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stematic Theology/Doctrine of Revelation

'오직 성경'의 교리에 관한 종교개혁 이전의 역사적 증언 - 네이선 부세니츠(Nathan Busenitz)

Bavinck Byeon 2018. 7. 11. 23:50



'오직 성경'의 교리에 관한 

종교개혁 이전의 역사적 증언1)

(The Witness of Pre-Reformation History 

to the Doctrine of Sola Scriptura)


- 네이선 부세니츠(Nathan Busenitz)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인정하는 견해는 개신교 종교개혁의 핵심이다개혁자들은 오직 성경만이 교회의 교리를 세울 수 있는 토대로 인정하고 다른 권위는 모두 거부했다. 1536년에 작성된 제네바 신앙고백이 대표적인 경우다.


확언하건대 우리는 오직 성경만을 믿음과 경건의 유일한 규칙으로 따르기를 원한다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인간의 견해를 토대로 만들어진 그 어떤 사상을 성경에 혼합하는 것을 거부하며우리 주님의 명령에 따라 가감 없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것 외에 다른 교리를 우리의 영적 행위를 위한 규칙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는다.2)


종교개혁자들은 교부들(교회사 초기에 활동했던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의 글에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할 근거를 찾았지만오직 성경만을 신학적 주장을 입증하는 유일한 토대이자 최종적인 권위로 받아들였다마르틴 루터는 1519년에 요한 에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직 정경으로 인정된 책들에만 무오성의 영광을 돌리고자 한다나는 그런 책을 기록한 저자는 어느 누구도 오류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굳게 확신한다그러나 다른 저자들은 그들의 교리나 경건이 아무리 탁월하더라도그들이 말한 것을 평가할 때는 그들 자신이 사실로 믿는 것이 아니라 정경에 속한 책들의 권위나 확실한 이성으로 나를 확신시킬 수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3)


종교개혁자들에게 오직 성경!’의 교리는 성경의 순수성과 권위를 모두 인정하는 의미를 지닌다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의 거룩한 성품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분의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고 믿었다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시라고 인정했을 뿐 아니라 오직 그분의 말씀만이 교회의 교리를 결정하는 최상의 권위를 지닌다고 확신했다따라서 그들은(교황종교회의교회의 전통 등스스로 권위를 내세우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복종시켜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자들이 교회 역사상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최초로 인정했던 것일까아니면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의 글에서도 그런 신학적 확신을 확증해 줄 명백한 증거가 있을까역사적인 관점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면 교부들이 이 문제에 관해 어떻게 말했는지를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사도 비록 성경만큼 권위적이지는 않지만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에 관한 초기 교회의 관점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증거를 제공한다오늘날의 신자들이 그런 연구를 통해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적인 신념들을 분명하게 확립하고 옹호하게 된 과정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나는 성경의 무오성과 성경의 권위라는 두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교부들의 사상을 간단하게 살펴볼 계획이다.


교부들과 성경의 무오성


교부들의 저서를 대충만 읽어보아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그들은 성경이 완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도 완전하다고 인정했다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은 거짓이나 오류가 있을 수 없다.


그런 확신이 교부들의 저서 곳곳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그들의 신념을 몇 가지로 나눠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교부들은 성경이 성령으로부터 비롯했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4) 예를 들어로마의 클레멘트(AD 100년경)는 고린도 신자들에게 전한 말에서 그 점을 분명하게 언급했다그는 "너희는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성경은 사실이고 성령에 의해 주어졌다너희는 성경에 불의한 것이나 거짓이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5) 이레나에우스(AD 130-202년경)도 이단 논박이라는 책에서 똑같은 결론을 제시했다그는 진실로 성경은 완전하다왜냐하면 말씀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6)


둘째성경은 오류가 없기 때문에 (순교자 유스티누스<AD 165년경>나 이레나에우스와 같은초기 교부들은 성경은 자체 모순이 없다고 확신했다그들은 모든 성경이 사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성경의 한 부분은 다른 모든 부분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고 결론지었다이레나에우스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성경은 우리가 볼 때 완벽한 일관성을 이루고 있다비유(즉 덜 명료한 대목)들도 온전히 명백한 대목과 조화를 이룬다의미가 명료한 대목들은 비유를 설명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7)

 

유스티누스는 성경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어떤 성경의 내용도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성경이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나와 동일한 견해를 갖게 하기 위해 애써 설득하기보다는 차라리 기록된 말씀을 온전히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인정하겠다.8) 아타나시우스(AD 296-373)도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내용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거나 계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그러나 성경은 조금도 모순되지 않고, 진리이신 성부 하나님도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성경은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라고 말씀한다.9)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 사실로 믿는 굳건한 신념을 지녔다테르툴리아누스(AD 160-220년경)는 "성경의 진술은 진리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10) 아타나시우스도 그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진리를 나타내기에 충분하다"라고 말했다.11)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AD 347-470년경)는 요한복음 17장 17절을 주석하면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 이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거짓이 조금도 없고그분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12)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는 이 문제에 관해 특별히 확고한 견해를 드러냈다그 증거가 아래의 인용문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나는 오직 정경인 성경에만 그런 영예와 존경심을 바치고 싶다나는 오직 정경을 기록한 저자들만이 오류에서 온전히 자유롭다고 확신한다만일 내가 볼 때 성경 안에 진리에 어긋나는 내용이 있어 나를 혼란스럽게 할 때는 주저하지 않고 사본이 결함이 있거나 번역자가 말씀의 의미를 잘못 이해했거나 내 자신의 이해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성경이 오류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잘못이다.13)


성경은 거룩하고진실하고흠이 없다따라서 우리가 틀렸다고 해서 성경이 틀렸다고 불평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그 이유는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우리가 성경을 잘 이해했다면 틀릴 리가 없다우리가 들린 이유는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 탓일 뿐성경은 정확하다우리가 틀렸다고 해서 성경이 틀리는 것은 절대 아니다성경은 항상 정직하고 옳다따라서 우리가 틀렸을 때는 성경으로 되돌아가 교정을 받아야 한다.14)


내가 보기에 성경에 거짓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곧 성경을 기록해 우리에게 전달해 준 사람들이 그 안에 거짓된 것을 기록했다는 생각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왜냐하면 지극히 거룩한 권위를 지닌 성경 안에 저자가 기록의 의무를 행하면서 잘못 기록한 내용이 단 한 가지라도 포함되어 있다고 인정하기 시작하면실천하기 힘들거나 믿기 어렵게 보이는 내용은 모조리 그런 잘못된 규칙을 적용해 모든 구절을 저자가 사실이 아닌 것을 기록했다고 설명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15)

 

그로부터 7세기 후에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D 1033-1109년경)도 다음과 같은 말로 그와 동일한 신념을 드러냈다. "만일 내가 거룩한 성경과 명백히 모순되는 것을 말한다면그것은 잘못된 일이 분명하다설혹 그런 모순을 발견했다손 치더라도 나는 그렇게 주장하고 싶지 않다"16)

 

이렇듯 교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성경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아타나시우스는 39번째 절기 서신』에서 이 원리를 분명하게 언급했다그는 정경에 속한 성경 목록을 제시하고 나서, "이 책들은 구원의 샘물이다목마른 사람은 누구나 그 안에 담겨 있는 생명수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오직 이 책들 안에서만 경건의 교리가 발견된다그 누구도 여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된다."17)


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는 "성경에 기록된 것을 삭제하거나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을 삽입하는 것은 대놓고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니 그런 잘못을 저지른 자는 경멸을 받아야 마땅하다."라고 말했다.18) 아우구스티누스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달리 고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나 그분의 교회나 믿음과 삶에 속하는 문제에 관해 성경과 다르게 말한다면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너회가 성경곧 율법과 복음을 통해 받은 것과 다른 것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바울의 말대로 저주를 받을 것이다.19)


지금까지 간단하게 살펴본 대로뛰어난 교부들은 한결같이 성경이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그분의 완전한 성품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고 확신했다그들은 성경은 오류가 없는 절대적인 사실이며누구든지 성경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그들은 그런 식으로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신념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교부들과 성경의 권위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성품을 반영하고 있다고 믿었을 뿐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를 지닌다고 확신했다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서 숭고함과 신빙성을 지녔기 때문이다진리의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비롯했다하나님의 권위가 부여된 말씀이기 때문에 기록된 말씀을 입증해 줄 증거를 요구하는 것은 불필요하다성경은 곧 하나님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 어떤 증거도 성경 자체의 증거를 뛰어넘을 수 없다.20)


하나님보다 더 큰 권위는 없기 때문에 그분이 계시하신 말씀보다 더 큰 권위를 지니는 것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씀의 진실성을 공격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것과 같다고 설명함으로써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하나로 연관시켰다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짓 교사)가 성경에 있는 내용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거룩한 성경의 권위를 믿는 우리의 신념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자신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21) 그는 다른 곳에서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최상의 권위를 지닌다는 진리를 거듭 강조했다.


중보자께서는 처음에는 선지자들로그 다음에는 자신의 입으로또 그 후에는 사도들을 통해 스스로 충분하다고 판단하신 것을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정경이라고 불리는 지고한 권위를 지닌 성경을 허락하셨다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모든 문제와 관련해 성경의 가르침에 기꺼이 동의한다.22)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지고한 권위를 믿었다는 증거가 최소한 세 가지 사실을 통해 확증된다즉 그들은 교회 안에서 성경을 존중했고성경에 의존해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했으며권위를 주장하는 다른 모든 것보다 성경을 우위에 올려놓았다.


교부들은 교회 안에서 성경을 존중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지고한 권위를 존중했다는 증거가 성경이 초기 교회의 삶 속에서 핵심적이고 권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된다유스티누스는 150년경에 저술한 그의 첫 번째 변증』에서 교회의 예배를 묘사했다그의 글은 성경 외에 교회의 예배를 묘사했다그의 글은 성경 외에 교회의 예배를 묘사한 가장 초창기 문헌 가운데 하나다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일이라 일컫는 날에 도시나 시골에 사는 모든 사람이 한 장소에 함께 모여 먼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사도들의 글이나 선지자들의 글을 읽는다그리고 낭독자가 읽기를 그치면 지도자(목회자)가 말로 교훈을 전하고그런 선한 일을 본받으라고 권고한다.23)


유스티누스의 글에서 알 수 있는대로 초기 교회는 구약 성경(선지자들의 글)과 신약 성경(사도들의 글)의 권위를 인정하고예배 중에 읽고 가르쳤다또한 주일 예배에 참석한 신자들은 성경에 계시된 선한 일에 복종하라는 권고와 가르침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태도는 이레나에우스의 말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그는 사도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들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그들은 한 때는 그 것을 공적으로 널리 선포했고또 나중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믿음의 터요 기둥인 성경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24)


이레나에우스는 성경을 교회의 믿음을 떠받치는 '터와 기둥', 곧 궁극적인 권위로 삼아 영지주의 이단에 대응했다.25) 윌리엄 웹스터는 성경에 관한 이레나에우스의 견해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이레나에우스는 성경이 믿음의 터와 기둥이라고 역설했다그는 성경을 사도들을 통해 인간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온전하고 궁극적인 계시로 인정했다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된 권위 있는 말씀으로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성경은 충분하고 최종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으며교회의 믿음을 떠받치는 터와 기둥이다성경은 형식상으로나 내용상으로 모두 충족하다.26)


이레나에우스가 말한 대로성경은 초기 교회의 주일 예배에서 중심을 차지했다그 이유는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교회의 가르침을 위한 권위 있는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교부들은 성경에 의존해 이단을 단죄했다

 

교부들이 특히 이단의 공격에 맞서 건전한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성경에 의존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권위를 기꺼이 인정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역사가 켈리는 그런 교부 신학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요약했다.


교부들의 목적이 논쟁적인 것이었든 건설적인 것이었든그들의 신학적 노력이 모두 성경 해설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은 성경이 큰 영예를 누렸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였다더욱이 어떤 교리든 인정을 받으려면 먼저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 어디에서나 당연하게 여겨졌다.27)


이 말의 진실성을 입증해 줄 증거는 매우 많다예를 들어이레나에우스는 성경을 근거로 영지주의자들을 단죄했다그는 "그들의 사상은 선지자들이 선포한 것도 아니고주님이 가르치신 것도 아니며사도들이 전해준 것도 아니다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능가하는 완전한 지식을 소유했다고 자랑한다그들의 견해는 성경이 아닌 다른 것에 근거한다."라고 말했다.28) 이레나에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근거로 가르침을 전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사상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로 생각했다.


테르툴리아누스도 부활에 관한 책에서 그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다그는"이단들에게서 그들이 이방인들과 공유하는 지식을 제하고오직 성경만을 근거로 그들의 입장을 입증해 보이라고 요구한다면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29) 그는 거짓 교사들이 성경을 근거로 자신들의 견해를 입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이단으로 단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히폴리투스(AD 170-236년경)도 테르툴리아누스처럼 이단들을 상대할 때 그들의 가르침을 성경과 비교했다.

 

진리를 확립하려면 진리의 계시 자체를 의존해야 한다이 모든 막강한 이단들은 적절한 설명을 할 수도 없으면서 진리를 대적한다형제들이여우리는 다른 것이 아닌 오직 성경을 통해 한 분이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 외에는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경건한 삶에 관해 배울 수 없다성경이 선언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의 깊게 관심을 기울이고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 열심히 배워야 한다.30)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주의의 오류를 이렇게 논박했다.

 

그들(아리우스주의자)이 주장하는 신학과 우리(삼위일체주의자)가 성경에 근거해 주장하는 신학 가운데 어느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자 성부 하나님의 아들로 제시하는가성경은 그들에게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지금까지 종종 드러났고또 지금도 드러난 대로 그들의 교리는 거룩한 계시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31)

 

아우구스티누스도 도나투스주의자들과 논쟁하면서 성경을 오류를 분별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간주했다.

 

속이는 저울을 가져다 우리가 원하는 분동을 매달아 놓고우리의 입맛대로 "이것은 무겁고이것은 가볍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우리는 주님의 보물창고에서 성경이라는 거룩한 저울을 꺼내다 놓고 무엇이 더 무거운지를 확인해야 한다우리 마음대로 무게를 측정하지 말고주님이 알려주시는 무게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32)

 

이런 사례들은 교부들의 근본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그들은 성경의 권위에 입각해 건전한 교리를 옹호했고그릇된 가르침을 논박했다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성경을 전적으로 의존한 이유는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를 지닌 것은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교부들은 다른 모든 권위보다 성경을 더 우위에 올려놓았다

 

교부들이 다른 모든 권위보다 성경을 더 우위에 올려놓은 사실을 통해서도 초기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높이 존중했다는 증거가 분명하게 드러난다교부들의 문헌을 살펴보면초기 교회가 건전한 교리를 결정할 때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초기 교회가 성경의 궁극적인 권위를 인정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훗날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그런 확신을 '오직 성경으로'라는 슬로건으로 나타냈다.).


첫째오리게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교부들은 정경에 속하지 않은 책들은 비록 신자들을 유익하게 하고 덕스럽게 할지라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했다오리게누스(AD 182-254년경)는 "그 누구도 교리를 확증하고자 할 때는 정경에 속하지 않은 책을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33) 그는 다른 곳에서도 그런 신념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 두 언약(신약과 구약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말씀이 발견되고 논의된다이 두 언약을 통해 모든 지식을 이해할 수 있다그러나 성경이 결정하지 않은 것이 있을 때는 그 무엇을 세 번째 언약으로 내세워 어떤 지식이나 교리에 권위를 부여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34)


아우구스티누스도 신약 정경이 완성된 후에 기록된 책들에 관해 그와 비슷하게 말했다.


사도 시대 이후에 저술된 책들과 구약과 신약이라는 권위 있는 정경을 구별하는 분명한 경계선이 존재한다정경에 속한 책들의 권위는 사도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었고그 지고한 권위로 신실하고 경건한 마음의 복종을 요구한다그 후에 기록된 많은 책들은 이따금 성경과 동일한 진리를 전하지만그 권위는 결코 동등하지 않다성경은 그 자체만의 독특한 신성을 지닌다.35)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곳에서도 이 원리를 거듭 강조했다.

 

정경이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우리가 서로를 논박하기 위해 인용하는 것들은 모두 제거해 버리자누군가가 "왜 우리 가운데서 이런 것들을 제거하기를 원하는가?"라고 묻는다면나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인간이 저술한 문서로 거룩한 교회를 시험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36)

 

둘째암브로시우스(AD 337-397년경)와 같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지혜가 계시되어 있는성경을 다른 어떤 인간의 지혜보다 더 권위 있게 받아들였다암브로시우스는 그런 신념을 이렇게 드러냈다.

 

철학의 전통이나 설득의 기술이라는 '헛된 속임수'로 그럴듯하게 진리인 양 포장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고진리의 규칙을 좇아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것과 그런 장엄함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신실한 자들의 마음속에 새겨지게 된 것을 받아들여라.37)

 

아우구스티누스도 『교회의 일치』에서 그와 비슷하게 말했다. "내가 말하는 것이나 네가 말하는 것은 듣지 말고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자이것은 하나님의 책이다우리 모두 그 권위를 인정하고또한 믿는다그것을 토대로 교회를 세우고그것을 토대로 우리의 문제를 논의하자."38) 이 말이 속한 문맥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심지어 교회와 관련된 문제조차도 성경의 궁극적인 권위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많은 교부들이 성경이 자신의 견해나 가르침보다 훨씬 더 큰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분명하게 인정했다그들은 자신의 해석을 성경의 권위와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으려고 하지 않고스스로의 견해보다 성경의 가르침을 더욱 우위에 두었다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AD 265년경)우리는 반론을 회피하지 않고가능한 한 우리 앞에 제시된 것을 고수하고 확증하려고 노력했다그리고 제시된 이유가 타당하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의 견해를 바꿔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동조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열어 놓고진지하고 신중한 태도로 성경의 가르침과 증거를 통해 입증된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였다.39)


예루살렘의 키릴루스(AD 315-386년경)신성하고 거룩한 믿음의 신비에 관해서는 성경에 의존하지 않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우리는 교묘하고 그럴듯한 말 재주에 속아서는 안 된다만일 내가 거룩한 성경을 근거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심지어는 이런 말을 하는 나조차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말라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구원은 인간의 기발한 사변이 아닌 성경이 제시하는 증거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40)


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성경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교사들이 하는 말을 잘 살펴 성경에 일치하는 것은 받아들이고 일치하지 않는 것은 거부해야 한다그릇된 교리를 계속해서 가르치는 사람들은 단호하게 배격해야 한다.41)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모든 주장은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아무리 논리적인 주장이라고 해도 성경에 비춰 살펴보면서 그 주제에 관한 말이 인간의 추론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정확히 일치하는 것인지를 확인해야 한다그래야만 우리가 말하는 것이 좀 더 신뢰를 받을 가치가 있고마음에도 더 깊게 새겨질 수 있다.42)


아우구스티누스설혹 참된 그리스도인이고 높은 평판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추론을 정경인 성경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대해서는 안 된다만일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가 진리라고 확신하는 것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그들의 글에 있는 내용을 반박하거나 논박할 수 있다나는 다른 사람들의 글을 그런 식으로 다룬다나는 현명한 독자들이 내 글도 그렇게 다루기를 바란다.43)


아우구스티누스가 암시한 대로 현명한 독자들이란 성경의 진리를 교부들의 글에 비춰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글을 성경의 진리에 비춰 판단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곳에서도 성경이 교부들의 글보다 더 권위가 있다고 강조했다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룩한 정경곧 신구약 성경은 그 자체적인 한계가 분명하게 설정되었을 뿐 아니라 주교들이 나중에 쓴 모든 서신을 능가하는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우리는 성경 안에 포함된 내용이 올바른 사실인지를 의심하거나 논박할 입장이 못 된다그러나 정경이 완성된 이후로 주교들이 쓴 서신들의 경우에는 그 가운데 진리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된 것이 발견될 때는 언제라도 논박할 수 있다.44)


아우구스티누스는 5세기에 글을 쓰면서 키프리아누스(3세기의 교부)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자 주저하지 않고 그의 글을 성경에 비춰 평가했다그는 이렇게 말했다.


키프리아누스의 서신과 정경인 성경의 차이를 구별한다고 해서 그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신자들이나 불신자들의 글을 똑같이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다따라서 정경의 권위를 지니지 못한 키프리아누스의 서신들도 거룩한 성경의 권위에 일치하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해야 마땅하다우리는 키프리아누스의 서신에서 성경에 일치하는 내용은 받아들이고일치하지 않는 내용은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다.45)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2세기와 3세기에 살았던 신자들을 비롯한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글을 성경의 권위 있는 진리에 비춰 판단하는 것을 모욕으로 여기지 않았다.


넷째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교회 회의보다 더 큰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했던 아타나시우스는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도 성경의 권위가 그것보다 더 우월하다고 믿었다공의회의 결정은 성경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반영했을 때만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럴듯한 핑곗거리를 내세워 믿음을 위해 공의회를 소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녀봤자 다 소용없다왜냐하면 그 어떤 것보다도 오직 거룩한 성경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어떤 문제에 관해 공의회가 필요할 경우에는 교부들이 조처를 취할 것이다니케아 공의회 주교들은 이 문제를 무시하지 않고 교리를 정화하게 진술했다정직한 태도로 그들의 글을 읽으면 거룩한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심이 절로 우러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46)


(공의회를 비롯해) "그 어떤 것보다도 오직 거룩한 성경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라는 아타나시우스의 말에 주목하라또한 그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이 거룩한 "성경이 가르치는진리에 입각했다는 것을 그 정통성을 입증하는 근거로 제시했다아리우스주의가 오류를 저지른 이유는 공의회의 결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의 확실한 가르침을 왜곡하고 거부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교회 회의가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권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막시미누스라는 아리우스주의자와 논쟁을 벌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당신에게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강요해서는 안 되고당신도 내게 아리미눔 회의의 결정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우리는 서로 그런 회의의 결정을 들이대지 말고 우리에게 공통되는 것곧 성경의 증언에 근거해야 한다."47) 다시 말해 공의회의 권위가 통하지 않는 경우에도 성경의 권위는 항상 변함없이 절대적인 효력을 발휘한다.


다섯째교부들은 교리적인 문제와 관련해 성경이 교회의 전통보다 더 큰 권위를 지닌다고 생각했다일부 교부들은 이따금 교회의 관습을 지지하기 위해 구전을 인용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성경을 교리적인 문제를 결정짓는 궁극적인 권위로 인정했다.48) 바실리우스가 대표적인 경우다그는 이따금 침수 세례와 동쪽을 향한 기도와 같은 문서화되지 않은 관습을 언급했지만,49) 건전한 교리를 결정할 때는 오직 성경만을 권위 있는 안내자로 받아들였다.50)


바실리우스는 아리우스주의 신봉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습(곧 전통)이 이 교리를 용납하지 않고또 성경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이 문제에 대한 나의 대답은 무엇일까나는 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관습을 정통주의의 규칙이자 법칙으로 간주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관습을 옳은 것의 근거로 내세운다면나로서도 여기에서 통용되는 관습을 얼마든지 근거로 내세울 수 있다그들이 이 교리를 거부한다면우리는 그들의 견해를 따를 의무가 없다따라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이 우리 사이를 판단하게 해야 한다어느 쪽이든 그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면그쪽이 진리라고 인정받게 될 것이다.51)


바실리우스는 아리우스 신학의 오류를 비판하면서 전통이나 교회 회의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호소했다그의 관점에서 보면아리우스주의가 오류라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삼위일체 교리의 전통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었다바실리우스는 다른 곳에서도 그 점을 거듭 강조했다.


우리도 교부들이 말한 대로 똑같이 성부와 성자의 영광이 동일하다고 말한다따라서 우리는 성자와 성부께 모두 영광을 돌린다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교부들의 전통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기 때문이다나는 앞에서 성경에서 추론한 증거를 모든 사람 앞에 제시한 바 있다.52)


바실리우스의 말대로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옹호하면서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큰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했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풍부한 사례들이 증언하는 대로 초기 교회는 1) 정경에 속하지 않은 문헌들, 2) 인간의 지혜, 3) 그들 자신의 가르침과 초기 교부들의 가르침, 4) 교회 회의의 결정, 5) 교회의 전통보다 성경의 권위를 더 우위에 올려놓았다교부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으로'라는 교리(곧 성경은 정확한 사실이며 교회가 무엇을 믿고 가르쳐야 할지를 결정하는 궁극적인 기준이라는 교리)의 출현을 예고했다.


교부들이 말한 전통의 의미


그렇다면 교부들이 이따금 '전통'을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인정했던 그들이 전통을 언급한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로마 가톨릭 교회는 어떤 교리들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만이 아니라 성경 이외의 구전을 통해 보존되고 전달된다고 주장한다그들은 그런 구전을 근거로 교황의 무오성이나 성모의 무원죄 잉태설과 성모 승천과 같은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설명한다.


그런 주장에 대응하려면교부들이 '전통'이라는 용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그들이 말한 전통 가운데 현대 가톨릭교회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예를 들어이레나에우스는 성경 이외의 교리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곧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진리의 관점에서 전통을 정의했다그는 사도들의 '옛 전통'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지닌다고 설명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유일하신 하나님곧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를 믿는다성자께서는 피조물을 무한히 사랑하심으로써 자기를 낮춰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고자기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로 연합하셨으며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셨다가 다시 부활하셨고영광 중에 승천하셨으며구원받은 자들의 구원자요 심판받을 자들의 재판관으로서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진리를 왜곡하고 성부와 자신의 강림을 멸시하는 자들을 영원한 불 속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53)


이레나에우스가 말한 '전통'에는 1)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2) 그분이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믿음, 3) 성육신을 믿는 믿음, 4)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믿는 믿음, 5) 그리스도의 고난을 믿는 믿음, 6) 그의 부활을 믿는 믿음, 7) 그리스도의 승천을 믿는 믿음, 8)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믿음이 포함된다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 진리를 간단명료하게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교리적인 진리와 온전히 일치한다.54)


이레나에우스는 사도들로부터 구전으로 전승되었지만성경과는 다른 비밀스런 전통을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을 '전통'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직접적으로 논박했다그는 사도들의 전통이 성경의 가르침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영지주의자들이 틀린 이유는 비성경적인 비밀스런 전통을 성경보다 우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참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다른 권위 있는 전통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부들은 때로 이단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가르침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이전 세대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증언을 증거로 제시했지만초기 교회의 역사가 성경과 동등하거나 그보다 더 우월한 권위를 지닌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그렉 앨리슨은 이렇게 설명했다.


교회의 권위특히 교부들이 글에 호소하는 관습은 성경이 지닌 정당한 권위를 빼앗으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그런 관습에 의지했던 이유는 이단들과 싸울 때 참된 교리의 근거를 제시하고그것이 거짓 교사들의 새로운 가르침이 아닌 교회가 항상 인정해 온 교리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물론 교회가 믿는 것은 무엇이든 성경 자체에 비춰봐야 했다그 이유는 성경이 모든 문제를 결정짓는 궁극적인 권위를 지녔기 때문이다.55)


물론 (가이사라의 바실리우스와 같은교부들은 때로 세례를 베풀 때 수세자를 세 차례 물속에 담갔다가 일으키는 관습이나 동쪽을 향해 기도를 드리는 관습과 같은 부차적인 중요성을 지닌 교회의 관습을 언급할 때 '전통'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56) 교황의 무오성이나 성모 승천설과 같은 현대 가톨릭교회의 교리들은 바실리우스가 말한 전통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더욱이 초기 교회의 경우에는 부차적인 관습들도 성경에 근거해 판단했다바실리우스는 "선한 자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악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모든 말과 행위는 성경의 증언에 비춰 확증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57)


바실리우스보다 1세기 앞서 살았던 키프리아누스(200-258년경)도 전통을 그런 식으로 성경에 비춰 평가했다. 그는 이단이었던 노바티아누스주의자들이 정통 교회로 다시 복귀하기를 원할 때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지 여부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이 글을 쓴 목적은 그런 특정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키프리아누스가 자신이 제기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권위에 호소했는지를 살펴보는데 있다그는 전통적인 관습이 성경에서 비롯한 경우에만 그것을 따르기를 원했다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전통이 어디에서 비롯했는가주님과 복음의 권위로부터 비롯했는가아니면 사도들의 명령이나 서신에서 비롯했는가하나님은 기록된 것은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따라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거나 사도들의 서신이나 사도행전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면이 거룩하고 신성한 전통을 지켜야 마땅하다.58)


간단히 말해 교부들은 전통을 교리적인 의미나 '신앙의 규칙'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그들이 말한 전통은 대부분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진리들을 가리키는 의미를 지녔다. (4세기의 바실리우스와 같은교부들은 기록되지 않은 성경 이외의 '전통', 곧 특정한 교회의 관습이나 실천행위를 이따금 언급하기도 했다그렇다고 하더라도 많은 증거가 보여주는 대로교부들은 대부분 교리적인 문제든 실천적인 문제든 모든 것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원칙에 동의했다따라서 그들이 '전통'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과 성경의 궁극적인 권위를 믿는 그들의 신념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교부들의 글에서 발견되는 증거가 보여주는 대로 초기 교회는 '오직 성경으로'라는 교리를 굳게 확신했다그들은 성경이 오류가 없을 뿐 아니라 건전한 교리를 결정하는 궁극적인 판단의 기준이자 최종적인 권위를 지닌다고 믿었다성경은 모든 것을 평가하는 원칙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완전한 성품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분의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초기 교회는 성경에 복종하는 것이 곧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교부들의 글에서 발견되는 내용을 몇 가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성경을 모든 교의의 규칙이자 척도로 간주한다우리는 성경만을 바라봐야 하고오직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만을 용인해야 한다.59) (각주: Gregory of Nyssa, on the Soul and the Resurrection,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5:439. 그레고리우스가 수도자였던 누이 마크리나의 말을 인용해 말한 것이다.)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된 것들 가운데서 믿음과 삶의 방식에 관한 모든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60) (각주: Augustine, on Christian Doctrine, 2.9,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2:539.)


우리가 사도들의 서신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보다 무엇을 더 가르칠 수 있겠는가성경이 우리가 믿는 교리의 규칙을 결정한다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생각해야 할 그 이상으로 스스로를 더 지혜롭게 여겨서는 안 된다따라서 나는 궁극적인 교사이신 주님의 말씀을 해설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61) (각주: Augustine, on the Good and Widowhood, 2, in White, "Sola Scriptura and the Early Church", 24-25. 다음 자료를 참조하라.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3:442.)


이런 증거들을 고려할 때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믿는 믿음이 2,0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친 풍성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서 큰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오직 성경으로!'라는 교리는 16세기에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의 시대에는 항상 분명하게또는 직접적으로 이 교리가 주장된 것은 아니지만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으로 그런 확신을 항상 소중하게 간직해 왔다웹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 역사의 초창기부터 종교개혁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신학자였던 교부들의 견해는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대해서는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고트렌트 공의회의 결정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로마 가톨릭교회의 변증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오직 성경으로!'라는 원리는 지극히 성경적이며또한 역사적이다.62) (각주: Webster, Holy Scripture, 2:92.)


신자들은 이 교리가 성경에 의해 확립되었고 교회사를 통해 확증되었다는 신념으로 단단히 무장한 채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월한 권위는 없다왜냐하면 그 어디에도 하나님보다 더 큰 권위를 지닌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출처: '성경 무오성에 대한 도전에 답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