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modern Theology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관점 비판 - 이윤석 목사

Bavinck Byeon 2015. 10. 21. 19:34

(<개혁논총> 2015, 35, 137-163.)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관점 비판 (이윤석 2015 개혁논총 35권).pdf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관점 비판

 

이윤석 목사(남서울교회)

 

 

1. 서론

 

본 논문은 김세윤의 최근 저서인 칭의와 성화를 통해 비로소 명료하게 드러난 그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입장을 개혁주의 구원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하였다. 그는 신약신학자로서 The Origin of Paul’s Gospel을 비롯하여, 구원이란 무엇인가, Paul and the New Perspective(바울 신학과 새 관점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판됨), 복음이란 무엇인가등의 여러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칭의와 성화를 출판하였다.

 

그는 2001년도에 출간된 구원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신자 각 개인에게 일어나는 주관적인 구원 사건의 실재를 의인 됨(justification)’, ‘화해함(reconciliation)’, ‘하나님의 아들 됨(adoption)’,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개혁주의 구원론의 테두리 안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2003년도에 출간된 복음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의 개념이 법정적인 것 뿐 아니라 관계론적 개념임을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다소 생소하면서도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2013년도에 출간된 칭의와 성화를 통해 우리는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해가 종교개혁 이후 정립되고 발전되어 온 개혁주의 구원론의 교리를 벗어나 있다는 것(만약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구원론 교리 체계의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개혁주의 구원론의 입장에서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 개념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며 올바른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방어하고자 한다.

 

2. 개혁주의 구원론이란?

 

2.1. 개혁주의 그리고 개혁주의 구원론

 

문병호는 개혁주의를 칼빈주의의 동의어로 오직 성경을 모토로 하는 성경중심적 신학 노선을 가리키며, 칼빈, 투레틴, 바빙크, 카이퍼, 핫지, 워필드 등이 그 노선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하였다. 본 논문에서도 이와 같은 입장을 전제한다. 이러한 개혁주의 관점에 입각하여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 개념을 비판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개혁주의의 범위를 모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혹 있을지 모르므로 필자가 본 논문에서 전제하는 개혁주의의 범위를 표준문서와 주요 학자들을 나열함으로써 진술하고자 한다. 개혁주의의 내용 자체를 진술함으로써 이런 내용을 담고 있어야 개혁주의이다라는 식으로 개혁주의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지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구원론과 관련해서도 개혁교회의 표준문서 중 중요한 위상을 갖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돌트 신조, 그리고 존 칼빈(John Calvin), 존 오웬(John Owen),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프란시스 투레틴(Francis Turretin), 로버트 댑니(Robert Dabny), 찰스 핫지(Charles Hodge),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존 머레이(John Murray),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 앤소니 후크마(Anthony Hoekmea), 로버트 레이몬드(Robert Reymond),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 등의 신학적 노선을 수용하는 입장임을 밝힌다.

 

“Five Views”라는 이름을 달고 출판된 Justification: Five Views (칭의 논쟁: 칭의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점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판됨)Christian Spirituality: Five Views of Sanctification (성화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됨)의 다섯 가지 관점 중에서는 칭의와 관련해서는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의 관점을, 성화와 관련해서는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의 관점을 각각 따른다.

 

2.2. 개혁주의 관점의 칭의와 성화

 

개혁주의 구원론은 칭의와 성화를 명확하게 구별한다. 물론 칭의와 성화는 구별되는 개념이지만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칭의 없는 성화 없고 성화 없는 칭의도 없다. 바꾸어 말하는 칭의가 있으면 반드시 성화가 있고 성화가 있으면 반드시 칭의가 있다. 이 때문에 칭의와 성화를 이중적 은혜(duplex gratia)라고 부른다. 종교개혁 이후 본 논문에서 필자가 제시한 표준문서들과 학자들의 입장은 대체로 일관되게 이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는 로마 가톨릭의 의화(iustificatione)’ 교리에 맞서서 개혁주의는 칭의의 법정적 성격을 명확히 하였다. 칼빈은 칭의가 갖고 있는 법정적 성격을 명확히 주장하고 있으며 죄 사함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주된 특징으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별개로 칼빈은 회개와 중생이라는 표현으로 성화를 표현하고 있다. 칼빈은 회개를 죽이는 일(mortification)’살리는 일(vivification)’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죽을 때까지 평생에 걸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가 모든 신자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확립된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은혜 구도는 개혁주의 구원론이 갖는 핵심 구도였다. 유수한 학자들이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은혜 구도를 수용하고 그에 따라 구원론을 전개한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하여 죄인에 대한 율법의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다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 행위로 정의된다. 칭의에 있어서는 법정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칭의는 소극적 요소인 죄의 용서를 포함할 뿐 아니라 적극적 요소인 양자 됨도 포함한다. 즉 단지 죄가 없다는 판단을 받고 더 이상 죄인이 아니게 되었지만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는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칭의에 있어서 이 적극적 요소는 신자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칭의의 적극적 요소에는 이 양자 됨과 함께 영생의 권리도 포함되어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경우 제11장 칭의와 제13장 성화 사이에 제12장으로 별도의 장을 할애하여 양자 됨(adoption)에 대해 다루고 있기도 하다. 칭의의 적극적 요소인 양자 됨은 칭의로 인해 신자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관계에 들어가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획득한 충만을 함께 누릴 수 있는 복된 지위와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한편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택자들에게 전가되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 칭의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개념은 가장 핵심적인 원리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혁주의 구원론은 칭의 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원리를 주장하며 중세 로마 카톨릭의 의화 교리와 차별화해 왔다.

 

성화는 칭의된 죄인을 죄의 오염으로부터 해방시키며, 그의 본성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며, 선행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는 성령의 은혜롭고 지속적인 사역으로 정의된다. 성화에 있어서는 실제적, 변혁적 측면이 두드러진다. 성화는 죄의 오염으로 인한 본성의 부패 상태를 개선한다. 비록 단번에 이러한 죄의 오염이 모두 제거되지는 않을지라도 평생 살아가는 동안 진전되다가 죽음 이후에 성화가 완성된다. 성화에도 소극적 요소와 적극적 요소의 두 부분이 있다. 소극적 요소는 죽이는 일(mortification)이며, 적극적 요소는 살리는 일(vivification)이다. 또한 머레이 이후로는 전통적인 성화의 개념인 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와 별도로 단회적으로 즉각적인 성화를 의미하는 결정적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의 개념도 구분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칭의와 성화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벌콥은 칭의와 성화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대조하며 설명하고 있다.

 

1. 칭의는 죄책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해당되는 영원한 기업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회복시킨다. 성화는 죄의 오염을 제거하며 죄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점점 더 닮아가도록 죄인을 새롭게 한다.

2.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의 외부에서 일어나며 하나님의 판결이 주관적으로 주어지지만 인간의 내적 삶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반면에 성화는 인간의 내적 삶에서 일어나며 인간의 전 존재에 점차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3. 칭의는 단 한번만 일어난다. 칭의는 반복되지 않으며 과정일 수 없고 단번에 완성되며 영원히 지속된다. 칭의에는 정도의 차이가 없다. 인간은 완전히 의롭다 여겨지거나 아니면 전혀 의롭지 않다고 여겨진다. 그와 달리 성화는 계속적인 과정이며 이생에서는 결코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

4. 양자는 모두 그리스도의 공로를 공로인(meritorious cause)으로 갖지만 작용인(efficient cause)에는 차이가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성부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 선언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그를 거룩하게 하신다.

 

칭의와 성화의 명확한 개념 구별과 함께 개혁주의적 관점의 구원론이 계승하고 있는 중요한 개념이 하나 있다. 바로 칭의와 성화의 근거이자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이다. 이 연합은 그리스도가 그들의 생명과 힘, 복과 구원의 근원이 되게 하는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의 친밀하고 생명력 있는 영적인 연합으로 정의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칭의와 성화를 비롯한 구원의 서정에서 나열되는 여러 구원의 양상들의 기초가 된다. 구원에 대한 교리 전체 중에서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게 된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갖게 된 것이며 이 연합 때문에 칭의와 성화가 그 개인에게서 반드시 함께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는 받았는데 성화는 없다는 식의 이야기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구원의 서정과 관련한 입장은 머레이처럼 부르심,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됨, 성화, 견인, 영화 등으로 명확한 순서를 추출할 수 있다는 입장, 벌콥처럼 부르심, 중생, 회심, 칭의, 성화, 견인, 영화 등으로 개념적으로 구분은 되지만 순서를 명확하게 정하기는 어렵다는 입장, 벌카우워처럼 구원의 서정 구분이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입장 등으로 다양하지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 모든 구원과 관련된 양상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공통적이라고 하겠다.

 

한편 전통적인 개혁주의 구원론은 성도의 견인을 주장한다. 성도의 견인 교리는 하나님께서 중생케 하시고 은혜의 상태로 유효적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그 상태로부터 완전히 혹은 최종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영원히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교리이다. 참 신자들은 절대로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견고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개혁주의 관점의 칭의와 성화 개념에 입각하여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해를 고찰해보자.

 

3. 김세윤의 주장과 개혁주의 관점의 비판

 

3.1. 법정적 이해만이 아닌 관계적 이해를 강조하는 칭의 개념

 

김세윤은 칭의(justification)의 법정적 의미도 인정해야 하지만 관계적 의미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로마서 3:21에 사용된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하며 크랜필드 주석의 해석을 예로 들며 법정적 의미로 이해됨을 한편으로는 이야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근본적으로 관계적 의미를 갖는다고 케제만의 주석을 예로 들면서 주장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에 대한 두 가지 이해에 따라 그는 칭의론에 대한 이해도 달라진다고 본다. 그는 칭의에 대한 법정적 해석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이 구원(은혜)을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면(믿으면), 십자가에서 일어난 그 역사적 구원의 사건이 오늘 나에게 실존적으로 효력을 발생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사면된 죄인으로 선언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칭의’(무죄 선언, 의인이라 선언됨, 의인이라 칭함 받음, 의인의 신분을 얻음)입니다."

 

위 인용문에서 그는 개인이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그 개인에게 적용되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사면된다고 선언되는 것을 칭의라고 설명하고 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오늘 나에게 실존적으로 효력을 발생해서같은 표현들도 전통적인 개혁주의 구원론 관점의 칭의 정의에서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의 주장의 초점을 일단 진노로부터 사면된 죄인으로 선언되는 것에 맞추어 본다면 그것 자체가 법정적 성격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와 별개로 김세윤은 칭의에 대한 관계적 해석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죄를 씻어 버리는 제사(expiatory sacrifice)가 되게 하심은 창조주로서 또는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돌보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심이요 우리에 대해 스스로 짊어진 의무를 다하심이다(3:21~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에 대한 선포, 곧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다. ,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 해 주심(은혜)이 드러난다(1:17). 이 복음을 믿으면(받아들이면) 그것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속죄 제사가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여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함(‘불의’)의 죄가 씻어지고, 그 죄가 초래한 하나님과의 갈등이 해소되어,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다. 의인’(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자)이 된다. 이것이 칭의, 의인 됨, 의인의 신분을 얻음이다."

 

그는 우리를 돌보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심”, “우리에 대해 스스로 짊어진 의무를 다하심”, “하나님과의 갈등 해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칭의가 관계적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김세윤의 칭의에 대한 관계적 해석의 핵심은 불의를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행하지 못함으로 정의하고 그 죄가 씻어짐과 함께 그 죄로 인해 생겼던 하나님과의 갈등이 해소되고 화목한 관계로 회복되는 것을 강조함에 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2003년도에 출간된 책에서도 이미 주장되었었다. 여기서도 이미 칭의에 있어 관계적 의미가 있다는 주장을 했지만 그러나 가톨릭교회가 가르쳐왔던 도덕적인 의미에서 의인으로 변화한다는 개념은 아니라고 하였다. 이 부분에서 김세윤의 주장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관점의 칭의 이해와 혼란이 생긴다. 구원을 논할 때 개혁주의 관점의 구원론은 법정적이냐 아니면 도덕적 또는 실제적이냐 하는 차원을 따졌다. 그래서 법정적 개념은 죄책을 담당하는 칭의, 도덕적 또는 실제적 개념은 죄의 오염을 담당하는 성화 이런 식으로 큰 구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김세윤은 칭의의 법정적 성격 외에 다른 것을 논한다면서 법정적이란 단어에 대응되는 도덕적또는 실제적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관계적이란 또 다른 범주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혼란을 야기하였다. ‘관계적이란 용어는 사실 법정적이면서도 관계적일 수 있고 도덕적이면서도 관계적일 수 있는 용어이다. 실제로 앞에서 개혁주의 관점의 칭의와 성화 개념 요약에 제시되었듯이 전통적인 개혁주의 관점의 칭의에는 소극적 요소인 죄의 용서도 있지만, 적극적 요소인 양자 됨(adoption)의 개념과 영생의 권리를 얻음도 포함되어 있다. 김세윤이 주장하는 칭의의 관계적 의미라는 것은 사실 전통적인 개혁주의 관점의 구원론에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양자 됨이라는 개념으로 이미 충분히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김세윤이 주장하는 관계적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해보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양자적 관계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관계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가 주장하는 관계적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모호하다.

 

김세윤은 칭의론의 법정적 이해와 관계적 이해를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대조하여 요약한다. “칭의론을 법정적 범주로 해석하면 아담적 죄에 대해 용서받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해방됨이나, 관계적 범주로 해석하면 아담적 죄로 뒤틀린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잡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범주에 따른 특징이 서로 독립적인 차원의 내용을 실제로 담고 있다고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단지 단어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잡히는이라고 표현되었을 뿐 관계가 바로잡히는에 해당하는 실제 내용은 아담적 죄에 대해 용서받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해방됨이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인간과 하나님의 양자간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관계적이라 할 수 있다. 두 가지가 서로 다른 범주가 되려면 두 범주를 구분하는 기초가 되는 차원이 있고 각 범주는 그 차원에 대해 서로 독립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김세윤의 구분은 그렇지 않으며, 범주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칭의에 대한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토대로 하여 한국의 기독교계를 향해 다음과 같은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칭의를 순전히 법정적 의미로만 가르치고 그것의 관계적 의미는 가르치지 않으며, 그것을 성화와 구조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가운데, 칭의는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으로만 얻는 것이라는 바울의 강조(종교개혁 전통의 강조)를 정통 신앙의 시금석으로 삼도록 가르치면, 자연히 성화에 대한 열정이 식고, 도리어 성화에 대한 열정이 바울이 경계하는 율법의 준행으로 얻는 자기 의를 내세워 칭의를 얻으려는 이단 신학에 빠지지 않나 걱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대다수 한국 목사들이 가르치는 왜곡된 칭의론, 성화와 분리된 칭의론, 의로운 삶을 낳기는커녕 도리어 방해하는 칭의론입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신학의 구원의 서정의 틀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관점의 칭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김세윤의 이와 같은 주장은 부적절함이 명확하다. 그는 개혁주의 구원론이 갖고 있는 칭의의 적극적 요소인 양자 됨과 영생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개혁주의 구원론의 칭의가 단순히 죄의 용서라는 소극적 부분만 갖고 있는 것처럼 간주하고 비판하며 자신이 주장하는 칭의의 관계적 의미가 상당한 기여를 할 것처럼 주장했지만 그가 주장한 칭의의 관계적 의미는 이미 양자 됨이라는 법정적 개념 속에 포함되어 다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김세윤의 이러한 입장은 구원을 의인 됨(justification)’, ‘화해(reconciliation)’, ‘하나님의 아들 됨(adoption)’,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 4가지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한 2001년도에 출간되었던 구원이란 무엇인가의 입장에서보다 더 전통적인 개혁주의 구원론 관점에서 이탈한 것이다.

 

3.2. 칭의와 성화의 구별 거부, 성화는 칭의의 현재 단계를 지칭하는 동의어

 

김세윤은 칭의와 성화의 구별을 거부하는 입장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성화는 칭의와 같은 것이라는 입장이다. 아래 진술은 그의 이러한 주장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의 구도에서는 이렇게 성령의 도움을 받아 의의 열매’/‘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칭의에 뒤따르는 성화의 단계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칭의의 현재 단계인 것입니다. 의인으로 칭함 받은, 즉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우리가 그 관계에 서 있음의 단계인 것입니다. ,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이전된 우리가 하나님이 통치를 실제로 받으며 살아가는 단계인 것입니다. 이것은 칭의 다음에 오는 성화의 단계가 아니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됨의 의미에 있어서 칭의와 동의어인 성화(하나님께 바쳐지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되기)의 현재 단계(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이기도 합니다."

 

그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구원론이 칭의가 단 한 번 일어나며 과정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는 성화를 “‘칭의의 현재 단계라고 규정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칭의가 마치 일회적으로 끝난 일이 아니라 칭의라는 행위 자체가 계속되는 것처럼 주장한다. 그는 이를 “‘그 관계에 서 있음의 단계라고도 한다. 이 표현은 새 관점 학파의 들어가기(getting in)과 머물기(staying in)의 구도를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서 칭의 다음에 오는 성화가 아니라 칭의와 동의어인 성화의 현재 단계라고도 한다. 즉 그는 성화를 칭의와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는 성화란 칭의와 마찬가지인데 칭의와 동의어인 성화가 있고 그 성화의 현재 단계를 전통적 입장의 성화라 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전통적 입장에서는 단순히 칭의의 현재 단계를 굳이 성화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 전통 신학의 구원의 서정에서의 성화는 칭의의 현재 단계에 대해 이름을 잘못 붙인 것입니다.”라는 진술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상 칭의에 대한 김세윤의 정의는 전통적인 칭의의 정의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다른지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뒤틀려 있다. 그는 한 번에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칭의의 특징을 무시하고 마치 로마가톨릭 교회의 의화 교리처럼 구원의 전 과정에 해당하는 것처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칭의를 믿는 자 된 순간부터 현재를 거쳐 최후의 심판 때까지의 구원의 전 과정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으로 이해해야지,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론에 의거하여 믿는 자 된 순간에만 적용하고, 그 후에 성화가 있는 것으로 논하면, 칭의의 현재적 과정(전통적인 신학이 말하는 성화의 과정)이 등한시됩니다. 그러면 윤리(의로운 삶)가 없는 칭의론이 되고 맙니다."

 

김세윤은 칭의를 중생 이후 구원의 전 과정을 통해 계속되다가 최후의 심판 때 완성되는 것으로 보는데 이러한 관점은 칭의가 계속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로마카톨릭 교회의 의화 교리와 유사하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새관점 학파의 라이트의 인식과도 유사하다. 호튼은 라이트가 신자들이 살아온 전 생애에 기초하여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 최종적 칭의라고 주장한다고 평가한다. 루터파 신학자 포드도 성화가 굳이 칭의와 구별되어야 할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성화란 칭의라는 영원히 솟아나는 분수로부터 흘러나온 것의 결과로 거룩함이 자라가는 것, 단지 시간 속으로 전가가 침투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칭의면 다 되고 성화는 별도로 다룰 의미가 없다는 입장이다.

 

전통적인 개혁주의 관점의 칭의는 중생 때에 일어나며 칭의와 함께 성화가 시작되는데 성화는 계속해서 지속된다. 그러나 칭의는 어디까지나 단회적이며 그 효과는 영원하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 때는 중생 때 있었던 칭의로 인해 의의 옷을 입은 상태이기 때문에 의롭다고 판결을 받게 되는 것이다. 김세윤의 주장처럼 칭의가 최후의 심판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또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로 칭의와 성화를 분리된 별도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의로운 삶이 없는 구원론이 된다는 점을 든다. 신자의 삶에서 윤리가 약한 것이 칭의와 성화 개념을 구분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앞서 개혁주의 구원론의 칭의와 성화 개념을 정리할 때 칭의와 성화의 공통의 기초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임을 제시한 바 있다. 전통적인 개혁주의 관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인간의 구원의 기초라고 생각하며 구원의 은택의 여러 양상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참 신자라면 칭의만 있고 성화는 없는 경우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김세윤의 이러한 문제 제기는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매우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김세윤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관점은 우리가 이미 칭의를 받았으니 설령 성화가 부족하여 장차 하늘에서 상급을 못 받아도 최소한 구원은 이미 확보했으므로 그것으로 되었다고 자만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개혁주의 관점은 칭의된 사람에게 성화의 삶을 의무적으로 요청한다. 성화의 과정에서 인간의 책임 있는 참여가 반드시 요구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칭의와 성화에 대한 진술 후 제 XVI장에서 선행에 대한 요구 사항을 적시하고 있다.

 

김세윤은 칭의와 성화가 같은 개념이라는 자기 주장의 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새 관점 학파의 전형적 구도인 들어가기(getting in)와 머물기(staying in)의 구도를 적용할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런 왜곡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관점에서 설명해야 합니다. 전통 신학의 구원의 서정론에 근거하여 칭의와 성화를 서로 구분되는 두 단계들로 이해하기보다는, 칭의를 하나님 나라에로 진입함’, 하나님 나라 속에 서 있음’(,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기),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완성을 받기라는 구원의 전 과정을 총칭하는 하나의 범주로 이해하면, 윤리적 요구, 즉 의로운 삶에 대한 요구가 칭의에 구조적으로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칭의라는 개념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과 하나님 나라에 머무름이라는 서로 다른 일이 칭의라는 같은 개념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이 부분에서는 그가 새관점 학파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판단된다. 그가 기본적으로 새관점 학파의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칭의와 성화라는 전통적 구도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와 머물기라는 새관점 학파의 전형적 구도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 구도로 접근하면 전통적인 개혁주의 구원론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3.3. 견인 교리의 실제적 부정, 즉 구원 은혜로부터의 탈락 가능성 주장

 

김세윤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구원론이 갖고 있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실제적으로 부정한다. 이 말은 거듭난 신자가 구원 은혜로부터 중도에 탈락할 수 있다는 이해를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아래의 진술에서 우리는 그가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믿음의 시작점에 칭의 된 모든 사람들은 결국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들 중 구원에서 탈락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결론적으로 한마디로 답한다면, 칭의의 현재(‘구원의 서정의 언어로 말하자면 성화’) 단계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성령의 도움으로 순종하려는 기본 자세를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은 설사 그가 예전에 믿음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여 칭의/구원을 받았다 한들(10:9~10), 종말의 칭의/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탈락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김세윤은 위 진술에서 자신의 언어로는 칭의의 현재 단계’, 구원의 서정의 언어로는 성화 단계에서 최초의 칭의는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중간에 구원에서 떨어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칭의된 사람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기본 자세를 갖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칭의와 성화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두 가지가 구분을 되나 항상 같이 가는 개념이라는 이해가 없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돌트 신조의 내용과 명확하게 상반된다.

 

김세윤은 로마서 8:23~39에 근거하여 성도의 견인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주장만 수용하면 구원파적 신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구원의 은혜에서 탈락할 가능성을 히브리서 6:1~10이 명확하게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그는 히브리서 6장에 대한 전통적 개혁주의 관점의 해석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후자는 사변적이고 기계적인 예정론을 견지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펴기도 합니다. “진정으로 예정된 자는 타락할 수 없다. 고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배교하고 방탕한 삶을 살고 있는 저 목사나 장로는 원래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산 것이 아니라 단지 겉으로 믿는 자같이 보이는 생활’(only apparent faith)을 한 것이다. 아니면 현재 그의 방탕한 삶은 단지 겉으로 타락/탈락으로 보이는 것’(only apparent fall)이고 결국은 하나님의 지켜 주심으로 돌아서서 구원을 받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성경의 타락/탈락의 가능성에 대한 경고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성경을 바르게 공경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전통적 개혁주의 관점의 히브리서 6장 해석은 김세윤이 비판하는 바로 그 방식의 해석이다. 히브리서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에서 빛, 하늘의 은사,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 등을 경험하는 것은 참 신자가 아니라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들은 언약 공동체에 단지 외적으로만 소속된 이들로 참 신자들과 함께 참 신자들이 누리는 구원의 복락에 참여하는 것 같지만 참된 거듭남이 없었던 명목상의 신자로 간주된다. 이들은 마치 가룟 유다 같은 사람들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능력,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했고, 예수님을 전하고 기적을 행했지만 유기된 자로 드러났다. 히브리서 6장에 대한 김세윤의 이해는 전통적 개혁주의 관점의 해석과 다르다.

 

김세윤은 히브리서 6장을 굳이 그렇게 해석하고자 하는 이유를 신자가 된 이후의 삶이 나태해지지 않고 경건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란 취지로 이야기한다. 계속해서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생활을 지속해야 최후의 심판 때 의롭다는 판단을 받게 된다는 입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택자에 대한 칭의가 최후 심판 때까지 유보된다는 식의 이해는 개혁주의 관점의 이해와 다르다.

 

그러나 그는 일면 성도의 견인 교리를 부인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단지 성도의 견인 교리와 함께 구원에서의 중도 탈락 가능성도 같이 제기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입장이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믿을 수 있음, 그래서 넘어질 수 있음을 가르치는 바울의 말씀들을 진지하게 읽고 회개하는 가운데 신실한 믿음의 순종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이렇게 예정론/성도의 견인론과 타락/탈락의 가능성에 대한 교리 간에 생기는 논리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두 교리들을 함께 견지할 때, 이것이 건강한 신앙입니다."

 

김세윤의 위 주장은 견인의 교리를 인정하는 것 같지만 구원에서의 탈락 가능성도 함께 주장하기 때문에 사실상 견인의 교리를 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칭의 이후 성도로서의 삶에 대한 바람직한 지침은 그의 주장처럼 견인과 중도 탈락 가능성을 함께 가르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견지해 온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은혜 구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한 칭의와 성화 개념을 제대로 인식하고 강조하는 데 있는 것이다.

 

4. 결론

 

본 논문은 김세윤이 주장하는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전통적인 개혁주의적 구원론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비판하였다. 필자는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 이해에 크게 세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다.

 

첫째, 김세윤이 칭의를 법정적으로만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개혁주의 관점의 칭의 이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생긴 오해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그가 칭의의 관계적 이해라고 설명하는 내용을 칭의의 적극적 요소로 구분하여 양자 됨의 개념으로 설명해 왔다. 그가 비판하는 것처럼 개혁주의 칭의 개념이 죄의 용서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법정적이냐 실제적이냐라는 서로 배타적인 구분 기준을 괜히 관계적이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혼란을 초래했을 뿐이다.

 

둘째, 김세윤은 칭의와 성화의 구분을 거부하며 이 둘이 사실상 동의어라고 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은혜 구도를 무너뜨린 것은 칭의에 대한 개념이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는 칭의가 거듭날 때에 단회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효과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칭의 개념과 달리 칭의가 신자의 평생에 걸쳐 계속되고 최후의 심판 때에 최종적으로 칭의가 완성된다는 이해를 갖고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칭의가 성화와 별 다를 게 없는 개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는 전통적 개혁주의가 견지해 온 칭의와 성화가 각각 갖고 있는 고유한 구원의 은택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 김세윤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히브리서 104~6절을 알미니안들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무수한 개혁주의 관점의 해석을 잘못된 해석이라 주장한다. 그는 교리적 균형을 이야기하며 성도의 견인 교리도 인정하고 구원에서의 중도 탈락 가능성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주장은 사실상 성도의 견인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본 논문은 최근에 출간된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2013)를 기본으로 하여 그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입장을 분석하고 비판하였다. 김세윤이 칭의와 성화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여 자신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해를 자세하게 제시했기 때문에 그가 갖고 있는 관점이 어떠한지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본 논문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다소 충격적이다. 그가 복음이란 무엇인가(2003)에서도 칭의에 대한 관계적 이해를 주장하긴 했지만 김세윤, 복음이란 무엇인가, 166-172.

 

그 때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그의 이해가 충분히 상세하게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칭의와 성화를 통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자신의 입장을 상세하게 밝혔기 때문에 이제는 그의 구원론에 대한 평가가 충분히 가능해졌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해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구원론의 칭의와 성화 이해와 다르다.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자의 칭의와 성화 개념이 이렇듯 전통적 개혁주의 구원론의 관점에서 떠나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이 매우 유감스럽다. 필자는 칭의와 성화의 주제에 대한 이러한 혼란을 해결할 수 있도록 더 많은 학자들이 더 많은 연구 결과를 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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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관점 비판 (이윤석 2015 개혁논총 35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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