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삼위일체론
김영재 교수(합동신학대학원, 교회사)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교리이므로 이를 논의하는 일은 한국 교회 신학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하여 그 기초부터 점검하고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어진 주제를 위하여 우리는 먼저 한국의 여러 교파와 교단 교회의 신앙고백을 살펴야 하는 줄 알지만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것에 한하여서만 살피기로 한다.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를 논한 몇몇 유수한 신학자의 저술을 일별하기로 한다. 삼위일체론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들이 의외로 적음을 발견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논하면서 삼위일체 교리를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인지, 또한 어떤 이유에서 소홀히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고, 삼위일체 교리가 흔히 난해한 교리라고 말하는데, 왜 그렇게들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인들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지를 모색하며, 삼위일체 교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 것인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1.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한국 교회들의 신앙고백
한국 장로교회가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할 때 채택한 12신조는 전체적으로 짧은 신앙고백문으로 되어 있지만, 제 2 조와 3조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비록 짧으나마 아래와 같이 중요한 전통적인 교리를 빠트리지 않고 말하고 있다.
제 2조: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니 오직 그만 경배할 것이다. 하나님은 신이시니 자연히 계시고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며 다른 신과 모든 물질과 구별되시며 그 존재와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과 사랑하심에 대하여 무한하시며 변하지 아니하신다.
제 3조: 하나님의 본체에 세 위가 계시니, 성부, 성자, 성령이신데 이 세 위는 한 하나님이시라 본체는 하나요,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다.
12 신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전통적인 교회의 신앙고백을 따라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하나님 안에서 삼위가 구별되심을 밝히 말하고 있다.
1930년에 채택된 감리교의 신앙선언에서도 역시 제 1조에서 제 3조까지 삼위일체 각 위격(位格)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개별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세 위격의 하나되심에 대한 언급은 없다. 말하자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나 전통적인 역사적인 신앙고백 형식을 따르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어떤 신학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 본문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1.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시며 온 인류의 아버지시요 모든 선과 미와 애와 진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2.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시며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3.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사 우리의 지도와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신을 믿으며,
1784년의 감리교회 종교 강령(the Articles of Religion)은 삼위의 하나되심을 강조하는 면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보다는 철저하지 못하지만, 제 2 항에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고백하면서, 즉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에서, “아버지의 말씀이신 성자가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타고나셨으나...”라고 말하여 성자가 성부와 동 본질임을 표현하고 있다.1)
한국 감리교의 신앙 선언문은 감리교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따라 충분히 고백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제 2항에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라고 한 말을 보아서는 감리교의 종교 강령과는 달리 양태론적인 이해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감리교의 신앙 선언문이 자유주의적임은 주지하는 사실이지만, 그러한 자유주의적 경향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서도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자유주의적 표현은 1972년에 나온 기독교 장로교의 신앙고백 선언에서도 현저함을 본다. 말하자면, 양태론적(樣態論的)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거룩하신 아버지로 나타나셨고 계시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아들로 나타나셨고 또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에서 성령으로 나타나셨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세 품격에서 만나며 그 하나의 품격에서 다른 두 품격과 만난다.”2)
전반의 문장은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며 구약과 신약과 교회 시대의 세 시기를 통하여 계시하신 이름들이라고 말한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적 단일신을 고백하는 표현과 흡사하다. 삼위일체에 대한 이러한 사벨리우스적 견해는 한국 교회의 많은 부흥사들과 일반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이기도 하다.
장로교 통합측 교회가 1987년에 내 놓은 개정판 「헌법」에 새로 작성된 신앙고백서를 수록하고 있다. 새 신앙고백은 삼위일체 교리를 우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이 눈에 뜨인다.
즉, 신앙고백의 서문을 “우리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성호를 찬미하며...” 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를테면, “창조주 하나님” 혹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호칭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신앙고백서를 내어 놓으면서 붙이는 서문이기에 하나님을 기독교에서만 인식하고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호칭한 것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제 1장에는 7개항에 걸쳐 성경에 관하여 고백하고 있으며, 제 2장에서는 하나님의 속성, 삼위일체, 창조주 하나님, 섭리하시는 하나님, 최후의 심판주 하나님 등 5개 항목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고백한다. 제 2 항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고백은 이러하다.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시나 삼위로 계신다. 삼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 삼위는 서로 혼돈되거나 혼합할 수 없고, 완전히 분리할 수도 없다. 삼위는 그 신성과 능력과 존재와 서열과 영광에 있어서 완전히 동등하시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요 1:14,18),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요 15:26). 사람은 성자를 통하지 않고는 성부에게 갈 수 없고(요 14:6), 성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성자에게 갈 수 없으며(요 6:44), 또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성자를 주라고 말할 수도 없다(고전 12:3). 성삼위는 모든 사역에서 공동으로 사역하시나, 성부는 주로 계획하시고(마 24:36, 행 1:7), 성자는 계획된 것을 실현시키시며(요 1:18, 19:30), 성령은 모든 은총을 보존하고(엡 1:13) 더하신다.”3)
통합측 장로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는, 기독교 장로교의 신앙선언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드러나게 양태론적인 표현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라는 표현은 “한 하나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12신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2신조에서는 먼저 제 2조에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고백하는 것이긴 하지만 “한 분”으로 표현할 경우 삼위일체 교리 이해에 혼란을 초래한다. 우리 말로 “분”은 인격체, 즉 ‘person’에 대한 높임 말이다. 전통적으로 삼위의 각 위는 영어로 ‘person’으로 말한다. 그래서 삼위는 “three persons”라고 말해 왔다.
우리 말로도 삼위 하나님의 각 위격을 지칭할 때 “분”이라고 하는 데,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라는 표현은 삼위의 각 위를 “분”이라고 할 때와 혼동을 일으키게 만든다.4)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이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라는 표현은 양태론적 이해로 쉽게 빠지게 만드는 것임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의 문장, 즉 “삼위는 서로 혼돈되거나 혼합할 수 없고, 완전히 분리할 수도 없다.”는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unity)을 설명하는 말인데, 이 문장은 먼저 말한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란 표현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말하는 “In the unity of the Godhead”라는 개념과는 다른 개념임을 추정하게 해 준다.
그것은 종교개혁자들과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통적으로 존중해 온 아타나시우스 신경에 볼 수 있는 “삼위가 혼돈되거나 본질이 분리됨이 없이”이라는 말과 비슷한 표현인 것 같으나, 아타나시우스 신경에서는 “서로가” 아니라 “본질이” 분리됨이 없다고 말하고 있어서 함축성이 다르다.5) 또한 “완전히 분리할 수도 없다”라는 표현도 허술하다.
상당한 정도로 혹은 부분적으로는 분리할 수 있다는 말인지 종잡을 수가 없게 만드는 표현이다. “서로 혼돈되거나 혼합할 수 없고, 완전히 분리할 수도 없다.”는 말은 “한 분”이면서 동시에 “세 분”으로 인식하고 보니, 셋이 하나요 하나가 셋이라는 수적인 개념을 의식한데서 나온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완전히”라는 말을 제거한, “서로 혼돈되거나 혼합할 수 없고, 분리할 수도 없다.”는 표현은 칼케돈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서 그리스도께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지셨으나 그 인격(person)의 하나되심(unity)을 고백할 때 사용한 말로 우리에게는 더 익숙하다.6)
성 삼위 하나님(the Godhead)의 본질의 하나되심(unity)을 신성와 인성을 가지셨으나 한 인격(person)이신 그리스도의 하나됨을 서술하는 말과 같은 말로 서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삼위일체의 하나되심과 그리스도의 인격(person)의 하나되심에 대한 이해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의 각 인격(persona)을 사벨리우스가 그것의 헬라어 ‘προσωπον’의 본래의 의미 따라 ‘가면’(假面) 혹은 ‘역할’(役割, role)로 이해했듯이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동방 교회에서처럼 ‘ʿυποστασις’로, 즉 동본질의 실체로 이해하는 고백이다.
그와 반면에 기독론 교리는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으로 인식되나 한 인격이심을 강조하는 고백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심을 인식하고 고백하지만, 하나님되심(神性)과 사람되심(人性)을 그리스도의 인격에서나 사역에서 전혀 따로 구별하여 인식할 수 없다.
그와 반면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우는, 각 위께서 구원 사역을 함께 하시면서도 서로가 역할을 분담하여 하시는 것으로 인식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한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도 또한 세 분으로,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구별하여 고백한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분의 하나되심(unity)을 신성과 인성을 가지셨으나 그리스도의 하나됨을, 즉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persona)이심을 서술할 경우와 같은 말로 서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한 서술은 도리어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하여 양태론적인 이해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합동 측과 고신 측 계열의 장로교회 교단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고 있는데, 신앙고백서 제 2장 제 3항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거기에는 “신성(神性, 혹은 하나님)의 하나되심 안에 삼위가 계시다”(In the unity of Godhead there be three persons) 라고 표현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간결한 편이다. 통합 측의 새 고백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 각 위의 사역하심에 대하여 설명하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2.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신학자들의 관심
“19세기 이후 현대신학에서 삼위일체론은 교회의 헬라 철학적 신학노작의 산물이요 하나님에 대한 신학자의 사변이라고 푸대접 받아왔다”7)는 말 그대로 한국의 자유주의적 신학자들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거나 언급하는 일이 별로 없다.
1960년 초반에 윤성범(尹聖範)이 토착화신학을 논하는 과정에서 단군신화의 “환인(桓因), 환웅(桓雄), 환검(桓儉)은 하나님이다,” 혹은 “단군신화는 ‘Vestigium Trinitatis’이다” 라고 말하여 삼위일체를 언급하였으나, 그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진지한 이해를 위한 것은 아니고 단군신화가 경교(景敎)와의 접촉에서 생겨났다는 가설을 세우기 위하여 삼위일체의 개념을 그 내용의 이해와는 관계없이, 그리고 어거스틴이 추적한 ‘Vestigium Trinitatis’의 개념을 넘어서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적용해 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윤성범은 단군신화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발견하여 “잃었던 부모를 찾은 기쁨과 흡사한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삼신론 정도로 이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8)
조직신학자들은, 보수적이건 자유주의적인 간에, 그들의 「신론(神論)」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변증적 논증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논한 이후에 삼위일체를 언급하는 경향이다. 그것은 서양의 신학자들의 일반적인 경향을 따른 것이다.
박형룡(朴亨龍)은 그의 「교의신학신론」 제 1편 “하나님의 실유(實有)”라는 제목 하에서 거의 마지막 부분인 제 6장에서 삼위일체론을 다룬다.9) 그것은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주의 신론」의 제 6장에서 삼위일체를 논하는 배열과도 비슷하다.
차영배(車榮倍)는 그의 「신학서론」에 이어 삼위일체론을 「개혁교의학」 II/1의 단행본에서 다루고 있어서 그만큼 삼위일체 교리를 중요시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는 기대한 바와 같이, 이 책의 서언과 서론의 서두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신학 전반의 초석이 되는 신학의 본질적 윈리가 됨을 말한다. “이것이 없이는 어떠한 신학도 세울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초석이 잘못 놓여졌을 때, 신학 전체가 무너지고 만다.”10)고 역설한다. 성령론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많은 논문을 쓴 그로서는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건전한 성령관에 대한 논구를 위하여서도 삼위일체 교리의 정립이 필수적이며 우선되어야 하므로 그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은 기대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종성(李鍾聲)은 그의 「신론」11)에서는 “삼위일체”란 주제를 논의하고 있지는 않으나 따로 7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단행본에서 삼위일체를 논한다. 삼위일체 교리를 현대 신학자들이 경시해 왔으나, 바르트와 몰트만은 예외로 이를 중요시하고 있는 점에서 저자도 의견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와 몰트만이 이 교리를 유럽신학의 전통 안에서만 다루고 있는 데 반하여, 저자는 그러한 테두리를 벗어나 더 폭 넓게 논구하며, 아시아적 바탕에서 이 교리를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했다고 피력한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 역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그는 한국의 그 어느 신학자보다도 삼위일체 교리를 중요시하고 관심을 기울여 왔음을 알 수 있다.12)
김균진(金均鎭)은 그의 「기독교조직신학」13)에서 기초신학의 I에서는 제문제를, II에서는 계시론, III에서는 성서론을 논하고, IV.에서 신론을 다룬다. 신론에서 먼저 ‘성서의 하나님’을 논하고 이어서 두번째로 ‘삼위일체론’을 다루고 있다. 그 다음으로 ‘예정론’, ‘하나님 인식’, ‘하나님의 존재증명’, ‘하나님의 속성’,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등의 순서로, 즉 일반적인 저술과는 역순으로 논하고 있어서, 이러한 주제의 배열 자체가 삼위일체 교리를 합리적인 논구를 지양하고 출발에서부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관한 말씀을 통하여 이해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본체에 대한 교리, 즉 하나님 자신에 대한 교리이므로 하나님의 속성의 교리보다 우선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신학교 배경에서 나왔고 거기서 교수하는 신학자로는 의외로 삼위일체 교리에 관심을 보이며, 참신하면서도 건전하게 논구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3.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증의 문제점
박형룡은 고전적인 조직신학적 방법으로 합리적이며 유신론적(有神論的)인 논구(論究, approach)를 통하여 삼위일체론을 충실히 설명한다. 그에 비하여 차영배는 교리사적인 논구에 충실함을 볼 수 있다. 박형룡은 서두에 삼위일체 교리를 제 1절 “삼일교리의 개관”이라는 제하(題下)의 제 1 항에서 “난해한 계시진리”라는 주제하에 논구한다.14) 그리고 제 3절 교리적 진술이라는 제하의 결론 부분인 제 7항에서 “신비하나 진리”라는 제목을 붙여 삼위일체 교리를 서술한다.
삼위일체 교리를 논함에 있어서 “난해하다”든지 “신비하다”는 말을 미리부터 말하거나 혹은 결론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에서 바로 출발하여 논구하기 보다는 유신론적 논구를 시도하므로 하게 되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과 논구는 삼위일체 교리를 더 어렵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기독교의 교리가 난해하다면 다 난해하다.
하나님의 창조, 예정과 섭리, 그리스도의 성육, 십자가의 죽으심과 구속 등 그 어느 교리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같이 난해하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면서는 특별히 난해함을 상기시키거나 경고하는데, 그것은 그 교리가 다른 교리 보다 더 어렵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우리는 본래 이성적인 추리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지 않으시면,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신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알며, 계시해 주신 그 범위 안에서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논의할 수 있다.
성경에서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인 초대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특이하므로 그것을 발견하고 충분히 이해하며 교의화(敎義化)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었다.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최초의 교회 공의회는 소위 니케야 신조를 받아들였으며, 381년에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받아들였다. 서방 교회는 예배에서 사도 신경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한 신앙을,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그리고 기독신자가 되고 교회의 지체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나 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에 연합하는 세례를 받는다(마 28:18). 그리고 특히 한국 교회에서는 예배를 마칠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을 기원하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말씀을 따르는 축도로 예배를 마친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와 같이 가장 기본이 되는 교리이며 실제적으로 친숙한 교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자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난해한 교리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따라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철학적인 신관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고 하거나 그러한 신관에 맞추어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안셈(Anselm)과 토마스 아퀴나스 등 초대와 중세를 대표할 만한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을 시도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논증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만 막연히 하나님이 계신다는 억측을 할 수 있게 할뿐이지 인격적인 살아 계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도록 하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한다면서 하나님을 ‘최고의 선’, ‘만물의 원천’, ‘제일 원인’ 등 철학적인 개념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그런 방법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논증하려고 해서는 옳은 이해에 도달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러한 시도는 오히려 참된 이해에 방해가 될 뿐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는 일에 익숙한 신학자들은 삼위일체 교리 역시 논증하는 식으로 이해하거나 서술하려고 하기 때문에 난해한 교리라는 말을 하게 마련이다.
어거스틴이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을, 즉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할 수 있는 유추를 찾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이성적인 논증을 시도한 전형적인 범례이다. 이종성은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어거스틴이 발견하려고 한 ‘vestigium Trinitatis’를 ‘삼위일체의 모상(模像)’으로 번역하고, 그것을 삼위일체의 논리적 근거라고 하여 존중하면서, 자신은 이를 넘어서서 보다 광범하게 삼위일체의 모상을 추구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경주한다.
저자 자신이 그 작업이 특이한 것으로 자부하는 만큼, 우리는 그 점에 대한 평가를 옳게 해야 할 줄 안다. 필자의 견해로는, 그가 많은 노력을 경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러한 시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여긴다.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을 초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의 모상으로 존재, 지식, 의욕이라든지, 마음, 의식, 사랑, 혹은 기억, 지각, 의지 등, 인간의 지각 혹은 감정에 관한 추상적인 개념에서 삼위일체의 모상을 찾는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셋을 들어 말하는 유추들은 필연적으로 셋이 한 묶음으로 인식될 수 있는 개념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사하고 상호 관련된 개념들을 셋씩 골라 하나로 묶는다. 그러므로 그러한 방법론 자체가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종성은 이를 본받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신교적이며 범신론적인 타종교의 신 개념에서 삼위일체 신관의 모상을 발견하려고 한다. 즉, 고대 중국의 3대 신(三大神)으로 꼽힌다는 “상제(上帝), 노군(老君), 황제노군(黃帝老君)” 등의 신들의 이름을 들면서,15)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삼위일체론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그 논리 구조에 삼위일체론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16)
그리고는 수메르와 바빌론의 “다른 신들 보다 특출한 삼신,” 즉, “아누(Anu), 엔(Enlil), 에아(Ea),.”17) 힌두교의 삼신, 즉, “브라마(Brahma), 비슈누(Vishnu), 시바(Siva)”와 로마의 “3대 신”, 즉, “쥬피터(Jupiter), 마르스(Mars), 퀴리누스(Quirinus).”를 삼위일체의 모상으로 들고 있다.18)
이종성이 삼신(三神)으로 꼽는 타종교의 신(神)들은 많은 신들 가운데 한 신들인데, 어떻게 그들 가운데 셋을 골라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이라고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종성은 이 보다 앞서 “반(反)삼위일체론에서는 힌두교의 범신론적인 신관이 반삼위일체론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는 모순되는 말이 아닌가 싶다.19) 다신론의 많은 신들 가운데 주요한 신 셋을 택하여 삼위일체의 흔적이라고 말하면서, 단군신화의 삼신을 삼위일체의 모상으로 생각하는 윤성범의 발상을 그가 비판하는 것은 역시 모순이다.
비슷한 모순된 발언은 박형룡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이종성과는 달리 이교(異敎)에는 유추가 없다고 말하면서도,20) “일체에 삼위의 증명”이라는 제하(題下)에서는 “다신론의 응원”이라는 제목 하에 이렇게 말한다.
“만대의 철학자들과 만국의 백성들만 아니라, 현금의 식자들 중에서도 채택하는 자 적지 아니한 다신론은 비록 그릇되고 악화한 종교 사상일찌라도 신적 성질의 충만과 다양을 추구함에서는 삼위일체 신관에 응수(應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설명은 삼위일체를 삼신론이나 다신론과 혼동하게 만들 뿐, 옳은 이해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인간의 드라마가 투영되고 있는 다신론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성을 찾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삼위일체 교리의 이해를 위하여 합리적인 논증을 시도하다 보면, 견강부회한 논리를 펴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4. 삼위일체에 대한 양태론적 이해 문제
차영배는 이종성이 번역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 부분을 오역이라고 지적한다.22) 여기서는 그 조항의 전반만 보기로 한다. “In the unity of the Godhead there be three persons, of one substance, power, and eternity; God the Father, God the Son, and God the Holy Ghost.”를 “하나님의 본체는 하나이시나 삼위로 계신다. 즉 한 본 체와 한 권능과 한 영원성이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하나님,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종성은 그의 저서에서도 “하나님의 통일성 안에서 세 위가 있다. 한 본체와 한 권능과 영원성이다.”하는 부분에서는 오역을 그대로 두고 있으나,23) 그 다음의 부분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다”라고 옳게 번역하고 있다.”2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단행본의 번역만을 두고 말하자면, 그것은 오역임이 분명하다. 만일 오역이 아니라고 한다면, 다시 말하여, 그렇게도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번역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양태론적인 이해에서 나온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거나 언급하는 일이 거의 없다. 언급한다고 하더라도 양태론적 이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충분히 알만한 일이다. 그런데 보수적인 신학자에게서도 양태론적 표현을 발견할 수 있어서 자못 긴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 세 위는 여러 사람의 여러 인격들처럼 전적으로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 위는 하나님의 본체(本體)가 존재하고 있는 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표현을 본다. 후반의 문장은 어김없는 양태론적 표현이다.
삼위일체 교리를 철학적인 용어를 빌려 설명하려다 보면 양태론적인 표현에 빠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찬송가 “참 반가운 시도여”의 4절 “여호와의 말씀이 육신을 입어...” 라는 말은 가현설적인 표현이다. “육신을 입어”가 아니라 “육신이 되셔”(σαρκοποιηθεις)라고 해야 한다. 이 정도의 표현을 가지고 따지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른지 모르나, 그러한 표현은 이미 2세기의 변증가들이 가현설에 반대하여 논의하면서 사용한 말이다. 신학적인 용어들은 사상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말로 다듬어져야 한다.
한국의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삼위일체의 하나되심을 말할 때의 ‘unity’를 ‘단일성’(單一性)으로 번역하는데, 그리스도의 인격(person)의 하나되심을 말할 때는 단일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럴 경우, 그것은 바른 표현이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unity’를 말할 때는 ‘단일성’이란 말보다는 ‘하나되심’ 혹은 ‘하나이심’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은 것으로 생각한다. 삼위일체 교리를 결과적으로 부정하는 ‘Monarchianism’을 ‘단일신론(單一神論)’으로 번역하면서 삼위일체의 ‘unity’를 같은 어간과 개념을 가진 ‘단일성’으로 표현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unity’는 복수성(複數性)을 전제하는 반면에, ‘단일성’은 시종 단수성(單數性), 즉 ‘모노스’(monos) 혹은 ‘모나드’(monad)를 전제할 뿐이다. 그러므로 “신성의 단일성” 혹은 “하나님의 단일성”이라는 표현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단일신론적 이해를 도우는 표현이므로 적절한 말이 못된다. 이런 여러가지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한국 교회에는 삼위일체 교리를 양태론적 단일신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소지가 마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이해가 만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5.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천적 이해
삼위일체 교리는 신학자들만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이해하기를 시도해야 하는 현학적인 논리의 희롱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이면 누구나 다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믿어야 하며, 이해할 수 있는 교리일 뿐 아니라, 또한 실제로 믿고 있는 교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평신도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은 목회 현장에서 당면하는 실제적인 문제이다.
목회 현장에서 평신도들에게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면서 난해한 교리라든지 신비 중의 신비라고 말함으로써 미리 겁을 주는 것은 그들이 교리를 배우는 일에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비”는 초절적(超絶的)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께 속한 지식이지만,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되었으므로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며, 비록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지식의 부요함을 찬탄하며 고백하는 것이다.
목회자가 성경에 충실하다가도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성경과 교리사적(敎理史的)인 지식을 동원하기보다는 자연의 유추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한 시도가 못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면서 비유를 사용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체를 비유로 설명하는 말씀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말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답하시는 말씀,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ehyeh asher ehyeh, 출 3:14)하는 말씀을 발견할 뿐이다. 그밖에, 예컨대, 이사야 9장 6절에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는 이름이나 유추들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물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역할과 능력을 묘사하는 말일 뿐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으시면,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은 신학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철학적인 막연한 신관이나 다신론적인 혹은 범신론적인 신관이나 다른 종교적인 신관으로 성경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려고 하면, 그것은 잘못이다.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물질 세계를 초월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을 당신이 지으신 자연계의 유추를 통한 설명으로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흔히 사용하는 태양의 유추 역시 그러하다. 그러한 설명은 약간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 같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금 의문을 일으키게 하거나 잘못 이해하게 만들 뿐이다. 즉, 단일신론적(單一神論的)인 이해로 오도(誤導)한다.
삼위일체 교리를 삼각형을 그려 설명하려는 시도 역시 안될 말이다. 그런 설명은 불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불경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본체의 오묘한 것을 도식화함으로써 쉽게 이해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비신학적인 발상이다. 셋이 어떻게 하나가 되느냐 하는 의문을 그대로 받아, 그 원리를 수적으로 혹은 기하학적으로 설명하려면 설명이 옳게 되지를 않는다.
속사도 시대 이후 로고스를 우주구조론(cosmogony)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오던 것을 이레니우스(-202년)가 구속론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확립에 전기(轉機)를 마련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당시까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로고스로써 설명하려는 것을 지양하여 그리스도로써 로고스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에 관한 지식은 무슨 사색으로나 비유를 사용하는 설명을 통하여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말씀을 따라 논구하고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성경에는 삼위일체란 단어는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 교리는 충분한 말씀으로 가르친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하는 자세로 고백해야 하는 교리이다.25)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왜, 어떻게 형성되게 되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를 말하게 된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냐,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냐 하는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두고 논의할 때, 쟁점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냐 하는 것이었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아버지와 같이 참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는 말이다.
삼위일체라는 말을 비록 만족할 만하게 설명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구든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고 하는 베드로의 고백을 따라, 혹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하는 도마의 고백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고 고백하면, 그는 실제로 삼위일체 교리를 믿고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한다.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를 먼저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시인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모든 이단은 단일신론적 신학을 지지한다.
초대 교회의 유대교적 에비온주의적 양자론(養子論)과 영지주의적 가현설(假現說)은 반 기독교적인 이단의 전형(典型)이다. 영지주의는 희랍적 철학 사상과 동방의 신비주의적 종교 사상이 혼합된 사상이었다. 양태론은 인간의 육체를 옷 입듯 입으셔서 사람인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말하는 가현설과 통한다. 합리주의적인 그리스도 이해나 신비주의적 그리스도 이해가 서로 통한다.
많은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역사 안에 사람으로 나셨음을 믿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사람으로 나신 예수께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인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냥 종교적인 체험을 위하여 모범으로 삼을만 한 이로 생각할 뿐이다. 금식과 기도와 명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접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함으로써 각자가 그리스도와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에 양태론적 삼위일체 이해가 보수적인 교회에까지 일반화되어 있는 것은 시정되어야 한다.
양태론적 이해는 신비주의 운동이 준동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한다. “그리스도 중심 신학”을 떠나서 “신 중심 신학”을 거점으로 한다는 종교다원주의자에게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완전히 폐기될 수 밖에 없는 교리이다. 기독교적 신앙과 신학의 핵심을 떠나 단일신론적인 신관을 견지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이제 기독교적 신학 세계를 벗어나 “우주론적 기독론”이란 말에 걸맞게 종교다원주의의 무중력 세계로 접어들어 표류한다. “우주론적 기독론”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그들의 사상적 근거를 두려는 비역사적인 기독론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능력임은 일찍부터 알았다. 그러나 성령께서 인격이심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고백을 확정하고 난 이후에 인식하게 되었다. 성령이 인격이시라는 교리만 해도 성경에는 분명히 기록되고 있다. 말씀을 깨닫고 보면, 그것이 진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성령을 가리켜 보혜사(parakletos, 위로자)라고 하심으로써 성령께서 인격이심을 말씀하신다(요 14:26, 15:27, 16:7, 17:13-14, 참조:롬 8:26-27).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즉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에서 출발한다. 구원을 약속하시고 이를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은 당신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해 주신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17). 즉,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요 14:6). 그리고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다(롬 8:9, 요 3:5).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전에 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이 기독교 서방 교회의 전통적인 고백이다. 동방 교회는 성령은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나오신다고 고백하는 점에서 다소 다르다. 그러나 삼위 일체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다. 요한 1서에 보면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말씀한다(요일 4:9, 16). 그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증거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작품으로서 좋게 여기시면서 사랑하기 시작하셔서 비로소 사랑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고 영원 전부터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영원 전부터 아들을 사랑하시며,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과 더불어 사랑으로 교제(communion)하고 계심을 말씀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이심을 함축한다(요 15:9, 17:24).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섭리하신다. 사람을 지으시되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며 서로 사랑하게 하신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순종하심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당신을 희생하셨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났음을 믿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삶을 살아 구원을 이루게 하신다.
맺는 말
유신론적(有神論的) 논증은 철학과 종교에서 성경의 계시의 말씀을 접어 둔채 신의 존재를 논의하는 논증이다. 즉, 자연 만물을 보아서 신(神)이 존재함이 틀림 없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논증이다. 유신론적 논증을 통하여서는 신의 존재를 막연히 추측할 수 있게 해 줄 뿐이다.
이러한 지극히 제한된 일반적인 유신론적 논증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일에 더 연장하여 적용하는 일은 잘못이다. 그것은 아주 불합리한 논리의 비약을 감행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 안에서,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된 하나님의 본체에 대한 교리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에 관한 부수적(附隨的)인 교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논의할 경우와 같이 술어(述語)나 보어(補語)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변함이 없는 주어(主語)로서 의미를 가진다. 즉, 우리의 신앙고백과 예배를 받으시는 주격이신 하나님 자신에 관한 교리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논증할 수 있거나 논증을 감행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고 신앙고백과 예배를 요구하는 교리이다.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거나 설명함에 있어서 유신론적 논증의 한계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대로 적용하면 쉽게 양태론에 빠지게 마련이다. 한국 교회는 양태론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유신론적 논증의 한계점을 충분히 인식하는 가운데 당치않은 논리의 비약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고백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련하여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구원 교리는, 아니 모든 교리는 온전히 그리고 철저히 삼위일체 교리에 근거하고 있음을 재삼 인식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사람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에 관한 교리이기 때문이다. <차영배외, 「삼위일체론과 성령론」 - 차영배교수 성역 40년 기념논문집 -, 택학사, 1999, 235~253.>
참고문헌
1) 이장식 편역, 기독교 신조사 II, 서울:컨콜디아사, 1983, 219쪽.
2) [한국기독교장로회] -연혁·정책·선언서-, 한국 기독교장로회총회발행, 1978, 24쪽.
3)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87, 1988 3판), 161쪽.
4) 삼위를 세 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런 표현은 삼신론(三神論)과 혼동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성부, 성자, 성령을 함께 지칭할 때는 삼위라는 말이 적합하다. 참조: 차영배, [개혁교의학 II/I] 삼위일체론(신론),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82), 239쪽.
5) 아타나시우스 신경에서는 “위격”과 “본질”을 따로 언급하면서 표현하고 있다. Fides autem catholica haec est, ut unum Deum in Trinitate, et Trinitatem in unitate veneremur, neque confudentes personas, neque substatiam separantes. 참조:Denzinger-schönmetzer, 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klartionum, Editio XXXVI, Verlag Herder KG, Freiburg im Beisgau 1965, S. 41.
6) 이에 해당하는 칼케돈 신조의 본문은 이러하다: “그 분은 두 본성으로 인식되는데, 두 본성이 혼합되지도 않고, 변화되지도 않으며, 분활되지도 않으며, 분리되지도 않음을 인정한다. 도리어 양성은 각 본성의 특이성을 보유하면서 하나의 인격과 자질로 연합되어 있다. 우리는 두 인격으로 분열되거나 분리된 한분을 고백하지 않고, 한분이시며 동일한 독생자이신 성자, 하나님의 로고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7) 金敬宰, “신의 삼중적 동태양식”, [神學思想], 1977년 8월호, 458쪽.
8) 基督敎思想, 1963년, 10월호, 14쪽이하.
9) 朴亨龍著作全集 II,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77). 185-237쪽.
10) 차영배, 앞의 책 서문.
11) 李鍾聲, [神論],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0)
12) 李鍾聲, [三位一體論],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1), 서문 참조.
13) 金均鎭, [基督敎組織神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4, 1989(7판)
14) 朴亨龍, 앞의 책, 185쪽
15) 李鍾聲, [三位一體論], 491쪽.
16) 같은 쪽.
17) 같은 책, 492쪽.
18) 같은 책, 493-495쪽.
19) 같은 책, 401쪽 이하 참조.
20) 朴亨龍, 앞의 책, 185쪽.
21) 같은 책, 193쪽.
22) 차영배, [삼위일체론], 238쪽 각주.
23) “하나님의 하나되심 안에 세분이 계시는데, 한 실체이시며 능력있고 영원하시다.” 즉, 세분이 한 실체이시며 동등하게 능력있고 영원하시다는 말이다.
24) 李鍾聲, 앞의 책 135쪽.
25) 李鍾聲, 앞의 책, 544쪽 이하 참조.
출처: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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