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modern Theology

노먼 쉐퍼드(Norman Shepherd) 견해 평가 - 코르넬리스 프롱크(Rev. C. Pronk)

Bavinck Byeon 2017. 1. 29. 15:57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 아니면 믿음과 행위에 의한 칭의?

: 노먼 쉐퍼드의 견해 평가 (1부)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or by Faith and Works?

An Examination of the Views of Dr. Norman Shepherd (Part 1)


코르넬리스 프롱크(Rev. C. Pronk)

황준호 역(譯)



○ 저자 소개 : Rev. Cornelis (Neil) Pronk


Cornelis (Neil) Pronk(프롱크) 목사는 FRCNA(Free Reformed Churches of North America/북미자유개혁교회)의 은퇴목사로서, FRCNA의 교단 잡지인 Messenger 의 에디터이며,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방문교수이다.




I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는 바울이 로마와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들에서 명백히 밝히듯 성경의 중심 교리이다. 핵심이 되는 구절은 로마서 3:29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쓰고 있다. 이 자유케 하는 진리는 루터와 16세기의 다른 이들에 의해 재발견되었고 담대하고 그리고 기쁨으로 로마카톨릭의 거짓 가르침에 노출되어 있던 여러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 루터는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에 의해 교회가 서고 넘어진다고 보았으며 칼빈은 이 교리를 모든 성경의 진리가 도는 축이라고 표현했다. 모든 개혁주의자들과 그의 후계자들, 청교도와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사도 바울을 따라서 이 교리에 있어서 한 마음이였으며 이 교리에 흠집을 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장엄한 저주를 선언했었다.


   말하기 슬프게도 교회사에서는 그러한 흠집내기가 많이 있어왔다. 이 중심 교리로 부터의 모든 이탈은 "오직"이란 단어에 대한 반대로 부터 나온다. 이 단어에 문제를 느낀 사람 중 한명이 전직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이며 현제는 기독개혁교회의 은퇴 목사인 노먼 쉐퍼드 박사이다. 그는 1982년 그의 칭의에 대한 가르침이 성경과 개혁주의 고백서(웨스트민스터)에 어긋난다고 판단되어서 신학교로 부터 면직되었다. 하지만 이 면직이 그 논쟁의 끝은 아니였다. 신학교 위원회의 다수가 쉐퍼드의 반대편에 있었지만 소수는 그를 지지했고 지금까지고 그러하다. 신학교 위원회가 쉐퍼드를 그 교수진에서는 제거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다른이들에 의해서 웨스트민스터에서 계속 가르쳐져 왔다. 그렇게 지난 20년간 배출된 수백의 학생들이 목사, 선교사, 교사가 되어서 장로교단과 개혁교단의 교회, 학교, 신학교에서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고전 견해와는 다른 방법으로 칭의를 가르치고 또 설교를 하고 있다.


   논쟁의 발단


   이 '칭의 이슈'는 1975년에 처음으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들의 주목을 받았다. 목회 후보생들을 시험하는 자리에서 몇몇 후보생들이 믿음과 동시에 행위에 의한 칭의를 주장한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믿음과 행위가 둘다 칭의의 도구라고 믿는다고 인정한 쉐퍼드에게로 거슬러 간다. 신학교의 교리 표준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것은 여러 교수들로 부터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믿음만이 오직 칭의의 도구이다"라고 확언하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2)


   교수진들에 의한 이 도전에 대해서 쉐퍼드는 믿음이 칭의에 있어서 독보적인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행위 역시 칭의의 "그 수단"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한다라고 설명했다. 칭의는 믿음을 전재로 한다. 믿음이 칭의의 근거는 아니지만, 믿음은 칭의의 도구이다. 마찬가지로 칭의는 선행을 전재한다. 그리고 선행이 칭의의 근거는 아니지만 믿음과 마찬가지로 칭의의 도구이거나 수단이다.


   쉐퍼드는 어떤 점에서는 그의 표현이 이 신조들 넘어로 나아간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의 가르침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들과 조화된다고 믿었다.


   믿음의 "독보성"에 대한 쉐퍼드의 확신이 어떤이들의 두려움을 진정시켜 주기는 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가 선행이 칭의의 "수단"에 포함된다는 주장때문에 여전히 회의적이였다. 쉐퍼드에 의하면 믿음과 행위는 칭의에 있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칭의가 "오직 믿음에 의하여" 이기는 하지만 역시 믿음과 행위에 의하여 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또 이것이 그의 생각에서 또다른 요소인데-- 칭의시키는 "믿음"은 그 자체로 순종의 행위이며, 이 순종의 행위는 신자가 하나님께 구원에 있어서 빚지고 있는 순종의 넓은 언약적 응답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란 표현은 쉐퍼드에 의하면 칭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고 또한 행위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칭의시키는 "믿음"은 칭의의 수단으로써 역할을하는 선행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쉬운 믿음주의에 대한 쉐퍼드의 두려움


   쉐퍼드를 공평하게 대하기 위해서, 그가 칭의를 이러한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그가 쉬운 믿음주의라고 보는 어떠한 오류에 대한 방어벽을 쌓기 위함이 그 동기였다는 것은 언급되어야 한다. 야고보 사도를 따라서 그는 역사하지 않는 믿음은 의롭다 함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더이상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믿지 않으며 어떤면에서 "믿음의 행위"가 칭의에 기여한다고 믿는다는 고소에 노출시켰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에게 한 호소가 합법적인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야고보서 2:24)라고 사도가 말한 것은 맞다. 이 말은 종종 사도 바울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나 로마카톨릭이 그들이 "행위에 의한 구원"의 가르침에 대한 근거를 위해서 그러하였고, 또 루터의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에 반대하는 여러 사람들도 야고보사도에 매달린다. 하지만 칼빈은 그의 야고보서 주석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소피스트들[로마카톨릭주의자들]을 미혹한 잘못된 추론에 빠지지 않으려면, 의롭다 하다라는 말이 가지는 두가지 의미를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바울은 그 단어를 가지고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의의 자비로운 전가를 의미했고, 야고보는, 우리가 그 앞에 있는 "네 믿음을 보여라"라는 말로써 알 수 있듯이, 사람 앞에서 행위로 그 의로움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했다.(Commentaries on the Catholic Epistles, 314ff)


    개혁자들에 의하면, 야고보는 그들의 죄들이 용서받았다는 하나님의 법정 선언을 받기 위한 방법으로써 "행위"가 "믿음"에 추가되거나 믿음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바울처럼 죄책으로부터 용서받는 길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야고보는 사람이 그의 믿음이 참됨을 "보일 수 있는"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야고보서 2:18). 그리고 어떻게 믿음이 선행으로써 필연적으로 "온전케 되거나" "열매를 맺을"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2:22)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 하지만 믿음은 혼자 남겨지지 않는다. 믿음은 항상 선행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4주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이 교리(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가 사람들을 부주의하거나 또는 악하게 만들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 요리문답은 답하기를 "결코 그럴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이 그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불가는 하기 때문입니다(64문답)" 여기서 명백하게 선행은 칭의를 주는 믿음의 결과로 보여지고 있지 칭의의 근거의 일부분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쉐퍼드는 이러한 해석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선행은 단순히 믿음에 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중요한 부분이며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행위 둘 다에 근거하여 칭의 하신다고 굳게 믿는다. 그가 순종하는 믿음이라는 표현을 써서 말하는 것을 선호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쉐퍼드의 주장의 논리


   그의 논법에 어떠한 논리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가 중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것이 특별히 잘 드러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3장을 주석하면서, 그는 중생이 믿음, 회개보다 앞에 오며 실은 성화를 시작하게 한다고 신앙고백서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고 지목한다. 이로부터 쉐퍼드는 믿음과 회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의하면 "죄로 부터 돌이켜서 그분의 모든 계명을 따라 살도록 결심하고 분투하는 것"을 포함)가 중생의 열매들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믿음과 회개가 다 같이 칭의를 구성한다 라고 결론 짖는다. 회개가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따라서 믿음은 결코 혼자가 아니며 반드시 회개와 함께 한다. 믿음이 그러하듯이, 회개가 용서나 칭의의 근거는 아니다. 하지만 회개는 "그것 없이는 죄사함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모든 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4.2) 신앙고백서는 회개를 단순히 죄용서의 증거로 보지 않고 죄용서의 필수요소로 본다. 따라서 칭의가 죄용서를 포함하고 회개가 죄용서에 필요하므로 회개는 칭의에 필요하다 라고 쉐퍼드는 추론한다.


   그 주장에 치명적인 결함


   그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보일수는 있지만 심각한 오류가 있다. 믿음과 회개가 칭의의 근거를 구성한다고 말하면서 그는 로마카톨릭교회에 아주 위험스럽게도 가깝게 간다. 그가 이 혐의를 아주 강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은 행위를 은혜의 열매로 보지만, 로마카톨릭은 행위를 공로로 보기때문에 로마카톨릭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그는 칭의의 근거로써 주입된 의 용어를 거부하며, 개혁자들과 마찬가지고 전가된 의의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그는 루터가 가르친 바대로 이 전가된 의가 오직 믿음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하면 성경과 개혁신학이 가르쳤다고 주장하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의해 주어진다는 입장을 계속 유지한다. 그에 의하면 개혁주의 관점에서 중생의 변개가 없는 믿음은 없으며 믿음 없이는 칭의가 없다.


   나는 이부분에서 쉐퍼드가 치명적으로 틀린 결론을 이끌어냈다고 믿는다. 개혁주의자들(나는 여기에 루터도 포함한다)이 중생은 모든 구원의 은혜가 샘?는 샘이라고 가르쳤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거듭남의 결과로 오는 변화들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칭의하시는 근거가 되거나 또는 근거의 일부분이 된다고는 가르치지 않았다.(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24주 62문답) 믿음 조차도 칭의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믿음이 행위인것 처럼 우리의 믿음 때문에 칭의하시지 않는다. 도구나 또는 우리가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손으로써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칭의하신다.


   쉐퍼드는 여기에서 구원의 서정을 다루는데 있어서 역사적 순서로 보는 실수를 하였다. 즉 맨 처음으로 중생이 오고 그 다음에 믿음과 회개(성화)가 오고 그 다음에야 칭의가 오는 것으로 말이다. 여기에 있는 기본적인 오류는 거듭남의 이 열매들을 하나님께서 죄인을 칭의하시는 근거의 일부분으로 봄으로써 쉐퍼드는 성령님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본질적으로 바꿔치기 했다. 제임스 뷰캐넌이 그의 칭의에 대한 고전에서 말했듯이:


칭의가 내적으로 거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운 사역에 의존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보다 칭의에 있어서 더 교묘하고 뛰어난 오류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고 받아들여지게 되는 근거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대리적인 사역 대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운 사역으로 바꿔치는 것보다 비성경적이거나, 인간의 영혼에 치명적인 것은 없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그분께서 아직 이땅위에 계실 동안,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고 고난받으신 것에 오직 근거하여서만 칭의를 얻었다면 우리는 전적인 확신으로 이미 "다 이루신" 사역에 의지할 수 있으며, 또한 이미 다 행하신 의, 또 그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이미 받아들여진 의에 의지할 수 있다. 반면에, 만약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사역에 근거하여 칭의를 얻는다면, 우리는 새롭게 되지 않는 죄인인 경우 아직 시작도 안했으며, 신자의 경우에 이미 시작 했다 하더라고 아직은 초기 단계일 뿐이며 종종 남겨진 죄로 인하여 탈선과 뒤로 물러섬에 오염되어 있고, 구름과 짙은 어둠에 의해 의심에 가려지고 둘러싸인 그 아직 완성되지 않고, 또 아직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사역에 의지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된다. (영어판 387-388쪽)


   어떤 이들은 쉐퍼드 박사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의문을 갖는다. 어떤이들은 그를 이단이라 정죄했다. 나는 그렇게 멀리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이름표는 매우 신중하게 붙여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가 잘못된 길 위에 있다고 확실히 믿는다. 쉐퍼드의 제자들은 그 선생의 관점을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패러다임이란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개념이나 이론이다. 따라서 칭의에 대한 쉐퍼드의 견해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눈에 보시기에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근거과 방법을 이해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만일 이것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믿는 것 말고 무엇인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만일 내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행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행해야 하는 어떠한 선행에 의지해야 한다면 나는 두려워 떨것이다. 나는 그의 목사에게 "내가 내 구원을 위해 하나의 탄식이라도 보태야 한다면 나는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될 것이다"라고 말한 핸드릭 드콕의 요리문답반 학생이였던 클라스 카이핑하에 동의한다.


   쉐퍼드 박사의 견해가 새롭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는 신규범주의 또는 신율법주의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고통하는 양심에 대한 그것의 효과는 항상 똑같다: 완전히 파괴적이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체계를 "양심의 도살장" 이라고 루터는 아주 옳게 말한 것이다!


II


언약적 순종에 의한 칭의?

: 노만 쉐퍼드의 견해 평가 (2부)

Justification by Covenantal Obedience?
An Examination of the Views of Dr. Norman Shepherd (Part 2)


<평가 1에 대한 요약 생략>


   언약적 순종


   쉐퍼드가 "행위"나 "선행"이라는 용어를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명백하다. 대신 그는 언약적 순종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에 따르면 이 말의 의미는 신자가 그 구원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이다. 이것은 그의 견해를 로마카톨릭이나 칭의에 있어서 행위를 구성 요소로 보는 다른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만든다. 쉐퍼드와 로마카톨릭과 다른 이들의 견해의 차이는 쉐퍼드는 독특하게도 언약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쉐퍼드는 교회가 언약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이 아닌 로마카톨릭의 법적인 체계 아래에서 이 교리를 접근했기 때문에 과거에 칭의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를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는 칭의가 언약적 모델의 다이나믹의 용어로 이해되기를 성경이 요구한다라고 말한다.이 "생명의 언약은, 특별히 칭의 교리를 다룰 때에도 역시, 법적인 법정의 구조로 축소되어서는 안된다"라고 그는 말한다.


   행위 언약은 없다


   그가 언약을 기술하는 방법을 주목하라. 그것은 생명의 언약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쉐퍼드와 그의 제자들은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 사용을 거부한다. 타락전에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어떠한 합의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는 이러한 합의를 행위가 아닌 은혜의 합의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최근 책, 은혜의 요구에서 그는 찰스 핫지와 같은 언약 신학자이 공의의 엄격한 원리를 따라 그의 피조물을 다루는 공정한 심판자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러한 언약을 맺었다고 가르친 것에 대해 문제를 삼는다. 사람은 시험적인 명령에 순종함으로 영생을 얻고 그 규례에 조금이라도 어긋날 경우 영생을 잃어버리게 된다. 사람이 이 행위언약을 깬다 하더라도 행위/공로의 원리는 여전히 효력을 갖는다. 하나님 앞에 죄 없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영생이 약속되어 있다. 하지만 타락으로 인해서 이것은 명백히 불가능 하다.


   율법의 주된 역할


   쉐퍼드는 모세 언약에 대한 언약주의자들의 견해에도 역시 비판적이다. 그가 모세언약이 본질적으로 행위 언약을 다시 선포한 것이라는 견해를 옳게 거부하기는 하지만, 그는 시내산에서 맺어진 언약을 은혜 언약이라고 보는 사람들과도 동의하지 않으며, 특별히 율법에 탁월함을 부여하며 이 언약이 원래의 행위 언약에 속한 여러 면들을 포함한다고 주장하는 사람과도 동의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언약 신학자들이 받아들이는 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모세 언약안에 있는 율법은 우리의 삶을 그 율법의 완전한 기준과 비교함으로써 우리의 죄와 비참의 깊이를 드러냄으로써 은혜의 목적에 봉사한다. 그러한 결과로, 우리는 우리의 불완전한 순종으로는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율법의 주된 역할은 그분의 백성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어 우리에게 값없는 은혜의 선물로 그것을 주신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쉐퍼드는 이것을 다르게 본다. 그에 의하면 율법의 주된 역할은 언약 회원에게 어떻게 언약적으로 살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갈라디아서 3:17-19 주해에서 그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죄 때문에" 이 모세 율법이 덧붙여졌다고 바울이 말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율법은 이 세상에 있는 죄의 파괴적인 영향력에 대응하기 위하여 계획되었다. 율법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며 또 인간에게 최선의 이익이 되는 행동들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려준다. 이것은 믿지 않음과 불순종의 결과에 대해 경고한다. 또한 그것은 주님께서 은혜롭게 주시는 용서를 어떻게 하면 붙잡을 것인가를 제사제도 안에서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이 합당한가? 율법의 역할에 대해서 더 말할 것이 없는가? 분명 바울은 율법이 인간의 행동을 제한하는 역할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분명 그것은 그 역할 중 일부분이다. 하지만 율법은 또한 죄를 깨닫게하고 또 계명들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죄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저주받은 상태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를 이끄심으로써 율법을 사용하여 우리를 그분께로 모으신다... 율법이 다른 역할, 예를들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들도 하고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바울이 율법이 범법함을 인하여 죄가 주어졌다고 말했을때, 그는 율법이 가저다줄 모든 열매와 유익을 염두해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당하게 그들을 정죄하셨으며 그들이 들은 약속에 머물러 위안을 얻을 때까지는 늘 좌절가운데 끊임없이 고통당할 뿐 아무런 쉼도 없다는 것을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 위하여 약속에 덧붙여진 것이다.(갈라디아서3:19 설교)


복음의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죄인들을 데려가기 위해서 율법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칼빈은 답하기를:


"그 분의 약속으로 그분께서는 우리를 부드럽게 그리고 아버지와 같이 부르신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비참을 알게 하며 그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도록 한다. 하지만 우리는 강요당하기 전까지는 너무도 빨리 우리의 죄들 가운데 잠을 자며 죄에 대해서 생각치도 않는다.(같은 책)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 중 작은 한 부분만이라도 어긴다면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며(갈라디아서 3:10) 우리를 경악하게 해서 하나님의 진노로 부터의 보호를 구하며 피난처이신 그리스도께로 도망하도록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그것의 영원한 운명을 그 진노를 짊어지시고 또 우리를 위해서 율법을 지키신 그분께 던진다. 오직 이 방법만이, 즉 그리스도의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순종에 대한 믿음으로만, 우리는 죄들에 대한 용서를 받고 또 하나님의 눈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된다.


   쉐퍼드는 언약적인 순종 가운데 사는 삶으로 인해 의 또는 칭의가 온다고 말하는것 처럼 보이며 사실상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 언약적 순종의 삶은, 그에 의하면, 믿음을 포함한다 하지만 믿음과 회개의 길에 주님과 함께 걷는 것 역시도 포함한다 (은혜의 요구 20쪽)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순종보다 우리의 순종에 무게가 실려있다. 그렇다. 쉐퍼드는 분명 그리스도의 언약적 의를 통해서만 우리가 언약적 의의 기준을 충족할 수 있다고 말한다(19쪽)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로 보기 보다는 우리가 반드시 따르고 재현해야 할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살아있고 역사하며 순종하는 믿음이 그로 하여금 십자가로 그 모든 길을 걷게 했고 이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19쪽)" 라는 말로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분께서 우리의 율법에 범죄함을 대신해 값을 치르신 것이나 그분께서 우리의 위치에서 율법을 지키신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첫번째 아담이 행하기를 실패한 그 것, 즉 그와 그 후손을 위해 영생을 얻는 것을 행하시려 오신 두번째 또는 마지막 아담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우리가 듣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살아있고 역사하며 순종하는 믿음을 발휘하셔서, 아브라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지거나 전가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언약안에서 살아갈지를 보여주는 언약의 동료 회원인가? 언약의 약속들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적 충성됨과 순종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하는 말(19쪽)에서 쉐퍼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순종의 본성과 범위는 무엇인가? 쉐퍼드는 주장하기로 이것은 구원에 대한 공로와는 관계가 없다. 첫번째 아담 뿐 아니라 두번째 아담 역시 영생을 하나님께 얻어낸 것이 아니다.


   쉐퍼드에게 있어서 반율법주의와 율법주의의 두 쌍둥이 오류에 대한 해답과 또 로마카톨릭과 종교개혁자들 사이의 충돌에 대한 해답은 모두 공로 개념을 통채로 부인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하여 더 많은 은혜를 공로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로마카톨릭이나 또 선행이 은혜를 공로로 얻어낸다는 것은 부인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적극적 순종과 소극적 순종에 의하여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서 구원을 공로로 얻으셨다는 개념에 여전히 매달리고 있는 종교개혁자들 둘다 틀렸다고 쉐퍼드는 믿고 있다. 이 개신교도들의 공로에 대한 집착은 결과적으로 은혜로 인한 구원의 교리가 위협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성화나 선행의 필요를 약화시켰다고 쉐퍼드는 말한다.(62쪽) 행위에 대한 모든 개념(그리스도의 것이든 신자의 것이든)을 다 부인하는 것만이 우리가 언약의 조건적인 특성에 대해서 바른 강조를 할 수 있는 길이다. 그러하면 우리는 믿음, 회개, 순종의 언약적 요구에 의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의 축복들이 주어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복음에 대한 이러한 언약적 이해는 더 나아가 개신교가 갈라디아서 5:6과 야고보서 2:24절과 같은 성경구절을 대할 때마다 겪는 전통적인 "당황"을 해결해주는 혜택 역시 가져다 준다.


   언약의 법적 근거


   만약 쉐퍼드가 옳다면,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아담-그리스도의 병행구조가 더이상 유지될 수 없을 뿐더러 그리스도의 의는 그 법적 근거를 잃게 된다. 하지만 쉐퍼드가 틀렸다. 그의 오류는 그가 칭의를 그가 말하는 법적 틀에서가 아니라 언약적 틀에서 접근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언약 그 자체가 법적인 근거위에 서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에 있다.


   모든 성경적 언약은 법적인 기초를 갖는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모두 신적인 율법을 반영하며 그것과 조화된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반대가 아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종교는 모두다 하나님의 율법에 그 뿌리를 둔다. 복음은 전부 율법과 관련되어 있다. 죄 역시 그러하다. 죄는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며 구원은 (깨어진) 율법을 지키거나 만족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율법의 요구를 만족하는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범법자들을 위해 구원을 얻어내셨다. 갈보리에서 벌어진 일은 법적인 교환이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크게하고 존귀케 하셨다(이사야 42:21) 반면에 아담은 그것을 격멸하고 모독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언약의 중보자로서 진실로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구원을 얻어내혔다. 요한복음 17:4에서 그분은 그분의 아버지께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일은 바로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2절) 그분께서는 두번째 아담으로서 행위 언약의 요구를 짊어지셨다. 그리고 그분의 소극적 순종과 적극적 순종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얻으셨기에 우리가 이제 의롭고 공의로우며 또는 법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로마서 3:26)


   언약의 은혜로운 성격을 강조하며 율법주의의 냄새를 풍기는 모든 것을 부인하려는(행위 언약에 대한 그의 부인) 그 열정이 쉐퍼드로 하여금 율법주의나 행위로 인한 의와 다를 바 없는 언약적 순종을 가르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언약의 조건성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그는 그분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이 모든 조건들을 다 만족하신 바로 그분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레이엄 메이첸의 임종에 대한 일화가 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그의 동료였던 존 머레이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나는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에 너무나 감사를 드린다. 그것 없이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 이 유식한 신학자가 이 말을 통해 뜻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칭의가 단지 죄들의 용서에 뿐아니라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전가에도 있다는 것이다. 나의 언약적 순종은 나의 칭의에 대한 증거로써 필요하기는 하지만 내 칭의와 내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 근거로써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III


오직 믿음으로 인한 칭의, 아니면 믿음과 행위로 인한 칭의?

: 노만 쉐퍼드의 견해 평가 (3부)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or by Faith and Works?
An Examination of the Views of Dr. Norman Shepherd (Part 3)


   언약 : 조건적인가 무조건적인가?


   쉐퍼드는 은혜언약이, 아브라함 단계에서나 모세 언약의 형식에서 제정에 있어서는 무조건적인 언약이라고 주장한다. 두 경우 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과 언약적 관계로 들어오셨다. 하지만 오직 신실하게 그의 언약적 의무들을 다하는 사람들만이 언약의 복들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은혜언약이 어떤 면에서 무조건적이라는 견해는 개혁주의 안에서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어떤 의미에서 무조건적이냐 하는 것이다. 개혁자들은 언약이 하나님 편에서는 무조건적이고 인간의 편에서는 조건적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의를 우리에게 제공하여 주시기를 그 언약안에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무조건적이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영생을 공로로 얻어내신 그분의 아드님 안에서 이러한 언약의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방법으로 이를 행하셨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회개와 믿음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여하셨다. 또한 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주님께서는 "능히 우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우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자(유다서 24)"이시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언약이 조건적인가? 구원얻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명령(마가복음 1:15, 사도행전 17:30)과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의미에서 만이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볼 수 없기"(히브리서 12:!4) 때문에 믿음안에서 인내하는 것과 선행들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성경은 또한 가르친다.


   쉐퍼드에게 있어서 언약의 조건성이란 말은 전통적으로 그 단어를 이해해온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신자가 자신의 힘으로 이 언약의 조건들을 충족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는 구원이 순종에 의존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언약안에 있다, 하지만 만일 그가 요구되는 언약의 순종을 하지 못한다면 그는 결국에 구원을 잃고 멸망할 것이다. "언약의 복들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살아있고 역사하는 믿음에 의해서 받는다... 그것들은 언약의 두 부분이다(22쪽)


   불신앙의 원인


   언약의 의무들을 행하며 살지 않는 언약의 회원들은 멸망할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이 슬픈 사실에 대한 성경적인 해설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로마서 9:6) 이다. 개혁신학은 늘 언약 자녀가운데 두 부류,말하자면 택자와 비택자가 있으며, 언약의 약속들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만 오직 택자만이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시어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이 약속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쨋든 그들이 충분히 책임을 져야할 의도적인 불순종 가운데 거부한다.(돌트신경 I, 5-7)


   하지만 쉐퍼드는 신실하지 못한 언약의 당사자에 대한 문제를 신적 선택의 용어를 사용하여 해결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언약의 객관성에서 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언약안에 있는 모두는 택자로 또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자로 바라보아져야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들의 선택을 언약적 순종의 삶으로 드러내어야 한다. 설교와 복음전파에 대한 옛 접근법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가득차있다고 그는 느끼는데, 그 이유는


목사/전도자는 그의 청중 가운데 누가 택자인지 알수 없고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의 대상자라는 어떠한 확신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81쪽) 우리가 하나님의 작정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선택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틀린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쉐퍼드에 의하면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원초적 유혹에 궁극적으로 굴복하는 것이다" 선택의 감춰진 작정을 캐고들어가는 대신 우리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신실한 순종의 언약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 관점,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 안에 있다는 객관적인 사실,에서만 선택은 은혜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83쪽)


   또다시,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들이 여기에 많이 있다. 우리의 설교와 목회에 있어서 우리 역시 언약과 그 약속들의 중요함을 강조하며, 그것들이 죄인들의 삶속에서 성령의 사역으로 인하여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이것이 쉐퍼드가 언약의 순종이라는 말에서 뜻하는 바와 같은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두렵다. 그가 믿음과 회개 그리고 "하나님과 연합과 교제의 언약 생활"(84쪽)로 들어오기를 초청하는 등 많은 좋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강조점이 신실함과 순종에 놓여있다. 첫 회개 또는 회심과 죄인이 처음으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 보다는 매일의 회개와 믿음의 생황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언약 회중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구원받은 것으로 보아야 하며, "언약의 순종"가운데 사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인상을 받는다.


   언약과 세례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언약과 세례 중생의 관계에 대해서 쉐퍼드가 쓴 글을 보면 매우 명백히 드러난다. 핵심적인 부부은 다음과 같다:


중생의 관점에서 언약을 바라보는 대신, 우리는 중생을 언약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럴 때에 언약의 표와 인인 세례는 중생의 시점을 나타낸다. 세례는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가 일어나며 그가 구원받는 것을 보는 순간이다.(94쪽)


   쉐퍼드에게 있어서 세례는 언약 당사자의 삶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이다. 왜냐하면 이 성례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교제와 결합하는 것을 보이는 방법으로 표하며 인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택자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출발점이 된다. 회중을 바라보는 이 언약적인 방법은, 그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의 구원이 판단되는 기준으로써 중생에 초점을 맞추는 전통적인 방법에 비해 월등히 우수하다. 그 방법은, 그의 주장에 의하면, 반드시 언약 공동체를 두 부류, 중생자와 비중생자(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심)로 나누는 습관을 만들어 내며 그의 접근법은, 그는 그것을 "언약적 복음주의"라고 부른다, 언약과 그 시행의 관점에서 죄인을 다루게 된다.(94-95쪽)


   조건적 선택?


   우리가 위와 같은 서술을 기초로 하여 그가 모든 세례받은 언약 회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라고 본다 라고 말한다고 해도 전혀 쉐퍼드에게 공정치 못한것은 아니다. 어쨋든, 세례에 표되고 인쳐진 객관적인 약속에 근거한 선택은 만약 그 세례받은 사람이 순종하는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에 실패한다면 여전히 잃어버린 바 될 수 있다. "회중 가운데 어떤 사람은 떨어져 나가서 교회를 떠날 수 있다, "그러한 경우 우리는 "더이상 그가 하나님의 택자라고 말하지 않는다"(88쪽)는 것을 쉐퍼드는 인정한다. 따라서 언약의 당사자는 그리스도안에서 택자로 반드시 보아야 하지만 오직 그가 언약의 신실함가운데 인내하는 동안 만이다.


이것이 바로 돌트 회의에서 강하게 거부된 조건적 선택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더욱이, 그가 제시하는 바 대로, 어떤이가 믿지 않고 복음에 순종치 않는 경우(85쪽)에도 개혁주의 설교자가 그의 모든 청중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확신하도록 권위를 부여받았다면, 제한 속죄와 성도의 견인이나 불가항력적 은혜교리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신 양이 그가 믿지 않거나 믿음안에서 인내하기를 실패하였기 때문에 멸망할 수 있는가?(요한복음 10:15,28)? 돌트신조가 "선택은 모든 구원의 덕의 샘이며, 그로부터 믿음과 거룩함과 다른 구원의 선물들, 마지막으로 영생 그 자체가 그 열매와 효과로써 나온다"라고 가르치고(I.9) 있지 않는가?


   약속과 성취


   은혜의 표와같은 주관적인 요소에 구원의 확신을 두는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쉐퍼드는 언약과 세례안에 표되고 인쳐진 언약의 약속들의 객관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접근법에 정당한 면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이 접근법의 세부사항들을 다루는 방법은 많은 의문과 염려를 낳는다. 그는 어떻게 언약의 약속들이 실현되고 성취되는 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믿음과 회개를 언급한다. 하지만 죄,원죄와 자범죄 둘다,에 대해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는 조금만 말하거나 아무런 언급도 없다. 그는 죄인이 어떻게 그가 첫 아담과 관련하여 그가 잃어버린 처음 상태와 위치에 대해서 알게 되고 왜 우리가 두번째 또는 마지막 아담의 의를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쉐퍼드가 은혜 언약의 당사자가 되었다는 것이 그와 행위 언약사이와의 연결을 자동적으로 없에거나 폐기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잊은 것으로 보인다. 2차 종교개혁과 청교도들은 죄인들이 첫번째 아담으로 부터 끊겨져서 믿음으로 두번째 아담에게 접붙여질 것의 필요성을 종종 강조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쉐퍼드의 신학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공로개념을 버리느냐 아니면 누구의 공로이냐?


   앞에서 본 대로, 쉐퍼드는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 사이의 구분을 흐린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인류를 대하시는 것은 모두 은혜와 사랑안에서이지 공로의 행위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 영생은, 그에 관점에 의하면, 아담이 되었든 그리스도가 되었든 결코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공로 개념 그 자체가 그와 소위 "새로운 관점"에 서명한 사람들에게는 저주받을 이단개념이다. 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마이클 호튼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성품이 (단지 "일반적인 신실함"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완전한 성취를 요구하기 때문에, 어쨋든 공로는 필요하다....칼빈과 개혁주의 전체는 모두, 세일치신조도 포함해서, 공로의 원리를 주장했다. 문제는 공로가 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누구의 공로냐? 하는 것이다. (What's Really At Stake, p 15).


   성경과 개혁주의 신조들은 모두 오직 믿음에 의해서 받은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 만족케 하심, 의에 근거해서만 오직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3주) 언약의 순종이 신자에게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불완전한 순종이며 결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의의 전부나 일부분"이 될 수 없다.(24주)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은혜의 보상을 받을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가장 선한 행위조차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데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아무것도 보탤수가 없다. 은혜 언약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 앞에서의 신자의 칭의(와 성화!) 에 있어서 유일한 근거가 된다.(고린도전서 1:30)


   인류 역사에 있어 오직 한 언약


   칭의에 대한 쉐퍼드의 견해의 기본적인 문제는 그가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의 차이를 인식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은혜 언약은 그 집행에 있어서 역사 전체에 걸쳐있는, 따라서 타락 전과 타락 후 모두,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과의 관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관계는 은혜롭게 세워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사이의 연합과 교제의 결속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것은 그 복들을 누리기 위해서는 믿음과 순종이 요구되며 그 책임을 이행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처벌이 주어진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의 길은, 아담에게나 그리스도에게나 또는 신자에게나! 언제나 하나이며 동일하다-언약을 지키는 신실함이다.... 구원은 은혜에 의해 믿음(또는 신실함)을 통해서이다(Venema, Reviews of Shepherd's Call of Grace, p. 15).


   그러므로 결국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있다! 만약 쉐퍼드가 옳다면, 칭의는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다른 무언가에 의해서이다. 그것을 언약적 순종이라 부르든지 또는 언약에 신실함이라 부르든지 아니면 다른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말이다. 루터가 로마카톨릭 신학자들과 칭의교리를 논하는 회의에 멜랑히톤을 보내면서 그는 그에게 장엄하게 경고하기를 "오직 이란 단어를 지키라" 라고 했다. 이 경고는 오늘날에도 전혀 그 긴급함이 감소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직"은 천국의 문이 도는 돌쩌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피와 의 말고는
아무 것 위에도 나의 소망은 서 있지 않네;
그리스도, 그 든든한 반석위에 나는 서있네,
다른 모든 기초는 가라앉는 모래일 뿐.



출처: http://blog.naver.com/truthh/20108430370



노먼 쉐퍼드(Norman Shepherd) 견해 평가 - 코르넬리스 프롱크(Rev. Cornelis Pronk).pdf


노먼 쉐퍼드(Norman Shepherd) 견해 평가 - 코르넬리스 프롱크(Rev. Cornelis Pronk).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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