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stematic Theology/ㅡPredestination

예정론(Predestination) 5 - 대니얼 하이드(Daniel Hyde)

Bavinck Byeon 2015. 3. 11. 22:42

예정론 5: 내가 선택받은 자 맞을까?



예정론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택자인가?” 이 질문은 확신에 대한 문제를 보여준다. 16세기 로마 가톨릭의 트렌트공의회는 자신이 택자란 사실을 안다고 말하는 자는 성급한 가정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생에서는 영광에 이르는 불변적 선택이 맺는 열매나 의식, 혹은 어떤 확실성 따위를 가질 수 없다. 어느 때나 변할 수 있고 불확실한 조건만이 존재한다.” (도르트신조 1항 오류의 거부 7)

 

그들은 우리 신자들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불확실성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당신은 자신이 택자임을 확신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이것은 믿음과 구원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해 알아두자. , 어떤 절망이나 두려움을 일으키려는 의도에서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던지는 매우 실제적인 질문이다.

 

1.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인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이것이 선택의 확실성에 관한 첫 번째 답변이다. 예를 들어, 베드로후서 2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베드로는 자신을 으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지칭 한다 (v. 1). 그리고나서 그는 자신의 편지를 받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v. 1). 이것은 놀라운 말이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한때 유대계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자신의 신망을 잃을까 두려워 이방인 크리스천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기를 거부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자신이 베드로를 면전에 두고 책망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베드로는 자신의 행동으로 말보다 큰 소리로 복음을 부인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이방인 크리스천들보다 유대계 크리스천들이 더 높은 계층의 크리스천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 사도들과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말이다.

 

또한,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 (v. 3)이신 하나님에 근거하여 우리는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게 된 것” (v. 4)이다. 9절에서 베드로는 교훈과 경고를 하면서도,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입었다고 말한다. 이런 모든 이유로 인해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v. 10).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우리는 부르심을 입었고 선택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것을 굳게 하는 것이다.

 

2.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우리가 서 있는 단계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기본적으로 안전한 곳에 서 있지만, 신자로서 우리 각자는 그 관계성에 있어 실제 어떤 단계에 있는지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단계에서 전능하신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서 있는 경험을 한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객관적 현실과 이에 대한 주관적 체험은 다르다. 우리의 믿음의 객관성은 확실한 반면 매순간 그 객관성에 대한 체감은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를 도르트신조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하나님께서 다양한 정도와 여러가지 방식으로 때에 맞춰 당신 백성들을 선택하시지만, 그 선택하심이 영원불변하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도르트신조 1.12).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 베드로후서 1:5-7은 이를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이다. 우리 모두 성숙의 정도는 다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으로 조부모 수준일 수 있다. 또 다른 이들은 부모 수준일 수도 있다. 혹은 10대 수준일 수도, 심지어 젖먹이 수준일도 있다. 베드로가 5-7에서 말하고 있는 수준들이 우리 안에서 높아져야 하고, 만약 그러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v. 8) 되는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성장함에 있어 우리는 침체될 수도 있고, 역동적이 될 수도 있다. 베드로가 1:9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다시 보라. 베드로는 참 신자조차 이런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을수 있다고 말한다.

 

베드로의 말 속에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개개인마다 다르게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나의 성장이 다른 사람의 성장과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왜 그런가? 도르트신조의 말을 들어보자. “참 신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확신할 수 있고, 또 확신 한다” (도르트신조 5.9; 12:3). 우리 각자의 믿음의 분량이 있고, 우리는 서로 다른 정도로 서로 다른 인생의 때에 그 믿음을 기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3.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표지

 

그렇다면, 나 자신이 점점 더 성숙해지고 확신이 자라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표지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선택의 확신을 하나님의 비밀하고 깊은 것을 호기심으로 탐구하여” (도르트신조 1.12) 찾을 수 없다. 확신은 추측이 아닌 계시의 문제이다. 선택의 표지를 하나님에게서 찾지 말고 그분의 말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택의 표지를 뭐라 말하는가? 다시 한번 도르트신조를 보면 아주 유용한 답을 발견하게 된다. 신자들은 영적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나타난 썩지 않는 선택의 열매, 곧 참 믿음, 충성스러운 경외심, 죄에 대한 경건한 애통,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함 등을 스스로 보게 되는 것” (도르트신조 1.12) 이다. 믿음의 선조들은 우리들을 천국으로 끌어올리거나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을 찾게 하지 않고, 성경 앞으로 인도해 주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기한 능력으로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 (벧후 1:4)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베드로전서 1:1에서 언급한 것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인 것이다. 도르트신조 1.12항에서 맨처음 그리스도 안에서 참 믿음으로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하라. 참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 있어 첫 표지이다.

 

그 다음 표지는 충성스러운 경외심이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에 대한 자녀들이 보여주는 존경심과 같은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당신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존경심으로 듣고 또한 그 인도해주심대로 따른다.

 

세 번째 표지는 죄에 대한 경건한 애통이다. 우리는 당신의 율법에 대항하고 불순종하여 하늘 아버지를 슬프게 했다는 것을 애통해 한다.

 

도르트신조에서 언급하고 있는 마지막 표지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함이다. 이 표현은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나타나고, 또한 베드로후서에도 등장한다. “이러므로 너희가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 1:5-7).

 

선택의 교리를 믿는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믿음과 회개, 거룩 등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약간 조롱 섞인 비난을 한다. 그런데, 베드로의 말은 이 조롱 섞인 주장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이 같은 비난은 사도 바울이 살았던 시대 이후로 줄곧 이어져 내려왔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1:8).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6:1). 하나님 자녀에게 선택교리는 육신적 확신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 속에서 이 육신적 확신의 유혹을 경계하라. 육신적 확신은 신중함보단 경망스러움을 낳고, 열심보단 굴종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참되고 영적인(, 성령이 만드시는) 확신은 경건을 위한 더 큰 동기를 부여한다. 확신은 겸손을 결과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찬송하게 만든다. 또한 그것은 생각과 언행에 순수성을 지키려는 의지를 발현시키고, 구세주와 그 백성들, 잃어버린 세상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으로 인도한다.

 

4. 결론

 

자신이 택자임을 확신하는가? 위대한 영국 찬송작곡가 존 뉴튼은 이 확신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노래로 답하였다.

 

진정 알고자 했던 것 자주 일어나는 사나운 생각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가? 혹 아닌가? 나는 주의 것인가? 혹 아닌가?

 

만약 주님을 사랑한다면 왜 나는 이러한가? 왜 내 겉모습은 어둡고 생기가 없는가? 주의 이름을 단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여 단언컨대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있으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았다 했는데 내 마음은 굳어있고,기도는 일이요 짐이 되어 버렸으며 소소한 일상들이 고통을 주네

 

눈을 돌려 내 안을 살피니 모두 어둠, 공허, 황량함 뿐 불신앙과 죄로만 가득 내가 주의 자녀가 맞는 것인가?

 

기도하고 듣고 읽을진대 죄가 나의 행위와 섞여있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그대여 내게 말해보라 주님 사랑이 그대와 함께 하는가?

 

뉴튼의 노래가 자신의 것처럼 들리는가? 하나님과 함께 서 있는 것은 마치 망망대해에 높이 솟아있는 바위 위에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라. 당신의 디딘 발이 안전함은 그 바위가 안전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망망대해 위에 솟아있는 바위에 서 있는 것과 진배없다는 것을 다시 말한다.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부딪혀 당신을 놀라게 할 수도 있다.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바위에서 서 있을 동안 당신은 바위가 미동도 하지 않고, 파도에 휩쓸리는 등의 위협 따위는 없을 것이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믿음을 굳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