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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 - 김명도 교수

Bavinck Byeon 2015. 2. 7. 21:02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

 

김명도 교수

 

 

기독교를 믿는 성도들이 오해하는 교리가 성령이다. 어떤 분은 성령을 하나의 힘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성령은 힘이 아니다. 성령은 하나님 바로 그분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삼위 일체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령도 믿지 않고, 성자 예수도 우리가 믿는 바 성삼위 중 제 이위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는 “우리 보다 먼저나신 피조물”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골로새 1:15절 말씀에 의거한다고 하지만, 성경은 항상 문맥을 따라 해석해야 한다. 골로새 1:16을 보면 저들이 피조물이라고 믿고 있는 그 예수는 바로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된 것이 하나도 없는 조물주 바로 그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시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나 종교는 구원이 없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은 종교나 교파와는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WCC에는 문제가 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주님이 “하나가 되라”고 기도한 것은 신앙이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지, 신앙체계가 전혀 다른 사람들, 이를테면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과연 창세기 1:26절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인데 왜 일인칭 복수인 “우리”란 말을 썼을까 하고 한번쯤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여기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입증한다. 또한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내려가서”라고 하였다. 역시 하나님은 자신을 일인칭 복수로 나타냈다.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아마도 결정적인 삼위일체의 교리의 입증은 요한복음 12장에서 요한이 이사야 6장 말씀을 인용한데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선지자로 안수 받는 장면이다. 이사야는 만군의 주 여호와를 만나 “화로다 나여 화로다 나여 입술이 부정한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를 뵈었음이라”라고 하였는데,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2장에서 그 때 이사야가 본 것은 주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입증은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볼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했는데,  아버지, 아들 성령이 삼위일체인 것을 증명하는 것은 “이름으로”란 말이 단수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만일 삼위가 각각 다른 분이라면 복수로 되어 있을 것인데, 단수로 되어 있는 것은 삼위가 모두 한분 하나님을 의미함을 웅변으로 입증한다.

 

이 외에도 디도서 2:13에 보면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 대목도 볼 수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항상 계시며 각각 각위가 하시는 일이 독특하시다. 여기에 대해서 자세히 공부하기 원하시는 분은 “아다나시우스 신경”을 참고하기 바란다. 모든 신경 중에서 <아다나시우스 신경, The Athanasian Creed>은 우리의 믿는 도리중에서도 삼위일체와 예수님의 인성 신성에 대하여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초대교회의 우수한 개혁주의적 신조이다. 전문 44조로 좀 길지만 꼭 읽어 내용을 숙지해 두자.

 

대개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을 혼동하는 분들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을 언급한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읽어가면서 보면, 그 오순절이 자꾸만 반복하는 듯 보인다. 여기서 어떤 교파에서는 오순절은 지금도 반복되고 세상 끝날 까지 반복한다고 가르친다. 심지어 Wayne Grudem 같은 학자 (필자보다 신학교 1년 후배) 도 지금도 예언이 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개혁주의의 거장이며 필자의 신학교 시절 은사이신 O Palmer Robertson 은 새로운 책을 써서 Grudem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그 책의 이름은 "The Final Word" 우리 말로는 “현대의 방언과 예언 과연 성경적인가?” 라고 번역되었다.

 

또 이들은 히브리서 13:8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란 구절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니, 오늘도 오순절에 있었던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이 어제와 오늘과 영원토록 불변하다는 말씀은 그의 속성(attributes 屬性)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의 사역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가령 노아의 홍수가 다시 반복하는가? 가령 십자가 사건이 다시 반복하는가? 아니다. 구약의 의식법이 다시 반복하는가?  이런 일은 하나님의 구속사(God's Redemptive History)에서 유일회적(唯一回的)인, 단회적(單回的)인 사건들이다.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할 능력이 없어졌거나, 하나님이 변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이 변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끝난 지금은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안 하시는 것뿐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상실되어서가 아니다.

 

오순절 사건도 그러하다. 오순절에 약속의 영이 오셨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사도행전 1:8에 곧 성령을 보낼 터인데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였다. 또 주님께서 그가 승천한 다음 성령을 보내셔서 진리를 증거 하실 것도 이미 요한복음 14장 과 15장에서 미리 말씀하셔서 제자들은 그런 성령이 오실 것을 알고 있었으며, 과연 오순절에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 진 것이다. 오순절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했던 성령을 보내신 날이고, 신약교회가 출발하여, 승천한 주님의 영이 말씀을 통해서 전 세계에 산재하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원 운동을 촉진한 날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우리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 약속이란 말은 <언약> (言約, covenant)이란 의미이다. 언약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장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매”란 말에서, “계신다”는 말은 원문에서 “천막(天幕)을 쳤다”라는 말, 즉 “skenew”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 낮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원형으로 천막을 치고 그 중심부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그 중심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렸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계시고 오늘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같이 계시는” “임마누엘” 되신다. Immanuel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하신다는 말이다 (God with us).

 

오순절에 불의 혀, 강한 바람, 방언 등의 해석이 구구하지만, <불의 혀>라는 말은 오늘도 그런 불의 혀가 나타난다는 말이 아니라,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강림하던 때에 있었던 일시적인 단회적인 현상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았다. 그때 시내 산에는 우뢰소리가 나고,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지진이 나서 땅이 흔들리고, 불 가운데 연기가 일고, 그런 가운데서 받은 계명을 기억한다(출 32장). 여기 사도행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12에서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지금 여기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건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 갈릴리에서 500문도, 예루살렘에 120문도, 그의 제자 12명, 그리고 그 주위의 여인네들 몇 명 모두할 합쳐도 1,000명이 되지 못했지만,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베드로가 한번 설교하니 3,000 명이 회개했다.  이런 의미에서 “더 큰 일”을 말하는 것이며, 오늘 어떤 목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적 기사”를 말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계명을 받던 때와 연관지어 생각하라. 시내 산 사건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세우고 신정국가(神政國家, theocracy)를 만드는 장면이다.

 

오순절 사건은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어 신약 교회가 탄생한 기록이다. 본문에서  강한 바람이 불고 불의 혀가 갈라지고, 그리고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모두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와 같은 상황이다. 그때도 구름과 바람과 불이 있었다. 세례 요한은 말하기를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란 말을 했다. 그 말씀이 여기서 이루어졌다. 불은 정결케하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정열을 가리킨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이제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복음을 나가서 전하라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받은 것이다. 이때부터 복음은 왕성하게 전파된다. 성령 받은 증거가 무엇인가? 성령을 받은 증거는 전도하는 것이다.(행 1:8).

 

방언은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알지 못할 방언(unintelligible gibberish)이 아니다. 전 세계 16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가 배우지 않은 말로,  세상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었던 기적 중의 기적이다. 이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고 서로 배우지 아니한 외국어를 더듬거림 없이 자유로이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방언은 항상 예언과 같은 구실을 한다. 그것을 통역하면 예언이 되고, 그 예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 그러기에 통역 없는 방언을 금한 것이다. 이것이 기적이다. 선교 할 때는 말이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원전 2세기에 LXX(편집자 주-70인역:구약성경 그리스어 번역본) 을 만들도록 애굽왕 Ptolemy IV를 동원해서 역사하시어, 칠십인역 을 만들게 하여, 잊어버린 모국어인 히브리어로부터 당시 전 세계에서 통용되던 헬라어로 읽게 만들었고,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구약성경이 끝난 다음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약 400년 어간에 전 세계의 언어를 헬라어로 통일했다. 어디를 가나 헬라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신약성경도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바울은 소아시아를 여행하면서 헬라어로 된 LXX 를 이용하여  전도했고, 사람들은 쉽게 복음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떤 분들은 원래 신약성경은 아람어로 기록된 것을 후세 사람들이 헬라어로 번역했다는 사람이 있다. 가령 영국 Scotland의 St. Andrews 대학의 Matthew Black 박사 같은 사람이나 미국 Chicago 대학의 종교학 교수였던 Edgar Goodspeed 교수가  그런 사람이지만 이들의 생각은 잘못이다. 신약은 원래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만일 번역한 것이라면 pun, 즉 말장난 같은 것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가령 예를 들어서,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저 밭의 콩깍지는 깐 콩깍지냐 안 깐 콩깍지냐? 라는 멋있는 말을 영어로 그런 묘미를 살려 번역할 재주가 없다. 영어에서  Peter Piper picked a peck of pickled peppers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아무리 유능한 분이 번역해도 그 멋진 두운법(頭韻法 alliteration)의 묘미를 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나오는 그런 묘미가 있는 기교를 만일 신약이 원래 아람어(Aramaic)로 기록되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번역할 수 있겠는가? 라는 것이 필자의 반론이다. 이에 대해서 흥미가 있는 분은 Nigel Turner 의 Syntax of New Testament Greek (Edinburgh, Scotland: T.&T.Clark, 1967)을 참고하라,  이 책은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필자가 Th.M 공부를 하던 옛날 지도교수 Dr. Philp E. Hughes 교수와 이 책을 가지고 seminar 를 하면서 실로 엄청한 지식을 얻었던 기억이 있다. 필자는 그의 RA 로 일하면서 공부했는데 지금은 하늘 나라에 가셨다. 지금도 그를 못 잊는다. 그는 박식한 신학자 였다. 그 밑에서 연구할 수 있었던 젊은 날들이 그리워 진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평상시에 아람어를 일상용어로 사용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그리고 아람어를 필요에 따라 모두 사용하셨으며, 오직 아람어만 사용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마가복음에 아람어 몇 개가 등장 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아람어만 사용했다고 단언하는 것은 억측(臆測)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신약성경이 원래 아람어로 기록된 것은 아니고, 신약성경은 원래 헬라어로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조금 전에 언급한대로 WCF에서도 그렇게 증언하고 있고, 신약성경의 구문(構文 syntax)에서 그렇게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Richard Longenecker. New Dimension in New Testament Study (Grand Rapids, Mich: Baker, 1964) 중에서, Philip Edgecumbe Hughes 교수의 “Language of Jesus"를 참고하라. Hughes 교수는 동부 Pennsylvania 주 Philadelphia에 있는 세계적인 개혁주의 신학의 보루(堡壘, bastion)인 Westminster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였으며, 필자의 Th.M 공부 시절, 필자의 논문지도 세 명 지도교수 중 한 분이었고, 필자는 공부하는 동안 그의 “히브리서 강해” 저술을 위해 얼마동안 Research Assistant(RA)로 일했다.

 

성령 세례는 곧 구원을 말하며 일생에 중생할 때 단 한 번 경험하는 사건이다. 우리가 중생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될 수 없는 일이다. 고린도전서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하고, 로마서 8:9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라고 했으니, 성령을 받는 것은 구원을 이룩할 때 경험하는 유일회적(唯一回的)인 사건이다.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하는데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모두 성령의 역사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어떤 분들은 목사가 손을 머리에 대고 안수해야 성령이 임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이고, 안수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안수 받는 사람에게 특별한 일을 위임할 때, 그가 맡은바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더하기를 기도할 때 안수한다. 가령, 안디옥에서 사울과 바나바를 성별(聖別 set apart)하고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했다. 구약 때는 왕, 제사장, 선지자들을 모두 기름을 부어 안수를 대신했다. <메시야>란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인데, 그 메시야는 헬라어로는 <그리스도, Christos>란 말이고, 그 메시야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다.

 

그러기에 성령 세례는 중생하고 구원을 얻은 다음에 다시 두 번째로 받는 축복이 아니라, 중생할 때 일생에 한 번 받는 일로 참다운 성도라면 누구나 처음 믿을 때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성령 세례를 중생과 별도로 받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오순절파와 순복음파 들이다. 저들은 사람이 중생하는 것은 자기 본인의 힘으로 되어 지고, 그 다음에 성령 세례를 받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잘못이다. 성경 어디에도 성령 세례가 구원을 얻은 다음 두 번째로 받는 축복이란 말은 없다. 엡 4:5에 보면,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라고 했다. 세례는 하나뿐이다. 그 세례는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즉 유기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organic union with Christ) 할 때 받는 것이다.

 

로마서 6장에는 성도가 세례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되어(mystic union with Christ) 다시는 죄 가운데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혼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의에 대하여 산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의 설명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찾아 불 수 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이 있고 열매를 맺는다. 사람이 중생하여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우리가 가지(枝)로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듯, 우리가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연합으로 접하여 있으면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의 의미이고 이것이 바로 성령 세례의 의미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것과 우리에게 성령을 주어 예수를 믿게 하는 두 가지 사역이다. 요한복음 1:29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한 구절에서, 우리의 죄를 없이 하는 일을 하시고 세례요한이 한 말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는 불로 세례를 줄 것이요”라고 한 대로,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말을 잊지 말자. 구약을 보면 “영을 부어 주신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가령, 요엘 2:28은 베드로가 오순절 때 인용한 말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구약성경을 보면, 가령 에스겔 39:28-29에도 “이스라엘 집에 영을 퍼부어 준다”는 말이 있고, 이사야 32:15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예수님은 죄를 없이 해주시고 또한 세례를 주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신다. 주의할 것은 요한복음 1;29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에서 “지고 가는”이란 말은 원문 헬라어 성경에서 보면, 현재분사(現在分詞, present participle)이다. 구원할 자를 구원해 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계속적 사역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그 모든 피택자의  죄를 짊어지고 가신다는 말이고, 그가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세례 요한의 말도 현재형 분사이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해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람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즉 단회적(單回的)으로 성령을 부어주어서 그가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에게 돌아오도록 한다는 말이 분명하다.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주고, 동시에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함을 잊지 말자(요14:26;15장 26절).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려 하심이다(엡 1:17; 갈 4:19; 고후 3:18).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은 우리 속에 성령이 내주하기 때문이다(갈 5:15-25).

 

그러므로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그가 보낸 성령으로 인하여 많은 그의 백성들이 세례를 받고(영을 퍼부어 주리니), 그리고 죄 없이함을 받는다. 이것이 구원이다. 성령 세례는 사람이 거듭날 때, 즉 구원을 얻을 때 누구나 처음 단 한번 경험하는 일이며, 중생한 다음에 다시 경험하는 특수한 성령의 사역이 아니다.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 세례는 단회적(單回的), 유일회적(唯一回的)인 성령의 역사>이다. 개인적으로는 일생에 중생할 때 단 한번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한편 <성령의 충만함>은 다르다.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함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자. 승천하신 예수님은 오순절에 성령을 퍼부어 주시어, 처음에는 120명에게 성령 세례를 주었고, 후에는 3,000명에게 성령 세례를 주었다. 이렇게 성령 세례를 주어 회개하고 중생한 결과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가? 사도행전 2:4에 보니 “성령 충만”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의 결과는 성령의 충만이다. 세례는 주님이 하신 일이다. 그는 하늘에서 성령을 부어 주셨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은 거기 모인 사람들이 받은 것이다. 주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주신 성령을,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이 받은 것이다. 세례는 중생할 때 단 한번 주님이 성령의 도움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일어나는 계속적인 성화의 은혜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말씀에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에 날마다 닮아가는 사람이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중생하면 그 다음부터 계속해서 성화(聖化)가 시작된다. 성화는 과정이다.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 연속된다.  바울도 빌 3:13에서 “내가 이미 잡았다 함도 아니요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나간다”라고 말했다. 또 바울은 빌 2:12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룩하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은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이룩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화의 과정을 충실하게 해 나가라는 말이다. 성령 세례는 한번이고 성령 충만은 계속되어져야한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을 받은 사람이 그 증거로 날마다 성화를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행위를 말한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성화가 완성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성도는 죽을 때 그의 성화가 끝난다.

 

성화는 본인이 해 나간다. 성화를 잃어버리면 다시 회복하면 된다. 성화하지 않으면 성령이 근심한다(엡 4:30). 성화를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이다. 회개를 통해서 성화가 계속된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회심(conversion)에는 믿음과 회개가 따르는데 ,믿음은 미래 지향적이고 회개는 과거 지향적이며 성화와 직결된다.

 

성령 충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은 칭찬을 들으며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한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를 보라. 이들은 칭찬을 받으며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다(행 6:3-5). 바나바도 그러하고(행 11:24),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도 그러했다(행13:52).

 

2. 성령 충만은 어느 특정한 직무를 담당할 때도 하나님이 내리신다. 누가복음 1:15-17에 보면, 세례 요한은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9:17 이나 사도행전 22:12-15에 보면, 다메섹에 들어가서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는 사울은 앞으로 사도로서 성령이 충만했다.

 

3. 성령 충만은 사도나 선지자 같은 항구직(恒久職)을 맡은 사람을 따로 성별하여 세울 때가 아니더라도, 임시적으로 어떤 일을 수행하도록 일을 맡길 때 주어진 사실들이 있다.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선지가가 아니고 제사장이었지만, 그와 그의 부인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했다고 누가복음 1:5-8에 말한다. 바울도 전도할 때 성령이 충만했고, 베드로도 산헤드린에서 증언할 때 성령이 충만했고, 에베소 5:18에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는데, 성령 충만은 모든 성도가 받는 것이며, 일생동안 지속적으로 받는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이다.

 

엡 5:18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연구하면 성령 충만의 분명한 뜻을 알 수 있다. 몇 가지로 살펴보자.

 

1,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형은 신약 성경에서 모두 현재 명령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성령에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헬라어에서 현재 명령은 항상 동작이 반복되는 것을 말하고, 정과거(定過去 aorist form)는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가령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독을 채워라” (2:7) 하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 주님은 정과거형 동사(定過去動詞形)를 사용하여 말했다. 그러므로 물을 채우는 것이 한 번만 하라는 것이지 자꾸 채우라는 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요한일서 3:9에서도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에서 “죄를 짓는다”는 말은 현재 동사이므로<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임이 분명하다. 정확한 뜻은 원어에서 온다.

 

2.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은 복수형이다. 원문에서 보면, 그 동사는 “plerousthe en pneumati”이다.  그러므로 복수 수동태 현재 명령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 의미는 자명하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하는 말이며,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서 어느 특정한 부류들에게만 하는 말이 아님을 알자.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기독교 지도자 중에는 성령의 충만은 어느 특정한 교파나 교회에 출석하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속이는 자들이 있으니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사이비 지도자들을 조심하라. 말세의 특징은 “속임수”이다. A great deception is in vogue. Beware. (편집자 주: 가장 큰 속임은 성행하는 것 속에 있다. 조심하라.)

 

3. “성령 충만하라”는 말은 수동태이다. 그러니까 성령이 너의 마음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도록 하라는 말이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는 방법은 “우리가 기쁨으로 그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절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다. 엡5:18에서 술 취하는 사람은 술을 마셔서 취한다.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가만히 있으면 성령이 우리 마음에 저절로 부어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술 취하는 사람은 술을 먹어야 취하듯, 우리도 성령을 충만함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구원의 서정에서 중생, 믿음, 회개, 칭의, 양자 등은 모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한 순간에 하시는 사역이지만, 성화는 하나님과 성도가 같이 해 나가는 일이다. 성도는 가만히 앉아서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 에 대해서 공부했는데,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은 엄격히 구별된다. 성령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죄의 용서와 성령의 은사로 그리스도 안에서 외부적 으로 그리고 내부적으로 종합적인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그때 받는 일생에 한번 있는 일이다.

 

한편, 성령의 충만은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은 다음,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또 유기적으로 연합한 다음, 우리의 생활을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성경대로 살려는 욕구가 증대해 가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니,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늘 믿음을 지켜나가며 그리스도인의 훈련을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을 우리 안에 이루려고 노력하는데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선 아들을 보내고, 아들을 죽게 하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하여금 우리 속에 살게 하신 하나님에게 늘 감사하며 살자.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각자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회개와 믿음과 순종, 또한 계속해서 성령으로 심어, 그의 성령으로 우리 인격이 성숙하여 열매를 맺어, 우리가 “원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 생활에 열매가 맺어져야 한다.

 

셋째로, 성령은 항상 각 개인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이면서 각각 은사 (charismata)가 다르다는 것을 알자. 우리는 서로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이지만, 또한 다른 은사들을 부여 받았다. “그 은사들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한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서 우리로 회개하게 하고, 우리 죄를 없이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지으셨고, 우리는 그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은사는 여러 가지이다. 그리고 봉사하는 직임은 여러 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에게나 한 가지 은사와 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자. 이 은사와 직임은 주권으로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되어 진다. 그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즉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한목적뿐이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모든 은사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유용하게 사용하자. 이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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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 교육 선교회
김명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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