'이라는 말은 본성이라기보다는 활동을 나타낸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일에 함께 참여할 때 그들은 헤아림 받고 복수로 말해진다. 그러나, 세 개의 위격들[hypostases]이 '신성'으로 표현된 의미로부터 분리될 수 없을지라도, 한 분 하나님과 하나의 신성처럼, 신성은 단수로 말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활동에 종사하고 있을 때조차 그들 각자는, 똑같은 직업에 참여하는 자들과 함께 개별적인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가 지정받은 업무를 한다로 말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이성적인 일일 것이다. 예를 들어, 많은 연설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똑같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똑같은 이름이 다른 경우들에 참여하는 그들의 활동에 주어진다. 그러므로 같은 일에 종사할 때 사람들의 구별된 활동 때문에, 그들 각자는 자기의 특별한 목적을 실현하는, 자기의 구별된 활동영역에서 자기의 동료들과 구별되므로, 그들은 마땅히 복수로 말해진다. 그러나 신성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아버지가 홀로 아들이 아들이 협력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행한다는 것을 듣지 못했고, 또한 아들이 성령과 떨어져서 고립된 어떤 활동을 한다고 듣지도 못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물까지 확장되는 모든 활동들은 그들이 우리의 생각에 주어진 다른 방법들에 따라서, 다른 이름들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활동은 아버지에게서 기인하고, 아들을 통하여 계속되며, 성령 안에서 실현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개체 속에 있는 각자의 에너지는 분리되지 않고 나뉘어지지 않으므로, 그 활동의 이름은 중개자들의 복수성 속에서 쪼개지지 않는다. 우리를 위한 섭리에 관계되는 것이거나, 혹은 전 우주의 통치나 질서에 관계된 것이든지, 무슨 일이 발생할지라도 그것은 셋의 활동을 통하여 발생한다. 그러나 발생하는 것은 세 가지가 아니다.

 

나의 견해로는, '신성'을 활동에 대한 이름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반대 주장하는 자들과 논쟁할 절대적인 필요성은 없다. 우리는 신성이 제한되지 않고 불가해적인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파악할 수 없지만, 신성이 모든 면에서 무한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은, 어떤 면에서 제한받고 다른 면에서는 제한받는 것이 아니다. 무한성은 어떤 종류의 제한 도 벗어난다. 제한이 없는 것은 확실히 이름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념 속에서 신성의 무한성에 대한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성은 모든 이름을 초월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성'은 이름이다. 이리하여 똑같은 것은 동시에 이름이면서 모든 이름을 초월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만일 '신성'의 의미는 본성이지, 활동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우리의 적수들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어법이 신성이라는 이름을 복수성을 나타내기 위해 그릇되게 적용한다는, 우리의 본래의 주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엄격한 논법으로, 본성은 더 많거나 더 적은 수의 실례들에서 관찰될 때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기 때문이다. … 금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잘려질지라도, 하나이며 하나로서 말해진다고 확언한다. 그러나 많은 동전들에 대하여 말하고, 금의 본성이 동전의 수에 의해 증가되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금이 보다 큰 크기고 있거나, 평판이나 동전으로 있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많은'(much) 금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많은 금들'(many golds)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 그러므로, 금 화폐들이 많이 있을지라도, 금은 하나인 것 같이, 우리는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과 같은 인성의 개별적인 많은 예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 안에 있는 인간[인성]은 하나이다. … 그러나 '사람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면서도…, 성서는 신중하게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단수로만 사용하여, 신적인 본질을 지닌 다른 본성들에 관한 개념을 도입하지 못하도록 경계한다.

 

그러나 본성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위격들[hypostases]의 혼동을 초래한다는 이유 때문에,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의 주장을 트집잡는다면, 우리는 그 비난에 대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한편으로 본성의 불변하는 속성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원인과 야기된 것에 관하여는 차이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것이 다른 것과 구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점에서만 그렇다. 즉, 하나는 원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원인에서 유래한다는 믿음에 의해서 그렇다. 그리고 또 그 원인에서 유래된 것 속에 있는 그 이상의 차이점을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는 첫번째 원인으로부터 직접 유래되고, 다른 것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유래된 것을 통하여 유래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독생자의 신분은 논의할 필요도 없이 아들에 소속되며, 한편 성령은 명백히 아버지로부터 유래된다. 아들의 중재는 독생자로서의 그의 특징을 보호하고, 본성이라는 방법으로 성령의 아버지에 대한 관계를 방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인'과 '원인된' 것에 관해 말함에 있어서, 우리는 본성의 차이를 지적하려 하지 않고, 그러나 존재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지적할 뿐이다. <quod non sunt tres dei>

 

(c) 위격들의 동등성

 

[유노미우스는 성령의 종속은 항상 세번째로 언급되는 그의 존재의 의해 보여진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철학에 대해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것은 일종의 순서 때문에 두번째나 세번째로 언급된 것을 열등하고 종속적인 지위로 격하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위격들의 계수에 있어서 전통적인 순서는 지위와 본성의 우월성과 열등성에 대한 증거라고 주장함에 있어서, 그가 원하는 것이다. 사실상 그는 잇따른 순서가 본성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공상의 근원은 명확하지 않고, 그를 이런 공상에 빠지게 한 추리의 설득력도 없다. 수적인 순서는 본성의 다양성을 산출하지 않는다. 계수되는 사물들은 그것들이 계수되든 되지 않든 똑같은 본성으로 남아있다. 수는 사물들의 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치에 있어서 본질상 열등한 것들을 두번째로 돌리지 않으나, 그것은 계수자들을 언급함에 있어서 수적으로 지시된 대상들의 순서를 만들어낸다. '바울(Paul)과 실바누스(Silvanus)와 디모데(Timothy)' - 여기에는 말하는 사람 편에서 특별한 의도에 대한 참조로서 세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바울 다음에 있는 실바누스의 위치가, 그가 한 인간과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것을 지시하는가? 디모데는 세번째로 위치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순서로 언급되었다 해서, 다른 본성을 지닌 종류에 속한다고 간주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 각각은 이렇게 계수되기 전과 후에, 인간이다. 그러나 한 번의 발언으로 셋 모두를 언급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의 어법은 마음에 드는 순서로 각각을 따로 언급하는 것이지만, 연결사에 의해 그 이름들을 결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러한 이름들의 결합에 의해 그 셋 사이에 존재하는 목적의 조화를 지시하는 것이다. <c. Eunom. 1. 16>

 

[우주의 기본적인 구분은 분명한 것(혹은 지성적인) 수준의 존재와 감각계 사이에 있다. '감각적인' 세계는 양과 다른 감각적인 속성들에 의해 구별되는 것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알기 쉬운(혹은 지성적인) 존재의 영역에서(나는 창조된 '알기 쉬운' 세계라는 말을 쓰고 있다), 감각계에서 발견되는 차별의 원리는 없고, 다른 방법은 우월성과 열등성을 인지하기 위해 발견된다. 왜냐하면 모든 선을 공급하는 원천과 기원과 근원은 창조되지 않은 영역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지성적인 창조물은 고차적인 수준의 존재가 그것과 교제하기 때문에 원형적인 선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지성적인 창조물은 그것과 교제하며, 그것이 고차적인 수준의 존재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필연적으로 그것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 참여에는 정도들이 다른데, 책임있는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지성적인 피조물의 영역에서 각 멤버의 우월성과 열등성은 첫번째 선을 향한 이러한 경향에 따라 판정된다. 왜냐하면 지성적인 영역에 있는 피조물의 부분은 선과 그 반대의 것 사이에 있는 일종의 경계선에 위치하며, 그 결과 그 자체의 선택의 대상 쪽으로 기우는 그것의 의미에 의하여, 어느 한편을 수용할 수 있다. 이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악을 떠나 선에 접근한 정도에 따라 우월성의 정도를 말할 수 있다. 한편, 창조되지 않은 본성은 획득된 것으로서의 선을 소유하지 않고, 또한 어떤 우월한 선에 참여함을 통하여 그것 자체 속으로 받아들이지도 않기 때문에, 창조되지 않은 본성은 어떤 차이점들이 제거된다. 그것은 본질상 본성적으로 선하고 그래서 그렇게 간주된다. 그것은 우리의 적들에 의해 인정되는 것처럼, 선, 단순, 균일성, 비합성물의 근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의 내적인 차이점이 있고, 그 자신의 본성의 장엄성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은, 유노미우스가 생각하는 것처럼, 더 크고 더 작은 문제이다.

 

성 삼위일체 신앙에 어떤 선의 결여 개념을 허용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그와 반대되는 속성이 부족한 것 안에서 어떤 혼합이 있다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생자에 관한 경우나 성령에 관한 경우에, 그러한 가정은 불경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이 창조되지 않은 본성을 지고하게 완전하고 무한하게 우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체 속에 각 위격들에 속하는 특별한 속성들 때문에 분명한 차이점들을 함유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위격들에 의해 공유되는 비창조성이라는 속성에 의해 불가역성의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각 위격의 분리되고 구별되는 특성 때문에 구별된다.

 

각 위격들에서 관찰되는 개체적인 특성은 분명하고 예리하게 그들을 서로로부터 나눈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창조되지 않고 출생되지 않은 분이라고 인정된다. 그는 창조되지도 않았고 탄생하지도 않았다. 이 비창조성은 그가 아들과 성령과 함께 공통적으로 지니는 속성이다. 그러나 아버지 신분과 같이, 비출생은 다른 위격들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 그의 특별하고 비공유적 속성이다. 아들은 그의 비창조성 안에서 아버지와 성령에게 연결되어 있다. 독생자라는 그의 신분과 이름에서 그는 지고의 신이나 성령에게 속하지 않는, 유일한 특성을 지닌다. 성령은 비창조성이라는 공통적인 속성에 의해 아버지와 아들에게 결합되었으나, 그는 그의 자신의 특별한 특징들에 의해 그들과 구별된다. 그의 가장 개인적인 특징과 특성은 비출생이나 독생하는 속성을 보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닌데, 그것들 각각을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특징짓는 것으로 관찰했다. 그는 단순히 존재하고, 비출생하거나 독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위격들에 대한 구별과 특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는 창조되지 않음에 의해 아버지에게 연결되고,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에 의해 분리된다. 비창조성이라는 끈에 의해 아들과 결합되고, 지고한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의 존재가 유래된다는 것에 의해, 그는 아버지의 독생자가 아니라는, 그리고 아들 자신을 통해 나타났다는 구별에 의해 분리된다. 한편, 피조된 세계는 아들을 통하여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에, 성령이 계시된 아들을 통해 존재하므로 피조계와 공통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을 경계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꾸어질 수 없고 변화될 수 없음에 의해 그리고 자신 바깥에 있는 어떤 선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창조와 구별된다. <c. Eunom, 1. 22>

 

[공간과 시간은 창조와 함께 시작한다.] 이 낮은 세계에 사용될 때, 우리의 바쁘고 지나치게 활동하는 지성은 시간의 간격들로 구별되는 것들 사이에서 선후를 언제나 구별한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것을 '만세 전에', 창조되지 않은 존재에 적용시킬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이라는 놀라운 이름들을 지니는 놀라운 실재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바로 이 창조되지 않은 영역에서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우리는 시작이 없고, 출생되지 않은 언제나 아버지인, 아버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어떤 구별의 간격이 없는 아들에 대한 관념이 오며, 그 아들을 통하여 그리고 그와 함께 나누어질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성령은, 공허하고 실재하지 않는 틈에 대한 사상이 삽입되지 않고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존재에 있어서 아들 다음이 아닌데, 이것은 마치 독생자가 성령 없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조차 없는 것과 같다. 성령은 그의 존재를, 지고한 신으로부터 이끌어내는데, 거기서부터 독생한 빛의 존재가 온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참된 빛 성령은 비추고, 시간의 간격이나 본성의 다양성에 의해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누어지지 않는다. '만세 전에' 존재하는 영역에는 간격들이 없으며, 또한 어떤 존재의 차이점들도 없다. … 아들의 출생은 시간 안에서가 아닌 것은 창조가 시간 전에 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어떤 분리도 허용하지 않는 존재의 순서 속으로 구별을 도입하고, 모든 존재의 창조자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우주의 창조적인 원인 속으로 시간의 간격을 삽입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c. Eunom. 1. 26>

 

하나이며 동일한 아버지의 위격[prosopon]이 있으며, 그로부터 아들이 출생하고 성령이 발출한다. 그는 그에 의해 야기된 그 인격들의 원인이다. 그래서 그는 그들과 함께 공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한 분 하나님나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신성의 위격들은 시간, 장소, 의지, 점유, 활동 혹은 인간에게서 관찰되는 구별점들인 이런 종류의 어떤 속성들에 있어서 서로로부터 나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일한 차이점은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며, 아들은 아들이고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아버지도 아니도 아들도 아니라는 것이다. <de comm. not.>



[헨리 비텐슨, 후기 기독교교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