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ical Theology/Biographies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의 재판 - T. H. L Parker

Bavinck Byeon 2014. 11. 30. 15:06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의 재판

 

T. H. L 파커(Thomas Henry Louis Parker)

 

 

세르베투스는 툴루즈(Toulouse)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황제의 스페인 목사의 비서 노릇을 한 후에, 바젤에 거주하면서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오이콜람파디우스에게 삼위일체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연상 떠들어댈 때부터 그 악명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 견해를 삼위일체에 관한 오류에 대한 칠서七書(de Trinitatis erroribus libri septem)라는 제목으로 1531년에 출판했다. 그는 바젤에서 스트라스부르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그의 주요 표적은 부처(Martin Bucer)였는데 그는 그 시를 종교 개혁자들 사이에서 악평이 나도록 하는 일을 시작했다. 부처는 그에게 떠날 것을 요청했고 그는 바젤로 돌아왔으나 행정관들이 책에 나타난 그의 견해를 취소할 것을 명령했다. 이 명령에 대한 그의 순종은 평생을 통해 일관되어 나타나는 정직성의 결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삼위일체에 관한 2권의 대화(Dialogorum de Trinitate libri duo)라는 새 책을 썼는데 옛 책의 사상이 더 전개시킬 부분이 있는 미숙한 책이었다는 점에서 옛 책의 견해를 취소한다고 했다. 스페인의 종교 재판소는 그를 체포할 것을 명령했고, 세르베투스는 세르베투스로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수학 강사 미카엘 빌뇌브(Michael Villeneuve)로 파리에 다시 나타났는데 거기서 의학 공부를 시작해 남다른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하비(Harvey)가 폐의 혈액 순환을 발견할 것을 미리 내다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약용시럽에 관한 매우 인기 있는 저술인 시럽의 보편적 사용(Syruporum universa ratio, 1537)을 저술했음이 분명하다. 30대 중반일 때 칼빈은 목숨을 내걸고 그를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파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세르베투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것은 사정이 확실치 않아서 칼빈에게는 그가 세르베투스였는지 빌뇌브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는 파리에서 리옹으로 와서 거기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Teography)을 라틴어로 편집했다(에라스무스는 1533년에 헬라어 본문을 편집했다). 그러나 그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 점성학 책이 의학부에 의해 정죄되었고 발매가 금지되고 있었다. 빌뇌브로서 그는 파리에서 사귄 비엔 주교의 개인 의사가 되었다. 루터와 칼빈을 몹시 싫어하는 그의 후원자는 그가 칼빈과 서신 왕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상한 책을 쓸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문학에는 아마추어인 주교는 그의 두 권의 책은 인정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세르베투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의 재판과 파그니누스(Pagninus)의 라틴어 성경 신판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가 서로를 알고 있는 출판업자인 리옹의 장 프렐롱(Jean Frellon)을 통해 칼빈에게 세 가지 어려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함으로써 칼빈과 다시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545년이었다. 첫째,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그렇다면 어떤 방식과 어떤 형태의 아들 관계인가? 둘째, 하나님의 왕국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언제 그 왕국은 시작되는가 그리고 사람은 언제 중생되는가? 셋째, 세례는 주의 만찬과 같이 믿음을 요구하는가? 왜 세례는 새 언약 안에 제정되었는가?

 

칼빈은 이에 대한 답신을 보냈으나 세르베투스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의 답변을 논박했다. 칼빈은 이번에는 매우 자세히 답변을 했고 동시에 그의 교리를 상세히 알 수 있도록 기독교강요한 부분을 복사해 보내 주었다. 세르베투스는 이를 다시 논박했고 자기의 비평을 갈겨 쓴 기독교강요를 되돌려 보내왔다. 그도 역시 자기가 쓰고 있는 책의 일 부분과 30개의 편지’(letters) 혹은 장으로 구성된 소론小論을 보냈다.

 

칼빈이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가르쳤다는 명목으로 고소한 사람, 게다가 자신이 충고를 받으려고 했던 존경받는 학자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글을 쓴 사람을 정신이 멀쩡한 사람으로 보기는 매우 어려웠다. “내가 당신에게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당신이 하나님을 머리가 셋 달린 믿기 어려운 괴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만 하면 어디에서도 그 지지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오.”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이것은 당신의 지식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즉 얼마나 마술적 매력과 거짓 근거로 가득 찬 것인가를 보여 준다등등. 심지어는 볼세크((Hieronymus Bolsec)도 세르베투스를 진실로 매우 교만하고 거만한 인간이라고 했다.

 

칼빈은 프렐롱에게 만일 어떤 한 인간이 좀 더 겸손하게 글을 쓰는 방법을 배울 줄 모른다면 무엇 때문에 자신이 편지를 계속하겠느냐고 서신 가운데서 말했다. 그러나 같은 날 파렐에게 보내는 편지의 어조는 이와는 매우 다른 것을 보여 준다.

 

세르베투스는 최근에 편지와 함께 놀랍고 전혀 새로운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허풍을 떨면서 헛된 환상으로 가득 찬 부피가 큰 책 한 권을 보내왔소, 그는 나만 좋다면 이곳에 오고 싶다고 했소. 그러나 나는 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했소. 만일 그가 온다면 내게 조금의 권위라도 있다면 그를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오.”

 

이 편지의 역사와 출판에 대한 기록은 두메르그(Doumergue)의 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위협이나 혹은 경고로 해석될 수도 있다. 만일 그것이 위협이라면 그것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세르베투스에게 통보된 것이 아니라 파렐에게만 말한 것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경고였다면, 그는 직접적으로는 안전 통행권을 줄 수 없다고 말했거나 아니면 간접적으로라면 안전 통행권을 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세르베투스에게 경고했을 것이다. 서신 교환이 중단되자 칼빈은 그가 더 이상 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쓰지 않겠지라고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칼빈이 드 빌뇌브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따라서 언제라도 그의 정체를 밝힐 수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한 몸으로서는 가톨릭 교도와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는 원리를 굳게 밀고 나가고 있었다.

 

15531월에 수년 동안 준비해온 책에 다른 자료들이 첨가되어 기독교의 회복(Christianismi Restitutio)- “기독교의 회복,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우리의 칭의, 중생, 세례, 주의 만찬을 완전히 회복시켜 전 사도적 교회가 새롭게 시작하는 외침. 우리의 회복은 사악한 바빌론과 적그리스도의 속박에서 풀리고 사탄이 멸망당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완전히 이루어짐” - 이 출판되었다.

 

기독교의 회복(Restitutio)- 책명은 기독교강요(Institutio)를 고의적으로 겨냥한 것임 - 은 사실상 여러 권의 책을 한 권으로 묶은 것인데, 삼위일체에 관한 오류에 대한 칠서, 믿음과 그리스도의 왕국과 적그리스도 그리고 중생에 대한 칠서, 30개의 편지, 적그리스도의 60가지 표적, 삼위일체와 교회 권징에 대하여 멜란히톤에게 보내는 변증이 포함되어 있다. 바젤의 인쇄업자가 출판하기를 거절하자 그는 비엔의 인쇄업자인 아르눌레(Arnoullet)와 귀에룰(Gueroult)에게 인쇄하도록 했다. 동서 지간인 이들은 제네바 사람들인데 귀에룰은 간통죄와 그 외의 죄 때문에 형벌을 받을까봐 수개월 전에 제네바를 탈출한죄인이었다.

 

그러나 이 익명의 책의 저자가 주교의 의사인 다름 아닌 빌뇌브이고, 빌뇌브는 다름 아닌 이단자 미카엘 세르베투스라는 사실은 아직 비엔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발각되지 않았는지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왜냐하면 몇몇 스위스 종교 개혁자들이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제네바에 있는 프랑스인 도피자요 기욤 뷔데(Guillaume Bude)의 사위요 칼빈의 개인적인 친구인 기욤 드 트리(Guillaume de Trie)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세르베투스는 기독교의 회복을 칼빈에게 한 권 보냈는데 이미 원고로 그 일부분을 읽어 본 적이 있는 그는 쉽게 저자가 누구인지를 알았다. 그는 그것을 그의 믿을 만한 동료들과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 왜냐하면 그 책의 견해가 알려지는 것을 칼빈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드 트리가 이들 중의 하나였다. 그의 사촌 한 명이 비엔에 살고 있었는데 드 트리는 그의 사촌에게 복음주의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는 사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약간의 변증을 한 다음 제네바 신학의 순결성과 아무나 제멋대로 떠들도록 내버려 두는 가톨릭의 미지근한 태도를 대조했다. 어째서 비엔에는 지금도 이단의 괴수가 살고 있는가? 더욱이 그 곳에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주교의 고용인까지 되었다니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내가 말한 그 사람은 자네가 떠난 모든 교회에서 정죄를 받았네. 그러나 자네가 있는 곳에선 그가 용인되고 있는 실정이네. ……그의 진짜 이름은 미카엘 세르베투스로서 포르투갈계 스페인 사람이네. 그러나 그는 지금 빌뇌브로 행세하고 있네.” 그리고 그는 1페이지를 샘플로 보냈다. 이것이 226일이었다.

 

드 트리의 사촌인 앙투안 아르네(Antoine Arneys)는 즉시 이 편지를 당국에 넘겼고, 삼 주일이 채 못 되어 프랑스 왕궁의 종교 재판소장은 리옹 대주교의 비서인 추기경 드 투르농(Tournon)에게 이 문제를 잘 조사해 보라는 밀서를 보냈다. 추기경은 도피네의 총독에게 이 일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므로 즉시 해결해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아르네는 더 자세한 정보를 알려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드 트리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드 트리는 이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알려왔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자네에게 밝혀 둘 일이 있네. 나는 이 사실들을 칼빈 선생에게서 알아내는 것이 보통 힘들었던 게 아니네. 그것은 선생이 그런 저주받아 마땅한 불경을 벌주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기를 원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사법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임무는 칼로 이단을 쫓는 게 아니라 교리로 이단을 정죄하는데 있다고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도와주지 않으시면 내가 경솔하다는 죄로 고발당할 것이라고 항의하면서 끈질기게 졸라대자 결국은 내게 이 모든 사실을 알려주시기로 한 것이네.”

 

따라서 빌뇌브는 종교 재판소장 마티외 오리(Matthieu Ory)가 이끄는 위원회에 의해 감옥에서 심문을 받았다. 복음에 대해 진리를 말하겠다고 맹세한 후에 죄수는 그의 이름은 미카엘 빌뇌브로서 의학 박사이며 나바라 튀델 출신이라고 했다. 그는 바젤과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체류 생활은 빼고 간략하게 자기 경력을 이야기했다. 그는 시럽의 보편적 사용, 점성학 서적, 캄페지오를 위한 변증(Apologia pro Campeggio)을 저술했으며 몇 번 책을 수정한 일은 있으나 그 밖의 다른 책은 자신이 출판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에게 그의 인쇄된 책 두 페이지와, 같은 내용인데 여백에 사실상 유아 세례는 사탄적인 괴상한 이론에 불과하다는 주가 적힌 원고가 제시되었다. 그는 자신은 유아들이 세례에 의해 구원받음을 믿는다고 답변했다. 그렇다면 스스로 몇 군데의 주를 반대로 수정해야만 한다고 하자 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것이 자신의 편지인지 아닌지는 즉석에서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보기에는 그런 것 같은데, 만일 신앙에 반대되는 것이 있으면 우리의 어머니이신 거룩한 교회의 결정에 굴복할 것이며 좀 자세하게 읽어볼 수 있도록 허락해 준다면 오류를 다 고치겠노라고 했다.

 

그 다음날 그는 맹세를 하고는 다시는 심문을 받았다. 이번에는 그에게 자유 의지에 관한 편지가 제시되었다. 그는 울먹이면서 말을 했다. “선생님들, 제가 사실대로 다 말하겠습니다. 이 편지들을 썼을 땐 지금부터 약 20년 전에 제가 독일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스페인 사람인 세르베투스라는 사람에 의해 독일에서 출판된 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스페인 어디 출신이었는지 또 그 당시 그가 독일 어디에서 살았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독일에서 그 책을 읽었을 대는 15-17세의 매우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몹시 좋아 보였고 사실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훌륭해 보였습니다.” 그는 칼빈에게 편지를 써 보낸 적이 있는데 그 때 세르베투스가 칼빈에게 던진 적이 있던 질문을 적어 보내면서, 자신은 세르베투스가 아님을 칼빈에게 분명히 밝힌 후 일치를 위해서 세르베투스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칼빈이 너무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서신 교환을 중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아 세례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그의 견해를 조금씩 바꾸었으며 이제는 교회와 보조를 같이 원한다고 했으며, 삼위일체에 관한 편지에 대해서는 단지 세르베투스의 견해를 베낀 것뿐이라고 했다.

 

2차 심문이 끝난 후 세르베투스는 그의 하인을 시켜 자신이 받아야 할 돈을 모으게 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그는 간수로부터 작은 정원 열쇠를 받고는 담을 넘어, 제네바 의회가 비엔 법정을 조소한 표현대로 그의 주인에게 인사 한마디도 없이 감옥을 떠났다.” 법정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놓친 죄수에게 판결을 선고하는 길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617일에 판결을 선고했다. 그는 몸이 재가 될 때까지 약한 불에서 산채로 화형에 처한다. 당분간은 - 즉 그가 잡히기 전까지는 - 그의 초상을 만들어서 화형에 처하고 그의 책들은 소각한다.”

 

세르베투스가 이렇게 믿기 어려운 어리석은 행위를 저지른 것을 볼 때, 우리는 그가 20년 동안 가면을 쓴 생활을 통해 이제는 환상과 실제를 부결해 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 아닌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아는 한에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탈리아를 거쳐 제네바에 왔고 거기에서 칼빈의 설교를 듣기 위해 생 피에르 교회에 참석했던 것이다. 그는 칼빈의 요구로 그의 비서 니콜라 드 라 퐁텐(Nicolas de la Fontaine)의 고소를 통해 체포되었다. 제네바의 제도에 따라 증거를 제시할 수 있을 때까지는 피고뿐 아니라 고소한 사람도 감옥에 수감되었다.

 

칼빈은 신학적인 근거 위에서 죄목의 리스트를 작성해서 퐁텐으로 하여금 법원에 제출케 했다. 피에르 티소(Pierre Tissot)를 검사로 해서 행정관 앞에서의 첫 공판이 814일에 열렸을 때는 세르베투스는 세르베투스라는 본명으로 심리를 받았다. 죄목이 낭독되면 이에 대한 세르베투스의 답변이 있었다. 드 라 퐁텐은 불만족스럽다는 선언을 하고 감옥으로 되돌아 갔다. 그 다음날 앙투안 코뱅은 드 라 퐁텐 대신 고소자를 맡았다. 16일에는 필리베르 베르텔리에가 티소 대신 대리로 나왔다. 니콜라의 삼촌인 제르맹 콜라동(Germain Colladon), 즉 베리 공국의 유명한 전직 법률가가 소추 위원회를 맡았다. 그 다음 날 칼빈은 소의회에 나가서 베르텔리에가 세르베투스를 어느 정도 옹호하려고 한다는 점을 들어 그를 비난했다. 그 다음 여러 번의 공판에선 수석 행정관인 페랭은 불참하고 티소가 대리의 역할을 다시 맡았다. 독자들에게 수많은 심문들을 다 이야기하려면 진력이 날 것 같아서 심문을 통해 입증된 사실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제가 된 저술들은 이단적이었다. , 보편적 교부들과 회의에 비추어 보면 이 저술들은 성경에 정반대되며, 더욱이 교의敎義의 주요 핵심으로 보아도 이단적이었다. 결국 초대 교회 기독론을 많이 연구한 것처럼 보였다.

둘째, 문제가 된 저술들의 저자는 세르베투스였다.

셋째, 그는 판매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썼으며 따라서 그 안에 들어 있는 견해는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도록 쓴 것이었다.

넷째, 그는 구두로 혹은 글로 칼빈 선생, 비레 선생, 푸팽 선생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이단 사설을 전했다.

다섯째, 이단은 제국 내에서는 범죄에 해당한다는 것은 로마법으로부터 확립되어 온 전통이다. 따라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뿐 아니라 세속 권력으로 이단을 처벌한 예는 많이 있다.

 

목사 총회의 기록을 보면 재판을 한없이 길게 질질 끌 것이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건이 복잡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실상 세르베투스의 책은 보편적 기독교 표준에 따르면 무서운 이단적 내용이 담겨있는 책임이 너무나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방종파가 그 재판에서 칼빈을 궁지로 몰려드는 데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어려움은 로마 가톨릭도 이미 세르베투스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그들의 행위를 전 유럽이 지켜보고 있다는 데 있었다. 제네바의 모든 사창가의 영업을 재개한다 해도 - 소위 가스라프 파브르의 선거공약처럼 - 페랭이 잘 알고 있었듯이, 가장 사악한 이단의 편을 들어 생길수도 있는 종교, 정치, 사회적인 영향을 보상해 줄 수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이 소송 - 사건 - 을 질질 끄는 것이었다. 세르베투스는 이제 그를 재판하는 자들이 그를 고소한 자의 불구대천의 원수임을 깨닫자 그의 과거 방자한 태도가 칼빈을 대할 때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실로 칼빈에 대한 그의 답변은 비엔의 종교 재판관들에게 아첨하면서 매달리던 모습과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판이하게 달랐다. 그래서 보니바르(Bonibard)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 당시 도시를 지배하고 있던 칼빈의 적들은 페랭의 추종자인 간수를 통해서 칼빈에게 대적하라고 세르베투스를 충동질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지지한다는 희망을 그에게 불어넣고 그를 설득시켜서 칼빈이 감옥에 나타나면 칼빈과 논박을 벌일 뿐 아니라 모욕을 주라고 부추켰다.”

 

821일에 소의회는 그들이 빠진 딜레마에서 빠져 나오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 그들은 비엔에 왜 그가 구금되었으며 어떻게 달아났는지 알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으며 다른 스위스 교회들과 도시들에 자신들의 견해를 적어 보냈다. 그들은 다른 교회들이 세르베투스의 편을 들 것이라는 것은 거의 믿지 않았으나 볼세크의 경우처럼 미온적인 대답을 해줄 것을 아마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세르베투스에게 불리한 답변들이 일률적으로 제시된다 해도 그들은 그에게 유죄판결을 내릴 때 칼빈 외에 다른 교회나 도시의 견해를 따를 작정이었다.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또 다른 해결책을 생각해내고 세르베투스에게 계속 재판을 받고 싶은가 아니면 비엔으로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질문했다. “그는 땅바닥에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이곳에서 재판받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선생님들이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 그것에만은 되돌려 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걸했다.”

 

1020일에 답신들이 의회에서 낭독되었다. 취리히, 바젤, 베른, 샤프하우젠이 한결같이 세르베투스의 견해를 이단이요 불경스러우며 유해하다고 정죄했다. 이것은 실제로 재판의 종결이었다. 1026일에 소의회는 결정을 내렸으나 마지막으로 페랭은 세르베투스를 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그 사건을 200인 의회에 넘겼다. 그 다음날 판결이 내려졌는데 비엔과 동일한 판결이었다. 칼빈과 다른 목사들은 그를 제발 화형은 시키지 말고 참수시켜 줄 것을 청원했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칼빈과의 마지막 인터뷰를 한 후에 파렐이 참석한 데서 세르베투스는 화형에 처해졌다.

 

국가가 이단을 죄로 형벌해야 하는가? 시민 정부에 대한 칼빈의 교리는 기독교강요첫 판부터 마지막까지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으며 독일 도시들의 요청에 의해서 세르베투스 사건에 대해서 쓴 정통 신앙의 수호(Defensio orthodoxae fidei)에 명확히 재진술되어 있다. “기독교 제후나 국가가 이단을 벌하는 것이 합법적인가?” “시민 정부의 목적은 인간 사회를 위해 존재할 때 그 안에 다 포함되겠지만 인간들이 호흡하고 먹고 마시고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데 있을 뿐 아니라 우상 숭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독, 그의 진리에 대한 경멸, 그 외의 종교에 대한 공공연한 범죄 등이 나타나지 않고 유포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종교의 공적인 면모가 존재하도록 하고 인간들 가운데서는 인간성이 드러나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결국 국가의 임무란 진정한 종교를 확립시키고 한 번 확립되면 그 종교를 계속 유지하는 데 있는 것이다. 국가와 국가의 운영은 결코 세속적이거나 부정하지 않으며 중립적이거나 교회에 적대적인 영역이 아니다. 한번 법률과 그 법률을 진행하는 자들은 세상의 경륜을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 임명된 것이다. 치리자들은 하나님의 일꾼이요 종들이며 치리자들로서 세상 직무의 권위뿐 아니라 주님의 권위까지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주님에 의하여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이 직무를 수행해 나가는 것이다. 진정한 종교를 확립해 나가고 유지해 나가는 것이 국가의 임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진정한 종교가 근본적으로 공격받고 있을 때는 정부가 무슨 일을 해야겠는가?

 

관용에 대해서나 혹은 형벌에 대해서 20세기와 16세기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20세기의 우리는 가련한 희생자의 고통과 아픔을 생각만 해도 온 몸이 오싹해진다. 그러나 16세기의 그들은 질서의식이 강했기에 거짓 교리에 의해 영혼이 파괴되고 교회가 산산 조각나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전쟁과 병과 기근으로 그들에게 덮칠 것을 생각하니 또한 온 몸이 오싹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인 도피자 발렌티노 젠틸레(Valentino Gentile)의 경우는 세르베투스와는 대조를 이루는데 매우 교훈적이다. 제네바의 이탈리아 회중은 삼위일체 교리로 인해 분열되어 있었다. 따라서 신앙고백을 작성하고 서명하지 않으면 추방당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서명했다. 젠틸레는 서명을 해놓고서는 계속해서 그의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대한 이단설을 전파하고 있었다. 15587월에 그는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가 작성한 진술서는 불충분하다고 인정되어 정죄를 받았다. 세르베투스와 같은 꼴이 되기는 싫다고 말하고 그는 회개한다고 했다. 법률가 위원회가 그의 고백이 참된지를 알아보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들은 815일에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고 그를 참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의 회개를 증거 했기 때문에 사형은 보상하고 공적인 회개를 하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8년 후에 젠틸레는 그의 견해를 베른에서 다시 되풀이하기에 이르렀고 베른 당국은 제네바가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을 마저 하는데 하등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1566910일에 참수되었다.

 

 

 

[T.H.L 파커, 존 칼빈, pp.263-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