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eds & Confessions

벨직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 1561) - 이제롬(Jerome Lee) 목사 번역

Bavinck Byeon 2024. 1. 28. 15:55

벨직신앙고백서(Belic Confession, 1561) 한글 새번역

이제롬(Jerome Lee) 목사 번역

 

[본 글은 역자이신 이제롬 목사의 허락하게 게재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캐나다 개혁교회의 교리표준 중에 첫 번째 것은 참된 기독교 신앙에 대한 고백서입니다. 이것은 흔히 벨직신앙고백서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오늘날 벨기에로 알려진 네덜란드의 남부에서 처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서의 저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설교자였던 기도 드브레인데, 그는 1567년에 이 기독교 신앙으로 말미암아 순교했습니다. 16세기 네덜란드의 교회는 로마 가톨릭 체제로부터 극심한 박해 가운데 있었습니다. 기도 드 브레는 당시의 잔혹한 탄압에 항거하고, 또한 개혁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씌워진 혐의처럼 반역자가 아니라 오히려 법을 준수하며 성경에 따라 참된 기독교 교리를 고백하는 시민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1561년에 이 고백서를 작성했습니다. 다음 해에 이 고백서의 사본에 탄원자들의 청원서를 첨부하여 필립 2세 왕에게 보냈는데, 이 청원서에서 그들은 선언하기를 합법적인 일에는 정부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만일 이 고백서에 담긴 진리를 부인해야 한다면 차라리 “우리의 등을 채찍에 내어주고, 우리 혀를 칼에 내어주며, 우리 입을 재갈에 맡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온 몸을 불사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비록 박해로부터 자유를 얻고자 했던 일차적인 목적은 달성되지 않았고, 드 브레 역시 수천의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려야 했지만, 그의 노고는 잔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대대에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저자는 이 신앙고백서의 작성을 위해 칼빈이 주로 작성하여 2년 먼저 출판했던 프랑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를 어느 정도 참조했습니다. 하지만 드 브레는 그저 칼빈의 것을 가져다 수정하여 이 고백서를 만든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교회들은 즉시 이것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16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 열린 전국 총회에서도 이 고백서를 채택하였습니다. 1618-1619년에 열린 위대한 도르트 총회에서는 내용이 아닌 문구에만 주의 깊게 수정을 가한 후 이 고백서를 개혁교회 교리표준의 하나로 채택하여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이 여기에 동의서명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고백서는 개혁주의 교리에 대한 최고의 신조문으로서 그 탁월성이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구원에 관한 교리를 요약해서 담고 있는 참된 기독교 신앙의 고백

 

*벨직신앙고백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다섯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Ⅰ. 제1~11조 : 하나님, 그리고 그분을 아는 방법

Ⅱ. 제12~15조 : 창조와 섭리, 타락과 그 결과

Ⅲ. 제16~26조 : 선택, 그리스도, 그리고 구원의 은덕

Ⅳ. 제27~35조 : 교회와 성례

Ⅴ. 제36~37조 : 교회와 정부, 그리고 최후의 심판 ㅡ 역자 주

 

제1조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순전하신 영적 존재시라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 그분은 다음과 같은 속성을 갖고 계신다. 영원함, 불가해성, 불가시성, 불변성, 무한함, 전능함, 완전한 지혜, 의로움, 선함, 그리고 모든 선의 원천이 되심.

 

제2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방법

 

우리는 두 가지 방편을 통해 그분을 알게 된다. 첫째,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통치하시는 것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지극히 아름다운 책으로서 그 안의 크고 작은 모든 피조물은 수많은 글자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특성들, 즉 로마서 1:20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바 있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인도해준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죄를 정하고 핑계할 수 없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생에서 그분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그분의 거룩하고 신성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보다 분명하고 온전하게 알려주신다.

 

제3조 하나님의 말씀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뜻대로 지어진 것이 아니고 사도 베드로의 말처럼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21)임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각별히 우리를 보살피시는 가운데 선지자와 사도 같은 그분의 종들에게 명하사 그분께서 계시하신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고, 또한 하나님께서도 친히 그분의 손가락으로 율법의 두 돌 판을 기록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기록된 것들을 거룩하고 신성한 책, 곧 성경이라고 부른다.

 

제4조 정경 (正經)

 

우리는 성경이 구약과 신약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둘이 곧 정경이라는 사실에 대해 어떠한 이의(異議)도 제기할 수 없음을 믿는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인정되는 성경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구약성경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모세오경.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신약성경 :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사복음서. 사도행전. 사도 바울이 쓴 열세 개의 서신인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그 밖의 일곱 서신인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1,2,3서, 유다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제5조 성경의 권위

 

우리는 이 책들 전부를, 그리고 오직 이것들만을 우리 신앙의 규율과 기초가 되고 그것을 확증할 수 있는 거룩한 정경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데, 그것은 교회가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인정해서만이 아니라 특별히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증명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 스스로 그에 대한 증거를 담고 있기도 한데, 이는 소경이라 할지라도 성경의 예언들이 성취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6조 정경과 외경의 차이

 

우리는 이 거룩한 책과 외경을 구분하는데, 이 외경에는 에스드라3,4서, 토빗, 유딧, 지혜서, 집회서, 바룩, 에스더 부록, 아사랴의 기도, 풀무 속 세 소년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 므낫세의 기도, 그리고 마카비1,2서가 있다. 교회는 이 책들이 정경과 일치하는 한 그것을 읽고 거기서 교훈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들에는 우리의 신앙이나 기독교의 요점을 확증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이나 권위가 없다. 하물며 이 책들을 사용함으로써 정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제7조 성경의 충족성

 

우리는 이 성경 안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담겨 있으며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믿어야만 하는 모든 가르침이 충분히 들어있음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의 모든 양식도 그 안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심지어 사도라 할지라도 이제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합당치 않다. 참으로 사도 바울의 말처럼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갈 1:8) 이는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가감하는 일을 금하셨으므로(신 12:32) 이로써 그 안의 교리가 모든 면에서 가장 완벽하고 완결하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아무리 거룩한 사람의 글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성경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 밖에도 관습이나 다수의 견해, 역사적 가치, 특정 시대나 인물을 계승하는 것, 공의회의 결정이나 결의 혹은 법규 등도 하나님의 진리와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진리는 모든 것 위에 있으나 사람은 스스로 거짓되고 “입김보다 가볍기”(시 62:9)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사도들이 가르쳐준 무오한 규칙에 따라 그에 어긋나는 것들을 온 마음을 다해 거부한다.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요일 4:1) 또한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요이 1:10)

 

제8조 하나님은 본질 상 하나이시면서 또한 삼위로 구별되신다.

 

이러한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믿는다. 하나님은 그 본질에 있어 한 분이시면서 또한 삼위로 계시는데, 그 삼위 간에는 비공유적 특성이 있어서 실제로, 참으로, 그리고 영원히 구별되시는 이른바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신다. 성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원인과 근원, 그리고 출발점이시다. 성자는 성부의 말씀이요 지혜이고 형상이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영원한 능력과 권능이시다. 그렇지만 이렇게 구별되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셋으로 나눠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가 각각 존재하고 그 특성 상 구별이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러한 삼위는 오직 유일하신 한 분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며, 마찬가지로 성령 또한 성부와 성자가 아니신 것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이 삼위는 그렇게 구별은 될지언정 서로 나뉘거나 섞이지 않는데, 왜냐하면 성부는 우리의 살과 피를 입으신 적이 없고 그 점에서 성령도 마찬가지인데 반해, 오직 성자만 그러하셨기 때문이다. 또 성부는 결코 그분의 성자나 성령 없이 존재하신 적이 없다. 왜냐하면 이 세분은 하나의 동일한 본질로 계시므로 영원히 동등하시기 때문이다. 먼저 되거나 나중 됨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 세 분이 진리와 능력,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있어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제9조 이 교리의 성경적 근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성경의 증거와 삼위 각각의 사역, 특히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봄으로써 알게 된다. 우리가 이 거룩한 삼위일체를 믿을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성경의 증거는 구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 모든 곳을 다 거론할 필요는 없고 몇 군데만 선별해서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 27)라고 하셨다. 또한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창 3:22)라고도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말씀에서 하나 이상의 신적 위격이 존재함이 분명히 드러나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위격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시지만, 구약에서 다소 희미하게 보이는 것도 신약에서는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부의 음성이 들려와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 3:17) 성자는 물 가운데 계셨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려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줄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베풀라’(마 28:19)고 명하셨다. 누가복음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우리 주님의 모친인 마리아에게 이렇게 전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라는 말씀도 있다. 성경의 이 모든 곳에서 우리는 오직 한 분의 신적 본질 안에 삼위가 계심을 충분히 배우게 된다.

 

비록 이 교리가 인간의 모든 이해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기는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그것을 믿으며, 나아가 장차 천국에서 그 진리를 온전히 알게 되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을 바라본다.

 

또한 우리는 이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일로 인해 서로 구별되는 독특한 직함을 갖고 계심을 살펴보아야 한다. 즉 성부는 그 능력으로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고, 성자는 그 피로 우리의 구원자와 구속주가 되시며,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 거하심으로 우리의 성화주가 되신다. 이 성삼위일체 교리는 사도 시대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대인과 무슬림에 맞서, 그리고 정통 교부들로부터 정당하게 정죄된 말시온, 마니, 프락세아스, 사벨리우스, 사모사타의 바울, 아리우스 등과 같은 거짓 그리스도인과 이단들에 맞서 참 교회 안에서 항상 지켜지고 보존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교리와 관련하여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세 신경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또한 그 내용과 부합하는 초대 교부들의 결정도 받아들인다.

 

제10조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성에 있어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심을 믿는다. 그분은 영원부터 나셨으되 만들어지거나 창조되지 않으셨다. 만약 그렇다면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시고, 똑같이 영원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시며, 모든 면에서 성부와 동등하시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우리의 본성을 입으셨을 때부터만 그러하신 것이 아니고 영원부터 그러하시다. 다음의 증거들을 서로 비교해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즉 모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다. 사도 요한은 만물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음 받았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한다.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통해 세상을 지으셨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필연적인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곧 하나님, 말씀, 아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 불리는 그분은 스스로 만물을 창조하실 그 때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 또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그분을 부르고 예배하며 섬긴다.

 

제11조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 성령님

 

우리는 또한 성령님께서 영원부터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심을 믿고 고백한다. 그분은 만들어지거나 창조되거나 혹은 나신 분이 아니시고, 오직 다른 두 분에게서 나오신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분은 순서상 거룩한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시고, 성부, 성자와 함께 하나의 동일한 본질과 위엄, 그리고 영광에 속하신 분이시며,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얻는 가르침이다.

 

제12조 만물의 창조, 특별히 천사에 관하여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곧 그분의 아들을 통해,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성부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그 존재와 모양과 형태를 주셨고, 자기들의 창조주를 섬기는 일에 각각의 특정한 임무와 역할을 주셨음을 믿는다. 뿐만 아니라 성부께서는 그분의 영원한 섭리와 무한한 능력으로 만물을 지탱하시고 다스리시는 일을 쉬지 않으심으로써, 그 만물은 사람을 섬기고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심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천사들을 선하게 창조하셔서 그분의 사자를 삼으시고 택하신 자들을 섬기도록 하셨다. 이들 중 일부는 자기들을 창조하실 때 부여하신 그 존귀한 위치에서 타락함으로써 영벌에 처하게 되었으나, 나머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처음의 상태를 굳게 지켜 그 위치를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 이 마귀와 악한 영들은 심히 부패하여 하나님과 모든 선에 대항하는 원수이다. 그들은 마치 살인자처럼 숨어 있다가 교회와 성도들을 무너뜨리고 자기들의 악한 꾀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일에 온 힘을 다 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그 악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정죄 받았고, 날마다 자기들이 받을 그 끔찍한 고통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과 천사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의 오류를 혐오하며 거부한다. 또한 마귀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며, 부패하게 된 것이 아니라 본질 상 악하다고 하는 마니교의 오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제13조 하나님의 섭리

 

우리는 이토록 선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그것을 버려두시거나 운명이나 우연 따위에 맡겨두지 않으심을 믿는다. 오히려 그분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그것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심으로써 세상의 그 어떤 일도 그분의 지시 없이는 일어나지 않음을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죄를 짓게 하시는 것은 아니며, 또 죄를 저지르고 그분께 그 책임을 돌릴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은 너무도 크고 인간의 지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그분은 가장 뛰어나고 공의롭게 모든 일을 정하고 행하시기 때문이며, 이는 설사 마귀와 악인들이 악한 행위들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각을 초월하여 행하실 때 우리는 호기심으로 우리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을 묻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지극히 겸손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추신 그 공의로우신 판단을 흠모한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에 만족하여 그분께서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만을 배우고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다.

 

이 교리는 우리에게 형언할 수 없는 위로를 준다. 왜냐하면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의 지시 없이는 우리에게 그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나는 법이 없음을 거기서 배우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를 지켜보시고, 모든 피조물을 그분의 권능 아래 두어 지키시므로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조차 - 그것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 혹은 참새 한 마리조차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마 10:29, 30). 우리가 이것을 신뢰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마귀와 우리의 모든 원수를 붙들고 계시어 그분의 허락과 뜻이 없이는 우리를 해하지 못하도록 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저 우연에 맡겨두신다고 하는 에피쿠로스학파의 가증한 오류를 거부한다.

 

제14조 인간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참된 선을 행할 수 없는 무능력

 

우리는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선하고 의로우며 거룩하게 만드셨음을 믿는다. 그 첫 사람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한 뜻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그것에 감사하거나 그 탁월함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자신의 의지로 죄에 굴복하였고, 그 결과 사망과 저주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받은 생명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이고, 자신의 죄로 참 생명이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며, 결국 자신의 본성 전체가 부패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그는 영과 육의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사람이 이처럼 악하고 비뚤어져 모든 일에서 부패해버렸기 때문에 그는 전에 하나님께 받았던 탁월한 은사들을 전부 잃게 되었다. 약간의 흔적 외에는 이제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지만, 그것 만으로도 사람이 핑계치 못하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이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빛이 어둠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인데, 성경은 이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고 하신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모든 인류를 가리켜 어둠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관련하여 이와 반대되는 모든 교훈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의 종”(요 8:34)이요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라고 하셨는데, 누가 감히 스스로 조금이라도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자부하겠는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 8:7)라는 말씀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누가 자신의 의지를 자랑 삼겠는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고전 2:14)라고 하셨는데, 누가 자기의 지식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라는 말씀을 깨닫는 사람이라면 누가 감히 무슨 일이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다음과 같은 사도의 말은 여전히 참으로 지당하고 틀림없는 말씀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왜냐하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같이, 그분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누구도 하나님의 지각과 뜻에 합한 지각이나 뜻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제15조 원죄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 가운데 원죄가 들어와 자리하게 되었음을 믿는다. 이로써 사람의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었고, 심지어 그 악함은 모태의 영아들에게까지 전해져 내려간다. 그것은 뿌리가 되어 사람 안에 온갖 종류의 죄가 자라나게 한다. 따라서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불결하고 가증스러운 이 원죄는 인류를 정죄하기에 충분하다. 원죄는 세례를 받아도 없어지거나 그 뿌리가 뽑히지 않는데, 이는 마치 샘에서 물이 솟아나듯 이 비통한 근원에서부터 끊임없이 죄가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원죄의 전가로 인해 정죄에 이르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은혜와 자비로 죄사함을 얻는다. 하지만 이것은 신자들이 죄를 지으면서도 평안히 잠자리에 들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 부패함을 알게 됨으로써 그들은 자주 탄식하며 속히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받기를 열망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원죄는 그저 모방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하는 펠라기우스의 오류를 거부한다.

 

제16조 하나님의 선택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그의 모든 후손이 영벌과 파멸에 던져진 그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비와 공의를 명백히 보여주셨음을 믿는다. 자비는 어떤 이들을 이 영벌에서 구하고 건져 내심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계획 가운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선택하셨는데, 이는 그분의 순전한 선하심을 따라 하신 일이지 그들의 행위를 조금도 고려한 것이 아니다. 반면 공의는 그 외의 사람들을 자기들 스스로 빠진 그 타락과 영벌의 상태에 내버려 두심을 말한다.

 

제17조 타락한 인간의 구원

우리는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렇게 스스로 육신과 영의 죽음에 빠져들어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음을 보시고, 그분의 경이로우신 지혜와 선하심 가운데 비록 그가 떨며 그분에게서 도망칠 때에도 사람을 찾아오셨음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갈 4:4) 하심으로써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 사람을 복되게 하시리라는 약속을 주심으로써 그를 위로하셨다.

 

제18조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심

 

우리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우리 선조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성취하셨음을 고백한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분의 영원하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어 종의 형체를 갖고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빌 2:7). 그분은 참으로 온갖 연약함이 가득한 실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으나 죄는 없으셨는데, 이는 그분께서 인간의 행위가 아닌 성령님의 능력으로 축복 입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인간의 육신적 본성만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영혼도 취하셨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사람이 되시고자 함이었다. 왜냐하면 타락은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에도 미치기 때문에 그 둘을 다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둘을 다 취하셔야 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친으로부터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사실을 부인하는 재세례파 이단에 반대하며, 그리스도께서 자녀들의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을 고백한다(히 2:14).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시며(행 2:30),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3), 동정녀 마리아의 태 중에 잉태되시어(눅 1:42) 여자에게서 나셨다(갈 4:4). 또한 다윗에게서 난 한 가지이시고(렘 33:15),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이시며(사 11:1), 유다지파에서 나셨고(히 7:14), 육신으로 하면 유대인의 자손이시요(롬 9:5),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갈 3:16)이신데, 이는 그 아들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면에서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만 했으나, 죄는 없으셨다(히 2:16, 17 ; 히 4:15).

 

이로써 그분께서 참으로 우리의 임마누엘,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마 1:23)이 되신다.

 

제19조 그리스도 한 분 안의 두 본성

 

우리는 이와 같은 방식의 잉태로 말미암아 성자 하나님의 위격과 인간의 본성이 분리할 수 없도록 연합되고 결합되었음을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둘이 된 것도 아니고, 존재 자체도 둘이 아니며, 오직 두 본성이 하나의 단일한 존재 안에 연합된 것이다. 각각의 본성은 자체의 고유한 특성들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분의 신성은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히 7:3) 언제나 창조되지 않은 그대로이며 하늘과 땅에 충만하다. 그분의 인성 역시 그 특성을 그대로 갖고 있는데, 곧 시작한 날이 있고 창조된 것이며, 따라서 유한하고, 그 안에 참된 육신의 모든 특성들을 다 보유하고 있다. 비록 부활하심으로써 그분의 인성이 불멸의 것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 인성의 실체는 변화시키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우리의 구원과 부활 역시 그분의 실체적인 육신을 따라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분의 존재 안에 있는 이 두 본성은 너무나도 단단히 연합되어 있어서 심지어 그분이 죽으실 때도 분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분께서 죽으실 때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신 것은 육신에서 떠난 실제 인간의 영혼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분의 신성은 무덤에 누워 계실 때조차 그분의 인성과 연합된 채로 있었다. 그리고 그 신성은, 비록 잠시 동안은 그다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적이 있었을지라도,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그분 안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분을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으로 고백한다. 참 하나님이심은 그분의 능력으로 사망을 정복하시기 위함이고, 참 사람이심은 그 육체의 연약함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함이다.

 

제20조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우리는 완전한 자비와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시어 이전에 순종치 않았던 인간의 본성을 취하게 하셨고, 동일한 그 본성 안에서 아버지의 요구를 만족케 하셨으며, 극심한 고난과 사망을 통해 죄의 형벌을 감당케 하셨음을 믿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분의 아들에게 지우신 후 그 아들을 벌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명백히 드러내셨고, 반면 죗값을 치르고 정죄 받아야 마땅한 우리에게는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를 부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완전하신 사랑으로 우리 대신 그분의 아들을 사망에 내어 주셨고, 또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그분을 일으키심으로써 그분을 통해 우리가 불멸의 영생을 얻게 하셨다.

 

제21조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케 하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심이 맹세를 통해 확증되었음을 믿는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아버지 앞에 우리를 대신해 자신을 드리셨고, 아버지의 요구를 온전히 채워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셨으며, 또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십자가에 달려 그분의 보혈을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사 53:5, 7, 12)고 하셨고, 실제로 본디오 빌라도가 처음에는 그분에게 무죄 선언을 했지만 결국 그분을 범죄자로 정죄했다. 그분은 “(자신이)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주게 되었고”(시 69:4),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벧전 3:18). 또한 우리의 죄로 인한 끔찍한 형벌을 받으심으로 영과 육에 고난을 당하셨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눅 22:44) 마침내 그분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소리치셨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견디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고전 2:2) 아무 것도 알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빌 3:8) 우리는 그분의 상함 안에서 위로를 발견하고, 신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는 이 유일한 한 번의 제사(히 10:14) 외에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방법도 찾거나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분을 예수, 곧 구원자라고 부른 이유이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제22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우리의 칭의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참된 믿음의 불씨를 붙여 주셔야만 이 커다란 신비를 참으로 알게 됨을 믿는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공로를 받아들이게 되고, 그분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며, 그분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찾지 않게 된다. 이는 반드시 다음 둘 중의 하나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전부가 아니던지, 반대로 만약 전부라면 믿음으로 그분을 받아들인 사람은 완전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분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끔찍한 신성모독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는 반쪽짜리 구원자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과 같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롬 3:28)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가 하면 엄밀히 말해서 믿음 그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의 의(義)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해주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모든 공로와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이루신 많은 거룩한 일들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믿음은 우리가 그분과의 교통 가운데 그분의 모든 은총을 받으며 그분께 붙어있도록 해주는 도구이다. 그 은총이 우리의 것이 될 때 그것은 우리의 죄를 충분히 사하고도 남음이 있다.

 

제23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우리의 축복이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바로 거기에 있음을 믿는다. 이것이 바로 다윗과 바울의 가르침이다. 이들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롬 4:6 ; 시 32:1)에 대해 말했고, 바울 사도 역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롬 3:24)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이 견고한 기초를 붙든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시인한다. 어떤 것도 우리 자신을 위해 주장하지 않고, 그것을 우리의 공로로 내세우지 않되,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순종만을 의지하고 의탁한다. 즉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그분의 순종이 이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가리는 일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하며, 우리의 양심을 두려움과 무섭고 떨림에서 해방시켜 줌으로써 우리의 첫 조상 아담이 떨면서 숨어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리려 했던 전례를 따르지 않게 해준다. 이는 참으로 의심의 여지없는 일이다. 만약 우리가 눈곱 만큼이라도 우리 자신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선다면 (화 있을진저!), 우리는 불타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윗과 같이 말해야만 한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제24조 우리의 성화와 선행

 

우리는 이와 같은 참된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으로 사람 안에 생겨남을 믿으며, 그 믿음으로 사람이 거듭나고 새롭게 됨을 믿는다. 참된 믿음을 통해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되고 죄의 종 된 상태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이처럼 사람이 믿음으로만 의를 얻게 되면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데 무관심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런 믿음이 없이 하는 행위는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 혹은 정죄 받을 것이 두려워서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룩한 믿음이 사람 안에서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 아니고, 성경의 말씀대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시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이런 일들은 믿음의 선한 뿌리에서 자라나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성결해지므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행위가 우리의 의로움에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즉 그 어떤 선한 일을 하기 전에도, 오직 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안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릴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러한 일도 선한 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을 하되 공로를 쌓기 위해 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슨 공로를 쌓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빚을 진 것이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을 지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행을 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한편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행에 대해 상을 주신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을 더욱 빛나게 하시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선을 행할지라도 우리 구원의 근거를 거기에 두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는 육신의 소욕으로 더러워져 벌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다. 설사 한 가지 선행을 보인다 해도 전에 지은 죄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받지 않으실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우리의 구원자께서 사망과 고난을 통해 이루신 그 공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어떠한 확신도 없이 요동칠 뿐만 아니라, 가엾은 우리의 양심은 끊임없는 고통 가운데 놓이게 될 것이다.

 

제25조 율법의 성취이신 그리스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율법의 의식과 상징들은 종료되었고 모든 그림자가 성취되었음을 믿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들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 안에 담긴 진리와 본질은 그것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아직도 남아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여전히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사용하는데, 이는 복음의 교훈 위에 우리 자신을 굳게 세우기 위함이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온전한 진실함 가운데 우리의 삶을 다스려 가기 위함이다.

 

제26조 중보자 그리스도

 

우리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중보자이자 대언자이심을 믿는다. 이를 이루시기 위해 그분은 신성과 인성이 함께 연합된 사람이 되셨고, 그리하여 우리가 엄위하신 하나님께로 막힘없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께서 당신과 우리 사이에 세우신 이 중보자의 위대하심이 너무 두려워 우리 마음에 맞는 다른 이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하늘과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는 피조물은 없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셨음에도 자기를 비워 우리를 위해 사람과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빌 2:6, 7), 또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히 2:17). 따라서 만약 다른 중보자를 찾아야 한다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도 우리를 위해 그 생명을 버리신(롬 5:8, 10) 분보다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찾을 수 있겠는가? 만약 권세와 능력 있는 자를 찾아야 한다면, 아버지 우편에 앉으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쥐고 계신(마 28:18) 분보다 더 한 이가 있겠는가? 그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너무도 사랑하시는 그분의 친 아들 말고 누구의 말을 더 귀 기울여 들으시겠는가?

 

그러므로 그것은 순전히 믿음이 없어서이고, 성인들을 명예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불명예를 안겨주는 행태이며, 성인들 자신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또 하라고 한 적도 없는 일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에 그와 같은 명예가 돌아가는 것을 끊임없이 거부했음이 그들의 글에서 드러난다. 이와 관련해 우리의 무가치함을 끌어들이려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우리가 기도를 올릴 때 우리의 가치를 근거로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하심과 그분의 가치,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 그분의 의에 바탕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두려움, 혹은 오히려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을 떨쳐버리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말하길, 예수 그리스도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7, 18)라고 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더욱 용기를 내어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 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또한 같은 성경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 22)라고도 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하셨다. 왜 우리가 다른 대언자를 찾아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우리의 대언자로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분을 떠나 다른 데로 가거나, 결코 찾을 수 없는 다른 이를 찾으려 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주셨을 때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른다. 이것이 주기도문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아버지께 구한 모든 것을 다 받게 되리라고 확신한다(요 16:23).

 

제27조 그리스도 교회의 보편성

 

우리는 하나의 보편적 혹은 전인류적 교회를 믿고 고백한다. 이 교회는 참된 기독교 신자들로 이루어진 거룩한 회중 혹은 모임인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로서 그분의 피로 씻음 받고, 또한 성령님께서 성결케 하시고 인 치신 사람들이다.

 

이 교회는 세상이 시작할 때부터 존재했고 또 끝날 때까지 있을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왕이시고 왕은 백성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매우 하찮고 소멸해버린 것처럼 보일 때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온 세상의 포악함 가운데서 이 거룩한 교회를 보존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아합의 위협적인 통치 속에서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사람들을 친히 남겨두셨었다.

 

또한 거룩한 이 교회는 특별한 어느 한 지역이나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한정되거나 제한되지 않고 온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럼에도 이 교회는 믿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동일하신 한 성령님 안에서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로 이어지고 연합되어 있다.

 

제28조 교회에 들어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

 

우리는 이 거룩한 모임과 회중은 구속 받은 자들의 모임이고 그 밖에는 구원이 없음을 믿는다. 따라서 누구도 그 지위나 신분을 막론하고 자기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교회를 떠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오히려 모든 사람은 교회에 들어와 연합함으로써 교회의 하나 됨을 지켜가야 할 의무가 있다. 즉 교회의 가르침과 권징에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자신의 목에 메며, 형제와 자매를 위해 덕을 세우는 일에 봉사하되 하나님께서 한 몸의 지체로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해야 한다.

 

이것을 보다 실질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모든 신자는 반드시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들과 함께 하지 말고, 또 그곳이 어디든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교회에 들어가야만 한다. 설사 그것이 통치자들이나 군주의 명령이 그에 반할지라도, 그리고 죽음과 육신의 형벌이 따를 지라도 신자라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교회를 멀리하거나 거기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다.

 

제29조 참 교회와 거짓 교회의 표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부지런히 그리고 매우 신중하게 무엇이 참 교회인지 분별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상에 나와 있는 모든 분파들이 자기들 스스로 교회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교회 안에 있고 거기서 선한 이들과 함께 섞여 있으나 실상은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은 위선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참 교회의 몸과 그 교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며, 이것은 스스로를 교회라고 부르는 모든 분파들과 반드시 구별해야만 한다.

 

참 교회는 다음의 표지들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참 교회는 복음을 순수하게 설교한다. 또한 성례를 순수하게 집행하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한다. 그리고 죄를 바로잡고 벌하기 위해 교회의 권징을 시행한다. 한 마디로 참 교회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따라 다스리되 그에 반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 여긴다. 이로써 참 교회는 분명히 드러나게 되고 누구도 거기서 떠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은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또한 죄를 멀리 하고 의를 좇는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 없이 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육체와 그 육체의 일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비록 그들 안에 연약함이 많이 남아있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한평생 그에 맞서 싸운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고난, 죽으심과 순종에 의지하는데, 이는 바로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얻기 때문이다.

 

거짓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회 자체나 교회가 정한 규정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한다. 자신을 낮춰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려 하지 않는 것이다. 거짓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말씀에 명하신 대로 성례를 집행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멋대로 거기에 어떤 것을 더하거나 뺀다.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사람 위에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살면서 거짓 교회의 죄악과 탐욕, 우상숭배를 꾸짖는 사람들을 핍박한다.

 

이 두 교회는 쉽사리 알아볼 수 있고 구분된다.

 

제30조 교회를 다스리는 일

 

우리는 이 참 교회를 다스리는 일이 주님께서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영적 질서에 따라 행해져야만 함을 믿는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사역자 혹은 목사가 있어야 하고, 또한 이 목사와 함께 교회 협의회를 구성하는 장로와 집사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참된 신앙이 보존된다. 즉 이들을 통해 참된 교리가 온전히 전파되고, 악인들을 영적으로 권징하여 그들을 억제하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그들의 필요에 따라 돕고 위로한다. 이처럼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준 규칙을 따라 신실한 남성을 선택하면 모든 일이 온전하고 선한 질서 가운데 이루어질 것이다.

 

제31조 교회의 직분자

 

우리는 교회의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 사역자와 장로, 집사를 직분자로 선출하되 기도와 선한 질서 안에서,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정해진 대로 하여야 함을 믿는다. 따라서 누구든 합당치 않은 방법으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직분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이로써 그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얻고 나아가 자신의 소명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확신하게 된다. 말씀 사역자는 그들이 어디에 있든 힘과 권위에 있어 동등한데, 이는 그들 모두가 온 세상의 유일한 감독이시자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 거룩한 규례를 훼손하거나 부인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즉 모든 사람은 교회의 말씀 사역자와 장로를 그들이 하는 일로 말미암아 특별히 존경하고, 할 수 있는 한 불평이나 논쟁을 벌이지 않고 그들과 화평 가운데 지내야 한다.

 

제32조 교회의 질서와 권징

 

우리는, 교회를 다스리는 자들이 교회의 운영을 위해 일정한 규율을 정하는 것이 편리하고 유익하기는 하나,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의 유일한 주님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바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만 함을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양심을 속박하고 강제하는 일체의 인간적인 창작물이나 규칙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오직 교회의 화합과 하나 됨을 보존 및 증진함에 합당한 것, 그리고 매사에 하나님께 순종하며 행하기에 합당한 것만 받아들인다.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맞게 권징과 출교를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33조 성례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둔함과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성례를 제정하셔서 그분의 약속을 우리에게 인 쳐주시고, 또한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선한 뜻과 은혜에 대해 확실한 보증을 삼아 주셨음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고 바로 서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분께서는 복음의 말씀에 이 성례를 더하셔서 우리의 외적 감각을 통해 다음의 두 가지를 더욱 잘 알 수 있게 해 주셨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선언하시는 것과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내적으로 행하시는 일이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푸신 그 구원을 확증해 주신다. 성례는 내면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신 표(標)와 인(印)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그 표는 우리를 속이는 공허하고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례가 나타내는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분을 떠나서는 그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단 두 가지 성례만을 우리에게 제정해주신 것에 대해서도 만족한다. 그 두 성례는 바로 세례(침례)와 성찬이다.

 

제34조 세례 (침례)

 

우리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롬 10:4)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사람이 죄를 속하거나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 할 수 있는 혹은 하고자 하는 다른 모든 피 흘림에 종지부를 찍으셨음을 믿고 고백한다. 그분께서는 피 흘리는 할례를 폐지하시고 그 대신 세례를 제정하셨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다른 모든 부류의 사람들과 거짓 종교로부터 구별되며, 이로써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하게 되는데, 그 표지와 상징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세례이다. 이것은 그분께서 영원히 우리의 하나님과 은혜로우신 아버지가 되시리라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하시기를 그분의 모든 백성은 평범한 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마 28:19) 안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표해주시는 것은 물을 부으면 그것이 몸의 먼지를 씻어내는 것처럼, 또한 세례 받는 사람의 몸에 그 뿌려진 물이 묻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도 성령님의 역사로 사람의 영혼 안에서 동일한 일을 한다는 점이다. 즉 우리의 영혼을 죄로부터 씻어 정결케 하고, 우리를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물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의 보혈을 뿌림으로써 일어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홍해, 즉 마귀를 상징하는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나 영적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건너야만 하는 붉은 바다이다.

 

따라서 목사는 자신의 직무로써 성례, 즉 눈에 보이는 것을 우리에게 베풀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 성례가 표시하는 것, 즉 보이지 않는 선물과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씻으시고 그 안의 모든 더러움과 불의를 제하심으로써 그 영혼을 정결케 하신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그 안을 위로로 가득 채우신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 같은 그분의 선하심을 참으로 확신할 수 있게 해 주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입혀 주셔서 옛 본성과 그 일을 전부 내어버리게 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단 한 번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세례를 다시 주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두 번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세례는 물이 우리에게 묻어 있거나 우리가 그 물을 받을 때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에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재세례파의 오류를 거부한다. 그들은 단 한 번의 세례에 만족하지 않고, 또한 신자의 어린 자녀에게 세례 베푸는 것을 정죄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이들이 세례를 받고 언약의 표로 인 침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이스라엘의 유아들도 오늘날 우리 아이들에게 주신 것과 동일한 약속 위에서 할례를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어른들 뿐만 아니라 신자의 자녀들 또한 씻어 주시기 위해 그분의 피를 흘리셨다. 따라서 신자의 아이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하신 일에 대한 표로서 성례를 받아야만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율법에 명하사 아이가 태어난 후에 어린 양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셨던 것과 같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의 성례였다. 이 세례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할례와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바울은 세례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할례”(골 2:11)라고 불렀다.

 

제35조 성찬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찬을 제정해 주심으로써 그분께서 이미 거듭나게 하시어 그분의 가족인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신 사람들을 먹이시고 기르신다는 것을 믿고 고백한다.

 

다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두 개의 생명이 있다. 하나는 육체적이고 현세적인 생명으로 이것은 처음 태어날 때 얻는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영적인 하늘의 생명인데 이것은 두 번째 태어날 때 주어지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 되어 복음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시작된다. 이 생명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육신의 생명이 살아가도록 이 땅의 물질적인 떡을 주셨다. 모든 사람에게 생명이 있는 것처럼 이 떡도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 신자들에게 주신 하늘의 영적 생명을 먹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을 주는 떡(요 6:51),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신자들이 그분을 먹을 때, 다시 말해 영적인 차원에서 믿음으로 그분을 취하여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는 그들의 영적인 생명을 먹이시고 기르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적인 하늘의 떡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그분의 몸을 상징하는 이 땅의 가시적인 떡과 그분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제정해 주셨다. 이로써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증거는, 우리가 그 떡과 포도주를 우리 손에 받아 들어 우리 입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고, 또 그것을 통해 우리 육신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해서도 영혼의 손과 입인 믿음으로 유일하신 구주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를 우리 영혼에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참으로 분명하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 성례가 결코 헛되지 않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이 거룩한 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모든 것을 우리 안에 이루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에게 감춰져 있어 우리가 그것을 다 파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참된 본연의 몸과 참된 피라고 말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먹는 방법이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믿음으로 할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 우편에 늘 앉아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가 믿음으로 계속해서 그분의 몸을 받게 하시는 일도 멈추지 않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이 영적인 잔칫상에서 그분과 하나가 되어 그분께서 주시는 모든 유익을 얻게 되며, 그분 자신은 물론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의 공로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은혜를 받는다. 우리의 주리고 메마른 영혼은 그분의 살을 먹음으로써 힘과 능력과 위로를 얻고, 그분의 피를 마심으로써 새롭게 회복된다.

 

비록 성례에는 의식과 실체가 서로 결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모든 이가 언제나 그 실체를 받는 것은 아니다. 악인은 이 성례를 받음으로써 반드시 정죄에 이르게 될 뿐 그 성례에 담겨 있는 진리는 받지 못한다. 따라서 가룟 유다와 마술사 시몬도 모두 이 성례를 받았지만 그들은 그것이 뜻하는 그리스도를 받지 못했다. 그분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자신을 주신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의 회중 안에서 겸손과 두려움으로 이 거룩한 성례를 받는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감사하며 함께 그것을 기념하고, 우리의 믿음과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다. 따라서 누구도 자신을 면밀히 살피지 않고 이 상에 나와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떡과 잔을 받음으로써 자기 위에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고전 11:28, 29). 요컨대, 우리는 이 거룩한 성례를 통해 감화를 받아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이 이 성례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가증스런 것들을 만들어 혼합하는 것을 불경한 일로 여겨 거부한다. 선언컨대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이 가르쳐준 규례에 만족하며 오직 그 안에만 거해야 한다.

 

제36조 시민 정부

 

우리는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인간의 부패함 때문에 왕과 군주와 공직자들을 세우셨음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법과 규율에 따라 다스려짐으로써 인간의 문란함이 억제되고 사람 사이의 모든 일이 선한 질서에 따라 행해지기를 원하신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정부의 손에 칼을 쥐어 주심으로써 범법자를 처벌하고 선을 행하는 자는 보호하도록 하셨다(롬 13:4). 이와 같은 정부의 규제 및 보존의 임무는 비단 공공질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교회와 교회의 사역을 보호하는 일도 포함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왕국이 임하고 복음의 말씀이 곳곳에 전파되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섬길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시는 바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 계급에 상관없이 공직자들에게 복종하고 세금을 내야 하며, 그들을 명예롭게 여기고 존중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한 모든 일에 그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사에 그들을 인도하사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딤전 2:1, 2) 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정죄한다. 곧 재세례파와 그 밖의 반체제적인 사람들, 기타 권위자들과 공직자들을 거부하고, 정의를 뒤엎고, 재화의 공동소유를 주장하며, 하나님께서 사람 사이에 세우신 선한 윤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모든 이들이다.

 

* 1905년 네덜란드 개혁교회 총회는 이곳에서 “모든 우상숭배와 거짓 예배를 제거하고 방지하며, 적그리스도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라는 표현을 삭제했다.

 

제37조 최후의 심판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정하여 두셨으나 어떠한 피조물에게도 알리지 않으셨다. 이 때가 되면 택하신 사람들의 수가 완전히 찰 것이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큰 영광과 위엄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실 때처럼(행 1:11) 눈에 보이는 육신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가 되심을 선언하시고 이 옛 세상을 불로 태워 정결케 하실 것이다. 그 때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세상 첫 날부터 끝 날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이 위대하신 이 재판장 앞에 각각 서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살전 4:16) 그들을 불러 모으실 것이다.

 

그 날 이전에 죽은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이 이전에 들어가 살았던 몸과 재결합되어 땅에서 일어날 것이고, 그때에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책들이 펼쳐지고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데(계 20:12), 이는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선악 간에 행한 것을 따라(고후 5:10) 내려질 것이다. 참으로 모든 사람은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비록 세상에서는 그것을 그저 우스갯소리나 오락거리에 불과하게 생각할지라도,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다.”(마 12:36) 그러면 사람들의 은밀하고 위선적인 모든 것이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심판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악한 자들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끔찍하고 두려운 것이지만, 의로운 자들과 택한 자들에게는 큰 기쁨과 위로가 됨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날에는 그들의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들이 겪었던 수고와 고생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결백을 알게 될 것이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을 핍박하고 억누르고 괴롭혔던 악인들에게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보복이 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악인들은 자기 양심의 증거를 따라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고 결국에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마 25:41)에서 죽지 못한 채 그저 고통만 받게 될 것이다. 반면에 신실하고 택함을 받은 자들은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마 10:32)과 그 택하신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들의 이름을 시인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실”(계 21:4) 것이고, 비록 지금은 수많은 재판장과 세상의 권세자들로부터 이단적이고 악한 것으로 정죄 받는 것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한 것임을 인정받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생각으로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광을 은혜로운 상급으로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그 약속을 온전히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열망하면서 위대한 그 날을 기다린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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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나타(Maranatha)는 캐나다 BC주 써리(Surrey)에 있는 캐나다개혁교회입니다. 한국인 선교 및 한인 이민자들에게 참된 성경적 신앙을 전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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