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modern Theology

믿음이 행위인가?(Is Faith a Work?) - 로버트 스캇 클락 교수(Dr. R. Scott Clark)

Bavinck Byeon 2017. 1. 29. 16:59

믿음이 행위인가?(Is Faith a Work?)


로버트 스캇 클락 교수

(Dr. R. Scott Clark, WSC 신학교 역사신학)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다.


성경이 "믿으라"(예: 사도행전 16:31)라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믿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만약 믿으라는 명령이 문법적으로 명령형이고 그리고 명령형은 "율법"이고 또 "믿으라"는 명령에 대한 응답이 믿음이라면 믿음은 분명 순종의 한 종류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믿음과 순종은 결국 동일한 것이 아닌가?


우르시누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교회 교리의 첫째되는 원리에서 가장 주되고 중요한 부분들은, 히브리서에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회개와 믿음인데 이것을 각각 율법과 복음의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요리문답은 우선되고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교회의 교리로써, 율법과 복음 두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카테고리를 바르게 잡아야 한다. 우르시누스에 의하면 회개는 "율법" 또는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의 당연한 귀결이며 믿음은 "복음" 또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믿는 너를 위해(대신해) 이루셨다"의 당연한 귀결이다. 우르시누스에 의하면, 율법과 복음이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있고 또 서로 반대되는 부분이 있다:


복음과 율법은 이러한 면에서는 일치한다, 즉 둘 다 하나님께로 부터 나왔고 그리고 하나님의 본성과 뜻과 행하신 일에 대해서 계시된 것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는 명령과 "믿으라"는 명령은 둘 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둘 다 명령형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형이 다 "율법"은 아니라는 점이다. 언약 도덕주의자들(페더럴비전, 바울의 새관점, 노먼 쉐퍼드)과의 논쟁에서 나는 종종 율법은 "하라"라고 말하고 복음은 "이루었다"라고 말한다고 말해왔다. 율법의 요구에 있어서, 우리는 율법을 내 스스로 아니면 다른 사람이 대신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타인에게 전할 때는 어떠한 언어를 써야만 한다. 다른 사람 즉 중보자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는 그 선포는 서술형으로 되어있다. 그 선포된 진리를 믿으라, 수용하라, 자신을 위해 받으라, 믿고 의지하라는 부르심은 명령형이다.


우리가 맨 처음에 언급했던 질문에는 잘못된 전제가 있다. 모든 명령형이 "율법"이라면 "믿으라"라는 명령형은 율법이고 따라서 믿음의 행위는 "순종"이여야 한다. 여기서 틀린 전제는 "만약 명령형이라면 그렇다면 율법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 율법과 복음 둘 다 조건을 가지고 있고 명령형이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같은 명령형도 아니다. 복음의 제시는 조건적이다: "수고하고 짐진 자들다 모두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에게 오라"라는 말은 명령형으로 쓰여졌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로,


율법은 창조시에 사람의 마음에 새겨졌으며 따라서 다른 계시가 주어지지 않더라도 모두에게 자연적으로 알려져있다. "이방인들은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가지고 있다(로마서 2:15)" 복음은 자연적으로 알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직 교회에게 신적으로 계시된다.


둘 사이에는 또 다른 주요한 차이가 있다.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것을 행할 능력을 주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대로 되어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해준다. 왜냐하면 복음은 믿음을 통해서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가 소유함으로, 그리고 이와 같은 방법(믿음으로 전가)으로 그 것(그리스도의 의)이 마치 합당하게 우리의 것인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올바르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그러한 은혜의 약속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율법은 "네가 빚진 것을 갚으라",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마태복음 18:28, 누가복음 10:28) 라고 말하고. 복음은 "오직 믿으라"(마가복음 5:36) 라고 말한다.


우르시누스가 어떻게 율법과 복음을 연결시키는지를 주목하라. 율법과 복음은 모두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하지만 그것들은 서로 다른 것을 가르쳐 준다. 율법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지만 그 어떤 것도 제공해주지 못한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지를 가르쳐 준다. 이것이 바로 "하라"와 "이루어졌다"의 차이이다.


율법과 복음이 비슷하면서 구분되는 또 다른 면이 있다. 율법은 약속을 가지고 있다. 율법은 그것을 완전히 행하는 자에게 생명을 약속한다. 복음도 역시 약속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의 대체자이신(Substitute)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약속한다. 율법은 칭의에 있어서는 죄인들을 죽일 뿐이다. 반면에 복음은 죄인들에게 생명을 준다. 우르시누스가 말한 대로 "그것들은 그 효과에 있어서 다르다"


"그리스도와 그 분이 이루신 사역을 믿으라"라는 명령형은 복음 명령형이다. 우르시누스는 율법은 일반적인 형태의 믿음, "모든 신적 약속, 계명, 저주를 신뢰하고, 또 행하지 않을 경우 형벌의 위협을 믿을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복음 명령형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그 분이 이루신 일을 신뢰하고, 받아들이고, 의지하며, 그리고는 이 믿음에서 부터 나오는 "새로운 순종을 시작할 것"을 촉구한다. 이 복음 명령형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은혜의 약속을 받을 것을 명시적으로 특별히 명령한다."


따라서 "행하라"와 "믿어라"는 둘다 명령이지만 서로 다른 조건과 약속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위치우스"Witsius"가 우리에게 믿음은 오직 부적절한 의미에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적절하게 말한다면 벨직 신앙고백서에서 말하듯 믿음은 칭의의 "도구"이다. 믿음(신앙)이 "믿으라"는 명령형에 대해 응답하는 것은 "순종"이 "행하라"라는 명령에 응답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믿으라"라는 명령형에 대한 응답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사역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 명령형에 대한 응답은 의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고 또 오직 그 분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1장, 하이델베르크 21문,60 벨직 22-24항). 율법을 지키는 것의 대상은 나의 순종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단어를 "성령님께서 주신 거룩"이나 "은혜 또는 은혜와 협력하여"라는 단어로 바꾸어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율법지킴이나 나의 순종이, 비록 그것이 은혜로 (또는 은혜와 협력하여) 성령님이 주신 순종이라 하더라도, 그 조건이 된다면 어쨌든 우리는 복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혁자들이 은혜에 의해, 은혜와 협력하여, 또는 "사랑으로 형성된 믿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로마 카톨릭의 구원론을 이해한 방법이다.


믿음의 대상은 어찌하였든간에 그리스도이시다. 믿음의 능력은 그리스도이시다. 믿음의 덕 역시도 그리스도이다. 믿음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덕(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쉐퍼드나 페더럴비전이나 다른 도덕주의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알미니안이나 항론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음 자체에 어떠한 덕을 부여할 때에 우리는 모든 종교개혁 전체를 거스르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밥 갓프레이(Bob Godfrey)가 CJPM에 쓴 에세이 '오직 믿음 대(vs) 사랑으로 형성된 믿음'에서 말하는 요점이다. 페더럴비전과 다른 여러 사람들은 "사랑으로 형성된 믿음"을 팔고 있다. 반대로 벨직 신앙고백서 24장에서는 명백하게 우리가 사랑으로 형성된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가 아무런 선행을 하기 이전에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칭의를 얻었다" 개혁주의자들의 용어에서 "선행"은 "성령이 주시는 거룩" 또는 "사랑으로 형성된 믿음"을 말한다.


칭의를 위해서(for)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for) 행하신 순종과, 성화에서(in) 그분이 우리 안에서(in) 행하시는 사역의 차이를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칭의를 얻는 문제에 있어서 성화, 성령이 주시는 거룩과 순종을 믿음에 집어넣으려는 방법을 계속해서 찾는 것이다. "언약의 신실함"이라는 교황주의자들의 쳇바퀴에 걸려서 그들은 결코 빠져나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련의 잘못된 전제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자들은 이 ‘은혜’와 ‘은혜와 협력하는 의’의 쳇바퀴, 성령이 주시는 거룩함에 의한 칭의의 쳇바퀴에 빠지는 것을 거부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복음의 설교를 통하여서 일하신다. 믿음은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도구이다. 믿음은 명령에 응답한다. 하지만 믿음은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반-행위이다. 왜냐하면 믿음 자체에는 선함도 의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 자체로는 칭의에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칭의에 있어서 값어치를 가진다.


다른 말로 이것을 표현하면, 칭의에 있어서 믿음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거룩함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도록 계속적으로 요구하는 페더럴비전주의자들에 대한 해답이다. (믿음이) 살아있다는 것은 곧 거룩함을 뜻한다(또는 순종한다-번역자 첨부)라는 당신들의 정의를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만약 나의 칭의가 나의 거룩함에 의존한다면 나는 결단코 칭의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완전하게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페더럴비젼의 해답은 우리의 최선의 노력에 하나님께서 완전함을 전가시켜 주신다는( "하나님께서는 자신들 속에 있는 것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거부하시지 않는다"(facientibus quod in se est Deusnon denegat gratiam) 중세의 congruent merit 교리로 우리를 되돌려 놓는 것이다. 우리는 congruent merit을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대한 모욕으로 보며 완전히 거부한다. 벨직 신앙고백서 22장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충분치 못하며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가장 커다란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예수그리스도는 반쪽짜리 구원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과 함께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또는 "행위 없이"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고 합당하게 말한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공로는 완전하다(condign).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 말고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취된 사역을 의지하고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것이라 정의된 믿음 말고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그 의를 얻을 수 없다.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믿음 sola fide"를 외친 이유이다.


이것에 대한 더 많은 것은 나의 글 "복음이 나쁜 소식이 될 때" 와 책 "언약, 칭의, 목회(CJPM)"에서 읽을 수 있다.


(원문: https://heidelblog.net/2013/06/is-faith-a-work-law-gospel-justification)



출처: http://www.lovereforme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