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 Reformation/H.Bavinck,1854

동서방교회에서 사용했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용어들 -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Bavinck Byeon 2016. 1. 27. 23:13


삼위일체론은 교회의 교리였으며, 따라서 아주 탁월한 신비였다. 기독교의 본질,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계시와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전달은, 오로지 그 토대와 원리가 존재론적 삼위일체론에 근거할 때만 주장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제공된 성경의 자료들이 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자, 또한 곧바로 여러 가지 명칭들과 표현들에 대한 필요가 생겨났다. 이 표현들은 비록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 진리를 어느 정도 불완전하게나마 재현하고, 이 교리에 대한 오류와 반대를 대항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아리우스파와 많은 후기 신학적 경향들, 즉 소시누스파, 재세례파, 항변파, 성경신학자들 등은 그러한 비성경적 용어들의 사용을 정죄했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은 계속하여 그 정당성과 가치를 변호했다. 결국 성경이란 우리가 단순히 앵무새처럼 반복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숙고하고 우리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다시 표현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예수와 사도들은 성경을 사용하지만, 그로부터 추론을 통해 더 진전된 결론들을 도출했다. 따라서 성경은 법조문도 교의학 교과서도 아니며, 오직 신학의 근본원리(principium).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단지 그 문자적 어구들만 구속력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정당하게 도출된 것들 역시 구속력을 지닌다. 더 나아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그런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그 어떤 숙고도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신학적 활동이란 불가능하다. 성경에서 발결되지 않는 표현들과 용어들은 단지 삼위일체론뿐만 아니라 각각의 다른 교리와 신학 전체에서도 사용된다. 따라서 이 용어들은 그리스도의 독자성, 신학의 정당성과 연관된다. 마지막으로, 이 용어들은 성경과 상관없거나 또는 성경과 반대되는 새로운 교리들을 도입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단에 대항하여 성경의 진리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것들의 기능은 부가하는 의미보다는 제거하는 의미가 훨씬 많다. 이것들은 기독교적 사고가 계시의 진리를 잃지 않기 위해 활동해야 하는 외부 경계선들을 지시한다. 성경신학은 성경적이라는 미명 아래 항상 성경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길을 헤매었다. 그런 반면, 교회적 정통주의는 항상 자신의 비성경적 용어들로 다시금 그 성경적 특성을 정당화했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에서도 점차 여러 가지 생소한 용어들이 등장하였는데, 그것들은 동일본질’(όμοουσιος), ‘본질’(ου̉σια), ‘실재’(ύπαρξις), ‘실체’(ύποστασις), ‘위격’(προσωπον), ‘출생’(γενναν), ‘’(τριας), ‘단일성’(unitas), ‘삼위일체’(trinitas), ‘실체’(substantia), 위격들(personae), ‘이름들’(nomina), ‘정도’(gradus), ‘종류들’(species), ‘형태들’(formae), ‘특성들’(proprietates)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초기에 이런 용어들의 의미는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우시아’(ου̉σια)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단일 존재에 대해 사용되었으나, 오리게네스, 아타나시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등의 작품에서는 그 단일 존재 내의 삼위를 지시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자는 성부와 단일본질’(μονοουσιος)이 아니라 동일본질’(όμοουσιος)이라고 칭함으로써, ‘사벨리안주의’(Sabellianisme)에 대항하여 명백하게 자신을 변호하였다. 마찬가지로 실체’(ύποστασις)란 단어도 한 번은 존재에 대해, 다음에는 삼위에 대해 사용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한 번은 하나님 안에 오로지 단 하나의 실체’(ύποστασις)만 있으며, 다음에는 세 실체’(ύποστασις)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벨리안주의’(Sabellianisme)는 위격들을 단지 단일 존재의 계시 형태들로만 여겼다. 이에 반하여 교회는 그 위격들은 신적 존재 내에 실제적으로 실재하는 실체들이라고 강조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실체’(ύποστασις)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바실리우스(Basilius)는 자신의 편지, «본질들과 실체들에 대하여»(περι ου̉σιας και ύποστασεως)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우시아’(ου̉σια), 그리고 삼위를 실체’(ύποστασις) 혹은 위격’(προσωπον)으로 지시함으로써 이러한 용어 사용에 있어서 상당한 통일성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각각의 실체’(ύποστασις)는 고유한 실재, ‘개별적 실재’(ι̉δια ύπαρξις)를 가지며, ‘독특한 특성들, 속성들, 특징들, 표식들, 특색들, 형상들, 형태들’(ι̉διοτητες, ι̉διωματα, ι̉διαζοντα, σημεια, ι̉δια γνωρισματα, χαρακτηρες, μορφαι)을 통해 다른 실체들과 구별된다. 그리고 이런 용어들은 두 명의 그레고리우스 그리고 더 나아가 요하네스 다마스케누스와 그리스 신학과 그리스 교회에 의해 사용되었다.


서방에서는 그 혼란이 그리 크지 않았다. 왜냐하면 터툴리아누스에 의해 본질’(essentia) 혹은 실체’(substantia)이라는 용어는 존재[본질]’로 사용되고, 위격’(persona) 혹은 실존’(subsistentia)이라는 이름은 위격들에 사용되는 것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후기 교회 교사들과 신조들은 이 용어의 사용을 이어받았다. 힐라리우스(Hilarius)는 자신의 작품,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서 단일 본질, 실체, 본성, 종류’(una essentia, substantia, natura, genus), 그리고 위격적 특성들’(proprietates)에 의해 서로 구분되는 세 위격들’(tres personae)을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헬라어 휘포스타시스’(ύποστασις)를 라틴어 숩스탄티아’(substantia)로 표현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라틴어 숩스탄티아’(substantia)에센티아’(essentia)는 헬라어 휘포스타시스’(ύποστασις)우시아’(ου̉σια)처럼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라틴어에서는 단일 본질’(una essentia)세 실체들’(tres substantiae)을 말할 수 없다. ‘에센티아’(essentia)보다는 오히려 숩스탄티아’(substantia)가 헬라어의 우시아’(ου̉σια)와 같고, ‘에센티아’(essentia)는 라틴어 사용자에게 항상 낯설고 이상하게 들렸다. 그러므로 라틴어는 단일 숩스탄티아’(una substantia)세 위격들’(tres personae)이라는 표현을 유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오히려 본질과 위격 모두에 대해 숩스탄티아’(substantia)란 단어를 사용하기를 전적으로 피하였다. 왜냐하면 라틴어에서 숩스탄티아’(substantia)우연’(accidens)과는 구별되는 스스로 실재하는 존재로서 속성들의 담지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본질과 속성들은 동일한 것이기에, 그분 안에서는 이러한 대립이 일어날 수 없으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적 존재를 에센티아’(essentia)로 지칭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방에서 사벨리안주의’(Sabellianisme)에 대항하여 삼위의 실체’(ύποστασις)를 강조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서방에서는 아리안주의에 대항하여 삼위는 세 숩스탄티아이’(substantiae, ‘실체들’)가 아니라, 페르소나이’(personae, ‘위격들’)라고 확고하게 주장하는 것이 필요했다. 스콜라주의는 이 용어를 더 확대하여 나중에 일반적으로, 또한 종교개혁신학에서도 전수되었던 확정된 구조를 제공하였다. 하나님 안에 단 하나의 존재, ‘단일 본질’(una essentia), ‘본성의 일치’(unitas naturae)가 있고, ‘삼위’(tres personae), ‘위격들의 삼위일체’(trinitas personarum)가 있다. 그 존재 안에 있는 이 삼위는 동일하며, ‘동일본질’(όμοουσιοι, coessentiales)이며, 서로 호혜적으로, ‘위격들의 순환으로’(ε̉μπεριχωρησις, circumincessio personarum) 존재한다. 하지만 그 삼위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는 자연적 방식과 의지적 방식을 통한’(per modum naturae en per modum voluntatis) ‘두 가지 발출’(duae emanationes)이 있고,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들’(tres hypostases)이 있으며, 아버지됨, 아들됨, 능동적 나옴’(spiratio), 수동적 나옴네 관계들’(quatuor relationes)이 있고, 출생되지 않음, 아버지됨, 아들됨, 능동적 나옴’(spiratio), 수동적 나옴다섯 개념들’(quinque notiones)이 있으며, 출생하지 않은 성부, 출생한 성자, 나온 성령의 세 위격적 특성들(tres proprietates personales)이 있기 때문이다.



- 개혁교의학(Reformed Dogmatics), II.II.6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