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 Reformation/H.Bavinck,1854

‘본질’과 ‘위격’, 그리고 위격들 사이의 상호 관계 -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Bavinck Byeon 2016. 3. 13. 23:52


[373p] 삼위일체론을 잘 이해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 질문이 반드시 대답되어야 한다. '본질'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위격'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지칭하는가? 그리고 '본질'과 '위격' 그리고 위격들 사이의 상호 관계는 무엇인가?


'본질'이라는 개념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시아'를 '실체'(substantie)로 "마치 개별적인 사람과 개별적인 말(馬)처럼, 언어로 진술될 수 있는 어떤 실체도 아니고 그 실체 안에 무엇이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정의했다. 그래서 '우시아'란 단어는 처음에, 또한 신학에도 사용되어 삼위와 단일 본질에 적용되었다.


하지만 '우시아'는 점차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 한 사물의 존재, 본성, 본질,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컬었던 '사물의 존재'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래서 '우시아'는 '푸시스'(본성)와 동의어가 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나투라'(natura, 본성)가 '태어나다'(nasci)에서 유래한 것처럼 이 단어 '푸시스'(본성)도 '생성되다'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본질]를 지시하는데 덜 적합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단어 '푸시스'(본성)는 '나투라'(natura, 본성)라는 단어처럼 신학에 적응되었고, 베드로후서 1장 4절의 지지를 얻었다. 그래서 '우시아', '푸시스', '수브스탄티아'(substantia), '에센티아'(essentia), '나투라'(natura)는 신성의 존재, 실존(subsistentia), 그리고 신성의 존재 양식들, 실존 양식들(modi subsistendi)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단일 본질, 일반적 신성(神性)에 대한 지속적인 명칭이 되었으며, 따라서 신적 본성이 삼위 모두에 공통된 것처럼, 신적 본성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이 신적 본질은 단 하나이고 모든 속성들을 소유한다.


이 신적 본질과 하나님 안에 있는 삼위 사이의 구별은 피조물들 가운데서 그 유비가 발견된다. 이 유비에서 우리는 본질과 개인들을 구별한다. 바울, 요한, 베드로는 모두 동일한 인간적 본성을 갖지만, 인격으로서 그들은 존재와 구분되고, 또한 상호 간 서로 구분된다.


하지만 여기에 곧바로 이중적 위험이 있다. 유명론은 본질, 보편적인 것을 단지 이름, 개념으로 이해하고, 따라서 삼위일체론에서 삼신론에 이른다. 다른 한편으로, 과도한 실재론은 본질을 위격들 배후에, 또는 그 위에 있는 실체로 여기고, 따라서 사신론(四神論) 또는 사벨리우스주의에 이른다.


심지어 닛사의 그레고리우스조차 이 지나친 실재론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신성(神性)이란 단 하나이기에 세 신(神)들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 위해, 심지어 유한한 피조물들에게 수효조차 적용하기를 부정했다. 그에 의하면, 단일 본성을 가진 존재들을 복수(複數)로,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본질과, 피조물들 가운데 있는 본질 사이의 구별을 간과한 것이었다. 물론 의심의 여지없이 신적 본질과 인간의 본성 사이의 유비가 있으며, 이 유비로 인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본질을 말할 수 있다.


[375p] 하지만 이러한 유비는 동시에 아주 중요한 차이를 전제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개념은 하나의 일반적인 개념이다. 인간 본성은 물론 실재적으로 실재하며, 그 어떤 바람 소리(fiatus vocis)도 아니다. 즉, 인간 본성은 진실로 인간 외부나 인간 위에가 아니라 각 사람 안에 현존한다. 인간 본성은 각 사람 안에 고유한 방식으로, 유한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다신론에서의 신들과 마찬가지로 과연 본질에 있어서 유사하지만, 본질에 있어 동일하거나 본질에 있어 단일한 것은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인간 본성은 전체적으로 (tota) 동일하지 않으며, 양적으로(numero)도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지 구별될(distincti) 뿐만 아니라 또한 분리된다(divisi).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은 다르다. 신적 본성은 추상적 보편 개념으로 생각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위격들 밖에, 위에 그리고 배후에 있는 하나의 실체(substantia)라고 생각될 수 없다. 신적 본성은 위격들 안에 있으며, 각 위격 안에서 전체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위격들은 물론 구별되나, 분리되지는 않는다.


위격들은 본질에 있어 동일하며, 본질에 있어 단일하며, 동일한 존재다. 위격들은 시간이든 장소, 그 무엇에 의해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위격들 모두는 동일한 신적 본성과 미덕들을 소유한다. 단 하나의 동일한 신성이 삼위 모두 안에 존재하고, 특별히 각 위격에 존재한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는 한 분의 영원한 존재, 한 분의 전능한 존재, 한 분의 전지한 존재, 즉 하나의 지성, 하나의 의지, 하나의 능력을 지닌 단 한 분의 하나님이 있다.


따라서 본질[존재]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계속하여 전면에 부각되고, 일신론 안에 포함되며, 또한 유니테리언에 의해서도 변호되었던 하나님에 대한 단일성의 진리를 보존한다. 신적 존재 안에 그 어떤 구별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단일한 본성을 부당하게 취급해서는 안 되며 취급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그 단일성은 불완전하거나 제한되지 않고, 완전하고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피조물들 가운데서 모든 다양성이란 일의 성격상, 또한 크든 작든 분리와 분할을 포함한다. 모든 피조물은 필연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형태로 존재하며, 따라서 나란히 그리고 차례로 존재한다.


하지만 영원성, 편재성, 전능, 선(善) 등은 그 성격상 모든 분리와 분할을 배제한다. 하나님은 복합이나 분할이 없는 절대적 단일성과 단순성이다. 이 단일성 자체는 인간들 사이에 있는 것처럼, 윤리적 속성도 계약적 속성도 아닌 절대적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이 단일성은 본질에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자체와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이 갖는 영광은 무엇보다도 이 단일성이, 얼마나 절대적이든 간에,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고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 어떤 추상적 단일성,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다양성 가운데 바로 최상의 단일성을 전개하는 존재의 충만, 무한한 생명의 풍요함이다. ...중략


[379p] 삼위일체론에서 위격이 단지 가리키는 것은, 신적 존재 안에 있는 삼위란 양식들(modi)이 아니라 각기 고유한 방식의 존재라는 사실만을 가리킨다. 심지어 이 개념의 합리성과 자의식은 강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삼위가 동일한 존재와 모든 미덕들을 가지며, 따라서 같은 지식과 지혜도 갖는다는 사실로부터 자연적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위격이라는 단어가 표현하는 것은, 신적 존재의 단일성이 삼중적(三重的) 실재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삼중성을 도출하는 단일성이다." 위격들은 단일한 신적 인격성의 세 가지 계시 양식들이 아니다. 신적 존재는 다름 아닌 삼위적인데, 이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절대적이고 신적인 인격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인간 가운데서 신적 인격성에 관한 희미한 유비를 발견한다. 인간의 인격성이 존재하는 것은, 한 주체가 있고, 자기 자신을 객체로 삼으며, 다시 자기 자신으로 요약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세 가지 요소들[계기들](momenten)이 인간 인격성의 본질을 구성하는데, 그것들은 우리에게 단지 요소들[계기들]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시간이나 공간이 없고, 연장이나 분리도 없으므로, 하나님에게 있어서 이 세 가지는 요소들이 아니라 '휘포스타시스', 즉 단일하고 동일한 존재의 세 가지 존재 양식들이다.


그러나 인간 인격성의 이러한 유비는 반드시 다른 방식으로 보충되어야 한다. 인간 본성은 너무 부요하기에 단 한 사람 또는 개인 안에서 구현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많은 사람들 안에서 확대되어 비로소 인류 가운데 그 충만한 발전에 이른다.


그래서 신적 존재도 삼위 안에서 그 충만함을 전개하는데, 하지만 이 삼위는 서로 나란히, 그리고 서로 분리된 세 개별자들이 아니라 신적 존재 안에 있는 삼중적 자기 구별이다. 이 자기 구별은 존재의 발전을 인격성 안에 취하여 세 인격으로 만든다.


인간 본성의 전개는 두 가지 성격을 지닌다. 즉, 각 사람 안에서 인격성으로 전개되는 것과 인류 안에서 많은 개인들로 전개되어 이 둘이 합해서 또한 다시 통일성, 한 인격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가 교회와 더불어 단 하나의 온전한 사람인 것과 같다.


인류 안에서 다른 것이 될 수 없는[이중적일 수밖에 없는] 이러한 이중적인 전개는 하나님 안에서 단일하다. 하나님의 존재가 인격성으로 전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위격들로 전개하는 것과 상응한다. 삼위는 존재 안에서, 존재로부터, 존재를 통해, 존재 내부에서 완전한 자기 전개를 이룬 단 하나의 신적 인격성이다.


[380p] 우리는 이러한 진술로부터 위에서 언급된 세 번째 질문, 즉 존재[본질]와 위격, 그리고 위격들 상호 간의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이 어떤 의미로 주어져야만 하는지 알 수 있다.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있어서 삼위는 "하나의 실체, 하나의 상태, 하나의 능력을 지닌 한 하나님이다." "상태에 있어서가 아니라 정도에 있어서" 셋이며, [실체상] '하나'(unum)이지만, [위격상] '한 분'(unus)은 아니다. 삼위는 "한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에 의해 그러한 정도들과 형태들과 종류들이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된다." 구별과 구분은 있으나, 모순과 분리는 없다.


아타나시우스와 캅바도기아 신학자들은 실체들을 존재 양식들로 정의하고, 이로써 실체들은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할지라도, 각각이 고유한 존재(existentia)를 가지며, 존재 방식에 있어서 다르다고 말했다. 따라서 존재[본질]와 위격, 그리고 위격들 상호 간의 차이는 상호 관계에 놓여 있다. 즉,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서로에게 대한 상태', 성부 됨[태어나지 않음], 아들 됨[출생], 거룩함[발출]의 속성들 가운데 놓여 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더 넓게 전개 되었다. 그는 삼위일체(trinitas)를 성부로부터 도출하지 않고, 단일성, 신성(deitas)으로부터 도출했으며, 삼위일체가 하나님에게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위격성(位格性)은 존재 자체와 동일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것과 위격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절대적 의미에서 존재가 하나님에게 속하고, 상대적 의미에서 위격성이 하나님에게 속한다면, 삼위는 단일 존재이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각 위격은 존재 전체와 동일하고, 다른 두 위격의 합이나 세 위격 모두의 합과 동일하다. 이것은 피조물들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한 사람은 세 사람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전부가 성부 홀로, 또는 성자 홀로보다 더 큰 본질이 아니며, 그 세 실체들 또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최상의 삼위일체에서 단지 한 위격은 세 위격 전부와 같고, 두 위격이 한 위격보다 어떤 것이 더 많지 않고, 더 나아가 그들은 스스로 무한하다. 그러므로 각 위격이 모든 위격 안에 있고, 모든 위격이 하나의 위격 안에 있으며, 하나의 위격이 모든 위격에 있고, 모든 위격이 모든 위격 안에 있으며, 모두가 하나다."


"삼위일체 자체는 그런 점에서 각 위격만큼 크다." 그러므로 존재[본질]와 위격, 그리고 위격들 상호 간의 차이란 어떤 실체에 있을 수 없고, 단지 상호 간의 관계에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관해 언급한 것은 무엇이든지 각 위격에 대해 개별적으로,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 말해진 것이며, 삼위일체 자체에 대해 동시적으로, 즉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동일한 삼위일체 내에서 특별히 각 위격에 대해 언급된 것은 무엇이든지 결코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서로에게 대해, 또는 피조물에 대해 언급된 것이다. 따라서 명백한 사실은 그것이 본질적으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언급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신학은 이에 따라 존재[본질]와 위격은 실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ratione)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벨리우스가 주장했듯이 [주관적인] 추론적 이성에 있어(ratione ratiocinante), 즉 이성적으로(rationaliter), 명분상(nominaliter) 다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추론된 이성에 있어(ratione ratiocinate) 다르다. 구별은 어떤 실체상의 구별이 아니라 오로지 관계상의 구별일 뿐이다.


하지만 이 구별은 실재적으로,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다. 존재[본질]와 위격은 실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닐지라도 실제로(realiter) 다르다. 차이가 실존 방식(modus subsistendi)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실재적인 차이다. 위격은 존재의 존재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위격들은 한 위격의 존재하는 방식이 다른 위격의 존재하는 방식과 다르듯이, 또는 일반적인 예를 들어, 펼펴진 손이 움켜진 주먹과 다르듯이 서로 다르다.


[382p] 만일 존재[본질]와 위격, 그리고 위격들 상호 간의 차이가 반드시 한마디로 표현되어야 한다면, 진실로 그것에 대해 더 많이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신적 존재 내에서 존재하는 관계들 자체를 생각할 때, 이 차이는 더 명확해진다. 비록 성경이 엄격하게 일신론적이라 할지라도, 성경은 성자와 성령의 신적 본성과 완전들을 인정하고, 성자와 성령을 성부와 동일 선상에 놓는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이며 동일한 신적 본질 안에 있는 구별된 주체들이다. 그러나 주체들로서 그들은 다양한 이름들을 지니고, 특별한 위격적 속성들을 지니며, 내적(ad itra), 외적(ad extra) 관계에서 항상 일정한 순서로 등장한다.


따라서 위격들의 차이는 전적으로 소위 위격적 속성들, 특성들(proprietates)에 놓여 있다. 즉 (1) 아버지 됨(innascibilitas, 태어나지 않음), 능동적 출생(generatio active), 능동적 내쉼(spiratio active), (2) 아들 됨(수동적 출생과 능동적 내쉼), (3) 발출(수동적 내쉼). 이제 이러한 속성들은 일의 성격상 하나님의 존재에 실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더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된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까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관계로 등장할 뿐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성부 됨, 성자 됨, 그리고 성령 됨에서 내용적으로, 실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성적으로, 관계적으로(ratione, relatione) 구별될 뿐이다. 하나이며 동일한 존재는, 아들의 관계 가운데 있는 동일한 존재에 대해, 자신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 성부라 불린다. 따라서 위격들 상호 간의 차이는 단지 한 위격은 성부, 다른 위격은 성자, 그리고 세 번째 위격은 성령이라는 사실일 뿐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인간 가운데서 단지 희미한 비유를 발견하는데, 그럴지라도 이것은 요점을 밝혀 줄 수 있다. 인간 사이에 아버지 됨과 아들 됨, 역시 진실로 단지 하나의 관계로서, 이 관계는 그 관계를 지닌 인격적, 개인적 주체를 전제하지만, 그 외에는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그 아버지 됨과 아들 됨과 상관없이 존재한다. 아버지 됨은 단지 인간 됨의 우연한 속성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결코 아버지가 되지 못한다. 아버지가 되는 자는 오랫동안 아버지가 아니었으며, 다시금 또한 점차 더 이상 아버지가 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 됨은 아버지 됨이나 아들 됨 가운데 결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적 존재에서는 그렇지 않다. 신성과 위격성은 완전히 일치한다. "그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며, 위대하고, 선하다는 것처럼, 따라서 그가 위격이라는 것과 같다." 따라서 신적 존재는 삼위의 각 위격, 성부 됨, 성자 됨, 성령 됨 안에 완전히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다. 성부 됨(paternitas), 성자 됨(filiatio), 발출(processio)은 하나님의 존재에 있어서 그 어떤 부수적인 속성들이 아니라 영원한 존재의 양식들, 즉 존재 안에 있는 영원한, 내재적인 관계들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인간의 단일 본성은 세분화되어 전개된다. 인간의 본성은 부분적으로 몇몇 사람에게 발생하여, 이를 통해 인간은 인격성이 된다.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은 인류 안에 발생하여, 모든 인간은 인간 본성을 특별한 방식으로 재현한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본성은 또한 성별, 혈연관계 가운데 존재하게 되는데, 이는 다시금 반복적으로 인간 본성의 한 면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인간의 경우에 이러한 삼중적 본성의 전개는 시간과 공간에서 나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연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분리나 나눔도 없다. 그의 존재가 인격성으로 전개되는 것은, 그의 존재가 위격들로 전개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의 존재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표현되는 내재적 관계들로 전개되는 것을 즉각적으로, 곧바로, 절대적으로, 완전히 포함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원형(原型, archetype)이다. 즉, 인류 안에서 시간과 공간의 형태 가운데 나뉘고, 나란히 병립하고, 전개되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는 영원하고 단순하게 현존한다.


하나님의 존재 안에 있는 발출들(processiones)은 동시에 하나님 안에 자신의 절대적 인격성, 자신의 삼위성 그리고 자신의 내재적 관계들을 초래한다. 그것들은 개인, 가정 그리고 인류 가운데 인간의 본성을 충만하게 전개시키는 모든 발출들의 절대적 원형이다. 그러므로 삼위는 진실로 각기 구별(alius)되지만, 다르지(aliud) 않다.


삼위성은 단일성에서 말미암았으며, 단일성 안에 있고, 단일성을 위한 것이다. 존재의 전개는 그  존재 내부에서 발생하며, 따라서 존재의 단일성과 단순성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더 나아가, 삼위는 비록 [본질에 있어서] 다르지(aliud) 않을지라도, 과연 구별된 주체들(alii), 실체들, 실재들(subsistensiae)이며, 무엇보다도 이를 통하여 존재 자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전개시킨다.


[384p] 마지막으로, 이 삼위는 상호 간에 출생과 내쉼을 통하여 절대적인 방식으로 서로 연관된다. 주체들로서의 그들의 [위격적] 구별은 그들의 내재적 관계들과 완전히 일치한다. 성부는 오로지 그리고 영원히 성부일 뿐이며, 성자는 오로지 그리고 영원히 성자일 뿐이며, 성령은 오로지 그리고 영원히 성령일 뿐이다.


그들 각 위격은 단순하고, 영원하고, 절대적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이므로, 따라서 성부는 하나님이며, 성자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하나님이다. 성부는 성부로서 하나님이며, 성자는 성자로서 하나님이며, 성령은 성령으로서 하나님이다. 그들 셋 모두가 하나님이므로, 그들은 단 하나의 신적 본성을 소유하며, 따라서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단 한 분의 하나님,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존재한다.



- 개혁교의학(Reformed Dogmatics), II.II.6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