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학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필자의 관점에 대해 앞서 언급한 비평가들의 비판에 대한 상세한 답변은 필자의 사상의 전체적 구조라는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 또한 다아너는 필자의『일반은총』(Common Grace)에 제시된 내용을 토대로 이 전체적 구조에 대해 다룬다. 그의 비판에 대해 필자가 생각하는 필자의 사상적 구조가 무엇이었으며 무엇을 의도했는지를 진술하는 것 외에는 달리 답변할 방법이 없다.
필자의 사상의 기본적인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필자는 지금까지 체계적 신학(어떤 형태이든)의 정립에 대한 요구를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변증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따라서 나는 개혁주의 교리체계를 전제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교리적 체계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강의를 처음 듣는 학생들은 대부분 조직신학에 대해 많이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체계적인 신학에 대해 간략히 제시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필자의 동료인 존 머레이 교수(Professor John Murray)의 조직신학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나를 찾아와 변증학적 문제에 대해 새롭게 살펴보는 것이다.
다음에 제시한 필자의 변증학 강의안은 본장에서 다루어야 할 주제를 잘 보여준다. 즉 우리는 무엇을 믿고 변증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 유신론을 변증해야 한다.
기독교를 오로지 사실에 대한 논쟁을 통하여 하나의 역사적인 종교로서 변증하려는 노력은 불가능한 것이고 또한 가능하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셨다고 전파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 부활의 사건이 그의 신성(神聖)의 증거라고 전파한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를 변증해 온 역사적인 논증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이와 같은 논리의 전개를 납득치 못하고 거부할 것이다. 설사 그 철학자들이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이것은 예수라는 인간에게 일어난 지극히 특이한 사건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실용주의 철하게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서로 연관이나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사건은 설사 그것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그 예수님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2000년이나 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을 참작할 때에, 만일 우리가 기독교를 역사적인 종교로서 진정하게 변증하고자 한다면 기독교의 기초인 유신론(有神論)에 대한 변증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며, 이 작업에는 철학적인 논쟁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철학적인 논쟁을 벌인다는 것이 성경 없이 시작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먼저 이성과 경험에 호소함으로 철학적으로 유신론을 변증한 후에 기독교에 대한 지식과 변증을 위해 성경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 자체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장하는 유신론도 성경으로부터 얻는다.
성경은 그것이 언급하는 모든 것에 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모든 것에 대해 언급한다. 성경이 축구경기나 원자() 등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성경이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는 말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그가 하신 사역에 대하여 말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이 우주의 유래는 어떠한지 등에 대해서도 말해 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역사 자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역사를 이해할 역사철학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주제들에 대한 정보들은 개개의 사실로서 쪼개질 수 없는 하나의 전체 속에 얽혀 있다. 성경의 내용 가운데 소위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교훈을 성경이 다른 주제, 예를 들어 물질적인 우주에 대해 가르치는 말씀과 분리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진리의 체계 바로 그것을 세상에 전파해야만 한다. 신학의 여러 부분들은 이 진리체계를 전파하는 작업에 기여하고 있다. 교의신학(domatic theology) 또는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의 과업은 바로 이 진리체계를 여러 제목으로 나누어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를 들자면, 루이스 벌코프 교수(Professor Louis Berkhof)가 쓴 여러 가지 입문서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조직신학의 제목들을 갖게 된다. 그 제목들에는 (1)신론(神論), (2)인간론(人間論), (3)기독론(基督論), (4)교회론(敎會論), (5)구원론(救援論), (6)종말론(終末論) 따위가 있다.
개혁주의적 입장은 이 교리들 하나하나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밝혀 준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이나 알미니안주의 그리고 여타의 입장들은 성경적인 입장을 완전히 보여주지 못한다. 이제 우리가 개혁주의적 신앙을 변증하는 문제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개혁주의적 신앙이 무엇인지를 개괄적으로 만이라도 알아야 할 것이다.
1. 신론
조직신학이나 변증학에서 신론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바로 묻기에 앞서 먼저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물어야만 한다. 즉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질문이 존재 여부를 묻는 질문에 선행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내포(connotation)가 외연(denotation)을 선행한다. 이 말은 적어도 한번쯤 전자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후자에 관한 납득할 만한 논의를 펼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란 단어를 무슨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조직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속성 또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논의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을 비공유적 속성(incommmunicable attribute)과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으로 나눈다. 비공유적 속성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속한다.
첫째, 하나님의 독립성(independence) 또는 자존성(aseity)이다. 이 속성의 의미는 하나님이 그 자신의 존재 밖에 어느 것에도 의존하시거나 그것들과 대등한 관계로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시다. 오히려 근원이라는 말조차 하나님께서는 적용될 수 없다. 하나님은 절대적이신 분이다. 그는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하시다.
둘째, 하나님의 불변성(immutability)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영원하신 존재 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고 계시지 않으므로 변함이 없으시며 또 변하실 수 없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막 3:6; 약 1:7).
셋째, 하나님의 무한성(infinity)이다. 우리는 이 무한성을 시간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하나님의 영원성(eternity)이라 부르고, 공간에 관련해서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의 편재성(omnipresence)이라고 부른다. 영원성이라 함은 하나님의 존재나 의식(consciousness)에 있어서 시작이라든가 끝 또는 시간적인 흐름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시 90:2; 벧후 3:8). 영원성에 관한 이와 같은 개념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현세계의 의미를 설정하는 문제 전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즉 영원성에 대한 이 개념은 어떤 일정한 역사철학을 포함하고 있다) 변증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편재성이란 하나님이 공간에 내재하고 계신다든지 아니면 공간속에는 전혀 계시지 않는다든지 하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전체 공간 위에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간 어느 부분에건 빠짐없이 임재하여 계신다(왕상 8:27; 행 17:27).
넷째, 하나님의 단일성(unity)이다. 단수성의 단일성과 단순성의 단일성은 구별되어야 한다. 단수성의 단일성은 수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단 하나임을 의미하고, 단순성의 단일성이란 하나님이 어떤 의미에 있어서라도 하나님 이전에 존재하던 어떤 부분들이나 요소가 모여서 이루어지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렘 10:10; 요 1:5).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들을 한 본체가 가진 여러 양상으로 생각하는 것 이외에 달리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전체는 부분들과 완전히 동일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속성들은 하나님이 점진적으로 발전시켜온 특징들(characteristics)이 아니다. 이러한 속성들은 하나님의 존재(being)의 근본적인 요소들이며 이 부분적 속성들이 모여서 전체를 형성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단일성과 다양성(the unity and diversity) 둘 다 근본적이며 상호 의존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교리가 변증학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모든 철학적 문제는 단일성과 다양성의 관계로 귀착된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소위 하나(one)와 여럿(many)의 문제는 하나님의 단순성의 교리로부터 분명한 해답을 얻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나누어 가질 수 없다.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건 자기 자신의 존재의 근원일 수 없으며 또 인간이 어떤 의미에서건 간에 불변하거나 영원하거나 편재하거나 단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은 하나님의 초월성(transcendence)을 강조한다.
공유적 속성에는 영성(Spifituality),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불가시성(Invisibility), 전지성(Omniscinece)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하나님은 영원한 지식적 행위 안에서 자신에 대해 완전히 아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에 관한 모든 것을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기 지식은 "분석적"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간이 걸리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분석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분석적이라는 말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의 지식에 덧붙이기 위해 자신 너머를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조세계의 사실들, 즉 하나님 외의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한 지식은 어떤가? 인간으로서 우리는 사실들을 본 후에 또는 그러한 사실들이 그곳에 존재한 후 (아마도)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작동한 후에,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알거나 해석한다. 즉 하나님은 사실들이 있기 전에 사실들에 대해 아시거나 해석하신다. 사실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또는 그의 포괄적인 해석이 사실들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그리고 공유적 속성들은 그의 내재성(immanence)을 각기 분명하게 나타낸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 즉 초월성에 대한 기독교적 인식과 내재성에 대한 기독교적 인식은 보조를 같이한다.
범신론적인 체계들은 하나님의 내재성만을 믿으며, 자연신론적 체계들은 하나님의 초월성만을 믿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모두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기독교적 유신론에 대한 충분한 서술이 되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초월성은 자연신론에서 말하는 그런 초월성이 아니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내재성 역시 범신론자들이 믿는 그런 내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신론의 경우 초월성이 의미하는 바는 사실상 분리이며, 범신론이 말하는 내재성이란 사실상 일체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러한 범신론적 일체화의 개념에 자연신론적인 분리의 개념을 더한다 할지라도 그 결과로써 유신론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신론자로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어떤 특별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용어들을 사용할 때도 우리는 어떤 특별한 종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뜻하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기독교의 교리는 피조물인 이 세계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라는 명백히 한정된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는 피조물인 이 세계 속에 있는 만물에 대한 어떤 일정한 한정된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인격성
이제까지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하여 논의하여 온 내용들을 "하나님은 절대적인 인격체(absolute personality)이시다"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속성들은 하나님의 자의식적(self-conscious)이며 도덕적인 활동들을 가리키는 말들이다. 하나님이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활동을 하심에 있어서 그 자신의 존재외에 다른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심을 인식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성(personality)에 관한 참다운 개혁주의적 교리를 갖게 된다.
하나님을 초월하는 - 또는 하나님 다음의 - 어떤 진리, 진, 선, 미 따위의 원리들이 이미 존재하여 하나님이 그것들을 모본으로 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진, 선, 미 따위의 원리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존재와 같은 것을 생각됨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의 속성들이기 때문이다.
비기독교적인 철학체계들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적어도 일부는 그렇다. 그럼에 불구하고 사실상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격성에 대해서는 그들 모두가 부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자신이 인격체라는 점에서는 하나님과 같을 수 있으며 또 하나님과 같아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은 절대적인(absolute) 인격이신 반면에 우리는 제한된(finite) 인격을 가진 자들이란 점에서 결코 하나님과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훨씬 월등한 인격이시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격성과 우리의 제한적인 인격성 사이의 구별이 질적인 차이의 것임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우긴다.
2) 삼위일체
기독교 신론 중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항목은 삼위일체 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의 인격체(tri-personality)로서 존재하신다고 주장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이다." 삼위일체의 삼위(three persons)는 본질상 동일하며, 그중의 어느 한 위의 본질이 다른 한 위 또는 다른 두 위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일성 속에 각기 다른 삼위가 각각 존재하는 것이다. 즉 다양성과 동질성은 둘 다 파생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기독교 신론의 골자만을 적은 간략한 개요를 보고 있는 중이다. 기독교는 이제껏 상술한 바의 모든 속성들을 지니신, 절대적인 인격체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 하나님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이와 같은 개념은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며 주장하는 다른 모든 것들의 기초가 된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면, 우리가 어떤 다른 종류의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든가 또는 다른 어떤 무엇을 믿을 수 있다든가 하는 따위는 하나도 유익을 줄 수 없는 것들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그 의미를 이러한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삼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며 다른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
2. 인간론
우리가 변증학에서 다루는 모든 문제란 결국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신론 다음으로 인간론이 매우 중요하다.
1)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을 수 있는 한도 내의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다. 인간이 인격체라는 면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과 같다. 우리가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말할 때에는 바로 인간이 인격체라는 점을 지적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참된 지식(knowledge)과 참된 의(righteousness)와 참된 거룩(holiness)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성품의 탁월성이 하나님을 닮았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교리는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을 회복시켜 주시고자 오셨다는 사실(골 3:10; 엡 4:24)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이 두 가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완벽하게 나누어질 수 없다. 인간이 오로지 넓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만으로 창조되었다고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시초에 있어서부터 하나의 도덕적인 행위이며 인간은 모든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을 위하는 선택을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심지어 모든 지식적 행위에 있어서 조차 그의 참된 의와 거룩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과 비슷하였다는 것과 이 경우의 성격을 비추어 보아 인간이 하나님과 비슷하였던 것이 틀림없음을 강조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언제나 분명하게 하나님과 구별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역시 강조해야만 하겠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입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속성들 가운데 어떤 것들이 비공유적인지를 보았다.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건 그의 피조물적인 지위에서 그 위로 나아갈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과 비슷하다(like)는 표현 속에 분명하게 함축되어 있다. 인간이 하나님과 비슷한 것은 사실이나 엄격히 말하자면 이는 언제나 피조물적인 범위 내에서 그러하다. 인간은 신적인 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단일성을 가지신 하나님과는 결코 동일할 수 없다. 교회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불가해성(Incomprehensibility of God)의 교리를 신앙고백서의 핵심 속에 빠짐없이 넣어 왔던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지식은 절대적으로 전포괄적(全包括的)인 것이다.
이런 지식은 인간들에게 있어서 너무도 불가사의한 것이다. 인간은 그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은 그가 지음을 받을 때에 전포괄적인 지식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유한하며 그 유한성이 본래부터 그에게 제약이나 부담이 되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인간이 미래의 어떤 시기에 이른다 해서 완전한 지식에 이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심지어 천국에서라도 완전한 지식을 갖게 될 것으로 기대하기란 어렵다. 지금 우리에게 신비로운 많은 일들이 그때에는 밝히 보여질 것임이 확실하지만, 문제의 성격상 하나님이 피조물인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까지 우리에게 보여주지는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존재 깊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계신 그대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들에게 신비로 남아 계시기 마련이다.
우리가 이러한 기독교적 신비의 개념을 지금은 심지어 기독교 진영 내부에서조차 볼 수 있게 된 비기독교적인 신비의 개념과 비교해 볼 때, 이 점이 갖는 중요성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기독교적인 신비의 개념과 비기독교적인 신비의 개념 사이의 차이는 간단히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인간에게는 신비가 있되 하나님께는 신비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반면에, 비그리스도인들은 인간에게나 하나님께 모두 신비가 없다고 말하거나 하나님과 인간에게 모두 신비가 있다고 주장한다.
2) 인간과 우주의 관계
우리는 이제까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입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이제 그 다음으로 그러한 인간이 자신의 주의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와 더불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생각해야만 한다. 즉 인간이 이 피조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행하는 하나님 감독하의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가 번영할지 아니면 쇠퇴할지는 인간이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 인간은 선지자로서 이 세계를 해석하고, 제사장으로서 이 세계를 하나님께 봉납(奉納)하며, 왕으로서 이 세계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리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론과는 반대로 모든 비기독교적 이론들은 인간과 인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의 흥망 여부는 오로지 우연이며 그 양자 사이의 관계란 우발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3) 인간의 타락
인간이 타락했다는 사실은 창조의 사실만큼이나 중요하다. 우리는 인간이 오래 전 한 시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입었다는 것을 믿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 직후에 인간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에 빠졌다는 것도 믿는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어떤 의미로 하나님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피조 됨을 입었다는 것이 어떤 것을 뜻하는지를 생각한 바 있으므로 죄가 무엇인지를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법, 즉 하나님이 피조물 속에 제정하신 그의 규례들에 부합되도록 살아야만 했다. 이 법은 대부분 음성을 통하여 인간에게 전달되었다기보다는 인간의 존재 그 속에 새기어 창조되었다. 인간은 그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고자 할 때에만이 그 자신의 본성과 일치하는 행동을 하게끔 되어 있었고, 역으로 본성과 일치하는 행동을 하려면 결국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기 마련이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되 그의 본성 속에 이미 주어져 있던 것을 넘어서 그 이상으로 진정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특별한 명령을 별도로 주셨다. 특히 인간이 그 자신의 내부에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위의 어느 곳에건 온통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법에 부합된 삶을 살려는지 아닌지를 직접적으로 시험하고 또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최종적인 시험을 직면토록 했던 것이 바로 이 명령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범죄 하였을 때에 그가 행한 일이란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 없이 자기 뜻대로 뭔가를 행하려고 시도한 셈이었다. 즉 그가 행하고자 했던 시도란 진, 선, 미 등에 대한 인간적 이상을 하나님 아닌 자기 속에서 직접적으로 또는 자신의 주위로부터 찾아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인간을 위하여 우주를 해석하셨기에 인간은 또한 하나님의 지도하에 우주를 해석하였던 것인데, 이제 인간이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우주를 해석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인간이 우주를 자기 뜻대로 해석하고자 했을 때에 그는 우리가 위에서 정의한 바 있는 그러한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주를 해석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지식에 대한 그릇된 이상(a false ideal of knowledge)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모든 지식을 하나도 빠짐없이 절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이것은 만일 그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망각지 않고 항상 인식하고 있었더라면 결코 생길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이 절대적으로 완전한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피조물이란 지위가 지닌 본래적 성질에 전혀 걸맞지 않는 개념이었다. 만일 그와 같은 절대적으로 완벽한 지식이 획득될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부터 부정되어 말살되고 결국 인간이 신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이와 같은 헛된 이상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끝없는 불행 속에 스스로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지식에 대한 그릇된 이상과 관련하여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보게 된다. 즉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지식에 대한 그릇된 이상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게 될 때에 그것을 자신의 유한성에 돌려 책임전가를 꾀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죄와 유한성을 혼동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실재의 형이상학적인 면과 윤리적인 면을 혼합한 것이다. 인간은 죄에 대한 책임을 결코 지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그것을 자기 자신의 주변과 자기 자신 내부의 환경에 전가시킨다.
3. 기독론
신론과 인간론을 다루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지식을 전달하고 전달받는 두 개의 주체들을 모두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 죄가 들어온 이후 인식론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이제는 만일 우리가 죄로 인하여 서로 불화하게 된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다시금 화해케 되는지 알지 못한다면 그 어느 누구도 세상에 존재하는 실재들의 전체적인 참된 모습을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바르게 바라볼 수 없게 된다. 화해는 오직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구원을 가져오시어, 그 구원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재 연합 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하나님께로 되돌려 회복시키고자 세상에 오셨다.
이러한 사역을 수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셔야만 했으며 또한 실로 참 하나님이셨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틀림없는 하나님"이심을 거듭해서 강조해왔다. 여기서 우리가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al trinity)를 다루기에 앞서 필히 존재론적 삼위일체(ontological trinity)를 먼저 다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지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 성육신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본질(essence)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 전부터 함께 계신 존재론적 삼위일체 내의 제2위(第二位)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가지신 신성을 버리셨다거나 인간이 되셨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인간이 되셨다는 말도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지닌 신성과 인성이 구별 없이 하나로 뒤섞여 버렸다는 뜻도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심지어 그가 베들레헴 여관의 말구유 속에 누워계셨을 때에도 역시 하나님이셨다. 그가 신성을 지니고 계신 분이셨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화가 없다. 오직 이와 같이 신성을 항상 지니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가 가지고 계신 신성에 인성을 또 취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은 그가 이미 지니고 계신 신성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그리스도의 양성(兩性)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칼케돈 신조는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서로 혼동되거나 또는 변화되거나 혹은 분열되거나 분리됨이 없는 두 개의 성품으로서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라고 표현하였다. 맨 처음 두 개의 한정 어구(혼동되거나 변화됨이 없이)는 신성과 인성이 어떠한 의미에서건 간에 한데 뒤섞였다는 생각을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뒤의 두 개의 한정 어구(분열되거나 분리됨이 없는)는 그리스도가 분리됨이 없는 하나님의 완벽한 단일체적 인격이심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성육신의 개념이 이미 앞에서 설명한 신론과 완전히 부합되는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제2위이시라면 그는 신격(Godhead)이 지닌 비공유적 속성들을 가지실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심지어 그가 성육신하신 후라 할지라도 그의 영원한 속성들을 시간에 매여 순간적인 속성들에 뒤섞을 수 없으셨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영원한 속성은 언제나 순간적인 것과 구별되어 우위를 지니며 존재하게끔 되어 있다.
첫째, 우리는 이제까지 그리스도의 품위(person)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였다. 이제 우리는 그의 직임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스도는 참 선지자이시며 참 제사장이신 동시에 참된 왕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자신의 선지자 직임을 수행하시는가?"라고 묻고, 이어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여 주심으로써 자신의 선지자 직임을 수행하신다"라고 대답한다. 인간이 죄인이 되었을 때에 진정한 지혜를 잃고 지가 자신을 위하여 헛된 거짓 지식 이상을 세웠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다시금 참된 지식에로 회복시킴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과 전포괄적 지식을 구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의 비밀을 말해 준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르쳐 준다는 의미에서도 역시 우리의 지혜이신 것이다.
둘째, 소요리문답의 또 다른 문항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사장 직임을 어떻게 수행하시는가?"를 묻고, 이어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단번에 그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우리를 화해시키셨으며 또 계속하여 우리를 위한 중보를 행하심으로 그의 제사장 직임을 수행하신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여기서는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이 선지자로서의 그의 사역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 이외에 또 다른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제사장으로 죽지 않으셨더라면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참된 지식을 우리에게 주실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지식의 문제가 결국 그 근본에 있어서는 윤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이론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마귀가 이 점을 매우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하나님을 알고 또 그를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고 그 이외의 것들은 전부 거짓이다.
셋째, 소요리문답은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왕의 직임을 수행하시는가?"라고 묻고, 이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의 뜻 아래 복종시키시며 우리를 다스리시며 또 보호하시며 자신과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을 제거하시며 정복하심으로써 왕의 직임을 수행하신다"32라고 대답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도 그리스도가 왕으로서 행하시는 사역 역시 그리스도께서 선지자와 제사장으로서 행하시는 사역과 분리할 수 없는 유기적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함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지혜와 지식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그에게 복종시키셔야만 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기에게 복종시키기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그와 같이 하여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다. 우리가 지식의 문제에 있어서 지적인 면과 윤리적인 면의 어떠한 기계적인 구분을 피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들이 갖는 여러 국면들 사이의 이와 같은 유기적 관계를 강조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4. 구원론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여러 직임들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들을 강조하였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하셨으며 지금도 하고 계신 일” 사이에도 동일한 유기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구원론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구속 사역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문제를 다루게 된다. 우리가 죄악 된 존재이므로 구원이 아무리 우리 가까이에 이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직접 적용되지 않는다면 구원은 하등에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어 있는 한 비록 생명을 주는 놀라운 유업일지라도 관 속에 누워 있는 우리에게는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 몫을 실제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어야만 비로소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참된 지식을 주시기 위해서는 우리를 그에게 복종시키셔야만 한다는 사실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복종시키심은 그의 성령을 통하여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여 놓으신 일을 취하여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일을 행하시는 것처럼 성령도 역시 자신의 일을 행하신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천국에 올라가시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야 성령께서 세상에 오시어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 시작하여 놓으신 일을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며 하신 일들은 오로지 그의 사역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 자신도 존재론적 삼위일체 가운데 한 분이시라는 점이다. 성령께서는 필히 하나님이셔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구원의 모든 작업이 오직 하나님이 홀로 하시는 일이 아닌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비공유적 성품들을 손상시키심 없이 계속 지키시려면, 인간의 구원을 주도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성령이셔야만 한다. 이것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인간이 어느 시점에서 자신의 구원 문제에 주도권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이 인간에 의해 좌절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생각해보라. 이 경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헛된 것이 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은 유한한 인간에 의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어느 한 죄인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도 구원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결정함이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달린 것이라고 한다면, 즉 만일 인간이 자신의 뜻에 따라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절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결국 영원하신 하나님을 인간에 의존하시는 분으로 만들어 결국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을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시 및 성육신의 경우에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을 혼합시키지 않으려 한 것처럼 구원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혼합하는 것을 마땅히 거부해야 할 것이다.
바로 앞 단락에서 논의된 문제가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와 칼빈주의(Calvinism) 사이의 차이점에 관한 것임을 혹 감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변증학에 있어서 상이한 여러 신학 사조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들을 일절 무시하고 소위 “공통적인 신앙”(common faith)만을 옹호해야 할는지는 정말 좋은 질문거리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계속 언급해왔던 바에 의하면 적어도 우리는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차이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순간에 매인 일시적인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개념에 대한 차이에 생긴다. 우리는 인간과는 완전히 별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어떤 면에서건 가감함으로 손상시키거나 절충시킴이 없이 있는 그대로 확고하게 주장하는 신학적 입장만이 오로지 모순 없이 일관된 기독교적 입장을 진정하게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우리는 기독교적인 입장과 비기독교적 입장 사이의 모든 논쟁이 영원과 순간에 매인 일시적인 것들의 관계 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논하는 문제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미니안주의가 기독교를 위한 어떤 효과적인 변증도 제시할 수 없음을 명백히 알고 있기에 또한 강한 반론을 펼 수 있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자가 칼빈주의자에 의해 제시된 변증보다 훌륭한 변증을 기독교를 위하여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혹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어서 이를 입증해 보이는 일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린 일이므로 나는 상관 않고자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 사이의 차이는 절대로 무시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무시하려고 하는 사람은 이미 사실상 알미니안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사이에 있는 그와 같은 차이점을 무시하고 넘어간다면 우리의 공동의 적을 대항함에 있어 그다지 좋은 성과를 올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은 자연히 알미니안주의자들이란 자신들이 스스로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요새 속으로 기어들게 내어버려두는 이들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반면에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칼빈주의자들을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적을 요새 속으로 들어오도록 방지하는 이들로 생각하고 있다.
5. 교회론
“눈으로 볼 수 없는 보편적 또는 우주적(the catholic or universal) 교회는 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하여 하나로 모였으며 지금도 그렇게 모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모일 선택된 자들의 전체로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몸이며, 모든 것을 충만히 채우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교회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구원에 대한 교리에 나타난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의 관계와 동일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결국 영원한 것은 일시적인 것에 선행하며, 인간의 구원을 결정하는 분은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이시고 “선택받은 자들의 전체”란 바로 불가시적(invisible) 교회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책임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바로 그 앞 장에서 인간의 책임과 “자유의지”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여기에 있어서도 다른 어느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오진 하나님이 홀로 절대적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 주고 있을 뿐이다.
인간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택정하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절대성에 관한 진리들은 우리가 사람들로 더불어 논의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에 우리에게 한없는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이 그들에게 강제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모든 논의나 복음 전파가 헛것이 되고 말 것임에 틀림없다. 인간은 빠져 나갈 구석을 알고 있는 한 절대로 궁지에 빠져들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 자신이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본래적 능력(inherent ability)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어디로든 빠져나갈 구석을 알고 있는 셈이 된다. 이러한 경우에 그들은 오늘 복음을 거절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주저하거나 불안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일이라도 그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6. 종말론
“마지막 일들”에 대한 기독교적인 입장을 생각함에 있어서도 역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이 그의 상대방의 입장과 완전히 정반대로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게 된다. 기독교적인 입장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관점에 있어서는 사건보다 해석이 선행한다는 사실이 여기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미래를 좌우하고 계심을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미래를 해석하셨음을 믿는다. 예언은 이것을 잘 설명해 준다. 만일 하나님이 미래를 좌우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원한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미래의 사건들에 주어진 해석들을 받기 때문에 미래에 일어난 사건들을 앞서 보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도 인간은 주변의 만물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임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가운데 “만물의 재창조”(regeneration of all things)에 대해 언급하셨다. 미래에 대한 약속은 장차 의인들이 거할 새 하늘과 새 땅을 포함하고 있다. 이 의에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거하며 어떤 짐승도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자연을 오로지 하나님의 해석에 의거하여 해석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그 순간도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시대의 징조들”을 해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해석하되 반드시 하나님이 그것들을 해석하신 것과 같이 해석하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는 역사를 오로지 하나님의 해석에 의거하여 해석한다. 기독교적인 자연철학과 기독교적인 역사철학은 비기독교적인 자연철학이나 역사철학과는 아주 반대적인 입장의 것이다.
우리는 이 첫 장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로서 변호하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매우 광범위한 일반적 진술을 제시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광범위하게 살펴보았을지라도 다음과 같은 사실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마땅히 변증해야만 할 대상은 기독교가 갖는 소위 공통분모적인 “핵심”이 아니라 개혁주의적 신앙이라는 사실이 가장 먼저 분명하게 드러난다. 필자가 말하는 “기독교적 인생관”(삶의 철학)이란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여러 개의 장(章)들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하면서 발전시켜 온 성경의 진리를 말한다.
이 기독교적 철학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성경과 관계없이 “경험”이나 “이성”이 주도하는 자연신학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2)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그의 인격 및 삼위일체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3) 만물과 상호 관계적인 하나님을 상상함으로써 그의 자기 충족적(self-contained) 성품을 부인하는 모든 형태의 비기독교적 사상에 대한 반박을 위한 것이다. 필자의 역사철학이 하나님의 섭리(또는 계획)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피조세계의 사실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실행으로서 하나님의 뜻이다. 필자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그의 창조와 보존 사역을 통해 수행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개인의 구원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해 “만물의 회복”을 실현하는 수단이라고 믿는다.
[변증학, P&R, pp 5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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