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Apologetics

기독교 실재론 -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Bavinck Byeon 2015. 1. 3. 12:34

기독교 실재론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지금까지는 일종의 서론으로서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에 대해 제시하였다. 이제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우리의 믿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신학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교육 정도에 따라 세속 철학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우주 따위의 범주들을 비기독교적인 철학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들을 대화를 통해 구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그들이 쓰는 언어를 배워야만 한다.

 

이러한 일이 번거로운 일이라고 해서 그만두거나 회피할 수는 없다.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들과 더불어 대화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단절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흔히 하나님과 실재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재를 놓고 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실재들을 모두 같은 것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는 어떤 명백한 구분이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어 주장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자족(self-sufficient)하신 하나님의 실재와 그러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창조와 섭리로 말미암아 비로소 존재케 되는 "우주의 실재"는 마땅히 구분되어야만 한다. 존재를 이와 같이 구분하는 일은 우리가 지식이나 행동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는데 매우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실재(reality) 또는 존재(being)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지식과 윤리에 대한 견해를 포함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지식과 윤리에 관한 우리의 견해는 존재에 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견해를 기초로 하여 그 위에 세워진 것이며, 결국 지식과 윤리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존재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포함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지식과 윤리 그리고 존재에 대한 완전한 체계를 제시할 수 없다.

 

단지 우리는 신학체계의 몇 가지 중요한 개념들을 취하여 그것을 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하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철학자들의 용어를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철학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철학적 언어들이 다소간에 비기독교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철학자들의 용어를 사용하게 한다면 이것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적으로 사물을 이해하는 체계 속에 비그리스도인들이 형성해 놓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끌어들이는 결과가 되지나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철학자들의 용어의 상당한 분량을 사용해야 하며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과 어떤 접촉점도 공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빌려서 사용하는 이 용어들 속에 기독교적인 내용을 집어넣는 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철학자들은 인간의 모든 경험을 설명하기 위한 통일된 조망을 추구해 왔다. 철학자들은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한도 내의 가장 전체적인 실재의 본성을 포괄적으로 그려주는 그림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우주는 너무 많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에게 부과된 과제는 사물의 복수성 속에서 단일성을 찾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하나와 여럿의 문제(the one and many problem)라고 부른다. "철학적인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이의(異意)를 갖지 않는다. 우리 역시 우리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전체적 그림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철학의 본성(the nature of philosophy)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독교적인 전체적 그림(the totality picture of Christianity)을 먼저 알아내어 그것을 비기독교적 사상의 전체적 그림(the totality picture of non-Christianity)과 더불어 비교하는 일일 것이다."

 

1. 영원한 단일성과 복수성

 

기독교적 철학과 비기독교적 철학의 차이는 기독교적인 입장에 서서 하나와 여럿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그 첫 시도에서부터 나타나는 매우 근본적인 차이다. 우리는 하나와 여럿에 관한 문제에 답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 영원한 하나와 여럿을 일시적인 하나와 여럿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 매우 필수적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비기독교적 철학자들은 이와 같은 구별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것을 구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관이 우리 사고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를 철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한 하나와 여럿은 하나의 자족적인 단일체를 이루고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인격체이시며, 따라서 절대적인 단일적 개별자이시다. 그는 필연적으로 존재하신다. 그는 본질상 스스로 정의를 내리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심지어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심에 어떤 비존재와 자신의 존재를 비교하심으로써 정의하시지 않는다. 어느 무엇, 심지어 비존재도 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와 여럿이라는 문제에 관한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 안에서 하나와 여럿은 둘 다 궁극적이라는 사실을 주장한다. 하나님 안의 단일성은 다양성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것이 아니며 다양성 역시 단일성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이지 않다. 삼위일체 내에서 삼위는 상호 포괄적이다.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와 더불어 존재론적(ontologically)으로 동등하다. 교회사에 나타나는 모든 이단들이 다양한 형태의 종속설(subordinationism)을 가르쳐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변증학적 방법론에서 기인된 모든 "이단들"이 각종의 종속설에 뿌리를 두고 돋아났던 것을 알고 있다.

 

이 시점에서 구체적 보편성(concrete universal, 구체적 보편자)에 관한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유익할 것으로 보인다. 철학자들은 하나와 여럿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명백하고도 엄청난 난관에 봉착하곤 했었다. 여럿(many)은 반드시 그들 상호 간에 어떤 연관이 지워져야만 한다. 그렇지만 여럿이 서로 연관 지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 여럿이 단지 상호 간에 연관성 없는 개별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제까지는 이러한 경우, 여럿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정설로 간주되었다. 여럿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체계로부터 추상화, 즉 추상적 특수성(abstract particulars, 추상적 개별자들)이 되고 말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개별자를 파괴하지 않는 단일성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대개 개별자들을 보다 큰 단일성들 속에 포함시키기 위하여 개별자들을 추상화시킴으로써 일반화하여 어떤 단일성에 이르곤 한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개별자의 개체성을 전부 배제시킬 수 있다고 치고 이러한 개체성을 모두 배제하기까지 일반화 과정을 계속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모든 개별자들로부터 그들이 가진 개체성을 모두 빼앗아 버리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추상적 보편자 외에 무엇이겠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고 확언한다. 우리는 잠시 후에 이 문제를 논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 문제를 도입한 이유는 구체적 보편자라는 개념이 가진 의미를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구체적 보편자라는 개념은 본래 관념론 철학자들이 추상적 개별자와 추상적 보편자라는 논리적 불합리성에 빠지게 되는 것(reductio ad absurdum, 귀류법)을 피할 목적으로 인출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구체적 보편자를 소유하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서만 접근할 수 있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교리를 통해서 뿐이다. 하나님의 존재 속에 보편자와 관련 없는 개별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개별자 속에 완전하게 나타나지 않는 보편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2. 일시적 단일성과 복수성

 

우리가 영원한 하나와 여럿을 위에서 설명한 방식대로 주장한다면, 일시적인 하나와 여럿, 또한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은 어떤 비존재를 설정하여 놓으시고 그것과 자신을 비교하시어 자신에 관한 정의를 내리실 그러한 비존재(non-being)를 필요로 하지 않으심을 언급한 바 있다. 기독교는 비존재를 매우 심각하게 다룬다. 비존재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우리는 하나님과 비존재 사이의 관계와 인간과 비존재 사이의 관계를 맨 먼저 구분한다. 하나님께 있어서 비존재란 실로 그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의 비존재는 하나님이 개연적으로 활동하실 수 있는 활동의 바탕이 된다. 비존재가 하나님께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므로 만일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창조하고자 하셨다면 그는 그것을 "전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out of nothing) 창조하셔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우주를 아무것도 없는 속으로(into) 창조하여 채우셨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적으로 볼 때, 창조는 반드시 명령19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우리가 창조의 교리를 이와 같이 중요하게 다루게 되면 그에 이어서 자연히 피조 된 실재가 갖는 여러 양상들은 창조주께서 그들 상호 간에 정하여 주신 바 우위와 하위 그리고 동등의 관계를 그대로 계속 유지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따르게 된다. 모든 양상들은 그들이 피조 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동등하므로 실재의 어떤 양상이 다른 양상에 비해 보다 본원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 이와 같이 피조 된 하나와 여럿은 이러한 점에 있어서 상호 간에 동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은 모두 그들 모두를 보살펴 유지시키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점에 있어 동등하며, 그들 모두가 그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도 역시 동등하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개별자들과 여러 사실들은 보편자 또는 법칙들에 의하여 운행하고 움직이기 마련이다. 이와 같이 피조 된 이 우주에는 질서가 있다. 그러나 반면에 법칙들은 개별자들을 추상적 개별자로 축소시키거나 다른 어떤 방식으로건 그들의 개별성을 축소시키지 않으며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법칙들이란 단지 개별자들을 움직이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일반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언제 어느 때라도 그들 가운데 한 가지 사실을 취하여 피조세계의 법칙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실 수 있으시다. 즉 사실들이나 법칙들 그 자체에 어떤 사실이 이렇게는 될 수 없다는 식의 본래적 이유까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적들을 믿을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관념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확실히 믿는다고 고백한 하나님 사상"에 포함된 일시적인 하나와 여럿, 즉 사실들과 법칙들 사이에 있는 관계들을 이와 같이 이해하는 개념이 기적을 믿을 여지를 마련함에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적은 기독교적 입장이 주장하는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이와 같이 피조 된 하나와 여럿 또는 피조 된 실재의 여러 양상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동등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와 반면에 그들 사이에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에 의한 종속적 관계도 역시 존재한다. "기계적 법칙들"(mechanical laws)"목적론적 법칙들"(thleological laws)보다 하위에 놓여진다. 물론 "기계적 법칙들""목적론적 법칙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의미로 볼 때에는 둘 다 "목적론적 법칙"에 해당한다. 그리고 우주의 물리적 양상의 여러 사실들 역시 사람의 의지와 지성들에 관한 사실들보다 하위 처한다. 성경이 말하는바 인간이 자연을 다스린다는 것은 바로 어떤 사실이나 법칙이 다른 사실들과 법칙들에 종속한다는 것을 말함이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위에 왕으로서 세움을 입었다. 인간은 그것을 정복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자연을 정복할 뿐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수하에 있는 왕일뿐만 아니라 제사장이기도 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수하에서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해석해야만 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 아래의 왕과 제사장인 동시에 선지자이기도 했다.

 

어떤 사실과 법칙이 보다 고등한 피조계의 사실과 법칙들에 종속되는 관계는 특히 이적의 관념 속에 아주 잘 나타난다. 모세가 바다를 명하여 갈라지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마른 하상을 건너게 하였을 대 물리적 세계의 법칙들은 인간의 의지가 내린 명령에 굴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연법칙들이 인간의 의지에 종속된 것은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께 종속시키고자 함이었다.

 

최근의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면 우리는 이제껏 우리가 이야기해 온바 피조세계의 어떤 양상이 다른 양상들에 종속되는 관계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위의 논의세계들(the lower universes of discourse)은 상위의 논의세계를 예상하고(anticipate) 상위 논의세계들(the higher universes of discourse)은 하위의 논의세계를 회고한다(look back to). 기계론적 논의세계는 유기론적 논의세계에 종속하며 그것을 예상하는 한편, 유기론적 논의세계는 기계론적 논의세계를 회고한다. 다음으로 유기론적 논의세계는 지적 논의세계와 윤리적 논의세계를 예상하며, 지적, 윤리적 논의세계들은 유기적 논의세계를 회고한다.

 

3. 죄와 죄에 따른 저주

 

위에서 제시해온 유신론은 그 자체에서 그쳐서는 안 되며 반드시 기독론이 첨가되어야만 한다.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가 피조물 전체에 임하였다. 인간은 사단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동시에 죄와 싸워 그것을 치유하는 힘을 이 세계에 집어넣으셨다. 이 치유적 사역은 그리스도 안에서 중심을 이룬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었다. 실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평화를 가져오기 위함이었는데 그가 가져오신 이 평화는 어두움의 세력을 완전히 파괴한 후 그 위에 세워져야만 하는 성질의 것이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10:34). 평강의 왕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메시지를 선포하시기 위하여 자신이 몸소 오시기 이전에는 선지자들을 그리고 자신이 오신 이후에는 사도들을 파송하셨다. 시편 기자(記者)는 이 메시지에 가장 깊이 사로잡혀 이 평화를 지극한 열심으로 사모하는 가운데 이렇게 외쳤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오며 주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한하지 아니하나이까? 내가 그들을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나이다"(139:21-22).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한번은 사단과의 싸움터에 단독으로 뛰어드시어 승리를 거두셨다. 이 그리스도가 사도 요한의 눈에는 백마를 타고 정복하시는 분으로서 보였다.28 그의 군대들의 기력이 쇠하고 싸움에 지쳤음을 보셨을 때, 그는 나팔을 불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도록 명령하신다.29 그들은 전투적 교회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오직 끝까지 싸우는 자만이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진정 평화가 있을 것이다. "세상이 새롭게" 된 가운게 예수님은 이십사 장로들과 네 생물들에게 둘러싸여 보좌에 않으실 것이다. 전 피조물이 거기에 있어 그들 모두가 구속을 받는다. 어떤 반대의 소리도 거기엔 들리지 않는다. 모두가 구속된 세계의 위대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구속을 통하여 창조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원수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전히 격리되어 밀폐된 방 속에 갇혀 있다. 사단은 싸움에 패하였다. 하나님은 진정 참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바로 위에서 말한 이러한 것들이 존재에 대한 개략적인 기독교적 개념 또는 형이상학에 관한 기독교적인 개념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것을 실재에 관한 이층 이론(two-layer theory)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실재나 존재는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우리는 만일 그 요구가 둘로 나누어 생각될 수 없다면 거기에 대한 아무런 대답도 제시할 수 없노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는 궁극적이며 영원하지만 피조물적인 존재들은 그 성격상 파생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한 것은 하나의 원리로서가 아니라 인격(人格)으로서 존재하며, 그 인격은 영원한 인격이라고 대답하게 될 것이다. 결구 우리는 영원이란 말을 일시적인 것과 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일시적인 우주의 인격적 창조주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만일 우리가 생성(becoming)과 존재(being) 중에 어느 것이 먼저냐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우리는 먼저 생성이란 용어는 하나님께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생성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는 영원한 존재이시다. 그리고 피조물이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생성 과정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세계의 생성 "이전"이다. 영원한 하나와 여럿은 피조 된 하나와 여럿에 "선행"한다. "이전"이란 말과 "선행"이란 말을 따옴표 속에 집어넣은 것은 이유가 있어서이다. 즉 만일 실재에 관한 우리의 논리가 옳다는 것이 선선히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주에 선행하시다고 단순히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피조 된 우주 시간적인 순서로 볼 때의 "앞선다"는 의미로서 선행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시간에 구속됨이 없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달력 속에 국한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시간 자체를 하나의 피조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피조 된 세계를 "선행"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단지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논리적인 선후 관계에 있어서의 선행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로 하나님이 피조물의 세계를 논리적으로 "선행"하시는 이유는 그가 이 우주를 그것에 속한 모든 일시적인 피조물들과 더불어 무(nothing)로부터 (또는 안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간적 피조 개념을 생각지 않는다면 논리적인 의존의 개념은 주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우리가 생각하는 실재의 본질에 대한 개념은 철학의 역사가 제공하는 실재에 관한 다른 모든 이론들에 반대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 문제는 본서의 뒷부분에서 더 분명해질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성경에 기초를 둔 조직신학 속에서 발견되는 실재의 개념을 취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기초로 하여 다음 장의 주제인 인식론의 문제로 나아가고자 한다.



[변증학, P&R, pp.7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