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 Reformation/H.Bavinck,1854

교의학의 방법론과 구성 -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Bavinck Byeon 2017. 6. 25. 19:41

교의학의 방법론과 구성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 교의학에서 자신의 신앙의 내용을 펼쳐 보이는 기독교 신학자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며, 기독교인으로 사는 한, 다름 아닌 기독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기독교의 본질, 계시의 방식, 정도 그리고 한계에 대한 모든 질문들은 여기서 아직은 제쳐 둘 수 있다. 우리가 다룰 문제는 간단하다. 기독교(그리스도, 선지자들과 사도들, 성경)에는 계시가 없으며, 혹 있더라도 그것은 자연이나 역사 어디선가 관찰될 수 있는 계시보다 더 위대하지도 뛰어나지도 않다고 평가하는 신학자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며, 어떠한 기독교 교의학을 쓸 자격도 능력도 없다.


그러나 만일 기독교의 계시가 더 뛰어나고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더 위대한 빛을 거부할 수 없으며, 반드시 그 빛 가운데서 자연과 역사 전체, 그리고 또한 비기독교 국가들과 민족들의 종교를 살펴야 한다. 계시가 교회나 성경,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든 어디서 발견되는지의 문제는 일단 논외로 차치하고, 기독교 교의학자는 기독교의 토대가 되는 하나님의 계시를 그의 기본 입장으로 취해야 한다.


그는 신자로서 그 입장 가운데 서야 하며, 교의학자로서 그 선상 위에 머물러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 그의 교의학의 성패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만일 기독교 교의학자가 그의 기본 입장을 계시에 둔다면, 계시는 어디서 발견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거기에는 많아야 세 가지 요인이 지적될 수 있는데, 성경,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의식(意識)이다. 이 세 가지는 각각 순서대로 혹은 나란히 교의학의 근원으로 사용된다. .......


※ 모든 학문적 작업은 그 저자의 특징을 수반하는데, 교의학도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교의학은 역사적 서술이 아니라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개인의 영향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교의학자가 모든 객관적 연관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다른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교의학도 고유한 대상에 연관되어 있어서 자체의 고유한 근원과 규범(norma)을 가진다.


분명한 사실은 모든 교의학자가 그 대상을 살피고 자신의 방식과 자신의 언어로 재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동일한 대상을 단순히 살피고 묘사한다 할지라도, 개인적 다양성은 풍부한 사상들을 교의학에 담아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교리적 신학에서 개인적 특성이 요구된다는 사실은 그것이 신앙의 내용이나 종교적 개념들과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임의로 수행하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지성을 가지고 그를 사랑하며, 그에 대하여 존경심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자기의 계시를 주었고, 교의학은 이 계시에 절대적으로 연관되어 있는데, 마치 모든 학문이 연구하는 대상에 연관된 것과 마찬가지다. 교의학이 이런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쉬안(M. Schian)이 매우 바르게 지적했듯이, "기독교 신앙에 관한 단지 주관적인 지식, 따라서 단지 개인적인 지식만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교의학도 기독교 신앙도 아니다.


교의학이 논의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교의학의 권위가 의존하고, 그 내용이 전개되는 신적인 계시가 있는 경우다. 지식의 근원으로서의 신앙고백서와 성경을 거부하고 모든 종교적 진리를 주체로부터 도출하려는 의식의 신학은 일차적으로 이미 건전한 인식론과 모순된다.


마찬가지로 종교의 영역에 있어서도 우리는 환경의 산물이다. 우리가 가진 종교적 개념들과 인상들은 우리를 돌보고 양육하는 사람들로부터 수용되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집단에 항상 매여 있기 때문이다. 지성과 마음, 이성과 양심, 감정과 상상력은 생활의 어떤 영역에서도 진리에 대한 지식의 근원이 될 수 없으며, 다만 진리를 수용하여 우리의 소유로 만드는 기관일 뿐이다. .......


※ 교의학은 오로지 기독교회와 더불어 신앙의 교제 가운데 서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이것은 종교적 신앙의 성격에 내재한다. 종교적 개념들은 학문적 개념들과 구별되는데, 특히 자신의 통찰이나 어떤 사람들의 권위에 근거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권위에만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개념들이 종교적 단체, 즉 교회에서도 신뢰와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그 증거는 오로지 우리가 교리 가운데 인간적인 견해가 아닌 신적 진리를 취급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신앙고백서를 믿는 것은 교회가 그 고백서의 진리를 학문적으로 교육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에만 표현되었는지 교회적 기관들을 통해 표현되었든지 간에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살피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종교적 신념을 철학의 학교에서 찾는 자는 종교와 학문을 혼동하고, 다름 아닌 항상 불확실하고, 많은 학자들이 반대한 학자의 판단 혹은 견해만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신앙은 그 고유한 속성에 의해 종교적 교제와 그 고백에 연계된다.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상황은 여기서도 동일하다. 추상적인 것들, 보편적인 것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나무, 그 사람, 그 학문, 그 언어, 그 종교, 그 신학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특정한 나무들, 사람들, 학문들, 언어들, 그리고 종교들이 있을 뿐이다. 마치 한 언어가 한 민족과 함께 관련되고, 학문과 철학이 항상 어떤 경향과 학파에서 수행되는 것처럼, 종교와 신학은 그 관련된 교제 가운데서만 발견되고 성장한다.


교회는 종교와 신학을 위한 천연적인 토양이다. 만일 그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종교와 그 신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다양한 교회들이 존재할 뿐이고, 그래서 다양한 신학들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가 충분히 성숙될 때까지 그리고 모두가 신앙의 일치와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런 일치는 무력으로 달성하지 못하고, 각 사람이 자기 교회의 신앙을 마음에 품고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때 최대한으로 증진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기존의 교회 밖에서가 아니라, 기존의 교회를 통해서 자신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를 마련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일치는 다양한 교회의 교리들 밖에서가 아니라, 이 교리들을 통해서 마련되고 실현된다. 이런 방식으로 교의학자 역시 자기 교회의 종교적 삶과 고백을 정화시키고 발전하도록 최대한 유익한 작업을 할 수 있다. 기존의 것과 연계하는 것이 미래의 개선을 위한 조건이다. ‘현재’ 안에 미래에 되어질 것이 내재한다.


신학과 교의학을 위한 교회의 이런 중요성은 그리스도 자신이 이 둘 사이에 만든 연관에 기초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에, 교회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성령을 약속했다. 이 약속을 통해 교리사는 영광스런 빛에 서게 된다. 교리사는 성경의 해설이며, 보물 같은 말씀에 대한 교회 가운데 있는 성령의 설명이다.


따라서 교의학자는 자신의 교의학을 위한 재료를 자기 교회의 기록된 고백서에서 이끌어 낼 뿐만 아니라, 이 고백서를 자기 교회의 아주 독특한 신앙과 삶에 관련시켜 살피고, 이것을 다시금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의 역사와 더불어 살핀다. 따라서 그는 이전 세대의 어깨 위에 서는 것이다. 그는 구름 같은 증인들로 둘러싸인 것을 느끼고, 자신의 증거를 많은 물과 같은 목소리와 더불어 합쳐 흐르게 한다. 모든 교의학은 모든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께 드렸던 송영에 동참해야 한다.


하지만 이로써 우리가 교리사와 교회의 고백서를 오류가 없는 권위로 승격시키는 것은 아니다. 교의학자가 형성되는 길과, 교의학이 그 재료를 얻는 기초원리 사이는 구분된다. 모든 학문에서 학자는 전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하나의 권위를 통해 자기 과목에 대한 첫 지식을 습득한다. 먼저 자기 과목의 역사를 수용하고 이해하고 자기 학문의 절정과 현재 상황까지 이르고, 그 뒤에는 독자적으로 작업을 수행해 가며 연구 대상을 간파하는 자신만의 통찰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그렇게 “교육학적으로” 중요한 전통을 자기 학문의 근원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교의학자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교회는 교육학적으로 성경보다 선행한다. 하지만 논리적 순서에 있어서는 성경이 교회와 신학의 유일한 원리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견해 차이의 가능성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데, 이런 견해 차이에 대해 교회와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양보해야 한다.


교회가 아닌 성경이 ‘자증하는 것’이며 ‘논쟁들의 심판관’이고 ‘자기 자신의 해석자’다. 그 어떤 것도 성경과 같은 동일 선상에 놓여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 교회, 신앙고백서, 전통 - 반드시 성경을 따라 정돈되고, 성경에 복종해야 한다. 항변파들은 개혁파가 신앙고백서를 사용함으로써 성경의 권위, 충족성 그리고 완전성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개혁파는, 비록 이러한 교회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고, 이단들을 내쫓고, 신앙의 일치를 유지하기 위한 신앙고백서가 필요하다고 여겼을지라도, 그 신앙고백서가 성경과 나란히 어떤 권위를 가진다는 주장에 강력히 반대했다.


성경만이 ‘믿음과 생활의 규범과 척도’다. 신앙고백서가 신뢰를 받는 것은 오로지 성경과 일치하는 한에서 가능하며, 오류를 배제할 수 없는 인간적인 작품으로서 항상 성경의 기준에 따라 수정되고 검토되어야 한다. 따라서 신앙고백서는 기껏해야 ‘이차적 기준, 진리의 기준이 아니라 어떤 교회에서 수용된 교리의 규범’이며, 따라서 그 교회의 교제 안에서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구속한다. 교회 안에서 신앙고백서는 교제와 동의와 교회의 신앙의 표현으로서 권위를 가지나, 교회는 그 신앙고백서를 오로지 성경을 근거로 하여 믿고 유지한다. .......


※ 교의학에는 주관적 관점에서 자연적인 이성이 먼저 의견을 제시하고 그 뒤에서야 비로소 신앙이 발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언제나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리문답, 신앙고백서, 교의학에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관점에서 자연은 성경과 나란히 서서 각자의 고유한 일련의 진리들을 제공하는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원리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은 성경의 빛에 비추어 관찰되고, 성경은 엄밀한 의미에서 계시된 진리만이 아니라, 신자가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들도 포함한다.


알스테드(J.H.Alsted, 1588~1638)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자연신학이 존재한다고 인정했으나, 이것은 혼동되고 모호한 자연신학이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자연신학의 원리들과 결론들’은 성경 안에서 선명하고 분명하게 반복되었다. 따라서 비록 자연으로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교의학은 유일한 외적 원리, 즉 성경, 그리고 또한 유일한 내적 원리, 즉 믿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 성경이 단지 교의학의 규범이고 근원은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성경은 특별히 신학의 원리다. .......


※ 우리 모두가 더 자세한 숙고를 통해 이것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학문에 고유한 대상이 없고 고유한 지식의 근원이 없다면, 그러한 학문은 또한 존재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실재적으로 어떤 종교적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에 대한 정도와 범위는 차치(且置)하고, 또한 그런 지식에 대한 체계가 학문이라는 명칭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상관없이, 만일 그러한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을 길어 낼 근원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현재 많은 학자들이 자연과 성경이 그러한 근원이 될 수는 없고, 종교적 지식은 단지 자신의 내적 정서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 주장을 심각하게 고려할 때, 이 주장은 하나님이 다른 어떤 곳도 아닌 사람 가운데, 그의 마음, 정서 혹은 양심 가운데 자신을 계시한다는 사상을 포함한다. 이 경우에 사람의 정서는 특정한 속성을 소유하고, 교의학의 대상과 근원으로 고려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그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정서에 대한 종교적 경험을 역사적 보고서에 단지 객관적으로 묘사하기를 바라는 자는 아마도 중요한 종교적 심리학을 제시할 수는 있으나 교의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교의학은 전제하기를 종교적 지식에 대한 근원이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그 근원으로부터 중립적인 지성이 아닌 개인적인 신앙을 통해 도출할 수 있다. 그래서 의식의 신학을 옹호하는 자들도 무심코 증거하기를 교의학이 진리가 되려면 그것은 반드시 고유한 근원, 대상 그리고 권위를 가져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을 인정하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신앙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사실상, 자연과학, 역사학, 법학, 윤리학 등 모든 학문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학문은 개인적인 특성을 지닌다. 한 학문은 확실히 다른 학문보다 더 개인적이지 못한데, 예를 들면 수학은 역사학보다 개인적 특성이 훨씬 적다. 하지만 학문이 덜 형식적이면서 인간 삶의 중심에 더 가까울수록 그 정도에 비례하여 개성의 영향력은 증가한다.


사람이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수련에서 스스로를 제거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교육, 인생관, 마음과 양심, 동정심과 반감을 수반하고, 이것들은 당연히 자신의 연구와 숙고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사람을 둘로 나누고 학문의 수련에서 사람을 단순한 지성으로 격하시키는 이원론은 실재적으로 불가능하며, 이론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유일한 요구 사항은, 위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사람이 항상 어디서나, 그가 학문을 연마할 때에도,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능력을 갖춘 온전한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딤후 3:17). 이것은 교의학 영역에서도 다를 수가 없으며, 이 모든 것은 다른 학문에서보다 교의학에서 더욱 강력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교의학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가장 깊은 신앙의 확신들과 모든 학문의 중심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사람이 선한 사람이어야 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영생이므로 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요 17:3). 따라서 이것은 성령의 가르침이기도 한데, 객관적인 계시가 주관적인 조명으로 완전하게 된다. 개혁파의 성경에 대한 가르침은 성령의 증거에 대한 교리와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외적인 말씀은 우리 외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신앙을 통해 내적인 말씀이 된다.


성경을 주신 성령은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 성경에 대해 증거 한다. 성경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의식(意識) 가운데 자신의 승리의 입성이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온 영혼으로 성경에 매임을 느낀다. 그는 교회의 교사인 성령의 인도로 성경에 이르게 된다. 신자의 모든 목적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생각들을 자신의 의식(意識)에 받아들여 그것들을 생각함으로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에 있어서 그는 여전히 고유한 성격, 교육, 통찰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신앙 자체는 각 사람에게 있어서 동일한 방식으로 발생하지 않고, 모두에게 동일한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성은 생각의 날카로움, 깊이, 선명함에 있어 차이가 있고, 죄의 영향은 그의 의식과 지성에도 여전히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모든 영향들의 결과로 교리적인 신학은 여전히 개인적인 특성을 지닌다. 그것은 모든 학문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동일하다.


심지어 선지자들과 사도들조차도 동일한 진리를 다양한 관점에서 보았다. 신앙의 일치는 지식의 일치와 마찬가지로 아직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다양성을 통해 그의 교회가 일치에 이르도록 인도한다. 만일 그 신앙과 지식에 일치에 도달하면 교의학 역시 그 과제를 완수한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이르기까지 교의학은 여전히 학문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성경에 담아 놓은 그 생각들을 해석하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


※ 만일 교의학자가 그리스도의 교회와 더불어 신앙의 교제 안에 살고, 성경을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유일하고도 충분한 기초원리로 고백한다면 그는 이 임무를 수행할 가장 탁월한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교의학자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내용을 교회로부터 받는다. 교육학적 의미에서 그는 교회를 통해 성경에 이른다. 하지만 그는 다른 신자와 마찬가지로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가 받은 소명은 교회를 통해 배운 교리들을 샅샅이 분석하고, 그 교리들이 어떻게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조사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교리들을 먼저 객관적으로 진술하고 난 뒤, 다시 성경으로 추적하는 것이 그의 임무라면, 그의 방법은 역사적, 분석적 방법이다. 하지만 비록 이와 같은 방법이 그 자체로 몇몇 교리에 아마도 적극 추천할 만한 가치가 있거나 혹은 이 방법이 교의학에서 부차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할지라도, 이 방법이 직면한 결정적인 반대는 학자들이 이 방법을 사용해서는 학문적인 체계를 세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의학자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더 낫다. 강에서 근원으로가 아니라 근원에서 강으로 가는 방법이다.


교육학적 의미에서 교회는 성경보다 선행한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고도, 교의학자는 신학의 기초원리로서의 성경 자체에 자신의 입장을 둔 뒤에 성경으로부터 교리들을 전개할 수 있다. 그래서 말하자면 그는 교회의 지성적 작업을 재산출하는 것인데, 교리들이 어떻게 성경으로부터 유기적으로 자라났는지를 보여주고, 단 하나의 본문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교리적 건물이 세워지는 확고하고 넓은 토대임을 보여 준다. .......


※ 교의학의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말씀을 통해 계시한 것이다. 신자들의 지식의 독특성은 그들이 모든 것을 종교적, 신학적으로 바라보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빛으로 영원의 관점에서 살핀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신자들의 세계관과 철학적 혹은 학문적 세계관의 차이다.


교의학에서 발언하는 사람은 언제나 신자,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하여 사색하지 않고,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신(神) 개념에서 출발하지 않으며, 자연신학을 통해 계시신학에 도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추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지식은 전적으로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계시한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묘사할 뿐이다. 따라서 그가 교의학의 첫 부분에서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들, 삼위일체를 다룰 때에도, 그는 철학자가 아닌 신자, 그리스도인 그리고 신학자로서 발언하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에는 종교의 심장이 박동한다. 교의학은 철학적 체계가 아니며, 교의학은 신학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교의학자는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자신의 체계 안에서 그가 어떻게 신앙에 이르렀고, 신앙을 통해 주관적으로 그리고 연속적으로 신앙의 다양한 진리들에 대해 통찰을 얻게 되었는지 서술하지 않는다. 그것은 분석적 방법으로 교리문답에서는 월등하게 적합하지만 교의학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그 대신에 그는 하나님이 직접 그의 신앙의 목전에 객관적 계시 가운데 펼쳐 보인 자신의 신앙의 내용을 설명한다. 그는 교의학의 구성 원리와 재료의 배열을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도출하지 않고 자신의 교의학에 서술할 대상 자체로부터 이끌어 낸다. 즉 믿는 주체가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부터 이끌어 낸다.


따라서 비록 우리가 교의학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철두철미하게 신자가 생각하고 발언한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동의한다 할지라도, 그가 교리적 재료를 배열하는 데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 도출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교의학은 그 특성을 잃게 되고, 인간학으로 전이되어 신학이 되지 못한다. 교의학이 신학이 되려면 오로지 교의학 체계는 그 자체의 고유한 재료와 내용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만일 이 출발점이 옳다면, 재료의 배열을 위하여 추천되는 두 개의 구분이 있다. 교리적 체계에 대한 기본적인 개요는 객관적으로 우리 앞에, 성경 가운데, 교회의 고백 가운데, 그리고 교회의 신앙 가운데 놓여 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곧 그 본질과 사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골자로 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사도신경과 같은 어떤 고백서들은, 경륜적 의미에서 각 위격에 구체적으로 부속된 사역들과 연관하여 각각 하나님의 위격들을 먼저 언급한 반면, 다른 고백서들은 먼저 삼위일체론을 포함한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취급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사역들로 넘어간다.


따라서 먼저 언급된 삼위일체론적 방법은 그 자체로 거부될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심지어 매력적인 면이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은 거듭 수용되고 또한 철학에서도 영향을 끼쳤다. 그것이 추천되는 이유는 자체의 순수 신학적 특성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다. 자연과 역사는 하나님 아래 부속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말미암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 삼위일체론적 개요는 획일성을 방지하고 생명, 발전 그리고 과정을 보장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러한 묘사는, 위에서 이미 언급된 반대들 외에도 삼위일체론적 방법의 위험을 지적한다. 그것은 쉽게 사변적으로 오용될 수 있으며, 그래서 역사를 체계에 희생시키고, 우주 기원(kosmogonie)을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생명에 짜 넣어 신통기(神統記, theogonie-신들의 계보에 대한 기록)가 되고 만다. 에리게나(Erigena), 뵈메(J. Böhme), 바이더(F. von Baader), 쉘링(Schelling), 헤겔의 철학이 이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신학적이고 동시에 역사 발생학적 특성을 지닌 구성이 선호된다. 이것 역시 그 출발점을 하나님 안에 두고 모든 피조물을 단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본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이 방법은 하나님의 사역들로 내려가는데, 이것은 이 사역들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에게로 올라가 하나님에게서 끝마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 구성도 역시 하나님이 시작, 중간, 끝이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역사의 과정에 끌어당겨 내려가지 않고, 역사는 여기서 더 좋고 정당하게 취급된다. 하나님과 그의 사역들이 구별된다. 그 사역들 가운데 하나님은 창조자, 회복자, 완정자로서 일한다. 하나님은 '창조에 있어서 실효(實效)의 전형(典型)일 뿐만 아니라, 구속(救贖)에 있어서도 회복(恢復)의 전형이며, 보답(報答)에 있어서도 완벽한 전형'이다(Bonaventura).


교의학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체계다. 교의학은 기독종교의 체계다. 그리고 기독종교의 본질은 성부의 창조가 죄로 인해 파괴되었을지라도 성자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회복되고 성령의 은혜에 의해 하나님 나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교의학은 홀로 충만하신 하나님이 비록 죄로 인해 흩어졌다가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불러 모인 그의 피조물 가운데서 어떻게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는가를 보여준다(엡 1:10).


교의학이 우리에게 저술하는 것은 하나님이며, 항상 하나님이며, 시작부터 끝까지, 본질 가운데 있는 하나님, 자신의 창조 가운데 있는 하나님, 죄와는 상반된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성령을 통하여 모든 반대를 깨뜨리고 모든 피조물을 자신이 확정한 목적인 자기 이름의 영광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을 서술한다. 따라서 교의학은 메라른 학문이 아니다. 교의학은 신정론(神正論, theodicee)이며, 하나님의 모든 미덕과 완전에 대한 송영(頌榮)이고, 경배와 감사의 찬송이며, "지극히 높은 곳에 하나님께 영광"이다.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1권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