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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열 목사님의 묵상

Bavinck Byeon 2014. 12. 12. 01:57

시간과 영원에 대한 묵상

 

김경열 목사(GMS 선교사)

 

 

* 2년 전 페북 시작할 때 페북이 뭔지 전혀 모르던 때 올린 최초의 페북 글입니다. 한달 동안 불과 12명만이 '좋아요'를 눌렀던 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이 글을 통해 우주와 인간, 그리고 신의 존재에 대해 묵상해볼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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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란 무엇인가? 물질의 세계는 연속적 작용 속에 존재한다. 그 연속적 작용의 흐름을 계량화 한 것이 시간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물질과 별개의 독자적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창조 순간 처음부터 물질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래서 시간의 시작인 태초에가 설정된다.

 

물질의 연속적 작용은 그것이 계량화된 인간의 관념 속의 시간이라는 형식에 의해 이해된다. 그래서 우주의 물리적 설명, 그리고 인생에 대한 설명은 시간을 토대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으며, 인간의 축적된 과거는 역사가 된다.

 

시간은 우주, 곧 물질의 창조와 더불어 존재하게 되었기에, 시간이란 오로지 유한 속에서만 존재한다. 무한의 존재, 무한의 세계 속에서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주, 곧 물질의 창조는 무한의 존재에 의한 유한화 작업의 산물이다. 무한자는 유한자를 만들 수 있고 스스로 유한자가 될 수 있으나, 유한자가 무한자를 만들거나 스스로 무한자가 될 수는 없다. 곧 무한은 유한을 포함하나 유한은 무한을 포함할 수 없는 것이다.

 

우주는 무한에 의한 유한의 창조였다. 무한이 유한의 존재를 만든 것이다. 그 무한이 유한을 창조하여 그 유한에 개입하였다. 그것이 우주 창조다. 그 유한, 곧 물질의 창조 순간, 물질의 연속적 작용으로서 시간이 내재적으로 수반되었다. 따라서 물질은 정적인 상태로, 곧 연속 작용을 거부하고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곧 유한한 물질계에서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법칙, 곧 유한한 존재인 자연의 법칙이다.

 

시간은 이 유한의 세계 속에서 물질과 더불어 존재하나 무한의 세계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영원이라 부른다. 영원의 세계, 곧 무한의 세계에서는 물질의 작용이 존재하지 않기에, 생로병사도 사계와 밤낮, 만물의 운행과 엔트로피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도 미래도 존재할 수 없고, 무한의 세계는 영원한 현재, 곧 마치 영원한 상태의 지속과도 같다.

 

무한자는 유한의 세계를 창조할 때, 그 유한의 세계가 무한의 세계를 반영하고 투영하도록 했다. 그래서 우주는 무한의 세계로 인식된다. 실제 우주가 무한한지 유한한지 알 수 없으나, 무한자는 우주를 무한자에 포함되는 유한 속에 무한의 세계로 인식되도록 창조했다. 그래서 우리는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우주를 관측할 때, 무한자를 인식하게 된다.

 

또한 무한자는 자신의 본질을 유한의 세계에 투영해 우주를 창조했다. 수 많은 다채로운 은하와 찬란한 성운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무한자의 영광이 투사된 옷자락이요 그림자다. 그리하여 그 신비한 우주를 볼 때, 유한자는 무한자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일반 계시, 혹은 자연 계시라 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19:1)

 

, 아름다운 자연, 찬란한 우주

창조주의 영광이여

 

 

영생이란 무엇인가?

 

김경열 목사(GMS 선교사)

 

 

무한과 유한은 선악과를 사이에 둔 무한자와 유한자의 약간의 차이가 아니다. 유한과 무한과의 차이는 무한이다.

 

+ 1이고

+ 10000000000000000000000 또한 인 것과 같은 이치다.

그 어떤 유한의 자원의 총집합도 무한의 자원과 비교하면 0에 불과하다. 지구가 크다지만, 우리 은하계와 비교하면 해운대 백사장의 모래 한 알 보다 작고, 무한해 보이는 우주 전체에서 그 존재 값은 사실 0.

 

인간은 언제나 목마르다. 거지도 목마르고 백만 장자도 목마르고 중동의 석유 왕도 목마르다. 유한한 자원은 유한하고 언제나 갈증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무한의 자원이 필요하다. “영원히 솟구쳐 나오는 물,”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을 물이다.

 

예수는 자신이 바로 그 영원한 물이라 했다. 그리고 자신의 물을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된다고 했다. 무한의 근원에서 나오는 물이기 때문이다. 그 유한자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무한이 유한 속으로 와야 한다.

 

무한은 자신의 결정으로 유한이 될 수 있으나, 유한은 결코 무한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무한자가 유한자로 하여금 무한자를 직접, 그리고 분명하게 인식하게 끔 자신을 유한자로 스스로 제한한 것이 곧 "아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 분은 하나님 자신이기도 하고 또한 아들이기도 하다.

 

성경은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 한다. 곧 예수는 무한이 유한으로 들어온 분이다. 성자는 성부와 다르나 둘은 한 본질의 하나님이시다. 또 한 분의 하나님, 성령과 더불어 이해 불가한 삼위일체의 신비다.

 

성자를 통한 무한의 유한에의 출현을 신학에서는 특별 계시라 한다. 무한자는 자신이 투영된 우주를 통해 흐릿하게만 알려 지나, 그 무한자가 특별한 방식으로, 곧 아들을 통해 명확히 알려지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별 계시는 "성경"이다. 무한자가 유한자에게 자신의 정보를 특별한 방식인 성경을 통해 직접 알린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라는 종교다.

 

그 성경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애초에 무한자는 유한자로 하여금 유한이 유한에 머무르게 만드는 장치를 마련했다. 그것이 곧 선악과다. 선악과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느 인간의 피와 화학적 성분이 다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수의 피의 기능이 특수한 것처럼, 바로 선악과에 부여된 의미가 중요하다.

 

역설적이게도 선악과는 무한의 자원이 유한에게 보장되게 하는 장치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것은 무한자가 만든 최소한의 한계의 설정을 의미한다. 오직 그 안에서 유한자는 무한의 자원을 향유하는 것이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절대자에의 순종이라고 한다.

 

선악과를 따 먹지 않을 때, 유한은 무한의 자원을 보장 받는다. 이것을 기독교는 자유”"기쁨”"평화,” 그리고 만족이라 말한다.

 

따라서 무한자는 선악과의 경계를 통해 유한이 무한이 되려 하는 무모함을 제어하고 무한의 최소한의 통제 속에서 유한으로 하여금 진정한 유한이 되게 하려 했다. 그런데 그 통제를 벗어나려는 시도, 곧 유한의 어긋남이 "".

 

유한자는 이미 어긋나 있던 존재(사탄)의 부추김에 이끌려 선악과, 곧 무한과 유한의 최소한의 경계를 제거함으로써 스스로 무한의 존재가 되려 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경계가 없는 무한의 자원을 누리려 했다.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하나를 포기함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으나, 그 하나마저 취해 모든 것을 얻으려 함으로써 모든 것을 잃었다. , 그 결과는 유한 속에 부여된 자유의 상실과 삶의 파멸이었다.

 

이 파멸과 붕괴, 유한의 어긋남을 바로 잡기 위해 무한이 자신을 유한 속에 가두어 유한의 세계로 들어오셨다. 이것을 기독교는은혜라 한다. 그런데 그 어긋남을 바로 잡는 방법은 그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는 방식인 자신의 "죽음이었다.

 

유한으로의 진입 (육신이 되심)도 은혜인데, 자신을 죽음으로 내어 준 것으로 인해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가 된다.

 

그 분이 아들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스스로 유한이 되신 하나님은 특별 계시로 자신을 알리기 위해, 또한 자신의 죽음으로 유한자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찾아 오셨다.

 

그리고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로 하여금 무한의 자원을 다시 누려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도록 했다. 이것을 영생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무한자와 또한 그분이 공급하는 무한의 자원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런 유한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말한다. 또한 이것을 "구원이라고도 말한다. 이미 이것을 얻었으니 육신의 죽음으로 이 연결 고리가 끊기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말하는 천국의 소망이 이것이다.

 

특별 계시인 예수와 성경을 통해 우리는 무한자의 사랑과 우주적 계획, 유한자의 한계와 개인적-구조적 죄의 현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구원의 길을 발견한다.

 

그 예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했다. 자신을 통해 유한의 존재가 무한의 존재가 되고, 무한의 세계 속에서 무한의 자원을 누리며 있게 될 것을 약속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바로 그것이 영생이다. 바로 시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무한 속에서 현재만이 있게 되는 그런 상태에서의 삶이다. 유한자가 무한자에게 접속된 상태, 곧 무한자의 은총으로 무한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영생이 예수, 그분을 통해 지금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으며 항상기쁨, 감사, 평화 속에 이미 영생의 현재를 사는 것이다.

 

나의 영원하신 반석,

창조주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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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저의 2년전 페북을 시작할 때 두번째로 올린 글이었는데, 역시 15명만이 '좋아요'를 눌러 주셨지요. 아래 첫번째 글을 읽어보시고 이 두번째 글을 읽으시면 명확히 이해가 잘 됩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의 구원과 영생의 의미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김경열 목사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