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stematic Theology/ㅡPredestination

예정론(Predestination) 2 - 대니얼 하이드(Daniel Hyde)

Bavinck Byeon 2015. 3. 11. 22:01

예정론 2: 그 얘긴 언제 해야 하는 거지?



예정에 대하여 크리스천들은 말하고 설교해야 하지만, “, 여러분 이제 예정론을 이야기해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과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를 매우 어색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예정론은 불신자, 혹은 신자들에게마저도 공격적인 느낌을 받게 한다. 나는 그런 어색함을 갖는 사람이 없기 바란다. 나를 포함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효과적인 증인되기를 소망한다. 우리에게는 예정론이라는 진리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하고, 사랑 안에서 그 진리를 말할 때 더 성숙한 지혜로움을 가져야 한다 (v. 4:15).

 

예정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몇 가지 전제를 알고 준비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교리를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상상해 보라. 그림을 그리려면 캔버스가 있어야 한다. 예정론은 그림물감이다. 그 그림물감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색칠할 캔버스로 시작하는 것이다.

 

1. 자신이 죄인임을 알자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한 뒤에 예정론을 이야기하라. 야곱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에 대한 응대를 위해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도르트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회의에서 선조들은 11항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어 그 저주 아래에 놓였으며, 영원히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들을 멸망 받게 하시고 죄 값을 치르게 하시는 것을 공의롭지 못하다 할 수 없다.” (도르트신조 1.1)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아담 안에서죄를 지었다는 뜻이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v. 12). 13-14에서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범한 이후로 모세의 지도 아래 있던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법을 범하기 전에도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아담 때문이다. 아담, , 죽음이라는 전개과정에 주목하라.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말았다. 우리가 이해할 것은 아담의 행위가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아담은 믿음의 선조들이 말했던 공인(public person)”이요 만인의 대표자였다. 대통령이 우리의 대표자이므로 중요한 인물이듯이, 아담은 오래 전 에덴동산에서 우리를 대표하였기 때문에 중요한 인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가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또한, 그 한 사람의 죄로 인해 사망이 세상에 들어와 모든 사람에게 미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 죄를 짓기도 전에 사망이 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쳤는가? 마지막 부분이 핵심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언제 범죄 하였는가? 바로 아담이 범죄 했던 그 순간이다. 한 사람의 죄 안에 모든 이들의 죄가 포함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 (2:1)로 태어난 것이며, “죄악 중에 출생하고 모친이 죄 중에 잉태한” (51:5) 존재들이다.

 

아담의 죄와 그 죄에 포함되어 있는 까닭에 우리는 창세기 2:15의 저주 아래 놓여있다. 로마서 5:15-19은 다시 한 번 연속적으로 아담과 예수님 사이의 크나큰 차이점을 말하면서, 우리에게 영원한 죽음이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 저주, 죽음.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이 세 가지 어휘를 점진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태초에 한 사람아담이 있었는데, 그의 행위는 세 가지 용어로 묘사된다. , 그는 범죄하였고(sinned)”, “불법을 행했으며(trespassed)”, “불순종하였다(disobedient)”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심판을 선언하셨다. 그리고 이 심판으로 인간은 정죄되어 영적이고, 영원한 육체적 죽음을 맞았다.

 

2. 하나님의 공평하신 정죄를 알자

 

이것은 사람들의 민감한 부분을 자극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는 분이 아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지옥에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는 까닭은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천국에 갈 수 있는 동등한 기회가 있다.” 이렇게도 질문한다. “성실하게 하나님을 구하는 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다문화적이고 다원적인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는 현대적 반론은 전혀 현대적이지 않다. 이것은 오래된 반론으로,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에 대한 답변을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죄성에서 나오는 반론인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증언한다. 성경은 우리 죄로 인해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 (3:19)이라고 말씀한다. 또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3:23)고 말씀한다. 성경은 죄의 값은 사망” (6:23)이라고도 선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들을 멸망 받게 하시고 죄값을 치르게 하시는 것을 공의롭지 못하다 할 수 없다. 하나님의 공평하신 정죄를 알고나서 예정을 말하라. 하나님은 오직 정의만을 행하시는 최고재판관이시다.

 

3.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난후에 예정을 말하라. 앞서서 도르트 신조 1.1항을 언급했는데, 이제 예정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1.2항을 살펴보자.

 

그러나, 이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으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서신을 읽는 이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요일 4:7)고 교훈했다. 그리고 다시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v. 11)라고 하였다. 요한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의 원인이다. 그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 (v. 7)이므로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당신께 난 자로 당신을 아는 자는 누구든지 사랑을 주신다 (v. 7). 그러면서 요한은 그 궁극적인 원인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v. 8).

 

4. 하나님 당신 자신을 향한 사랑

 

예정을 말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 (v. 9)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신학자들의 표현대로, 이 사랑은 하나님 안에 내적이고(ad intra), 자연스러우며(amor naturalis), 필연적으로(amor necessitas) 존재하였다가 이후에 하나님께로 자발적으로(amor voluntaries) 나타났으며 그분의 아들을 보내셔서 외적으로(ad extra) 드러났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 아들을 보내심으로 나타났음을 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뜻을 되새겨 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랑을 체험하기 이전에 어떠한 사랑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4:9-10에서 하나님과 그 독생자에 대해 읽으면서 그 본질을 잠깐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이신 그분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영원하고도 자기 충족적으로 존재하신다. 창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 삼위 사이의 관계 속에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셨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은 그 시작점이 있고, 친구를 향한 사랑도 출발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것은 시작점이나 출발점이 없는 항상 존재해 온 사랑이다.

 

요한복음 17장을 보라. 예수님은 22-23에서 교회의 연합을 위해 성부께 기도하면서, 23절 말미에 그 목적이 무엇인지 밝힌다.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것은 그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동안에 성부께서 그분을 사랑하셨다는 뜻인가? 그 사랑은 예수님의 세례 중에 나타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3:17). 이 사랑은 좀더 거슬러 올라간다. 요한복음 17:24에서, 예수님은 당신 백성들이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기도하신다. 끝으로 요한복음 17:26에서 주님은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삼위일체이신 당신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고 자기 충족적 사랑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토마스 맨튼(Thomas Manton)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 자신 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지 않으시거나 사랑하지 않으신 적은 없다. 우리는 오래된 친구를 귀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게 가장 오랜 친구는 바로 하나님이신데, 그분은 사랑받을 만한 때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았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기 전부터 우리를 기억하고 계신 분이셨다.

 

맨튼이 한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완벽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4장에 따르면 이 사랑이 우리를 향한 사랑의 전형적 모범인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당신 자신에 대한 사랑은 성령의 교통 속에서 성자를 향한 성부의 친밀한 사랑이다. 영원한 성자는 성부의 총체적 사랑의 첫 대상이시다. 존 오웬(John Owen)은 성자는 성부의 깊은 곳에 계시며, 그 사랑으로 영원히 결합된 상태로 계시다고 말한다.

 

5.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예정을 말하기 전에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 성 삼위 하나님 사이의 영원하고 내적이며 자기충족적 사랑은 세상에 자기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바되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kosmos’는 요한의 글들에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첫째, 이 어휘는 피조세계를 의미한다 (1:3, 10; 17:5, 24; 21:25). 이것은 일반적으로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 둘째, 그 지위를 잃어버린 인간세계(3:16, 17, 19; 4:42; 8:23; 9:39; 12:47; 12:31; 13:1; 16:11; 18:36; 요일 4:14)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세계를 이를 때 이 어휘를 사용한다 (1:10, 29; 4:42; 6:33, 51; 12:19, 46-47; 14:17, 19; 16:20; 17:21, 요일 2:2; 3:1) 이 세상은 예수님 (7:7)과 제자들(15:18-19; 요일 3:13, 17)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구세주가 필요하다. 죄로 인해 인간은 마땅히 정죄받을 만 하지만, 하나님은 죄인들에 대해 특별한 사랑을 갖고 계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3:16).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에서 건지신 당신의 독특한 백성을 사랑하신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0). 제임스 패커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은 어떤 면에서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신다그러나 전적으로 보면 일부만을 사랑하신다.”

 

그렇다면, 예정론의 측면에서 이 모든 서술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예정론을 말할 때, 먼저 성경적인 가르침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적인 가르침이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인됨과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 그분의 깊고도 높은 사랑 등을 이르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 이후에야 예정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