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앙과 개혁교회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진자인
페더럴 비전 비판 I
믿음을 통해 얻은 구원은 율법을 지킴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무리가 있다.개혁신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언약사상을 이야기 하면서....언약은 약속(은혜)과 요구(율법)로 이루어진 ‘조건’이라면서 이미 구원을 체험한 사람은 율법(선행)을 행함으로 생명(구원)을 지속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무리가 있다.이런 사람들은 더 이상 개혁신앙과 개혁교회를 지향하는 사람들로 볼 수 없다.
개혁신앙을 지향한다고 하면서, 화란계 개혁교회의 가르침과 전통을 따라가겠다고 하면서 왜 이런 엉뚱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성경이 말하는 ‘언약’사상을 잘못 이해하고,나아가 ‘칭의’와 ‘성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구원의 핵심적 요소인 ‘칭의’와 ‘성화’에 대한 혼동 및 오해는 초대교회 때부터 많은 문제를 만들어 냈다. 이 문제는 신약교회의 가장 초기 단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신앙의 핵심적인 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속에 침투해 있었던 ‘다른 복음’을 ‘그리스도의 은혜’(갈1:6)와 대비시키고 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2:15-16) 갈라디아 교인들은 구원의 경험을 이미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의 꼬임을 받아 새로운 지위가 율법을 지켜야만 되는 것처럼 생각기 시작했다. 그들은 ‘칭의’와 ‘성화’에 대한 혼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런 문제는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교회들 속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거듭해서 되풀이되고 있다.
서방교회가 중세 가톨릭주의의 어두운 시기 속으로 빠져 들게 되었을 때, 구원에 대한 그 이해는 ‘전가된’(imputed) 은혜와 ‘부여된’(imparted)은혜의 구분을 흐리게 만들어버리는 방식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이 문제는 개신교 안에서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이나 20세기 초반의‘사회복음’속에서처럼 우리의 지위가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는 주장들이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은 이 문제가 산더스(E. P. Sanders)와 라이트(N. T. Wright)가 제시하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 이나, 오번 애비뉴(Auburn Avenue)의 ‘협력적 비전(Federal Vision)’ 신학, 그리고 노먼 쉐퍼드(Norman)의 ‘신 율법주의’ 등의 형태로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다. 이런 논쟁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집약된다.
페더럴 비전 비판 II
믿음을 통해 얻은 구원은 율법을 지킴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이,‘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못하고 뒤섞어 쓰면서 선행을 행함으로 언약백성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초대교회 때부터 현재까지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혼동이 계속되는 이유는 어떤 면에서 보면 인간의 본성 속에 죄의 뿌리가 그만큼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의 속에는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복음은 이런 인식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 중심을 겨냥하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공격하며, 또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선포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사65:6) 이런 사실은 하나님에게 속하지 못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미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실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시는 근거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려 하는 유혹이 압도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두 가지 질문은 목회자들이 답해야 할 갈장 중요한 질문들이다.
칭의의 개념이 너무나 자주 구원과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팔머 로벗슨(O. Palmer Robertson)은 노먼 쉐퍼드(Norman Shepherd)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에 있어서 선행과 칭의의 상관 관계’ 라는 글에 대한 논박에서 동일한 지적을 하고 있다. “쉐퍼드는 구원의 개념을 칭의의 개념과 뒤섞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경이 칭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 정교하고도 특징적인 초점을 놓쳐버리고 이것을 전체로서의 구원에 대한 보다 넓은 가르침 속에 파묻혀버린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해석의 과제는 우리가 성경과 관련하여 가지는 일단의 전제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주해를 거쳐 성경 신학, 역사신학을 통해 마침내는 교의학 또는 조직신학을 통해 정립된다. 오늘날 신학훈련 기관들을 보면 이런 전체적인 순환이 어디선가에서 끊어져 버리고 있다. 그 결과로 신학적 확신과 관련해서는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 개방시켜 버리는 결과를 맞고 있다.
노먼 쉐퍼드(Norman Shepherd)의 신율법주의 사상 및 오번 애비뉴(Auburn Avenue)의 ‘페더럴 비전(Federal Vision)’ 신학을 무분별하게 받아 들여 가르치면서 그의 사상이 개혁교회적이고 언약적이라고 우기는 무리들을 조심해야 한다.
나도 과거에 그런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우리보다 먼저 개혁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들이라서 배우려는 자세로 접근했지만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언약의 요구에 불순종하면 구원을 회수해 간다.”는 주장에 아연실색했다. 한국교회가 견인의 도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며, 언약은 약속과 요구로 이루어진 ‘조건’이기 때문에 이미 구원을 체험한 사람이라도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지속할 수 있다는 주장에 매우 놀랐다.
이런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잘못된 교리이기 때문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나같은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겨주시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나의 삶을 인도하셔서 (하나님 앞에 보잘 것이 없지만) 감사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끝까지 붙드셔서 궁극적으로 영화에 이르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은 조건은 없지만, 이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드립니다.
페더럴 비전 비판III
성경의 가장 기초적인 ‘구원에 관한 도리’ 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이미 얻은 ‘칭의’ 마저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무리가 있다.
개혁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언약론’ 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언약의 중보는 예수그리스도가 아닌 아담이라고 주장하는 무리가 있다.
구원의 두가지 측면인 ‘칭의’와 ‘성화’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하고 뒤죽박죽 뒤섞어서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한 결과이다. 말로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인 세 일치 신조를 받는다고 고백하면서 마음으로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 결과이다.
교회가 서고 넘어짐의 중요한 도리인 ‘칭의’를 ‘성화’와 구분하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은 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순종하지 않으며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며 성도들을 억압한다. 이런 식의 주장은 구원의 초점을 그리스도로부터 사람에게로 옮겨 사람의 순종 여부에 따라 구원이 유지(확정)되는 결과를 만들어 버린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과 -산더스와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 사상, 오번 애비뉴의 ‘협력적 비전(Federal Vision)’ 신학, 그리고 노먼쉐퍼드의 ‘신율법주의’ 등 - 그들의 주장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가르치는 사람들은 아래 글을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아래 글은 ‘진리의 깃발’ 제79호에 실린 "성화, 그러나 홀로는 아님( Mark G. Johnston/최승락 옮김)"의 일부입니다.
<칭의>와 <성화>는 유사하나 차이도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77문> 칭의와 성화는 어떤 점에서 서로 다른가?
[답] 성화는 칭의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지만, 이 둘이 서로 다른 점은, 먼저 칭의 속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켜 주시며, 성화 속에서는 그의 영이 은혜를 주입시켜 주시고 또한 이것의 시행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신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칭의를 통해서는 죄의 용서를 받지만, 성화를 통해서는 죄가 정복된다. 칭의는 믿는 자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로부터 이 생 가운데서 완전하게 그것을 주며 다시는 그들이 정죄 가운데 떨어지지 않게 한다. 반면 성화는 모든 사람에게 다 동일하지 않고, 누구에게서나 이 생 가운데 완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완전을 향하여 계속 자라간다.
웨스트민스터 문서들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칭의와 성화의 정교한 비교는 칭의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인 반면 성화는 그 은혜의 역사라는 데에 그 강조점이 있다.
칭의는 영원한 법정에서 단번의 선포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과거에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의 바탕 위에서, 믿는 신자들 속에 오늘 현재 적용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 그 사람의 도덕적 조건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의롭게 되어졌으나 여전히 죄인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여전히 유혹과 실패에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성화의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보시기에 원리적으로 의로운 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실질적으로 의로운 자들이 되도록 역사하신다.
19세기의 후기 청교도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라일(J. C. Ryle)은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또 다른 심도 있는 고찰을 남겨주고 있다. 그의 저서 ‘거룩’에 보면 그는 칭의와 성화의 차이점뿐만 아니라 그 유사점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는 다섯 가지 유사점을 지적하고 있다. 1) 칭의와 성화는 공히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2) 양자는 공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언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 3) 양자는 공히 동일한 사람들 속에 공존한다. 그리고 4) 양자는 공히 같은 시점에서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5) 양자는 구원을 위하여 다 같이 필요하다.
칭의와 성화의 차이점을 라일은 아브라켈의 정리 위에 다음 세 가지를 더하여 정리한다. 1) 우리가 칭의에서 받는 의는 우리의 것이 아닌데 비해 성화 가운데 나타나는 의는 우리의 것이라는 점, 2) 칭의에는 우리의 행위가 설 자리가 없지만 성화에는 우리의 행위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3) 칭의는 완성되고 종결된 일인데 비해 성화는 불완전하고 우리가 하늘에 이를 때까지 결코 완전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구원하는 은혜의 두 가지 측면 곧 칭의와 성화의 구별선이 뭉개져 버리게 될 때 이로 말미암아 침해 받는 것은 구원 그 자체이다. 마틴 루터가 말하는 것처럼 서고 넘어지는 교회의 표지인 칭의에 대한 명확한 시각을 우리가 잃어버리게 될 때, 그래서 칭의를 성화와 혼동하게 될 때, 믿음의 초점은 그리스도로부터 사람에게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이미 역사적으로 가톨릭주의 안에 나타난 바 있지만 보다 최근에는 신 율법주의 안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진정으로 더 나은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다만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얻는다는 사실에 우선권을 두는 일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junam67/150159385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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