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stematic Theology/ㅡPredestination

예정론(Predestination) 6 - 대니얼 하이드(Daniel Hyde)

Bavinck Byeon 2015. 3. 11. 22:58

예정론 6: 선택과 유기로 통해 뭘 배울 수 있는거지?



Decretum horribile. 이 말은 존 칼빈이 유기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한 말로 그 뜻은 무서운 결정이다 (기독교강요 3.23.7). 우리는 지금까지 놀라운 은혜로 삼위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 중에 일부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셨음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질문, 즉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인류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개혁파신학은 일반적으로 이중예정으로 알려진 교리를 고백한다. 도르트신조는 이 교리를 정의하면서, “성경은 모든 인류 중 일부만을 선택하시고 나머지는 그 선택에서 제외하신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1.15)고 하였다.

 

이 가르침이야 말로 매우 엄중한 고백이다.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일으키는 두 가지 실제적 다툼을 언급하기 앞서 성경적 가르침에 우리 마음을 집중해 보자.

 

1. 과연 성경적 교리인가?

 

성경은 우리 믿음의 기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교리가 과연 성경적인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덧붙여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성경적인 것인지 살펴보는 이유는 이 교리를 부인하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 교리를 가르치는 성경 말씀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첫째, 예수님께서 당신이 생명의 떡이심을 교훈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단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35). 그러나, 무리를 향해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3:36). 그들은 왜 주님을 믿지 않았는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3:37).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가? 마음이 굳어있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신 말씀은 천부께서 당신에게 구원할 자 얼마를 주시고 다른 이들은 주시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 어떤 이들은 선택을 받은 반면, 나머지 사람들은 딱딱하게 굳은 마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다는 뜻이다.

 

둘째, 아마도 로마서 9장이 선택과 유기의 교리에 대한 가장 유명한 성경 말씀일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 장에서 야곱과 에서라는 역사적 인물들을 대조한다. 그리고나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 곧 야곱은 선택하시고 에서는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신학적 확증을 선언한다. 이 쌍둥이 형제는 모든 인류에게 참된 예로 작용한다.

 

셋째, 데살로니가전서 5:9에서 바울은 어둔 시대를 살고 있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자신들이 평안하고 안전하다” (살전 5:3)고 스스로 위로하는 자들을 성경은 밤과 어둠의 자식으로 묘사하거나 (살전 5:5), 우리가 사는 시대에 잠든 자들이라고 말한다 (살전 5:6-7). 그들은 노하심에 이르게 된 자들이지만, 우리 신자들은 그렇지 않다.

 

넷째,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4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왔다고 하는데,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것이다. 반면, 그는 7절에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들이 시편 118편의 말씀 곧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예수님을 거부하였다고 언급한다. 8절에서는 이사야 8장을 언급하며 예수님을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으로 선언하며,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그로 인해 넘어지는 이유는 그렇게 하기로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베드로전서 1:23-25에서 말씀하는 복음과 정반대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유다서 4절은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로서 교회에 사용되었다고 증거한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이니”.

 

그렇다면 이 선택과 유기의 교리는 성경적인 것인가? 답은 그렇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을 때 우리는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으로 구원받기로 선택되었으며, 그와 정반대의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시키기 위해 선택한 특정 사람들이 있다고 가르치는 성경의 구절들은 또한 선택하지 않으신 사람들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이 교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특징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간과하심(Preterition)이란 당신께서 누군가를 선택하실 때 또 다른 누군가는 거기에서 제외된다는 개념이다. 정죄는 하나님께서 제외된 자들을 영벌하시는 실제적 행위이다. 따라서 그것은 간과하심 이후에 나타나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해서, 선택과 유기는 병렬적인 관계가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적극적으로 선택하시는 반면 당신의 그 은혜를 거두셔서 죄인들을 그 죄 가운데 남겨두시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정죄함을 받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기에 대해 비방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가르침이 크리스천의 삶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종종 발생하는 두 가지 공통의 목회적 문제제기를 말해보려 한다.

 

2. 선택과 유기는 무서운 교리?

 

삶이 반은 비어있는 유리잔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유기의 교리를 듣고는 쉽게 의심에 빠져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 교리를 듣고서 힘겨워 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 어떤 신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신앙, 영혼의 확신, 양심의 평화를 지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순종을 열망한다. 그러나 그런 이들조차 항상 완벽한 확신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유기는 그들의 마음과 정신에 확신에 대한 의문을 일으킨다.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서 자기자신 안에 은혜가 일하도록 주신 수단을 영구히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구한 수단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례, 기도이다.

 

둘째, 어떤 지속적인 죄와 싸우는 신자들이 있다. 하나님과 더 강한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만드는 죄로 인해 고통 중에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니 유기에 대해 듣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자비하신 하나님은 꺼져가는 등불을 끄시거나 상한 갈대(, 고통 중에 있는 신자)를 꺽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마지막 셋째, 유기의 교리를 듣고서 두려워 떨어야 할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부류는 신자들이 아니라 육신의 쾌락과 세상에 대한 관심에 완전히 빠져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만약, 자신이 이런 부류의 사람이라면, 두려워 떨어야 한다. 그러나 그 교리를 들었을 때는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3. 우리 아이가 죽는다면?

 

두번째 실제적인 문제는 유기와 유아 사망의 관계이다. 도르트신조는 유기의 교리에 집착하는 자들을 다음과 같이 풍자하고 있다. “신실한 자들의 자녀들이 무죄한 상태에서 그 어미 품에서 빼앗겨 지옥에 던져진다” (도르트신조 결론).

 

이런 문제제기는 출산 중 유아사망률이 25%나 되고, 5세 미만의 사망률이 25%나 되었던 17세기에 아주 커다란 논란거리였으며, 또한 미국산부인과대학(ACOG)에 따르면 오늘날 의료과실로 10-25% 정도의 유아가 사망하는 입장에 처해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유기의 교리는 유아 사망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성경은 신자인 우리에게 우리 자녀들이 언약의 자녀들이라고 가르친다. 적어도 믿음의 부모 밑에 있는 아이들은 거룩하다 할 수 있는데(고전 7:14), 그것은 그 아이들이 무죄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리하여 부르신 백성들에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17:7). 다윗은 자기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눈물과 금식을 멈추었다. 그러면서 아들이 돌아오지 못할지라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삼하 12:23). 그곳이 어디인가 묻는다면,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라 말할 수 있다. 다윗은 언약의 한 일원으로 자신의 어미의 태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조성하시고 아셨다고 기도했다 (13:9). 신약으로 눈길을 돌려봐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자녀들에 관한 이 관점을 이어받아야 이야기했으며, 결코 이를 폐기하거나 무효화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19:14). 오순절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믿는 자들과 그 자녀들에게 있다고 설교했다 (2:39). 바울은 에베소서 6:1에서 자신의 편지를 읽고 있는 언약공동체 안에 자녀들도 포함된다고 쓰고 있다.

 

이것은 어린아이일 때 죽은 사람 모두가 천국에 간다는 뜻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신자들의 자녀들에 대한 확신을 주는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스펄전이나 찰스 핫지, 워필드 같은 위대한 인물들은 모든 유아들이 구원을 얻는다는 개인적 믿음을 피력했다. 그렇다면, 낙태로 죽은 생명들, 과실치사한 생명들, 혹은 태어나지도 못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불신 부모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은 선하시고 은혜로우시며 공평하신 분이며, 당신께서 정당하게 행하신다고 말해야 한다. 그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택과 유기의 교리는 우리가 온전히 선하시고 완전한 주권을 지니신 하나님을 믿고 있음을 가르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로우심뿐만 아니라 그 은혜와 사랑, 자비로 인해 영광을 받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