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eds & Confessions

신조학 1 - 필립 샤프(Philip Schaff)

Bavinck Byeon 2015. 1. 18. 16:17

제1장 신조학

 

필립 샤프(Philip Schaff)

박일민 편역



제1장. 신조학

제2장. 에큐메니칼 신조

제3장. 로마교회의 신조

제4장. 복음주의 교회들의 신조

제5장. 복음적인 루터교회신조

제6장. 복음적인 개혁교회의 신조

제7장. 웨스트민스터 포준문서



1. 신조의 명칭과 정의

 

신조(Creed, Rule of Faith, Symbol)"공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신앙고백 또는 신앙의 내용을 언어 형태로 표현하되 그것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여 구원을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여기거나 최소한 건전한 기독교회를 유지하기에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간주한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신조는 기독교의 교리와 상황에 관한 모든 것들을 포함할 수도 있고, 근본적이거나 명확한 요소만을 포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논란이 있는 부분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신조에는 교리 공부를 하려는 사람이나 세례를 받으려 하는 사람이나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조처럼) 간략하고 대중적인 형식으로 만든 신조도 있고, 목회자나 교사들이 공적인 교리의 표준으로 삼고자 하여 보다 학문적이고 신학적인 형식으로 만든 신조도 있다(종교개혁 시대의 신조들). 후자의 경우에는 신조(즉 신앙고백)가 항상 교리적인 논쟁에서 나온 결론이었고 직접적이든 아니면 간접적이든 간에 오류를 막아내기 위한 논쟁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신조들은 각기 그 시대, 즉 그 신조가 생겨난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신조에는 역사적 발전이 있다. 신조들은 성경적 또는 신학적 지식의 발견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신조들은 기독교 교리의 이정표요 지계석이다. 신조들은 그 시대의 신앙에 대한 구체화요 종교적인 논쟁속에서 얻어진 가장 값진 부산물이다. 신조들은 지금도 기독교회들의 신학적 사고와 공적인 가르침을 현시 또는 제어하고 있다. 신조들은 교파간의 대립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로간의 일치된 견해를 나타내 보여줄 뿐만 아니라 장래에 있을 화합의 가능성을 예시해 주기도 한다.

 

2. 신조의 기원

 

모든 강력한 확신들의 경우처럼 신앙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입으로 발표하기를 원한다 -- "심령이 넘침으로 말미암아 입으로 말을 한다."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고백한다"(Credo, ergo confiteor)--또 우리는 사람을 기독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때 또는 우리 가운데서 신앙을 고백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할 때나 다른 사람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감화를 받아 그리스도께 나아 오도록 하려 할 때에 신조를 고백해야 할 필요성을 가진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독교 신조가 생겨났다. 신조는 믿음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전제로 한다. 신조는 교회의 외적 조건과 관계없이 내적인 삶 속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신조는 교리적 논쟁 없이도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란 결코 신조가 없을 수 없다고 할 수도 있다(Ecclesia sine symbolis nulla). 세례의식아나 성만찬 제정에 관한 말씀이 곧 하나님의 신조이다. 이러한 말씀들과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오순절에 기독교회가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교회는 신조들 위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위에 서 있으며,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다. 이처럼 신조가 사람에 의해서 고백된 그리스도 위에 서 있다고 한다면, 신조는 그리스도의 물으심에 대한 인간의 답변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해석과 수납이다.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너는 반석이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있게 했다. 이 말씀은 "너는 그리스도를 고백한 자라 내가 이 고백을 요동이 없는 반석으로 여겨 그 위에 다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것과 똑같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신앙의 고백도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처럼 고백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고백이 항상 글로 기록되어야 한다거나 논리적 형식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을 마음속으로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16:31). 기독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되었다. 살아 있는 믿음으로라야 이해될 수 있는 하나님이 말씀도, 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어 사도들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다가 훗날에 가서야 신약성경으로 기록되어, 영원토록 온전하고 무오한 기록물이 되었다. 신앙고백이나 신조는 글로 기록하기 오래전 전부터 입으로 가르쳐져 원입교인(原入jiao)들에게 전해졌으며 이들은 그것을 세례를 받을 때에 고백해 왔다. '디시플리나 아르카니' (Disciplina arcani)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만큼이나 오래 전부터 사도적인 교훈의 요약히 '신앙의 규범' (즉 신조)이란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신임을 받아 왔으며, 원입교인에서부터 최고의 단계에 이르는 모든 신자들에 대한 기독교교육의 내용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니케아회의 이전 교부들의 기록을 단편적인 것들밖에 가지고 있지 못함은 매우 유감된 일이다.

 

교회는 성경의 올바른 의미에 관한 논쟁이 생겨날 때면 필히 그 참된 의미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여서 교회의 공적인 교육에 적용을 시킴과 동시에 그것으로 오류들을 막아낼 필요가 있었다. 신조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점차 확대되어 그 분량이 늘어나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신학적 논리와 체계를 갖추게끔 되었다. 최초의 신앙고백, 즉 최초의 신조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베드로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다른 모든 제자들을 대신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라고 했던 신앙고백이다. 기독교 신앙의 제1 대상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이 고백은 자연스럽게 세례 받을 때 하는 신앙고백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필립은, 내시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만으로 만족했었다. 그러나 이 고백은 세례의식과 관련하여서 곧 삼위일체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은다"라고 하는 단순한 형태의 것이었던 것 같다. 여기에 점차로 다른 항목들이 추가되고 확대되어 여러 가지 형태의 신조가 나오게 되었다. 이것들이 4세기 이후에는 하나의 형태로 굳어져 서방교회에서는 '사도신경', 동방교회에서는 '니케아신조'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카톨릭의 경우이고, 1517년부터 독립된 조직을 갖기 시작한 프로테스탄트교회는 1530년까지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으로 일치된 신앙을 보이고 있었다.

 

신조는 어떤 특정한 제정자가 없이 그 특정시대에 속한 교회들이 일반 적인 상황에서 나올 수도 있고(사도신경), 교회의 전체 회의에서 나올 수도 있고(니케아신조, 칼케돈신조), 특정 교회회의에서 나올수도 있고(트렌트회의신조, 도르트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 어떤 신학자들이 교회의 권위를 위촉받아 만든 것일 수도 있고(영국 성공회의신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일치신조), 한 개인이 자기가 속한 교회나 교파의 대표자 자격으로 만든 것일 수도 있다(멜랑톤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과 변증서, 스몰칼드신조, 루터의 요리문답, 불링거의 제2 스위스 신앙고백). 후자의 경우에는 신조로서의 권위가 그것을 고려한 교회나 교파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부여되거나 또는 묵인되었다. 회중교회나 침례교회는 매 지교회마다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고백을 가지는 습관이 있는데 흔히 그 지교회의 목회자가 작성한 소위 '언약'이란 것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다른 귄위 있는 신조를 그대로 채택하거나 전혀 독립적인 신조를 갖기도 한다.

 

3. 신조의 권위

 

(1) 프로테스탄트 체계 안에서 신조가 갖는 진위는 다른 모든 인간의 산물들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이고 한정적이다. 신조는 성경과 동등한 것이 못되고 기독교 신앙과 생활의 유일하고 무오한 규범인 성경에 항상 종속된다. 신조의 가치는 그것이 성경과 일치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이 만들어진 진조 중 최상의 것은 계시된 진리에 가장 가깝고 진리를 올바르게 해설한 것이다. 성경은 완전하고 무오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신조는 교회의 발전하는 지식에 의해 발전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것이지만,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답변이다.

 

성경은 '노르마 노르만스' (norma normans, 能产的 规范)요 신앙고백은 '노르마 노르마타' (norma normata, 所产的 规范)이다. 성경은 신앙의 규범(regula fidei)이요 신앙고백은 교리의 규범(regula doctrine)이다. 성경은 신적인 것이요 절대적인 것이지만, 신앙고백은 단지 교회적이고 상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성경은 목사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의 믿음과 행위까지 모두 지배하고 있지만 신조는 교회정치, 예배의식, 찬송가 등과 관련되는 교회의 헌법과 교헌(jiaoxian) 같은 교회 직분자들의 공적인 가르침만을 지배하고 있다.

 

신조의 귄위를 이보다 더 높이 보려는 입장은 비프로테스탄트적 사상으로써 결국에는 로마교회의 오류에 이르게 된다. 신조주의는 일존의 우상숭배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쇄된 책의 횡포로 대치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조주의는 모든 신조들을 극구 반대하는 합리주의와 불신앙을 자극하기가 쉽다.

 

(2) 희랍교회(Greek Church)는 로마교회보다 한층 더 성경과 전통을 진리와 신앙의 규범에 대한 두 개의 똑같은 근원으로 여기면서, 자기들의 신앙고백이 절대적이고 무오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희랍교회는 그 무오성을 325년 제1차 니케아회의에서부터 787년 제2차 니케아회의에 이르는 일곱 차례의 교회회의에만 국한시킨다.

 

(3) 로마교회는 이와 같은 주장을 트렌트회의나 마리아 무오사상을 결정한 1854년의 칙령이나 교황무오설 교리를 선언한 1870년의 바티칸회의 결정과 같은 다른 모든 교황의 공식적 결정에까지 확대시킨다. 바티칸회의의 결정 이후 정통적인 로마교회의 교인들은 교황을 무오한 분으로 여겼으며, 신앙과 도덕에 대한 그의 모든 공식적 결정들은 교회회의 인준 없이도 최종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희랍교회이건 로마교회이건 또는 그들 모두 이건 간에 신조의 무오성에 대해서는 똑같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중요한 점, 즉 로마교회 안에서 '아르티쿨루스 스탄티스 에트 카덴리스 에클레시오스' (articulus stantis et cadenlis ecclesios)라고 하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한다. 특히 비오 5(Pius V)의 신조와 바티칸 신조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4. 신조의 가치와 용도

 

신조는 성경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매우 큰 가치와 용도흘 가진다. 신조들은 성경의 교훈들을 요약해 주고, 성경의 올바른 이해에 도움을 주며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거짓된 교훈과 생활을 막아내는데 있어서 공적표준으로서의 방패가 된다. 특별히 자녀들의 교육에 널리 이용되고 있는 요리문답 형식의 신조들은 즉흥적이고 피상적인 충동에 의하지 않는 확고하고 실질적인 종교교육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신조의 최초 목적은 교회를 세상이나 유대교나 이교 사상과 구분하는 것이었으나, 후에는 정통교리와 이단을 구분하는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교파와 교파를 구분하는 쪽으로 그 목적이 바뀌었다. 어떤 측면에서 보든지 신조들은 현재까지도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값진 독보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종교적이든지 아니면 세속적이든지 간에 규모가 잘 짜여진 사회라면 모두 조직과 규약을 가질 수밖에 없고 적절한 권징을 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교리를 구체화시킨 것을 신조라고 한다면 요리문답이나 예배의식서 또는 찬송가 등도 일종의 신조라고 할 수 있다.

 

신조가 갖는 구속력의 정도가 기록의 형태에 있어서는 "신조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quia)로 할 것인지 또는 "신조가 이렇게, 말한 것을 참작해 볼 때" (quatenus)로 할 것인지와 같은 문제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특별히 소시니안파, 퀘이커파, 유니테리안파, 합리주의자들은 신조의 귄위와 용도를 전적으로 배격하거나 반대하려고 한다. 그것은 신조들이 성경의 자유로운 해석과 신학의 발전을 저해하며, 양심의 자유와 개인의 판단권을 방해하고, 위선과 독선과 완고함을 조장시켜 주며, 분란과 혼란을 야기시키고, 종교적인 증오심과 분파들간의 험담을 낳게 하며, 역작용을 일으켜 교리적 무차별주의나 회의주의 또는 불신앙을 조장하며, 17세기의 루터파와 칼빈주의의 국가들이 국교화되면서 가졌던 신조주의가 18세기의 배교 운동을 낳게 만드는 것과 같은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교를 가진 나라에서는 의견을 달리하는 가구를 조직할 수 있는 자유가 용납되지 않았었고, 신조가 성경에 종속되기는커녕 성경보다 우위에 올랐었다고 하는 그들의 반론에도 일리가 없지 않다.

 

그러나 신조란 성경 그 자체가 아니라 성경에 대한 단순한 요약 또는 해설에 불과하다고 보는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이러한 비난은 적당치가 않다. 우리는 모든 신조들을 다 배격하는 종파들이라 할지라도 자기들 나름대로의 어떤 전통적인 체계나 자기들이 추앙하는 인물들의 권위에 자기들의 입장을 호소하고 있으며, 그들 역시 형식화된 신조를 가진 교회들 못지 않은 논쟁과 분열과 변화를 많이 일으키고 있은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신조가 없이는 신앙과 생활의 순결을 도저히 지켜 나갈 수가 없다. 가장 훌륭한 교회라 해도 과오에 빠지거나 부패해지는 일이 많았었다. 하지만 부패한 교회라 할지라도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성령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실 때에는 새롭게 되고 부흥될 수 있었다.

 

5. 신조의 분류

 

기독교의 신조는 교회의 삼대 주류인 희랍교회, 로마교회, 복음주의교회의 신조와 그 공동기원으로서의 신조 등으로 4구분될 수 있다.

 

(1) 고대 공교회시대의 에큐메니칼신조들

 

이 신조들은 주로 성부와 성자에 대한 정통 교리 또는 성령과 성육신에 대한 근본 교의들을 진줄하고 있다. 이 신조들은 모든 교회들의 공동 소유물이었다. 후대의 신조들은 이것들로부터 발전되어 나왔다.

 

(2) 희랍 또는 동방교회의 신조들

 

이 신조들 속에는 로마 카톨릭교회나 복음적인 프로테스탄트교회가 받아들이는 신앙과 차이가 있는 동방교회의 신앙내용이 밝혀져 있다. 이 신조들은 주로 성령의 발출(fa, Process) 교리에서 로마교회의 신조들과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교황의 권위에 대한 교리에서는 더욱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규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회와 성례, 성자 또는 성물숭배, 수도원이나 수녀원 제도 등에 있어서는 프로테스탄트교회보다 로마 카톨릭에 훨씬 더 가깝다.

 

(3) 트렌트회의에서 바티칸회의까지(1563-1870)의 로마교회의 신조들

 

이 신조들은 로마교회의 독특한 교리들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최고 권위로 받아들이면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생각하던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정죄를 받았다. 1870년 바티칸회의에서 선언된 로마교회의 마지막 신조는(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교황 무오설을 공식화함으로써 카톨릭 신앙헌장을 체계화시켜 놓았다.

 

(4) 복음적인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신조들

 

이 신조들은 대부분이 종교개혁 시기 이후(어떤 것들은 17세기 이후)에 작성되었었다. 어떤 것은 희랍교회의 신조들을 기초로 사용했으나 어떤 것은 라틴교회의 신조들을 기초로 삼았다. 이 신조들은 초기 에큐메니칼신조들과 일치하고 있으나, 죄와 은혜의 교리 또는 초대교회에서 결론을 보지 못하였던 인간론, 구원론(: 속죄론, 칭의론) 같은 몇몇 교리에 있어서는 어거스틴의 입장을 택하고 있다. 이 신조들의 발전은 성경교리(특히 바울서신)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 개인적으로 적용되는 교리(구속적용교리)에 초석을 놓았던 튜톤족(게르만 민족의 일파)의 신학발전과 함께 이루어졌다.

 

프로테스탄트 신조들은 루터파 또는 개혁파신조로 나누어진다. 루터파 신조들은 모두 1530-1577년 사이에 독일에서 작성되었으나, 개혁파신조들은 각기 다른 나라 -- 독일, 스위스, 프랑스, 화란, 헝가리, 폴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등, 쯔빙글리와 칼빈의 영향이 미친 여러 나라 -- 에서 제정되었다. 루터파와 개혁파의 신조들은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 종말론에서 대체로 견해가 일치하고 있으나 신적 작정, 성례의 성질과 효능 특히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방식에 관한 교리 등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회중교회파(Congregationalists), 침례교, 퀘이커파, 알미니안파, 감리교, 모라비안파 등과 같은 후대 복음주의 교파들은 종교개혁의 중심 교리들을 그대로 용납하면서도 인간론, 교회론, 성례론 특히 교회 정치와 권징론에 있어서는 루터파나 칼빈주의 사상과 입장을 달리한다. 이들 교파들의 신조들은 고대 프로테스탄트 신조의 확대라기보다 그것의 축소 또는 일부의 변경에 불과하다.

 

프로테스탄트사상과 연관성이 있는 이단들은 대개가 신조들을 전적으로 배격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신조를 마치 인간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멍에인 것처럼 여기거나 새로운 형태의 교황주의로 간주한다. 어떤 이단은 성경까지도 도외시해 버리고 자기 자신의 이성이나 그 시대의 정신을 신앙문제에 대한 최대의 판단자와 안내자로 삼기까지 한다. 이러한 종파들은 분열을 원치 않으면서도 결속하는 힘이 부족하여 그 설립자로부터 오래가지를 못해 붕괴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교회의 신조 제정 시기는 17세기 중엽으로 마감되었으나 로마교회만은 근세에 들어와서도 동정녀 마리아의 무염시태설(1854)과 로마 교황의 무오설(1870)이란 두 교리를 추가시켰다. 우리가 앞으로 새로운 신조를 갖게 된다면 그 신조는 혼란과 불화를 가져다 주는 신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의 여러 지체들을 하나로 일치케하는 신조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필립 샤프,신조학,pp.7-15]



The Creeds of Christendom (3 vols.) - by Schaff, Phi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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