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ical Theology/Biographies

정암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 이승구 교수

Bavinck Byeon 2015. 5. 26. 17:23

정암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1)

- 초기 삶의 모습(평양 신학교 다닐 때까지의 삶)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이 글은 안명준 교수의 편집으로 나올 <한국의 칼빈주의자들>(킹덤북스, 근간)에 실릴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내용으로 여기서는 본문만을 소개합니다. 각주를 비롯한 자세한 내용 전체는 나중에 나올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 필자 주 

 

 

정암 박윤선 목사님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그의 생애를 간단히 생각해 보고(I), 그의 사상을 소개한(II) 후에 그의 실천적 가르침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III). 이것은 정암에 대한 오해가 많은 상황에서 그에 대한 바른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한 작업의 한 부분이다.

 

I. 정암의 생애

 

19051211(음력)에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 장평동 해변가에 있는 351번지에서 출생한 정암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평북 철산 해변의 작은 마을" 안에서 살던 그의 가정은 "부모님(부친 박근수(朴根秀) 모친 김진신(金眞信))과 형님 박윤석, 그리고 위로 누님이 두 사람, 아래로 여동생 한 사람으로 구성된 농부의 가정이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여 이웃을 돕고 가족을 잘 보살피는 아버지는 선량한 분이셨으나 기독교를 믿지는 않으셨고, 정암 자신도 불신이었다.

 

 

▲ 숭실전문대 재학 시절의 박윤선 목사. ⓒ이승구

 

정암은 "9살 때 (마을 부호의 사랑방에 있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근면히 공부하여 사서삼경은 (주해까지) 거의 다 암송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19세 되던 해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정암의 고향에서 30km 정도 떨어져 있는 선천군 국산면 장공동에 있던 (1885년에 "김도순이라는 부자가 사립으로 설립한 일종의 기독교 학교") 대동소학교 6학년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공부하고, 최우등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이 학교는 "아침마다 예배"를 하는 학교였다.

 

그러나 그때는 "선생님들의 설교를 듣기는 들어도 사실상 믿음이 무엇인지 몰랐다"고 하셨다. 이는 대동학교에 가기 전 수년 동안 15(6km)를 걸어서 "자발적으로" 출석한 동문동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정암의 교회 출석은 그의 10대 중반에서 말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김영재 교수는 정암이 17세 때에 동문동교회에 출석하였다고 하고 있다. 1921년이 그 시작이라고 제시한 자료도 있다. 또한 이 학교 다니던 중 18세에 당시 15세 되던 김예련과의 혼인을 하였다고 하였다(192211).

 

19233월 최우등으로 대동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4월에 (남강 이승훈이 1907년에 세운) 정주 오산학교 2학년에 입학하였고, 그 학기 말에 이구하 교장 배척 데모가 일어나 방학식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쉬다가, 1924년 봄에 보결 입학 시험을 치루고 선천의 신성(信聖)중학교 3학년에 들어갔다고 한다. "신성중학교는 평북 선천에 설립된 기독교 학교로서 19064월 미북장로교 선교부와 함께 [위트모어(Norman C. Whitemore) 선교사의 조사(助士)였다가 1907년에 처음으로 목사가 된 7명 중 하나였던] 양전백(1870~1933), 안준, 김병농, 김석창 등이 설립한 중고등 과정의 남학교였다."

 

신성학교에서도 우유 배달, 김매기, 변소 청소, 소 먹이기, 그리고 선천 YMCA에서 경영하는 '무산 아동 교육' 교사 일을 하면서, 점심시간까지 아껴 가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학교에서 날마다 예배할 때 "예수를 잘 믿어 보려고 힘썼다"고 한다. 특히 "설교를 듣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이때 정암은 주일마다 선천북교회에 출석하였는데, 그때 담임목사님이 신성중학교 설립자의 한 분이었던 양전백 목사였다. 또한 방학이 되면 학우들과 함께 전도대를 조직하여 여러 지방으로 가서 전도 강연을 하였다고 한다.

 

이즈음 첫째 자녀인 박경조가 태어나 자라다가 심히 앓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정암은 이때의 자신을 평하면서 "공부에는 열중했으나 가사를 돌보지 못했다는 느낌이 언제나 마음에 떠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그 후에 정암은 아내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어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밤에 선천으로 데려와 기초적인 가르침을 주어 선천읍 보성여학교에 입학시켰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김영재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박윤선은 늦게야 공부를 시작했으나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참으로 즐겼으므로 아내와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공부와 일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알고 있으나 어려운 가운데서도 아내를 공부하게 한 일은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그의 인품을 엿보게 하는 그런 대목이다."

 

정암의 딸도 이에 대해서는 "이 일은 짧은 어머니의 생애를 위로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고 쓰고 있다.

 

그 뒤 정암은 1927(23) 4월에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19313월에 졸업하고, 그 부인도 보성여학교에서 4년을 공부하고 졸업했다. 이 숭실전문 시절인 1931, 정암의 부친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숭실전문학교에 다닐 때에 이유택, 송영길, 김철훈(이상 후에 목사가 되었으나 공산당 박해로 순교했다 함), 박기환, 방지일, 김진홍 등과 함께 모란봉 뒤 숲속에서 소위 "조기(早起) 부대"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새벽 기도 운동을 하였고, 이때도 학생회 종교부장을 하던 정암은 방학 때마다 전도대원으로 만주나 고향인 철산 지방에도 가서(192971일부터 19) 전도 강연을 하였다고 한다.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1931년에 정암은 "자신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드려야겠다고 결심하고" 평양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그는 "성경 해석에 취미를 가지고 방학 때는 주석을 몇 권 빌려 가지고 시골에 가서 성경을 연구하곤 했다"고 하며 "신약 원어와 구약 원어에 주력했고 독일어는 자습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당시 신학교 교장이던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의 나부열(羅富悅, Stacy L. Roberts, 1881~1946)에게 배운 것을 강조하면서 그는 많이 가르치면서도 언제나 부드러운 말로 가르쳤기에 학생들에게 많은 감화를 끼쳤다고 하며, "그는 자기가 말한 대로 언제나 실천에 옮기는 진실한 지도자였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맥코믹신학교 출신의 마포삼렬(Samuel A. Maffett, 1964-1939),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요 할리팍스장로교신학교(Presbyterian College in Halifax) 출신의 업아력(業雅力, Alexander Francis Robb, 1872-1935), 남장로교 선교사인 이눌서(李訥瑞, William D. Reynolds, 1867-1951) 등의 평양신학교 교수진은 "믿음과 덕의 감화로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또한 한국인 교수들인 신약학의 남궁혁 박사에 대해서는 "무게 있는 인격자"라고 하셨고, 구약학의 이성휘 박사는 "겸손한 목회자로 서문 밖 교회를 주로 도우셨다"고 하시고, 박형룡 박사에 대해서는 "인격적 감화가 큰 동시에 신학자로서 인상 깊은 교수"라고 하시면서, 박형룡 박사는 "학구적으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유익을 많이 주었다"고 하시면서 "교수직에도 능하셨지만 진리를 수호하는 데 많은 공적을 남기셨다"고 했다. 또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치던 독일인이었지만 호주 장로교 선교사인 왕길지(王吉志, George O. Engel, 1868~1939) 교수의 가르침과 함께 공부하던 10여 명의 학생들을 언급한다.

 

평양신학교에 다닐 때에도 방지일, 김진홍 제씨와 함께 <겨자씨>라는 잡지를 내었고, 숭실중학교 학생 방문을 위한 사감도 하고, 주일에는 모란봉 뒤에 가현리에 있는 가현교회에서 시무하였다고 한다. 그때를 돌이켜 보면서 정암은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그때의 열심은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열렬했던 것 같다. 나의 생활 형편은 역시 어려웠지만, 그때도 기도 생활에 열중했기 때문에 생활 문제를 염려하지 않고 기쁨으로 지낼 수 있었다." 평양신학교 2학년 때 맏아들 춘호 씨가 태어나고(1932), 2년 후에 맏딸 춘자 씨가 태어났다고(1934) 한다. (계속)

 

 

정암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2)

- 미국 유학과 만주 시절까지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이 글은 안명준 교수의 편집으로 나올 <한국의 칼빈주의자들>(킹덤북스, 근간)에 실릴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내용으로 여기서는 본문만을 소개합니다. 각주를 비롯한 자세한 내용 전체는 나중에 나올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정암 박윤선 목사님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그의 생애를 간단히 생각해 보고(I), 그의 사상을 소개한(II) 후에 그의 실천적 가르침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III). 이것은 정암에 대한 오해가 많은 상황에서 그에 대한 바른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한 작업의 한 부분입니다. - 필자 주

 

 

지난번에 이어서 정암의 생애에 대한 두 번째 글을 올립니다. 정암이 언제부터 확실하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느냐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10대 말에 출석하기 시작한 동문동교회에서는 빠짐없이 그저 출석했다고 하셨고, 신성학교 시절에는 학교에서 날마다 예배할 때 "예수를 잘 믿어 보려고 힘썼다"고 했고, 특히 "설교를 듣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고 하셨으니, 이때 확실히 구원을 생각하며 확신을 가진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때 정암은 주일마다 선천북교회에 출석하였는데, 그때 담임목사님이 신성중학교 설립자의 한 분이었던 양전백 목사였습니다. 정암은 자신에 대해서 잘 표현하지 않는데 이 모든 것이 다 성령님께서 주권적으로 감동, 감화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정암은 19343월에 평양신학교 29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가족은 고향 철산 장평리 초가삼간을 얻어 머물게 하고", "성경 원어를 연구하려고 세계적 권위자인 메이첸 박사를 찾아가"기 위해 193484일에 한국을 떠나 "일본 고베(神戶)에서 지지부마루라는 배를 타고" 27일간 여행하는 중 요한계시록을 외우고,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여 9월 학기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입학하여 특별 학생으로 1935년 봄 학기까지 공부하였다. 이 기간 동안 웨스트민스터는 200달러의 장학금 지급하고, 수업료도 받지 않고 기숙사 방도 제공하였다고 한다. 특별 학생으로 공부하던 1934년 가을에는 기초 히브리어, 고급 히브리어, 헬라어, 복음서의 역사를 공부하였고, 25년 봄에는 히브리어 강독, 본문 비평, 요한 문서, 예수의 탄생, 로마서 4-11, 칼빈의 신학을 공부했다.

 

그 다음 해인 1935년 가을부터 1936년 봄 학기까지 신약 전공의 대학원(Th.M.) 학생으로 등록하여, 창세기 1-12, 아람어, 공동서신, 바울과 그의 환경, 요한계시록, 성경적 종말론, 히브리어 연구, 1936년 봄에는 아람어, 누가복음, 히브리서, 위기 신학, 그리고 초급 아랍어를 공부하고, 메이첸 박사의 지도를 받아 공부를 마쳤다. 이때 메이첸 휘하에서 그와 같이 공부한 사람이 한국 선교사 한위렴(William B. Hunt) 선교사의 아들로 평북 정주 출신의 "가장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라고 불리는 한부선(Bruce F. Hunt, 1903-1992)이다. 한부선은 휘튼대학교와 럿거스대학교를 마치고 프린스턴신학교에서 1924년에 입학하여 1928년에 졸업하고, 그해인 1928년에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청주 지역에서 사역하다가 안식년을 얻어 1935년에 웨스트민스터에서 신학 연구를 하였기 때문이다. 정암은 웨스트민스터에서 "진정한 기독교"를 발견하였고, "칼빈주의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암 자신은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웨스트민스터에서 나는 칼빈주의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나는 이제 미래의 한국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깨닫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교육받았던 평양신학교는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이기는 하였지만, 선명한 칼빈주의를 전하지는 못하였다"고 한 바 있다. 이에 근거해서 정암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허순길은 "그가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와 그 심오함을 깨닫게 된 것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공부했을 때였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정암 자신도 자신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칼빈주의 신학 지식을 재정비하게 된 것이 성경 주석 사업에 실제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1936(31) 8월에 귀국하여 표준 주석 작업을 하는 대한예수교장로교 총회 종교 교육부 편집실 근무와 평양신학교 원어 강사, 고등성경학교 시간 강사 등 여러 일을 하다가, 아마도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의 신학교가 1938년에 한 학기 마치고 자진 폐교하여 일자리가 없어졌고, 더 중요한 이유로는 아마도 신사참배를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원어와 신학을 더 알기 위해" 1938년 가을에 다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가서 1940년까지 개인적인 연구를 하였는데 이때 특히 원어와 반틸의 변증학에 관심을 가지고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정암이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인 19389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하다는 안타까운 결정이 내려졌다. 정암의 두 번째 미국 유학 시기는, 김영재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두 번째 웨스트민스터 시기에 정암은, 1938년 가을 학기에는 시리아어, 연구 과목으로 히브리어, 아랍어, 성경 아람어를 하였고, 데살로니가전후서 논문을 썼다고 하고, 1939년 봄 학기에는 연구로 히브리어, 아랍어, 시리아어, 골로새서를 하고, 논문으로 변증학(위기 신학)8시간 한 것으로 나온다, 1939~40년의 가을 학기에는 고급 시리아어, 교회사, 교리적 설교를 듣고, 변증학 논문으로 4시간 인정받은 것으로 나온다. 19394월에 나온 미국 교계지에 실린 그의 글을 보면 그가 반틸과 그의 변증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잘 나타난다.

 

[C. Van Til]는 기독교 유신론을 철저하게 철학적으로 변증함으로 (칸트와 플라톤의 체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체계가 의지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주었다. 반틸 박사야말로 현대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터뜨린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 이 위대한 신학자는 우리가 어떻게 모든 비기독교적 공격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변호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 사람이다. 그의 체계는 단순한 인간의 사변에 의한 것이 아니고 성경에 제시된 방어의 체계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편이다. 주께서 한국에서 그의 진리를 방어하는 데 이 방법을 사용하시기를!

 

이와 같이 성경 주석을 잘할 수 있도록 어학과 반틸의 변증학을 잘 공부하고서 다시 귀국할 때인 193910월에 정암은 동경에서 오랜만에 가족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수개월간 사설 언어 강습소에서 독일어를 공부하다가,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어 있었기에 만주에 있는 한국 교포들이 신학교를 세우고자 하던 뜻을 따라 만주에 가서 19403월에 만주 한인예수교장로회 신경(新京)노회에서 목사로 임직하여 만주 오가황교회에서 목회했다.

 

그리고 베자상교회도 시무했다고 한다. 조금 후에 봉천 북능(北凌) 지방에 세워진 만주신학원(현 동북신학원)에서 신약학 교수로 사역하였다. 후에 박형룡 박사님도 신사참배 문제로 동경에 망명 중 초빙받고 일본 해로로 이 신학교에 와서 가르치셨다. 당시 이 학교는 박형룡 박사와 정암이 신사참배하지 않도록 하면서 교장인 정상인(鄭尙仁) 목사를 비롯해 다른 모든 이들과 학생들이 다 신사참배를 하였다고 한다. 이때 정암도 한번 신사참배하였다고 1950년 어떤 목회자 수련회에서와 합신 5회 졸업생 최미희와의 인터뷰에서 정암 자신이 말하였다고 한다. "그는 신사참배에 참여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번민"하였다고 한다. 정암은 "신사참배와 일본기에 대한 경례 문제로 고민하다가 드디어 사임하고", 봉천에서 80km 떨어진 공업도시 안산(鞍山)으로 가서 해방 직전 2년 동안은 계시록 주석 쓰는 일에만 집중하셨다고 한다. (계속)

 

 

정암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3)

- 부산 고려신학교 시절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이 글은 안명준 교수의 편집으로 나올 <한국의 칼빈주의자들>(킹덤북스, 근간)에 실릴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내용으로 여기서는 본문만을 소개합니다. 각주를 비롯한 자세한 내용 전체는 나중에 나올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정암 박윤선 목사님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그의 생애를 간단히 생각해 보고(I), 그의 사상을 소개한(II) 후에 그의 실천적 가르침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III). 이것은 정암에 대한 오해가 많은 상황에서 그에 대한 바른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한 작업의 한 부분입니다. - 필자 주

 

 

지난번에는 만주에서 목회하고, 가르치고, 주석 쓰는 시절의 이야기까지 하였다. 이 어려운 시절이 지나고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해방을 맞아, 정암은 1945827일에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 철산리로 돌아왔다." 이곳에 있던 6개월 동안도 정암은 장평교회를 목회했다고 한다. 6개월 후인 19462월에 당시 장경재 전도사(1918~2000)에게 장평교회를 부탁하고 가족을 데리고 월남하여, 31일에 서울에 와서 이태원의 한 적산 가옥을 빌려 수개월 머물다가 출옥 성도인 한상동 목사(1901~1976)께서 4월에 방문하여 제시한 평양신학교 전통을 잇는 신학교를 세우자는 뜻에 동의하게 된다.

 

진해 신학 강좌

 

그리하여 정암은 5월에 경남 부산에 갔다가 진해로 옮겨 예전에 일본 해군 수련원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강주선 목사가 빌려 사용하던 진해교회 예배당에서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께서 주동이 되어 운영해 나가던 소위 진해 신학 강좌를 3개월 동안 열게 되었다. 정암은 진해 경화동에 있는 경화동 교회에서 설교 목사로 봉사하면서 그리했다. 이때 이 신학 강의에 63명이 등록하여 공부하였다고 한다.

 

고려신학교 설립

 

그 해 917일에 부산에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어, 당시 부산진 일신여학교(지금의 금성중학교) 교실을 빌려 수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본래는 박형룡 교수님을 교장으로 모시고 와서 개교하려 하였으나 이를 위해 봉천신학원 학생이었던 남영환(南永煥) 전도사가 모시러 가는 것이 38선에서 군인에게 발각되어 돌아오게 되자 우선 정암을 학장 서리로 하여 신학교를 열기로 했다고 한다. 당시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서도 정암이 썼다고 한다. 그런 뜻에서 "어떤 점에서 그가 고려신학교의 진정한 설립자였고, 그의 신학입교의 의지가 고려신학교를 지탱해 가는 힘이었다"는 이상규 교수의 말은 정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196010월까지 정암은 부산 고려신학교 교수, 교장 서리와 2대 교장을 역임한다.

 

고려신학교와 박형룡 박사

 

194710월에 송상석(宋相錫) 목사가 박형룡 박사를 만주로부터 모셔와 부산에 도착하여 고려신학교 교장직에 부임하였고(1014일 노진현 목사가 시무하던 부산중앙교회당), 이때 조선신학교에서 성명서를 냈던 51인 학생들 가운데서 34명이 고려신학교에 합류하여 학생 수가 120명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전국 교회와 총회의 인준을 받는 신학교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박형룡 박사는 반년 후인 19484월에 자진 사임하고, 517일에 상경하여 6월에 남산 조선신궁 터에서 '장로회신학교'를 시작하게 된다. 이는 "194863일에 109명의 편입생으로 개교하였다"고 한다. 후에 1951년에 다시 세워진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195392일 취임하면서 박형룡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한국교회 신학의 수립이란 결코 우리가 어떤 신학 체계를 창작함이 아니라, 사도적 전통의 바른 신앙을 그대로 보수하는 신학, 우리 교회가 70년 전에 창립되던 당시에 받은 그 신학을 우리 교회의 영구한 소유로 확보함을 이름이다.

 

고난스러운 고려신학교 시절

 

한편 한상동 목사가 19467월에 초량교회의 청빙을 받아 사역하게 되자 194735일에는 초량교회 부속 건물로, 또 다른 교회 건물로, 그리고 415일에 다시 광복동의 적산 가옥을 확보하여 옮겨 간 고려신학교는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서 초기에 홀로 거의 모든 과목을 가르치며 (박형룡 박사가 떠난) 19485월부터는 2대 교장으로도 섬긴 정암과 19461028일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군정 군목이었던 정통장로교회의 목사인 John Betzold의 소개로 한상동 목사를 만나고 신학교에서 가르칠 것을 부탁받고 허락한 선교사 한부선, 그리고 설립자인 한상동 목사, 그의 동생 한명동 목사 등의 노력으로 점점 공고한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당시 어려운 형편의 단면을 한부선 선교사가 선교부 총무에게 보낸 다음 같은 편지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박윤선과 그의 일곱 식구는 방 두 개 있는 작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이 아내는 이웃으로 물을 길러 가야만 하였고 이 때문에 구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비가 오면 그 집은 새서 부엌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습니다. 박윤선은 매일 신학책에 코를 박고 살림에는 신경을 전혀 쓰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서 걱정을 해 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한 목사가 그에게 자기 집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목사 내외는 방 하나에 살면서 먹고 자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화란 자유대학교 유학과 사모님의 소천

 

그러다 정암은 "여행 경비를 제외한 모든 재정 지원을 얻어" 1953112일에 화란 자유대학교에 가서 19543월까지 신약학을 연구할 수 있었다. 이 기간 중 정암이 사모님께 보낸 편지가 <파숫군> 19543월호에 게재되어 있어 당시 정황의 일부를 알 수 있다. 그 투와 내용에 대해서 박혜련은 사모님과 가족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정암의 의도를 오해하면서 섭섭한 마음을 내비치고 있다. "편지를 너무 기다리지 마시오. 무소식이 희소식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편지를 종종하시오"와 같은 말들이 그런 오해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 뒤에 "아침마다 두어 시간씩 교회와 가정을 위해 기도합니다"는 말도 잘 보면 어떠했을까 생각된다.

 

또한 "나를 위해서는 기도만 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마시오. 주님이 허락하시면 돌아갑니다. 성령 충만히 받기 전에는 안 돌아갑니다. 성령 충만히 받지 못하면 교회에 나서지 않는 것이 오히려 유익합니다"는 말도 성령이 화란에만 있다는 표현이 아니고, 공부하는 과정도 성령과 교제하는 것이라는 정암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시는 것이 가족을 만나 보는 것보다 좋습니다. 당신도 나를 만날 날을 기다리지 마시오. 하나님만 모시고 사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시고 길이요 생명입니다. 나를 위해 기도할 것은 성령 충만히 받아 돌아가는 것이오" 같은 말도 하나님 중심의 삶을 표현한 말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1954318일에 일어난 사모님의 교통사고 소식을 전보로 전달받고, 떠나 왔으나 결국, 320일 오전 11시에 "고려신학교 이사회 중심으로 신학교장으로" 진행한 장례식 후인 41일에 부산에 도착한다(정암 48세 때). 귀국하여 먼저 미 해병사령부에 편지하여 아내를 치어 죽게 한 트럭 운전병을 선처해 주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곧 바로 42일부터 고려신학교 경건회 인도와 강의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 짧은 화란 유학 기간에 대해서 정암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화란 유학 기간은 길지 못했고,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때의 연구 결과는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화란 유학이 아니었다면 신, 구약 주석 저술에 있어서 진리를 깨닫는 데 부족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사실 간하배 교수는 정암이 "화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글을 소개하고 인용한 최초의 한국인"이라고 했다.

 

페이스신학교와의 관계

 

또한 1954ICCC 2차 세계 대회에 참여했다가, 9월 페이스신학교가 개강 예배를 할 때 칼 메킨타이어의 주선으로 한상동 목사와 함께 명예신학박사 학위(D.D.)를 받았다. 그리고 10월에 부산 삼일교회에서 이화주 전도사와 재혼하여 (초혼의 32녀에 이어) 21녀를 두게 된다.

 

부산에 있는 동안 신학교 강의를 하면서 계속해서 성경 주석을 써서 요한계시록(1949), 공관복음(1953), 로마서(1954), 바울서신(1955), 히브리서, 공동서신(1956), 시편(1957), 요한복음 (1958) 주석을 출간한다.

 

고신 사임

 

19607월 하순 어느 주일에 발생한 그 유명한 서아도(Arthur Boyce Spooner) 선교사 환송 예배 건으로 주일 성수 문제로 논쟁을 하고 924일에 결국 고신을 그만두었다. (계속)

 

 

정암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4)

- 총신시절과 은퇴 이후, 그리고 합동신학원 시절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이 글은 안명준 교수의 편집으로 나올 <한국의 칼빈주의자들>(킹덤북스, 근간)에 실릴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내용으로 여기서는 본문만을 소개합니다. 각주를 비롯한 자세한 내용 전체는 나중에 나올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정암 박윤선 목사님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그의 생애를 간단히 생각해 보고(I), 그의 사상을 소개한(II) 후에 그의 실천적 가르침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III). 이것은 정암에 대한 오해가 많은 상황에서 그에 대한 바른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한 작업의 한 부분입니다. - 필자 주

 

 

동산교회와 개혁신학교

 

19607월 하순 어느 주일에 발생한 그 유명한 서아도(Arthur Boyce Spooner) 선교사 환송 예배 건으로 주일 성수 문제로 논쟁을 하고 924일에 결국 고신을 그만두었다. 이재만 목사가 있는 동래 장전동의 작은 초가집을 전세 내어 살다가, 196125일부터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서 얼마 전부터 모이기 시작한 동산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해 19644월까지 시무한다. 동산교회에 대해서 정암은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이 교회는 나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위로와 사랑의 원천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내가 그 교회 개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자신이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고신을 그만두고 있을 때인 그 어려운 시기에 청빙받아 목회하던 마음이 잘 나타나는 회고라고 여겨진다. 이 기간 중에도 정암은 내수동 교회에서 시작한 칼빈성경연구원, 장소를 동산교회 예배당으로 옮겨 개혁신학교로 명명된 신학교도 하였다. 그러나 196211월에는 시의 폐쇄 명령이 내려졌고, 학생들이 학교 운영을 말하는 것 등이 문제되었고, 마침 19621122일에 정암이 총회신학교 교수로 부름을 받아 이 개혁신학교는 자연히 사라지게 된다.

 

총회신학교 교수 시절

 

그리하여 19633월부터 197411월까지 정암은 총신에서 교수, 신학대학원장(1964) 7대 교장(1964~), 총신 부산 분교 교장(19653~1966년 말)과 대학원장(1969~)을 역임한다. 정암은 이 기간 동안 "한국교회의 기둥 같은 신학자 박형룡 박사와 함께 가르친 일""언제나 불타는 가슴으로 학생들에게 칼빈주의 신학"을 주고자 한 것을 특별히 언급한다. 이런 점을 주목한 박용규 교수는 "총신이 더 한층 개혁주의를 선명하게 표방하기 시작한 것은 박윤선이 총신 교수로 보임한 이후 나타난 뚜렷한 현상이었다"고 역사적 판단을 내려 제시한 바 있다.

 

이 기간 동안 정암은 영도에 있던 총신 부산 분교 교장도 하면서 수정동에 있는 부산 성산 교회 목회도 하였고(19653~19672), 부산 분교가 1966년 문을 닫자 다시 총신을 섬기기 위해 서울로 와서는(19673) 가장 바쁜 교수 생활을 하면서도 상도동에 한성 교회를 개척해 목회하는 일도 겸한다(19687~1973).

 

총신 교수로 있던 기간 동안에도 계속해서 주석 집필과 출간에 힘써 사도행전(1961), 소선지서(1962), 고린도전후서(1962), 이사야서(1964), 예레미아서(1965), 에스겔, 다니엘서(1967), 창세기, 출애굽기(1968),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1971), 잠언(1972), 욥기, 전도서, 아가서(1974)를 출간한다. 담석증으로 고생하던 1971년에는 성경신학책도 내었다. 정암의 딸은 그의 집필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아버지는 한번 하겠다고 하면 해내는 성품이었기에 늘 주석 작업에만 몰두하셨다. 신학교 강의가 없는 날은 하루 종일 책상에만 앉아 계셨다." 그의 주석 작업은 이런 노력의 결과였던 것이다.

 

총신 은퇴 이후와 다시 총신에서

 

총신 교수 은퇴(197411, 70) 후 도미하여 (이미 19737월에 가족들이 이민하여 자리 잡고 있던) 로스엔젤레스에서 가족들과 함께 37개월 보내면서, 룻기(1976),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1978), 에스라, 느헤미야서, 에스더서(1979)을 내고, 복잡한 총신 상황 가운데서 다시 초빙받아 19772학기에 초청 교수로 봉직하면서 "동산교회 강단을" 섬기다가, 총신 상황이 더 악화되자 19793월에 다시 총신대학교 대학원장에 취임하고(19793~198011월까지 시무), 주석 완간 감사 예배를 총신대학교 신관 강당에서 하나님께 드린다(1979109). 그 얼마 전인 197993일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개교 50주년을 기념하면서 한부선 선교사를 비롯하여 "전 세계 각국에서 복음 전파에 공헌하고 훈련된 봉사의 기술과 신실한 삶의 모범을 보인" 네 분에게 명예신학박사(D.D.)를 수여하였는데, 간하배 교수 등의 노력으로 그중의 하나를 정암이 받게 된다.

 

총신 상황은 더 악화되어 총신에서는 정암을 다시 모셔 와서 학내 문제를 해결하고자 1980421일부터는 학장 서리를 부탁하게 된다. 그러나 정암이 총신에 와 있어도 총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당시 교권의 대표자인 이영수 목사에게 정암이 한국교회 전체를 위하여 교회 정치로부터 물러나도록 호소해도 듣지 않고, 오히려 위협하는 말로 대응할 뿐 아니라 행정에는 무능한 인물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자 정암은 학장 서리직을 사임하였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서 홍치모 교수는 "정암과 같은 신학자를 모시기에는 한국교회와 신학교는 너무 혼탁하고 세속적이고 정치적이다. 말한 바 있다. 더구나 19802학기 개강 예배를 교수진과 상의하지 않고 이사들이 행하고, 107일에는 학적부를 교수들과 상관없이 반출하고, 1024일에 5명의 학생들을 제명하자, 이러한 상황에서는 도저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신복윤, 윤영탁, 김명혁, 박형용 교수는 19801023일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1027일 경건회가 마친 후에 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합동신학원과 정암

 

그러자 신대원 학생들이 19801028일 남서울교회당에 모이기 시작하여 학생들의 요청으로 네 교수님들과 함께 1111일 오후 2시에 남서울교회 예배당에서 개교 예배를 드림으로 합동신학원이 설립된다. 정암은 합신의 초대 원장으로 청빙받고, 1118일에 취임하여(76) 사역하시다가, 1988630일에(84) 소천하시기까지 학생들에게 강의하시면서 명예원장으로 수고하였다. 정암의 아들인 박성은과의 인터뷰에 근거해서 서영일은 "합동신학교는 틀림없이 박윤선이 한국교회에 남겨 놓은 가장 중요한 유산이다. 그리고 이 학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웨스트민스터의 모범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에도 정암은 198111월부터 장안교회를 목회했고, 19872월까지 목회하다가 1987419일에 화평교회와 병합하고, 1987427일에 성역 50주년 감사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 기간, 즉 소위 합신 기간 동안에 그는 장로교 정신을 충분히 반영하여 만든 합신 교단 헌법의 의미를 밝히고 그 정신을 분명히 하는 <헌법 주석>을 쓰고(198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주석>을 쓰고(1989년 유작),<성경과 나의 생애>(유작, 1999)를 썼다. 또한 그의 사후 부산 고신 시절부터 그가 했던 그의 여러 강의안 등에 기초한 개혁주의 교의학2003년에 출간되었다.

 

정암 생애에 대한 평가들

 

정암의 생애와 신학을 깊이 생각하면서 그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쓴 서영일 박사는 다음 같이 말한다:

 

그분은 완전하지 않았다. 그의 가족을 돌보는 데 게으른 것을, 그것이 더 고상한 목적을 위하여 그렇게 했다고 해서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는 강철이 아니었다. 압력에 굴복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룟 유다가 아니라 베드로였다. 약점을 솔직하게 시인하는 진솔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평생 동안 매일 몇 시간씩을 무릎을 꿇고 보냈다. 남들이 그를 해하려 할 때에도 비방하거나 중상하지 않았다.

 

젊은이들에게도 겸손하고 온유하였다. 지혜와 책략이 부족한 적은 있었어도 원리를 꺾으려 한 적은 없었다. 무엇보자도 하나님께 대한 깊고도 진지한 사랑을 품고 있었다. 그가 쓴 어떤 책보다도 그의 삶이 이를 웅변으로 보여 준다.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쓰는 필자에게도 그의 사랑과 경외심이 전율로 다가온다. 경건과 학문이 어우러진 분이여! 약한 데서 더욱 빛을 발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 분이여!

 

서영일 박사의 부탁으로 이 논문을 우리말로 번역한 정동민 교수도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을 통하여 박윤선이라는 한 사람을 만났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 은혜에 감격하고 그에 맞게 살고 가르치려 한 연약한 사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강하게 된 한 사람을 말이다. 이른바 '한국교회'를 구성하고 형성해 준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살고 이렇게 죽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됨으로, 그것들이 나의 삶에서도 체현되고 있음을 느끼고 감사할 것이다. 더불어 수치심이 뼈 속에 깊이 스며들기도 하였을 것이다." 우리들이 정말 조상들의 신앙과 삶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수치심이라고 하면서 장동민 박사는 아주 고전적인 말을 인용하고 있다. "! 수치심을 모르는 세대여!" 아마 이것이 정암의 삶에 대한 오늘날의 논쟁에 대해 매우 적절한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작금의 이 논의에 대해서 김영재 교수님이 미리 아주 정확하게 말한 바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정암에 대한 평전에서 이렇게 말했었기 때문이다.

 

박윤선이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그의 자녀들이 듣는다면 아버지에 대하여 어쩌면 더 서운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한 나머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는 사실과 그것이 박윤선의 삶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으며 그가 고민했던 부분이었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하는 자녀들의 당연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박윤선이 자녀들과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채로 보낸 그 많은 세월을 되돌릴 수 없듯이, 서로가 사랑을 나누지 못함으로 채우지 못한 공백을 달리 메울 길이 없었다.

 

<목사의 딸>이라는 책으로 있게 된 작금의 논의는 바로 이런 서운한 자녀들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정암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5)

- 정암의 개혁파 사상과 강조점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이 글은 안명준 교수의 편집으로 나올 <한국의 칼빈주의자들>(킹덤북스, 근간)에 실릴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내용으로 여기서는 본문만을 소개합니다. 각주를 비롯한 자세한 내용 전체는 나중에 나올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정암 박윤선 목사님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그의 생애를 간단히 생각해 보고(I), 그의 사상을 소개한(II) 후에 그의 실천적 가르침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III). 이것은 정암에 대한 오해가 많은 상황에서 그에 대한 바른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한 작업의 한 부분입니다. - 필자 주 

 

 

II. 정암의 개혁 사상

 

정암의 사상이 개혁주의적이라는 것은 아주 자명한 것이다. 특히 다음의 강조를 보라.

 

"박윤선 박사는 철저한 개혁주의적 신학자이다."

"이 개혁주의 신학 사상은 그의 몸에 깊이 배여 있어서 설교와 저술과 생활과 그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물씬 풍겨 나오곤 하였다."

"박 목사님은 한국교회 안에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이며 개혁주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히 보여 주신 분이었다."

"박윤선 박사의 신학 사상은 개혁주의이며 그것은 그의 저서와 주석집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그것은 이미 성경에 명확히 나타난 신학이며, 오랜 전통이 잘 수립한 신학이다. 그러므로 오병세 교수님께서 잘 표현하고 있는 바와 같이, "박윤선 신학이란 독특한 그 나름대로의 신학을 일컫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바울과 어거스틴과 칼빈의 신학이요. 칼빈주의의 신학이며, 개혁주의 신학이고, 웨스트민스터 교리 표준에 밝혀 놓은 장로교 신학을 이어 받은 신학이다." 이와 같은 개혁 신학 사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 특히 다음 몇 가지 면에서 정암의 개혁주의 사상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 제일주의이다. 그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분은 드물다고 할 정도로 정암은 신학과 교회와 삶의 모든 측면에서 하나님 제일주의를 강조했다. 정암은 "하나님 주권 사색이라는 것은 어디서나 무엇에서나 하나님의 통치를 보고 있는 사색이다(139:9-10)"라고 말한다. 신복윤 교수님은 "칼빈주의 근본 원리인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 그의 전체 생활 밑바닥에 깊이 깔려 있어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그의 신앙의 참모습을 우리 교수들과 학생들은 가까이서 항상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고 쓰고 있다. 김명혁 교수님은 "박 목사님은 한마디로 하나님만 아신 분이었고 하나님께 붙잡혀 사신 분이였다"고 말할 정도이다. 정성구 교수님은 정암의 생애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위해서 살다 간 그의 승리적 생애"라고까지 표현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정암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이런 신본주의를 강조한 정암의 가르침이 "목회자들의 권위주의 강화에도 크게 가여 했다"는 말은 성립하기 어려운 말이다. 오히려 정암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않을 때에 목회자들이 권위주의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사실 정암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않으면 결국 권위주의로 나아가게 됨을 항상 통렬히 비판한 것이다. 권위주의는 정암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의 사자'라는 말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사용하지 않기를 요청했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을 항상 비판하였다. 그것이 그를 치하하기 위한 자리에서 그가 했던 "팔십삼 년 묵은 죄인"이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정암은 권위주의와는 권위가 먼 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도 정암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들은 별로 권위주의적이지 않다. 정암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수록 권위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더구나 정암의 하나님 제일주의는 구체적인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여주동행(與主同行)'이라는 그의 강조 어귀가 잘 드러내는 대로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강조한 것이다. 'Coram Deo''신전의식(神前意識)'이라는 말로 번역하면서 항상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한다는 그의 강조는 늘 계속되었다. 따라서 정암에게는 기도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그와 대화한 사람들이 잘 느끼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노진현 목사님의 다음 말씀은 매우 적절한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윤선 목사님과 이야기를 해 보면 기도의 냄새가 난다. 기도하고 모든 일을 하니 자신이 있다."

 

둘째는 성경 중심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평생 성경을 주석하도록 한 힘이었을 것이다. 그도 신성중학교 재학 시절 학교 가까이 흐르는 시냇가를 걸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가진 적이 있었으나, 즉시 '네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이 계신 증거'라는 생각과 함께 하나님을 놀랍게 확신하게 되었고, 그 후 정암은 "하나님을 의심한 적이 전혀 없고 성경을 견고히 붙잡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에 만족했다"고 한다. 후에 신학을 배운 후에는 정암은 이것이 칼빈주의 신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계속해서 성경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정암은 "칼빈주의 신학이야말로 성경을 그대로 전하는 말씀의 신학"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정암에게는 성경이 그의 생애와 사상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신복윤 교수님은 박윤선 목사님을 "성경의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하신다. 그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홍정길 목사는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에 그렇게 헌신한 분은 이제껏 보지 못하였다"고 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추모 예배에서 한부선은 그들의 만남과 우정과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한 후에 "박 박사는 성경을 위하여 싸운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그를 본받읍시다"라고 결론 맺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의존하여 생각하는 일을 정암은 '계시의존사색(啓示依存思索)'이라고 표현하였다. "칼빈주의 사상 체계는 하나님을 절대주권자인 인격적 신으로 믿기에 계시의존사색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입장의 신앙을 계시의존신앙이라고 하며, 그런 신학을 계시의존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홍치모 교수께서 잘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사고의 논리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변증학 교수였던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 교수와 화란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H. Bavinck)의 이론을 소화시켜서 표현한 말이다."

 

그래서 정암에게는 성경 주석이 그렇게도 중요했다. 그리고 정암의 이 성경 주석 작업은, 박영희 교수께서 잘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칼빈주의를 받아들이게 하는 데 가장 실질적인 공헌을 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셋째는 교회 중심주의이다. 이때도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고 그런 교회가 나타나도록 하는 일에 정암은 열심이었다. 특히 한국교회의 문제가 드러나서 합동신학원이 세워진 후에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제도가 과연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에 신경을 많이 쓰셨다.

 

 

▲ 박윤선 목사의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주석 : 정치 예배 모범 >. 박 목사는 노회와 총회가 상회(上會)가 아니라는 것,

즉 더 높은 기관이 아니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는 '더 넓은 회의체'라는 것을 개혁 신학의 정신에 따라 매우 강조하였다.

 

정암이 합신에서 특히 강조하신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전체 교회의 모습을 제시하신 것이라고 사료된다. 정암은 노회와 총회가 상회(上會)가 아니라는 것, 즉 더 높은 기관이 아니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는 '더 넓은 회의체'라는 것을 개혁 신학의 정신에 따라 매우 강조하였다. 그 누구도 주관하는 자세를 가지지 않도록 하시려는 그 정신이 정암의 강조점에 고스란히 나타나던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정암은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였고, 회의할 때만 '당회 의장', '노회 의장', '총회 의장'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 총회는 개회할 때마다 새로 조직하는 이유가 지난번에 폐회(閉會)함과 동시에 파회(罷會)되기 때문이라는 것도 강조하였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전혀 경험하지 못하던 장로교회의 참된 정신을 잘 드러내어 준 것이다. 이런 것을 합신의 헌법에 반영하셔서 그 헌법을 학생들에게 손수 가르치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넷째는 일반 은총과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적극적 삶에 대한 강조이다. 이를 강조하면서 신 복윤 교수님은 "개혁주의는 영적 구원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현세 생활에 있어서도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며 또 그대로 실현하기를 원한다"고 정암의 강조점을 요약한다. 이와 연관하여 "일반 은총을 감사하게 누리면서 문화 활동에서도 역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는 정암의 말도 인용하시는 것이다.

 

정암은 또한 "칼빈주의는 신령한 천국을 중심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현실과 사회 정치 면에서도 찾아 드리려고 한다"고 하신다. 물론 서영일이 그의 논문 가운데서 자세히 논의하고 있는 현실 정치와 깊이 관여하지 않으려고 하는 문제가 있지만 기본적인 원칙에 있어서 정암은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이 세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것을 매우 강조했다.

 

이 모든 활동의 완수를 위해 정암이 강조한 것이 요한계시록 210절 말씀을 활용한 '지사충성(至死忠誠)'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이 구호가 "우상을 섬기던 습관에서 나온 것이다"는 말, 그리고 이를 "유교의 지사충성"이라고 하는 말은 전혀 성립할 수 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을 모든 것을 다해 섬겨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그렇게 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구보다 유학을 잘 알고 그것이 옳지 않은 길임을 잘 강조하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이제 이 "휘호도 이제 내려야 하지 않을까"라고 제안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더 나아가 지사충성식의 강조를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질문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는 결국 정암의 딸이 정암과는 상당히 다른 신학적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정암이 이야기한 것은 박혜련이 마지막에 강조한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believe in)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닮아 가는 삶을 위해 부단히, 그러나 잠잠히 기도함으로 말씀의 깊이를 이해하는" ,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신실함을 회복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믿는 사람은 박혜련이 강조한 것과 같이 이것을 강조하기 마련인데, 이것을 아주 강조한 정암을 왜 비난하는 방향으로 보는 것인지 안타깝다. "자기 노력을 의지하는 것은 죄다. 그것은 곧 행위를 의지하는 죄인 것이다"라고 정확히 이신칭의가 말하려는, 따라서 정암이 말하는 것을 강조해 놓고, 정암이 마치 행위에 의지하는 가르침을 준 것같이 왜곡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왜곡인 것이다.

 

또한 정암이 "한국교회에 팽배한 이분법적인 신앙의 토대를 만든 중심에" 있다고 하는 말도 사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정암이 강조한 개혁 신학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분법적 신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신앙과 삶의 연관성,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에 대한 바른 이해를 잘 드러내는 많은 책들이 쓰인 것은 분명히 정암의 개혁 신학이 이원론적 신앙의 원천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해 주는 것이다. (계속)

 

 

정암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6)

- 정암의 실천적 교훈, 삶으로 가르친 개혁 신학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이 글은 안명준 교수의 편집으로 나올 <한국의 칼빈주의자들>(킹덤북스, 근간)에 실릴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내용으로 여기서는 본문만을 소개합니다. 각주를 비롯한 자세한 내용 전체는 나중에 나올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정암 박윤선 목사님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그의 생애를 간단히 생각해 보고(I), 그의 사상을 소개한(II) 후에 그의 실천적 가르침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III). 이것은 정암에 대한 오해가 많은 상황에서 그에 대한 바른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한 작업의 한 부분입니다. - 필자 주 

 

 

정암의 설교는 항상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웠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하게 여기면서 그 교훈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해 주었다.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질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때때로 학교 채플에서 있었던 성경과 관계없는 이야기들이나 성경을 풀이하되 매우 이상하게 설명하던 설교들이나 성경에 대한 피상적 접근들과는 달리 정암이 과연 이 본문을 어떻게 설명하여 주실까 하는 것이 항상 학생들의 관심이었다. 더구나 당신의 삶과 인격의 무게가 실린 정암의 설교는 항상 성경의 뜻을 더 밝히 해 주셨고,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클로즈업(close-up)해 주었다.

 

그러므로 교단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신대원 학생들이 교단 정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새로운 학교, 그저 성경과 교수님들의 개혁 신학을 바로 배워 그대로 목회할 수 있는 새로운 학교를 세워 주기를 요청하고, 이 요청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신 대부분의 교수님들께서 새로운 학교를 세우는 것에 동의하시고 정암도 이에 동참하기로 하셨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신대원 과정은 정암과 대부분의 교수님들께서 수종 들어 세우기 원하시는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것은 우리 학생들에게는 그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어른들은 교단과 관련해서 다른 이야기를 할 때도, 또 어떤 친구들은 교육전도사 자리를 사임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남서울교회 지하실에 있는 합동신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를 생각할 때마다 합동신학교에 교육할 수 있는 장소를 허락해 주신 남서울교회 성도님들과 당시 담임목사님이셨던 홍정길 목사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수년 동안 교우들이 많이 불편했을 텐데도 남서울교회는 그 불편을 감수해 주었다. 또한 그 시기의 1-4회 선배님들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선배님들은 이 새로운 학교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교단에서 허락하지 않아서 평생 목사가 못 되고 평생 전도사로 섬길지라도 성경과 교수님들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목회하겠다는 다짐을 했었다고 한다. 희생을 각오하고 나아가신 이 선배님들은 참으로 개척 정신을 가진 분들이었고, 성경에 충실한 개혁 신학을 배워서 개혁파적으로 목회하겠다는 것을 대내외에 천명하신 역사적 인물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우리들은 교회사 속에서만 보던 진리를 위해 희생하고 평생을 그것을 위해 헌신하시는 분들을 바로 우리 눈앞에서 보는 영광을 얻었다.)

 

 

▲ 정암은 학생들이 성경과 개혁 신학을 바로 배워 목회할 수 있는 학교를 세우길 원했다.

사진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모습이다. (사진 제공 이승구)

 

이런 학생들에게 정암은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정신과 지사충성(至死忠誠)의 자세를 강조하였다. 그야말로 주마가편(走馬加鞭)이었다. 정암의 강조에 따라 학력을 위조해서 총신에 입학했다가 합신으로 따라 나왔던 선배 한 분은 이런 사람이 신학을 하면 안 된다고 판단하시고 신학과 목회의 길을 그만두고 돌아 가셨다는 말씀도 들었고, "공부하다가 죽었다는 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정암의 말씀 때문에 그야말로 열심히 공부하시던 분들이 많았다. 물론 교수님들께서는 학생들의 부족한 모습을 많이 보셨겠지만, 그때 학생들에게는 공부하는 것과 경건한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세로 공부했고, 개혁 신학이 가르치는 대로 우리들의 교회가 변할 것을 기대하고 그렇게 목회하기를 원했다.

 

정암이 설교를 담당하신 날은 강대상에 서시어 언제나 양복 안주머니에서 설교 원고를 꺼내어 강대에 놓고 설교하였다. 처음에는 한두 번 그러시겠거니 했으나, 정암은 항상 그렇게 하였던 것 같았다. 주석을 완간한 정암도 설교하실 때는 항상 새롭게 설교를 준비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설교 시간 전까지 준비하신 그 내용을 항상 심장 가까운 곳에 두기 원하시며, 그 심장으로부터 전하는 심령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박 목사님께 이것에 대해 감히 묻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마 그런 심정으로 그리하셨으리라고 짐작해 본다. 훗날 하늘에서 박 목사님께 여쭈어 보고 싶다.)

 

정암의 설교와 강의 속에서 항상 강조되는 말은 "성경이 자증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었다. 특히 변증학 강의에서 정암은 항상 "성경이 자증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셨고, 그분을 위한 변증을 하였다. 그리고 "진실함", "교역은 하나님의 일을 수종 드는 것이라는 것" 등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교만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과 특히 교역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아주 자명하게 만들었다.

 

"성령님의 감화 없이 목회하라는 것은 목사에게는 가장 큰 욕이다"라고 하신 말씀도 강하게 기억한다. 개혁 신학의 강조를 따라서 말씀과 성령님을 늘 연관시키면서 제시해 주었다. 성령님께 충성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에 충실하는 것임을 아주 분명히 해 주었다. 정암의 가르침에 의하면 개혁 신학에서 성령론이 약하다든지 부족한 것이 있다든지 하는 말은 있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항상 성령님께 온전히 충성할 것을 가르치시는 정암은 언제나 성경에 충실했다.

 

또한 정암은 하나님을 언급하실 때는 항상 "당신님"이라고 지칭했다. 이는 기도 중에서나 설교에서나 강의에서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지칭하실 때 사용되던 정암의 독특한 표현법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잘 나타나는 말버릇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들로 하여금 당신님의 뜻을 잘 배워 알게 하옵시고, 당신님의 나라 백성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시던 정암의 그 기도와 심지어 말버릇까지도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원한다. (마침)

 

 

* (위의 글은 작성자이신 이승구 교수님의 허락하에 게재하는임을 밝힙니다.)

 

 

 

출처: http://www.newsnjoy.or.kr/main.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